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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빌’, 신이 그려낸 Grace의 역설

내가 본 <도그빌>은 한 평범한 마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다. “파멸해가는 건 그레이스(니콜 키드만) 아닌가? 오히려 마을 주민들이 그레이스(니콜 키드만)를 비열하게 착취했잖아.”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내겐 꼴사납게 파멸해가는 마을 주민들에 눈이 더 가는 걸 어쩌겠나.

‘은총(Grace)’의 수용은 비가역적이다

마을 주민에게 ‘그레이스’는 이름 그대로 ‘은총(Grace)’이었다. 일을 시켜달라고 졸라대는 그레이스에게 맡겨진 일들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하면 좋은 ‘그저 그런 일들’이었다. 그래도 그레이스는 주민들에게 훌륭히 ‘용역’ ― 텃밭을 가꾸고 아이들을 돌보고 장님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등 ― 을 제공하며 자신의 이름값을 한다. 그렇게 2주가 지난 뒤, 놀랍게도 그녀가 제공하는 ‘그저 그런 일’들은 칙칙했던 마을을 밝혀주는 마을 시스템의 필수 구성요소가 되어버렸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던가. “있을 땐 모르지만 없어지면 아쉬운 법”이라고. 이런 예는 상당히 흔하다. 예를 들어 핸드폰이라는 물건을 접한 초기엔 그저 장난감처럼 여겨졌겠지만, 언젠가부터 핸드폰은 우리 생활에서 너무나 큰 부분을 차지해버렸다. 이젠 핸드폰 없는 생활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언제나 새로운 물질적 혜택의 수용은 비가역적이다. 칙칙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레이스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런데, 마을의 은총이 되어주던 그레이스에게 잠재되어 있는 문제가 불거져버린다. 그레이스를 찾는 현상수배 포스터가 나붙은 것이다. 이런 제길, 그녀를 버려? 그러면 마을은 칙칙한 과거로 돌아갈텐데. 그럼 어떻게? 칙칙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공포감에 마을은 그레이스를 몰래 잡아두고 착취하는 길을 택한다. 뽑아낼 수 있는 만큼 뽑아내야 하지 않겠나. 공포감에 점점 야비해져가고 잔혹해져가는 마을 주민들. 그레이스에게 개목걸이를 채우더니 급기야는 그레이스에게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 즉 ‘섹스’라는 용역을 강제로 제공받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그레이스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마을은 칙칙하긴 해도 이렇게 막가진 않았을 텐데. 그레이스가 마을 주민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면, 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마을 주민 또한 그레이스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교한 비극의 함정

이제 ‘그레이스’에 ‘물질문명’이나 ‘풍부한 상품’을 대입하고, ‘갱단’에 ‘자본’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자본주의 국가’를 대입하면, ‘미국 3부작’ 중 첫작품으로 이 <도그빌>을 만들었다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말이 대충 그럴 듯해지지 않나?
그런데 뭔가 의심이 생긴다. 어쩔 수 없는 파멸이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물론 그 파멸의 과정은 매우 촘촘한 얼개로 꽉 짜여져 있기에 영화를 보는 동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따져보니, 파멸의 원인은 단 두 가지 ― ‘그레이스의 등장’과 ‘현상수배 포스터’ ― 밖에 없지 않은가. 두가지 원인을 가지고 이렇게 영화를 치밀하게 끌고가는 것도 감독의 재주겠거니 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악취미 아닌가? 지금까지 내가 본 그의 영화들,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 속의 댄서’의 설정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는 참혹하게 망가져가는 인간군상을 보여주고서 그 원인은 자본주의 또는 어떠한 구조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모든 인간들을 끌고 가지는 못하는 법. 인간들은 관념 속에서 만든 논리대로만 움직이진 않는다는 점을 간과하진 않았는지. 자신은 스스로를 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면서, 자신이 만든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구조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다 파멸하게 만들면 쓰나. 자신이 만들어놓은 정교한 비극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저 어리석은 중생들” 하며 오만하게 혀를 끌끌 차고 있을 라스 폰 트리에가 떠오르는 건 과연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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