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 없는 결혼식 준비 후기

결혼식 행사를 준비하면서 둘 사이에서 계속 갈등이 있었다. “정말 와보길 잘했다고 할만한 의미있고 재미있는 결혼식을 하자”와 “그래봐야 어차피 우린 이미 결혼했는데 결혼식이 의미있어봤자 별건가… 대충 하자” 사이에서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약속하는 자리”라는 컨셉은 잡혀 있었지만, 결국 식순에 무엇을 넣을지 고민하다보면 부모님 말씀, 우리 다짐, 친구 덕담, 축가, 노래와 같은 뻔한 것들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재밌게 해보려고 본식이 끝난 후 사람들이 밥을 먹기 시작하면 2부에서 질의 응답 시간도 가져볼까 했었지만, 일단 밥을 먹기 시작하면 장소가 소란스러워져 식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식장 직원의 얘기를 듣고 이 계획은 버려졌다.

일단 사회자, 덕담을 부탁할 친구 세 명, 그리고 축가를 불러줄 노래패 후배를 섭외했다. 그리고 우리도 노래를 한두 곡 부를 계획이었다. 양측 부모님 모두에게도 덕담을 부탁했고,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던 아빠한테는 시를 부탁했다. 엄마한테도 덕담을 해달라고 그렇게 졸라댔건만, 자기는 사람들 앞에서 얘기 못한다고 끝까지 손사레를 쳤다. 그리고 우리도 결혼 1년 생활 보고도 하고 마지막에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도 하는 것으로 대충 계획을 짰다. 시작과 끝을 어떻게 할까도 꽤 큰 고민이었다. 입장과 마지막 행진을 할까 말까. 입장을 안 하면 어떻게 시작하지? 행진을 안 하면 어떻게 끝을 맺지? 2주 동안 이렇게 저렇게 순서도 바꿔보고 뺐다 넣었다를 거듭하다 예식 하루 전에야 아래와 같은 최종안이 나왔다.

  1. 신랑 신부 입장
  2. 신랑 신부의 연애 및 결혼 생활 소개
  3. 양가 부모님 말씀 및 축시 낭독
    – 신부측 어머니의 말씀 (신랑의 장모님 소개)
    – 신랑측 부모님의 말씀과 축시 낭독 (신부의 시부모님 소개)
  4. 신랑 신부를 모두 아는 성욱의 한 마디
    – 둘의 결혼에 거는 기대와 바램
  5. 신랑 신부의 노래
    –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6. 신랑 신부의 친구들의 덕담
    – 신부 친구 지혜
    – 신랑 친구 춘기
  7. 노래패 후배들의 축가
    – 쿨의 ‘아로하’
  8. 신랑 신부의 마지막 감사 인사 및 건배

입장을 안 하고 시작하는 방법을 오래 고민해봤지만, 어차피 신랑 신부가 등장하긴 해야겠기에 그냥 입장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행진하는 건 내가 무척 싫어해서, 대신 하객들께 절을 할까 어쩔까 고민을 하다가 예식 이틀전 사회를 보기로 한 선실이 누나가 건배 제의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자고 제안을 해서 그동안의 고민이 깔끔하게 해결되었었다. 그런데 당일 식장측에서 식 중간에 테이블마다 맥주를 돌리는 게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앞쪽 테이블에만 맥주를 돌려주는 것으로 합의를 봄으로써 겨우 문제가 해결되었다.

애초에 생각하고 있었던 신랑 신부의 다짐 발언은 너무 발언이 많은 것 같아서 뺐다. 게다가 우리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는 마당에 무슨 “다짐”인가 싶기도 하고, 또 손발이 오그라드는 다짐을 할 것 같기도 해서 빼기로 결정했다. 원래 2부에 넣으려고 했던 노래패 축가는 2부 행사가 무산되면서 식 마지막 부분에 넣었다. 그러면서 애초에 우리가 마지막에 부르려고 했던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는 빼기로 했다. 원래 느끼하게 부르면서 하객들도 함께 부르도록 유도하려고 했던 곡인데, 제대로 분위기가 날지 예측도 안되고 노래도 너무 많은 것 같아서 결국 빼기로 했다.

아마 식순을 보면 눈치를 챘겠지만, 정말 “말”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3분 정도로 얘기를 부탁했지만 모두가 장문의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는… 보통 결혼식은 주례가 한 명이지만, 우리 결혼식은 주례가 장모님, 아빠, 성욱, 지혜, 춘기 다섯 명이었다. 장모님은 그렇게 말씀 안하신다고 하시더니, 마이크 안드렸으면 큰일 날 뻔 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이크를 놓지 않으셨었다. 그리고 성욱은 어느 결혼식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니 지금까지 본 주례사 중 가장 훌륭한 주례사를 해주었다. 지혜씨도 소녀와 같은 감수성으로 아줌마가 될 신부에게 아름다운 말을 선사해주었고, 춘기도 가슴이 아리면서도 웃음이 묻어나는 축사를 전해주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별 생각없이 부탁을 했고 때로는 “저지 발언”처럼 각본에 따를 것을 요구했던 반면, 친구들은 우리의 각본을 거부하고 자신의 한마디를 위해 진솔한 고민을 해주었던 것이다. 너무나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우리 연애 및 결혼 생활 소개를 맨 앞에 넣은 건, 이 예식이 사실상 결혼 1주년 파티라는 것을 처음부터 명백하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손님 중에 우리 대학원 동료들을 제외하면 신랑이나 신부 한 명만 알지 둘 모두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테니, 둘의 연애 및 결혼사는 손님들에게 의미있는 정보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신랑 친구가 결혼식에 와서 신부가 대체 누군지(친구 결혼식 가서 배우자에 대해 전혀 모르고 오는 일은 정말 허다하지 않나?), 또 둘이 어떻게 사귀고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고 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꽤 의미있는 결혼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애 및 결혼 1년 생활 보고는 완성도가 무척 떨어졌다. 사실 준비할 시간이 너무 없었다. 사회자에게 부탁할 멘트는 이틀전부터 준비해서 당일 미용실에서 완성을 했지만, 우리 발표 ppt는 새벽 전철에서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미용실에서 겨우 완성을 했으니 말이다. 우리 발표를 좀더 정성들여 준비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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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서 발표 ppt와 멘트를 작성중인 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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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완성한 사회자 멘트를 급히 사회자에게 메일로 보내고 있는 신랑

실제 결혼식 진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결혼 1주년 파티의 주요 장면들

6 thoughts on “주례 없는 결혼식 준비 후기

  1. 전 제가 떠들고 싶어서 주례 안세운거 같아요. ㅋ 순서는 신랑친구의 신랑소개, 신부친구의 신부소개, 신랑신부 결혼서약, 신부 아버지 축사, 신랑 학생들의 축가, 신부 아는 동생인 피아노 반주자와 그 친구들의 축주, 대충 이런. 결혼식이란 게 다 비슷할 수밖에 없나봐요. 아쉬웠던 점이라면 아빠한테 얘기할 기회를 놓쳐서 손 잡고 들어간 거랑, 나름 친구들을 울리면서 떠들었는데 그 원고가 어딨는지 모르겠다는 거.. 결혼식 전날밤에 식전 동영상 만들고 사회자 스크립트 써주느라 날밤 샐뻔 한건, 당시엔 죽을거 같았지만 지금 떠올리니 재밌네요.

  2.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야겠다고 둘이서 마이크 정말 많이 잡긴 했는데, 정작 원고 준비를 제대로 못해서 좀 아쉬웠지. 주인공이 되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야 >.< 지금 결혼에 대해 평가를 하자면, 재밌는 결혼식을 했다는 것보다도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예단 예물을 비롯해 이것저것 없애는 데 성공했다는 데 점수를 많이 주고 싶어 ㅎㅎ

  3. 안녕하세요! 과학사회학에 흥미를 느껴 검색하다보니 이 블로그에 왔는데, 덕분에 또 하나의 유용한 정보를 보고 가네요. 전 아직 결혼 계획이 없지만, 하게 된다면 절대 평범하지 않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여러가지로 고민중이었거든요. 덕분에 하나의 아이디어를 추가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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