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의 일기장

방에서 뒹굴거리다 고등학교 때의 일기장을 들쳐보았다.
1995년 11월 1일부터 1996년 12월 30일까지 약 1년간 쓴 일기장.

그 이후에 일기장을 하나 더 만들긴 했지만….
97년 대학 입학 이후 3월달까지만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그렇게 책꽂이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더이상 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때의 일기장을
오늘에서야 꺼내어 끝까지 다 읽어보고 말았다.

주된 소재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들과의 다툼과 학교에 대한 불만.
이성에 대한 관심과 묘한 감정.
친구들과의 관계.
자신에 대한 불만과 자랑.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

그 때 읽은 책들의 목록을 쭉 보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들이 내게 꽤 많은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실은 그 때는 이해도 못하는 세계문학전집을 마구 읽어댔다. 책 읽는 것도 못하게 하는 학교의 방침에 대한 반발심이기도 했지만, 그런 경험이 어렴풋한 생각의 변화를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는 고3때의 독서목록을 정리해보면..

박경리, ‘토지’
기드 모파상, ‘여자의 일생’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알베르 카뮈, ‘이방인’
스탕달, ‘적과 흑’
레마르크, ‘그늘진 낙원’
루이제 린터, ‘생의 한가운데’
?, ‘털없는 원숭이’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에릭 시걸, ‘7일간의 사랑’
최인훈, ‘남들의 지붕 밑에서’
콜린 맥컬로우, ‘가시나무새’
이문열, ‘젊은날의 초상’
‘꿈꾸는 인큐베이터’
‘천사의 날개’
‘유년의 삽화’
존 스타인백, ‘분노의 포도’
레마르크, ‘개선문’
‘Scarlet Letter’
‘Daddy-Long-Legs’
‘Demian’
‘Huckleberry Finn’
‘A streetcar Named Desire’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
‘독일인의 사랑’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미샤네 회삼촌’
이외수, ‘벽오금학도’
공지영, ‘고등어’
‘초당’

지금 이 목록을 적어보니
내용이 떠오르는 것도 있고,
이미지만 남아있거나 배경만 떠오르는 것도 있고,
어떤 건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일기장을 통해 다시 기억난 거긴 하지만…
남아선호 사상과 임신중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던 ‘꿈꾸는 인큐베이터’, 월남전 참전 용사의 비참한 말로를 다룬 ‘천사의 날개’, 70년대 한국의 여러 모순을 스케치한 ‘유년의 삽화’는 지금도 꽤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읽을 때도 꽤 감정이입을 해가며 읽었던 것 같고.. 솔직히 국내 작가의 소설이 감정이입하기엔 더 쉽다.
그리고, 망명자의 얘기를 다룬 레마르크의 ‘개선문’, ‘그늘진 낙원’은 그 아련한 이미지만 기억에 남아있다.
음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은 ‘뫼르소’를 구제한다며 훈계하던 ‘신부’는 고등학교 시절 매우 재수없는 놈으로 엄청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신부녀석, 우리학교 선생들이랑 똑같애’라고 말이다.

‘이방인’에 대한 감상을 일기장에 적을 때 썼던 구절을 옮겨보면

“이 신부를 보면서 우리학교 선생님 생각이 난다. 항상 학생을 훈계하며, 그가 용서빌기를 요구하며, 그를 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옳다 믿고, 자신 뜻대로 하지 않는 학생을 불쌍(?)히 여긴다. 마치 자신이 무어라도 되는 양 실제론 우리와 다를 것도 없으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가 뉘우치고, 자신의 뜻에 맞는 듯 하면 마치 큰 일이라도 해냈다는 듯이 자랑스러워 한다. 우리의 행위가 가식인지 진실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지금 봐도 엄청 공감이 가는 감상이군.. 후훗..
고등학교 땐 그렇게 책을 읽어댔었는데,
대학 와선 … 에궁..

시간이 벌써..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네.
방에서 나갈 시간이다..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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