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통론2] 이론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 ‘환원’ 개념의 한계와 ‘선행이론’의 역할에 대해 (기말페이퍼)

ps_paper.hwp 1. 이 글의 목적

지금까지 이론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환원’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 이론간의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하면 일단 ‘환원’ 개념을 수용하고 변호해야 하는 것으로, 또는 반대로 ‘환원’ 개념을 수용하지 않으면 이론간의 관계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 것으로 보여져왔다.
환원은 일차적으로는 이론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 ‘환원’의 옹호자들은 이론들간에 ‘환원’이 성립함을 보임으로써 과학의 진보와 통합을 이상적으로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환원관계’의 성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을 완화하거나 애매하게 만들어야 했으며 심지어는 ‘대체’라는 예외를 수용하기까지 했다. 현재 전통적인 ‘환원’ 개념은 상당부분 누더기가 된 듯하며, 지금의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환원’을 수용할 것인가/말 것인가가 아니라 이론간의 관계가 정말로 어떠한지를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이론간의 관계를 ‘환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의 한계를 밝히고, 다른 한편에서 이론간 ‘소통불가능’을 주장하며 이론간의 관계에 대해 침묵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그 한계를 밝힐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이론간의 관계에 대해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할 것이다. 첫번째 사례는 열역학과 통계역학 사이의 관계로, ‘경험의 일반화’로서의 이론과 ‘추상적 모델’로서의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형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도입되었다. 두번째 사례는 CM과 STR 사이의 관계로, 추상적 모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형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연구를 통해, 위상이 다른 이론 사이의 관계와 위상이 같은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유형적으로 그 특징을 뽑아내고, ‘환원’ 개념 등으로 인해 평가절하되어 온 선행이론의 고유한 지위와 역할을 뽑아내고자 한다.

1. ‘환원’ 개념의 배경과 한계

1) ‘환원’ 개념의 배경
Nagel에게 있어, 이론간 환원이란 이론간의 설명관계이다. 이는 ‘한 이론 T1이 다른 이론 T2를 설명할 때, T1이 T2를 환원한다’고 정식화할 수 있다. 여기서 도입되는 ‘설명’은 Hempel 식의 연역적 도출관계를 의미하며, T1이 T2를 연역적으로 도출해야 환원이 성립한다. 이러한 환원이 성립한다면, 과학이론은 후속이론에 의해 선행이론들이 포괄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동시에 더욱더 체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Nagel은 이러한 환원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연결가능성(connectability)과 도출가능성(derivability)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연결가능성의 조건이란 각기 다른 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용어간에 의미가 불변하는 대응이 성립해야 함을 의미하고, 도출가능성의 조건이란 환원하는 이론이 환원되는 이론을 연역적으로 도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Feyerabend 또는 Kuhn 등은 ‘도출관계로서의 환원’이 ‘의미불변’을 전제하나 이론간에 ‘의미불변’ 조건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방법론적으로 밝혀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Schaffner는 ‘일반적 환원모형(GR)’을 제안하며 ‘환원’ 개념을 변호했다.
Schaffner의 일반적 환원모형은, Nagel의 ‘연역적 도출관계’로서의 환원모형에 대해 Feyerabend와 Kuhn 등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도 환원의 개념을 살리기 위한 일환으로 등장했다. 이론간의 용어의 동일성이 보장되지 않고, 이론간의 연역적 도출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후속이론이 선행이론과 어떠한 관계가 있으면, 그 관계를 환원이라 정의하려는 작업이다.
이 작업의 핵심 문제의식은 Nagel의 환원개념인 ‘T1이 T2를 설명한다’의 의미를 ‘T1이 T2가 왜 성공적이었는지 또는 실패했는지를 설명한다’로 이해함으로써 연역적 도출 관계의 오류를 피해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Nagel식 환원의 조건인 연결가능성의 조건과 도출가능성의 조건을 완화하는 작업을 한다. 여기서 그는 T2*의 개념을 도입한다. T2는 T2*와 유사관계(strong analogy & positive analogy)로서 비형식적으로(nonformal) 대응되고 T1은 T2 대신 T2*를 연역적으로 도출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T2*가 T2보다 더 정확하며, T1이 T2(의 성공 또는 실패)를 설명하면 T1은 T2를 환원한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 환원 모형이다.
조건을 완화시켜 ‘환원’을 변호하려는 Schaffner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계속되었고 더욱더 조건을 완화시키고 ‘대체’라는 예외조항까지 두면서 일반적 환원-대체 모형(GRR)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아직도 이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다.

2) 전통적 ‘환원’ 개념의 한계
Schaffner를 포함한 Nagel 전통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환원’ 개념은 몇가지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으며, 뒤에서 사례와 함께 더욱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첫째, Nagel 전통의 환원개념의 핵심은 ‘도출’관계에 있다. Nagel의 직접적 도출이든, Schaffner의 간접적 도출이든, 여전히 ‘환원’은 ‘후속이론의 선행이론으로의 도출관계’를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도출관계는 이론간의 역동적인 관계들을 포착해내기 어렵다. Churchland가 지적했듯이 이론간에는 협동, 경쟁이 이루어지면서 상호진화할 수 있다. 한편, 대부분의 거시이론에는 미시이론에서는 절대로 생겨날 수 없는 개념들이 존재하는데, 이 경우 보통 미시이론에서는 거시이론의 개념을 ‘수입’하거나 또는 거시이론의 법칙 전체를 ‘수입’하기도 한다. 이 경우 어떻게 미시이론이 거시이론을 도출한다고 볼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에, 미시이론은 거시이론을 도출하기보다는 단지 미시적 모델을 제공함으로써 거시이론을 ‘이해할만하게’ 해주곤 한다.
둘째, Nagel 전통의 환원개념에서는 ‘환원하는 이론이 환원되는 이론보다 정확하거나 보다 넓은 영역에 대한 설명까지 해낼 수 있어야 함’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기준은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추구될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이론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는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 후속이론이 선행이론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바램일 수는 있지만, 바램에 어긋나는 사례들은 종종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경우의 이론간의 관계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셋째, Nagel 전통의 환원개념은 선행이론의 역할과 지위를 격하시키곤 한다. 이는 위의 첫째, 둘째의 주장과 연관되는 주장이다. 선행이론은 단지 후속이론의 등장과 환원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Nickles가 지적했듯이, 신뢰할 만한 선행이론은 후속이론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또한 선행이론 없이는 후속이론이 만들어질 수 없거나, 현재의 시점에서 과학이론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선행이론에 대한 이해 없이는 후속이론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다. 이러한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3. 이론간 ‘소통불가능’ 주장의 배경과 한계

1) 이론간 ‘소통불가능’ 주장의 배경
‘소통불가능’에 대한 논의 이전에 ‘공약불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Kuhn과 Feyerabend가 유사하게 주장한 공약불가능성에 따르면, 첫째 각 패러다임에서의 문제목록이 다르고 그에 따른 문제해결방법이 다르다. 둘째 두 이론 사이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용어일지라도 그 의미가 다르다. 셋째, 두 이론에 기반한 관찰자는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공약불가능성은 ‘다른 이론/패러다임에 기반한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상징적인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다. Feyerabend는 이에 기반하여 이론간 ‘도출’관계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론간의 의미가 다른 상황에서 이론간의 도출관계라는 것은 착시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Schaffner의 간접적 도출관계로서의 환원모형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환원을 통한 진보’에 대해 부정적일 것으로 보인다. 이론간의 ‘비교불가능’ 또는 ‘소통불가능’을 주장하는 그에게는 ‘환원’은커녕 ‘이론간의 관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작업으로 여겨질 듯 하다.

2) 이론간 ‘소통불가능’ 주장의 한계
그러나 Feyerabend의 ‘소통불가능’ 주장은 상당히 부적절한 주장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과거 이론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진 못할지라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한 과학이론간에는 소통도 이루어지고 비교작업도 수행된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Kuhn 식의 ‘국소적 공약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Kuhn의 ‘국소적 공약불가능성’은 의미가 변하지 않는 용어가 있다는 것일텐데, 이는 어떤 용어의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인지가 불명확하다. 오히려 모든 용어의 의미가 변하더라도 소통가능한 고리는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 이론간의 소통가능한 고리는 이론적 용어들의 ‘인과적’ 또는 ‘기능적’인 측면들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역사적’인 측면이 이론간의 소통을 가능케하는 핵심고리라고 생각한다.
Feyerabend의 ‘소통불가능’ 주장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 Feyerabend의 ‘소통불가능’ 주장은 역사적으로 부적절하다. 많은 경우에 후속이론들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선행이론의 용어들과 개념들을 ‘수입’한다. 수입과 동시에 그 의미가 변하더라도 용어들을 수입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예를 들어 SM(Statistic Mechanics) 자체에서는 논리적으로 ‘온도’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 없다. 그렇다면 SM의 온도는 어디서 왔는가? 새로 발명했는가? 그렇지 않다. SM의 온도는 TD(Thermodynamics)와의 통합을 위해 TD에서 수입된 것이다. TD와의 통합을 바라지 않았다면 SM에는 영원히 온도개념을 없었을 것이다. 비록 온도의 개념이 ‘분자들의 평균운동에너지’로 각색되었더라도 그 원조는 TD의 온도임에 틀림없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후속이론은 후속이론 내의 많은 용어들의 원천으로서 선행이론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소통이 충분히 가능하다.
둘째, 이론간 용어들의 의미가 다른 것은 ‘추상적 모델’의 측면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각 모델에 따라 용어들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Feyerabend에 따르면 CM과 STR은 단 하나의 관찰명제도 공유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이론 내의 용어들은 기능적으로 인과적으로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추상적인 측면에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더라도,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이어져있는 것이다.
‘질량’이라고 하는 이론적 용어의 의미변화를 살펴보자. 질량은 역사적으로 또는 현재의 학습과정에서 다음의 의미들을 포함해왔다. 첫째, 무겁거나 가벼운 정도. 둘째, 무게와 비슷하지만 무게와는 다른 무엇. 셋째, 용수철저울이 아닌 접시저울로 재는 것. 넷째, 물질간에 비교가능한 고유량. 다섯째, 힘에 대한 관성량. 이렇게 나열한 다섯가지의 의미 중, 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첫째 의미는 질량이 아니라 무게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첫째 의미에 대한 직관적 이해 없이 다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 또는 다섯째 의미만으로 질량을 이해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뉴턴 본인도 그렇게 이해하지는 않았다. 천칭을 이용한 질량 측정은 연금술사들에 의해 발명되어 뉴턴이 살던 시대에 적어도 과학자 집단에서는 통용되었으며, 뉴턴은 이때의 질량 개념을 수입하여 정교하게 이용했을 분이다. ‘힘에 대한 관성량’으로 질량을 정식화한 것은 뉴턴을 계승한 물리학자들의 성과이다.
고전역학 체계 내의 질량 개념은 사회적으로 또는 선행과학자들에게 통용되던 질량, 힘과 분명 질적으로는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고전역학 체계의 ‘질량’과 이전의 ‘질량’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을 완전히 분리할 경우, 고전역학 체계는 허공에 떠있는 자기만의 체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질량’이란 용어에는 정교하게 추상화된 의미 외에도, 경험적, 기능적 의미들 ― 무겁거나 가벼운 정도, 저울로 재는 무언가를 비교하는 행위 등 ― 이 층을 이루어 포개어져 있다. 이러한 층들을 해체할 때 그 의미는 아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오히려 이렇게 겹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경험과 의미들의 얼개는 추상적 개념을 현실세계와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경험적, 기능적 의미들의 얼개는 ‘질량’의 추상적 의미가 변하더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4. 열역학(TD)과 통계역학(SM)의 관계

지금부터는 사례를 중심으로 이론간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번째 사례로 TD와 SM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이 사례는 ‘경험의 일반화’로서의 이론과 ‘추상적 모델’로서의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형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도입되었다.

다음의 방정식들을 살펴보자.

i) TD의 기체상태방정식(보일-샤를 법칙) :  ①
ii) SM의 방정식(단원자분자의 경우) :  ②
iii) SM이 재해석한 기체상태방정식 :  ③
iv) 연결법칙(Bridge Law) :  ④

i)의 방정식은 현상의 관찰을 일반화한 ‘경험법칙’으로서의 방정식이다. 물론 경험을 법칙화하여 표현하면서 이미 그 경험은 추상화되고 이론화된다는 점을 인정함에도, ii)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험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ii)의 방정식은 고전역학과 통계역학의 아이디어를 이용한 ‘추상적 모델’을 함축한 방정식이다. 이 방정식에는 온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iii)의 방정식은 SM이 TD의 기체운동방정식을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방정식이다. 바뀐 것이라고는 이 로 바뀐 것밖에 없지만, TD의 이론에서 상정하지 않는 ‘개별’ 기체분자들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iii)의 방정식은 TD로부터 수입되었지만 SM에 의해 각색된 방정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식에서 등장한 상수 는 단지 기체상수를 아보가드로수로 나눈 값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상수로서 인정받아 ‘볼츠만 상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iv)의 관계식은 연결법칙이라고도 하고 연결원리라고도 한다. 가장 해석의 논란이 많은 식이다. 혹자는 온도와 기체분자의 평균운동에너지와의 상관관계만을 뜻하는 식이라고도 하지만,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의 경우엔 온도를 재정의하는 식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관계식은 기존의 열역학이나 고전역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식임에는 분명하다.

1) TD와 SM 사이에는 도출관계가 없다
흔히 TD가 SM으로 환원된다고 할 때, 식 ②가 연결법칙(Bridge Law)인 ④를 이용해 식 ③ 또는 ①을 도출한다고 한다. 연결법칙의 위상과 이론간 개념의 변화 또는 상이함에 대한 논의를 거친 이후에도, 환원의 핵심 아이디어는 위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어찌했든 ②에서 ①로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도출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볼 때, ii)에서 i)로의 도출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 ④는 식 ①과 식 ②의 결합을 통해서 유도된 식이기 때문이다. 두 이론에 의해 유도된 식을 디딤돌 삼아 하나의 이론이 다른 이론을 도출했다고 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SM이 TD를 도출한다고 보는 이유는 상당부분 ‘편견’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SM은 미시적 설명을 위한 이론이고, TD는 거시적 설명을 위한 이론이며, 두 이론이 연결된다면 미시적 이론이 거시적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이론간 ‘방향성’에 대한 편견이다. SM과 TD 중 어느 것이 근본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이론이냐고 묻는 것과 별개로 ‘도출관계’를 묻는다면 여전히 SM과 TD 사이에 ‘도출관계’는 없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쉽다. 만약 식 ①이 식 ④를 디딤돌 삼아 식 ②를 도출했다고도 하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보아도 수식상으로는 별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은가. 물론 TD 내의 과학자들은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TD와 SM의 관계에서 어느 쪽이 도출한 쪽이고 어느쪽이 도출된 쪽인지를 해명하려는 작업은 ‘해석’의 문제처럼 보인다. 또한 이러한 도출관계에 대한 집착은 TD와 SM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부적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식 ①은 식 ②를 도출하지 못하고, 식 ②는 식 ①을 도출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TD의 결론적인 식인 ①은 분자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어떠한 식으로도 변형될 수 없고, SM의 결론적인 식인 ② 또한 기체의 총체적인 상태인 온도를 기술하는 어떠한 식으로도 변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식은 각자의 막다른 길이다.
이 막다른 길의 탈출구는 TD와 SM의 협동밖에 없다. 둘의 협동으로 식 ④, 즉 온도와 운동에너지의 비례관계를 함축하는 식을 만들어냄으로써 막다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식 ④는 식 ①과 식 ②에 의해 간단히 유도되며, 이렇게 보는 것이 상식적이며 자연스럽다. 역사적으로 식 ④를 식 ②에서 식 ①로의 도출을 위한 디딤돌처럼 써온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식 ④를 ‘도출을 위한 디딤돌’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식론적으로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식 ④는 절대로 식 ① 없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TD와 SM은 어떠한 관계인가? 이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본 후에 정리를 해보도록 하겠다.

2) TD과 SM 사이의 경쟁, 대체, 보완
TD를 경험법칙의 집합으로만 간주한다면, SM은 TD의 경험법칙들과 정합적인 추상적인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한 이론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SM은 그러한 목적에서 등장한 이론이다. 그러나, TD를 경험법칙 뿐만 아니라 나름의 고유한 추상적인 측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SM은 TD를 대체하기 위한 이론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SM은 열과 온도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이론들 중 하나였으며 TD와 경쟁하는 이론이기도 했다.
SM과 TD 사이의 긴장관계는 후속 이론작업 과정에서 계속 드러나게 된다. SM이 TD의 기체상태방정식을 수용함으로써 TD와 SM은 당연히 경험적으로 동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두 이론은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SM의 모델은 TD의 기체상태방정식과는 정합적이지만, TD의 다른 설명들과는 정합적이지 않고, 때로는 경험적인 진술들조차 TD와 달라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예로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기체상태를 ‘확률’적으로 보는 SM의 입장에서 열역학 제2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엔트로피는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단지 확률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기체상태를 일종의 ‘성질’로 보는 TD의 입장에서 열역학 제2법칙은 그 자체에 함축되어 있는 법칙이다. 이러한 차이는 기체상태 및 온도에 대해 어떠한 모델로 바라보느냐에 따른 것이다. 이 점에서 SM은 TD 내의 추상적인 영역을 대체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SM과 TD의 차이가 드러날 때마다, TD를 버리고 SM을 채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TD가 SM보다 더 잘 설명하기도 하고 SM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SM의 초기 이론화 작업에서 TD의 기체상태방정식을 수용했던 사례 자체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으며, 이와 유사한 사례들은 더 존재한다. 아래는 그러한 사례 중 하나이다.

TD에 따르면, 어떠한 계를 둘로 나누면, 총 내부에너지와 총 엔트로피는 단지 부분들의 합이 된다. 이는 실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 이것이 실험적으로 타당하다면, SM 또한 TD처럼 이를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SM은 ‘유한’계에서 이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SM이 이러한 어려움을 피하는 방법은 ‘무한계’를 상정하고, 열역학적 극한을 취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TD가 SM을 고쳐줌으로써 SM이 실험적으로 검증된 특정 현상에 적응할 수 있게 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TD와 SM의 관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TD와 SM은 도출관계가 아닌 협동적인 관계이다.
둘째, 상대적으로 경험적인 이론 TD는 그와 정합적인 추상적 모델 SM에 의해 그럴듯하게 ‘이해’될 수 있다.
셋째, 추상적 모델 SM은 경험적으로 성공해온 TD와의 ‘정합성’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넷째, TD와 SM의 협동은 새로운 통찰을 얻게 해준다. TD와 SM의 통합을 위한 연결법칙은 두 이론의 협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두 이론 내에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닌 새로운 통찰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얻어진 통찰은 SM에만 수용된 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지금 현재 물리학 교과서에서 접하는 SM은 그러한 통찰을 수용한 SM이다.
다섯째, TD와 SM은 경쟁을 통해 서로의 문제점을 수정, 보완케 한다. 각자의 이론을 정교화함에 따라 TD의 암묵적인 전제와 SM의 전제들이 충돌하기도 하며, 정합적으로 보였던 두 이론의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두 이론은 서로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해결해가는데, 보통 TD의 추상적인 설명을 담당했던 부분은 대부분 SM에 의해 대체되고, SM의 부족한 부분은 TD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됨으로써 진화하는 형태를 띤다.

3) 온도 개념의 변화와 보존
Feyerabend는 TD와 SM의 온도개념이 다르다고 주장하며, 둘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과연 그러한가? 통계역학까지 오는 과정에서 온도 개념의 변화를 대략적으로만 살펴보면, 첫째 뜨겁거나 차가운 정도로서의 온도, 둘째 온도계의 수치로서의 온도, 셋째 열역학적 온도, 넷째 통계역학적 온도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의미는 감각 경험을 담고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졌을 때, 혹은 계절의 변화를 느낄 때의 감각 경험을 담고 있다. 여기서의 온도는 단지 감각 경험 그것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미 ‘온도’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감각경험이 아닌 객관적인 무언가를 상정한다. ‘뜨겁거나 차가운’ 감각경험은 주체의 경험이지만, ‘온도’라는 것은 주체 외부의 객관적인 무언가를 상정한다.
둘째 의미는 감각경험과 정합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도구가 등장한다. 온도계의 수치는 ‘뜨거우면 높아지고 차가우면 내려가는’ 감각경험과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온도계가 등장하기 전까지 ‘온도’는 정성적인 개념이었지만, 온도계가 등장하면서 ‘온도’는 수치를 동반한 정량적인 개념이 된다. 여기서도 위와 비슷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때의 온도는 단지 ‘온도계의 수치’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미 온도계를 만들 때부터 ‘온도계의 수치’는 ‘온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진짜 ‘온도’는 따로 있지만, ‘온도계의 수치’는 그것을 정확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도구이며, 그것의 ― 오차가 포함된 ― 근사치 또는 상관관계가 있는 수치를 표현해낸다고 하는 생각이다.
셋째 의미에 들어서는 완전히 추상화된 온도가 등장한다. 열량과의 비례관계라든지, 보일샤를 법칙 등의 경험적 사실들을 법칙화하여 방정식형태로 표현해낸다. 열량과의 비례관계, 보일샤를 법칙 등의 발견은 온도계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토대로 만들어낸 법칙화된 방정식들은 온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단순히 ‘뜨거워지면 수치가 올라가고, 차가워지면 수치가 내려가는’ 것뿐만이 아닌 ‘절대온도’와 같은 개념을 상정하게 되는데, 이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온도는 추상적인 ‘절대온도’가 되고 그것과 연관된 법칙들 또한 일반적인 법칙으로 여겨지게 된다. 반면, 이전까지의 감각경험 또는 도구(온도계)를 통한 경험들은 이러한 추상적인 온도개념과 일반적인 법칙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 되고, 경험과 법칙들과의 미세한 차이는 도구의 문제로 인한 오차로 생각하게 된다.
넷째 의미에 들어서는 새롭게 추상화된 온도가 등장한다. 열역학적 온도는 ‘어떠한 것의 성질’로서의 온도이지만, 통계역학적 온도는 ‘어떠한 것을 이루는 분자들의 확률적 운동’으로서의 온도이다. “분자의 온도를 잴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면, 열역학적으로는 머뭇거리며 “잴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가능하다”라고 답하겠지만, 통계역학적으로는 “온도는 분자들의 평균운동에너지일 뿐이기 때문에, 분자의 온도는 잴 수 없다”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통계역학은 이렇게 새롭게 추상화한 개념을 통해 위의 감각 경험, 도구를 통한 경험, 경험 법칙들을 설명한다.
이러한 ‘온도’라는 용어의 의미변화에서 보여지는 특징은 무엇인가?
일단, 후속이론은 선행이론 또는 선행경험으로부터 의미를 수입하며, 후속이론은 선행이론 또는 선행경험 없이 불가능하다. 온도계는 ‘뜨겁거나 차갑다’라는 감각경험 없이 만들 이유가 없으며, 그러한 감각경험과 정합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열역학의 각종 법칙들은 온도계 없이는 발견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통계역학에는 아예 온도개념이 없기 때문에 열역학으로부터 그 개념을 수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가 ‘온도’라는 개념을 학습하는 순서는 ‘온도’의 역사적인 개념변화 순서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의 ‘온도’개념의 학습 순서는 역사적인 순서와 정확히 동일하다. ‘뜨겁거나 차가운 정도’는 배우지 않고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으며, 그와 연결되는 ‘온도’라는 언어를 배운다. 그리고는 온도계를 보는 법을 배우고, 열량과 온도사이의 관계를 배운 후, 보일샤를 법칙을 중학교에서 배운 후,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통계역학을 배운다.
결론적으로, 후속이론에서의 ‘온도’는 선행이론에서의 ‘온도’와 분리될 수가 없다. ‘온도’란 용어에는 정교하게 추상화된 의미 외에도, 각종 경험과 의미들 ― 뜨겁거나 차가운 정도, 온도계를 보는 행위, 보일샤를의 법칙 등 ― 이 층을 이루어 포개어져 있다. 이러한 층들을 해체할 때 그 의미는 아예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오히려 이렇게 겹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경험과 의미들의 얼개는 추상적 개념을 현실세계와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선행이론과 후속이론을 의미상에서 소통가능하며, 비교가능할 수 있게 해준다.

5. 고전역학(CM)과 특수상대성이론(STR)의 관계

두번째 사례는 CM과 STR 사이의 관계이다. 이 사례는 추상적 모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형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STR은 선행이론인 CM이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그러나 이론의 전체론적 성격상, CM과 정합적이지 않은 관찰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CM을 전체적으로 대체할 새로운 이론의 필요를 의미한다. 결국, STR은 애초에 CM을 완전히 대체할 목적으로 구상된 것이다. CM이 세계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추상적 모델이라면 STR도 마찬가지이다. CM과 STR은 이론적 위상이 같은 양립불가능한 이론들이다.
같은 자리를 놓고 다투는 두 이론간에 전통적인 환원관계는 원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극한연산을 이용해 STR은 CM의 기본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 Feyerabend는 STR과 CM 사이에는 어떠한 의미도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STR은 극한연산을 통해 무엇을 도출한 것인가? Schaffner의 경우 STR은 CM*를 도출할 수 있고, CM*는 CM과 유사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STR은 CM을 환원한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STR이 CM을 환원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보다 궁금한 것은 STR이 도출한 CM*가 무엇이며, CM*와 CM의 관계는 무엇인지이다.
일단 이 논의는 STR의 목적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STR은 CM이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STR은 CM을 전체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CM이 성공적으로 설명했던 영역에 대해서도 똑같은 수준 또는 보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STR이 CM이 성공적으로 설명한 부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STR이 CM의 성공적이었던 영역()에서 CM과 똑같은 형태의 방정식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STR의 극한식 CM*는 STR의 CM으로의 간접적 도출관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CM의 성공적인 영역에서 STR도 경험적으로 동등한 수행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CM과 STR의 관계에 대해 Nickles는 환원2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기존의 통념과 반대로 CM이 STR을 환원한다는 것이다. STR을 처음 접한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STR의 방정식을 놓고 가장 먼저 의 극한연산을 취해볼 것이다. 극한 연산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STR을 CM으로 환원해보기 위함이며, 그 시도가 성공적이라고 확인하고는 STR에 대해 일종의 안심을 보이게 된다. 그 식에 표현된 용어들의 의미가 같은지 다른지는 그의 안심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경우 그 학생은 STR을 CM으로 환원2하여 STR의 정당성을 검토해본 것이라고 말해야 적절하다. 이러한 관계를 무엇이라 부를지가 중요하다 생각지는 않지만, 이론간 관계의 새로운 특성을 발견한 것으로서 Nickles의 환원2는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한편, STR과 CM의 관계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STR이 CM으로부터 개념들을 수입했다는 점이다. 물론 STR은 CM의 개념들을 수입함과 동시에 각색을 한다. 그럼에도, STR과 CM은 개념들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용어들의 인과적, 기능적 의미이다. STR이 CM의 성공적 영역에서 CM과 경험적으로 동등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각 용어들의 추상적인 의미들은 완전히 바뀌더라도, 용어들의 인과적, 기능적 의미는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다.

6. 결론

이론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환원’ 개념은 과학의 진보와 통합에 대한 상당히 날카로운 직관을 담고 있고, ‘공약불가능성’ 및 ‘소통불가능성’의 주장 또한 개별과학들이 포함하고 있는 의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두 주장은 부적절하다.
선행이론이 후속이론에 의해 환원된다는 개념은, 후속이론이 선행이론을 포괄해가는 과정을 통해 과학이 진보해왔다는 직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에 따르면 선행이론은 역사적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 현실적인 의미는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후속이론은 언제나 선행이론의 축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한 후속이론은 언제나 선행이론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선행이론은 단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선행이론은 우리의 감각경험과 직관적인 이해들과 연관되어 후속이론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다.
한편, Feyerabend 식의 ‘소통불가능’ 주장은 ‘의미’를 너무 좁게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론적 용어의 의미는 이론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이론적 용어가 현실세계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과 경험법칙들 및 선행했던 의미들이 층을 이루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용어 내에 함축되어 있는 많은 경험과 의미들의 얼개가 이론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선행이론과 후속이론 사이에는 특정한 관계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관계는 ‘환원’처럼 일방적이지 않다. 또한, ‘환원’이라는 말로 단순화하기에는 그 관계들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물론 이 글에서도 그 관계를 유형화하고 특징을 일반화하긴 했지만, 그러한 유형화 또는 일반화된 특징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유형과 특징들에 포괄되지 않는 것이 충분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며, 다분히 전통적인 환원관계로 보이는 사례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원관계의 사례가 있다/없다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할 작업은 과학의 변화발전 과정에서 등장하는 많은 이론간의 관계에 대해서 ― 환원/비환원의 이분법이 아닌 ― 더욱더 세심하게 연구함으로써 과학의 변화상을 확인하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 Sang Wook Yi, “Reduction of Thermodynamics: A Few Problems”, PS v.70 (2003) pp. 1028-1038
– E. Nagel, The Structure of Science, (1961) pp. 336-358
– P. Feyerabend, “Explanation, Reduction, and Empiricism”, Feigl & Maxwell (eds.) (1962) pp. 43-62
– T.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70) Ch. IX
– K. Schaffner, “Approaches to the Reduction”, PS v.43 (1967) pp. 137-47
– Partricia Churchland, Neurophilosophy, (1986) pp. 278-295 & 363-367
– T. Nickles, “Two Concepts of Intertheoretical Reduction”, in JP v.70 (1973) pp. 1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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