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누리] 공포와 연민 by 진중권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의 효과는 ‘공포와 연민’에 있다. 그리스 원어로 ‘공포'(phobos)는 ‘경악’에 가까운 강렬한 뜻이고, ‘연민'(eleos) 역시 남의 불행에 대한 동정 정도가 아니라, 파멸에 처한 남의 처지를 곧 자신의 처지로 느끼는 강력한 감정이입의 상태를 의미했다. 그리스 비극에서 잔인한 장면이 전령의 대사로 처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토록 강렬한 감정상태를 야기하는 장면을 실연할 경우, 당시의 관객들은 그 심리적 쇼크 때문에 임상의학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어제 새벽에 한 사내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물론 이런 종류의 사건이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왜 그랬을까? 화면의 사내가 나와 다르지 않은 외양을 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미국의 인질들과 달리 몸뚱이 전체로 죽기 싫다고,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 그 절규의 절실함 때문에? 어쨌든 그 장면을 보면서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보며 느꼈다는 그 강렬한 ‘공포’와 ‘연민’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의 목숨도 중요하다. 한국군은 여기서 나가라.” 그 짧은 영어로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너희들은 별 생각 없이 여기에 군대를 보낼지 모르나, 너희들도 내 처지가 되어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인들이 ‘연민’이라 불렀던 그 강렬한 감정이입을 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의 입장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우선적으로 안심시켜야 할 대상은 이 일로 자칫 낭패를 볼지도 모를 부시 정권. “추가 파병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 시간에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은 만두 먹기 이벤트를 벌이고 있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입장을 물었다. “한 사람 잡혀간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있나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감정이입의 능력을 잃어버린 그를 대신하여 머릿속으로 역지사지의 사유실험을 하고 있었다. 저기에 잡혀 있는 저 사내가 유시민 의원이라면, 그는 과연 카메라 앞에서 무슨 말을 할까? 국정을 책임진 집권여당의 정치인답게 당당하게 외칠까? “각하, 한 시민 잡혀간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있습니까?”

황당한 것은, 납치된 이의 부모조차도 처음에는 이라크 파병에 찬성을 했었다는 사실. 제 자식이 잡혀가자 비로소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뒤늦게 파병반대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어디 이게 그 분들만의 일이겠는가? 아마도 대한민국의 상당수가 자기가 직접 당하기 전까지는 ‘공포와 연민’의 감정이입을 못 할 게다. 파병으로 인해 초래되리라 예상되는 피해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늘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으로만 상정된다. 왜 그럴까?

우리는 그렇게 개개인의 생명을 존중하기보다는 국가라는 기계의 부분품이 되어 희생하도록 교육받아 왔다. 동료시민들과 서로 감정이입을 하기보다는 자신을 국가적 목표와 동일시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과거에는 그렇게 하도록 ‘동원’ 당했고, 이제는 그렇게 하도록 ‘참여’ 당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빌어먹을 습속부터 뜯어고치지 않는 한, 아무리 그 형식이 민주적이어도 그 내실은 전체주의다.

군대를 안 보내면 우리 생명이 위협을 받는가? 군대를 보내서 우리 시민들의 안전이 보장되었는가? 이라크에 한국인 얼마나 된다고, 그 중 벌써 두 명이 살해당하고, 두 차례 납치사건이 벌어지고,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처형까지 있었다. 이렇게 국민 개개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나서서 저지르며, 심지어 그것을 ‘안보’라 부른다. 완전 변태들이다. ‘안보’라는 말로써 제 나라 시민의 생명보다 남의 나라 정권의 안위를 의미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조국’이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팔자 한번 더러운 국민이다.

(추기) 방금 김선일씨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우리 모두가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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