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통론2] 라투어의 아인슈타인 텍스트 분석

hs_041116.hwp Bruno Latour, “A Relativistic Account of Einstein’s Relativity,” Social Studies of Science 18 (1988), 3-44

라투어는 이 논문의 연구 영역을 아인슈타인이 준-대중적으로 집필한 ‘상대성, 특수 및 일반 이론’의 영역본에 한정하고, 그것으로부터 다음의 두 질문 ‘사회의 개념을 재정식화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명백하게 사회적으로 볼 수 있을까?’와 관련된 질문으로써, ‘우리는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사회를 연구하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해 답을 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힘든 사회적 설명을 찾기보다 스트롱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 실험 과학에 한정되지 않는 ― 쉽고도 넓은 방법이 있다는 점을 보이려 한다.
이를 위해 일단 텍스트 분석의 도구로서 semiotician의 용어인 shifting-out과 shifting-in을 소개한다. 모든 텍스트에서는 독자에게 현실세계 또는 필자로부터 새로운 행위자, 공간, 시간으로 주의를 돌리는 shifting-out과 그 반대방향으로의 이동인 shitting-in이 계층적, 반복적으로 수행된다. 모든 텍스트들은 ― 과학도 포함하여 ― 내적 실재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간에 정합적인 내적 참조(internal reference)가 이루어진다.

라투어는 아인슈타인은 특별하게 shifting-out, shifting-in의 ‘operation’에 집중했음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일단 shifting-out된 공간과 시간을 재정의하는 방법 ― 간단한 막대와 시계가 공간과 시간을 not represent, but generate하는 도구로 등장시킴 ― 을 공들여 설명한 이후, 다시 shifting-in을 통해 각 기준틀에서의 관찰을 수합하여 superposing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다. 라투어는 특히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이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 했으며, 그 해결책으로서 제시하는 것이 (변형 없는) 변환이었다고 말한다. (변형 없는) 변환을 통해 각 기준틀의 관찰은 모든 관찰자에게 동등해지고, 상호 호환가능해지며 superposing이 가능해진다.
각 기준틀의 대리인마다 호환불가능한 관찰을 가져오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노력은 수많은 분과와 활동의 보편적인 관심이다. 아인슈타인의 연구 또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관찰을 수합하여 superposing하는 곳을 ‘중심’이라 할 때, 아인슈타인의 ‘중심’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절대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중심’은 단지 ‘계산의 중심’일 뿐이며, 그 ‘계산의 중심’은 모든 관찰을 동등하게 만들고 상호 호환이 가능하게 해주는 (변형 없는) 변환식을 통해 각 정보를 수합하여 superposing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라는 원리를 통해 절대주의를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과학사회학의 연구 또한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정의를 부정함으로써 그 진정한 의미와 실재성을 얻기 위한 작업으로 보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든 semiotics이든, 각 원리 하에서 의미와 실재성은 적어도 두 개의 기준틀로부터 온 정보를 제 삼자가 superposing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의미는 두 기준틀 사이를 shifting-out, shifting-in 하는 과정에서 유지되는 무언가이며, story 내에서의 movement 과정에서 계속 유지되는 무언가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추상화(abstraction)은 보다 높은 상위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추상화는 곧 (변형 없는) 변환(transformation, transcription, translation)이며, 가역적인 이동(reversible movement)이며, 순환(circulation)이며, property of network이다. 즉, 의미와 실재성을 얻어내는 데 있어, 외적 참조는 내적 참조에 비해 특별히 우월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

사회적 맥락(social context)이라는 큰 그림(big picture)에 대한 집착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물리학계의 에테르에 대한 집착과 같으며, 과학에 대한 사회적 설명(social explanation:사회적 맥락에 기반한 인과적 설명)에 대한 집착은 정말 왜소한 기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혁명적 사회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아…’ 식의 설명은 빈약하며 옳지 않다. 물리학자의 용어를 사회학자의 용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를 더이상 사회적이라고 부르기 민망하다. 오히려 광속 c 또는 로렌츠 변환 등을 사회를 구성하는 정상적인 일부분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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