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통론2] 양자역학

hs_041116.hwp <과학사통론 II 11주차 요약문>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

날짜 : 2004. 11. 16  | 이름 :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N. Bohr, “The Quantum Postulate and the Recent Development of Atomic Theory,” Nature 121 (1928), 580-590

원자현상에 대한 고전물리학의 근본적인 한계로부터 양자이론 출발.
양자 가정 : 본질적 불연속성, 개별성
양자 가정의 함축 : 원자현상을 다루는 데 있어 인과적 시공간 좌표계 포기, 원자현상을 다루는 데 있어 관찰할 때 관찰의 대상은 원리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관찰행위와 상호작용
양자 가정의 귀결 : 상태정의엔 외부개입이 있어서는 안되지만, 관찰과정에서는 개입이 필연적. 따라서 ‘모호하지 않은’ 상태 정의 불가능.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질문 불가.
* 시공간 좌표계와 인과성 사이에 상보적이나 배타적인 특징 나타남.
양자 가정 하에서, 첫째, 시공간적으로 기술하려 시도하면 통계적 고려만 가능해지고, 둘째, 완전한 인과성 고려하면 시공간적인 기술 포기해야 한다.
물질에 대한 시공간 내에서의 파동적 기술을 시도할 경우 : 시공간 초월.. unsharpy 개별성 및 인과성 귀결 (드브로이-슈뢰딩거)
인과적 고려 하에 개별 입자 운동 기술을 시도할 경우 : 인과성 초월.. 파동-장(wave-field)의 시공간 확장 귀결 (하이젠베르그)
대응원리 및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적 기술 ↔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적 기술
두 종류의 정식화는 파동적 기술과 입자적 기술 사이의 상보성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보존 등의) 인과 수용한 원자의 정상상태 기술 : 시간 기술 포기. 특정한 에너지 정의, 정상태의 초역학적 안정성 표현
정상상태의 개념과 개별 전이과정은 개별입자의 개념만큼 실재성 가짐.
기본입자의 문제 : 많은 어려움과 시도들..

N. Bohr, “Light and Life,” Nature 131 (1933), 421-23, 457-59

J. Stark, “The Pragmatic and the Dogmatic Spirit in Physics,” Nature 141 (1938), 770-772

Paul Forman, “Weimar Culture, Causality, and Quantum Theory, 1918-1927: Adaptation by German Physicists and Mathematicians to a Hostile Intellectual Enviroment,” HSPS 3 (1971), 1-116

막스 재머는 ’19세기 후반의 몇몇 철학사상들(우연론, 실존주의 등)이 현대 양자이론의 새로운 개념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양자역학(1925년경)과 위의 철학사상은 시간적으로 25년이라는 간격이 있다. 그 기간사이에 많은 독일어권 물리학자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연구내용상의 발전과는 관련없이’ 인과율을 거부했다.
필자는 사회학적 접근법을 이용해, 그 변화를 인과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설명을 위해서는, 독일의 당시 지적환경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 바이마르의 지적환경은 물리학, 특히 인과율에 적대적이었다. 독일의 패전 이후, 바이마르의 지적 경향은 신낭만주의적 실존주의의 ‘생의 철학’이었고, 분석적 합리성, 정밀과학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수학자와 물리학자는 이러한 환경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반적인 반응은 ‘과학 내부로 그리고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으로 자신들을 가두어 버리며 그 분야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적 환경에의 적응도 서서히 이루어진다. 특히 그들과 그들 분야의 지위가 낮아지고 있을 때에는 무언가 대항할 수단을 취해야만 한다. 그러한 대항수단은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를 대중의 변화된 가치와 조화되도록 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독일 과학자들은 강연이 많았는데, 그러한 강연에서 과학자들은 실증주의적 개념들을 거부하고, 과학연구에 대한 공리주의적 정당화를 거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활동의 가치와 가능성 자체마저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과학자 사회의 적응은 ‘이데올로기’ 차원에만 한정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실질적인 ‘학문적 내용’에까지 미쳤던 것일까?
필자는 물리학에서 인과율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독일 물리학자들의 적응 노력의 결과라고 확신하고 있다. 당시 독일의 물리학자는 대중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려고 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과율, 엄격한 결정론을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John Hendry, “Weimar Culture and Quantum Causality,” History of Science 18 (1980), 155-180

헨드리는 포먼의 논증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본다. 첫 단계는 바이마르의 지적 환경이 물리학, 특히 인과율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 두번째 단계는 그러한 환경에서의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의 ‘적응’을 증명하는 것, 세번째 단계는 물리학에서 인과율의 개념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내적 발전이 아닌 환경에 의한 영향임을 밝히는 것이다.
먼저, 바이마르의 지적환경에 대한 포먼의 분석에 대해서는 일단 동의를 한다. 그리고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이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있었음 또한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 적응에 한정을 두어야 함을 말한다. 헨드리는 ‘용어’ 상의 적응은 인정을 한다. 그러나 ‘가치’의 적응 ― 과학에 대한 공리주의적 동기에서 문화적인 동기로의 대체 : 보른의 공동체에의 열망, 빈의 이상주의, 폰 미제스의 ‘새로운 직관’ 그리고 지식을 탐구하려는 일반적인 감정적 욕구 ― 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한편, 인과율의 문제에 대해서는 포먼의 결정적인 주장 ― 물리학에서 인과율에 대한 거부가 널리 퍼져 있었고 여기에 대한 내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다는 ― 에 대해서는 심각한 약점이 있다고 제기한다. 왜냐하면 인과율의 거부에는 강한 내적 요인이 작용했으며 이 점을 고려하여 포만이 제시한 ‘비인과율로의 개종자’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 인과율에의 도전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응이 환경에의 적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환경으로부터의 격리의 경향까지도 있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시기 이전부터, 인과율의 개념은 물리학계에서 이미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플랑크, 푸앙카레, 아인슈타인의 논의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이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보존법칙을 포기하면서 인과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란 점에서, 인과성 포기에 대한 압력이 존재했을 개연성이 높다. 1916년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의 원자에서의 상태전이를 지배하는 확률은 (숨은 메커니즘을 암시하긴 했지만) 그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켰고, 특히 그런 메커니즘을 찾을 가망이 없었기에 더욱 심했다. 그리고 당시 양자물리학자들의 주류는 대체적으로 에너지 보존법칙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하며, 1921년에 이전에 이점이 분명하게 표현된 듯한 편지를 인용한다. 보어는 논문에서 ‘자발적 전이’를 언급하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즉, 보어는 분명 인과율에 대한 압력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이 압력은 아직은 양자이론의 문제들과 파라독스에 의해 생겨난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것이었다.
한편, 인과율에 대한 최초의 중요한 거부 ― 1920년 바일(Weil)에 의한 ― 는 내적인 것보다는 환경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지만, 역시 바이마르의 환경보다는 시기가 앞선 직관론적 철학이었고 한편 물리학적 문제들의 복합체 속에 뿌리박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파울리의 예를 볼 때, 각 물리학자들의 관심과 입장들은 인과율만을 가지고 양분하기 어려우며, 그러한 시도는 다소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1921년 쇼트키와 폰 미제스의 사례가 당시의 환경과 철학에 연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내적 동기가 있었다. 그리고 1922-1923년 슈뢰딩거의 사례도 철학에 연관된 것이 사실이나 보존법칙의 문제와 이론의 파라독스와 분명 연관이 있다. … 어쨌든 아직까지는 대부분 물리학자들의 인과율에 대한 입장 모호 또는 유보적 상황.
양자이론에서 역사적으로 다소 중요한 인과율의 최초의 부정은 보른의 결정이었다. 1926년 즉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해석하면서 슈뢰딩거의 고전적 해석이 성립될 수 없음을 깨닫고, 원자세계에서의 결정론을 포기하며 새로운 양자역학을 주창했다. 그리고 그 후 겨우 2년만에 대부분이 양자역학 수용하게 된다.
다시 내적 요인을 정리하면, 양자이론은 오랫동안 궤도의 위치나 전이의 순간 등에 있어서의 불확실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은 언제나, 젠프틀레벤이 말한 것처럼, 불확실한 통계에 따른 불확실한 결론의 경우였다. 원자와 전자 간의 충돌에 대한 보른의 분석에서는, 불확실한 결론들이 원자의 상태와 전자의 운동에 대한 확실해보이는 통계로부터 나왔다. 물론 감춰진 미시적 변수가 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이론이 어떤 식으로건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였고, 보른은 이로부터 물리학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추론했기가 쉽다. 보른의 인과율 부정은 관련 좌표들의 부정과 같았지만,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이론이 최종적이고 완전하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물리적인 해석이 이론의 수학적 정식화로부터 단일하게 결정된다는 보른의 주장에 직접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독일 물리학자들은 적응이라기보다는 격리 쪽에 가까웠고, 양자이론에서의 인과율에 대한 반응은 주로 내적인 고찰들에 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과원리에 대한 매우 강한 내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양자역학(보른의 것)이 출현하기 전에는 다만 몇몇 물리학자들만이 그것을 부정했다. (덧붙여 사회적 인과관계에 대한 복잡성 언급하며 끝냄)

Gerald Holton, “The Roots of Complementarity,” in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s, pp. 99-145

Sungook Hong, “Science as Culture, History as a Science: Revisiting Kuhn,” (ms 1996)

과학사학자로서 쿤의 업적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 하나를 분석함으로써, 쿤의 과학사 연구가 어떻게 그의 철학적 개념들과 관련이 있는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씌어졌다.
쿤 식의 사료읽기 : 독해가 불가능한 과거의 텍스트를 이해 가능하고 명료하게 해주는 열쇠를 그 텍스트 속에서 찾는 것임.
쿤에게 있는 ‘주관’과 ‘객관’ 간의 긴장과 이 둘의 협력적인 상호 작용 검토. 결론으로 쿤이 과학을 문화로 보았지만, 과학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일종의 ‘객관적 지식’으로 보았음을 보일 것이다.

정상 과학에서 혁명적 과학으로의 전이. 과학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문제들과 결국에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해결되는 문제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가령, 당시 물리학자에게도 마이컬슨-몰리의 실험과 흑체복사 현상은, 고전물리학에 의해 효과적으로 해결된 패러데이 효과와 홀 효과에 비해 더 신비하고 더 도전적이고 더 혁명적인 문제로 보였을까?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 전환이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서술.
19세기 말 과연 흑체복사 현상 등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 때문에 물리학계가 위기의식으로 팽배했는가? 플랑크는 자신의 양자 가설의 혁명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쿤은 흑체 복사 문제가 많은 물리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플랑크의 가설 또한 본질상 고전적인 것임을, 그리고 플랑크 자신도 1908년 로렌츠가 그를 설득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설이 지닌 혁명성을 알지 못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쿤에 의하면, 그 혁명적인 의미를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플랑크가 아니라 6년 뒤의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이고, 따라서 양자역학의 시초는 1900년이 아닌 1906년으로 옮겨진다.
쿤에 의하면, 공약불가능성은 고전 물리학자로서의 플랑크(1900)와 양자물리학자로서의 플랑크(1908-1909) 사이에도 드러난다. 마찬가지 해석에 의하면, 변칙(anomaly)이라는 문제는 1900년과 1906년 사이에 찾아야 하며, 플랑크의 수학공식들 그 자체가 변칙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다.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에게 플랑크의 공식은 고전물리학과 양립불가능한 수수께끼인 것이다.

쿤의 관점은 역사가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뒤에 있는 가히 객관적이라 할 만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시사. 이것은 과거의 맥락에 자신을 몰입시킴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낯선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은 옛 과학자의 텍스트에 드러난 명백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 그러면 다시 다른 부분이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텍스트의 모든 구절이 이해되고 텍스트에 있는 모든 변칙적인 점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쿤 식의 사료읽기’이다. 여기에 열쇠 맞추기.
쿤은, 1895-1899년 사이에 씌어진 플랑크의 초기 저서들을 읽은 수, 즉 “플랑크의 고전적인 흑체 이론에 거의 동화된 후에는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이들이 그전에 보통 읽었던 방식으로는 ⌈플랑크가 1900-1901년에 쓴⌋ 첫번째 양자 이론 논문을 읽을 수 없었”고 마침내, “플랑크의 새 이론이 여전히 고전적”이라느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쿤의 철학적인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그의 개념들로부터 과학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에 도전을 가했다. 그러나 쿤의 방법론에는 객관과 주관 사이에 ‘본질적인 긴장’ 있었다. 그의 ‘주관적인 경험’이 과거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객관적인 이해’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과학에 대한 쿤의 ‘객관적인’ 이해는 자연과학을 다른 인간 문화적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쿤의 역사적 방법론과 과학의 가설 연역적 구조 사이의 닮은 꼴과 관련이 있다.

쿤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과학자들의 일반적 담론과 이미지와의 투쟁. 그의 무기는 맥락을 중시하는 그의 방법론에 일종의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방법론.

쿤과 사회구성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 : 텍스트의 ‘불완전성’ 공유. 그러나 사라진 부분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서 갈라짐. 쿤에게 그것은 대체로 지적인 것이고 실마리는 텍스트 안에 있지만, 사회학자들에게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인 것이고 실마리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 있다. 그렇지만, 둘은 과거의 과학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공유. 둘 모두 역사 분석에 있어 일종의 ‘과학적인 방법’에 의지.

과학자에게 주변의 밑천이 자유롭게 동원가능한 자원임과 동시에 실천의 범위를 제한하는 구속요인이 된다. 그리고 과학자가 그 한계에 접근할 때 밑천의 유연성은 그를 구속하는 아주 견고한 규제의 그물이 되고, 이때 사람들이 일컫는 바 ‘자연이 말하는’ 순간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과학관은 역사가의 실천을 새롭게 조명해준다. 그러나 그들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 모든 내러티브가 동일한 정도의 진실성과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가에게 사료는 실천의 밑천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구속물이다. 비록 역사가들의 실천이 기본적으로는 역사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닌 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구성과 해석에 연관되어 있지만, 역사에서도 ‘역사적 사실’들은 말하는 법이다. 역사 연구의 실천은 과학적 실천과 역사 연구에 있어서의 실천에 수반된느 이러한 복잡성의 발견이야말로 아마도 우리가 쿤에게 진 가장 큰 빚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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