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사연구] 기말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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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관료, 이론적 공학자의 이상과 현실
19세기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수학과 객관성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 제출일 : 2005. 12. 20

머리말
가브리엘 헤트(Gabrielle Hecht)는 2차세계대전 이후 핵발전을 연구했던 프랑스 연구자들의 정체성을 다룬 책(The Radiance of France, 1998)에서, 19세기 초 정부공학자들의 정체성을 언급하고 있다. 20세기 중반의 현상을 다루기 위해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프랑스만의 특수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였고,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에콜 폴리테크닉과 공병대의 정부공학자들은 그 프랑스 혁명의 독특한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 정부공학자들은 프랑스 공학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대변하는 엘리트로서, 모든 정부사업을 계획, 추진, 감독하며 각 그룹간의 이해관계를 ‘공공’의 이름으로 조정해왔다.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공공을 대변했고, 그러한 자격과 권위는 어떻게 획득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공공’적 이익은 진정 ‘공공’적이었는가?
한편, 정부공학자는 단순한 정부관료가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공학자’로서 활동했다. 공학이론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학자를 열거하다 보면, 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 공학자들의 이름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는 과학의 역사에서도 프랑스 ‘공학자’의 이름은 쉽게 발견된다. 과학의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쿨롱, 카르노는 프랑스의 공학자였다. 반면, 발명과 기술개발의 역사에서 프랑스 공학자의 이름은 찾기가 어렵다.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이는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의 ‘수학/이론 지향적’ 지적 풍토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지적 풍토는 어디서 연유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학문, 산업, 공학자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관료’로서의 정부공학자
19세기 프랑스의 대부분의 건설사업 ― 도로, 운하, 다리, 철도 등 ― 은 중앙정부의 계획 또는 승인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Corps des Ponts et Chauss es를 비롯한 공병대의 정부공학자들은 그 사업들을 설계, 총괄, 감독,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9세기 말, 이들의 주요 결과물은 세계적인 찬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를 기획한 미국의 공학자들은 프랑스의 기념비적 다리, 튼튼한 다리, 균일한 철로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보여준 국가적인 규모의 체계적인 수송망은 방문객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운하 시대(Canal Era)의 막을 연 것은 건설교통국(Bureau of Bridges and Roads) 장관 베쿠이(Fran ois Bequey)의 1920년 법안(Report to the King)이었다. 베쿠이는 영국의 산업혁명 모형을 따라 침체된 프랑스의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단, 그는 ‘국가의 힘’으로 사기업의 성장시키고자 했으며, 그 핵심에 운하 건설이 있었다. 그의 계획은 국가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각 운하들의 경로, 기술, 비용, 가능한 계약자까지도 명세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명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산하의 공병대의 수학적, 통계적, 기술적 능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자유주의자가 보기에 엄청난 낭비사업(perfect pork barrel)이었으며, 은행과 민간업자들에게도 선뜻 참여할 매력이 없었다. 운하 건설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대의에는 모두가 동의했음에도, 구체적으로 보조금, 통행료, 사업순서, 설계 등에서 정부와 은행, 민간업자 사이에 잦은 충돌이 빚어졌다. 민간업자들은 국가적인 사업의 거대한 모양새보다는 자신들의 수지에 맞는 사업을 선호했고, 정부의 설계를 자신들의 사정에 맞게 변경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정부와 공병대는 국가적인 규모의 체계적인 사업이 장기적으로는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이 될 것이라 주장했고, 민간업자의 사적인 이윤추구 행위를 제한하고 감독하고자 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운하 건설은 영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의 수많은 운하는 주요 제조업 지역을 중심으로 ‘국소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수송기술로는 감당이 안될 만큼 수송량이 증가했음을 반영했는데, 이러한 병목현상에 대한 감지와 그에 대한 개선이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기대가 운하 건설의 원동력이었다. 각 운하는 개별 업자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건설되었으며, 그 어디서도 전국토 규모의 ‘계획’과 국가의 ‘개입’은 없었다.

한편, 철도 건설이 제기된 것은 1830년대부터이다. 프랑스 철도망은 1842년 6월 11일 법령(Act of June, 1842)으로 체계적이고 완성도 높게 건설된 것으로 유명하지만, 던햄(Arthur L. Dunham)은 그러한 계획(1842년 6월)이 만들어지는 지난한 과정이 그 경제적 효과를 반감시켰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철도 건설(1835년)은 사기업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정부는 ‘외국의 침략으로부터의 국가 방어’를 이유로 철도를 국가 차원에서 계획, 관리하고자 했다. 정부공학자가 책정한 공사비와 운임 등을 바탕으로 정부는 계약자를 모집했고, 운하 계획 때와 마찬가지로 노선, 공사비, 운임을 둘러싼 합의 과정에서 철도 건설 계획은 계속 지연되었다. 공학자들은 사기업의 비용과 이윤보다는, 철도 건설의 공공적 가치와 목적 ― 경제적, 안보적, 미적 가치 등 ― 을 통합하여 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이는 개별 사업자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부와 정부공학자는 개별업자에게 내맡겨 시장으로부터 사후평가받는 방식보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입안하여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그 사업은 개별사업자가 아닌 공공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했다.

공공의 보편적 이익과 수학
정부의 주요사업을 시장에 의한 사후평가가 아닌 방식으로 사전에 평가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지 않은 객관적이고 합리적 기준이 필요했다. 수학은 이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었는데, 수학의 방법은 그 계산의 결과가 규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것으로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며, 그 계산결과는 ― 과정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 객관적인 것으로 신뢰를 줄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주요사업을 사전에 결정하기 위해, 공공의 효용을 명시적으로 계산하고자 했고, 그 계산과 해석은 정부공학자의 몫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부 공공사업의 효용을 수량화하여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부터였다. 나비에(C.-L.-M.-H. Navier)는 정부사업의 이상과 수량화의 수사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잘 조화시켰다. 그를 비롯한 정부공학자들은 영국 사기업의 이기심, 주관성에 의한 결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공공의 장기적인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이 선호했던 수량화는 공평할 뿐만 아니라 시간, 장소, 사람에 따른 편협하고 주관적인 고려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증명해주었다.”
정부공학자로서의 사명감 아래서, 나비에 식의 공공 이익 계산법은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1847년, 정부공학자 코모이(G.-E. Comoy)는 운하의 운임을 인하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운임인하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운하의 사용률을 극대화함으로써 전체 공공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정부공학자 도야트(Laurent Doyat)는 시장 자체를 불신하면서, 철도의 운임이 투자를 환수할 만큼 될 필요가 없으며, 중요한 질문은 “그 가격이 사회에 유용한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논리 하에서, 철도는 국가만이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공학자 미나드(Charles Joseph Minard)는 경쟁의 해로운 결과를 수치화하여 증명하면서, 같은 경로를 다니는 철도회사가 두 개 이상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손실을 막을 책임은 정부공학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정부공학자 내에서 계산법이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듀푸이트(Jules Dupuit)는 나비에 식의 계산법에 반대했는데, 그는 전보다 더 복잡한 계산법을 동원하여 공공의 효용과 수입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적인 차등가격 시스템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건설사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정부공학자의 기술과 경험 외에는 별 이득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정부공학자들의 효용 계산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으며, 전보다 절충적인 결과를 산출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포터(Theodore M. Porter)는, 정부공학자들이 주장한 분석방법의 객관성이 여전히 주관적 가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음을 주장했다. 정부공학자들은 종종 “수량화의 적절한 형태(the proper form of quantification)”를 두고 논쟁을 벌이곤 했는데, 이는 곧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부공학자의 권위는 그들이 사용한 수학이라는 ‘객관적’ 방법에 의존했으며, 이는 사실 불완전했다.

수학과 ‘객관적’ 능력주의
정부공학자들의 수학과 객관성에 대한 강조는 그들의 교육과정과 프랑스의 위계적 교육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병대 소속 정부공학자들은 모두 에콜 폴리테크닉 졸업생이었으며, 다른 학교 출신은 들어올 수 없었다. 또한 에콜 폴리테크닉은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입학을 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면에서 에콜 폴리테크닉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었지만, 그 시험은 너무 어렵워서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즉, 에콜 폴리테크닉은 소수의 상위계층에게만 열려 있었다.
한편, 에콜 폴리테크닉에서는 입학시험부터 교과과정까지 ‘수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801년 에콜 폴리테크닉의 수학관련 과목은 전체 교과과정 66%에 달했으며, 물리와 화학은 18%에 불과했다. 그리고, 에콜 폴리테크닉은 입학시험뿐만 아니라, 학교를 다니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성적에 서열을 매겼고, 이 성적은 이후 어느 공병대에 진출할 수 있느냐의 지표가 되었다.

에콜 폴리테크닉은 프랑스 혁명 중 1794년에 설립되었으며, 혁명정부는 신분계급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콜 폴리테크닉은 의무교육 기관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국가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고, 원하는 모두를 받을 수는 없었다. 즉, 에콜 폴리테크닉은 학생을 선발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이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과거의 신분에 대한 대표적인 대안은 능력(merit)이었고, 그 능력은 ‘수학 성적’이라는 지표에 의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학교도 똑같은 지표로 평가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에콜 폴리테크닉의 하위 서열에 있는 Ecoles Centrale des Arts et Manufactures와 Ecoles d’Arts et Metiers의 입학시험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으며, 실용적인 능력과 경험도 포함되곤 했다.
즉, ‘수학’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자격’이자 엘리트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그렇다면 엘리트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며, 수학은 어떻게 엘리트의 지표가 될 수 있었는가? 당시 엘리트란 공공의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자, 국가를 건설하는 지도자로서 인식되었다. 지도자로서의 엘리트는 개별적인 지식이 아닌 보편적인 지식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에콜 폴리테크닉과 공병대에서 계속 강조되었다. 한편, 수학은 자연을 성공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객관적 언어로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학’이라는 언어는 자연에 대한 객관성과 보편성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혁명 이후 새로운 엘리트를 위한 ‘언어’가 되었다. 즉, 혁명 이후, ‘능력’에 따른 새로운 위계질서는 ‘수학’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고, ‘수학’은 사회 내에서도 객관과 보편성이라는 권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수학’에 대한 권위가 원래부터 확고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능력’이란 신분에 의한 능력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던 모호한 단어였다. 앨더(Ken Alder)는 앙시엥 레짐 하에서의 포병부대에서 새로운 질서의 씨앗을 찾아냈다. 18세기 포병부대는 대포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이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대포의 성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자의적이지 않으면서 비개인적인(impersonal) 도구로서 수학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포병부대는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자체적인 교육기관을 운영했고, 최고의 교수진을 영입했다. 그리고 병사/학생들은 (수학)시험을 통해 선발하였고, 진급도 시험(+연공)을 통해 이루어졌다. 포병부대는 신분과 상관없는 ‘수학’에 대한 능력을 통해 병사/학생들을 평가하였고, 병사/학생들은 능력만 있으면 최고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동적인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앨더는 이 포병부대를 혁명 이후의 교육기관 및 공병대와 연속적으로 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공학자들은 “자연에서 객관적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평가받고자 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이 포병부대의 공학자였다는 것은 두 기관 사이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공학자들의 ‘객관적’ 방식은 ‘비개인적인(impersonal)’ 방식을 의미할 뿐, ‘성공적인’ 방식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즉, ‘비개인적인’ 방식이 ‘성공’을 보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둘을 혼동하곤 하며, 프랑스 공학자들 스스로도 그 둘을 자주 혼동했다.

공학자 사회의 위계질서
바이즈(John H. Weiss)가 지적했듯이, 19세기 프랑스에는 정부공학자 외에도 민간공학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공공부문보다는 민간 산업부문에 종사했으며, 이들 사이에는 넘기 힘든 장벽(barrier)이 존재했다. 이들 사이의 구분은 기능적인 구분이자 계층적인(stratification) 구분이었다. 또한, 이러한 구분은 그들이 졸업한 학교에 의해 규정지어졌다.
가장 하위에 속했던 Ecoles d’Arts et Metiers의 졸업생들은 주로 중소 산업체의 십장, 중간관리자로 종사했다. 데이(C. R. Day)에 분석에 따르면, Ecoles d’Arts et Metiers의 졸업생들(gadzarts)은 민간 산업부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들의 말년에는 대부분이 일정 이상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Ecoles d’Arts et Metiers의 입학생들의 출신계층도 점점 높아졌다.
그럼에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간계층에 속하는 Ecoles Centrale의 졸업생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민간 산업부문으로 진출했으나, 일부는 공병대의 보조인 conducteurs로 종사했다. 그런데, conducteurs는 1850년의 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공병대의 일원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1850년, 10년 이상 근무한 conducteur에 한해서 공병대로 추천될 수 있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추천받은 conducteur는 2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수학 및 이론에 대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결국,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20년간 이러한 경로로 공병대로 올라간 conducteur는 한명도 없었다.
민간부문에 진출한 Ecoles Centrale 출신의 공학자들은 Ecoles d’Arts et Metiers 출신의 공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공공부문 또는 철도부문에 진출한 공학자들만은 하위직에서 머물렀다. 이는 당시 정부공학자의 권력을 반영한다. 정부공학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자신의 ‘능력’에서 찾았는데, 그 능력이라는 것은 곧 수학을 비롯한 복잡한 이론에 대한 지식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공병대가 되기를 바라는 conductuer가 치뤄야 했던 시험이 바로 이에 대한 테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공학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러한 수학적 능력이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회의적이다. 정부공학자들은 자신이 가진 수학적 능력으로부터 얻은 권위 때문에, 그 능력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 착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공학자’로서의 정부공학자
나비에(Claude-Louis-Marie-Henri Navier, 1785-1836)의 인밸리데스 다리(the Pont des Invalides) 건설 현장(1826-1827)은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공학자’적 면모를 잘 드러내준다. 크라나키스(Eda Kranakis)는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공학’ 스타일을 드러내기 위해 미시적인 비교분석을 시도했는데, 그는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전형으로 나비에를 제시했다. Corps des Ponts et Chauss es의 대표적 공학자인 나비에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복잡한 수학적 분석에 엄청나게 의존했다. 이러한 고난이도 수학의 사용은 그가 졸업한 에콜 폴리테크닉의 졸업증명서(hallmark)이기도 했다.
나비에는 인밸리데스 현수교를 설계하기 전, 이미 다리 설계에 대한 권위있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물론 그 논문은 줄의 강도와 탄성, 뒤틀림, 진동 등을 특성화하는 방정식들로 가득했다. 이 방정식들은 대부분 복잡한 계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분석에서 실험이 기여한 부분이란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편, 나비에의 다리는 기본적으로 기념비적(monumental)인 성격을 만족해야 했다. 다리의 구조물에는 장식이 포함되었고, 실용적인 재료임에도 볼품이 없으면 더 멋진 재료를 선택했다. 나비에의 다리의 바닥재료로 육중한 오크판(oak planking)을 사용했는데, 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더 두꺼운 케이블과 더 큰 규모의 타워가 필요했고, 이는 비용증가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정부공학자들에게 무게와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공학적 태도는 미국의 공학자 핀리(James Finley, 1762-1839)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사업가로서의 핀리는 이윤을 추구했고, 최소의 비용으로 ‘건널 수 있는’ 다리를 건설했다. 그의 현수교는 값싸고 가벼운 케이블을 사용했고, 값싼 나무타워에 케이블을 걸었다. 이러한 간단한 설계에 의하면 지역의 비숙련 노동자를 동원해서도 건설이 가능했다. 한편, 그는 다리를 설계하는 데 부하, 장력, 경사 등의 간단한 개념만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작고 간단한 실험의 시행착오(trial-and-error)를 반복하면서 최적의 해를 찾아나갔다. 그의 접근방식은 경험적이고 귀납적이었으며, 수학은 최소한으로 이용됐다. 이러한 방법과 설계는 값싸고 용이했으며, 널리 적용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학적 태도는 미국에서 일반적이었다. 요컨대, 프랑스 공학이 이론-연역적이라면, 미국의 공학은 실험-귀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공학자들의 지적 태도
정부공학자들의 수학/이론 중심의 경향은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에콜 폴리테크닉이라는 엘리트 교육기관으로부터 기인한다. 폴리테크닉에서는 복잡한 이론을 중심으로 가르쳤고, 매우 약간의 실험을 했으며, 현장실습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공학자 사회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론/실험/현장실습은 기능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위계적으로도 구분되었다. 그리고 크라나키스는 이에 대한 원인으로 프랑스 사회의 수작업(manual labor)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짚는다. 분명, 프랑스 사회는 미국에 비해 수작업 노동자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수작업에 대한 태도가 지적 위계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는 좀더 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적 위계의 풍토에 의한 결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라나키스는 정부공학자의 이러한 지적 태도가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전통이 어떻게 계속 ‘유지’될 수 있었는가”라고 말한다. 크라나키스는 이를 ‘방어의 성공’으로 설명한다. 권위를 획득한 정부공학자들이 “이론적 수학적 지식만이 모든 기술적 영역에서 기능할 수 있는 공학자를 만들어낸다”는 논변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사회적/지적 위협을 방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지적 전통을 계속 재생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공학자들의 공학이론
쉰(Terry Shinn)은 정부공학자들이 사실 ‘공학자’가 아닌 정부 관료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부공학자들이 공학적인 작업을 수행하지도 않았으며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크라나키스는 당시 정부공학자들이 현장공학자, 컨설팅공학자, 전체를 감독하는 분석공학자로 활동했으며, 단순한 관료로만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당시 정부공학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수행했던 작업들, 예를 들어 설계, 안전에 대한 표준 정하기 및 안전 검사 등은 분명히 전문성이 필요한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관료의 일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크라나키스는 “관료제 자체가 공학화되었다”고 말한다.
크라나키스는 당시 정부공학자들의 예를 들어가며, 그들이 수행했던 ‘공학적 연구’를 보여준다. 그들의 연구는 미국이나 영국의 공학적 연구와 사뭇 다르긴 했지만, 분명 ‘공학적 연구’였다. 정부공학자들은 이론중심의 지적 풍토 아래서, 공학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의 연구를 발명 및 특허의 형태보다는 논문의 형태로 발표하기를 좋아했고, ‘과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는 것을 큰 성취로 여겼다. 그리고 당시 과학 아카데미의 역학분과는 상당수가 정부공학자로 채워져 있었다.
쉰은 에콜 폴리테크닉과 정부공학자가 공학과 과학에 기여했다는 크라나키스의 주장에 대해, 몇몇의 사례만으로 전체의 모습을 착각하면 안된다고 반박한다. 쉰은 당시 정부공학자 중 과학아카데미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정부공학자의 핵심적인 역할은 국가의 이해와 사적 이해를 중재했던 ‘기술관료’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정부공학자가 연구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크라나키스의 분석이 힘을 잃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쉰의 반박은 분석 대상의 분모를 바꾼 것뿐인데, 이는 크라나키스가 보여준 정부공학자의 연구 태도와 지적 풍토까지 바꾸진 못할 것이다.
정부공학자들의 연구활동은 기계 등의 인공물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왜 이런 설계는 저러한 결과를 산출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이론, 특히 수학적 이론으로 기술하고자 했다. 예외가 없진 않겠지만, 그들은 실험에 대해 이론을 증명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공학자들이 던지는 질문 및 실험과 매우 대조적이다. 미국의 공학자들은 “어떻게 설계를 바꾸면 산출이 더 좋게 나올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실험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프랑스의 정부공학자들은 장인 전통 하에서 비밀스럽게 또는 ‘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 채’ 하는 실험과 그로부터의 지식을 경멸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완전한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완전한 지식이며, 그러한 완전한 지식으로부터 완전한 도구와 기계를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그들의 지적인 편향이었으며, 그들은 때로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기술적 개선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자주 놓치곤 했다.

공학이론과 기술발전의 관계
분명,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공학의 이론을 탄탄히 다지는 데 기여를 했다. 이는 교과서가 증명해주며, 영국, 미국을 비롯한 외국으로의 공학교육 이전 또한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이 기술발전에 기여한 바는 극히 적다. 오히려 과학에 기여한 바가 많을 지도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지만,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논문의 형태로 발표하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미국 공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특허의 형태로 발표했다. 미국 공학자들의 특허에는 다양한 실험자료에 대한 표와 그래프로 가득했지만,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의 논문에는 현상을 특성화하는 방정식만 즐비할 뿐이었다.
기술발전은 꼭 내부 원리를 다 알아야만 가능하지는 않다. 다양한 실험과 귀납, 유비 등만으로도 기술은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수학이 가져다주는 ‘객관적 능력’에 사로잡혀 쉬운 방법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론; 객관의 혼동
지금 현재, 공학교육과 공학교과서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체계적인 공학이론은 과거의 성과를 표준적인 방식으로 저장하여, 학습의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이 복잡해진 기술환경에서, 체계적인 공학이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기술발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진 않는다.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수학과 이론이 자신에게 준 ‘지위’와 ‘객관성’에 사로잡혀, 다른 길을 보지 못했다. ‘객관성’은 비개인적인(impersonal) 기준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앞으로의 성공을 보장해주진 못한다. 또한, 사회적인 이슈에서 수학이 가져다 주는 ‘객관’은 특정한 가치와 함께만 작동 가능하다. 수학 및 이론과 함께 성장한 정부 공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놓치거나 혼동했다. 또는 적극적으로 이용했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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