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계획서에 빠진 연구거리 2

표상 대상이 없는 모형은 가능한가?

표상의 역할을 무시한 모형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검토하고자 한다. 표상하는 대상이 없는 모형이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상적인 문법에 따르면, ‘모형’이란 말은 “…의 모형” 형식의 표현법이 항상 가능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과학 현장에서는 표상하는 대상이 없는 모형이 실제로 구성되고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서 또는 그 외의 다른 이유로) 그 자체로 연구되는 경우도 꽤 많기 때문에 이를 해명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잠정적인 나의 생각에 따르면, 이러한 표상 대상이 없는 모형이란 마치 수학이나 공학에서 다루는 대상과 유사해 보인다. 18세기의 구분법에 따르면, 비슷한 그림이나 기계라도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이 있는 경우에는 ‘모형’으로 불렸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계’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과학과 수학과 공학 사이의 새로운 구분법을 제시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즉 과학은 원칙적으로는 자연을 표상 대상으로 하는 모형을 (가상적 모형이든 물리적 모형이든) 다루는 반면, 수학과 공학은 원칙적으로 표상 대상이 없는 모형, 즉 기계를 다룬다. 수학과 공학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수학은 주로 가상적 기계(예컨대, 튜링기계)를 다루지만, 공학은 물리적 기계(예컨대, 컴퓨터)를 다룬다. 이는 또한 세 분과가 왜 그렇게 자주 혼합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애초에 표상 대상이 없는 기계가 후에 (유비 등에 의해)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모형이 될 수 있으며(예컨대, 17세기 기계적 철학이나 기계학, 즉 역학 mechanics), 거꾸로 과학에서 자연을 표상하기 위해 고안된 일부 모형들은 그 자체로 순수한 수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한편 공학의 대상인 물리적 기계(모형)는 자연의 제약을 받는 것으로 가정되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여러 모형들은 공학적 대상의 구성물들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모형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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