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분담

나는 가사 분담에 꽤 집착하는 편이다. 게다가 서로의 역할 구분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 중이다. 서로가 잘하는 영역에 따라 역할을 나누어 일을 처리하는 것은 분명 효율적이지만, 전통적인 남녀 역할 구분을 벗어나기 힘들다. 주변의 케이스들을 보면, 보통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 요리는 부인이 하고, 청소는 내가 할테니 빨래는 부인이 하고 식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암묵적으로 세운 원칙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정해진 역할은 없다. 무엇이든 나누어 함께 한다”이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아무나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준비한다. 하지만 원래 일이란 게 귀찮기 마련. 아침에 눈을 뜨면 밥하기가 싫고, 밥먹고 나서는 설거지가 싫다.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부인이 먼저 싱크대 근처로 가면 덜컥 미안해지게 된다. 설거지를 하는 부인에게 “놔두면 내일 아침 내가 할게” 하며 못하게 막기도 한다 -_-;; 게다가 나는 유독 청소를 싫어하는데, 부인은 나보다는 깨끗한 방을 원한다. 그래서 “청소하자”는 말은 항상 부인 입에서 먼저 나온다. 어쨌든 청소를 하기 시작하면 함께 하는 것이 내가 세운 원칙인 이상, 내가 청소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인도 못하게 말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때마다 “꼭 지금 해야 하나?” 또는 “부인 너무 청결 떠는 거 아냐?” 식의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 평등은 원하지만 일하기는 싫어하는 내가 취하는 고육지책들인데, 쉽게 고쳐지진 않고 있다.

일의 물리적인 양만 문제는 아니다. 가사 일을 함께 “하는” 건 쉬울지 몰라도, 살림을 함께 “책임”지는 것은 쉽지 않다. 위의 청소 얘기와 관련된 얘기인데, 가사 일에는 누군가 신경을 계속 쓰다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 많다. 음식 재료가 뭐가 떨어졌는지, 물은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쯤 장을 보러 갈지, 쓰레기통은 꽉 찼는지, 속옷은 얼마나 남았으며, 그래서 언제 빨래를 돌릴지, 청소한지는 얼마나 지났으며 언제쯤 청소를 해야할지 등등… 결혼 후 한동안 이런 일들에 대한 모든 세세한 신경을 부인이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살림을 부인이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함께 살림을 책임지겠다”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나의 10년 자취의 습관이란 게, 재료는 떨어져야 사고, 청소는 바닥에 먼지가 굴러다녀야 하고, 빨래는 양말이 떨어져야만 하는 삶을 살았던 나에게 부인보다 빨리 이런 사항들을 챙겨서 “내일은 우리 빨래할까?”라는 말을 하기란 쉽지 않다. 어쨌든 이점은 고치려고 노력중.

마지막으로 요리 얘기. 난 10년 자취를 하면서, 나름 집에서 혼자 직접 해먹고 산 편인데도, 할 줄 아는 요리라는 게 된장찌개랑 두부구이, 계란후라이밖에 없었다. 신기하게도 부인은 밖에 나와 산 적이 1년밖에 안 되는 데도, 어떻게 하면 요리가 될지에 대한 상당한 감이 있었다. 음.. 내가 요리를 많이 하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요리를 할 때면 겁이 좀 났고, 결국 3,4월에는 부인이 훨씬 더 많은 요리를 했다. 내가 하겠다고 한 경우에도 부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옆에서 부인이 하는 요리를 구경하고 보조하다보니 지금은 나도 꽤 감이 생겼다. “무슨무슨요리” 하면 대충 뭐가 들어갈지 감이 온다. 그래서 최근에는 꽤 평등하게 요리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정도면 평등한 남편이지” 하고 자부하려는 사이, 부인은 또 새로운 요리를 찾아 공부해서 해준다는-_-;; (나는 맨날 하던 요리 하는데 말이지)

부인 따라잡기 정말 힘들다.

14 thoughts on “가사 분담

  1.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구나! ^^ 남편과 둘이 살 때는 그래도 가사 분담이 제법 잘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생기니 확 달라지더라구. 일단 젖먹이는 사람이 나니까 내가 할 일이 기본적으로 많은데 거기에 기저귀며 분유 살 때 됐는지 챙겨야지, 이유식 만들어야지, 쑥쑥 크는 속도와 계절 변화 맞춰서 옷이며 신발이며 계획 세워야지, 시터 아주머니 댁에도 필요물품 챙겨야지, 게다가 집안 청결상태도 예전보다는 높아져야 하니 청소며 빨래도 자주 해야 하고.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그게 다 내 몫이 되었더라구. 많이 얘기하고 했더니 이제는 좀 나아진 듯. ^^ 빨리 요리의 고수가 되도록 하여라~

  2. 일단 편향된 가사분담을 자각한 것만으로도 좋은 시작으로 볼 수도 있겠네… (물론 앞으로 실천을 잘해야겠지만..)

  3. hubility/ 대학교 1학년 때 네가 \”요리 못하는 건 안 하는 것의 핑계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던 거 기억나?

  4. hubility/ 신입생 교양학교 뒤풀이에서였는지, 학회 뒤풀이에서였는지, 네가 그 문제를 가지고 열변을 토했었어. 난 네 얘기가 신선하면서도 무척 훌륭한 지적이라 생각해서 오래오래 간직하고 있었는데 말야, 정작 본인은 까먹었단 말인가 -_-;;

  5. \”요리 못하는 건 안 하는 것의 핑게가 될 수 없다\” 이거 참 찔리는 말인걸. 그래도 둘 다 요리를 못하는 건 불행중 다행인 건가. >_<;;

  6. 지금 보니 hubility가 남긴 말은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군. 첫째, 지금 요리 못한다고 계속 안 할 생각이냐? 둘째, 가사에서 평등하려면 요리를 실제로 잘 해야 한다.

    두 번째 뜻이 원래의 뜻에 더 가까둔데, 음 그러니까… 원래의 얘기는, 남자가 아무리 평등하게 가사 분담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더라도, 실제로 일을 잘 못하면 일에 방해만 되어 버리고, 결국 여자에게 모든 일이 떠맡겨지기 쉽상이라는 얘기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평등이라는 게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을 잘하는 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던 거지.

    근데 그만큼 무서운 건, 분명 결혼할 때에는 둘 다 요리를 못했는데, 결혼하고 났더니 둘 중 한 명만 요리를 하게 되는 경우인 듯. 성욱-자경 커플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길~~.

  7. 자 서로 인사하세요~ 지혜님은 저의 고등학교 친구, hubility님은 저의 대학 친구, 성욱님은 저의 대학원 친구랍니다.

  8. 가사분담의 적은 \’도와준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나… 가사분담에 참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켜 주지만, 가사는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있으니 말야.

  9. 언니 말이 맞아 \’도와준다…\’가 문제야… 그리고 여자들이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것도 문제고…. 그냥 냅둬야 하는데 나같은 경우는 \’보고 넘어가질 못해\’ 내가 하는 경우가 좀 있어서말야… 니모는 잘 할 마음도 있고 많이 하기도 하고 그래도 난 불만사항이 항상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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