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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지적유희’로서의 글쓰기

spain_Borges.hwp 1. ‘극도의 주관점 관념론’의 상상세계 ‘틀뢴’과 점차 ‘틀뢴’에 근접하는 현실

‘틀뢴’이라는 상상세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틀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틀뢴에 있는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2) 틀뢴에서 지식의 주체는 하나이고 영원하다. (각주1)
틀뢴을 건설한 것은 우주의 현실을 모방한 인간의 작업이었겠지만, 허구의 틀뢴이 그것의 모태인 현실을 침식해 가면서 그것이 인간 자신들의 창조물이었다는 사실조차도 현실의 인간들은 망각하게 된다. 틀뢴이 현실의 일부가 되고 언젠가 현실 전체를 압도하게 된다면 어느 것이 진정한 현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가?(각주2) 점점 복잡해지고, 진리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가는 세계에 대한 보르헤스적 해석이 아니었을까.

2. 지적 유희의 글쓰기

보르헤스는 상상세계 틀뢴에 대해 몇가지만을 묘사하였다. 나머지는 다른 백과사전에 담겨있다고 하면 끝이다. 물론, 묘사된 부분만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그럴듯한 묘사였다. 그러한 세계가 솔직히 있을 법하진 않지만, 논리적으로만은 있을 법도 하겠다는 상상을 하게 하며, 보르헤스의 지적유희는 나 또한 따라해보고 싶어지게 한다. (각주3)

3. 나가며

보르헤스의 지적유희 속에는 분명 진실이 담겨있다. 현실과 허구를 딱잘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 세상에 일치하는 것은 없다는 점 모두 사실이다. 이러한 선도적인 문제의식이 이후 많은 지식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인식과 문학의 지평을 넓혀준 것 또한 사실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에 가득찼던 근대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현실의 수많은 오류와 모순에 대해 그는 혐오했을 것이다. 그에 대한 반편향으로 그는 ‘알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진리’에 대한 겸손함이 필요해진 시기, ‘진리’를 완전히 부정해버린 그에게 남은 삶의 의미는 ‘즐긴다’ 뿐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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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책은 매우 드물다. 그들에게 있어 표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작품은 단 한 작가의 작품이며, 무시간적이고 익명이라는 생각이 확립되어 있다.

2) ‘보르헤스평론’, 김춘진

3) 다음은 소설의 한구절이다.
틀뢴의 학설들 중 <유물론>만큼 스캔들을 일으킨 학설은 없다. 한 유물론자가 한 개의 컵이란 궤변을 고안해 내었다. 이 유물론자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해낸다.
틀뢴의 언어는 그러한 역설이 설정되는 것을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식의 대변인들은 먼저 그 일화의 진실성을 거부했다. 물질이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궤변에 대해 틀뢴의 학자들은 엄밀한 논리를 동원하여 그 ‘오류’를 지적하려 하였다. 그들은 엄밀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두 개의 신조어 ‘다시’와 ‘그(the)’라는 부사와 관사를 사용한 데서 온 언어적 오류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에 의하면 <치웠다>가 <앞에 놓은> 상황 자체가, 그 궤변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 즉 처음과 나중 사이에 계속 컵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설정 자체가 이미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등한 것>과 <일치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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