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 페이퍼에 대한 홍샘의 빨간펜

일주일 전에 제출했던 기말페이퍼가 홍샘의 빨간펜 첨삭을 받아 돌아왔다.

“시제와 몇몇 표현을 제외하면 글의 구성이나 논지의 전개가 깔끔하고 무리가 없음. paper는 꽤 괜찮은 review paper이지만 동욱이 경우는 수업 reading 요약 제출에서 다른 학생들에 비해 점수가 현저히 떨어짐. 물론 수업 중반 이후에 계속 improve 되었음을 알고 있으니, keep going 하길”

하핫.. 기분 좋은 코멘트였다. ;;;
오늘 개인 면담에서도 페이퍼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다.
다만 매주 읽을거리에 대한 요약문 제출에 대해서만 지적을 받았다.
“왜 그랬어?”
“영어 읽는 속도가 너무 느리구요.. “
“그리고?”
“노는 일에 웬만하면 안빠지려고 하다보니..”

사실 매주 부과되는 5-6개 정도의 요약문 중 거의 2-3개씩 꼬박꼬박 빠뜨린데다가, 특별히 발제를 맡은 주에도 다 못해가서 반 이상 펑크를 내거나 하나 정도 빠뜨리는 식이었으니.. 지적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페이퍼를 내고는 내심 학점을 좀 기대하긴 했었는데..
학점은 그냥 평이하게 나와버렸다. 아쉽 ;;;
사실 페이퍼도 2% 부족하긴 하다..
뿌린대로 거둔 셈.

가만히 앉아 포도를 따먹을 수 있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건 진작에 고등학교 때 끝냈어야 했는데..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다.

급진파들의 다윈 수용 1859-1930: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과학의 이해를 왜곡시키는가?

hs_paper.hwp 과학사통론 2 기말보고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제출일 : 2004. 12. 20 | 담당교수 : 홍성욱

머리말

1859년 발표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하여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등 당대의 사회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다윈의 진화론이 자신들의 혁명이론을 뒷받침해준다며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맑스주의 이데올로기가 다윈 이론의 온전한 이해를 방해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또한 리센코주의로 대표되는 소비에트 생물학의 문제에 대해, 맑스주의 영향에 대해 언급을 안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글에서는 리센코주의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이 다루는 시기는 ‘종의 기원’이 발표된 19세기 중반이후부터 리센코주의가 소비에트 생물학의 전면에 등장하기 직전까지이다. 따라서, 그 시기 동안 급진파들이 다윈주의를 수용한 방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리센코주의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직접적인 관심은 당시 급진적 지식인이 가진 정치적 지향과 가치관이 과학이론의 수용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먼저, 맑스와 엥겔스의 수용방식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크게 두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 오갔던 논쟁을 살펴볼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다윈 이해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될 상시, 맑스는 이미 그의 유물론적인 역사관, 계급 투쟁, 잉여가치 이론 등 맑스주의의 주요한 요소들을 정식화해놓고 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세계관을 거의 완비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출간 1년 뒤인 1860년 겨울에 읽었으며, 1862년 봄에 한번 더 읽었다. 콜프 주니어에 따르면, 당시 맑스는 ‘종의 기원’에 대해 세 가지 관점을 표현했다고 한다. 첫째, 그는 유기체의 진화 이론을 수용했다. 둘째, 그는 ‘종의 기원’의 유물론적 성격, 합리적 설명, 자연과학에서의 “목적론(teleology)”의 제거를 높이 평가했다. 셋째, 그는 맬서스의 인구법칙에 대한 다윈의 믿음을 비판했다.
당시 그는 그의 동료 엥겔스에게 ‘종의 기원’은 “우리 관점에 대한 자연사적 토대를 담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으며, 또 다른 편지에서는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나에게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다윈과 연결짓고자 상당한 노력을 했다. 1867년 겨울, 맑스는 엥겔스에게 ‘자본론’의 서평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맑스는 “(자본론이) 현재의 사회가, 경제학적으로 볼 때, 새롭고 더 높은 형태를 산출한다는 것을 증명하며, 다윈에 의해 자연과학에서 증명된 보편적인 변화의 과정이 사회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고 써주길 부탁했으며, 엥겔스는 그렇게 썼다. 또한, 1883년,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듯이, 맑스는 인간 사회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자연의 역사에 대한 다윈의 관점을 인간사회의 역사에 직접 적용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맑스는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와 다르다. … 우리는 전자를 만들어 왔지만, 후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맑스주의와 다윈주의를 병렬적으로 공존시키려 했던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윈주의를 사회에 직접 적용하려는 시도, 특히 사회 다윈주의나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에 대해 매우 불편해했다. 엥겔스는 ‘반듀링론’과 ‘자연변증법’에서 이러한 관점을 더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논증을 위해서 잠깐 생존경쟁이라는 이 공허한 말을 받아들여 보자. 동물이 해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수집하는 행위’까지일 뿐이나, 인간은 ‘생산을 한다’. 즉 인간은 자연이 인간 없이는 결코 생산해내지 않았을, 그 말이 갖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생활수단들을 만들어낸다. 이 사실로써 동물사회의 생존법칙들을 그렇게 거침없이 인간사회에 전용하는 어떠한 행위도 불가능해진다. 생산은 곧 소위 생존경쟁이 더 이상 순전히 생존수단을 두고서가 아니라 향락과 발전의 수단을 두고 벌어지게 되는 데까지 사태를 진척시킨다. 여기서 이미 ― 사회적으로 생산된 발전수단들에 있어서 ― 동물계로부터 나온 범주들은 전혀 적용할 수 없다.

엥겔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생산’에서 찾았으며, 그로 인해 동물계의 법칙과 범주가 인간에 곧바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윈을 비롯하여 그의 현재의 추종자들이 강조해온 것은 식물계가 동물계에게 먹이와 산소를 공급하고, 동물들은 식물들에게 분뇨와 암모니아 그리고 탄산을 공급하는 등 바로 생명계의 조화적 협력이었다. 그러나 막 다윈이 널리 인정받게 되자마자, 바로 이 사람들은 이제 어디서나 투쟁만을 본다. 이 두 견해는 좁은 범위 내에서는 정당하나, 둘 다 똑같이 일면적이고 편협하다. 죽은 자연물들의 상호작용은 조화와 충돌을 포함하며, 살아있는 자연물들의 상호작용은 의식적·무의식적 협력과 의식적·무의식적 투쟁을 포함한다. 즉 일방적으로 ‘투쟁’만을 기치로 내세우는 것은 이미 자연에 있어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 (중략) …
다윈의 생존경쟁 이론 전체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론과 부르주아 경제학의 경쟁이론 및 맬서스의 인구론을 사회로부터 생물계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재주를 일단 부리고 나면(그런데 이러한 재주의 무조건적 정당성은 특히 맬서스의 이론과 관련해 볼 때 매우 의심스럽다) 그 다음에 이 이론들을 자연사로부터 다시 사회사로 거꾸로 도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며, 그것으로써 이러한 주장들이 사회의 영원한 자연법칙임이 입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우직한 짓이다.

여기서 엥겔스는 자연의 작동법칙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반대함과 동시에, 맬서스의 이론을 자연에 전일적으로 적용하는 것에도 의심을 표명하고 있다. 엥겔스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생존경쟁에 대해 “무엇보다도 일정한 식물과 하등동물의 단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식물과 동물의 개체수의 과잉에 의해서 야기된 투쟁에 엄격히 한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자유경쟁, 생존경쟁 ― 경제학자들은 이를 최고의 역사적 성과라고 칭송해 대고 있는데 ― 이 바로 동물왕국의 정상적 상태임을 증명했을 때, 다윈은 자신이 인류와 특히 영국 국민들을 얼마나 쓰라리게 풍자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며 비유적으로 사회 다윈주의자들을 비난했다.
결론적으로, 엥겔스는 자연이 형이상학이 아닌 변증법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다윈이 증명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진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졌고, 사회의 진화(진보) 메커니즘과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다윈의 이론이 변이의 원인을 설명하는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무작위적인 변이가 진보적인 진화를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맑스도 이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인간의 진화에 관련하여, 맑스는 트레마욱스(Pierre Tr maux)가 제기한 ‘지리적 환경’이 진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이라 생각했다. 반면 엥겔스는 좀더 능동적 요인(문화, 노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점은 라마르크주의에 편향된 것으로 보인다.

논쟁지점들

자연 대 인간 / 경쟁 대 협동

급진파들의 대부분은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진화는 열렬히 수용했으나, 경쟁이 그 진화의 요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불편해했다. 특히 맬서스의 ‘인구법칙’과 ‘생존경쟁’에 대한 비유의 직접적인 차용은 급진파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맬서스를 읽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838년 10월, 그러니까 나의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한 지 15개월 후에, 나는 우연히 맬서스의 ‘인구론’을 재미삼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동물과 식물의 습관들에 대해 오래 관찰하면서 모든 곳에서 진행되는 생존경쟁을 제대로 평가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 아래서는 유리한 변이는 살아남고 불리한 변이는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이 즉각 떠올랐다. 그 결과로 새로운 종이 형성될 것이다.

그의 공동발견자인 월러스도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 당시까지 읽은 것 중 철학적인 생물학의 어떤 문제를 취급한 첫 번째 책이었으며, 그 주요 원리들은 영원히 내 것으로 남게 되었고 20년 후 생물 종의 진화의 유효한 작인에 대해 오래도록 찾던 실마리를 제공”하였으며, “그 저술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자연선택 이론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의 독자적 발견에 대한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윈과 월러스가 사회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생명의 진화에 관한 이론을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지 않거나 극히 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 다윈주의자들과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들은 다윈의 이론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려 했다. 엥겔스의 지적처럼, 다윈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하는 일은 지극히 쉬운 일이었다. 다시 맬서스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스펜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직 출간되지 않았던 1852년에 쓴 원고에서, 사회에 적용되는 생존경쟁과 선택이 극단적 자유방임형 사회경제학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했다. 스펜서에 의하면, 국가는 자기 관심을 추구하는 개인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방임해야 하며, 불공평이나 불평등을 시정하거나 관행을 규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사방에서 비탄의 상황을 낳기 때문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 사회는 항상 신체적 약자들, 저능자들, 지진아나 결단력이 없거나 신의가 없는 사회 구성원들을 자동 소거해 버린다는 사실을 눈감아 버린 채, 선의를 갖고 있더라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정화 과정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런 타락을 증대시키는 영향력을 옹호하게 된다.” 스펜서의 주장은 멜서스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빈곤의 원인은 빈곤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결함 또는 인구의 과잉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위와 같은 견해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 상태를 정당화해주는 보수적 견해로, 사회의 개혁 또는 혁명을 추구하는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급진적 지식인들은 다윈으로부터 스펜서와 같은 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진화에서 인간을 예외로 하거나, 둘째, 진화론에서 맬서스를 제거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진화론에서 맬서스를 제거하려는 경향은 특히 러시아에서 강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아직 자본주의가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기는 엄청난 경쟁사회였다. 그러한 경쟁을 겪어본 적인 없는 러시아의 지식인들로서는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이라는 비유 자체가 오히려 진화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체르니쉐프스키(N. G. Chernyshevskii)의 경우, 그는 진화에서 ‘생존경쟁’을 완전히 배격하였고, 다윈주의를 반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급진적 과학자들 중 다윈주의를 완전히 반대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진화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그것의 적용을 생물계에 한정시키거나, ‘생존경쟁’이라는 비유를 최대한 삼가거나, 또는 진화에서 협동의 메커니즘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식물 생리학자인 티미리아제프(K. A. Timiriazev)는 러시아의 정통 다윈주의의 변호자였으며, 이후 생물학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에게 다윈이 말하는 ‘생존경쟁’이 맬서스의 관점과 분리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다윈의 인구법칙이 맬서스가 아닌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해 먼저 발견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법칙이 자연에서만 “진보에서의 기계적 원인”으로 남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다윈도 어떠한 일관된 다윈주의자도 오늘날의 문명화된 인간에 “생존경쟁”의 개념을 확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 그는 자연선택 이론을 설명하는 데 다윈의 비유를 가능한 최대한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유명한 글 “진화의 요인(Factors of Evolution)”에서는 ‘생존경쟁’이란 단어를 완전히 없앴다. 그는 점점 잔인한 “생존경쟁”보다 “조화(harmony)”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에게 “자연선택”이란 그 잔인한 경쟁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조화를 만들어가는 자연의 방식에 대한 기술이었다. 1910년, 그는 “‘생존경쟁’이라는 불편한 표현을 언급하지 않고도” 20년간 다윈주의를 방어했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그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다윈에서 맬서스를 제거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람 중 크로폿킨(P. A. Kropotkin)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잘 알려진 러시아 혁명가이다. 그는 진화를 이해하는 데 “붙임성(sociability)”과 “상호도움(mutual aid)”을 중요한 용어로 들여오면서, 종 내부(intra specific)의 협동을 진화의 핵심 요소로 보았다. 1902년 ‘상호도움’이라는 책에서, 그는 새, 늑대, 사자, 설치류, 원숭이 등 자연에서의 협동의 사례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원시부족, 중세 길드, 현대의 노동조합의 구성원들 사이의 협동을 강조하면서, 앞서의 주장을 인간 역사에 확장 적용하였다. 그에게는 서구 유럽의 현재 상태는 오히려 진화의 경쟁적인 측면을 일시적으로 과장시킨 탈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진화론의 이해는 러시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연선택 이론의 공동발견자인 월러스조차도 ‘생존경쟁’과 ‘최적자 생존’이 진화를 설명하는 데 불충분하거나 적합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로버트 영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두뇌와 미적·도덕적 능력들에 관해 예외를 두게 되었고, 점점 더 자연을 초월하는 어떤 힘에 의한 인간 욕구의 예견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는 효용의 원리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적절한 설명임을 이미 거부하였으므로, 더 나아가서 맬서스에서 그것이 기원했음을 거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81년 월러스는 다윈에게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이 그에게 맬서스의 법칙이 인간의 진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음을 확신시켜주었다고 편지했다. 조지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인간이 실패한 것 때문에 자연이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월러스의 생각으로는 자발적인 협동과 개혁이 사회변혁의 메커니즘으로서 경쟁을 대체했다. 그는 맬서스의 이론이 “그것에 의존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광대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데에서 조지와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는 ‘진보와 빈곤’이 “아담 스미스에 의해 한 세기 전에 이루어진 것과 동등한 진보를 정치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이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조지는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적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주장할 만하다”고 이야기되었다. 1898년 ‘경이의 세기’를 쓸 때까지는 미래사회에 대한 월러스의 사회주의적 희망들이 그로 하여금 사회적 경쟁을 완전히 거부하게 하였고 어떤 메커니즘도 규정되지 않은 채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신념을 갖게 했다. 말년에 와서 월러스가 “자연은 잔인한가?”라는 물음을 다시 생각하고 고통의 목적과 한계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동물세계에서의 맬서스적 경쟁을 인간의 진보에 대한 비맬서스적 견해와 양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제공해주었다. 그의 해결은 그 단순함에 있어 거의 데카르트적이었다. 동물은 인간보다 고통을 아주 적게 느끼거나 거의 느끼지 않으며 실제로 문명화되지 않은 종족들은 문명화된 종족보다 (고통을) 적게 느낀다는 것이었다.

또한, 월러스는 ‘생존경쟁’이라는 비유가 영국 자연학자에게도 매우 괴로운 것이었음을 토로했으며, 그 비유는 단지 “자연선택”이라는 현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서, 월러스와 후커는 다윈에게 더 이상 그러한 표현을 쓰지 말 것을 조언하기도 했다.

우연 대 의지 / 유전학 대 신라마르크주의

무작위적인 변이로부터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다윈의 주장은 급진파, 보수파 모두에게 불충분한 설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작위성과 자연선택으로부터 ‘적응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이 불충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선택’은 적응하지 못한 개체를 제거하는 데에 유용한 부정적인 요인(negative factor)일 뿐이다. 그렇다면, 적응적인 결과를 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할텐데, 그것이 ‘무작위적인 변이’라는 다윈의 설명에 충분히 만족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시 말해, 변이 생성의 메커니즘이 만족스럽게 해명되지 않았다는 점이 다윈의 설명의 큰 약점이었다.
이러한 약점은 다시 다윈 스스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868년 다윈은, 범생설(pangenesis)이라는 이론을 발표하는데, 이 이론은 적응적 변형이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적인 개념에 가까웠다. 1844년 다윈은 자신의 입장을 라마르크와 구분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었다. 그러나 1872년 ‘종의 기원’ 6판이 출간되었을 무렵, 다윈은 획득형질이 유전되는가의 물음에 관해 라마르크에 무척 가까워졌다.
다윈주의의 이러한 난점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전학에 의해 보완된 것이 사실이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의 신라마르크주의의 엄청난 유행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 사이의 논쟁은 무척이나 격렬하고 진지했다. 스펜서, 핵켈 등은 어떤 미지의 힘이 생물체로 하여금 그가 처한 환경으로부터 어떤 ‘영향(impression)’을 받아들이게 한다는 가정에 바탕하여 라마르크주의를 옹호했으며, 버틀러, 프랜시스 다윈(다윈의 아들) 등은 라마르크주의에 목적론을 강하게 도입하여 동물의 의식 또는 의지가 진화를 이끌어간다는 주장을 하였다. 물론 이들의 목적론적 사고는 창조주를 끌어들이진 않았다. 반면, 크로폿킨은 이에 반대했는데, 의식이 행위상의 ‘변형’을 통해 진화를 이끌어 가는 추진력이 된다는 논리는 잘못된 인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삶을 하나의 ‘합목적적인 행위’로 보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러한 견해가 연관된 과정에 대한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설명을 추구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유전학은 바이스만(August Weismann), 드 브리스(Hugo de Vries), 모간(Thomas Hunt Morgan) 등에 의해 발전했다. 1892년 바이스만은 점-플라즘(germ-plasm) 이론이라 불리는 유전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을 내놓는다. 이 이론은 종의 변이에 대한 연구에 이산적이거나(discrete) 미립자적인(particulate) 접근에 힘을 실어주었다. 1900년에 이르러, 바이스만은 34년 전의 멜델의 연구를 재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유전적 변이가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인 과정에 의한다는 실험적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멘델을 재평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멘델과 바이스만에 의해, 유전형질은 섞이거나 평균화되지 않으며, 뚜렷한(distinct) 단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드 브리스는 새 변이가 갑작스레 출현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이를 “돌연변이(mutation)”이라 명명했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의 장미 실험은 잡종일 뿐이었지만, 그의 연구는 모간의 연구 방향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모간에 의해 명백히 확증될 수 있었다. 모간은 초파리 실험을 통해, 무수히 많지만 작은 돌연변이들을 발견했으며, 이는 오직 (조한센에 의해 이름지어진) “유전자(gene)”의 변화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었다. 모간의 실험은 드 브리스의 실험에 비해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모간이 엄격한 실험 위에서 돌연변이 유전학(mutational genetics)를 세웠다는 신뢰는 널리 인정받았다. 이렇게 멜델, 바이스만, 모간의 노력으로 확립된 유전학은 다윈의 진화론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엥겔스는 당대의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인이었던 드 브리스나 모간의 연구에 대해 한 줄도 언급한 적이 없다. 아마도 엥겔스는 유전학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맑스주의자들이 유전학을 거부한 것은 아니며, 대부분은 과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생물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논쟁은 보통 과학자들 내부에서 이루어졌으며 2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만, 플레하노프나 카우츠키에 대한 언급은 필요할 듯 하다.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플레하노프(George Plekhanov)는 드 브리스의 돌연변이 이론을 수용하였고, 불연속적인 돌연변이를 혁명의 자연스러움을 확증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의 역사는 도약적으로 진보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하노프는 17세기 스피노자 또는 신라마르크주의에 의해 유행된 물질에 대한 물활론적인 성격(animistic character)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사회 다윈주의에 입각하여 맑스주의에 도달한 카우츠키(Karl Kautsky)도 드 브리스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가 보기에, 그 이론이 ‘자연이 변증법의 법칙을 따른다’는 함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연적인 사회 진화에 대해 생물학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카우츠키는 다윈주의와 맑스주의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긋지 않은 보기 드문 맑스주의자라 할 수 있다.
위에서처럼, 플레하노프와 카우츠키는 돌연변이 유전학이 맑스주의에 통합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반면, 레닌은 물리학의 인식론적인 문제들을 깊이 다루긴 했지만, 생물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해답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전학에 대해 통일된 맑스주의적 관점은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1920년 전까지는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 사이에 명확한 쟁점이 그어진 적도 없었다.
조라브스키(David Joravsky)에 따르면, 유전과 진화의 문제에서 유전학과 신라마르크주의의 관점이 명백히 양립불가능함을 밝히면서 대규모의 생물학 논쟁을 촉발시킨 사람은 세레브로브스키(A. S. Serebrovskii)였다. 세레브로브스키는 모간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모간” 학교(Morganist school of Soviet Marxist biology)를 세운 과학자로서, 그가 촉발시킨 논쟁에는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러시아 생물학자와 물리학자가 그 논쟁에 참여했으며, 이는 맑스주의 대 비맑스주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맑스주의 내부의 유전학 진영과 라마르크주의 진영의 대결이었다. 논쟁의 내용 또한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었으며, 맑스와 엥겔스의 노선에 따라 입장을 정하려 한 참가자는 거의 없었다.
1929년까지는 모간 유전학 진영이 라마르크주의를 압도했으며, 모간 유전학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소비에트 생물학 내 맑스주의 노선에 따른 적확한 해석이라 믿었다. 그러나, 같은 해, 스탈린에 의해 “거대한 단절(the great break)”이 선포되었고, 생물학 논쟁은 어이없게 종결되어 버렸다. “과학의 볼세비키화”라는 명목 아래, 소모적인 논쟁 대신 과학적 진리 판별의 유일한 기준으로 ‘실천(practice)’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실천’이란 개념은 거의 ‘실용’에 가까운 듯하다. ‘사회주의 생물학’은 최우선 과제로 소비에트 인민을 이롭게 해야할 의무를 부여받게 되었고, 그동안 논쟁되어 온 생물학의 문제는 농업 산출력에 의해 판별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동안의 논의가 용해되어 버렸다. 그 유명한 리센코주의는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서 태동할 수 있었다.

맺음말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볼 때, 리센코주의가 맑스주의의 자동적인 귀결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쿨락(M. W. Mikulak)에 의하면, 맑스주의 내에 있던 라마르크주의의 잔재가 일정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근거로 엥겔스 또는 티미리아제프의 라마르크주의적인 편향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다윈 또한 나이가 들수록 라마르크주의적인 편향에 물들어갔으며, 사회 다윈주의자인 스펜서와 같은 보수주의자들도 라마르크주의자였다. 그렇다면 리센코주의가 다윈주의의 영향도 받은 것인가? 사회 다윈주의의 영향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맑스주의는 하나의 공리적인 체계가 아니며, 그것을 주창한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의 다양한 입장들에 의해 구성된 체계이다. 그런데, 그것을 구성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 인물들이 가지고 있던 입장 하나하나를 맑스주의에 포함시킬지 말지는 애매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가 가졌던 라마르크주의적 편향을 맑스주의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아닌가? 이를 명쾌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엥겔스의 라마르크주의적 편향을 맑스주의에 포함시킨다면 리센코주의는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리센코주의는 맑스주의의 영향이라 할 수 없다. 만약 과학적 지식들을 사상시킨 순수한 형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가지고 따져보면 문제는 좀더 간단해질 수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전학과 라마르크주의 중에 무엇을 지지하는가? 변증법적 유물론은 순수한 내용 상에서는 둘 중에 어느 것과도 정합적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둘 중에 선택을 내릴 수가 없다.
리센코주의의 가장 큰 원인은 과학의 내용을 맑스주의 철학에 종속시키려 했던 1920년 말 당시 소비에트의 분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센코주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가졌던 생각 하나하나를 교조화시키면서 그것에 과학의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끼워맞추려 했던 것과 실용주의적 노선이 덧붙여지면서 벌어진 헤프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따라서 리센코주의는 엥겔스의 영향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엥겔스의 책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맑스주의의 내용 또한 과학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해간다. 만약 20세기 초, 라마르크주의적 진화론이 맑스주의의 내용을 구성했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맑스주의에까지 라마르크주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자. 철학,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들은 과학활동에서 제거되어야만 하는가? 하물며 종교는? 물론 과학의 발전에 아무런 추동력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철학, 이데올로기도 있다고 본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경우, 과거에는 과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과학에 전혀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맑스주의 철학과 이데올로기는 19세기부터 지금까지도 과학에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 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맑스주의자들은 진화론에서 ‘생존경쟁’이란 용어를 불편해했다. 그들은 ‘생존경쟁’이란 비유를 최대한 제거하려 노력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진화에서의 ‘협동’의 역할을 연구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항상 ‘생존경쟁’이란 용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주장할 때, 유전자가 ‘비유적으로’ 이기적이란 것이지, 개체가 필연적으로 이기적이 된다는 뜻이 아니란 점은 중요하다. 한편,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은 생물계의 협동이 경쟁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맑스주의자들은 생물계의 진화론이 인간사회의 역사에까지 직접 적용하는 것을 꺼려했다. 왜냐하면, 진화론의 직접적인 적용은 자유방임적 경제체제를 정당화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인간 본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날 보기에도, 인간의 역사에 생물학적 진화론을 직접 적용하는 것은 당연히 문제가 있다. 생물학적 진화는 유전자의 변이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인간의 역사를 생물학적 진화에 의한 변화로 보기에는, 인간의 역사는 너무 짧은 반면 변화의 폭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유전자의 작용 외에도 의식적인 작용에 훨씬 더 많은 부분 기대고 있다. 물론 역사변화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맑스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이 본래적으로 이기적이라는 식의 생물학적 결정론을 매우 불편해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자유롭고 협동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은 큰 장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기적 본성이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고 생각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본성도 함께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맑스주의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테제는 이를 잘 말해준다. 20세기 들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무척이나 격렬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간 본성은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 사이에서 환경 결정론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었다가, 지금은 둘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이 논의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철학과 이데올기는 세계에 대한 직관을 제공해주며, 과학자들은 그러한 직관을 바탕으로 과학활동에 임하게 된다. 그 직관이 때로는 증명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그러한 직관이 과학에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한 철학과 이데올로기는 유의미하다. 언젠가 그 철학과 이데올로기의 생명력이 다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실 명제와 당위 명제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흄의 논의를 그대로 이어 과학과 정치적 지향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영은 그러한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과학에는 언제나 도덕, 정치적 관념이 심어져(imbedded) 있으며,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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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규 2001, “진화론 논쟁에서의 신라마르크주의,” 한국과학사학회지 23-2, pp. 148-149.

분자생물학의 역사

hs_041130.hwp <과학사 통론 II 13주차 요약문>
분자 생물학의 역사(History of Molecular Biology)

날짜 : 2004. 11. 30  | 이름 :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Erwin Schrodinger, What is Life? The Physical Aspect of the Living Cell (Cambridge, 1944)

슈뢰딩거는 그의 책에서, 첫째, 양자역학의 중요성, 둘째, 비주기적 고체로서의 유전물질, 셋째, 음의 엔트로피를 섭취함으로써 죽음을 유예하는 유기체의 본질, 넷째, 새로운 물리학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을 부호화되어 있는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로 보았으며, 그것은 아마도 ‘커다란 비주기적인 고체’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물질은 확률적 열운동으로부터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커야 하며, 엄밀한 질서를 지닌 분자구조여야 한다. 그러나 결정은 매우 규칙적인 구조이므로, 결정의 각 부위는 어느 면에서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규칙적인 결정은 많은 정보를 부호화할 수 없다. 따라서 슈뢰딩거는 비주기적 고체에 승부를 걸었고, 그런 비주기적 형태는 생물의 발생을 통제하는 일종의 미시부호 ― 모스부호와 같은 ― 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주기적 고체의 양자 특성은 불연속적인 작은 변화들(양자도약), 즉 돌연변이들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의 비율은 생존과 동시에 진화가 일어날 만큼의 적절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예측했다.
한편, 슈뢰딩거에 의하면, “살아있는 유기체는 계속해서 자체 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죽음을 뜻하는 최대 엔트로피의 위험한 상태로 다가가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환경으로부터 계속하여 음의 엔트로피를 얻어야 죽음에서 멀리 벗어나, 즉 살아 있을 수 있다. 음의 엔트로피는 우리가 곧 보게 되는 바와 같이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유기체가 먹고사는 것은 음의 엔트로피이다.”

i) 사전적인 논의에서 질서와 확률적 열운동과의 관계를 논의하는 부분은 지금 봐도 인상깊은 서술이었음.
ii) 돌연변이를 설명하는 데에 양자역학까지 도입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 물론 나는 양자역학적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긴 하지만, 책에서 슈뢰딩거가 언급한 돌연변이에 대한 설명은 단순한 활성화에너지와 확률적 열운동 사이의 관계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듯 보인다.
iii) 환원주의에 대해 : 그의 환원주의적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 – “우리는 생명체가 보통의 물리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살아 있는 유기체 안에서 개개 원자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어떤 ‘새로운 힘’ 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물리학 실험실에서 검증했던 것과는 구성이 다르기 때문인지도 알아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열기관에만 친숙한 기술자가 전기모터의 구조를 검토한 뒤에 그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원리들을 좇아 그 모터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아내려 하는 태도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기술자는 열기관의 솥에서 친숙해 있는 구리가, 모터에서는 코일에 감긴 길고 긴 선 모양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레버와 막대기 그리고 증기실린더에서 그에게 친숙해 있는 철은 여기에서 구리선 코일의 내부를 채우고 있다. 그 기술자는 똑같은 자연법칙에 따르는 똑같은 구리와 철이라고 확신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점에서 옳다. 충분히 그는 구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일러와 증기는 없더라도 스위치를 켬으로써만 돌기 때문에 유령이 전기모터를 작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슈뢰딩거는 발전기의 전기모터로부터 유령을 배제하였던 것과 같이 유기체에서 ‘생명력’을 배제하였다.
iv) 슈뢰딩거가 생각한 새로운 물리학이란 : 분명치는 않지만, 세포 내용물들의 행동으로부터 발전기에서 작용하는 전자기력과 같이 신기한 법칙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듯(로버트 올비의 논문에서)
v) 슈뢰딩거의 결정론적인 귀결에 대해 : 결정론적인 물리학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로 보임.

Horace F. Judson, “Reflections on the Historiography of Molecular Biology,” Minerva 18 (1980), 369-421

이 글은 분자생물학의 역사를 다룬 문헌들에 대한 코멘트라 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분자생물학의 성장을 특징짓는 사고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생물학의 역사가 물리학의 역사에 기반한 기존의 관점을 교정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표준적인 관점과 그것의 단점 (Fleming과 Kendrew의 저작을 중심으로)
분자생물학의 성장에 대한 표준적인 관점은 몇가지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첫째, 물리학자 또는 물리학 기반의 학자들의 이주(보어와 슈뢰딩거의 영향: 보어의 영향은 생물학에서의 새로운 법칙 발견 위함, 슈뢰딩거는 환원적 경향), 둘째, 그들의 기존학자들(생화학자 또는 미시-생물학자)에 대한 불신 및 그들이 가지고 온 새로운 의제(분자 구조가 생리학적 기능을 해명할 것이라는 명백한 생각과 함께 거대분자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 : 결정학 등), 셋째, 정보이론(information)과 분자구조이론(conformation)의 두 흐름의 합류, 넷째,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유전자가 단백질이라는 확신의 폐기
비판 : 처음 두 가지가 분자생물학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은 명백하긴 함. 정보이론은 post hoc임. 단백질에서 핵산으로의 유전물질에 대한 방향전환은 (분자물리학이 아닌) 생화학 자체의 편견을 수정하는 일이었으며, 이를 해결한 것도 생화학자(Sanger와 Chargaff)들이었다.
1930년대, 생화학자들 사이에 단백질에 대한 강조. 단백질 없는 효소작용에 대한 Willstatter의 주장을 경멸하는 분위기. 핵산에 대한 방기(핵산은 4개의 염기가 단순반복적으로 결합된 물질이라 생각).

Avery와 때이른 발견에 대한 관념(Dubos와 Wyatt, Stent, 그리고 Hotchkiss의 저작을 중심으로)
Avery는 박테리아 연구. 박테리아 종 내에 다양성 발견.(1920년대) 특정 세포 환경에서 무독성의 박테리아가 유독성의 박테리아로 변형되어 증식되는 것 발견. 박테리아의 유전형질을 변형시키는 원리는 DNA밖에 없음을 발견(1930년대부터 인식) 그러나 Dubos는 왜 Avery가 발표(1944년)를 연기했는지에 대해 별 언급이 없다.
Wyatt는 Avery 연구논문에 대한 참조 분석(citation analysis)을 통해, Avery의 연구가 당시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무시되었다는 주장을 했고, Stent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파지(phage) 그룹 및 될브릭은 Avery의 발표 전부터 그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고, 1943년에서 1948 사이에 세계 유전학의 최고학자들은 Avery의 연구를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Hotchkiss가 보이길, 될브릭은 당시의 역설적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편으로는 DNA의 분명한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DNA가 바보같은 물질(stupid substance)라고 생각했다”

Chargaff의 비극
DNA가 바보같은 물질이 아님을 밝힘. DNA의 화학적 구성을 밝힘. 그러나 자신의 귀결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함. 즉, 첫째, DNA의 4가지 염기의 비율이 한 종에서는 똑같고, 다른 종에서는 다르며, 몇가지 종들간엔 유사하다는 것 발견. 둘째, A-T, G-C의 비율이 1:1임을 밝힘.
Chargaff는 Watson과 Crick이 이중나선 모형을 만드는 데 자신의 영향을 축소시켰다고 주장. 그러나 사실 Chargaff이 DNA의 구조에 대해 많이 고민한 것은 사실이지만, DNA가 두 가닥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음. Watson과 Crick이 얘기한 염기-쌍과 상보성은 Chargaff가 도달하지 못한 구조적, 삼차원의 결론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Chargaff는 그러한 개념을 먼저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즉, DNA 모형을 만든 것은 Chargaff의 규칙(염기 1:1)이 아니며, 오히려, 규칙(염기-쌍 규칙)을 만든 것이 모형이다. Watson과 Crick의 DNA 모형 자체가 바로 유전자에 대한 풀리지 않는 설명을 해결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화학적 특성과 생물학적 특성

서열 가설(Sequence Hypothesis)과 중심 교의(Central Dogma) : 57년 Crick의 논문에서
서열 가설 : DNA의 염기서열이 특정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에 대한 부호이다.
중심 교의 : 단백질에 들어간 정보는 다시 나오지 못한다.
그 당시 나타나서 오늘날까지도 지배적인 연구 프로그램을 선언한 것이라 할 수 있음. 기저에 있던 생각을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한 것임.

한 가닥의 역사
DNA의 에 대한 관심 이후 처음엔 한 가닥의 나선형 구조라 생각(Furberg).
Hotchkiss의 4염기설 분석 : 관측 및 실험을 통한 비율값이 아니라, 단지 자의적인 4염기설 이론에 의해 도출된 계산값임을 밝힘
염기서열이 곧 20가지의 아미노산과 대응될 것이라 예상. 2개의 염기로는 부족. 3개의 염기로는 남음. 염기서열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부호도 포함될 것으로 생각.
단백질과의 관계에서, DNA의 번역 직접? 또는 매개체? 단백질과 DNA 사이의 매개체는 RNA로 밝혀짐
그러나 Portugal과 Cohen의 RNA에 대한 서술 순서는 역사적 발견과 정반대임. 문제 있음.

Rosalind Franklin에 대한 과도한 평가
Franklin의 친구, Sayre의 Franklin 전기에서 남성적 과학자 사회에서 Franklin이 무시되었다는 주장. 너무 과도한 주장임.
Franklin은 탄원이 필요없는 훌륭한 과학자임. 다만, Wilkins 등과 마찬가지로 DNA의 구조가 2중나선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임.

편집상의 그리고 학문상의 와해
Olby의 저술. 수많은 오타와 시간배열 잘못. Franklin을 다루는 부분에서 중요한 부분(그녀가 DNA 나선에 대해 둘 혹은 그 이상이라고 믿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을 빼먹으며, 이미지 왜곡시킴. 편집상의 문제도 있겠지만, 학문적으로도 완전히 문제가 있는 저술임. Fleming이나 Kendrew의 진술을 단지 장식적으로만 차용.
“패러다임 전환”의 문제. 30년대에서 50년대 사이에 생화학 내의 각종 선입견들이 변화한 것은 사실. 그러나 Olby는 단순히 단백질→핵산으로의 유전자 개념 변화만을 다룸. 한편, Olby는 Central Dogma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 정확히 말해, Central Dogma는 ‘획득형질이 유전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재표현임

과학의 변형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은 생물학의 역사에 맞지 않음.
과학의 발전방식 : 새롭고 또한 변칙적인 발견은 국소적인 방식으로 이용되다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긴장과 또다른 발견 초래함.
오늘날의 생화학의 발전은 과학변화에 대한 대안적인 기술 제공.
이 과정의 한 양상 : 가설적인 긴장(tention of the tentative) – 새로운 설명, 새로운 사실 관계 등에 대한 심리적 태도
긴장 (기존에 것에 근처에 나타난) 새로운 것에 대한 효과 → 다른 관계들과 재조정 유발 → 때로 원래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놀라운 귀결을 동반하기도 함
이러한 설명방식에는 혁명을 언급하면서 무시되는 ‘모험의 보수성’을 보여줌. (새로운 이론은 적어도 기존의 성공적인 이론에 의해 정당화되어야만 함. 예: 보어의 대응원리)

Evelyn Fox Keller, “Physics and the Emergence of Molecular Biology: A History of Cognitive and Political Synergy,” Journal of the History of Biology 23 (1990), 389-409

물리학이 분자생물학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기술적, 지적 기여 외에도 다른 종류의 기여 ― 즉 물리학과 물리학자가 분자생물학의 성공에 사회적 권위와 같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더욱 중요한 공헌을 했음 ― 가 존재하며,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 그러한 권위는 물리학의 기술적 도구적 능력으로부터 얻어지나, 점점 그것을 넘어서서 발전하게 되며, 이는 생물학의 성격과 목표를 재구성하는 사회적 과정에 도입된 효과적인 자원이 된다. 이러한 (물리학으로부터의) 수입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 ― ①물리학의 의제 적용 ②물리학자들의 언어와 태도 수입 ③물리학자들의 이름 수입 ④심지어는 (물리학의) 순수한 전문기술조차 수입. 즉, 20세기 물리학과 물리학자들의 사회적 권력의 물질적 토대를 수입함으로써, 물리학의 대담함까지도 수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자극되었다.
저자는 물리학과 초기 분자생물학의 접합이 지식과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해 (베이컨적이면서 푸코적인) 이중적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주장하려 함.

분자생물학이란 무엇인가?
분자생물학은 DNA를 유전의 물질적 기반으로서 간주함으로써 시작? 분자생물학이란 DNA 내의 유전 정보의 분자 구조와 활성에 대한 연구를 지칭. 세 가지 결정적인 개념적 전환 ― ① 생명의 본질에 대한 재배치. 생명 활동의 중심을 개체나 세포가 아닌 유전물질, 즉 유전자에서 찾음. ② 생명의 재정의. 유전자 내에 부호화된 정보의 지령으로 재정의. ③ 생물학의 목적 전환. 관찰 → 실험과학, 묘사 → 통제 ― 에 의해 특성화되는 생물학의 한 하위분과.
위의 전환 과정에서, 물리학과 물리학자의 역할은?

워렌 위버(Warren Weaver)
분자생물학이란 용어를 만들어 냄. 1930년대 록펠러 재단의 자연과학 분과의 지도자. 물리학, 화학, 수학을 생물학 문제에 응용하는 역할. 물리과학의 지적, 기술적 능력을 생물학에 수입. 실험 물리학에 많은 부분 의존. 아직까지 생물학에 필요한 충분한 자극을 제공해주지는 못하였음.

뮐러(H. J. Muller)
물리학자라기보다는 생물학자. 그럼에도 그가 물리학을 고려할 때에는 고전 전자기 이론 정도가 아닌 물리학의 최신 이론, 특히 핵물리학을 지표로 삼았다. 본인은 고전 유전학자일 뿐이었지만, 앞으로의 개념적 혁명에 도움을 주었음.
생물학사에서 그의 중요성은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전환을 전제한 분자생물학 프로그램에 일찍부터 강하게 고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변이를 양자론에 의해 설명하는가 하면, 특히 생명의 궁극적 입자로서 유전자를 강조했다. 생물학의 주요문제에 생물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들 또한 참여할 것을 주장. 그러나 그의 주장은 주의를 끌지 못했다. 권위가 부족했기 때문.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944년, ‘생명이란 무엇인가?‘ 출판. 생명의 특징을 ’여러 세대에 걸쳐 그것의 구조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유전 물질의 특정한 능력‘으로 간주. 유전자를 (열운동에 견딜만한) 안정적인 물질로 간주. 될브릭의 ’비주기적 고체‘라는 용어 차용. 뮐러와 같이 불연속적인 변이에 대해 양자이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
슈뢰딩거의 언어는 뮐러의 것과 다름. “부호”, “부호-문자”, “패턴”, “질서로부터의 질서”와 같은 놀라운 신뢰성, 통계역학의 법칙으로부터의 탈출 등의 그의 이론적 용어 사용. 한편, 생명의 중심적인 문제에 관한 해결책이나 유용한 연구에 대한 제시는 하지 않음.
보어와 달리, 물리학과 생물학의 개념적 통일 가능하다고 공언. 생물학계에 큰 파장 일으킴과 동시에, 분자생물학에 대한 관심 유도. 유전정보에 관한 물리적 기초를 찾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과 희망 던져줌.
즉, 슈뢰딩거의 실질적 기여는 ‘내용’보다는 ‘목표설정’과 ‘태도’임.
한편, 왓슨과 크릭이 물리학에 (기술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권위를 얻기 위해서였음.

Lily E. Kay, “Cybernetics, Information, Life: the Emergence of Scriptural Representations of Heredity,” Configurations 5 (1997), 23-91

1950년대, 분자생물학 광범위한 변화 겪음 : 인공지능, 정보 이론, 컴퓨터와의 연계 속에서 스스로를 의사소통(communication) 과학으로 묘사하기 시작.
Jacob : “오늘날 유전은 정보, 메시지, 부호의 용어로 기술된다.” 또는 “유전 기능 – 컴퓨터의 메모리”. “조직, 세포, 분자 – 의사소통 망에 의해 통합”.
Aspay : 2차 대전 이후에야, 정보가 처음으로 과학적 연구에 적합한 물리적 파라미터이자 수학적으로 정의된 개념이 됨.
저자의 입장 : 유전을 정보의 용어로 기술하게 된 것은, 유전학 내부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이래 발전해온 정보이론에서 온 것임.
이 글은 정보 담론의 생산에 대해 진단.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의 새로운 장의 출현을 다룰 것임. 그것의 범위와 한계를. 첫째, Wiener의 cybernetics의 성장, 둘째, 의사소통의 수학적 이론과 Shannon, 셋째, von Neumann에 의해 체계화된 컴퓨터 이론과 자동자(automata) 이론, 넷째, Quastler의 생물학(과 유전)을 정보과학으로 개작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살펴볼 것임.

저자는 정보이론의 발전에 대해
– Wiener. 전쟁시기 포격 계산 과정에서 새로운 계산기 고안 → 정보전달과 작동체계로 이해. 생물학의 행동주의(behaviorism)와 연결. 유기체는 부호화된 메시지의 집합체, 즉 사이보그라는 개념 도입. 군사적 ‘통제’ 개념과 cyvernetics의 ‘정보전달’ 개념 동질화
– Shannon. 정보이론 일반화. bit 개념 도입. 정보의 양을 수학적으로 규정. 유기체의 정보전달도 기계적 정보전달과 비슷할 것. 정보 개념에서 의미론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짐.
– von Neumann. 생물학적 자동자 이론. 기본 요소와 그것들로 구성된 시스템 구분. 유전자는 ‘information tape’
– Quastler. 생물학을 완전히 정보과학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 정보를 통해 생물학적 특이성(specificity)의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주장.

1950년대 ‘정보’ 개념은 광범위한 분야에 인식론적, 기술적(description) 틀 제공하는 한편, 그 자체로 독자적인 학문으로 성장. 그럼으로써 분자생물학의 이론 및 실천의 구성요소가 됨. 한편, 복잡한 ‘정보’ 담론은 당시의 사회적 맥락(통제무기 및 자동화된 통제시스템에 대한 추구), 문화적 맥락(행동주의의 수용, 의미론의 사장 등 당시 학술문화적 분위기) 등에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정보’ 담론이 분자생물학과 전후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연결하는 매개로 작용했음.

Diane B. Paul, “Eugenic Anxieties, Social Realities, and Political Choices,” Social Research 59 (1992), 664-683

생명의학의 발전이 “새로운 우생학”을 부추길 것인가?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우생학의 부활에 대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에서의 경계의 목소리는 높지만, 우생학이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와 그것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분석이 없다. 이 글의 목적은 우생학에 대한 뻔한(일반적인) 인식 ― 우생학을 의도, 강제, 사회적 정책 등과 관련짓는 생각 ― 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우생학의 다양한 의미
시각에 따라 다양한 정의 가능. 의도 vs 결과.
우생학은 과학으로서 정의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목적을 가진 행위자와 관련된다고 가정되는 것이 일반적. 즉, 우생학은 과학이자 동시에 (누군가의) 목적적 행위이다.
이 때, 행위자를 사회, 국가, 조직 등으로 보는 경향에 의하면, 우생학은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정책에 가까움. (사회적 동기 중요) 그러나 우생학을 결과적인 용어로 정의한다면, 행위자는 개인 수준으로 내려가고, 이 경우 각각의 개인들의 행위에 따른 비의도적인 결과 초래(“back door” eugenics) 가능. (개인적 동기보다는 전체적인 결과가 중요) → 최근 들어, 전자보다는 후자에 대한 예측이 상대적으로 높아짐.
지금까지 우생학이냐 아니냐를 의도/결과로 경계짓는 방식에 대해 살펴봤다면(즉, 문제가 있다는 결론), 이에 덧붙여, 우생학이냐 아니냐를 “강제적/자발적”, “사회적/개인적”이라는 구분을 통해 경계짓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겠다. (결국, 우생학을 의도, 강제, 사회로 연결시키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보이려고 함)

우생학과 강제
우생학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하고, 강제가 아닌 교육, 설득, 권유의 방식으로 실행된다면? 자발적인 환경에서, 능동적 우생학은 배제하고 수동적 우생학만을 장려한다면? 이 경우 우생학으로의 “뒷문”은 없다. 경로는 여성의 태아에 대한 검사와 낙태 선택에만 의존.
정책이 강제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님. (사실 결정에 가치중립적인 방법이란 없음.) 전통적인 자유주의자 또는 현재의 보수주의자에게 위와 같은 방식은 강제가 아니지만, Green 전통의 자유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에게 위의 방식은 강제와 같다.
결국, “강제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강제 또는 자발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충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아예 반대로 태아 검사와 낙태를 모두 금지시킨다면? 이번엔 여성의 선택에 대한 자율성을 건드리게 된다.

우생학과 사회적 목적
종종, 어떠한 정책을 우생학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그 방법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근본적 이유(목적)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 우생학은 불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많은 유전학자들은 여전히 인류의 생물학적 질을 높이는 것이 가치있는 목적이라 확신하고 있으며, 우생학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중립화시키는 방법을 찾았고, 그로부터 유전 상담이나 태아식별 등의 의학기술이 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을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우생학”은 증오한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뭔가?
유전학자들의 연구의 변화 : 사회적 유전자 풀의 질 향상 → 가족, 개인의 안녕.
과거의 (나쁜) 사회적 우생학에서 새로운 (좋은) 개인적 우생학으로 전환된 것인가?
개인적/사회적 구분이 좋다/나쁘다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 구분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개인적인 선택 또한 사회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결국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만 하다. 또한 최근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윤리관이 예전의 윤리관을 대체해감에 따라 태아 진단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지진아에 대한 부모의 불임술 요구 사례는 어떠한가? 또한 자녀출산에 대한 선택권의 문제는 어떠한가? 또한 성감별 출산의 문제는 어떠한가?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권은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는 추세. 하지만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출산, 국가, 그리고 시장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 사회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Wright는 국가가 출산의 선택에 개입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고 말함.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를 중시했던 Mill도 사적인 출산과 양육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라는 점 인정.
하지만 아동 노동 및 아동 학대의 경우에는 ‘한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아동)의 이익 및 자유 침해’의 문제로 사회적 개입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출산의 문제는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출산 결정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평가는 개인마다 다를 것임. 어떠한 정책이든 어느 한 편의 가치를 옹호하게 마련이며, 사회적 대립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갈등은 출산 결정을 개인에게 맡김으로써 해소될 수 있긴 하지만, 보통 정치의 영역이 감소하면 시장이 확장되기 마련이다.
생명 의학의 발달에 따른 쟁점들은 매우 다루기 어렵다. 개인에게 모든 것을 맡길 경우 사회적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에 대해 정치가 관여하지 않을 경우, 궁극적으로는 시장이 모든 것을 점령하게 된다.

Susan Wright, “Recombinant DNA Technology and its Social Transformation, 1972-1982,” Osiris 2 (1986), 303-360

1972년, DNA 재조합에 의한 유전자 조작의 가능성이 처음 얘기되었을 당시만 해도, 분자생물학은 주로 순수 연구에 치중되어 있었다. 1970년대 동안 DNA 재조합 기술의 실용적 잠재력이 드러남에 따라, 분자생물학에 대한 사적인 지원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많은 분자생물학자가 사기업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발전. 대학도 다국적기업들(화학, 석유, 제약)과 연구 계약 맺음. 연구의 실용적 이익은 빠르게 상업적 후원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어감. 원래 분리되어 있던 “기초”와 “응용” 연구는 인슐린이나 인터페론과 같은 상업적으로 중요한 물질을 생산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빠르게 융합. DNA 재조합 기술의 이용이 일차적인 상업적 목적이 되어감에 따라 연구 규범과 관행도 변화. 즉 기초연구 영역에 있었던 것이 사회적 변형을 크게 겪게 됨.
이러한 변화증상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 초의 기간에 잘 드러남. 이 글은 변화의 과정을 진단하고, 그것을 추동한 사회적, 기술적 조건을 정의하고자 한다. 주요 질문 : 왜 이러한 변화가 불쑥 나타나게 되었는가? 왜 분과 구성원들로부터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는가? 주장 : 1970년대 초, 분자생물학의 특정한 기술적 사회적 특성이 실용적 적용에 알맞게 무르익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 부족. 그 기간의 경제 및 정치적 환경에 대한 설명 필요. 특히 국가에 의한 강력한 상업화 유인책에 대한 설명 필요. 추가적으로 대기업의 역할에도 관심. 70년대 말 80년대 초, 작은 유전공학 기업이 자신을 그 분야의 선도적인 위치로 정립하려고 했고, 이것이 일차적인 빠른 상업화의 추진력으로 보임. 이러한 기업은 인적으로는 대학에 재정적으로는 다국적 기업에 많이 의존함. 1980년대 초까지 실질적인 통제권은 작은 유전공학 기업보다는 다국적 기업에 있었음.
편의상 구분했던 “기술적”, “사회적” 구분 오해의 소지 있음. 분자생물학에서의 기술과 사회는 매우 밀접히 엮여있음. 분석적으로만 구분 가능. 실재적으로, 기술적 발전은 사회적 이해관계에 강한 영향 받아왔고, 사회적 이해관계는 기술 발전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DNA 재조합 기술 발전의 연속적인 다음 상태는 기술적 혁신과 투자한 산업, 재정적 영역의 반응 모두와의 관련 하에 결정됨. 따라서 설명 소스 다양. 연구논문, 신문기사 등등. 이러한 자료들은 기본적으로 수렴.
DNA 재조합 기술에 대한 상업적 반응에 대한 설명은 각종 산업 자료에 의존. 기술발전에 대한 설명보다는 불완전. 여기서는 분자생물학에 대한 상업적 이해의 효과에 집중.
DNA 재조합 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역사적 논쟁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음. 정부정책과 연관되고, 이것이 또한 투자계획에 영향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발전에 중대한 장애가 아니었음. 투자자의 주된 관심은 기술의 실현가능성, 시장의 크기, 투자에 대한 이윤이었지 정부의 규제가 아니었다. 정부의 기술의 안정성에 대한 통제는 사적인 자발적인 영향을 넘지 못했으며, 기술 발전에 따라 (정부통제는) 사라져갔다. 일반적으로, 기술의 위험성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상업적 발전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1. 유전 공학에 대한 기대, 1952-1970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발견 이후, 이론적 발전도 성취. DNA 조작 기술 예상. 그러나 아직까지 실제로 적용가능한 응용 기술은 등장하지 않음. 연구 자금의 투입 필요. 미국의 경우 국가적 지원이 커짐. 의학의 발전에 대한 기대 때문.

2. 첫 번째 유전자 접합 실험, 1969-1973
세포에 DNA 삽입하는 기술 개발. 플라스미드와 바이러스 이용하는 방법. 특정 효소의 DNA 자르고 붙이는 작용 발견. Lederberg 박테리아에서의 유전자 접합 실험 성공. 이러한 실험은 기초, 응용 양면 지님.
i) 기술 : 유전공학에서의 많은 연구 성과 나타남. 산업적 응용 가능성 인식 시작.
ii) 사회적 반응 : 유전자 접합 실험 성공에 대해, 유전공학의 발전가능성과 산업적 응용 가능성 인식. 우려의 목소리도 있음. 연구범위 제한의 의견도 나옴. 그러나 기술 발전. 영국의 ICI는 대학과 협동연구 시작. 이후 많은 대학들도 따라함.
iii) 언론 : 1974년 이전까지는 거의 관심 없음. 1974년 New Scientist에 실린 기사 이후로 상황 달라짐. 그 이후 DNA 재조합 기술의 상업적 이용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유명 언론에 여럿 실리는 한편,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함께 다룸.

3. 상업적 미래에 대한 전망, 1974-1976
i) 기술적 발전 : NIH에서 거금의 예산을 동원하여 여러 프로젝트 수행. control, amplification, generalization, expression의 목표. 5가지 기술(새로운 vector 조립, 클로닝을 위한 DNA preparation, 특정 단백질 포함한 박테리아 콜로니 선별, 분자적 수준에서 DNA 규정, vector로의 정확한 DNA 절편 삽입)
ii) 상업적 반응 : 일반적으로 조심스러웠음. 기업에서 이 분야에 대해 흥미를 가지긴 했지만, 투자액 적음. 대학의 연구 상황 보아가며 판단 유보.

4. 유전공학의 사업 무대(arena)으로의 진입, 1976-1979
i) 기술적 발전 : 1977년, intron의 발견. 고등생물의 유전자 구조가 박테리아와 다름. 유전공학에서 기술적 장애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동물 단백질을 박테리아로부터 합성하는 데 성공. 이러한 기술과 함께 유전자 접합, 합성, 클로닝 등의 기술도 더욱 발전. 성장호르몬, 인슐린, 인터페론 등의 생산에 관련된 유전자를 포함하여 다양한 동물 유전자에 대한 표현 가능해짐.
ii) 상업적 반응 : somatostatin 실험 이후 많은 자본 유입. 기존의 대기업(Standard Oil of India 등)의 참여 뿐만 아니라 신생기업(Genex 등)도 생겨나 경쟁에 참여함. 대기업은 방어적 자세. 신생기업 모험적 투자. 치열한 경쟁으로 유전공학 고도 성장 거듭.
iii) 새로운 연구 풍조 : 전통적인 순수 연구의 흐름에서 벗어나 기업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연구 풍토가 생겨남.

5. “클로닝 골드러시”, 1979-1982
i) 정치경제적 환경 : 새로운 기술을 통제하려는 정부와 의회 vs 자유로운 연구와 기술혁신. 후자의 승리? 1979년 정책 변화. 기술혁신을 촉진, 대학과 산업의 연결 강화. 컴퓨터, 전기통신, 항공기, 제약 등의 새로운 산업 각광받는 상황에서, 유전공학도 관심의 초점이 됨.
ii) 기술적 발전 : 민간 투자 급증. 새로운 구조의 Z-DNA 발견. 진핵세포에 관한 많은 양의 새로운 이해 얻음. “생물학 혁명”
iii) 상업적 이해 : 높은 수익률. 높은 투자율. 경쟁 치열.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 증가와 공급의 부족. 1979년 이후, 정부의 강력한 후원. 발전 가속화(특히 미국). 82-84년에 이르면 소강상태로.
iv) 상업적 이해의 확장 : 1979-1984 기간 동안, 유전공학의 상업적 개발 경쟁은 대학실험실이나 유전공학회사의 범위를 넘어 확장. 거대기업, 투자자, 대학, 주, 주정부 등으로 확장.

6. 새로운 생물학의 사회적 기초
상업적 이해관계의 영향으로, 지식은 공공 재산이라기보다는 사적 재산이라는 인식 굳어짐. 연구의 성과는 특허. 비밀주의 확산. 대학은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사이에 갈등. 내용에 있어서도, 기초 연구와 응용 연구를 통합. 그 경계를 모호해짐.

7. 결론
위와 같은 이유와 과정에 의해, 분자생물학은 상업과의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빠른 성장과 내용적 변형을 겪게 됨.

[과학사통론2] 원자 폭탄

hs_041123.hwp 과학사 통론 II 12주차 요약문>
원자 폭탄(Atomic Bomb)

날짜 : 2004. 11. 22  | 이름 :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Feynman’s recollection in Feynman, Richard P. “Los Alamos from Below,” in Lawrence Badash et al.. eds.. Reminisciences of Las Alamos, 1943-1945 (Boston: D. Reidel, 1980), pp. 105-132

밥 윌슨의 제안으로 프로젝트에 참여.
로스 알라모스의 준비기간 동안 시카고에서 폭탄에 관해 필요한 정보 알아왔음.
은밀히 로스 알라모스로 이동. (파인만은 그냥 주의 안하고 감)
도착해보니 아직 집, 기숙사, 실험실조차 완전히 준비 안되어 있었음.
그래도 이론물리학들은 곧바로 일을 할 수 있었음. 매일같이 연구하고 책을 읽었음. 매우 열광적인 시기였음.
한스 베테의 말상대가 되어줌으로써(그의 말에 반박해주었는데 그거이 마침 그에게 필요한 것이었음) 점수를 따고 베테 밑에서 네 명의 사람을 거느린 그룹 책임자가 되었음.
기숙사 완공. 2인 1실이었는데, 혼자 살고 싶어서 아내의 잠옷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못들어오게 했음. 이것 때문에(그때는 몰랐지만) ‘남자기숙사에 여자가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이 생겼고, 평의회의 대표로 선출됨. (상층부까지의 보고 및 아래까지의 명령)
검열 문제. 아버지와 아내의 편지에서 암호. 암호는 안된다는 규칙 생김. 검열당국과 신경전(게임) 벌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 통과되고 어떤 것이 통과될 수 없는지 정확히 알게 됨. 이런 경험을 토대로 다른 사람과 내기를 해서 돈을 따기도 함.
개구멍 생김. 정문으로 나가서 개구멍으로 들어오는 식의 행동 반복. 구멍이 있다고 설명. 구멍에 대한 편지 통과시킴.
케메니의 출신성분을 두고 엄하게 심문했던 일에 대한 편지 통과시킴.
파인만은 언제나 문제를 직접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지적하려고 애썼다. 문서보관의 문제. 문서를 꺼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문제 지적했음. 번호로 된 자물쇠 열기 시도. 간단한 번호 및 그 사람의 취향을 토대로 모든 사람들의 자물쇠 열었음.
자연 우라늄으로부터 우라늄235를 분리해내고 측정하기. 에밀 세그레가 측정방법을 보내도 실패. 직접 가봐야 했음. 서로서로 오가는 정보 아무것도 없음. 군인들 아무것도 모르고 안전에 대해 전혀 주의 기울이지 않음.
오펜하이머가 세그레에게 “공장 전체를 주의깊게 조사해 보시오. … 그동안, 우리는 그곳에 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양의 물질이 한 곳에 모여 있을 수 있는지 계산해 보겠소” 두 개의 그룹 활동. 크리스티의 그룹은 용액으로된 물질에 관해 연구. 나의 그룹은 상자 속의 마른 가루로 된 물질에 관해 연구. 우리는 그들이 얼마 만큼의 물질을 한 곳에 안전하게 축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계산을 했다.
오크리찌의 공장상황 살피러 갔음. 너무 많은 상자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음. 해결책. 물 속의 중성자들을 흡수하기 우해 용액에 카드뮴을 집어 넣고, 그리고 어떤 법칙에 따라 상자들이 너무 밀집해 있지 않도록 분리시키면 됨. 그곳의 장군들과 기술자들에게 설명했음. 상세한 것 알리지 말고, 수칙만 말해달라고 했지만, 파인만은 ‘이해를 해야 규칙을 따를 수 있고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로스 알라모스에서는 오크리찌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단 말입니다!’고 말함으로써, 대단한 효과 발휘.
공장 다시 설계. 한 개의 밸브가 막히더라도 문제가 없도록 어디서나 적어도 두 개의 밸브 필요했다. 그런데 파인만은 청사진을 볼 줄 모름. 대충 해결.
계산기(컴퓨터)의 문제. 고장 잦음. 모든 계산기 고칠 수 있게 됨. 폭탄의 내파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는 지를 정확히 알아내야만 하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방출되는지 등등을 정확히 알아내야 함. 많은 계산 요함. 프랭켈이 IBM 기계로 계산 가능하다는 것 깨닫고, IBM에 기계 주문. 스탠리 프랭켈, 나, 다른 한 사람이 기계 조립. 수리공 도와 완성.
프랭켈, 컴퓨터 병으로 고통. 파인만, IBM 그룹으로 옮겨가라는 명령 받음. (계산)
IBM 기계를 움직이는 어린 기술부대. 군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해주려 하지 않음. 파인만은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 강연. 그들은 모두 흥분해서 “우린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것이 무슨 일인지 알겠다!”라고 소리 지름. 그 후 그들은 작업방법 개선시켰고 밤에도 일함. (목표와 내용을 알아야 최선) 일의 진척속도 엄청 빨라짐. 한달에 두 세 개씩 문제 해결.
원폭실험 직전.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방출될 것인가?” 힘든 계산. 한달 안에?
아내 결핵. 기숙사의 친구에게 차를 빌리기로 약속. 크라우스 퍼크. 그는 스파이였고 로스 알라모스에서 산타페까지 원자 비밀을 가지고 가는데 자동차를 사용해왔다. 긴급한 일 닥치고 퍼크의 차를 빌려 알버커키로 향함. 겨우 도착했지만, 아내는 몇시간만에 죽음. 시계 멈춤. 과학적 설명. 무척 우울해지지는 않음.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 수개월이 지나서야 울었다.

처음에 말단에 있던 파인만, 후에 그룹 책임자가 됨. 그리고 몇 명의 위대한 사람들 만남.
페르미. 계산과 설명.
폰 노이만. 사회적 (적극적) 무책임감 키움.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줌.
보어. 보어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인만을 높게 평가. 파인만은 자신이 어떤 사람과 말하는 중인지 통 알지 못했다. 물리학 자체에 관한 걱정 속에서 직설적으로 말할 뿐. 그런 식.. 훌륭하고 유쾌한 일. 행운이다.
원폭실험. 실제로(맨눈으로)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은도금이 된 공. 그것은 플루토늄. 지구상엔 존재하지 않았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가치있는 것이다.
원폭실험 성공. 밥 윌슨 침울해 함. “우리가 지독한 일을 저질렀어요.”
알다시피 내게 일어났던 일은 ‘좋은 이유’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달성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바로 즐거움이요, 흥분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밥 윌슨이야말로 그때까지 그 일에 대해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옴.

Joseph J. Ermenc ad.. Atomic Bomb Scientist: Memoirs, 1939-1945, Interviews with Werner Karl Heisenberg, Paul Hartech, Lew Kowarski, Leslie R. Groves, Aristid von Grosse, C.E. Larson, (Westport: Meckler, 1989), pp. 1-75 (Heisenberg)

하이젠베르크 : 핵분열 시 중성자 나오면서, 연쇄반응 가능하다. 이를 통해 폭발 얻을 수 있다. 원리적으로는 가능하나,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 아무도 몰랐다. 실제로는 모두들(페르미 등과의 토론에서) 회의적이었다. 분열 당 튀어나오는 중성자의 평균이 1보다 크다면 연쇄 반응 만들 수 있다.
39년 플루게의 논문에 다수 흥미가졌고, 독일 국방부에서 그에 관심을 가지고 핵분열 연구 결정했음. 나는 39년 라이프찌히에 돌아왔고 군당국으로부터 우라늄 연구팀에 합류할 것을 지시받았다. 우리의 임무는 우라늄이 폭발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기술자와 물리학자 사이의 갈등? 추상적 물리학(유대 과학)에 대한 적대감 또는 무시 있었음. 그러나 기술자는 전체를 볼 수 없고, 핵분열에 대해 아무것도 모름. 내가 우라늄 프로젝트의 책임자라는 것은 과장. 이론가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난 프로젝트의 책임자도 아니며, 아무런 공식적 책임도 없었다. 난 이론물리학자일 뿐.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제안만 할 수 있을 뿐.
나는 페이퍼에서, 다른 이들의 연구논문이 옳다면 연쇄반응을 얻을 수 있고, 원자로를 지을 수 있으며, 순수한 우라늄-235을 얻거나 원자로를 작동시켜 그와 비슷한 물질(반년 지난후 알게된 바로는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면 폭발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원자로 배치에 대한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 팀은 실험물리학자가 주도했다. 여러 그룹들이 가벼운 경쟁을 하긴 했지만 심한 불화, 불일치는 없었다.

돈문제 : 전쟁 전엔 열악했지만, 전쟁 중에는 풍족해졌음.
라이프찌히 그룹의 되플(Dopel) 부부와 연쇄반응 실험 성공(L-4 : 중수 속에서 우라늄 화염.. 뜨거워지다 폭발). 흥분.
당시 물리학자들의 심리적 상황 : 처음으로 재정지원을 받으며 연구 수행. 그 상황을 계속 이용하고 싶었다. 정부는 우리를 전쟁에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물리학을 위해 전쟁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원자폭탄을 만드는 것은 원리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만드려면 오래 걸릴 것(5년 또는 그 이상)이라 예상했고, 그 전에 전쟁은 끝날 거라 예상했다. 그러한 상황 인식에서 우리는 그 방향(폭탄개발)으로 진지한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다. 39년 12월 실용화 계획안을 작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너무 오래 걸린다고 하면 지원이 소홀해질 것이라 예상. 조심스럽지만 만들 수 있다고 함. 우리는 전력발전용 우라늄 원자로를 개발하려 했고, 이는 전후 중요한 에너지원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도 우리와 마찬가지 인식일 것이라 예상했다. “나는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며, 독일이 질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전후에 관심이 있었다.” 반면, 당신들(미국)은 빨리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당신들도 45년에야 만든 거 아닌가..) 우리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방향은 피했다. 우리는 단지 연구용 돈이 필요했을 뿐. 누군가 “이제 원자폭탄을 만듭시다”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단, 연구의 책임권한을 다른 그룹(특히 Deibner)에게 뺏기지 않도록 조심하긴 했다. 그들을 의심하고 조심하면서 그들과 협동했다. 미국 프로젝트와의 차이는 원자폭탄의 개발가능성 및 기간을 다르게 보았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군 당국은 핵보다는 로켓에 더 지원.
Irving의 저술 : 사실은 맞지만, 정신은 틀렸다. 그는 우리의 심리상태를 잘못 파악. 전쟁 중, 그는 우리가 전쟁승리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라 추론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원자로 개발에 흥분했지만 그 이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전쟁 또는 원자폭탄과 관련짓지 않았다. 독일에는 진정 원자폭탄에 관한 것이라고 부를만한 프로젝트가 없었다.
바이스재커의 아버지 : 레지스탕스. 보어의 안전 도모해 줌. 보어가 미국으로 간 이후, 조사받았음.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복잡하다. 기술, 과학 함께 발전했다. 나는 기술(무기)발전에 의해 정치적 단위 커질 것이라 예상.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전쟁중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다. 상황논리일 수 있으나, 그는 원자로 연구에 매진했으며, 절대 원자폭탄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또는 그에 관심이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가 개발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면? 그땐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될 것 같다.

Los Alamos Laboratory 50th Anniversary atricles(#1-#24) [http://www.lanl.gov/worldview/welcome/history.html]

맨하탄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폭탄개발 완료 시점까지의 상세한 서술.
로스 알라모스의 실험실은 2차 세계 대전 중반에 설립. 과학적 무기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으며, 전쟁 이전 또는 중에 유럽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해 온 것이 기반이 될 수 있었음. 그들은 사이클로트론이나 입자 가속기 등에 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원자폭탄 개발의 핵심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으며, 실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2년 여름, 오펜하이머가 이론 물리학자 여름 학회 개최. 원자폭탄 개발 논의 시작.
그 이후, 오펜하이머와 존 메리는 여러 지역에 산개해있는 연구들 관리. 그러나 보안의 어려움 때문에 한 곳에 집적시키기로 함.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로스 알라모스 실험실.
핵무기 프로젝트의 감독에 Gloves 장군 임명. 프로젝트 명칭 ‘The Manhattan District’로 개명. 대규모 실험실 짓기로 결정. 독단적이긴 했지만, 효과적이었음. 과학자인 오펜하이머와 함께 계획 입안. 지리적 조건을 조사하여 결국 로스 알라모스 결정.
최초로 연쇄반응을 보였던(증명은 다른 사람이 했음) 엔리코 페르미가 미국으로 이민. 연쇄반응 이론은 원자폭탄의 원리이기도 하면서, 플루토늄 생산의 원리이기도 함. 따라서 그는 프로젝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
Ranch School을 주거공간으로 사용. 또한 많은 건물들 지음.
Groves는 과학자들에게 제복을 입히는 등 군사적인 성격 강조. (시간이 지나면 약간 옅어짐. 예를 들어 Military Laboratory는 후에 academic outpost로 바뀜)
짧은 시간 내에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하는 임무. 고용된 과학자와 기술자의 수 증가. 군사적인 시스템으로 굴러감.
보안상 bomb 대신 gadget라는 용어를 사용.
1943년 봄. 첫 번째 핵무기의 연구를 시작. 관리 위원회 구성.
핵무기 제작에 Gun type 도입. 핵물질을 임계질량 이하의 두 개로 나눈 다음 빠른 속도로 서로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초과하게 만들어 기폭시키는 방식.
우라늄-235 vs 플루토늄
1943년 7월. 첫 번째 플루토늄이 로스 알라모스에 도착.
계산기(컴퓨터)의 도입. 엄청난 양의 계산이 필요했기 때문. (전쟁 상황이 계산기 발명에 영향 주었을 것)
1943년 10월, Special Engineering Detachment(SED) 조직. (파인만 글에 있었던 부대) 군대에 징병된 고급인력 활용책이었으며, 로스 알라모스의 인원이 부족하기도 했기 때문.
우라늄-235 vs 플루토늄-240 => Trinity(플루토늄) 테스트 성공.

S.S. Schweber, “The Empiricist Temper Regnant: Theoretical Physics in the United States, 1920-1950,” HSPS 17(1) (1986), pp. 55-98

1920년대부터 미국의 물리학은 변화하기 시작. 20년대부터 이론 물리학이 서서히 성장해가긴 하지만, 그것이 독자적인 분야로 정립하기보다는 실험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상호발전하게 되었다고 함. 당시 이론물리학이 발전하게 된 이유로는 물질 이론이 정교화해감에 따라 이론물리학자들의 유용성이 인정되면서 그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점과 유럽에서 물리학자들이 대거 망명해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경험주의적, 실용주의적인 철학, 대학의 학부제도, 그리고 당시의 전쟁 상황은 이론 물리학을 실험 및 실용성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발전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으로, 이론 물리학은 순수학문으로 인정받는 한편, 미국 물리학에서 이론과 실험간의 긴밀한 협동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다.

1. 철학적 개요
실용성! [철학, 이론 -> 실험] 보다는 [실험 -> 철학, 이론 적용]
문화적 요인 있을 것. 사회적 부의 창출에 대한 요구. (역사적으로도 이론보다는 실험이 발달).
조작주의. 관측결과가 ‘의미’에 영향. -> 오펜하이머에 영향
설명(explanation)보다 기술(description) 강조. (특히 빛의 이중성에 대해)
이론의 철학적 해석보다는 현상에 대한 설명(기술)과 예측에서의 유용성 강조 (특히 양자역학에서)

2. 제도적 요인
대학 내에 이론분야와 실험분야가 한 학부에 함께 속해있음.
이론 물리학자도 실험 관심. 실험 물리학자도 이론의 중요성 인식 -> 유럽의 학자들 초청 강연. 이론과 실험을 배우는 학생들 유럽으로 유학 과정 이수.

3. 30년대
30년대 물리학 성장 두드러짐.
30년대 초, 이론 물리학자들이 대학에 정착. 대학원생 꾸준히 양성. 이론 물리학도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섬. (예: 미시건 대학의 이론 물리 심포지엄 개최) 한편, 유럽의 물리학자들 미국으로 대거 망명해옴. 그러나 그들은 미국의 분위기를 바꾸기보다는 그 분위기에 동화해감.
한편, 핵물리학의 발전은 이론과 실험의 관계가 매우 밀접해지는 계기가 되었음.

4. 오펜하이머와 그의 학파
오펜하이머는 원래 이론 물리학자. 그러나 실험 물리학과의 협동 연구의 중요성 간파. 특히 전쟁 기간 중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서, 이론과 실험을 조화시키는 방법 완전히 체득. 이러한 오펜하이머 지도 아래 많은 대학원생 양성됨. 이론과 실험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자리를 잡게 됨.
이러한 사례는 20-50년대 미국 물리학의 변화를 대표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음.

5. 전쟁과 전쟁 이후의 기간
전쟁이 대학의 연구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침.
연구의 대형화 (로렌스 실험실 등)
이론 물리학자들에 대한 존경 -> 이론 물리학이 순수 학문으로서 인정. (파인만의 QED)
한편, 이론 물리학자들은 실험과의 협동 강조했으며, 전시의 이론과 실험의 긴밀한 협동은 전후 미국에서 자리를 잡음.

Mark Walker, “National Socialism and German Physics,”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24 (1989), 63-89

독일의 국가 사회주의는 독일 물리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보통 국가 사회주의로 인해 독일 물리학이 쇠퇴했다는 평가 또는 독일 물리학이 국가 사회주의에 복무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어떠했는가?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레나르드, 슈타르크 등이 이론물리학을 유대 물리학이라며 비난하였고, 실질적으로 대다수 물리학자들이 정치적으로 난처한 처지(유대인이 아닌 하이젠베르크에게까지 White Jewish라는 비난)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이젠베르크 등의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한편, 정부와 군당국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실제로 정부와 군 당국은 이론 물리학에 대한 반감이 있긴 했지만, 그것의 실질적인 필요성(무기 제작 등)을 인정했으며 그들을 전쟁에 이용하고자 했다. 한편, 물리학자들도 계속 다투기 보다는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연구 지원 등)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결국 그 둘의 상호 협력하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정치적으로 난처한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 프랜텔 등은 국가와 타협을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의 소장이 되고, 프랜텔은 공군과 접촉하여 물리 교육과 군사에 있어 물리학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이들은 각종 공식 석상 및 각종 문헌에서 전쟁에서의 이론물리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정부도 그들의 필요성 인식하고, 그들의 연구(특히 핵분열 연구)를 대폭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로 옹호되기까지 한다.(오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결국, 레나르드와 슈타르크의 추종자들을 패배시키기 위해 하이젠베르크, 프랜텔 등은 국가 사회주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옹호하고 정당화한 것이며, 결국 그들은 승리했다.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과학사통론2] 양자역학

hs_041116.hwp <과학사통론 II 11주차 요약문>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

날짜 : 2004. 11. 16  | 이름 :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N. Bohr, “The Quantum Postulate and the Recent Development of Atomic Theory,” Nature 121 (1928), 580-590

원자현상에 대한 고전물리학의 근본적인 한계로부터 양자이론 출발.
양자 가정 : 본질적 불연속성, 개별성
양자 가정의 함축 : 원자현상을 다루는 데 있어 인과적 시공간 좌표계 포기, 원자현상을 다루는 데 있어 관찰할 때 관찰의 대상은 원리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관찰행위와 상호작용
양자 가정의 귀결 : 상태정의엔 외부개입이 있어서는 안되지만, 관찰과정에서는 개입이 필연적. 따라서 ‘모호하지 않은’ 상태 정의 불가능. 그리고 인과성에 대한 질문 불가.
* 시공간 좌표계와 인과성 사이에 상보적이나 배타적인 특징 나타남.
양자 가정 하에서, 첫째, 시공간적으로 기술하려 시도하면 통계적 고려만 가능해지고, 둘째, 완전한 인과성 고려하면 시공간적인 기술 포기해야 한다.
물질에 대한 시공간 내에서의 파동적 기술을 시도할 경우 : 시공간 초월.. unsharpy 개별성 및 인과성 귀결 (드브로이-슈뢰딩거)
인과적 고려 하에 개별 입자 운동 기술을 시도할 경우 : 인과성 초월.. 파동-장(wave-field)의 시공간 확장 귀결 (하이젠베르그)
대응원리 및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적 기술 ↔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적 기술
두 종류의 정식화는 파동적 기술과 입자적 기술 사이의 상보성으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 보존 등의) 인과 수용한 원자의 정상상태 기술 : 시간 기술 포기. 특정한 에너지 정의, 정상태의 초역학적 안정성 표현
정상상태의 개념과 개별 전이과정은 개별입자의 개념만큼 실재성 가짐.
기본입자의 문제 : 많은 어려움과 시도들..

N. Bohr, “Light and Life,” Nature 131 (1933), 421-23, 457-59

J. Stark, “The Pragmatic and the Dogmatic Spirit in Physics,” Nature 141 (1938), 770-772

Paul Forman, “Weimar Culture, Causality, and Quantum Theory, 1918-1927: Adaptation by German Physicists and Mathematicians to a Hostile Intellectual Enviroment,” HSPS 3 (1971), 1-116

막스 재머는 ’19세기 후반의 몇몇 철학사상들(우연론, 실존주의 등)이 현대 양자이론의 새로운 개념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양자역학(1925년경)과 위의 철학사상은 시간적으로 25년이라는 간격이 있다. 그 기간사이에 많은 독일어권 물리학자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연구내용상의 발전과는 관련없이’ 인과율을 거부했다.
필자는 사회학적 접근법을 이용해, 그 변화를 인과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설명을 위해서는, 독일의 당시 지적환경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 바이마르의 지적환경은 물리학, 특히 인과율에 적대적이었다. 독일의 패전 이후, 바이마르의 지적 경향은 신낭만주의적 실존주의의 ‘생의 철학’이었고, 분석적 합리성, 정밀과학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수학자와 물리학자는 이러한 환경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반적인 반응은 ‘과학 내부로 그리고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속으로 자신들을 가두어 버리며 그 분야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적 환경에의 적응도 서서히 이루어진다. 특히 그들과 그들 분야의 지위가 낮아지고 있을 때에는 무언가 대항할 수단을 취해야만 한다. 그러한 대항수단은 일반적으로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를 대중의 변화된 가치와 조화되도록 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독일 과학자들은 강연이 많았는데, 그러한 강연에서 과학자들은 실증주의적 개념들을 거부하고, 과학연구에 대한 공리주의적 정당화를 거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과학활동의 가치와 가능성 자체마저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과학자 사회의 적응은 ‘이데올로기’ 차원에만 한정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실질적인 ‘학문적 내용’에까지 미쳤던 것일까?
필자는 물리학에서 인과율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독일 물리학자들의 적응 노력의 결과라고 확신하고 있다. 당시 독일의 물리학자는 대중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시키려고 했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과율, 엄격한 결정론을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John Hendry, “Weimar Culture and Quantum Causality,” History of Science 18 (1980), 155-180

헨드리는 포먼의 논증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본다. 첫 단계는 바이마르의 지적 환경이 물리학, 특히 인과율에 적대적이었다는 것을 보이는 것, 두번째 단계는 그러한 환경에서의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의 ‘적응’을 증명하는 것, 세번째 단계는 물리학에서 인과율의 개념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것이 내적 발전이 아닌 환경에 의한 영향임을 밝히는 것이다.
먼저, 바이마르의 지적환경에 대한 포먼의 분석에 대해서는 일단 동의를 한다. 그리고 물리학자들과 수학자들이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있었음 또한 인정을 한다. 그러나 그 적응에 한정을 두어야 함을 말한다. 헨드리는 ‘용어’ 상의 적응은 인정을 한다. 그러나 ‘가치’의 적응 ― 과학에 대한 공리주의적 동기에서 문화적인 동기로의 대체 : 보른의 공동체에의 열망, 빈의 이상주의, 폰 미제스의 ‘새로운 직관’ 그리고 지식을 탐구하려는 일반적인 감정적 욕구 ― 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한편, 인과율의 문제에 대해서는 포먼의 결정적인 주장 ― 물리학에서 인과율에 대한 거부가 널리 퍼져 있었고 여기에 대한 내적인 이유는 전혀 없었다는 ― 에 대해서는 심각한 약점이 있다고 제기한다. 왜냐하면 인과율의 거부에는 강한 내적 요인이 작용했으며 이 점을 고려하여 포만이 제시한 ‘비인과율로의 개종자’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면, 인과율에의 도전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응이 환경에의 적응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환경으로부터의 격리의 경향까지도 있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시기 이전부터, 인과율의 개념은 물리학계에서 이미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20년 이전에 이미 플랑크, 푸앙카레, 아인슈타인의 논의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이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고, 보존법칙을 포기하면서 인과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란 점에서, 인과성 포기에 대한 압력이 존재했을 개연성이 높다. 1916년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의 원자에서의 상태전이를 지배하는 확률은 (숨은 메커니즘을 암시하긴 했지만) 그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켰고, 특히 그런 메커니즘을 찾을 가망이 없었기에 더욱 심했다. 그리고 당시 양자물리학자들의 주류는 대체적으로 에너지 보존법칙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하며, 1921년에 이전에 이점이 분명하게 표현된 듯한 편지를 인용한다. 보어는 논문에서 ‘자발적 전이’를 언급하기도 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즉, 보어는 분명 인과율에 대한 압력을 의식하고 있었는데, 이 압력은 아직은 양자이론의 문제들과 파라독스에 의해 생겨난 거의 전적으로 내적인 것이었다.
한편, 인과율에 대한 최초의 중요한 거부 ― 1920년 바일(Weil)에 의한 ― 는 내적인 것보다는 환경에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지만, 역시 바이마르의 환경보다는 시기가 앞선 직관론적 철학이었고 한편 물리학적 문제들의 복합체 속에 뿌리박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파울리의 예를 볼 때, 각 물리학자들의 관심과 입장들은 인과율만을 가지고 양분하기 어려우며, 그러한 시도는 다소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1921년 쇼트키와 폰 미제스의 사례가 당시의 환경과 철학에 연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내적 동기가 있었다. 그리고 1922-1923년 슈뢰딩거의 사례도 철학에 연관된 것이 사실이나 보존법칙의 문제와 이론의 파라독스와 분명 연관이 있다. … 어쨌든 아직까지는 대부분 물리학자들의 인과율에 대한 입장 모호 또는 유보적 상황.
양자이론에서 역사적으로 다소 중요한 인과율의 최초의 부정은 보른의 결정이었다. 1926년 즉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해석하면서 슈뢰딩거의 고전적 해석이 성립될 수 없음을 깨닫고, 원자세계에서의 결정론을 포기하며 새로운 양자역학을 주창했다. 그리고 그 후 겨우 2년만에 대부분이 양자역학 수용하게 된다.
다시 내적 요인을 정리하면, 양자이론은 오랫동안 궤도의 위치나 전이의 순간 등에 있어서의 불확실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불확실성은 언제나, 젠프틀레벤이 말한 것처럼, 불확실한 통계에 따른 불확실한 결론의 경우였다. 원자와 전자 간의 충돌에 대한 보른의 분석에서는, 불확실한 결론들이 원자의 상태와 전자의 운동에 대한 확실해보이는 통계로부터 나왔다. 물론 감춰진 미시적 변수가 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이론이 어떤 식으로건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였고, 보른은 이로부터 물리학 자체가 불확실하다고 추론했기가 쉽다. 보른의 인과율 부정은 관련 좌표들의 부정과 같았지만, 그것은 또한 자신의 이론이 최종적이고 완전하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물리적인 해석이 이론의 수학적 정식화로부터 단일하게 결정된다는 보른의 주장에 직접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하다.

결론적으로, 독일 물리학자들은 적응이라기보다는 격리 쪽에 가까웠고, 양자이론에서의 인과율에 대한 반응은 주로 내적인 고찰들에 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과원리에 대한 매우 강한 내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양자역학(보른의 것)이 출현하기 전에는 다만 몇몇 물리학자들만이 그것을 부정했다. (덧붙여 사회적 인과관계에 대한 복잡성 언급하며 끝냄)

Gerald Holton, “The Roots of Complementarity,” in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s, pp. 99-145

Sungook Hong, “Science as Culture, History as a Science: Revisiting Kuhn,” (ms 1996)

과학사학자로서 쿤의 업적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 하나를 분석함으로써, 쿤의 과학사 연구가 어떻게 그의 철학적 개념들과 관련이 있는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씌어졌다.
쿤 식의 사료읽기 : 독해가 불가능한 과거의 텍스트를 이해 가능하고 명료하게 해주는 열쇠를 그 텍스트 속에서 찾는 것임.
쿤에게 있는 ‘주관’과 ‘객관’ 간의 긴장과 이 둘의 협력적인 상호 작용 검토. 결론으로 쿤이 과학을 문화로 보았지만, 과학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일종의 ‘객관적 지식’으로 보았음을 보일 것이다.

정상 과학에서 혁명적 과학으로의 전이. 과학 혁명의 방아쇠를 당기는 문제들과 결국에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해결되는 문제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가령, 당시 물리학자에게도 마이컬슨-몰리의 실험과 흑체복사 현상은, 고전물리학에 의해 효과적으로 해결된 패러데이 효과와 홀 효과에 비해 더 신비하고 더 도전적이고 더 혁명적인 문제로 보였을까?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 전환이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서술.
19세기 말 과연 흑체복사 현상 등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들 때문에 물리학계가 위기의식으로 팽배했는가? 플랑크는 자신의 양자 가설의 혁명을 명백하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쿤은 흑체 복사 문제가 많은 물리학자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플랑크의 가설 또한 본질상 고전적인 것임을, 그리고 플랑크 자신도 1908년 로렌츠가 그를 설득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설이 지닌 혁명성을 알지 못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쿤에 의하면, 그 혁명적인 의미를 처음으로 알아본 사람은 플랑크가 아니라 6년 뒤의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이고, 따라서 양자역학의 시초는 1900년이 아닌 1906년으로 옮겨진다.
쿤에 의하면, 공약불가능성은 고전 물리학자로서의 플랑크(1900)와 양자물리학자로서의 플랑크(1908-1909) 사이에도 드러난다. 마찬가지 해석에 의하면, 변칙(anomaly)이라는 문제는 1900년과 1906년 사이에 찾아야 하며, 플랑크의 수학공식들 그 자체가 변칙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다.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에게 플랑크의 공식은 고전물리학과 양립불가능한 수수께끼인 것이다.

쿤의 관점은 역사가가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뒤에 있는 가히 객관적이라 할 만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시사. 이것은 과거의 맥락에 자신을 몰입시킴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낯선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은 옛 과학자의 텍스트에 드러난 명백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 그러면 다시 다른 부분이 이해가 안될 수 있다. 텍스트의 모든 구절이 이해되고 텍스트에 있는 모든 변칙적인 점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런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바로 ‘쿤 식의 사료읽기’이다. 여기에 열쇠 맞추기.
쿤은, 1895-1899년 사이에 씌어진 플랑크의 초기 저서들을 읽은 수, 즉 “플랑크의 고전적인 흑체 이론에 거의 동화된 후에는 더 이상 ⌈자신과⌋ 다른 이들이 그전에 보통 읽었던 방식으로는 ⌈플랑크가 1900-1901년에 쓴⌋ 첫번째 양자 이론 논문을 읽을 수 없었”고 마침내, “플랑크의 새 이론이 여전히 고전적”이라느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쿤의 철학적인 개념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한 그의 개념들로부터 과학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에 도전을 가했다. 그러나 쿤의 방법론에는 객관과 주관 사이에 ‘본질적인 긴장’ 있었다. 그의 ‘주관적인 경험’이 과거 텍스트에 대한 일종의 ‘객관적인 이해’를 낳은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과학에 대한 쿤의 ‘객관적인’ 이해는 자연과학을 다른 인간 문화적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쿤의 역사적 방법론과 과학의 가설 연역적 구조 사이의 닮은 꼴과 관련이 있다.

쿤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과학자들의 일반적 담론과 이미지와의 투쟁. 그의 무기는 맥락을 중시하는 그의 방법론에 일종의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방법론.

쿤과 사회구성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 : 텍스트의 ‘불완전성’ 공유. 그러나 사라진 부분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에서 갈라짐. 쿤에게 그것은 대체로 지적인 것이고 실마리는 텍스트 안에 있지만, 사회학자들에게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인 것이고 실마리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 있다. 그렇지만, 둘은 과거의 과학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공유. 둘 모두 역사 분석에 있어 일종의 ‘과학적인 방법’에 의지.

과학자에게 주변의 밑천이 자유롭게 동원가능한 자원임과 동시에 실천의 범위를 제한하는 구속요인이 된다. 그리고 과학자가 그 한계에 접근할 때 밑천의 유연성은 그를 구속하는 아주 견고한 규제의 그물이 되고, 이때 사람들이 일컫는 바 ‘자연이 말하는’ 순간인 것이다.
사회주의적 과학관은 역사가의 실천을 새롭게 조명해준다. 그러나 그들이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아니며, 모든 내러티브가 동일한 정도의 진실성과 설득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역사가에게 사료는 실천의 밑천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구속물이다. 비록 역사가들의 실천이 기본적으로는 역사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적 나열이 아닌 그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구성과 해석에 연관되어 있지만, 역사에서도 ‘역사적 사실’들은 말하는 법이다. 역사 연구의 실천은 과학적 실천과 역사 연구에 있어서의 실천에 수반된느 이러한 복잡성의 발견이야말로 아마도 우리가 쿤에게 진 가장 큰 빚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