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의철학] 게임이론 및 합리적 행위자

chapter6.hwp 합리적 행위자

이상적인 합리적 행위자의 세가지 요소 : ①완벽하게 정렬된 좋아하는 것(fully ordered preferences) – 일정해야 함, ②완전한 정보(complete information) – 가능한 경우들에 대한 확률분포, ③완벽한 계산능력(a perfect internal computer) – 비용까지 포함된 기대효용 계산. 물론, 세가지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일단 합리성에 대한 간단하고도 명확한 가정 – 합리적 행위자들은 자신만의 기대효용 극대화를 추구한다 – 에서부터 시작하겠다.

게임이론 및 4가지 기본 게임

(1) 협동
(Stop, Go)와 (Go, Stop) 두 개의 ‘균형’이 있다. 동전던지기 등의 방법(혼합전략)을 논외로 둘 때, 해결책은? 관습이 생기거나 관습, 대화의 이점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협동게임 이론에 의해 ‘자발적인’ 관습, 규범, 시민사회의 형성을 설명할 수 있다.

(2) 죄수의 딜레마
유일한 네쉬균형 (Confess, Confess)가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다른 죄수가 자백하든 안하든 자신은 자백을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게임을 반복하더라도, 이기기 위해선 언젠가 협동을 깨야한다.

(3) 치킨게임
양쪽에서 차를 몰고 먼저 피하는 쪽이 지는 상황. 자신이 안 피할 것임을 상대방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그렇다면 상대방은 합리적 선택에 의해 피할 것이기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전략을 쓰게 되지만, 이 전략은 양쪽 모두 손해를 주곤 한다.

(4) 남녀전쟁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는 서로 다르나, 못 만나게 된다면 더욱 최악이다. 이 경우 두 개의 균형이 생기기 때문에 선택이 불가능하지만, (맘씨 좋은 혹은 힘 약한) 한쪽이 다른 한쪽이 갈 것으로 예측되는 곳으로 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이는 권력관계의 본질과 그 아래에서의 행동패턴을 잠재적으로 설명해준다.

사회계약

도대체 사회라는 게 왜 존재할까? 사회계약론에 기초하면,
첫 번째 답변. 협동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개인들간의 협약인 사회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상호이익에 근거한 협동게임으로 사회를 모두 설명한다면, 이론상으로 사회계약에는 강제력이 필요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는 정부 없이도 가능하다.
두 번째 답변. 여러 사람의 욕구가 상충한다면 그들은 적이 될 수밖에 없고, 절대권력 없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이라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사람들이 평화와 협동을 바란다고 전쟁 상황이 자연스럽게 극복되진 않는다. 이 상황은 죄수의 딜레마와 같다. 평화를 원하더라도 그에 기여 안한 채 이익만 보는 것이 개인적으로 더 이익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이렇게 무임승차자가 되려 한다면 어떠한 평화계약 시도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힘’을 (사회계약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규범과 협동

규범을 설명하기 위한 위의 두 게임(협동 게임, 죄수의 딜레마)은  모두 ‘비협동적'(non-cooperative)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어떻게 비협동적 게임이 협동적인 무언가(규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홉스의 관점에서 이는 직접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합리적 개인들이 합의한 권능한 힘은 강제적으로 규범을 작동시키게 된다. 또한 더 나아가 도덕적 의무까지도 만들어낸다는 말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안지켜도 불이익이 없는 상황일지라도 정의, 윤리 등의 이름으로 그것이 지켜질 것인가? 사회에 신뢰는 필수 전제이다.
한편, 약속지키기 등의 규범 없이 각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꼭 최상의 결과를 보장하진 않는다. 규칙에 의거한 행동이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공리주의에서는 그것을 도입하겠지만, 게임이론에서는 도입할 수 없다. ‘합리적 선택 이론’의 기초와 위배되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 남녀전쟁에서 두 개의 선택가능한 균형 중에 왜 특정한(더 안좋은) 균형이 선택되는가? 이는 우연이라기보다는 권력관계 때문이다. 더 민감한 문제는 관습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에 걸쳐있다. 선택 가능한 두 개의 균형 중 어느 특정한 균형이 선택될 때, 과거의 행동이 왜 영향을 주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결론

합리적 선택 이론과 게임이론에 기반한 개인주의가 사회적 규범을 다루는 방법은 두가지이다.
첫째, 상호작용이 게임의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에는 무임승차자의 문제가 남아있다. 핵심은 신뢰이며, 합리적인 신중함이 있다면 과연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경우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있겠는가이다.
둘째, 규범적인 면을 행위자의 선호도에 포함시키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서는 선호의 동기에 대해서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는다. 선호도는 주어진 것일 뿐이다. 이 경우, 개인주의가 선호도의 사회적 선택과 같은 전체론적인 설명에 맡겨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합리적 선택이론보다 사회구조가 더 중요해진다. □

[사회과학의철학] 기능주의적 설명, 구조주의적 설명

chapter5.hwp 기능주의

기능주의적 설명이란 사회의 어떠한 특징(trait)의 출현과 지속을 그 체제에 대한 유용한 효과로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결과론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과론적인 설명방식은 현재의 상태를 ‘미래의’ 상태를 통해 설명하기 때문에, 미래가 현재의 원인이 되는 듯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간과정을 수행하게 하는 시스템상의 특징을 설정해야 한다. 생물진화이론에서 자연선택 메카니즘이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도 그에 준하는 메카니즘(quasi-teology, negative feedback loop)이 필요하다.

기능주의적 설명은 아래와 같이 세 주장으로 분리될 수 있다.
1. P persists in S (the persistence of the feature)
2. P has the disposition to produce B in the ciircumstances of S (P’s causal power)
3. P persists in S because it has the disposition to produce B. (B’s cuasal history)
이 중 3번이 가장 중요하다. 마빈 해리스의 ‘수렵-채집 민족의 긴 수유기간은 출산율을 저하시키기 위해 나타난 성질이다’라는 주장은 ‘긴 수유기간의 다른 잇점 때문에 생겨났다’고도 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위의 3번(causal history)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기능주의적 설명에서는 이 3번을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다. 따라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 이익 때문에 -이 나타났다’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중간과정(메카니즘)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다.
한 사회의 어떠한 규범체계에 대한 기능주의적 설명을 하려할 때, (누군가에 의한) 강제적인 메카니즘과 (누군가가 강요하지 않은) 비강제적인 메카니즘을 생각할 수 있다. 강제적인 메카니즘의 경우 개인행동 수준의 분석(micro-analysis)을 통해서만 완전한 형태의 설명이 가능하다. 한편, 생물학에서의 ‘자연선택’과 같은 비강제적인 인과적 메카니즘이 사회과학에서도 가능할까? ‘사회선택’, ‘특징선택’ 등의 접근을 해보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사회에 어떤 기능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 과연 그 기능을 만족시키는 무언가를 만들어낼까? 이러한 생각은 지나치게 낙천적인 생각(Panglossian functionalism)일 뿐이다. 사회가 무조건 필요한 기능을 만족시키는 방향으로만 발전하리란 법은 없다. 노예수급 기능이 필요했던 로마는 그 기능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로마의 노예제는 붕괴해버렸다.
결론적으로 기능주의적 설명은 그 자체로는 완전한 설명방식이 되지 못한다. 다만 어떠한 사회적 필요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지속시켜내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충족된다면 인과적 설명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구조주의

인과적 구조주의적 설명

사회구조란 ③개인행동을 인도, 제한, 고무시킬 수 있는 기회와 제약을 정의하는 ①일정기간 지속되는 ②개인으로부터 독립된 시스템이다. 토지 시스템을 예로 들어보면, 그 토지 시스템을 지탱하는 것은 법적기구와 권력분배 등일 것이다.
어떻게 사회구조가 원인(causal powers)이 될 수 있는가? 대체로 구조는 사회적 설명에서 고정적인 원인조건(standing causal conditions)으로 해석된다. 단, 구조 자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이유로 개인행동 수준의 분석이 간과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에 구조는 결과를 만족스럽게 결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구조는 다른 결과에 비해 좀더 많은 결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따라서, 구조주의적 설명에서도 개인수준의 메카니즘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어떠한 메카니즘이 가능한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회구조는 개인들에게 유인동기와 제약을 가함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하고, 개인들은 그 환경 하에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행동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 설명방식은 합리적 선택 이론과 차이가 없다.

비인과적 구조주의적 설명

여기서, 설명의 목표는 경험상의 무질서에서 근원적인 질서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언어에 해독(decode)될 수 있는 문법이 있는 것처럼 사회에도 추상적인 질서로서의 구조가 있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사회가 추상적 “문법”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연구의 목표는 이 문법을 운영하는 규칙을 찾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것은 반드시 사회양식에서 구조에 위치한다”는 진술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술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구조들(졍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articulation에 대한 이론을 형성하고 이러한 articulation은 그 나름의 추상적 논리를 가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비인과적 구조주의를 사회적 설명의 하나로 볼 수 있는가? 비인과적 구조주의는 현상적 차원에서 규칙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볼 수도 있고, 사회현상의 개념적 재구성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사회과학의 정당한 목표는 되지만 설명은 아니다. 후자는 사회과학보다 사변적인 철학의 작업에 가깝다. 둘 다 설명은 아니다.
한편, 사회구조에 사회이론으로 해명될 수 있는 추상적인 논리가 있다는 주장 또한 사회현상의 고유의 우연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반과학적이다. (Ex 5.10)에서 주장하는 규칙성은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사회형태가 생산양식 개념의 논리에 따라 전개된다는 식의 생각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론이 사회적 설명의 본질적 부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론은 사회현상의 복잡성과 비결정성에 대한 냉정한 고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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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지식에 대한 짧은 고찰: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과정 지원 에세이

essay.hwp 1. 들어가며

이 에세이의 목적은 지식 일반에 대한 이해이다. 부족한 능력으로 이렇게 포괄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것 자체가 매우 무모한 일이라 생각되지만, 이 글로써 대신 내가 하고 있는 현재의 고민 수준을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지식을 구성하는 층들 중에 가장 기저에 놓여 있는 제1원리(기본법칙), 또는 보편개념 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의문제기에 이어, 그에 대한 답변의 시작으로 제1원리 또는 보편개념이 지식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상이 관찰, 지식습득, 발견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식의 본질과 지식의 발전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근거는 많이 부족하고 문제의식은 매우 거칠겠지만, 현재의 고민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2. 제1원리의 자기순환적 성격

고전물리학의 제1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뉴턴의 세가지 기본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그중 뉴턴의 제 2법칙을 살펴보자. F=ma라는 간단한 공식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천칭(접시저울)을 통해 질량(mass)을 잴 수 있다고 배우고, 고무줄이나 용수철의 늘어나는 길이(Strain)를 통해 힘(Force)을 잴 수 있다고 이미 배운다. 따라서 고등학교에서 배운  라는 공식이 이미 있던 개념들을 가지고 만든 공식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은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물리학 체계에서는 질량을 재정의하기 때문이다. 새롭게 배운 질량(mass)의 정의는 ‘힘(Force)에 대한 관성량’이다. 다시 말해, 뉴턴 제 2법칙 자체가 질량의 정의, 즉 m=F/a라는 정의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천칭을 통한 질량(mass) 측정은 다시 F=ma, tau=F*l, W=mg(뉴턴의 제 2법칙, 토크이론, 무게와 질량의 관계)를 통해 재설명해야하는 부분이며, 고무줄이나 용수철을 통한 힘(Force)의 측정은 F=-kx를 통해 재설명해야 하는 부분이다. 중학교 물리학 체계에서는 천칭과 용수철을 통해 질량과 힘을 설명했지만, 고등학교 물리학 체계에서는 질량과 힘을 통해 천칭이론과 용수철이론을 설명하게 된다.
새로운 체계에서 질량이 힘에 의해 정의된다면, ‘힘'(Force)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가면 ‘힘'(Force)은 다른 말로 정의 내리기가 매우 곤란하게 된다. 용수철을 통해서는 힘을 연상할 수만 있을 뿐, 증명은 불가능하다. 뉴턴 물리학에서 ‘힘’은 ‘힘’일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쯤 되면 뉴턴 물리학의 체계의 기반이 매우 불안함을 느끼게 되며, 내적으로 자기순환적인 논리체계에 불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불안한 기반에 대한 신뢰 없이 우리는 어떠한 (고전)물리학도 더 전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며, F=ma를 믿는 순간 엄청나게 많은 현상들이 설명된다는 사실이다. 설명뿐인가. 뉴턴 물리학 체계를 이용해 달에 우주선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모든 지식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 국어사전을 놓고 한 단어의 설명을 찾고, 그 설명에 대한 설명을 찾고, 또 그 설명에 대한 설명을 찾는 식의 작업을 반복하다보면 결국 자기순환적인 설명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에 대한 사전설명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생각 : 궁리함. 사고
·궁리 : 깊이 생각함
·사고 : 생각함. 궁리함

자기순환적 설명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뉴턴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면 물리학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편개념이라 할 수 있는 언어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그 언어를 믿고 따르면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 있고, 세계에 대해 이런저런 해석들을 할 수가 있다.

3. 제1원리 및 보편개념의 위상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위와 같은 난감한 상황에서 출발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라톤은 다른 무엇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지식의 자기순환적인 부분   제1원리, 일반낱말들, 보편, 추상적 개념 자체   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그것을 원래부터 ‘실재’해왔던 ‘영원불멸’의 절대적 진리 즉 ‘이데아'(Idea) 또는 ‘형상'(Form)으로 승격시켜버린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태도는, 제1원리 또는 보편개념에 대해 더 이상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말고 그냥 진리로 믿으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극단적인 본질주의에 빠진 그에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제1원리 또는 보편개념을 인정하지 않고서 다른 무엇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플라톤은 그점을 인식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는 보편과 개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규명을 최초로 시도했다.  

세상에는 ‘이것은 고양이다’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많은 동물들이 있다. 이 경우에 이 ‘고양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이것은 분명히 개개의 고양이와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한 마리의 동물이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모든 고양이에게 공통된 어떤 일반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는 ‘고양이’와 같은 그런 일반적인 낱말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또 그런 낱말들은 확실히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고양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 고양이나 저 고양이가 아닌 무엇, 즉 어떤 보편적인 고양이 (universal cattiness)를 뜻할 것이다. 이 보편적인 고양이는 개별적인 고양이가 생겼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공간이나 시간의 어느 부분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하다.
이러한 보편 개념은 매우 유용하다. 즉 우리는 고유명사만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 “인간”, “개”, “고양이” 따위의 일반적인 낱말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가 만일 고유명사로만 표현할 수 있는 개별적인 사물들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런 낱말들은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의해, 플라톤은 보편 개념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했고, 그것만이 영원한 진리요, 실재라고 주장했다. 사실 제1원리, 보편개념은 절대적인 만큼 우리 인식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것 또한, 기존의 개념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끼워맞추려고 노력하는 행위는 매우 일반적이다. 유럽인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신대륙의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 노아의 몇 째 자식의 사돈의 팔촌 식의 설명을 하려고 했던 것은 그 극명한 사례이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편개념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론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보편개념이란 것은 만들어지기도 하고, 변색되고, 각색되고, 사라지기까지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4. 관찰 1 : 아는 것 속에서의 관찰

아이에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다들 똑같이 그린다. 얼굴형태를 그리고, 눈, 코, 입, 귀, 팔, 몸통, 다리를 그린다. 옆모습의 사람을 그리더라도 눈은 고대 이집트의 그림처럼 언제나 앞을 보고 있다. 얼굴은 동그랗고, 팔은 얼굴에 붙어 있다. 아이에게 나무를 그리라고 하면, 꼭 녹색과 갈색만을 사용해서 색을 칠한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에 대한 구분이 없으며, 그림자가 지는 부분도 그리지 못한다.
왜 이렇게 엉터리로 그리는 것일까? 아이의 망막에는 정말 그런 상이 맺히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 대상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방해하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정상적인 눈을 가진 아이라면 어른과 똑같은 상이 망막에 맺힐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관찰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상징체계이다. 아이는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고 싶어도 이미 머리 속에 자리잡은 상징체계가 눈, 코, 입에만 관심을 가지게 하며, 눈, 코, 입의 기호화된 상징 때문에 그렇게만 그리게 된다. 아이에게 대상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징체계 내에서 구조화될 뿐이다.  아이에겐 ‘숨은그림찾기’의 아직 찾지 못한 숨은그림처럼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서양에서 원근법이 발명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람들에겐 소실점이 보이지 않았을까? 고대와 중세의 사람들은 풍경화를 어떻게 그렸을까? 물론 중세의 화가들은 풍경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책의 삽화들을 통해 어렴풋이 추측해보건대 풍경화를 그렸다면 실제 풍경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풍경화를 그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동양에서는 나름의 원근법이 있었다. ‘먼 산은 이렇게’, ‘멀리 있는 사람은 저렇게’ 등의 규칙이 전수되어 왔던 것은 분명하지만, 현대 서양화의 원근법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과거 동양의 화가들이 쭉 뻗은 길을 그렸다면 그 그림에는 ‘소실점’이 있었을까? 안 그려봤기 때문에 그리는 방법을 모르고, 방법을 모르는 그림은 그리지 않았을 터이지만, 중세 서양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화가들 또한 소실점이 보이는 대상풍경을 제대로 그렸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

이렇게 관찰은 상당히 고정관념에 따라 이루어지며, 자신의 상징체계를 벗어나는 관찰은 극히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찰 행위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을까. 그 한계 내에서 가능하긴 하다. 고정관념에 의한 관찰도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각종 구체적인 지식들을 축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선과 악에 대한 확고한 개념이 있는 사회에서는 모든 대상에 대해 선과 악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도 하며, 식물 분류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었다고 하면 각종 주변의 식물들을 그 기준에 따라 분류하여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도 있다. 한편,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아래에서, 지구둘레를 잴 수도 있다. 연주시차의 원리에 의존하여, 지구와 별 사이의 거리들을 하나 둘 재는 작업을 할 수도 있다. 가끔 이렇게 쌓여가는 지식들이 당시의 일반적인 지식체계와 모순되는 결론에 이를 때 지식은 위기에 빠지곤 한다.

5. 관찰 2 : 모르는 것 속에서의 발견

다시 아이의 그림 그리기 문제로 돌아가보자.
나이를 먹으면서 그림의 수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 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아직도 초등학교 때의 그림을 보여주기도 하는가하면, 어떤 학생은 대상에 거의 일치하는 그림을 넘어 기교를 부리기까지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세심한 관찰과 엉터리 관찰의 차이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림을 못그리는 사람은 아무리 세심하게 관찰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그림은 여전히 엉망일 뿐이다. 실력 차이는 그림 그리는 ‘순간’의 관찰력의 차이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연습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연습을 많이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초심자들은 그림을 그리고서는 당연히 자기 그림에 못마땅할 것이다. 자기는 본대로 그렸지만, 결과물을 보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번 반복해 그리더라도 그 수준을 벗어나긴 매우 힘들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반복훈련 과정 어느 순간엔가 안보이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고 옆모습의 눈이 앞모습과 어떻게 다르다는 것, 그리고 사람에겐 목이 있고 팔은 어깨에 붙어있다는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의 _ 수준의 상징보다 훨씬 복잡한 개념들을 익히고 그 관계를 익히고, 그로써 보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학교의 교육은 이러한 훈련의 방향을 설정해주고 깨우침의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떻게? 학교에서느 명암, 면, 선, 빛, 그림자, 구도, 비율, 원근법 등의 그림에 필요한 개념을 가르쳐주고, 때로는 인체의 골격구조 등도 가르쳐준다. 그리고 도구를 사용하는 다양한 노하우도 전수한다.
보통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훈련 또는 학습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역사적으로 힘들게 발견해온 그림그리기의 개념들과 방법을 전수받는 과정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현대 미술교육에서 가르치는 원근법을 비롯한 개념들은 매우 더디고 힘들게 발견해온 것들이다. 몇 천년 동안 보이지 않던 소실점을 처음 본 행위는 획기적인 ‘발견’임과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상당한 도약을 가져다 주었다. 현대의 교육과정에서 각 개인들은 역사적 발견들을 초고속으로 깨우쳐가는 것이다.

이러한 깨우침 또는 발견의 과정은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매우 신기한 과정이다. 연역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역적 논리보다는 상상력이 동원되는 일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는 적용될 수 없는 어처구니없을 만한 각종 유비추리와 은유 등이 알게 모르게 동원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대상들 속에서 뭔가의 규칙을 찾아내거나 특정한 성질을 보고서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거나 법칙을 만들어낸다. 플라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개별대상들로부터 보편개념이 만들어지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이다.
매우 신기한 과정으로 보이지만 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과정이고 누구나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아이가 한글을 배울 때, 분명 부모들이 한글을 외우게 하고 반복훈련을 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아이의 학습과정에서 자기 이름, 엄마 아빠 이름 등 많은 한글을 외우고 쓰게 된다. 하지만, 한글조합규칙을 알기 위해 몇 개의 한글을 외우고 써야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모들이 아무리 한글조합규칙을 설명해도 스스로 깨우치기 전까지는 부모의 설명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의 한글교육이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한글조합규칙을 깨우치는 순간은 아이 스스로 추상력을 동원하여 이뤄낸 결과물로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에게 깨우침의 그 순간은 게슈탈트적 전환의 순간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발견은 새로운 지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기본원리가 된다.

6. 관찰과 인식, 그리고 지식

관찰이란 대상을 보는(또는 듣거나 냄새 맡는 등의) 것이다. 물리학자나 화가나 어린아이나 이점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는 것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지며 목적에 따라 초점이 달라지기도 한다.

아이의 상징체계는 상당히 단순하며 일반적이다. 아이는 실사영화보다 만화영화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상세하게 묘사된 실사필름은 아이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전달해주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얼굴을 대상으로한 사진에서는 표정, 머리스타일, 주름, 피부색, 피부상태 등 추출해낼 수 있는 의미가 너무 많지만 _과 같은 상징표현물은 불필요한 모든 것을 제거한 채 ‘웃는 사람’이라는 의미만을 전달한다. 그 이상의 개념은 아이에게 너무 벅차다. 아직 상징체계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른은 만화가 아닌 실사로 관찰하느냐. 그것도 아니다. 다시 그림그리는 얘기를 해보자. 화가가 아닌 많은 어른들에게 그림그리기를 시키면 대부분은 윤곽선부터 그리려고 한다. 윤곽선은 면과 면의 경계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윤곽선에 집착한다. 대상에서 무엇을 맨처음 뽑아내냐고 할 때, 형태의 상징부터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눈, 코, 입을 그려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절대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가는 정말 대상을 복사하듯 관찰하는가? 그 또한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과 다른 개념들을 이용해 대상을 구조적으로 보는 것일 뿐, 대상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다. 다시 얼굴 그리기를 예로 들면, 대부분의 사람이 대상으로부터 뽑아내는 개념은 얼굴형태, 눈, 코, 입, 귀 이런 식이나, 화가들은 구도, 명암, 면, 비율 등의 색다른 개념틀로 대상을 바라본다. 대상을 관찰하는 화가의 머리 속에도 여전히 각종 개념들로 가득 차 있다.
화가의 개념틀이 더 우월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그리는 데에 우월한 개념틀일 뿐이다. 일반사람들이 사람을 볼 때, 얼굴선, 눈, 코, 입 등을 떠올리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성형외과의사이든, 또는 관상장이든 자기 목적에 맞는 나름의 우월한 개념틀을 가지고 얼굴을 관찰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관찰을 기초로 한 인식은 감각경험과 관념적 개념을 필요로 한다. 감각경험 없이는 관찰 자체가 불가능하며, 개념 없이는 감각경험이 있다 한들 아무런 의미도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은 사진기나 거울의 반영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보통 관찰의 대상은 상징체계와 개념체계로 변환되어 인식된다. 대상을 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보편적 현상의 특수한 경우로 인식한다. 또는 추상적 개념을 통해 재구성해 대상을 인식하게 마련이다. 인식이란 복사와 같은 모사라기보다는, 상징적 또는 언어적 또는 관념적으로 재구성되는 모사라 할 수 있다.
이를 도식화시키면, ‘객관적 실재 -> 추상적 개념 -> 개념을 통해 재구성한 실재’, ‘개별 -> 보편 -> 특수’, ‘현상 -> 본질 -> 재설명한 현상’, ‘구체 -> 추상 -> 추상적 개념을 통해 재구성한 구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 원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질량, 구심력, 가속도 등의 개념을 잘 조직하여 인식한다. 고등학교 학생이 그렇게 설명하면 선생님으로부터 원운동을 제대로 설명했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지식형성과정 또한 인식과정과 흡사한 과정을 거친다. 다만, 그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는 것이 차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실재에서 어떠한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 걸린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금이 간 이후, 뉴턴 체계로 정착되기까지의 시간을 따져보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지식형성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롭게 형성된 추상적 개념을 이용해 현실을 재구성해 설명해야 체계적인 지식체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정통한 이론이 나온 이후, 그것이 열어주는 지평에 따라 세계에 대한 해석을 완벽하게 뜯어고치는 일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발표된 이후, 몇 백년간 과학자들은 그의 체계에 따라 세계를 계속 재해석해왔다. 뉴턴 체계에 의해 축적된 지식이 다시 뉴턴 체계를 위협하는 시기에 이를 때, 지식은 새로운 순환이 시작된다.

7. 지식과 현실

다시 가장 처음에 언급했던 F=ma로 돌아가보자. 그 이론이 내적으로 자기순환적이라면 왜 하필 그 때서야 발견되었을까? 발견의 패턴이 연역적인 과정이 아니라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서도 가능한 게 아닐까?
이론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는 내적 논리에 입각해서 각 개념들을 재정의하고 연역적인 체계를 만들어가게 되지만, 이론의 최초 발견 당시는 그렇지 않다. 뉴턴의 법칙들에서 쓰인 개념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을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중학교 때 천칭(접시저울)을 이용해 질량 개념에 대해 배우고 용수철이나 고무줄을 이용해 힘의 개념을 배웠듯이, 뉴턴 또한 사회적 관습으로 쓰이던 개념 또는 선행 과학자들이 쓰던 개념을 수용하여 자신의 이론에 차용한 것이다.
천칭을 이용한 질량 측정은 연금술사들에 의해 발명되어 뉴턴이 살던 시대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힘이란 개념은 사회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던 개념이나, 고무줄의 늘어나는 길이에서 힘을 연상하고 연장과 힘(응력)의 관계를 최초로 밝히고 그것을 이론화한 것은 뉴턴과 겹치는 시대에 살았던 후크의 성과이다.
뉴턴이 살아있던 시대에, 위와 같은 질량과 힘의 개념이 없었더라면 뉴턴의 제2법칙은 발견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경험의 차원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새로운 발견에도 건너뛰지 못할 단계의 벽이 있다. 한번에 한두 계단씩이다. 한번에 열 계단 씩 오르는 것은 무리이다.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시대에 살았던들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내진 못했을 것이다.

한편, 뉴턴 제2법칙의 질량과 힘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질량, 힘과 같은 것인가에 대해 질문해보자.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뉴턴 물리학 체계에서는 선험적인 재정의를 이용해 거꾸로 과거의 질량측정 방식과 힘의 측정방식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뉴턴 물리학 체계 내의 질량, 힘 개념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질량, 힘과 분명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그 둘을 분리하기가 매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을 완전히 분리할 경우, 물리학은 허공에 떠있는 자기만의 체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질량’이란 개념에는 무게, 접시저울, 관성량 등 여러 경험과 의미들이 층을 이루어 포개어져 있다. ‘힘’이란 개념에도 줄다리기, 던지기, 용수철의 길이 등 여러 경험과 의미들이 층을 이루어 포개어져 있다. 이것을 해체할 때 그 의미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오히려 이렇게 겹겹의 층으로 이루어진 경험과 의미의 얼개는 지식을 현실과 힘겹게 이어주고 있다.

8. 나가며

우리의 인식은 실재를 복사하듯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대신 추상적인 개념을 이용해 그것들을 재구성해 실재를 이해할 뿐이다. 그러한 인식적 기반 위에 있는 지식에는 오류와 모순이 내재해 있을 수 있고, 자기순환적인 논리가 숨어있게 마련이다. 경험과 의미의 층들이 겹겹이 포개어진 불분명한 개념들 또한 지식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러한 불안한 기반 위에 서있는 인간의 지식은 역설적으로 많은 가능성 또한 가지고 있다.
튜링머신은 연역적 추론만이 가능하며, 수집된 정보를 이용해 절대 그보다 상위의 개념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사후에 틀렸다는 평가를 받을 지는 몰라도, 구체적 정보들 속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뽑아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한 인간 인식의 특성은 인간 지식의 가능성과 한계를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
* zolaist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3-10-29 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