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워드프로세서(HWP, Hangul Word Processor)

이 글은 몇 년 전 <한/글 워드프로세서> 또는 <아래아한글>을 과학기술사물로서 전시하는 문제에 대한 자문 의뢰를 받고서 웹상에서 자료를 모아 정리해본 글이다. 얼마 전 엔씨소프트의 김태진이 한글과컴퓨터에서 일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글을 열어봤다가 하드에서 썩히기에는 아까운 것 같아 블로그에 올려보기로 했다. 블로그에 올리면서 일부 어색한 부분에 수정을 했다.

1. 기술적  특징

1) 강력한 한글 지원과 호환성

1989년 4월 24일 출시된 <한/글 1.0>은 모든 IBM 호환 PC에서 한글 문서를 편집하고 편집한 모양대로 인쇄할 수 있었던 한글 워드프로세서였다. <한/글>은 한글 카드가 없어도, 한글 DOS를 사용하지 않아도 작동했으며, 한글 모듈이 장착되지 않은 프린터로도 한글 문서를 편집한 모양과 똑같이 정확히 인쇄할 수 있었다.

“한/글의 개발 당시 시중에 나와 있었던 보석글을 제외한 다른 워드프로세서들은 특정 회사의 컴퓨터에서만 동작하거나 한글 카드와 같은 별도의 장비를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보석글>의 경우엔 한글 카드가 필요없긴 했지만, THP.COM이나 NKP.COM과 같은 별도의 한글 입출력 프로그램을 구동시킨 후 작동시켜야 했으며, 한글 모듈이 설치된 프린터가 아니면 인쇄를 할 수 없었다. 한글 모듈이 설치되어 있더라도 프린터가 특정 글꼴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요구한 글꼴(예를 들어, 명조체) 대신 기본 글꼴(예를 들어, 고딕체)로 출력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워드프로세서에서는 표현할 수 있는 한글에 한계가 많았다. <보석글>을 포함한 대부분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들은 제한된 완성형 글자만 표현할 수 있었고(예를 들어, ‘핤’과 같은 글씨는 입력할 수 없다), 특수문자나 고어 등의 표현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자체 한글 입력기, 자체 한글 코드와 자체 한글 글꼴, 자체 프린터 드라이버를 개발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었으며, 1988년 강태진이 제작한 <한글2000>은 처음으로 자체적인 한글 처리 기능을 내장함으로써 한글 처리에 관한 방향을 제시했고, 1989년 출시된 <한/글>은 그 방향을 이어받았다.

① 표현 가능한 모든 한글 지원

<한/글>은 완성형 코드로 표현할 수 없었던 11172자의 한글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으며, 한글 고어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한자와 외국어, 특수문자들을 표현하기 위해 <한/글>은 독자적인 코드를 개발해야 했는데, 이는 나중에 <한/글 2.0>에서 “한컴 2바이트 코드”로 완성된다.

② 한글 3벌식을 포함한 자체 자판 지원

<한/글 1.5x>는 2벌식 자판뿐 아니라 3벌식 자판도 지원했으며, 한글 고어도 자판 수준에서 지원했다. (‘ㅏ’를 두 번 눌러 ‘ㆍ’(아래아)를 표현하는 방식은 나중에야 구현된다.)

한글3벌식자판 한글고어자판

③ 다양한 자체 비트맵 글꼴 지원

<한/글>은 명조 고딕 샘물 필기(1.5판에서 추가) 4가지의 비트맵 글꼴을 지원했으며, 로마자는 명조, 고딕, 윗첨자, 아래첨자, 이탤릭, 필기체(1.5판), 타임즈(1.5판), 유니버스(1.5판) 글꼴을 지원했다. 이를 위해 <한/글>은 자체적으로 화면용 글꼴(*.SFT)과 인쇄용 글꼴(*.PFT)을 개발했으며, 덕분에 그래픽 카드나 OS, 프린터 종류에 상관없이 원하는 글꼴을 그대로 출력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비트맵 글꼴들은 크기를 확대하면 깨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크기를 확대해도 깨지지 않는 벡터 형식의 글꼴은 나중에 <한/글 2.0>에서야 지원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글 1.x>에서는 글자의 확대 효과가 가로/세로 2배로만 제한되어 있었다.

④ Shift+Space를 이용한 편리한 자판 전환 (1.2판에서 추가된 기능)

<한/글>은 한글과 영문(또는 외국어)을 동시에 작성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않고서 자판을 전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반적인 키보드에서 한/영 전환키는 우측 하단에 조그맣게 위치했으나, 이를 누르려면 손이 키보드에서 떨어지게 되어 문서 작성에 지장을 초래한다. <한/글>에서는 이 전환키를 Shift+Space로 변경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⑤ 다양한 하드웨어 지원

<한/글>은 출시 당시부터 다양한 그래픽카드(허큘리스, CGA, EGA, VGA 등)를 직접 지원하여, 한글 카드가 없어도 거의 모든 컴퓨터에서 정상적인 화면을 얻을 수 있었으며, 한글 모듈이 없는 프린터에서도 화면 그대로 인쇄를 할 수 있었다. <한/글>의 문서들은 저렴한 EPSON 9핀 프린터에서도 모든 글꼴이 정확히 인쇄되었고(<보석글>의 경우, 9핀 프린터로는 고딕체만 지원), 1.5판에서는 도트 프린터에서도 그림을 인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2) ‘위지위그(WYI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 방식의 워드프로세서

<한/글 1.0>은 ‘화면에 보이는 대로 출력이 가능한(WYISIWYG)’ 워드프로세서였다. 즉, 이는 문서를 편집하는 화면에서 표현된 글꼴, 문단형식, 페이지구성 등이 왜곡되지 않은 채 똑같이 출력되는 방식으로, 서식 태그(tag)를 직접 입력하여 글꼴이나 문단형식을 변화시키는 방식과 구별된다. 태그 입력 방식으로 문서를 편집하려면, 서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부분에 정확한 태그 명령어를 입력하는 수고를 들여야 하는 동시에 편집 결과를 미리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위지위그’ 방식에서는 편집 명령어를 정확히 외우지 않고도 편집 메뉴를 이용해 서식을 변화시켜 편집 과정에서 그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둘의 차이는 아래의 예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위지위그 방식 : 진한 이탤릭 글자
  • 태그 입력 방식 : <b><i>진한 이탤릭 글자</i></b>

현재 대부분의 워드프로세서는 ‘위지위그’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1989년 당시 ‘위지위그’ 방식의 워드프로세서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워드스타(WordStar)>가 ‘위지위그’ 방식의 워드프로세서라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불완전했던 것으로 보이며, <워드퍼펙(WordPerfect)>은 1993년의 6.0 버전부터 텍스트 모드와 위지위그 방식의 그래픽 모드를 동시에 지원했으며, 1988년의 5.0 버전은 미리보기에서만 그 기능을 지원했다).

당시 대부분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들은 외국의 텍스트 모드 기반 워드프로세서를 한글화한 제품들이었는데, 삼보컴퓨터에서 보급한 <보석글> 역시도 프린터에서 지원하는 글꼴을 사용하려면 텍스트 문서 내에 제어명령을 첨가해야 했다. 반면 강태진의 <한글 2000>을 모태로 한 <한/글>은 애초에 그래픽 모드에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사용자가 지정한 문단 형식과 문자 효과들을 그대로 화면에 보여주는 방식을 채택했으며, 자체 개발한 글꼴들도 화면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화면은 그대로 프린터로도 출력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용자 환경은 쉽고 편리한 풀다운 메뉴와 결합하여 누구나 사용설명서 없이도 문서 편집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3) F10 풀다운 메뉴와 다양한 단축키 동시 지원

<한/글>에서는 문서 편집과 관련된 다양한 명령을 풀다운(Pull Down) 메뉴를 이용해 제공했는데, 편집 화면에서는 문서와 몇몇 정보만 보여주다가 F10을 누르면 상단에 메뉴가 보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글>은 고급 사용자를 위해 다양한 단축키(예: 글자 모양 Alt+L)도 제공했는데, 메뉴 안에서도 알파벳을 이용한 단축키를 통해 커서 이동키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거의 모든 명령을 빠르게 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정된 블록의 글자에 그림자와 밑줄 효과를 주고 글꼴을 샘물체로 바꾸려면, Alt+L, S, U, K, S, D를 차례대로 누르면 됐다. 블록은 F3을 누른 후 커서를 이동하여 지정할 수 있었다.

새글자모양 새글자모양2

1.5판부터는 F4키를 이용해 세로줄을 따라 지정된 블록도 만들 수 있었다(아래 그림 참조).

F4블럭

4) 선 그리기 기능 지원

<한/글>은 간단하지만 유용한 선 그리기 기능을 제공했다. 표 기능이 없었던 <한/글>에서 선 그리기는 표를 대신 그릴 수 있는 기능으로 인기가 있었다. Alt+D를 통해 선그리기 모드에 들어갈 수 있었고, Alt+D를 통해 괘선의 종류도 바꿀 수 있었다. 1.2판부터는 선 그리기로 만든 그림을 보호할 수 있는 기능도 추가되어, 정말로 표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선그리기

5) 기타 기능

<한/글>에서는 내부에서 전자계산기와 달력, 전화번호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달력 계산기 전화번호부

 

2. 역사적 가치

1) 한글의 완전한 기계화

<한/글>은 그 제품명에서부터 아래아(ㆍ)를 쓰고 있듯이, 컴퓨터상에서 고어를 포함해 모든 한글을 완전하게 구현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한/글>의 개발자들은 조합형 한글이 지닌 잠재력과 장점 및 한글 창제의 원리를 그대로 기계적으로 구현하는 데 상당히 높은 가치를 두었는데, 그 때문에 이들은 당시 표준으로 채택되었던 완성형 코드 대신 조합형 코드를 선택하며 독자 코드 노선을 걸었다. 이는 개발자의 편의나 경제성을 넘어선 정치적, 문화적 판단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한/글>은 한글 기계화 운동과 꽤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글 타자기 자판 연구와 세벌식 자판 보급과 한글 기계화 계몽 운동을 벌이던 공병우 박사는 1988년 문을 연 한글문화원에서 80년대 중반부터 매킨토시 컴퓨터를 직접 활용하여 한글 글자꼴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한글문화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국어교사 출신의 박흥호와 함께 3벌식 자판 배열을 완성했으며, 3벌식입력기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글 2000>의 개발자인 강태진과 <한/글 1.0>의 개발자가 될 정내권, 이찬진 등과 교류를 맺고 있었으며, 그 인연으로 이찬진은 1990년 10월 9일 한글문화원의 작은 방에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했다. 같은 시기 한글문화원의 박흥호도 한글과컴퓨터에 입사했는데, 그해 말 출시된 <한/글 1.5>에는 3벌식 자판이 추가되었다.

한글 기계화 계몽 운동가들은 한글 창제의 원리에 주목하여 초성, 중성, 종성을 구별한 3벌식 자판을 보급하는 데 주력했고, 탈네모꼴의 3벌식 글꼴을 완성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탈네모꼴의 3벌식 글꼴이 교육에 효과적이고 가독성이 좋다고 주장했으며, 무엇보다 기계화가 용이해서 시각문화를 높이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러 실험 끝에 1984년에는 잡지 <샘이 깊은 물>의 제호를 위해 디자인된 샘물체(샘이깊은물)가 보급되었고, 1985년에는 안상수체가 발표되었다. 1989년 출시된 <한/글 1.0>에서는 3가지 한글 글꼴을 제공했는데, 명조체와 고딕체, 그리고 바로 샘물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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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한글 기계화 및 한글 계몽운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시작된 <한/글>의 개발자들은 조합형 완성형 코드 논쟁에서 일관되게 조합형을 지지했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조합형 지지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한/글>은 많지는 않더라도 3벌식 자판 사용자를 키워냈고, 탈네모꼴 글꼴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데 기여했다.

2) 절대적 점유율과 유사 표준 워드프로세서로서의 정착

<한/글>은 1989년 발매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거의 모든 컴퓨터 사용자가 사용한 워드프로세서였다. 발매 1년 후 1990년 <한/글>의 점유율은 70%를 넘어섰고, 대당 47,000원이었던 <한/글 1.0>의 판매 수익 5천만원으로 이찬진은 1990년 10월 9일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할 수 있었고, 이듬해에는 매출 10억원을 기록했다. 92년 발매된 <한/글 2.0>은 두 달 동안 3만 개가 팔리는 인기를 누렸고, 이후 97년까지 <한/글>의 점유율은 7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물론 이 점유율은 불법복제를 통한 사용자를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한글점유율
손영길, 석영욱, 정우식, 박수영, “㈜한글과 컴퓨터: 제2의 신화창조를 위하여”, 제2회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경영사례연구센터 주최 전국 대학(원)생 사례개발경진대회 우수상 수상작, 37쪽에서.

90년대 중반 MS의 윈도우가 IBM PC의 표준적인 운영체제로 자리 잡으면서, 사무용 소프트웨어 시장에서도 MS 오피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지긴 했지만, <MS 워드>는 <한/글>의 점유율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1998년 한글과컴퓨터가 재정위기를 겪고 경영진이 교체되는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워드프로세서라고 하면 <한/글>을 떠올릴 정도로 <한/글>은 막대한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자국 워드프로세서가 MS 워드보다 높은 점유율을 누리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높은 점유율은 <한/글>의 더 많은 보급에도 영향을 주었다. 초기의 PC 사용자들은 <한/글>의 강력한 한글 구현 능력과 위지위그 편집 기능의 매력에 <한/글>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단 다수의 PC 사용자들이 <한/글>을 이용해 hwp 문서를 작성하다보니, hwp(Hangul Word Processor의 약자)라는 확장자를 가진 문서는 한국 내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이 작성한 hwp 문서를 열어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글>을 설치해야 하는 순환이 만들어졌다. 또한 일단 <한/글>의 메뉴 구성과 단축키 환경에 익숙해진 사용자들은 다른 방식의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는 데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더 좋은 기능이 있는 워드프로세서를 접하더라도 <한/글>의 익숙함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MS 워드의 끈질긴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한/글> 자체의 꾸준한 기능 개선 노력과 사용자들의 한글 애국주의뿐 아니라, 절대적 점유율에 기반한 <한/글>의 선점 효과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심지어 <한/글>은 현재 관공서와 교육기관의 공식 문서 포맷으로 지정되어, 초기의 선점 효과는 제도화된 독점으로 발전한 듯한 인상도 주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자리 잡은 워드프로세서들과 호환되지 않는 <한/글>의 높은 국내 점유율은 국내 문서와 외국 문서 사이의 단절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으며, 자체 코드 노선을 걸어온 <한/글>은 html 등의 다른 형식의 문서로 변환될 때에도 일정한 한계를 보였다.

3) 소프트웨어 벤처 시대의 개막

<한/글>과 한글과컴퓨터는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만으로 수익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다. <한/글 1.0> 출시 당시, 한국에서 소프트웨어는 컴퓨터 제조사들의 판매 보조 수단이거나 아마추어들의 취미거리로 여겨졌다. 삼보컴퓨터에서 보급한 <보석글>은 자신들이 조립 생산하는 컴퓨터와 한글 모듈을 장착해 수입 판매하는 EPSON 프린터의 판매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개발만을 통해 수익을 남기는 업체는 당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프트웨어는 복사해서 사용한다는 인식이 너무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시기였기에, 프로그래밍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도 소프트웨어를 일반인에게 직접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는 힘들었다.

1989년 당시 서울대를 졸업한 이찬진이 ‘서울대 컴퓨터연구회(SCSC)’에서 만난 김형집, 우원식, 김택진 등과 함께 <한/글>을 개발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 소프트웨어로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은 진지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글 1.0>은 1989년 발매 이후 1년 동안 엄청난 불법복제의 환경 속에서도 5000만원이라는 상당한 수익을 올렸고, 그 돈으로 1990년 설립한 한글과컴퓨터는 91년에는 10억, 93년에는 100억이라는 매출을 올렸다. 이를 통해 한글과컴퓨터와 이찬진 사장은 소프트웨어로도 엄청난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소프트웨어 벤처 신화를 남겼고, 이러한 희망 속에서 소프트웨어 벤처에 뛰어드는 후배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4) PC 사용자의 확대

80년대 초 소프트웨어 애호가들이나 게임 매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PC는 점점 많은 사무용 소프트웨어의 개발 덕분에 점점 일반 사용자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애플II의 경우, <비지캘크>라는 스프레드쉬트와 <워드스타>라는 워드프로세서가 ‘킬러앱’의 역할을 했고, IBM PC의 경우, <LOTUS-123>이라는 스프레드쉬트와 MS에서 개발하기 시작한 오피스 프로그램들이 그 역할을 했으며, 매킨토시의 경우, 아도비의 <포토샵>을 비롯한 탁상 출판 프로그램들이 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다소 특수하다.

한국에서는 <한/글>과 같은 편리하고 강력한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개발되기 전까지, PC는 일반 사용자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PC를 구입할 때 몇몇 사무용 프로그램들이 제공되고 게임을 구입해 할 수 있었지만, 그 사무용 프로그램들은 많은 경우 특정한 직업군을 제외하면 불필요했고, 컴퓨터 게임은 즐겁긴 하지만 유용해 보이지 않았으며, 당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하는 <보석글> 역시도 컴퓨터를 구매할 다른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극복할만한 충분한 매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든 IBM 호환 PC에서 작동하고 저렴한 도트 프린터에서도 인쇄를 할 수 있으면서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이 등장하자, IBM 호환 PC는 복잡한 전자기기에 관심이 전혀 없는 일반인에게까지 매력적인 제품이 될 수 있었다. 즉 <한/글>은 한국에서 PC의 대중화에 기여한 일등공신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며, IBM 호환 PC의 한국적 킬러앱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한/글>은 다른 형식의 PC 구입을 방해하는 효과를 가지기도 했다. 상당 기간 동안(거의 현재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글>은 IBM 호환 PC에서 DOS나 윈도우 운영 체제 내에서만 동작했기에, <한/글>에서 만들어진 문서를 열어 봐야 하는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은 IBM 호환 PC를 떠나서 애플 컴퓨터를 구입하거나 리눅스와 같은 운영체제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특정한 목적에서 매킨토시와 같은 다른 PC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DOS나 윈도우가 설치된 IBM PC도 별도로 사용해야 했다. 현재도 많은 국내 애플 PC 사용자들은 윈도우 환경을 별도로 설치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자금융이다(현재는 맥용 <한/글>이 판매되고 있다).

5) 불법복제 문제의 공론화와 국가 대표 소프트웨어의 보호

<한/글>은 국내에서 너무나 높은 점유율을 누린 소프트웨어였다. 그렇기에 1998년 6월 15일 한글과컴퓨터 사장 이찬진이 회사의 재정 악화로 인해 <한/글>의 프로그램 소스를 MS에 넘기고 더 이상의 개발과 판매를 포기하는 대신 MS에서 2천만 달러 투자를 받기로 한다는 기자회견을 했을 때(이하 ‘한컴 사태’),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판매하는 회사가 단기부채 100억원 때문에 부도 직전에 놓였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88년 한컴 사태에는 IMF라는 어려운 금융 환경과 무리한 사업 확장 등 여러 원인이 있었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를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나는 ‘불법복제’였고, 다른 하나는 ‘MS의 공세’였다.

첫째로, <한/글>은 모두가 사용하는 국산 대표 소프트웨어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위기는 프로그램의 질과 같은 내적인 문제라기보다 한국의 ‘불법복제’라는 환경의 문제를 부각시켜주었다. 한컴 사태 이후 ‘불법복제’ 문제는 여러 수준에서 전보다 훨씬 진지하게 다루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구입 증가, 정부의 불법복제 단속 강화, 소프트웨어 업체의 수익모델 다각화 등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로, <한/글>은 국산 대표 소프트웨어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것의 포기는 국가적 손실로도 여겨졌다. 이는 일부 감정적인 판단이기도 했지만, 합리적인 경제적 판단이기도 했다. 당시 벤처기업협회 이민화 회장(메디슨)은 “우리 국민들이 다시 MS워드를 배울 경우 재교육 비용에 3천억원, 한글문서 교체 비용으로 1천억원, MS워드 구매 비용으로 1천억원 등 적어도 5천억원 이상의 국가적 손실이 발생한다. 하지만 아래아한글을 보완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비용은 50억원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국민주 모금 20억원과 메디슨의 50억원 등 100억원을 한컴에 투자하는 대신 MS와의 합의는 간신히 파기되었다. 이후에도 한컴은 여러 번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시장 논리 대 국가 대표 소프트웨어 보호라는 논쟁 구도는 계속 재발했다. 이는 <한/글>이 국가 인프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3. 사회문화적 영향력

1) 타자에서 워드프로세서로

<한/글> 덕분에 타자 자격증은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으로 바뀌었으며, 점차 그런 자격증은 거의 무의미해졌다. <한/글>은 초창기부터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에 깊이 관여했는데, 한글과컴퓨터는 92년 시작된 대한상공회의소 주관 워드프로세서 국가자격검정 시험을 후원했으며, <한/글>을 이용한 편집 교본을 직접 제작 출판하는 한편, 워드프로세서 시험 준비 학원을 직접 모집하기도 했다.

점차 타자 자격증보다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이 필요해지는 시대가 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글>은 자격증 없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격증은 점차 유명무실한 자격증이 되고 말았다. 즉 워드프로세서의 사용은 자격이 있는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일반인의 몫이 된 것이다.

2) 제한적인 탁상 출판의 확대

<한/글>이 점점 많이 보급되고 그것을 이용한 편집 방법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보고서, 논문, 유인물, 자료집, 시험지, 프린트물, 학급신문 등을 <한/글>로 직접 편집해서 인쇄하는 일이 많아졌다. 과거 타자나 등사를 통해 이루어졌을 비전문적인 인쇄물이 모두 컴퓨터상에서 <한/글>로 편집되어 출력된 후, 복사되거나 인쇄업자에게 맡겨져 인쇄되었다. 전문 인쇄업자나 출판업자가 만들어낸 인쇄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문서들이 <한/글>로 제작되었고, 아마추어적인 편집에 기반한 인쇄물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한글과컴퓨터는 1992년 탁상 출판을 염두에 두고 벡터 형식의 글꼴(확대해도 깨지지 않는 글꼴)과 수식편집기 및 다단 편집 등의 다양한 편집 기능을 추가한 <한/글 2.0>을 발표했다. 다양한 기능의 추가로 사용자들은 다양한 편집기능을 사용하며 전보다는 멋진 인쇄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한/글>은 여러 기능적인 한계로 인해 전문적인 출판 시장으로까지는 확대되지 못했다. 즉 <한/글>이 한국의 탁상 출판 문화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지만, 매킨토시와 어도비(adobe)가 이루어낸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3) 한국인만의 <한/글>

<한/글>은 사실상 한국인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워낙 당연하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다보니 <한/글>로 작성한 hwp 문서를 외국인들에게 보냈다는 실수담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해외취업 이력서나 해외대학 원서 등을 hwp 문서로 보내거나 심지어 해외 바이어에게 제품 소개서를 hwp 문서로 보낸 일화들이 수두룩하다. 이는 <한/글>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한국적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거의 최근까지 hwp 문서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한/글>과 <한/글 뷰어>뿐이었기 때문에, hwp 문서를 당연한 듯 공유하는 한국의 문화는 국제적인 교류 과정에서 가끔씩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2013년부터는 한글이 hwp 문서 양식을 공개함으로써 MS 워드와 같은 워드프로세서에서도 hwp 읽기와 편집을 지원하게 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차츰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부록1. 1980년대 대표적인 워드프로세서 비교

 

WordStar

애플II, 도스 등의 환경에서 작동. 텍스트 모드에서 작동. 콘트롤 키를 사용한 다양한 커서키 이동과 제어명령. 그리고 콘트롤 키와 여러 키의 조합을 통해 편집 기능 표시. 80년대 초중반까지 워드프로세서 시장 지배

WordPerfect

텍스트 모드에서 작동. 다양한 단축키를 통해 편집 1986년 4.2버전부터 인기 얻음. 자동 문단 번호 기능, 주석 삽입 기능 제공. 88년의 5.0 버전에서는 미리보기 기능을 제공. 도스용 5.1버전(1989년 11월 6일 출시)이 가장 성공적이었는데, 처음으로 풀다운 메뉴 제공하여 단축키들과 병용. (한/글 1.x와 매우 유사한 작업환경 제공)

<워드퍼펙(WordPerfect)>은 1993년의 6.0 버전부터 텍스트 모드와 위지위그 방식의 그래픽 모드를 동시에 지원. 그래픽 모드의 편집화면에서는 글꼴과 여러 효과들을 편집 중에 그대로 보여준 반면, 텍스트 모드에서는 미리보기를 할 때에만 출력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워드퍼펙

HWP

1989년 4월 출시. 풀다운 메뉴 제공. 그래픽 모드에서 작동하며 위지위그 편집 기능 제공.

hwp

MS Word

1983년 PC World 11월호에 묶여 배포. (그 해 윈도우에서 워드 작동 시연) 마우스를 이용한 위지위그 편집 기능 제공. 실행취소, bold, italic, underlined text 변경 바로 보여줌. 글꼴은 바꾸지 못함. 그러나 UI가 당시의 대표적인 워드프로세서인 WordStar와 달라 인기 얻지 못함(UI 때문만은 아닌 듯. 작업 성능이 너무 느렸던 것으로 추측됨). 1985년 2.0버전부터는 MAC용을 중심으로 개발됨(80년대 동안 MAC용 판매량이 Dos용 판매를 앞섬). 1987년 3.0(그리고 3.01) 출시. 당시 MAC용 워드프로세서에서 최강자로 군림. 1992년 5.1 for MAC은 매우 인기있는 워드프로세서였음. (당시 도스용은 MAC용을 DOS용으로 변형한 것에 불과?)

윈도우용 워드는 1989년 처음 출시. 윈도우 3.0의 출시와 함께, MS 워드는 곧장 IBM 호환 PC용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선두주자가 됨. 1991년에는 DOS용 워드도 윈도우 프로그램 같은 UI로 교체. 1993년에는 6.0 출시. 자동교정, 자동형식 기능 등 제공하여 좋은 평을 받음. 초보적인 탁상 출판 가능.

그리고 Win95와 함께 win95용 word95(office95에 포함) 출시(win 6.0, dos 6 버전의 워드 6.0과 거의 흡사)

84년 출시 도스용 워드 1.1과 2.0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함. 위지위그 등의 기능 혁신 칭찬. 그러나 매우 느린 작동 혹평. 아래 링크, 192쪽.

http://books.google.co.kr/books?id=UCIvSU6Y2GAC&lpg=PP1&pg=PP1&redir_esc=y#v=onepage&q&f=false

 

부록 2. 한/글 워드프로세서(HWP, Hangul Word Processor) 초기 연표

한/글 1.x

  • 1989년 4월 24일 최초의 상용버전 1.0 출시 (5.25인치 2D(360KB) 플로피디스크 3장)
  • 1989년 6월 1.1판 출시
  • 1989년 12월 1.2판 출시
  • 1990년 6월 1.2L판 출시
  • 1990년 9월 1.3L판 출시
  • (1990년 10월 한글과컴퓨터 설립)

한/글 1.5x

  • 1990년 12월 20일 1.5판 출시 (5.25인치 2D(360KB) 5장)
  • 1991년 1월 1.51판 출시
  • 1991년 11월 18일 1.52판/1.53D 출시

한/글 2.x (디지털 탁상 출판을 염두에 둔 워드프로세서)

  • 1992년 7월 27일 2.0 전문용 출시
  • 1992년 9월 21일 2.0 일반용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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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2쇄 발행

사진 2016. 1. 20. 오전 10 05 47

오늘 택배를 받았습니다. 택배 상자 속에는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두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뒷쪽을 펼쳐보니 2015년 12월 7일에 2쇄가 발행되었다고 적혀 있네요! 인터넷서점들의 판매지수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팔린 모양입니다. 번역 계약서를 쓸 때, 매절이 아닌 인세로 계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12월 7일에 발행된 2쇄본을 왜 이제야 보내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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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2015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저와 부인님이 함께 번역한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가 2015년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

 

전에 책 출판 소식을 블로그에 쓰긴 했지만 책 제목과 표지에 대한 불평만 하고서, 정작 책에 대한 소개는 하지 못했는데요. 늦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책에 대한 소개를 올려볼까 합니다.

이 책은 데이비드 에저턴의 1999년 논문 “From Innovation to Use: ten eclectic theses on the history of technology“에서 밝힌 연구 계획을 책으로 완성한 것으로, 원래의 책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구식의 충격 : 1900년 이후의 기술과 세계사” 정도가 됩니다. 이 책은 혁신 중심의 기술사에서 사용-기술 중심의 기술사로 초점을 옮김으로써 기술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깨는 동시에 20세기에 대한 전지구적인 기술사를 서술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역자 서문에서 우리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에저턴은 첨단이나 혁신 같은 기준 대신 그 기술의 사용, 사용 중인 기술(technology-in-use)에 주목한다. 사용 중인 기술을 통해 돌아본 오늘날의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기술의 세상과는 완연히 다르다. 석유에 자리를 내준 것으로 여겨지는 석탄은 19세기보다 지금 더 많이 생산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이 동원된 전쟁이었다. 즉 석탄과 말은 20세기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석유와 자동차만큼이나 중요하다. 또한 사용기술을 통해 본 이 세상에는 자동차보다도 많은 자전거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수많은 집들은 콘크리트가 아닌 초라한 양철판과 골함석으로 덮여 있다. 이러한 초라한 물건들은 현대적인 느낌을 주지 않지만 분명 20세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대의 물건들로, 20세기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비행기와 원자력만큼이나 중요한 기술들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20세기의 기술과 세계사”라는 책의 부제는 이 책이 부유한 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의 역사를 다루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은 대만, 아르헨티나, 가나, 인도, 중국 등 지금까지 기술의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가난한 지역들을 끊임없이 조명해주고 있다. 즉 사용기술의 세계에서는 기술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추격과 추월의 관점에서만 이해되었던 20세기 한국의 기술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국의 수많은 아파트들은 단지 선진국 기술의 모방품이나 혹은 기형적인 한국의 주거 문화로만 볼 수 있겠는가?

사용기술의 세계에서는 발명이나 혁신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유지관리가 중요하다. 발명과 혁신이 이루어지는 곳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유지관리는 기술이 사용되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유지관리는 구매력이 떨어지는 가난한 지역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폐차되었을 법한 낡은 자동차들이 가나에서는 날마다 끊임없는 수리를 받으며 영생을 누리고 있다. 또한 유지관리는 부유한 나라의 발명과 혁신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엔지니어들은 새로이 발명된 물건을 유지관리를 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며, 이러한 유지관리 역량의 축적은 종종 혁신 역량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래서 일본의 자전거 산업과 전자 산업은 보잘 것 없는 수리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지관리는 발명이나 혁신에 뒤처지는 활동이 아니라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인 활동인 셈이다.

흔히 국가의 기술 혁신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한다고들 말한다. 반대로, 기술의 발전이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에저튼의 책은 두 생각 모두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에 따르면, 선진국조차도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의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이며, 국가의 경제 성장과 기술 혁신은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가장 빠른 경제 성장을 보이는 나라는 오히려 기술 혁신에 큰 투자를 하지 않는 가난한 나라였다. 또한 비행기, 인터넷 등 전 세계를 지구촌으로 만들어준다던 여러 기술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국가라는 경계는 기술의 선택과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실 비행기와 같은 기술은 대부분 국가적 안보의 목적으로 개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모방되었다. 석탄 액화 연료와 같은 비효율적인 기술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국가의 ‘연료’ 안보라는 목적을 고려해야만 한다. 즉 기술의 혁신은 흔히 생각하는 만큼 국가의 경쟁력을 키우지도, 국가의 경계를 없애주지도 못했다.

이렇듯 이 책은 기술과 관련된 수많은 믿음을 깨뜨린다. 그렇다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무엇이었는가? 도대체 기술은 국가의 경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기술은 세계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기존의 답변들에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그 답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료한 입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답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문제를 제기하는 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답은 아직 열려 있다.

이 책에 대한 국내의 좋은 리뷰로는 아래의 두 가지가 있으며, 저자의 들어가는 글 역시 책에 대한 아주 좋은 소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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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출간

2010년 정도부터 부인님과 번역을 시작했던 The Shock of the Old: Technology and Global History since 1900이 드디어 오늘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석탄, 자전거, 콘돔으로 보는 20세기 기술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습니다.

 

초벌 번역은 2011년 12월에 끝냈는데, 출간은 2015년 1월이라니 이게 무슨 –_-;;

출판사 탓을 하는 건 아닙니다 ㅎㅎㅎㅎ

 

이미지를 클릭하면 창이 닫힙니다

 

출판사의 소개는 아래를 보세요.

http://www.humanistbooks.com/book/bookView.aspx?bookcode=NC000424&page=1&btype=history&otype=date&cntTF=T

 

근데… 표지는 그닥 맘에 들진 않는군요.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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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매거진”(magazine)과 “정비사”(fitter)

아래에 인용한 부분 역시 <구식의 충격>의 일부로,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어 했던 부분인데,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자동차가 지역 시스템 내에서 재정비될수록,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듯한 뚜렷한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수리에 의한 유지관리의 상태’라는 말에 감동(?)을 받았었다. 번역해놓으니 그 맛이 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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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정비는 자동차가 있는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일부 지역과 환경에서는 특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1970년대 초엽 서아프리카에 있는 국가 가나에는 ‘정비사(fitters)’라 불리는 많은 수의 자동차 수리공이 있었다. 그들은 흔히 ‘매거진(magazines)’이라 불리는 특정한 지역에 모여 판잣집이나 야외에서 작업을 했다. 가장 큰 곳은 수암 매거진으로, 이곳에서는 1971년 당시 거의 6,000명의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직접 자동차 수리에 직접 종사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부품을 팔거나 매거진에 음식 따위를 공급했다. 매거진은 엄청나게 성장하여, 1980년대 중반에는 그 인구가 대략 40,000명까지 증가했으며 모든 종류의 물건을 만드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 광대한 작업 단지에서 사용되는 도구는 망치, 이 빠진 스패너 세트, 줄, 드라이버 등의 기본적인 것들뿐이었다. (크기 조절이 가능한) 몽키 스패너는 오래 가지 못했고, 모루는 즉석에서 급조되었다.  이 넓은 단지에서 기계 공구의 수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가장 정교한 도구는 전기 용접 장비로, 매거진 내 제조 파트의 핵심적인 도구였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곳에서 호환가능한 부품과 정밀 공학, 그리고 정교한 정비 매뉴얼로 이루어진 산업의 생산품들을 유지관리하고 수리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매거진들은 그러한 자동차나 화물차, 버스를 처음 제조 당시의 상태로 유지할 수 없었다. 새로 들어온 차 또는 트럭은 이곳의 이용가능한 지지 기반과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수입된 새 자동차들은 사고나 윤활유 부족, 그리고 주되게는 유지관리 부족으로 인해 상태가 나빠져 갔다. 그러다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 문제에 해박한 학자의 말로,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자동차가 지역 시스템 내에서 재정비될수록,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듯한 뚜렷한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수리에 의한 유지관리의 상태이다.’  지역 버스와 트럭은 거의 매일 수리를 받았으며, 이는 극도로 저렴한 운송수단을 제공했다. 한 가지 이유는 이 운송수단들이 그들의 평형점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것을 교체하려 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정비소를 항시적으로 드나들며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투자와 감가상각의 경제학은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즉 비용은 유지관리와 수리에 드는 것뿐이었다.
 
가나의 자동차 수리공들은 자동차와 엔진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그 지역의 재료들을 이용해 계속 유지시키는 방법에 대해 은밀한 지식을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동차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들은 이에 대해 그 어느 부유한 국가의 사용자보다도, 심지어는 수리공보다도, 훨씬 깊이 알게 되었다. 이는 두 명의 인류학자가 쓴 한 푸조 504의 ‘일대기’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데, 그 차는 1990년대 콴쿠라는 이름의 운전수가 장거리 택시로 몰고 다녔던 자동차이다. 유지관리와 수리에 대한 고려는 차를 사는 순간부터 콴쿠의 머리 속에 있었는데, 그는 504의 중고 차체를 구입했고 나중에 중고 엔진을 사서 예비용으로 사용했다. 콴쿠의 자동차는 그 일생동안 반복해서 망가졌으며, 그때마다 차체와 회로를 복구하고, 휘발유를 덜 소비하는 새 카뷰레터를 달아 가면서 계속 굴러갔다. 교체용 개스킷은 폐타이어로 만들어졌고, 퓨즈는 구리선으로 교체됐으며, 못은 고정핀 대신 사용됐다. 그 자동차는 수년간 달렸다. 이 차의 일대기 작가들이 말했듯이, ‘가나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자동차의 “열대지방화(tropicalisation)”는 엔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철저한 지식뿐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오래된 물건을 한정된 재화밖에 없는 상황에서 계속 굴러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소 독특한 지식에 특히 의존해 있다.’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손실이 커 보이기도 하지만, 정비 매뉴얼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규칙을 무시하는 이 같은 유지관리 방식은 인간이 알아낸 기술적 수완의 극단에 자리한 놀라운 사례였다. 이는 크리올 기술의 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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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노새, 황소

부인님과 함께 진행하던 에저튼의 <구식의 충격: 20세기 기술과 세계사> 번역 원고를 드디어 지난 달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원래의 예정일보다 거의 1년이나 늦게 원고를 넘겼지만, 출판사의 관계자분께서는 아래와 같은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 일들도 많았습니다만, 무사히 번역 마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여나 제가 진행하는 데 있어 언짢게 해드린 부분 있으셨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ㅜㅜ

 

 

언짢기는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희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_-;;

 

어쨌든, 교정이 남았기 때문에 실제 출판일은 내년 3월은 넘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라도 원고를 읽고 비문이나 오탈자를 잡아주실 의향이 있으신 분은 이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메일로 원고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맛보기로 책의 일부를 보여드립니다.^^

 

말, 노새, 황소

 

인간의 목적을 위한 말의 사용은 수천 년 전에 발명되었다. 말의 번식, 사육, 훈련, 유지는 야생에 존재하지 않던 동물을 만들어내는 전문적인 일이었다. 만약 말의 힘이 최대로 사용된 시대를 결정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최근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말은 전(前)기계 시대의 잔재가 아니었다. 말에 의해 굴러가는 1900년의 거대한 도시는 새로운 도시였다. 1900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인 영국에서, 수송을 위한 말의 사용은 19세기 초가 아니라 20세기 초에 정점을 찍었다. 어떻게 ‘철마’가 끄는 기차의 시대에 말이 끄는 수송 수단이 함께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경제 개발과 도시화가 더 많은 승합 마차, 화물 마차, 소형 마차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기차와 배가 상품의 장거리 수송을 담당했다면, 짧은 거리에서는 마차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일례로, 거대한 철도 조차장과 운하 시스템의 교차점에 있는 런던 캠든 시장(Camden Market)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의 수많은 낡은 건물들이 마구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건물들은 근처 리전트 파크(Regent’s Park)의 승마용 동물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화물 견인용 동물들을 위한 곳이었다. 1924년 당시 가장 크고 가장 혁신적인 영국 철도 회사 LMS(London, Middleland and Scottish)는 자신이 보유한 기관차(1,0000대)만큼이나 많은 수의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 회사가 보유한 자동차는 1,000대를 겨우 넘겼을 뿐이었다. 1930년 당시 LNER(London and North Eastern Railway)은 7,000대의 증기기관차와 5,000마리의 말, 그리고 겨우 800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14년 경 세계의 가장 부유한 도시들에서, 말이 끄는 수송수단이 동력 엔진을 단 버스, 화물차, 승용차나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농업의 경우, 말의 최고 전성기는 보다 늦게 찾아왔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말 개체수는 1950년대에 정점을 찍었는데, 이는 목재를 벌채하는 데 말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가장 생생한 사례를 제공한다. 농사용 말의 이용은 1915년에 최고치에 도달했는데, 당시 미국 농장에서는 2100만 마리가 넘는 말이 이용되고 있었다. 이는 1880년의 1100만 마리에서 증가한 수치로,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이때의 수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미국의 사례는 특별히 흥미를 끄는데, 왜냐하면 20세기 초 미국의 농업은 고도로 기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말의 힘에 의존한 농업이었다. 우리는 시골에서의 말에 대한 의존도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농사용 말의 이용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당시, 경작지의 3분의 1 정도는 말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말은 풀, 건초, 곡물의 거대 소비자였다.  [이러한] 기계화된 농업 덕분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거대 국가이자 1910년 무렵 단연코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 삶의 한 영역에서, 수송용 말의 사용은 특히 두드러졌다. 1, 2차 세계 대전은 산업화된 전쟁이자 공학과 과학과 조직화의 위업으로 간주된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때문에 두 전쟁에는 엄청난 수의 말이 사람처럼 징집되었다. 모든 교전국은 말에 의존했으며, 노새를 비롯해 짐을 나르는 다른 동물에도 의존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 소규모의 영국 군대는 25,000마리의 말을 가지고 있었지만 1917년 중반 대규모의 최신 영국 군대는 591,000마리의 말과 213,000마리의 노새, 47,000마리의 낙타, 11,000마리의 황소를 보유하게 되었다. 1917년 말 서부 전선에만 368,000마리의 영국 말과 82,000마리의 영국 노새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수치는 그곳에 배치된 영국 자동차의 수를 훨씬 상회했다. 이는 기병에 대한 과소평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탈 것으로 이용된 말은 서부 전선에 배치된 영국 말 중에 겨우 1/3에 불과했으며(그리고 이 중 일부만이 기병 부대에 속해 있었다), 대다수는 현대전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물량을 수송하는 데, 특히 철도의 종점에서 전선까지 운반하는 데, 이용됐다. 이러한 동물 이용은 영국 내에 존재하는 말을 활용하기 위한 예외적인 응급 조치가 아니었다. 말은 정말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동물이었고, 그래서 영국은 429,000마리의 말과 275,000마리의 노새를 미국에서 사들였으며, 막대한 양의 사료도 수입했다. 세계 말 시장을 활용하는 영국의 능력은 영국 군사력에 핵심적이었다.  영국만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1918년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미국 군대는 각 대규모 보병 사단마다 2,000마리의 견인용 말을 비롯해 2,000마리의 타는 말과 2,700마리 이상의 노새를 갖추었다. 이는 병사 4명당 말 또는 노새 1마리가 있는 셈이었다. 

 

말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보여주는 보다 적나라한 예는 2차 세계 대전이다. 흔히 장갑 편대 중심으로 그려졌던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군대는 1차 세계 대전 때의 영국 군대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말을 갖추고 있었다. 말은 ‘독일 군대의 기초 수송수단’이었다. 1930년대 독일의 재무장은 말의 대량 구매를 뜻했으며, 그리하여 1939년 무렵 독일 군대는 590,000마리의 말을 갖추는 한편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 3백만 마리를 남겨두었다. 각 보병 사단은 스스로를 옮기는 데 약 5,000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1941년 소련 침공을 위해서는 625,000마리의 말이 소집됐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독일의 말 군대는 점점 더 거대해졌고, 결국 독일군은 자신이 정복한 나라들의 농업용 말을 약탈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45년 초 독일군은 120만 마리의 말을 갖추었다. 그리고 전쟁 중 손실된 말의 총수는 150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과거 그 어느 전쟁보다도 더 많은 수의 말을 전투에서 볼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방식의 수송 수단이 사용되긴 했지만, 병사 대 견인용 말의 비율 역시 증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대군단(그랑 아르메, Grand Armée)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의 말과 함께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사실, 모스크바에 이르는 데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세기 초반 몇 십 년이 지난 시점부터 전 세계적으로 말과 노새의 개체수가 떨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은 부유한 도시에서 사라졌고, 부유한 나라의 들판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동물의 견인력이 계속 중요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힘을 대체하는 용도로서 더욱더 중요해지까지 했다. 쿠바의 농업은 1960년대부터 소련과 동유럽의 농기계와 원조를 통해 변화를 겪었고, 결국 동물 견인력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9년 구소련 블록이 붕괴하면서, 쿠바 정부는 동물 견인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농업용 말의 개체수도 회복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동물은 황소였다. 황소를 번식시키고 대규모로 훈련시키면서, 그들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기반도 구축되었다. 황소 개체수의 회복세는 정말 극적이었다. 1960년 500,000마리에서 1990년 163,000마리까지 떨어졌던 황소의 개체수는 1990년대 말 380,000마리까지 증가하여, 40,000대의 트랙터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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