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기간인가보다

그저께는 안사가 안들어오더니
어젯밤엔 안사, 춘기 둘다 안들어왔다.
같이 TV 볼 사람이 없으니 TV의 재미가 떨어진다.. 앙 ;;;

나도 담주까지 책 두권 읽고 서평 써서 내야하는데..
영어로 된 책을 읽으려니 잘 엄두도 안나고..
책 펴놓고 엎드려 자다가 책에 침이나 묻히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인데 민망하고나.. ;;;

그러다 어젯밤 자려다가 퍼뜩!
혹시 번역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들자마다 이불에 누웠다 말고..
sis에 접속해서는 책을 검색해봤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나.. -_-;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걸 말야.. ;;;

하이에크의 The Constitution of Liberty는 자유헌정론으로 있었고..
앤서니기든스의 The Constitution of Society는 사회구성론으로 있었다.

우하하… 살았다… ^^;;;
이제부터 열심히 읽고 서평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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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XP 정품인증

주말에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학교에 갔더니
(오늘 서울에 올라왔기 땜에 옷을 갈아입을 수 없었다)
날이 으스스해서 못참고 일찍 집에 왔다.
평소같으면 시원했을 날씨임에도
노느라 몸이 좀 피곤했는지 감기기운도 좀 생긴것 같고.. 어쨌든..

계속 TV 보다가 방금 컴퓨터를 켰는데.. 정품인증하라면서 로그인을 안해준다.
지금 하는 웹서핑은 자동으로 뜬 정품인증 대화상자 아래의 정품키구매를 클릭해서 뜬 익스플로러 주소창에 홈피주소를 입력해서 들어온 것임.

실은 두달 전부터 정품인증 메시지는 계속 떴었다.
두달 전 xp를 깔면서 ’30일 이내에 정품인증을 받아야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는데..
CD에 있는 인증키도 쳐넣어보고
각종 crack serial 검색으로 찾은 인증키도 쳐넣어봐도 안되더라고..
모르겠다 싶어 30일 기다렸더랬지.
29일째 되는 날 ‘1일 이내에 정품인증을 받아야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떴고..
마음 졸이며 30일째 되는 날 컴퓨터를 켰더니..
’30일 이내에 정품인증을 받아야합니다’ -_-;;;
라고 뜨더라고. ;;;;

그걸 보고.. 이게 그냥 겁주기용 메시지라 생각하고
계속 무시했더니.. 오늘 얘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네.
어떻게 해야하나..

음.. 일단 자기컴 OS가 xp인 사람들 말야..
시리얼 넘버(xxxxx-xxxxx-xxxxx-xxxxx-xxxxx)좀 가르쳐줘.. -_-;;
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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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 민주노동당 당선자 10인의 면면: [프로필] 노동-농민-여성-학생운동권의 간판급 현장운동가들 by 최서영 기자

민주노동당이 창당 4년만에 4.15총선에서 민주당을 제치고 ‘제3당’으로 대약진, 10석의 의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특히 16일 새벽 정당투표 득표율이 엇갈리면서 10선을 노리던 자민련 김종필(JP) 총재가 간발의 차이가 낙마하고, 대신 노회찬 민주노동당 선대위원장이 당선된 것은 17대 총선의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 장면으로 꼽히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는 그동안 제도권 국회가 금기시해온 노동계, 농민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권의 내로라 하는 쟁쟁한 현장운동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국회 운영 및 의정활동에도 일대 변화를 몰고올 전망이다.
  
  다음은 이미 대통령선거에서 널리 알려진 권영길 대표를 제외하고, 앞으로 국회에서 활동할 민주노동당 당선자 9명의 면면이다.
  
  울산북구 조승수(41세) 당선자
  
  창원을의 권영길대표와 함께 울산북구에 출마, 영남권을 강타했던 지역주의 태풍을 헤치고 당당히 승리한 조승수 당선자는 누가 뭐래도 민주노동당 승리의 견인차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환경운동, 시민운동, 정당활동, 시의원, 구청장 등의 경력이 말해주듯 그의 당선은 결코 일시적 정치바람이나 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외길을 걸어온 데 따른 필연적 결과다.
  
  조 당선자는 지난 80년대초 동국대학교 재학중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 시위를 주도해 구속되면서 제적됐다. 그후 현장노동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인천의 한 기업체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86년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벌여 해고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번째로 구속됐다. 90년대 초부터는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중당 등 진보정당에 몸을 담기 시작했고, 95년 지역노동자의 전폭적 지지로 울산시의원에 당선되면서 지방의원으로서 본격적으로 정치수업을 시작했다.
  
  98년에는 노동계 정치세력화의 시험무대로 여겨지던 지방선거에 민주노총의 추천으로 현대자동차가 소재한 울산 북구청장 후보로 나서 당당히, 그것도 전국 최연소로 당선됨으로써 전국적인 조명을 받았다.
  
  특히 구청장으로서의 합리적 사고와 결정으로 그의 노동운동 전력을 우려했던 일부 구민들의 불안감을 불식시켰고 원만한 성품과 강한 리더십, 포용력으로 지역 노동계로부터도 신임을 받아, 이번에 국회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가 출마한 울산에서는 전국에서 민주노동당 정당투표지지율이 21.9%로 가장 높게 나와, 그의 당선이 갖는 함의를 한층 깊게 하고 있다.
  
  비례대표 1번. 심상정(46세) 전 금속노조 사무처장
  
  서울대 학생 출신의 심상정 당선자는 대학재학중 최초로 여성학생회를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계기로 미싱사 자격증을 가지고 구로공단 공장에 세칭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의 한길을 걸어온 학생출신 노동운동가의 상징적 존재다.
  
  1985년 역사적인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후 서울노동운동연합을 결성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쟁의국장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집단폭력, 집단방화 등 11가지 죄명으로 10여년간 수배생활을 겪는 등 25년간 노동현장에서 뼈가 굵었다.
  
  25년간의 노동운동기간에 단위노조 위원장이나 민주노총 임원 등 유려한 경력 대신 실무자의 위치에서 민주노총 강화, 금속산별노조 건설과 주5일제 등 노동운동의 중요한 과제들을 묵묵히 수행해왔다. 지난해 9월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끝으로 오랜 노동현장을 떠나,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전 당원투표에서 비례대표 투표 결과 1위를 차지했다.
  
  특히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이 새로운 희망으로 조화를 이루는 진보정치를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는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 감내해야 할 고통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지금, ‘여성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 여성의 역할에 적극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선자가 된 15일 밤, 심 당선자는 SBS 토론에 출연해 대학동기인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과 팽팽한 설전을 벌이는 등 앞으로 간단치 활동을 예고했다.
  
  ▶약력
  1959년 2월 27일생
  1980년~ 81년 구로 3공단 소재 남성전기 노동조합 교육부장, 강제사직
  1983년~ 85년 구로 1공단 소재 대우어페럴 미싱사, 노조결성 및 쟁의로 수배
  1985년 6월24일 구로동맹파업 조직, 주모자로 지명수배
  1985년~ 86년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주도, 중앙위원장 역임
  1987년~ 95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쟁의부장, 쟁의국장, 조직국장 역임
  1996년~2001년 민주금속연맹, 금속산업연맹 사무차장
  2001년~2003년 9월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 84년부터 93년까지 10년간 수배상태, 93년 징역1년6개월에 3년 집행유예 선고
  2000년~2002년 2월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
  2000년~ 현재 민주노동당 대의원, 중앙위원
  
  기호 2번. 단병호(56세) 전 민주노총위원장
  
  본인의 표현을 빌면 “학교 다닐 때는 공부가 싫어 어머니 속을 무던히 썩였고 그게 아직도 죄스러운 사람”이다. 구속과 수배로 점철된 전노협-민주노총 위원장 시절에도 자식들과 고생하는 아내 때문에 흔들렸으며, 아내의 신뢰가 없었다면 ‘노동운동가 단병호’는 없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 하지만 노동운동가로서 단병호의 삶은 무엇보다 이 사회의 척박한 노동환경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알칼리성의 시멘트가 날리는 작업장에서 머리카락 빠져가며 12시간의 중노동을 해야만 했던 80년대초 서울 창동의 동아건설 시절. 당시 단병호는 노동운동에 눈을 떴다. 막 결혼한 아내와 함께 10만원 들고 상경해 ‘안정적인(?)’ 삶을 위해 취직한 공장. 그곳은 군대식 노무관리가 판을 치고, 머리가 깨지고 손가락이 잘려도 한푼 받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지옥도였다.
  
  단병호는 그런 삶에서 노동과 자신의 관계에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노동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누구의 선동이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닌 척박한 노동환경에서 스스로의 고민을 통해 깨어난 참 노동자인 그는 노동운동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전국적 차원의 노동운동 지도자로 성장했으며, 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노협) 의장을 맡아 명실공히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전노협 시절부터 민주노총까지 단병호는 통칭 단위원장으로 불렸으며,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로 그는 직책에 걸맞게(?) 8년 5개월 동안을 구속과 수배로 보낸다. 수배 중이던 95년의 어느날, 전노협 주최의 노동교육 도중 만난 한 노동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한동안의 생각 끝에 “아이들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콧잔등을 살짝 일그러 뜨리던 단병호였다. 그 와중에 재롱을 피던 딸은 어느새 아버지의 활동을 이해하고 조언해주는 동반자처럼 성장했고, 아내는 홀로 야채장사를 하며 분당에 33평 아파트를 마련했다.
  
  “안 믿어질 이야기 같아서 이야기하기 그런데, (아내는)내가 일할 때 한번도 폭발할 정도의 불만을 터뜨린 적이 없다. 구속되고 뭘 해도 그런 적이 없다…(중략)..이제 못살아하고 이렇게까지 폭발한 적은 없었다. 그런 폭발이 자주 있었다면 내가 이런 일 할 수 있었을까.(단병호, 2004년 3월 24일자 <한겨레> 인터뷰)”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아내 이순애는 단병호에게 그렇게 이해자로서 한편으론 마음 든든한 지지자로서 자리잡아왔다.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그가 놓지 못한 꿈,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나설 결심을 할 때도 아내는 “이번에 하는 거 또 감방가는 거 아니에요”라고 물었을 뿐 그의 행동을 이해해 주었다.
  
  1979년 처음 만나 늙수구레한 총각이 사주던 국밥에 넘어가 함께 살아온 지 25년. 부인 이순애씨는 남편 단병호씨를 가리켜 “다정다감한 남자, 푸근한 남자”란다.
  
  ▶약력
  1949년 출생
  1967년 포항 동지상고 중퇴
  1983년 동아건설 창동공장 입사
  1987년 동아건설 창동공장노조 초대 위원장
  1989년 서울지하철 파업 관련 1차 구속
  1990년~94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1-4대 위원장
  1990년 전노협 활동 관련 2차 구속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대표
  1995년 현총련 파업 관련 3차 구속
  1996년 4.19 혁명상 받음
  1996년 민주금속연맹 위원장
  1998년 금속산업연맹 위원장
  1998년 민주노총 총력투쟁 관련 4차 구속
  1999년 8.15특사 형집행 정지로 석방
  1999년 9월 민주노총 3대 위원장 당선
  2000.7.27 ~ 8.18 서울역 단식농성
  2001년 민주노총 4대 위원장 당선
  2001년 6월15일 형집행 정지 취소 검거령 내림
  2001년 8월2일 노동운동 관련 다섯 번째 수감 (형집행정지 취소)
  2001년10월3일 출소 앞두고 노동운동 관련 여섯 번째 수감 (5차 구속)
  2002년 3월18일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 선고
  2002년 7월11일 2심 재판에서 징역 1년 6월 선고
  2002년11월13일 대법원에서 형 확정 판결
  2003년 4월 3일 만기출소
  2003년 12월 불교인권상 받음
  2003년 12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 불출마 선언
  2004년 2월 3일 민주노총 위원장 퇴임.
  
  기호 3번. 이영순(43세) 전 울산 동구청장
  
  이영순 후보는 울산 동구 1대 민선구청장인 남편 김창현씨가 취임 20여일만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후, 1999년 10월 보궐선거에 출마해 3만1천14표(득표율 45.9%)를 얻어 구청장에 당선됐던 화제의 인물. 이 후보는 남편이 구속된 뒤 지역주민들과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구청장 석방대책위’를 구성, 국가보안법 철페에 대한 광범위한 여론을 형성하여 구속의 부당함을 밝혀냈다.
  
  2년8개월간 구청장 재직시절 지역언론과 노동부, 검찰 등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INP중공업 사내하청노조와 홍익매점 노조, 두건의 노조설립 필증을 교부하는 등 노동자 서민을 위한 일관된 행정으로 주민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음. 현재 비례대표 3번을 배정받은 이 후보는 울산 동구에 출마한 김창현 후보와 ‘부부 구청장’ 신화에 이어 ‘부부 국회의원’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지 주목받았다.
  
  “부부 동시 출마는 지나친 욕심”이라는 일각의 시선에 이 후보는 여성은 남성을 뒷바라지하는 존재라는 그릇된 인식을 깨고, 한 사람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정치가로활동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실제 이 후보는 1985년 대한모방 현장취업으로 노동현장에 투신, 16년간 울산 지역운동에 몸담았으며 여성실업문제, 어머니회, 울산여성회, 울산시지부 여성위원장 등 오랫동안 여성운동, 여성행정가로 활약하며 독립된 여성으로서 일관된 길을 걸어왔다.
  
  ▶약력
  1962년 생
  1985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
  1984~85년 서울과 경기도 광명에서 야학강사 활동
  1985년 대한모방 현장취업
  1986년 계원예고 강사(역)
  1988년 울산민주화교사협의회 간사(역)
  1996~99년 동구사랑 어머니회 회장(역)
  1998~99년 울산 여성실업대책위원회 공동대표(역)
  1999~2002년 울산광역시 동구청장(역)
  현재 울산여성회 이사, 민주노동당 울산광역시지부 여성위원장
  
  기호 4번. 천영세(62세) 민주노동당 부대표
  
  ‘천 지도’. 민주노동당원들이 천영세 당선자를 가리킬 때 부르는 별명이다. 전노협 출범 당시부터 민주노총까지 이어온 지도위원이라는 직함이 큰 역할을 했겠지만, 그에 걸맞는 존경과 신뢰가 없는 한 이런 별명으로 불리는 것은 쉽지 않다.
  
  충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천영세 부대표. 60년대 시골청년들이 그러했듯 그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는다. 농사를 짓기 시작할 때만 해도 농민의 자식임에도 “농민이 못사는 것은 게으르고 무식해서”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3년간의 농사생활은 그의 인식을 바꿔 놓는다.
  
  4H라든가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선배들을 비롯해, 서울로 유학갔던 친구들이 가져 온 <사상계>를 통해 그의 이런 인식은 점차 확대된다. 인식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낳아 청년 천영세는 66년 고대 사회학과에 진학한다.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한맥’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농촌 문제를 연구하던 천영세는 농촌의 저곡가 정책이 노동자의 저임금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급속한 농촌 해체로 도시에 유입된 인력은 곧 저임금 노동자로 편입되었고, 이는 당시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었다.
  
  결국 노동운동으로 투신할 것을 결의한 천영세는 화학노조에서 노동조합 조직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또한 75년부터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노동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당시 노조 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아 나간다. 그러나 화학노조의 활동은 당국의 압력으로 인해 해고되면서 무산되었고, 이후 85년까지 한국노총에서 교육조사, 정책연구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당시 노총이 어용화의 길을 치달으면서 몇몇 상근자들을 해고하자 이에 반발해 사표를 내고 만다.
  
  이후 한국노동교육협회를 통해 지속적인 교육활동을 벌이던 천영세는 90년 역사적인 전노협의 출범을 맞으면서 지도위원으로 추대된다. 이후 천영세는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넘어가는 한 길에 70년대 노동운동의 선배로서 8, 90년대 후배들과 굳건히 어깨걸고 자리를 지켜왔다.
  
  1997년. 80년대 말부터 제기된 진보정당론이 그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영세는 권영길과 더불어 전국연합과 민주노총 내의 많은 이견을 조정해내며 ‘국민승리 21’을 결성, 결국 현재의 민주노동당의 기초를 닦는다.
  
  농민운동에서 시작해 노동운동으로, 그리고 그와 같이 했던 많은 동지들이 떠나간 자리에서도 꿋꿋하게 민중적 대의의 길을 지켜왔던 천영세. 그는 흰 눈 속에 의연히 서있는 소나무와도 같은 존재다.
  
  ▶약력
  1943년 생
  1970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1971년~73년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
  1973년~77년 한국노총 화학노조 기획실장
  1974년~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산업사회교육위원
  1979년~85년 한국노총 정책위원
  1986년~89년 한국노동교육협회 사무국장
  1990년~95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상임지도위원
  1992년~97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공동의장
  1997년 국민승리 21 권영길 대통령 후보 선대본부장
  2000년~2002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1995년~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
  2000년~현재 통일연대 공동상임대표
  2002년~현재 민주노동당 부대표
  
  기호 5번. 최순영 (52세) 민주노동당 부대표
  
  1979년 YH 무역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 습격. 정권이 민주노조를 짓밟기 위해 단행된 직장폐쇄에 항의한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은 유신독재의 붕괴를 알리는 투쟁이자, 전태일에서 시작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80년대와 이어준 기념비적인 노동운동사로 기록되어 있음. 당시 26살의 YH무역 지부장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최순영 후보는 자신을 ‘언니’라 부르는 여성 노동자들의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눴던 영원한 노동운동의 ‘언니’다.
  
  최 후보는 1983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1987년 전국여성노동자회 결성, 1984년 광명에서 전국 최초의 비영리 탁아시설인 ‘보람탁아소’, 1989년 부천 ‘튼튼이 아가방’ ‘부천여성노동자회 등을 만들어 여성과 가족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지역에서 여성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했다.
  
  아울러 부천에서 아파트 자치와 부녀회 운동을 주도하면서 1991년 부천시의원으로 당선돼 최초의 의정감시단인 ‘의정지기단’을 구성하고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의정활동, 탁월한 조정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1995년 시의원 재선과 동시에, 시의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전국 최초로 학교급식 문제를 시의원 공약으로 내걸었던 최 후보는 시의원 역임시, 담배자판기 철거조례, 촌지안주기 운동 등 지역주민의 삶에 밀착한 의정활동을 펼쳤으며 가정법률상담소 부천지부를 열어 억울하고 힘없는 여성과 시민들을 위해 뛰어왔다.
  
  ▶약력
  1953년 생
  1970년 YH무역 입사
  1975년 YH무역 노동조합 위원장
  1979년 일명 ‘YH사태’로 수감
  1983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여성부장
  1984년 광명시 보람탁아소 개원 원장취임
  1987년 한국여성노동자회 운영위원
  1989년 부천여성노동자회 창립, 회장
  1991년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 운영위원
  1991년 의정지기단 자문위원
  1993년 교육개혁과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 운영위원
  1994년 학교급식조례제정추진을 위한 부천 학부모연대 준비위원장
  1995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지방자치 특별위원회’ 위원
  
  기호 6번. 강기갑(52세) 전농 부의장
  
  2003년 10월 31일. 당시 김대중대통령이 경남도청을 순시하고 있었고, 이 자리에는 도민 2백60명이 초청되어 오찬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이런 자리는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밥을 다 먹은 털보 농민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돌발발언을 하려하자,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그를 끌어내고 만다. 도민 간담회에서 민생의 직언을 제지당한 털보 농민. 그는 끌려가면서 사태의 부당성을 항의한다. 바로 이 털보 농민이 강기갑이다.
  
  경남 사천 출신인 강기갑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71년부터 현재까지 줄곧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얼마 뒤 허리를 다쳐 2년 정도 쉬는데 집에서 농사는 돈이 안되니 다른 일을 주선해 주기도 했는데, 이 때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농사를 짓기로 한 것을 살아오면서 제일 잘 한 일로 꼽는 강기갑이다. 역시 그는 천상 농사꾼이며, 농민이다.
  
  76년부터 카톨릭 농민회에 가입한 그는 이 때부터 농사일과 농민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농민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는데,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농민운동을 그만두고 떠난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강기갑은 이 때 “농민들이 너무 미워지는데 그런 마음으로는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어서” 수도원에 수사로 들어가 버린다. 그렇게 들어간 수도원에서 강기갑은 87년 마침내 농민에 대한 감정의 앙금을 지우고 다시 삶의 터전이 농촌으로 돌아온다.
  
  91년 수입개방이 결정되자 많은 농민들이 상경투쟁을 벌였는데 불과 몇 분도 안돼 끌려간 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유치장에서 수인사를 하던 도중 서른 중반을 넘긴 많은 청년(?)농민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기갑은 그 길로 바로 ‘농촌총각 결혼대책위’를 만들어 자신이 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다. 이게 대박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그의 결혼대책위를 찾아 왔고 또 그만큼 많은 쌍(130여 쌍)이 맺어졌다. 39살의 노총각이었던 강기갑 역시 이 때 평생의 반려자 박영옥을 만나 32번째로 결혼식을 올린다. 나이 차이는 무려 14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땅을 기반으로 한 삶과 그 운동을 병행해 오던 강기갑은 FTA사태에 직면한다. 결사적인 비준저지 투쟁을 벌였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런 움직임을 묵살해 버렸고, 그가 속한 단체인 전농은 이에 농민의 조직적인 정치세력화를 당면 목표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의해 농민 후보 비례대표로 추대됐다.
  
  ▶약력
  1953년 경남 사천 출생
  1971년 사천농업고등학교 졸업 / 젖소, 과수 농사 시작.
  19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 입회
  1987~1991년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
  1989~1991년 전국농촌총각결혼대책위원장
  1990년 사천시농민회 결성
  1996년~ 사천시농민회 회장
  1998~1999년 전농 경남도연맹 부의장
  1999~2000년 전농 부의장, 전농 농가부채대책위원장
  2000~2003년 전농 경남도연맹 의장, 전농 협동조합개혁위원장
  2001~2003년 사천읍농업협동조합 이, 감사
  2004년~ 현재 전농 부의장
  
  기호 7번. 현애자 (42세) 남제주군 여성농민회장
  
  대학을 졸업하고 제주에 내려와 제주지역 문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내며 8년간 문화운동에 매진하다 농민운동을 ‘평생운동의 길’로 선택한 현애자 당선자. 그녀는 1988년 대정읍 농민회 간사로 출발, 1997년 제주도여성농민회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남제주군 여성농민회장에 이르기까지 16년간 여성농민의 삶과 한국농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해왔다.
  
  현 후보는 수입개방 반대투쟁, 감귤가격투쟁, 농가부채 해결과 FTA 저지 투쟁 등 농민투쟁과 제주 국제자유도시추진 반대, 한라병원 파업, 화순항 군사기지 반대 등 수많은 지역 및 민생현안에 앞장서온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여성농민운동가로 일컬어진다. 특히 2000년 7월과 11월 정부의 오렌지 수입을 비롯한 개방농정으로 제주농업이 붕괴 위기에 처했을 때 제주농민 역사상 1만명의 대중집회를 성사시킨 주역으로 제주도민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다.
  
  현 후보는 여성농민의 존재가치와 농업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의 여성농민들이 정치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하며 민주노동당 참여를 결의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조직적 지지를 바탕으로 비례대표에 출마했다. 제주 여성농민의 대표주자에서 이제 2백만 여성농민을 대변하는 여성농민 의원이 되었다.
  
  ▶약력
  1962년 10월 28일 출생
  1984년 경희대학교 수료
  1985년~ 87년 제주지역 문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
  1988년 대정읍농민회 간사
  1992년~ 96년 제주도여성농민회 준비위원장
  1997년~ 2000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주도여성농민회장
  1998년 제주도 사회복지위원
  2001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남제주군 여성농민회장(현)
  2001년 제주도 마늘대책위원회 집행위원
  2002년 일본산 씨감자 제주도 대책위원회 간사
  2004년 민주노동당 서귀·남제주군지구당 창당준비위원회 부위원장(현)
  
  기호 8번. 노회찬(49세)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
  
  “50년 동안 한 판에서 계속 삼겹살을 구워먹어서 판이 이젠 새까맣게 됐습니다. 이젠 삼겹살 판을 갈아야 합니다.”
  
  지난 3월20일 벌어진 KBS 심야토론에서 나온 이 발언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노회찬을 한 순간에 ‘스타’로 만들었다. 네티즌들은 그의 발언내용을 여기저기 퍼나르고 포털 사이트에는 팬 까페가 결성되었다. 이번 총선에 부상한 최대 스타로 대다수는 노회찬을 꼽는다. 서글서글한 이미지와 재치 있는 화술이 그를 한순간에 스타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촌철살인적 토론 실력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동안) 토론회에 나가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한다는 평가보다도 절묘한 짧은 한 마디 한 마디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거예요…(후략)” 결국 많은 토론의 경험과 그에 대한 분석, 그리고 명확한 시국관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진정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치적 투지가 남달랐다. 1학년 때 친구들과 ‘유신독재 반대, 박정희 타도’ 유인물을 제작해 살포했고, 형사들은 고등학생인 그를 주목하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당시 여학교에 가서 공연할 정도로 잘 나가는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던 그는 첼로와 민주화운동 둘 중에 어느 것을 자신의 진로로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한다. 70년대의 엄중한 시국 속에서 그런 삶이 가장 올바르고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을 결심하고, 청소년 직업학교에서 용접기술을 배운 뒤 82년 ‘자생적 위장취업자’로 현장에 투신한다. 당시에 학생 출신 위장취업자는 통틀어 10명도 안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 현장 노동운동은 89년 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막을 내린다.
  
  시대상황에 맞는 정치조직을 고민해왔던 노회찬은 92년 만기출소 후 진보정당 결성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여 나간다. 결국 10여년에 걸친 진보정당 운동은 민주노동당이라는 결실을 싹을 틔웠고, 노회찬은 그 중심에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판갈이를 주장하고 있다.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결혼 밖에 없다며 웃는 노회찬. 그에게 이제 성공 목록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다.
  
  ▶약력
  1956년 출생. 부산중, 경기고, 고려대 졸업
  1973년 유신독재반대 박정희타도 유인물제작 살포로 반독재민주화운동 시작
  1982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자격 취득, 서울,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근무
  1987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창립
  1989년 격주간지<사회주의자> 편집위원, 인민노련사건으로 구속
  1992년 만기 출소, 백기완 선본 활동
  1993~98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진보정치연합 대표 역임
  1993~03년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1997~98년 국민승리21 기획위원장, 정책기획홍보위원장
  2000~02년 민주노동당 부대표
  2002~현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선거대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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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누리] “어이, 높은 사람 좀 바꿔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 ‘전화와의 전쟁’ by 최백순

4. 15 총선 결과, 민주노동당은 총 10석의 의원을 국회에 입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선거동안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과 비례해서 여의도 중앙당사의 전화기는 끊임없이 울려댔다. 의회진출의 기쁨 뒤에는 선대위 당직자들의 ‘전화의 전쟁’이 쉴 수 없이 계속됐다.

막무가내형, 민원형

역시 단연 압권은 막무가내형과 민원형. 전체 전화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다. 김선봉 당원관리부장에 따르면 이들의 특징은 일단 높은 사람부터 찾는다는 것. 권영길 당 대표를 찾는 경우가 제일 많지만 이럴 경우 당직자들은 일단 안도한다. 권 대표가 지역구에 출마한 탓에 중앙당에 없기 때문.

TV토론을 통해 스타로 뜬 노회찬 선대본부장도 막무가내형이 찾는 1순위. 노 본부장의 경우 핸드폰을 본인이 직접 받기 때문에 당직자들은 핸드폰 번호 보안을 지키느라 선거기간 내내 전전긍긍해야 했다.

막무가내형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당직자들이 전화를 받을 경우 무조건 “아가씨, 남자 좀 바꿔봐”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여성당직자들이 이중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막무가내형의 전담마크맨으로 떠오른 사람은 기조실의 김홍석 부장.

김홍석 부장은 마치 TM회사의 능숙한 팀장처럼 막무가내형 전화를 느긋하게 받아내서 다른 당직자들과 대조를 이루기도. 하지만 김홍석 부장도 전화를 끊기 무섭게 “아 미치겠구만”을 연발해서 실제로 스트레스를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책조언형, 지시형, 시비형

▲ 기조실 김홍석부장   ©진보누리

정책정당인 민주노동당에는 정책조언형도 상당수. 정책정당인 민주노동당을 무색케 할 만큼의 다양한 정책조언들이 줄을 이엇다고 한다. 당직자들에 따르면 발표한 공약에 대부분 있는 것들을 마치 새로운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경우가 대부분.

정책조언형의 공통점은 “이것을 채택하면 득표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결론을 내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국민연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정책조언을 하고 혁명적인 득표향상이 있을 것이라고 우기는(?) 식.

정책조언형에는 꼼꼼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람들도 자주 있었는데 그냥 전화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FAX와 우편을 내용을 보내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사람들은 받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고 사후의 처리결과(?)를 점검한다는 것. 이쯤 되면 당직자들도 손을 들기 마련이다.

역시 가장 감당하기 힘든 것은 시비형. 가뜩이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당직자들을 상대로 다양한 형태로 시비를 걸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하락과 비례해서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시비성 전화가 많았던 것도 특기할만한 점.

항의형 VS 격려형

▲지쳐잠든 강상구부장    ©진보누리

항의형은 주로 논리적(?)인 것이 특징. 재계 실무담당자로 추정되는 전화도 자주 있었는데 이런 경우 예외 없이 민주노동당의 부유세와 분배정책을 물고 늘어진다고 한다.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대로 가면 경기침체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주요한 논지.

개중에는 당직자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당의 정책을 집요하게 질문하고 공격해서 곤욕스럽게 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특기할만한 점은 과거처럼 색깔론을 들고 공격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

한 당직자는 “이번 총선의 최대성과는 진보를 거부감 없이 국민에게 받아들여지게 했다는 점”이라고 나름대로 총선의 의미를 촌평하기도. 권영길 대표와 경쟁하던 “한나라당 후보의 색깔론 공세가 오히려 자멸로 이르게 했다는 것이 단적인 예”라고 덧붙였다.

당직자들이 탈진상태에서도 힘을 내게 했던 것은 쏟아지는 격려형 전화들. 격려형 전화들의 특징은 바쁜 당직자들을 미리 고려해서 짧게, 그리고 힘주어서 힘내라고 이야기 한다는 점. “쓰러지기 직전에도 이런 전화를 받으면 피로가 싹 가신다.”라며 한 당직자가 귀뜸한다.

“민원실 설치를 서둘러야”

선거기간 동안에는 전화만 불이 난 것이 아니라 여의도 중앙당사를 직접 방문하는 사람도 급증했다. 선거 지원을 나가려던 선대위의 핵심 책임자들은 입구에서 붙잡히기 일쑤. 노회찬본부장이 인기도와 비례해서 면담요청 제 1 순위였다고.

전쟁을 치르던 당직자들도 업무를 제쳐놓고 방문객에게 붙잡혀 살이되고 피가되는(?) 이야기를 이삼십분씩 들어야 했다. 법률과 관련되어 민원을 가지고 중앙당사를 방문하는 경우 중앙당에 단 한명뿐인 김정진 변호사는 그야말로 죽을 지경.

사무처의 박재명 총부부장과 김선봉 당원관리부장은 “민원과 방문객을 전담하는 부서의 설치가 시급한 사안”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민주노동당의 경우 별도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당직자가 속칭 ‘전화를 땡겨서 받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선거후반에는 서로 전화를 받지 않으려는 기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취재를 하는 와중에도 노동실천단의 강상구부장은 민원을 가지고 강원도 평창에서 상경한 한 농민으로부터 삼십분째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했다. 효율적인 민원업무를 처리를 위해서도 민원전담팀의 설치는 역시 시급해 보였다.

기사입력시간 : 2004년 04월17일 [03:32] ⓒ 진보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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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대전 나들이

토요일 과외를 마치고 강남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혹시 모르니 전화는 하고 가야지 하며 경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 동욱이.”
“.. 아. 동욱이 웬인이야?”
“오늘 대전 내려갈까 하는데.. 시간 되냐?”
“어.. 그래.. 내려와라..”

오케이. 토요일 놀 사람 한 명 확보..
일요일 오후엔 지혜가 놀아준다고 했으니..
이틀 놀고 돌아올 수 있겠지 하며 내려간다..

KAIST 정문에 도착한 건 밤 9시 경.
내가 저녁 안먹었으니 (점심도 안먹었었다..) 일단 고기를 먹으러 갔다.  
고깃집 주인이 갑자기 날 알아보는 척을 해서 당황했다.
대학가요제에 나온 김모군 아니냐며… -_-;;
어쨌든 친절했으니 오케이~~ 밥도 맛있었다.. 헤헤

고깃집에서 9시 뉴스를 보는데..
권영길과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하질 않나…
뉴스를 마치면서 앵커가 “살임살이 나아…”라는 멘트를 하질 않나..
이번 총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엄청난 일이었단 생각이 든다.

고기 다 먹고선
소화도 시킬 겸… 배팅연습을 하려고 했더니.. 없어졌단다… 아쉽 ;;;

같이 놀 사람 더 없나 했는데… 다들 고향 가고 없단다.
12시 쯤에 과외 끝낸 상준이가 술자리에 합석했는데..
상준이네 랩에선 돈을 한푼도 안줘서 어쩔 수 없이 과외를 할 수밖에 없단다..
프로젝트에 돈을 주면 마음이 헤이해진대나.. -_-;;

어쨌든 이런저런 얘기하다보니 시간도 늦었고..
상준이네 기숙사 방에서 룸메가 비운 침대에서 하룻밤을 잤다.

어제는 글쎄.. 뭐하고 놀았다고 해야하나..
일단 지혜한테 바람맞았다고 해야하나.. -_-;;;
오후엔 놀아줄 수 있다더니 전화기가 아예 꺼져있었다..
결국 남은 사람은 경천이.. 나랑 놀아주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래도 경천이도 나 덕분에
갑천에서 돌다리도 건너보고 잔디밭에도 누워보고 했을테니..

음.. 이번에 상당히 놀란 건..
휴일에 놀러나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사실.

강아지 산책시키는 사람..
고기 구워먹는 사람..
축구공 가지고 노는 애들..
꽃구경하며 즐거워하는 애들..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 -_-;

논다는게 뭐 별거있나..
잔디밭에 누워 하늘 쳐다보다..
눈에서 움직이는 먼지들 관찰하다가..
갑천변에서 뛰어노는 아기들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역시 눈을 즐겁게 하는 데에 최고는 ‘애기’들!!
애기들 보고 있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

그러고선 가까운 극장까지 계속 걸어서는
백화점에서 청바지 사는 거 구경하고는
영화 ‘범죄의 재구성’을 봤다..
재밌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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