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사연구] 기말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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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관료, 이론적 공학자의 이상과 현실
19세기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수학과 객관성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담당교수 : 홍성욱 | 제출일 : 2005. 12. 20

머리말
가브리엘 헤트(Gabrielle Hecht)는 2차세계대전 이후 핵발전을 연구했던 프랑스 연구자들의 정체성을 다룬 책(The Radiance of France, 1998)에서, 19세기 초 정부공학자들의 정체성을 언급하고 있다. 20세기 중반의 현상을 다루기 위해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프랑스만의 특수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였고, 이 글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에콜 폴리테크닉과 공병대의 정부공학자들은 그 프랑스 혁명의 독특한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 정부공학자들은 프랑스 공학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대변하는 엘리트로서, 모든 정부사업을 계획, 추진, 감독하며 각 그룹간의 이해관계를 ‘공공’의 이름으로 조정해왔다.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공공을 대변했고, 그러한 자격과 권위는 어떻게 획득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들의 ‘공공’적 이익은 진정 ‘공공’적이었는가?
한편, 정부공학자는 단순한 정부관료가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공학자’로서 활동했다. 공학이론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학자를 열거하다 보면, 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 공학자들의 이름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는 과학의 역사에서도 프랑스 ‘공학자’의 이름은 쉽게 발견된다. 과학의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쿨롱, 카르노는 프랑스의 공학자였다. 반면, 발명과 기술개발의 역사에서 프랑스 공학자의 이름은 찾기가 어렵다.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이는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의 ‘수학/이론 지향적’ 지적 풍토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지적 풍토는 어디서 연유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학문, 산업, 공학자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관료’로서의 정부공학자
19세기 프랑스의 대부분의 건설사업 ― 도로, 운하, 다리, 철도 등 ― 은 중앙정부의 계획 또는 승인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Corps des Ponts et Chauss es를 비롯한 공병대의 정부공학자들은 그 사업들을 설계, 총괄, 감독,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19세기 말, 이들의 주요 결과물은 세계적인 찬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를 기획한 미국의 공학자들은 프랑스의 기념비적 다리, 튼튼한 다리, 균일한 철로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보여준 국가적인 규모의 체계적인 수송망은 방문객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운하 시대(Canal Era)의 막을 연 것은 건설교통국(Bureau of Bridges and Roads) 장관 베쿠이(Fran ois Bequey)의 1920년 법안(Report to the King)이었다. 베쿠이는 영국의 산업혁명 모형을 따라 침체된 프랑스의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했다. 단, 그는 ‘국가의 힘’으로 사기업의 성장시키고자 했으며, 그 핵심에 운하 건설이 있었다. 그의 계획은 국가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각 운하들의 경로, 기술, 비용, 가능한 계약자까지도 명세했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명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산하의 공병대의 수학적, 통계적, 기술적 능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자유주의자가 보기에 엄청난 낭비사업(perfect pork barrel)이었으며, 은행과 민간업자들에게도 선뜻 참여할 매력이 없었다. 운하 건설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대의에는 모두가 동의했음에도, 구체적으로 보조금, 통행료, 사업순서, 설계 등에서 정부와 은행, 민간업자 사이에 잦은 충돌이 빚어졌다. 민간업자들은 국가적인 사업의 거대한 모양새보다는 자신들의 수지에 맞는 사업을 선호했고, 정부의 설계를 자신들의 사정에 맞게 변경할 수 있는 ‘자율성’을 갖고 싶어했다. 그러나 정부와 공병대는 국가적인 규모의 체계적인 사업이 장기적으로는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이 될 것이라 주장했고, 민간업자의 사적인 이윤추구 행위를 제한하고 감독하고자 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운하 건설은 영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의 수많은 운하는 주요 제조업 지역을 중심으로 ‘국소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수송기술로는 감당이 안될 만큼 수송량이 증가했음을 반영했는데, 이러한 병목현상에 대한 감지와 그에 대한 개선이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기대가 운하 건설의 원동력이었다. 각 운하는 개별 업자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건설되었으며, 그 어디서도 전국토 규모의 ‘계획’과 국가의 ‘개입’은 없었다.

한편, 철도 건설이 제기된 것은 1830년대부터이다. 프랑스 철도망은 1842년 6월 11일 법령(Act of June, 1842)으로 체계적이고 완성도 높게 건설된 것으로 유명하지만, 던햄(Arthur L. Dunham)은 그러한 계획(1842년 6월)이 만들어지는 지난한 과정이 그 경제적 효과를 반감시켰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철도 건설(1835년)은 사기업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정부는 ‘외국의 침략으로부터의 국가 방어’를 이유로 철도를 국가 차원에서 계획, 관리하고자 했다. 정부공학자가 책정한 공사비와 운임 등을 바탕으로 정부는 계약자를 모집했고, 운하 계획 때와 마찬가지로 노선, 공사비, 운임을 둘러싼 합의 과정에서 철도 건설 계획은 계속 지연되었다. 공학자들은 사기업의 비용과 이윤보다는, 철도 건설의 공공적 가치와 목적 ― 경제적, 안보적, 미적 가치 등 ― 을 통합하여 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이는 개별 사업자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부와 정부공학자는 개별업자에게 내맡겨 시장으로부터 사후평가받는 방식보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입안하여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그 사업은 개별사업자가 아닌 공공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했다.

공공의 보편적 이익과 수학
정부의 주요사업을 시장에 의한 사후평가가 아닌 방식으로 사전에 평가하고 결정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지 않은 객관적이고 합리적 기준이 필요했다. 수학은 이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었는데, 수학의 방법은 그 계산의 결과가 규칙에 의해 자동적으로 산출되는 것으로 보이게 해주기 때문이며, 그 계산결과는 ― 과정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 객관적인 것으로 신뢰를 줄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주요사업을 사전에 결정하기 위해, 공공의 효용을 명시적으로 계산하고자 했고, 그 계산과 해석은 정부공학자의 몫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부 공공사업의 효용을 수량화하여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1932년부터였다. 나비에(C.-L.-M.-H. Navier)는 정부사업의 이상과 수량화의 수사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잘 조화시켰다. 그를 비롯한 정부공학자들은 영국 사기업의 이기심, 주관성에 의한 결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공공의 장기적인 이익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들이 선호했던 수량화는 공평할 뿐만 아니라 시간, 장소, 사람에 따른 편협하고 주관적인 고려에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증명해주었다.”
정부공학자로서의 사명감 아래서, 나비에 식의 공공 이익 계산법은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1847년, 정부공학자 코모이(G.-E. Comoy)는 운하의 운임을 인하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운임인하로 인해 수입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운하의 사용률을 극대화함으로써 전체 공공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정부공학자 도야트(Laurent Doyat)는 시장 자체를 불신하면서, 철도의 운임이 투자를 환수할 만큼 될 필요가 없으며, 중요한 질문은 “그 가격이 사회에 유용한가?”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논리 하에서, 철도는 국가만이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공학자 미나드(Charles Joseph Minard)는 경쟁의 해로운 결과를 수치화하여 증명하면서, 같은 경로를 다니는 철도회사가 두 개 이상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손실을 막을 책임은 정부공학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정부공학자 내에서 계산법이 모두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듀푸이트(Jules Dupuit)는 나비에 식의 계산법에 반대했는데, 그는 전보다 더 복잡한 계산법을 동원하여 공공의 효용과 수입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적인 차등가격 시스템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건설사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정부공학자의 기술과 경험 외에는 별 이득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정부공학자들의 효용 계산법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복잡해졌으며, 전보다 절충적인 결과를 산출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포터(Theodore M. Porter)는, 정부공학자들이 주장한 분석방법의 객관성이 여전히 주관적 가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음을 주장했다. 정부공학자들은 종종 “수량화의 적절한 형태(the proper form of quantification)”를 두고 논쟁을 벌이곤 했는데, 이는 곧 가치를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부공학자의 권위는 그들이 사용한 수학이라는 ‘객관적’ 방법에 의존했으며, 이는 사실 불완전했다.

수학과 ‘객관적’ 능력주의
정부공학자들의 수학과 객관성에 대한 강조는 그들의 교육과정과 프랑스의 위계적 교육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병대 소속 정부공학자들은 모두 에콜 폴리테크닉 졸업생이었으며, 다른 학교 출신은 들어올 수 없었다. 또한 에콜 폴리테크닉은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입학을 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면에서 에콜 폴리테크닉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었지만, 그 시험은 너무 어렵워서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즉, 에콜 폴리테크닉은 소수의 상위계층에게만 열려 있었다.
한편, 에콜 폴리테크닉에서는 입학시험부터 교과과정까지 ‘수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801년 에콜 폴리테크닉의 수학관련 과목은 전체 교과과정 66%에 달했으며, 물리와 화학은 18%에 불과했다. 그리고, 에콜 폴리테크닉은 입학시험뿐만 아니라, 학교를 다니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시험을 통해 학생들의 성적에 서열을 매겼고, 이 성적은 이후 어느 공병대에 진출할 수 있느냐의 지표가 되었다.

에콜 폴리테크닉은 프랑스 혁명 중 1794년에 설립되었으며, 혁명정부는 신분계급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콜 폴리테크닉은 의무교육 기관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국가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고, 원하는 모두를 받을 수는 없었다. 즉, 에콜 폴리테크닉은 학생을 선발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이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과거의 신분에 대한 대표적인 대안은 능력(merit)이었고, 그 능력은 ‘수학 성적’이라는 지표에 의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학교도 똑같은 지표로 평가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에콜 폴리테크닉의 하위 서열에 있는 Ecoles Centrale des Arts et Manufactures와 Ecoles d’Arts et Metiers의 입학시험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으며, 실용적인 능력과 경험도 포함되곤 했다.
즉, ‘수학’은 엘리트가 되기 위한 ‘자격’이자 엘리트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그렇다면 엘리트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며, 수학은 어떻게 엘리트의 지표가 될 수 있었는가? 당시 엘리트란 공공의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자, 국가를 건설하는 지도자로서 인식되었다. 지도자로서의 엘리트는 개별적인 지식이 아닌 보편적인 지식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에콜 폴리테크닉과 공병대에서 계속 강조되었다. 한편, 수학은 자연을 성공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객관적 언어로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학’이라는 언어는 자연에 대한 객관성과 보편성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혁명 이후 새로운 엘리트를 위한 ‘언어’가 되었다. 즉, 혁명 이후, ‘능력’에 따른 새로운 위계질서는 ‘수학’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었고, ‘수학’은 사회 내에서도 객관과 보편성이라는 권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수학’에 대한 권위가 원래부터 확고했던 것도 아니었다. 또한, ‘능력’이란 신분에 의한 능력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던 모호한 단어였다. 앨더(Ken Alder)는 앙시엥 레짐 하에서의 포병부대에서 새로운 질서의 씨앗을 찾아냈다. 18세기 포병부대는 대포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이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대포의 성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자의적이지 않으면서 비개인적인(impersonal) 도구로서 수학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포병부대는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자체적인 교육기관을 운영했고, 최고의 교수진을 영입했다. 그리고 병사/학생들은 (수학)시험을 통해 선발하였고, 진급도 시험(+연공)을 통해 이루어졌다. 포병부대는 신분과 상관없는 ‘수학’에 대한 능력을 통해 병사/학생들을 평가하였고, 병사/학생들은 능력만 있으면 최고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유동적인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앨더는 이 포병부대를 혁명 이후의 교육기관 및 공병대와 연속적으로 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공학자들은 “자연에서 객관적인 결과를 얻어내기 위한 방법과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평가받고자 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이 포병부대의 공학자였다는 것은 두 기관 사이의 연속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공학자들의 ‘객관적’ 방식은 ‘비개인적인(impersonal)’ 방식을 의미할 뿐, ‘성공적인’ 방식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 즉, ‘비개인적인’ 방식이 ‘성공’을 보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 둘을 혼동하곤 하며, 프랑스 공학자들 스스로도 그 둘을 자주 혼동했다.

공학자 사회의 위계질서
바이즈(John H. Weiss)가 지적했듯이, 19세기 프랑스에는 정부공학자 외에도 민간공학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공공부문보다는 민간 산업부문에 종사했으며, 이들 사이에는 넘기 힘든 장벽(barrier)이 존재했다. 이들 사이의 구분은 기능적인 구분이자 계층적인(stratification) 구분이었다. 또한, 이러한 구분은 그들이 졸업한 학교에 의해 규정지어졌다.
가장 하위에 속했던 Ecoles d’Arts et Metiers의 졸업생들은 주로 중소 산업체의 십장, 중간관리자로 종사했다. 데이(C. R. Day)에 분석에 따르면, Ecoles d’Arts et Metiers의 졸업생들(gadzarts)은 민간 산업부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들의 말년에는 대부분이 일정 이상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Ecoles d’Arts et Metiers의 입학생들의 출신계층도 점점 높아졌다.
그럼에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간계층에 속하는 Ecoles Centrale의 졸업생의 경우에도 대부분은 민간 산업부문으로 진출했으나, 일부는 공병대의 보조인 conducteurs로 종사했다. 그런데, conducteurs는 1850년의 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공병대의 일원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1850년, 10년 이상 근무한 conducteur에 한해서 공병대로 추천될 수 있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추천받은 conducteur는 2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수학 및 이론에 대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결국, 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20년간 이러한 경로로 공병대로 올라간 conducteur는 한명도 없었다.
민간부문에 진출한 Ecoles Centrale 출신의 공학자들은 Ecoles d’Arts et Metiers 출신의 공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공공부문 또는 철도부문에 진출한 공학자들만은 하위직에서 머물렀다. 이는 당시 정부공학자의 권력을 반영한다. 정부공학자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자신의 ‘능력’에서 찾았는데, 그 능력이라는 것은 곧 수학을 비롯한 복잡한 이론에 대한 지식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공병대가 되기를 바라는 conductuer가 치뤄야 했던 시험이 바로 이에 대한 테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공학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러한 수학적 능력이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회의적이다. 정부공학자들은 자신이 가진 수학적 능력으로부터 얻은 권위 때문에, 그 능력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 착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공학자’로서의 정부공학자
나비에(Claude-Louis-Marie-Henri Navier, 1785-1836)의 인밸리데스 다리(the Pont des Invalides) 건설 현장(1826-1827)은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공학자’적 면모를 잘 드러내준다. 크라나키스(Eda Kranakis)는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공학’ 스타일을 드러내기 위해 미시적인 비교분석을 시도했는데, 그는 프랑스 정부공학자의 전형으로 나비에를 제시했다. Corps des Ponts et Chauss es의 대표적 공학자인 나비에는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복잡한 수학적 분석에 엄청나게 의존했다. 이러한 고난이도 수학의 사용은 그가 졸업한 에콜 폴리테크닉의 졸업증명서(hallmark)이기도 했다.
나비에는 인밸리데스 현수교를 설계하기 전, 이미 다리 설계에 대한 권위있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물론 그 논문은 줄의 강도와 탄성, 뒤틀림, 진동 등을 특성화하는 방정식들로 가득했다. 이 방정식들은 대부분 복잡한 계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분석에서 실험이 기여한 부분이란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편, 나비에의 다리는 기본적으로 기념비적(monumental)인 성격을 만족해야 했다. 다리의 구조물에는 장식이 포함되었고, 실용적인 재료임에도 볼품이 없으면 더 멋진 재료를 선택했다. 나비에의 다리의 바닥재료로 육중한 오크판(oak planking)을 사용했는데, 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더 두꺼운 케이블과 더 큰 규모의 타워가 필요했고, 이는 비용증가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정부공학자들에게 무게와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러한 공학적 태도는 미국의 공학자 핀리(James Finley, 1762-1839)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사업가로서의 핀리는 이윤을 추구했고, 최소의 비용으로 ‘건널 수 있는’ 다리를 건설했다. 그의 현수교는 값싸고 가벼운 케이블을 사용했고, 값싼 나무타워에 케이블을 걸었다. 이러한 간단한 설계에 의하면 지역의 비숙련 노동자를 동원해서도 건설이 가능했다. 한편, 그는 다리를 설계하는 데 부하, 장력, 경사 등의 간단한 개념만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작고 간단한 실험의 시행착오(trial-and-error)를 반복하면서 최적의 해를 찾아나갔다. 그의 접근방식은 경험적이고 귀납적이었으며, 수학은 최소한으로 이용됐다. 이러한 방법과 설계는 값싸고 용이했으며, 널리 적용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학적 태도는 미국에서 일반적이었다. 요컨대, 프랑스 공학이 이론-연역적이라면, 미국의 공학은 실험-귀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공학자들의 지적 태도
정부공학자들의 수학/이론 중심의 경향은 기본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에콜 폴리테크닉이라는 엘리트 교육기관으로부터 기인한다. 폴리테크닉에서는 복잡한 이론을 중심으로 가르쳤고, 매우 약간의 실험을 했으며, 현장실습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공학자 사회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이론/실험/현장실습은 기능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위계적으로도 구분되었다. 그리고 크라나키스는 이에 대한 원인으로 프랑스 사회의 수작업(manual labor)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짚는다. 분명, 프랑스 사회는 미국에 비해 수작업 노동자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수작업에 대한 태도가 지적 위계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는 좀더 평가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지적 위계의 풍토에 의한 결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라나키스는 정부공학자의 이러한 지적 태도가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전통이 어떻게 계속 ‘유지’될 수 있었는가”라고 말한다. 크라나키스는 이를 ‘방어의 성공’으로 설명한다. 권위를 획득한 정부공학자들이 “이론적 수학적 지식만이 모든 기술적 영역에서 기능할 수 있는 공학자를 만들어낸다”는 논변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사회적/지적 위협을 방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지적 전통을 계속 재생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공학자들의 공학이론
쉰(Terry Shinn)은 정부공학자들이 사실 ‘공학자’가 아닌 정부 관료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부공학자들이 공학적인 작업을 수행하지도 않았으며 수행할 능력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크라나키스는 당시 정부공학자들이 현장공학자, 컨설팅공학자, 전체를 감독하는 분석공학자로 활동했으며, 단순한 관료로만 볼 수 없다고 반박한다. 당시 정부공학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수행했던 작업들, 예를 들어 설계, 안전에 대한 표준 정하기 및 안전 검사 등은 분명히 전문성이 필요한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관료의 일원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크라나키스는 “관료제 자체가 공학화되었다”고 말한다.
크라나키스는 당시 정부공학자들의 예를 들어가며, 그들이 수행했던 ‘공학적 연구’를 보여준다. 그들의 연구는 미국이나 영국의 공학적 연구와 사뭇 다르긴 했지만, 분명 ‘공학적 연구’였다. 정부공학자들은 이론중심의 지적 풍토 아래서, 공학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의 연구를 발명 및 특허의 형태보다는 논문의 형태로 발표하기를 좋아했고, ‘과학 아카데미’의 일원이 되는 것을 큰 성취로 여겼다. 그리고 당시 과학 아카데미의 역학분과는 상당수가 정부공학자로 채워져 있었다.
쉰은 에콜 폴리테크닉과 정부공학자가 공학과 과학에 기여했다는 크라나키스의 주장에 대해, 몇몇의 사례만으로 전체의 모습을 착각하면 안된다고 반박한다. 쉰은 당시 정부공학자 중 과학아카데미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정부공학자의 핵심적인 역할은 국가의 이해와 사적 이해를 중재했던 ‘기술관료’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정부공학자가 연구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크라나키스의 분석이 힘을 잃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쉰의 반박은 분석 대상의 분모를 바꾼 것뿐인데, 이는 크라나키스가 보여준 정부공학자의 연구 태도와 지적 풍토까지 바꾸진 못할 것이다.
정부공학자들의 연구활동은 기계 등의 인공물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왜 이런 설계는 저러한 결과를 산출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이론, 특히 수학적 이론으로 기술하고자 했다. 예외가 없진 않겠지만, 그들은 실험에 대해 이론을 증명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이는 영국과 미국의 공학자들이 던지는 질문 및 실험과 매우 대조적이다. 미국의 공학자들은 “어떻게 설계를 바꾸면 산출이 더 좋게 나올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실험은 그것을 알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프랑스의 정부공학자들은 장인 전통 하에서 비밀스럽게 또는 ‘왜 그렇게 하는지도 모른 채’ 하는 실험과 그로부터의 지식을 경멸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완전한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원리를 정확히 알아야 완전한 지식이며, 그러한 완전한 지식으로부터 완전한 도구와 기계를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그들의 지적인 편향이었으며, 그들은 때로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기술적 개선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자주 놓치곤 했다.

공학이론과 기술발전의 관계
분명,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공학의 이론을 탄탄히 다지는 데 기여를 했다. 이는 교과서가 증명해주며, 영국, 미국을 비롯한 외국으로의 공학교육 이전 또한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이 기술발전에 기여한 바는 극히 적다. 오히려 과학에 기여한 바가 많을 지도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지만,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논문의 형태로 발표하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미국 공학자들은 그들의 연구를 특허의 형태로 발표했다. 미국 공학자들의 특허에는 다양한 실험자료에 대한 표와 그래프로 가득했지만,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의 논문에는 현상을 특성화하는 방정식만 즐비할 뿐이었다.
기술발전은 꼭 내부 원리를 다 알아야만 가능하지는 않다. 다양한 실험과 귀납, 유비 등만으로도 기술은 자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수학이 가져다주는 ‘객관적 능력’에 사로잡혀 쉬운 방법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론; 객관의 혼동
지금 현재, 공학교육과 공학교과서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체계적인 공학이론은 과거의 성과를 표준적인 방식으로 저장하여, 학습의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이 복잡해진 기술환경에서, 체계적인 공학이론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기술발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진 않는다.
프랑스 정부공학자들은 수학과 이론이 자신에게 준 ‘지위’와 ‘객관성’에 사로잡혀, 다른 길을 보지 못했다. ‘객관성’은 비개인적인(impersonal) 기준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앞으로의 성공을 보장해주진 못한다. 또한, 사회적인 이슈에서 수학이 가져다 주는 ‘객관’은 특정한 가치와 함께만 작동 가능하다. 수학 및 이론과 함께 성장한 정부 공학자들은 이러한 점을 놓치거나 혼동했다. 또는 적극적으로 이용했거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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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연구] 기말보고서

ps_r_2004_20309.hwp 과학철학연구 기말보고서

개념체계와 추론에 대한 인지적 접근
유사성과 사례-모형 기반 추론을 중심으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9 정동욱 | 담당교수 : 조인래 | 제출일 : 2005.12.12.

머리말

토마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개념체계와 추론에 대한 인상적인 스케치를 남겼다. 그에 의해 스케치되었던 개념체계과 추론의 원리는 그의 직관과 경험 및 심리학에 의존하고 있었다. 쿤 본인은 당시의 규칙에 편향된 인지과학과 연구의 초보성 때문에 그 길을 꾸준히 밀고 나가길 포기하고 언어적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지심리학, 신경과학, 인공지능의 연구에서 괄목할만한 성과가 알려지면서, 80년대 중반부터 쿤의 인상적인 스케치가 집중적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기어리, 너세시안, 첸, 바커, 앤더슨, 니클즈 등은 쿤의 초창기 암시적, 선언적이었던 스케치를 명료화하고 엄밀하게 검토하면서 발전적인 통찰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사를 통한 사례연구도 진행중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학자를 ‘평범한’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가진 행위자로 보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진 인지능력이 무엇인지 밝혀내어 그것을 이용해 과학활동을 묘사하고 설명하는데 주목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쿤이 제시했던 개념과 추론의 상을 검토해본 후, 최근의 인지과학 연구가 말해주는 개념과 추론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활동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그 잠재력과 보완지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쿤의 개념에 대한 이론과 유사관계

쿤은 과학적 개념들의 의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기존 과학철학자들의 의미론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고, 독자적으로 개념에 대한 이론을 구축했다. 그의 이론은 분류체계에 대한 이론에 가까웠고, 이는 그의 유명한 공약불가능성 논제로 이어진다. 그의 이론은 완전히 독자적인 것은 아니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의 원리를 개념 체계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원리로 채택했다 (쿤 1962[1999], pp. 79-80). 한편, 본인이 인정했듯 ‘변동가능한 범주’의 원리는 칸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 212).
그는 과학적 개념의 본성을 추출해내기 위해 일상적 개념에서부터 출발했다. 또한 과학적 개념의 본성에서 출발하여 과학적 지식의 발전과 변화까지도 설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과학의 실제 학습과정과 일상적인 언어습득 과정에 주목하였고, 범례에 기초한 문제 풀이와 그 과정에서 습득되는 유사관계가 일상적 개념 형성과 과학적 개념 형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 213).

일상적 개념

개념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어떠한 종의 예들은 동일한(혹은 유사한) 특징들을 공유한다. 그래서, 전통적인 과학철학자들은 그 종의 필요충분조건을 통한 정의로 그 종의 개념을 밝히고자 했다. 그러나, 학습과정에서 그러한 필요충분조건이 역할을 하는가? 또는 필요한가? 쿤은 이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쿤은 어떠한 종에 대한 개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예시를 통해 그 대상들간의 유사/비유사 관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쿤 1962[1999], p.80). 그는 어린아이가 다양한 물새들의 개념을 학습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보여준다. 동물원의 물새들을 직접 지시하며 ‘저것은 백조야. 이것은 오리야. 또 저것은 거위야’ 하는 훈련만으로도, 아이는 물새들간의 유사/비유사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각 물새들의 개념을 쉽게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백조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나, ‘모든 백조는 희다’와 같은 보편명제는 필요하지 않다 (쿤 1974, p. 139-145).
위와 같은 유사/비유사 관계를 통한 대상의 구분은 세계에 대한 일정한 개념체계와 구조를 형성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담고 있다.  
첫째, 위와 같은 방식에 의하면 오리, 백조, 거위의 분류에 성공한 사람들이라도 동형의 개념구조를 가질 필연성이 없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 215). 물새들 간의 분류를 위해 동일한 특징을 뽑아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와 백조의 구분을 위해 ‘목의 길이’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소리’에 주목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 추출에서의 다양성은 비트겐슈타인이나 쿤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류에서의 애매하지 않은 합의가 목적이지 동일한 개념구조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개념 구조의 다양성에 대한 허용은 쿤에게도 환영할 일일 것이라 생각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변화의 잠재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유사관계의 획득은 항상 또다른 대상과의 차이의 확인을 동반한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유사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x’과 x의 유사성은 y와의 차이에 상대적이다. 쿤에 의하면 유사관계를 통한 개념정립은 3자관계이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 216). 여기서 쿤은 대조집합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대조집합은 관심대상과 상위개념을 공유하지만, 관심대상과는 특정한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집합이다. 이러한 대조집합의 도입은 개념간의 위계질서를 함축한다. 즉, 유사관계의 확인은 위계적인 분류체계를 만들어낸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 216-217).
셋째, 분류의 성공은 ‘빈 지각 공간(empty perceptual space)’의 확보에 의존한다. 쿤은 동일한 상위개념을 공유하는 여러 개념이 가족유사성에 의해 종으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두 개념 사이에 ‘빈 지각 공간(empty perceptual space)’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각 개념의 외연이 끝나고 시작하는 지점이 연속적이라면, 유사성에 의한 종 구분은 애매함의 문제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 217-218). 이러한 원리는 최소한 대조집합간의 무중첩(No-overlap)의 원리를 함축한다. 그리고, 첸은 이 무중첩의 원리가 개념체계의 변화와 재정립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Chen 1998).

이론적 개념

쿤이 유사관계의 파악을 통한 일상적 개념획득 방식을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일한 방식이 과학의 맥락에서도 적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이 과학을 학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범례를 통해 학습하며, 새로운 문제를 접할 때마다 이미 풀었던 문제와 유사하게 보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쿤 1974, p. 133). 이 때 F=ma와 같은 법칙적 표현(law sketch)은 문제들간의 유사관계를 파악하는 지침으로 이용된다 (쿤 1974, p. 126). 그러나, 쿤은 힘, 질량, 가속도 등도 유사관계로 파악될 수 있는지는 명확히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뉴턴의 역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힘’, ‘질량’, ‘공간’ 그리고 ‘시간’과 같은 용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경우, 대개 이들 개념을 문제 풀이에 적용시켜서 관찰하고 관여함으로써 알개되는 것이지, 교재에 실린 불완전하지만 때로는 도움이 되는 정의로부터 터득하는 것은 훨씬 작다”(쿤 1962[1999], p. 82)고 말한다. 쿤은 유사성에 의한 개념 획득과 문제상황과 함께 이루어지는 개념 획득 사이의 긴장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비판가들은 이 점을 파고들었다. 힘, 질량 등의 이론적 개념들은 오리, 거위 등의 일상적 개념들과 달리 직접적인 지시나 유사관계를 통해 획득될 수 없다. 즉, 쿤이 일상적 개념과 이론적 개념 사이의 차이를 경시했다는 것이다. 쿤은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노믹(nomic) 개념과 노르믹(normic) 개념의 구분을 제시한다. 노믹 개념은 힘, 질량 등의 이론적 개념과 유사한데, ‘일반화가 예외 없는 자연법칙적인 개념들’을 지칭한다. 너세시안에 의하면, 이러한 노믹 개념은 유사성 집합으로 획득될 수 없다. 노믹 개념은 그 개념들(힘, 질량, 가속도 등)이 함께 작동하는 법칙(뉴턴의 2법칙)을 예화화는 여러 상황(범례)을 통해서만 학습될 수 있다고 말한다 (Nersessian 2000, pp. S228-S230). 여기서 너세시안은 노믹 개념을 명료화하여 다루기 위한 단초를 찾는다. 노믹 개념은 유사관계 집합을 통해 획득될 수 없더라도, 그 개념과 연관된 문제상황은 유사관계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지과학 연구로부터의 증거

1970년대 로쉬 등에 의해 진행되었던 연구에 의하면, 쿤의 개념 이론은 상당한 지지를 받는 듯하다. 로쉬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등급이 매겨진 (개념) 구조(graded structure)’를 가진다. 로쉬의 연구를 잇는 후속연구에 따르면, 일상적 개념에서부터 심지어 수학적 개념에 이르기까지도 등급이 매겨진 개념구조를 가진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 218-219).
로쉬의 연구를 요약하자면, 인간은 하나의 개념에 대해 좋은 사례와 덜 좋은 사례를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개념을 정의 또는 논리 규칙에 의해 규정지으려는 시도에 대해 상당한 반박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정의된 개념 하에서는 그 개념의 모든 예화는 동등해야만 하는데, 하나의 개념 하에서도 사례 사이의 등급이 매겨진다는 사실은 그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 218).
한편, 로쉬의 연구는 개념에 대한 원형(prototype)을 통한 표상을 상정하게 된다. 사례마다의 등급이 매겨진다는 것은 가장 좋은 사례가 있다는 것이고, 그 사례는 원형을 내포하게 된다. 역으로, 어떤 대상을 하나의 분류에 집어넣는 일은 각 종의 원형과 유사성 또는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쿤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 왜냐하면, 유사집합으로서의 개념체계를 제시했던 쿤의 이론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를 통한 개념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이 옳은 개념인가 하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정의가 가능한 개념도 있지만, 분류의 성공에 이르는 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개념에 대한 정의는 항상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원형과 유사집합을 통한 개념이 대상에 대한 개념 부여에 더 효과적이다. 원형은 구체 사례들의 수많은 특징 중 매우 작은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만 디폴트값을 부여하여 만들어진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222). 우리는 새로운 대상을 접할 때, 그 몇 가지 특징만을 원형과 비교확인(패턴매치)하면 되는 매우 간단한 과정만을 필요로 한다. 즉, 매우 경제적이다. 그러나, 정의를 통한 개념에 따라, 새로운 대상을 파악하려면 모든 필요충분조건을 따져야만 하는 비경제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셋째, 정의에 의한 개념은 개념의 역사적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정의된 개념과 사례는 ‘예화’라고 하는 논리적이고 비대칭적인 관계를 갖는다. 정의된 개념은 새로운 사례에 맞추어 변화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정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정의가 바뀌더라도 그것은 합리적이기보다는 규약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그 정의 변화의 메커니즘은 설명되기 어렵다. 그러나, 원형과 유사집합으로서의 개념은 새로운 사례에 대해 적응적이다. 원형과 새로운 사례의 비교(패턴매치)는 원리적으로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Nickles 2003, p. 169). 따라서, 원형과 그 유사집합으로서의 개념은 새로운 사례와 더불어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
넷째, 자연종, 몇가지 이론적 개념 및 인공적 개념을 제외하고는 사후적으로도 정의되기 어렵다. 생물학의 연구에 따르면, 어떠한 생물학적 종도 필요충분조건으로 정의될 수 없다. DNA로부터의 정의 또한 불가능하다. 같은 종의 생물일지라도 그 DNA는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들 생물학적 종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DNA와 연관지어 규정짓고자 한다면, 유사관계로서의 개념이 훨씬 잘 어울릴 것이다.

이렇듯 정의에 의한 개념은 실제적인 역할도 적을뿐더러 옳다고도 보기 어렵다. 다만, 정의는 개념을 명료하게 만드는 데 사후적으로 보조적인 역할은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의 또는 규칙은 기존 개념체계의 위기 상황 또는 애매한 범주의 경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하는데, 이는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마도 정의, 규칙의 명시화는 위기상황을 명료화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개념 변화에 대한 사례 연구: 과학혁명과 공약불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함축

바커, 첸, 앤더슨 등은 새의 분류체계 변화에 대해 역사적인 사례연구를 진행했다. 그들에 의하면, 새에 대한 전통적인 분류는 부리와 발의 모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뾰족한 부리와 갈고리발톱을 가진 ‘뭍새’와 넓적한 부리와 물갈퀴를 가진 ‘물새’는 새의 두가지 하위개념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뾰족한 부리와 물갈퀴를 가진 스크리머의 발견은 전통적 분류체계의 변칙사례로 간주되었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 224-227).
연구자들에 의하면, 다윈의 진화론 이후, 조류연구자들은 공통조상을 보여주는 새의 해부학적 특징을 중심으로 새의 개념을 변화시켰고, 동일한 해부학적 기준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사관계를 제시했고, 이는 새로운 분류체계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분류체계 하에서의 하위개념은 내포(속성-값)과 외연(그것의 종들)은 이전의 용어로 온전히 번역불가능하게 됨으로써, 두 체계 사이에는 공약불가능성이 나타나게 된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227-230).
그럼에도, 다윈 진화론에 대한 합의와 그것에 따른 두드러진 유사관계에 대한 합의, 그리고 이전의 분류체계에 의하면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종들이 하나의 유사집합으로 묶이게 된다는 비판에 대한 합의는 두 체계 사이의 합리적인 비교를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되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 230-231).

이들은 동일한 연장선 상에서 천문학 혁명기의 개념변화를 살펴본다. 코페르니쿠스의 행성의 ‘적절한 운동(proper motion)’의 속성이 프톨레미의 것과 ‘행성 회전의 중심이 우주의 중심(지구)과 다르다’는 점에서 일치했음을 주장한다. 프톨레미는 행성의 역행운동을 고민하면서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회전의 중심을 분리한 체계를 제시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시대까지도 여전히 많은 천문학자에겐 회전의 중심은 우주의 중심과 동일할 수밖에 없다는 관념이 팽배했으며, 그 이유는 프톨레미의 체계가 천문학 분류체계의 규칙성을 상당히 훼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톨레미의 천문학은 기술적인(technical) 문제에 대해 도구적으로 사용되었음에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일으킨 변화는 프톨레미의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분리된 회전의 중심 개념의 잠재성을 발견하고 그 회전의 중심에 대한 여러 선택지 중 태양을 선택한 것 뿐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는, 프톨레미 천문학의 연속선 상에서 코페르니쿠스를 불 때, 그 변화는 국소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작은 변화로부터도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233-236).
코페르니쿠스는 회전의 중심을 태양으로 옮김으로써 행성과 항성의 개념을 재조직하게 만든다. 태양은 항성이 되고, 지구는 행성이 된다. 이어 케플러는 브라헤의 정교한 자료를 계산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프레임 구조는 크게 변화시키지 않은 채, 행성의 ‘원운동’이라는 요소만을 (타원) ‘궤도’로 교체했다 (Barker, Chen & Andersen 2003, pp.236-237). 이어 목성의 위성 발견, 혜성 운동 등의 변칙 사례는 위성, 행성, 혜성, 항성의 개념을 또다시 재구조화시켰다. 혜성은 지상계의 물체에서 천상계의 물체로 변화하고, 회전의 중심이라는 속성은 위성(행성), 행성(태양), 혜성(태양/없음), 항성(없음)을 구분짓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궤도의 모양은 타원, 포물선, 기타의 속성값에 의해 대상을 보조적으로 구분짓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Chen & Barker 2000, pp. S216-220).
이렇게 정립된 천상계에 대한 새로운 분류체계는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분류체계와 소통이 안될 정도의 공약불가능성을 초래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분류체계로 가는 각 과정에서의 개념 변화는 국소적이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변칙사례는 기존 개념체계에 대한 부정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념체계로의 변형에 구성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도 이해될 수 있다 (Chen & Barker 2000, pp. S220-S221).
그렇다면 공약불가능성은 과학혁명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첸은 매우 독특한 견해를 밝힌다. 그는 공약불가능성이 과학의 변화에 비가역성을 띠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생물 진화 과정에서 교잡불가능한 새로운 종이 분화되는 상황으로 과학혁명을 묘사한다. 과학혁명 이후 왜 과학은 이전 프레임으로 회기하기 어려운가? 그것은 교잡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공약불가능성은 번역의 어려움, 소통의 장벽을 초래함으로써 과학의 일방향성을 주며, 더 나아가 과학의 진화에서 공약불가능성은 불가피하다 (Chen & Barker 2000, pp. S221-S222).

쿤의 문제 풀이(puzzle solving)와 사례 기반 추론(case-based reasoning)

쿤은 과학활동을 매우 독특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과학활동에 대한 상은 정상과학에 대한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쿤은 정상과학을 매우 틀에 박힌(routine) 활동으로 묘사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은 방법론적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Nickles 2003, p. 144). 규칙적이지 않으면서 틀에 박힌 활동이 어떻게 가능한가?

문제 풀이(puzzle solving) 과정으로서의 정상과학

쿤은 정상과학을 문제 풀이의 과정으로 묘사했다. 과학자가 풀기 위해 골몰하는 문제는 언제나 과거의 문제풀이 성과를 적용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으로 상정되며, 새로운 문제풀이는 패러다임의 핵심을 부수기보다는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과거의 성공적인 풀이는 범례(examplar)로서 패러다임을 구성하며, 과학자의 훈련과정은 그 범례들을 익히고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된다. 성공적인 훈련을 마친 과학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풀이에 나서게 된다 (쿤 1962[1999], pp. 65-75).
이렇게 볼 때, 정상과학은 규칙 의존적이지 않으면서도 틀에 박힌 활동이 된다. 그러나 틀에 박힌 활동이 상당히 성공적이라는 점과 종국적으로는 파국과 혁명을 부른다는 점은 여전히 의아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범례는 문제 풀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둘째, 그리고 문제 풀이는 범례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범례는 문제 풀이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패러다임은 많은 잠재적 문제들을 부적절한 것으로 보게 만들며, 적절해 보이는 문제더라도 그에 대한 적합한 범례가 없다는 사실은 아직 풀 수 없는 것으로 포기하게 만든다. 이렇게 문제들을 거르는(screen out) 과정을 통해 패러다임은 적은 수의 문제만을 돌출된(salient) 것으로 보이게 만들고, 과학자들은 이 소수의 제한된 문제들을 놓고 씨름하게 된다 (Nickles 2003, pp. 148-149).
그렇다면 어떠한 문제가 돌출되어 보이는가? 첫째, 풀 수 있는 문제이다. 풀 수 있다는 것은 기존의 범례들의 조합된 적용으로 풀릴 것으로 기대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훈련과정에서 풀었던 예제와 연습문제들의 연속선 상에 있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직 풀리지 않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째, 좋은 문제는 패러다임을 더 명료하게 만들 문제이다. 사소한 문제는 패러다임을 명료화해주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음 단계를 위한 더 세련된 범례를 산출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Nickles 2003, p. 149).
이렇게 볼 때, 범례는 가치론적, 규범적·평가적 기능까지도 담당한다. 범례는 이미 명료화된 것, 따라해야 할 것으로서 좋은 문제에 대한 예시가 되며, 새 문제를 풀기 위해 맞추어(match) 볼 자원이기도 하다. 즉, 범례는 문제에 대한 발견과 문제 풀이에 대한 정당화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한다 (Nickles 2003, pp. 149-150).
여기서 전통과 혁신 사이의 ‘본질적 긴장’이 발생한다. 좋은 문제와 풀이는 전통을 너무 벗어나도 안되고 너무 비슷해도 안된다. 전통을 너무 벗어나면 부적절하거나 이해 못할 문제와 풀이로 간주되며, 전통을 벗어나지 않은 문제는 혁신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패러다임의 명료화에 기여하지 못한다. 문제의 선택과 풀이는 전통과 혁신 사이의 긴장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하며, 선두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는 이러한 임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Nickles 2003, pp.147-148). 물론, 이러한 임무를 모든 과학자가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과연 “지금 물리학회지에 실린 수많은 논문 중 얼마나 많은 수가 후대에까지 중요하게 여겨질 것인가?” (Nickles 2003, p. 148) 이러한 질문은 과학활동이 개인만이 아닌 집단적인 활동임을 암시한다.
쿤은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정상과학에서 다루는 문제들에 ‘퍼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문제풀이는 모르는 것에 대한 탐색과 관련되어 있지만 고도로 제약된 문제에 한정된다. 쿤은 퍼즐에 대해, “풀이에서의 탁월성이나 풀이 기술을 시험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문제들의 특이한 범주”라고 설명한다 (쿤 1962[1999], p. 67). 가로세로퍼즐과 비유를 하자면, 가로세로퍼즐은 이미 답이 있을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이미 풀린 칸은 어떤 칸부터 풀 것인가에 대한 지침이 되며, 그 칸의 답을 찾기 위한 힌트도 제공한다. 그 남겨진 칸은 “과학자로 하여금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게 하는 무엇인가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쿤 1962[1999], p. 67).”
그런데, 여전히 퍼즐 풀이는 사소하게 보일 여지가 있다. 문제풀이 활동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있다. 첫째, 우리는 이미 답을 함축적으로 알고 있다. 둘째, 문제 풀이를 위한 모든 자원은 알려졌다. 셋째, 옳은 답은 함축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 해결된다 (Nickles 2003, p. 150).
이러한 전제는 플라톤의 메노(Meno) 역설에 대한 답과 너무나 흡사하다 (Nickles 2003, p. 150). 그러나 쿤은 분명 플라톤의 노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쿤의 지식은 변화하지만 플라톤의 지식은 이데아에 그 자리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쿤의 문제풀이는 플라톤의 답과 무엇이 다르며, 문제풀이는 어떤 점에서 사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첫째, 과학자들은 범례의 모든 함축을 알지 못한다. 논리적인 맥락에서조차 우리는 하나의 전제가 함축하는 모든 귀결을 알 수 없다. 하나의 귀결을 도출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며, 도출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그 귀결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범례의 모든 함축을 알지 못하며, 새 문제에 대한 범례의 적용가능성을 암묵적으로 깨닫더라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둘째, 쿤의 문제풀이는 논리 또는 규칙에 의존하지 않으며, 범례 또는 사례 의존적이다 (Nickles 2003, p. 151). 과거의 사례는 현재의 문제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문제 풀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문제 풀이를 새 문제에 맞게 변형하는 과정이 수반되곤 한다. 이러한 과정은 문제풀이가 이전의 범례로부터 (논리적으로) 사소하게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의 변형’은 정상과학의 발전, 그리고 더 나아가 위기의 초래를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단초이다. 메노 역설에 대한 플라톤의 답은 발전과 위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문제풀이는 범례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문제풀이를 범례에 대한 패턴매치의 과정으로 보았을 때, 패턴매치는 언제나 상호적이다 (Nickles 2003, p. 169). 새로운 문제는 범례들의 조합으로도 정확히 맞지 않을 수 있는데, 문제가 범례의 적용으로 풀 수 있는 형태로 바뀔 수도 있지만, 범례가 문제에 맞게 변형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한 새로운 문제 풀이는 새로운 범례가 되어 범례들의 집합에 귀속되며, 패러다임은 범례들의 추가를 통해 발전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범례의 모든 함축을 알지 못한다. 과거의 범례에 미묘한 변형을 가한 새로운 범례가 가진 모든 함축을 알지 못한다. 그 함축이 과거의 범례와 모순을 초래할지라도! 즉, 범례 상에서의 미묘한 변화조차도 혁명적인 함축을 가질 수도 있으며, 그 함축이 명시화되는 순간에서야 우리는 혁명을 인식할 수 있다 (Nickles 2003, pp.154-155). 이는 다시 말해 어떠한 문제가 혁명을 초래할지는 풀기 전까지는 알 수 없으며, 더군다나 풀고 나서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쿤은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코페르니쿠스, 플랑크에 대한 역사적인 묘사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수학적인 행성 천문학에 속하는 다분히 기술적인(technical)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던 와중에 거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태양 중심설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지구 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태양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혁명적인 이동이 겉으로 보기에 사소한 기술적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홍성욱 1999, p. 155).” 쿤은, 양자역학을 탄생시킨 것으로 알려졌던 흑체복사 문제는 당시 물리학자들이 씨름하던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이었으며, 플랑크의 가설이 본질상 고전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설이 지닌 혁명적 함축 또한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쿤은 이어서 그 혁명성을 명시화시킨 장본인은 플랑크가 아니라 또다른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하던 아인슈타인과 에른페스트이며, 그들은 플랑크의 작업을 ‘오독’함으로써 혁명적 해석을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홍성욱 1999, p. 156; Nickles 2003, p. 154).
이렇듯, 과학활동은 작은 변화들이 종국의 예측치 못하는 귀결을 만들어내는 비선형성을 특징으로 한다. 문제풀이 과정은 과거의 범례의 새로운 문제로의 적응과 재해석을 요구한다. 범례의 해석에 대한 용인된 변이들은 경우에 따라 과학의 변화와 발전에 큰 또는 예측치 못한 역할을 하게 된다 (Nickles 2003, pp. 154-155).
니클즈가 강조하기를, 교과서 속의 범례는 순수히 과거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접하는 범례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재해석되어 살균되고(sanitized) 이상화되어 역사적 맥락이 제거된 역사적 사례이다 (Nickles 2003, p.168).” 이러한 점에서, 쿤의 나쁜 역사서로서의 교과서와 나쁜 역사가로서의 과학자는 역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다. 즉,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쁜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 (Nickles 2003). 이러한 과학자들의 역사 왜곡과 범례의 변형 속에서, 어떤 범례들은 도태되고, 어떤 범례들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수된다. 이러한 점에서 범례는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고 범례의 변화와 역사는 항상 각각의 과학자들이 씨름하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에 관련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범례의 계통발달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Nickles 2003, pp. 168-169. p. 155).

인공지능과 사례 기반 추론

문제 풀이에 대한 인지과학의 연구를 살피기 위해서는 인공지능 연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들의 연구는 애초부터 ‘자동적인 문제풀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인공지능 연구는 일단 규칙기반 AI을 구현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욕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규칙기반 AI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AI는 단지 잘 정의되고 매우 제약된 문제에서만 작동했다. 결국, 규칙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그들은 AI에 규칙과 함께 ‘관련지식’도 함께 넣어주었다. 이른바 ‘전문가 시스템’이라 불린 지식 기반 계산기계를 구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구현한 AI는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지식기반 AI는 두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를 야기했는데, 첫째, 투여한 지식이 많을수록 성능은 지수적으로 느려졌고, 둘째, 지식기반의 변화에 매우 불안정(brittle)했다 (Nickles 2003, pp. 159-160).
직관에 의하면, 지식이 많을수록 성능은 좋아져야 한다. 인간을 흉내내는 좋은 AI를 구현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규칙기반 AI와 지식기반 AI에는 전문가들이 가진 규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규칙은 어떠한 특징을 보이는가? 사실 전문가들은 자신의 규칙을 명세하고 나열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규칙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더라도 사후적인 합리화인 경우가 많고, 종종 다른 규칙과 모순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Nickles 2003, p. 160). 이 점은 문제를 효율적으로 푸는 전문가들이 규칙에 따라 문제를 풀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8,90년대부터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사례 기반 추론에 기반한 AI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 기계는 전의 AI보다 유연하게 작동하였고, 이전에는 풀기 어렵다고 얘기되는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스템도 여전히 정보가 많아질수록 느려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현재의 연구자들은 이를 ①효율적인 인덱싱 기법과 ②사례에 맞게 시스템을 수선하는 기법의 문제로 보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아직 미성숙 단계이긴 하지만, ‘경험으로부터의 추론’이라는 오래된 철학적 난제에 일정한 통찰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인지과학 내의 인공지능 및 신경과학 연구자들은 ‘귀납’의 문제를 비롯한 유사한 문제를 놓고 씨름 중이다 (Nickles 2003, p. 160).
이러한 사례 기반 추론에 따르면, 인간은 “현재상황에 대한 지각과 반응을 과거 익숙한 상황과 매치시킴으로써 조직하는 경향 (Nickles 2003, p. 161)”을 보이는 것을 말해주며, 이는 우리의 직관과 잘 맞아떨어진다. 또한 사례 기반 추론에서는 사례저장의 용량초과를 방지하기 위해, 사례 정보를 일정정도 손실시킬 필요가 있다. 즉, 구체적 사례는 추상화된 범례로 변형시켜 저장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Nickles 2003, p. 162). 이는 원형(또는 전형)을 통한 표상이라는 인지심리학의 연구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점까지 고려해보면, 사례 기반추론은 일반적으로 ①추상화 절차 ②사례의 인덱싱 기법 ③시스템의 수선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안에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신경망 수준에서 또는 AI의 구현메커니즘 수준에서는 법칙적인 규칙이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의 수준이 아니다. 즉, 우리는 그 규칙을 알더라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규칙은 논리적인 규칙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규칙에 가까울 것이다. 물리적인 규칙이 논리를 따를지는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의식적인 수준에서 사용하는 논리 규칙은 오히려 패턴매치로 환원될 가능성도 있으며 그러한 연구도 인지과학에서 진행중이다 (Nickles 2003, pp. 162-163).
이러한 사례 기반 추론이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핵심적인) 추론은 언어 없이도 가능하다. 둘째, 추론에 해당하는 프로그램과 경험에 해당하는 자료 사이의 엄격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셋째, 문제와 풀이의 생성과 발견은 검증과 엄격히 분리되지 않는다. 넷째, 혁신의 본질은 수정이다. 마지막으로, 문제풀이는 자연에 대한 복사라기보다는 과거의 풀이에 대한 적응적 모방, 복사이다. 만약 이러한 사례기반 추론에 대한 연구가 성공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면, 쿤의 정상과학에 대한 묘사, 즉 범례를 통한 문제풀이에 대한 경험적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과학확동은 비합리적인 과정이 아닌 (새로운)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Nickles 2003, pp. 161-162).  

스키마 이론

이러한 사례기반 추론과 쿤의 통찰에 스키마 이론과 신경과학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스키마는 일종의 자료 ‘구조’이다. 대상의 유사관계 집합은 동형의 스키마로 담을 수 있는 자료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으며, 종 분류는 스키마의 종류에 따른 분류로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F=ma와 같은 스키마에 의해 담을 수 있는 자료들은 유사관계로 묶이게 되어, 고전역학의 부분적인 패러다임을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스키마 구조에 내장된 F, m, a의 관계는 그 구조 내에서만 상호적인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신경과학에서는 이러한 스키마가 메모리에 저장된다기보다는, 뉴런의 연결(의 강도) 자체에 함축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 뉴런의 연결과 강도는 계속되는 투입자료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것으로 설명한다 (Nickles 2003, pp.163-164).
이러한 스키마 이론은 사례 기반 추론의 한 난점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일정한 수준에 있는 과학자들은 과거 자신이 풀었던 문제들을 모두 기억해내지 않는다. 또한 앞서 구체적인 사례는 추상화를 거쳐 저장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과학자는 범례와 연습문제들을 통해 학습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은 사례 기반 추론과 딱 맞지는 않아 보인다. 다행히 이러한 난점에 대해 스키마 이론과 신경과학은 일정한 답을 주고 있다. 우리 신경망이 그런 식으로 학습을 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대상의 특정한 속성만이 중요하다면 그 속성만이 추상화되어 범례로 기억되며, 그렇게 투입되는 정보에 의해 신경망의 연결과 강도가 굳어지면서 스키마를 형성해내는 것이다. 또한 반복적으로 상기하게 되는 몇 개의 대표적인 범례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례들은 점차 지워지게 된다. 그렇게 일정 강도의 스키마가 굳어진 후, 전문가가 된 과학자는 몇 가지 대표적인 추상적 범례만으로도 유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은 사례기반 추론의 성격을 더 명확히 해주는 듯하다.

모형 기반 추론(model-based reasoning)

기어리는 과학이론에 대해 이론적 모형들의 유사관계 집합과 이론적 가설로 제시한다. 기어리는 쿤을 따라서 교과서 분석을 하였고, 쿤이 말했던 범례들이 바로 모형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 모형의 집합이 곧 문제공간의 영역을 제시함과 동시에 좋은 해답의 전형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즉, 기어리의 노선은 쿤의 연장선 상에 있다 (Giere 1988, pp. 62-91).
그렇다면, 모형 기반 추론은 앞서 말했던 사례기반 추론과는 어떤 관계인가? 사례는 구체적이지만 모형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앞서 사례기반 추론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용량초과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추상화가 동반되어야 함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니클즈는 모형을 사례로 인정한다면, 모형기반 추론과 사례기반 추론은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특히 정상과학 기에 과학자들은 그 둘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Nickles 2003, p. 165). 그러나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 더 이상 패러다임 내의 모형 중에서 알맞은 모형을 찾지 못한다면? 그 때에는, 패러다임 외부에서 알맞은 모형을 찾거나 상당히 생경한 모델링은 해야 할 수도 있다.
너세시안에 의하면, 모형 기반 추론은 모형을 구성하고 조작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모형 기반 추론은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멘탈 모델링(mental modeling)이라는 가설은 물리적 시스템의 인과성 추론, 논리적 추론, 담화와 이야기의 이해, 귀납 등의 수많은 영역에서의 연구에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진행중이다 (Nersessian 2003, p. 196).
너세시안, 기어리에 따르면, 멘탈 모델링은 진화의 산물로 많은 동물에게도 있다고 가정되고 있다. 또한, 인간은 지각과 언어를 통해 모형을 산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과학적 추론과 같은 난해한 상황에까지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Nersessian 2003, p. 197; Giere 1988. pp. 134-136).

모형기반 추론의 본성

모형 기반 추론(reasoning)은, 메탈 모델링(mental modeling)에서 시작하며, 구체적인 추론(inference)은 그 모형으로부터의 추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멘탈 모델링 과정에서는 실제 세계 또는 상상적인 상황, 사건, 프로세스에 대한 구조적 또는 기능적 유비가 동원되어 모형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다.  멘탈 모형은 사건과 존재자에 관련한 두드러진 공간과 시간 관계 및 인과구조에 대한 표상을 부여받는다. 실제 대상으로부터 상속되는 제약들도 유비를 통해서 들어온다. 그리고 표상은 실세계의 여러 차원 중 (문제 풀이의) 추론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차원에 대해서(만) ‘동형’인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스프링에 대한 표상은 3차원이라기보다는 1차원에 가깝다. 마지막 남은 추론과정은 모형의 구조적, 인과적, 기능적 제약에 따라 직접적 조작을 가하는 일이다 (Nersessian 2003, p. 197).
멘탈 모형의 구체적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멘탈 모형은 대상, 상황, 과정의 특징에 대한 ‘선택적’ 표상이며, 따라서 추론과 이해에서 ‘유연성’을 가지며, 멘탈 모형에 기반한 문제 해결은 매우 효과적이며, 일상적인 영역에서 이러한 추론은 대부분 성공적이다. 다만, 과학과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는 이러한 추론이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평가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주요한 성공 사례는 일종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범례로서 사례 기반 추론의 기초가 될 수 있다 (Nersessian 2003, pp. 197-198).
모델링의 기초는 유비이다. 너세시안에 의하면 유비란 추론의 길잡이일 뿐만 아니라 추론의 산출에도 기여한다. 전기 현상에 대한 문제풀이에서 보통 우리는 흐르는 물과 같은 비유를 쓰고, 기체 현상을 다루면서, 우리는 당구공과 같은 비유를 도입하여 모델링을 한다. 개념적 혁신은 이러한 유비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동떨어진 두 영역의 ‘잠재적 유사성’을 인식하는 것은 종종 새로운 개념과 산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곤 한다. 뉴턴의 혁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상계의 행성과 지상계 투사체의 ‘잠재적 유사성’을 인식하여 새로운 모델링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Nersessian 2003, pp. 198-199).
새로운 모델링에 성공하기 위해서, 과학자는 멘탈 모델링 뿐만 아니라 외적(external) 모델링도 사용한다. 외적 모델링 역시 문제해결을 위해 두드러진 차원만을 추출하여 만들어지며, 보통 다이어그램과 문자, 기호들이 동원된 시각적인 모형을 구성한다. 외적 모델링은 특정한 측면에 대한 집중과 추론의 조직화 및 모형의 저장과 지속적인 수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외적 모형은 모델링의 개인적 성공을 뛰어넘도록 해준다. 외적 모형은 공동체 내부에서 공유된 멘탈 모형을 구성하도록 도모하고 과학적 모형을 널리 퍼지도록 만듦으로써, 과학의 성과가 사회에서 소통, 비교, 평가되어 다음 단계로 이전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중요한 밑천을 형성한다 (Nersessian 2003, p. 200).

혁신적 모형의 기원

혁명기의 (또는 정상과학 시기에서라도) 혁신적인 모형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하나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혁신적 모델링은 인간의 인지적 추론능력에 달려있다. 둘째, 어떤 문제를 풀고 있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셋째,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인가에 달려있다. 넷째, 과거성과에 대한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각각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혁신적 모형은 인간의 인지적 추론능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앞에서 전제했듯이, 모형기반 추론, 사례기반 추론 등은 모든 인간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능력이다. 물론, 사람마다의 능력 차이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느 분야에나 능력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고르게 분포하기 나름이며, 과학자 사회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긴 어렵다. 인간의 인지적 추론능력은 혁신적 모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통의 전제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둘째, 어떤 문제를 풀고 있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은 다른 인과력(로렌츠의 힘/기전력)에 의해 동일해 보이는 현상(회로에서의 전류 발생)이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다 에테르가 없는 모형을 만들어냈다. 그와 같은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로렌츠는 로렌츠 변환식을 만들었음에도 아인슈타인과 같은 급진적인 모형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옛 칼로릭 이론 내에 있던 카르노는 열기관에 대한 공학적인 문제를 놓고 씨름을 하다 카르노 싸이클과 열역학 제 2법칙에 대한 모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코페르니쿠스와 플랑크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모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혁신은 항상 그 과학자가 어떤 문제를 풀고 있었는가에 깊숙이 관련된다.  
셋째,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이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정상과학 또는 사례기반 추론에 의하면, 문제풀이에 동원되는 자원은 보통 과거의 성공적인 사례, 즉 범례이다.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범례는 문제풀이에 동원되는 자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과거의 범례를 변형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다른 영역의 분과 또는 과학 외부의 자원들도 유비 등의 기법에 의해 함께 동원될 수 있다 (Nersessian 2003, p. 195). 멕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은 패러데이의 이론뿐만 아니라 (패러데이는 몰랐던) 다양한 수학적 모형을 추론의 자원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Giere 1990, p. 423). 니클즈는 미개척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과학자의 경우, 그가 자원으로 동원하는 사례는 꼭 학습과정에서 배웠던 범례들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닐스 전(Nils Jerne)이 면역시스템에 대한 모형을 만드는데 길을 가다 번뜩 떠오른 메노(Meno) 역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준다 (Nickles 2003, p. 168). 한편, 과학사학자 아이젠슈타인에 의하면, 르네상스 중기 활판인쇄가 보급되면서 범람한 문헌들 속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문헌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닥치는 대로 천문 관측 기록을 수집하였고, 과거의 특정 관측 기록의 일시나 장소를 측정하는 경우 동료들의 적당주의를 엄정히 비판했으며, 과거 보고서에서 모순을 발견하는 등의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했다. 또한 엄청난 천체 관측 자료로부터 그는 과거 천문학자로서는 할 수 없었던 장기적 주기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적(technical) 문제에 정열을 쏟을 수 있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는 ‘입수 가능한 모든 철학서’를 읽어댔으며, 지명, 달력, 연표, 주화 등까지 조사했다. 한편, 당시 등장한 새로운 학술서와 수학 제표 또한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할 수 있었던 자원이었다 (아이젠슈타인 1983[1991], pp. 213-215). 과연 이러한 넘쳐나는 자원이 없었더라면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
넷째, 과거성과에 대한 태도가 관련된다. 아이젠슈타인은 ‘인쇄술은 과거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수도원에서나 소수만이 주석을 달며 보던 옛 원전(original)이 인쇄술의 발전으로 갑자기 범람하게 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고귀한 지식의 총체로서의 원전은 자신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전까지는, 최고의 지식인 원전(original)으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오류가 증가해간다는 믿음이 있어왔고, 원전의 출판은 그 오류를 수정하여 온전한 모습의 원전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원전의 범람은 오히려 과거에 대한 경외감을 삭감시켰고 원전을 일정한 거리에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여러 종류의 원전의 등장은 유일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당시 지식인들에 과거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과거의 성과는 현재의 문제풀이에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자원 중 하나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안에 코페르니쿠스도 있었다. 아이젠슈타인에 의하면, 르네상스 중기 태동한 과학혁명은 과거에 대한 태도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아이젠슈타인 1983[1991]). 기어리는 색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17세기 전, 전염병이 돌자 마을 사람들은 신성하게 여겨지는 아이를 순교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전염병과 아이와 관련짓는 이론적 모형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지능력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며, 그들이 사용하는 추론이란 우리가 사용하는 유비, 연상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어리는 그들이 그러한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지 묻는다. 그에 의하면, 그들의 세계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안적 모형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보통 회의주의자이기보다는 패턴매쳐(pattern matcher)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과학혁명기에 회의주의가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Giere 1996, pp. 539-540). 내가 보기에, 전통의 관념에 회의적이기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활용가능한 다양한 모형의 등장 또는 변칙사례의 증가들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시기를 회의적인 분위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정상과학기의 전통과 혁신 사이의 ‘본질적 긴장’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전통에 대한 일정한 거리두기’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모형의 평가와 선택

너세시안이 지적했듯이, 일상적 맥락을 벗어난 과학적 맥락에서 모형의 구성은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받기 어려우며 평가의 과정을 동반한다. 그러나 현대 이론의 평가과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추론 또한 사례와 모형에 기반한 추론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어리의 주장이다. 기어리는 이론적 모형과 실험장치의 설계에 기초하여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과학자들에게 익숙한 추론이라고 말한다. 또한 실험에서의 결과 예측과 실제 실험결과를 비교하는 과정에서는 통계적인 기법이 사용되며, 이 방법도 모형에 기반한 추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기어리는 말한다 (Giere 1988, pp. 149-158).
이러한 입장에 대해 상당히 불편해할 사람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증거와 이론 선택에 대한 이론은 과학 철학 내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어왔으며, 현재는 베이지안들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증거가 이론을 지지하는 정도(합리적 믿음의 정도)를 주어진 정보로부터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절차에 의해 산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증거로부터 모형으로의 진단적 추론(diagnostic reasoning)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가?
내가 보기에 베이지안의 확률추론은 많은 경우 쓸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Explaing Science의 6장에서 소개된 실험 하나를 살펴보자 (Giere 1988, pp. 149-150). 기어리는 가방에 파란색과 빨간색의 포커 칩을 70:30 또는 30:70으로 넣고, 몇 개의 샘플을 보고 어떤 가방인지 확률적으로 답하라는 실험을 소개한다. 그 실험에서, 12개의 샘플을 보고 8:4의 칩분포를 확인했다면, 베이지안적인 확률 계산에 의해 70:30 가방일 확률이 97%로 계산된다. 이 확률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이 상황을 해석하기 위한 모형으로 나는 빈도주의적 모형을 상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똑같은 실험을 반복하여 12개의 샘플이 8:4인 경우마다 가방을 열어 확인하면, 1000번의 사례를 모으면 그 중 970번 가량은 70:30가방이고 나머지는 30:70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경우 나는 위의 97%라는 확률을 해석할 수 있는 모형을 구성하였으며, 위의 확률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 선택의 맥락에서, 위의 확률값에 대해 똑같은 해석을 요구할 수 있을까? 70:30 또는 30:70이 포커 칩이 들어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방이 있다. 그리고 가방은 열어볼 수 없다고 해보자. 위의 경우와 같이 12개의 샘플에서 8:4의 칩분포를 확인했다고 하자. 나는 이 경우 97%라는 확률로 70:30 가방이라는 주장은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빈도적인 해석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성향적인 해석도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70:30, 30:70이라는 제약조건조차 확실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샘플로부터 가방의 진상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계산한다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증거로부터 이론에 대한 지지의 정도를 계산하려는 시도는 바로 위와 같은 상황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일상적인 가방 실험에서는 가방을 열어볼 수도 있고 여러 번 반복할 수도 있지만, 실제 세계는 유일하며 그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열어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기어리는 모형기반 추론만 가능하고 진단적 추론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했다 (Giere 1988, pp. 149-157). 그러나 내가 볼 때, 진단적 추론도 모형화 가능한 경우에는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증거로부터 이론을 베이지안식으로 진단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모형을 검증하고자 하는 실험에서도 확률을 쓰고 있으며, 일종의 진단적 추론이 사용되는 듯 하다. 그런데 그 확률을 잘 살펴보면, 실험기구의 오류가능성의 의한 오차범위를 산출하는 경우에 많이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추론이란 명료한 사례에 대한 실험에 대한 반복적인 과정을 거쳐 나온 오차들을 통해 오차범위를 추정하는 데 쓰인다. 그 추론과정은 통계적 추정에 해당하는 진단적 추론이지만, 모형화 가능한 진단적 추론이라 생각한다.
모형의 평가와 선택의 기준으로는 메이요의 엄격한(severe) 검증 조건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Mayo 2000). 메이요는 증거와 모형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상정하기보다, 어떠한 이론에 대한 검증 역할로서 타당한 실험과 결과분석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엄격성(severity) 조건에 의하면, 실험 설계와 결과분석은 모종의 실험 결과가 증거로 채택될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꼭 다른’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 그는 대부분의 잘못된 실험 또는 결과분석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는 경우까지도 ‘fit’이란 결과로 보게 만드는 실험을 구성했거나 그 역으로 구성한 경우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메이요는 이러한 검증절차에서 동원되는 추론을 오류-통계적(error-statistical) 추론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실험을 통한 검증은 이론모형, 실험모형, 자료모형의 세 모형이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론에서 자료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도구 및 배경에 의해 오차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 오차로 인한 결과 혼동을 없애는 것이 검증에서 사용되는 추론의 핵심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이요의 연구는 실제 과학현장에서의 관행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메이요의 연구는 단순히 증거적 정보와 이론 사이의 관계를 선험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검증 절차, 즉 실험설계와 결과자료 분석의 조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적인 연구를 가능케 하고 있다 (Giere 1997).

인지적 접근이 과학철학에 주는 시사점

지금까지 살펴본 인지적 접근은 그동안 해명하기 어려웠던 과학활동의 동학(dynamics)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틀을 제공하고 있다. 그동안 강조되어 왔던 규칙과 정의 및 (정언적) 합리성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그 자리를 유사관계에 의거한 개념 및 표상, 사례-모형 기반 추론을 채우고, 과학활동의 핵심에 과학의 ‘내용’이 아닌 과학을 수행하는 ‘인지적 행위자’를 둠으로써, 과학활동의 양식과 내용의 변화를 유연하게 설명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세시안, 기어리 등이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활동은 평범한 인간의 인지적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패러다임 내의 범례와 인지적 능력만으로는 그 결과가 결정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과학자가 어떤 문제를 풀고 있는가’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가’이다. 이 점에서 역사는 과학활동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들어와야 한다.
나는 여기에 과학이 사회적 활동이라는 점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이 하지 못하는 과학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인간의 뛰어난 인지능력, 특히 고수준의 추상화 능력을 들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성과가 축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성과를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자원으로 활용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은 세대가 거듭되더라도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그 제자리걸음을 끊는 고리는 사람들과의 소통과 내용의 축적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외적 표상의 한 형태인 언어이다. 인지적 접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례-모형 기반 추론에서 언어의 역할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멘탈 모형을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회적인 자산으로 만들어 축적을 가능케 하는 언어와 문자의 역할을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어 그 자체는 고도의 추상력이 발휘된 표상의 형태로 인간의 인지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로서도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인지과학을 기반으로 한 자연화된 과학철학은 과학과 철학에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만약 과학활동이 지금 그대로도 성공적이고, 과학자들의 표상과 추론 활동도 상당히 성공적이라면, 철학은 과학에 조언을 해줄 필요가 있는가?
지금까지 과학철학자들은 일반화될 수 없는 규칙들을 과학에 조언을 해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한 규칙으로는 과학의 유연한 발전에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없다. 규칙기반 추론보다 사례-모형 기반 추론이 더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은 기존 철학자들의 조언방식에 대한 좋은 반례가 된다. 이렇듯 인지과학을 기반으로 한 과학활동에 대한 연구는 일단 적절하지 않은 조언을 걸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방식으로 어떠한 조언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바꿔, 자연과학은 기술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역사적으로 자연과학이 기술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이다. 그 전까지 과학은 기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사회과학은 사회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아마 지금도 사회과학이 아무런 사회변화에 영향을 못끼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사회이론은 사회를 설명, 이해, 예측하기 위해 제시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제시된 이론에 맞게 세상을 이해하면서, 그에 맞는 행동양식을 산출하게 된다. 사회는 변화하고, 예측은 빗나가곤 한다. 예측은 틀렸을지라도, 사회이론은 역사적 맥락에서 항상 사회를 변화시켜왔다.
‘인지적 과학철학은 과학에 어떤 도움 또는 변화를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위의 질문들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그 해답은 미지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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