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2쇄 발행

사진 2016. 1. 20. 오전 10 05 47

오늘 택배를 받았습니다. 택배 상자 속에는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 두 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뒷쪽을 펼쳐보니 2015년 12월 7일에 2쇄가 발행되었다고 적혀 있네요! 인터넷서점들의 판매지수가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팔린 모양입니다. 번역 계약서를 쓸 때, 매절이 아닌 인세로 계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12월 7일에 발행된 2쇄본을 왜 이제야 보내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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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혁명≫ 역자 해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번역본의 출간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현재 최종(?) 교정 작업 중이므로, 아마도 2월이나 3월에는 출간될 것 같습니다. 그 기념으로 제가 책 뒤에 덧붙인 역자 해설을 이곳에 올려봅니다.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

 

1957년에 출판된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토머스 쿤이 집필한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5년 뒤 출판한 ≪과학혁명의 구조≫와 함께 과학에 대한 통념을 허물고 새로운 과학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과학적 변화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거대한 사례 연구로 기획되었으며, 그 내용은 쿤이 강의했던 하버드대학의 교양 과학 수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47년 가을 물리학 박사 과정에 있던 쿤은 하버드대학 총장 제임스 코넌트가 개설한 교양 과학 수업의 조교로 참여하면서 개인적인 ‘혁명’을 경험했다. 17세기 역학의 기원에 대한 강의를 준비해야 했던 그는 뉴턴 역학과의 비교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읽다가 당혹감에 빠졌다. 뉴턴의 역학 체계로 교체되기 전까지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양 과학을 지배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너무나 엉터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쿤은 그런 엉터리 같은 내용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글과 끈질기게 씨름했고, “어느 기록적인(매우 뜨거웠던) 여름 어느 날, 그러한 당황스러움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날 그에게는 모종의 “개념적 재조정”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그는 글 전체를 합리적으로 만들어 주는 이해 방식을 발견했다. 더 중요하게, 개인이 과거의 글을 이해하는 데 그러한 개념적 재조정이 필수적이라면,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일어났어야 했다. 이는 쿤이 과학도로서 습득했던 과학 지식의 발전 방식인 축적에 의한 발전과 충돌했다. 1977년 저서 ≪본질적 긴장≫의 서문에서 스스로 회고한 바에 따르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음으로써 들춰낸 것은 인류가 자연을 보거나 그것에 언어를 적용하는 데서 이루어진 전체적인 종류의 변화로, 이는 지식의 추가나 단지 단편적인 오류의 수정으로는 적절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종류의 개념적 전환이 과학의 특징이라면, 과학 지식이 어떻게 발전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그림이 필요했다. 그가 보기에 이 그림을 추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과학사학자가 과거를 되찾는 데, 또는 반대로 과거에서 현재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근본적인 개념적 재조정”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1949년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쿤은 하버드대학 특별 연구원이 되어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과학사학자로 거듭났고, 1956년 UC 버클리로 옮길 때까지 하버드의 교양 교육 및 과학사 조교수로 재직하며 학부생을 위한 과학사 교양 수업을 꾸준히 강의했다. 그 수업의 내용은 차곡차곡 쌓여 바로 이 책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이루는 재료가 되었다. 그렇다면 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의 어떤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까? 그것은 네 가지 정도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과학은 혁명을 통해 비축적적으로 진보한다. 과학이 진보함에 따라 해명 가능한 현상들은 많아지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과학의 개념들은 연거푸 파괴되고 대체된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이 얼마나 막강한 체계였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것이 결국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아무리 강력하고 그럴듯한 개념 체계일지라도 언젠가는 소임을 다하고 다른 개념 체계로 대체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혁명적 교체 과정에는 끝이 없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개념들 역시 종국에는 파괴될 것이다. 이러한 쿤의 관점에 따르면, 과학의 진보는 진리를 향해 수렴하지 않는다.

둘째, 과학 연구는 개념 체계 또는 전통의 도움을 받아 수행된다. 어떤 개인도 기존 개념 체계로부터 한 번에 벗어날 수 없으며, 코페르니쿠스 역시 태양과 지구의 자리를 바꾼 것 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전통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개념 체계는 우리에게 다양한 현상에 대한 통합적인 설명과 심리적 만족감을 제공할 뿐 아니라, 미지의 것을 예측하고 탐지하는 강력한 도구로서 연구의 길잡이가 된다. 좋은 개념 체계는 좋은 연구 문제를 제공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제공한다. 따라서 개념 체계의 경쟁은 단지 현재의 설명력이 아니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달려 있다. 이론의 ‘정확성’, ‘일관성’과 같은 익숙한 가치 외에 ‘생산성(fruitfulness)’이라는 낯선 가치를 중시했던 쿤의 독특한 관점은 여기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유명한 개념으로 발전한다.

셋째, 과학혁명은 입증이나 반증의 논리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론과 관찰의 불일치는 전통을 파괴하는 혁명의 궁극적 원천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불일치는 언젠가는 기존의 전통 내에서 해결될 일시적인 불일치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론과 관찰의 불일치 자체는 혁명의 동기나 호소력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었을까?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전문적인 천문학자로서 하늘의 기하학적 조화에 집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점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독특한 수용 과정도 설명해 준다. 그다지 정확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던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그것의 기하학적 조화를 알아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호소력이 있었고, 그러한 소수의 노력 덕분에 결국 다수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혁명 초기에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수용 여부는 미적 취향의 문제가 되었다.

넷째, 과학의 한 분야는 다른 분야의 사상들과 얽혀 있다. 천문학은 기본적으로 좁은 분야에 속한 전문가들의 활동이긴 하지만, 물리학, 우주론, 종교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천문학의 일부 내용이 바뀌면 물리학과 우주론, 심지어 종교의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가 완수되기 전까지 천문학의 혁신은 저항을 받는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당시 유럽 사회의 저항이 왜 그렇게 극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변화가 왜 그렇게 광범위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야기한 수많은 천문학 바깥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에 완성됐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1543년에 시작되긴 했지만, 그 혁명은 그로부터 150년 뒤에나 종결될 수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코페르니쿠스만의 혁명이 아니었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은 독자라면, 쿤이 제시한 ‘정상과학→위기→과학혁명→새로운 정상과학’의 발전 단계가 이 책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서술되길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기대는 합당하며 어느 정도는 충족될 것이다. 단, 혁명의 전조를 알리는 ‘위기’에 대한 묘사는 쉽사리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기 전까지 당대의 천문학의 상황을 위기로 인식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위기와 가장 근접한 묘사를 찾는다면,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계자들이 그 체계에 주전원을 추가해 체계의 복잡성을 증가시켰다는 지적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적조차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수정 시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코페르니쿠스가 활동하던 16세기 초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고유한 체계에 기초한 천문표를 여전히 사용했다. 천문학 이론을 이용해 천문표를 계산하던 사람을 제외하면, 천문학 이론 자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연구자’ 자체가 극히 희박했던 것이다. 어쩌면 코페르니쿠스는 16세기 초 유럽에서 천문학의 상태를 온전히 이해한 유일한 천문학 ‘연구자’였을지 모른다. 쿤에게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당시 천문학 연구자 공동체의 구성원은 코페르니쿠스 한 명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의 개인적인 위기의식 표명은 공동체 전체의 위기로 간주될 수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한편, 이론 선택의 문제가 미적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는 쿤의 주장은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다. 과학의 합리성을 부정하고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후에 쿤은 자신이 상대주의자가 아니며 이론 선택은 분명히 정확성, 단순성, 정합성, 생산성과 같은 합리적인 가치에 호소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이론 선택 과정에 주관적인 요소가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위의 가치들을 존중하는 데 모두 동의하더라도 개인들은 다른 이론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마다 이론의 단순성이나 생산성에 대해 조금씩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각 항목의 상대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른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별로 단순하지 않다고 판단할 때, 케플러는 매우 단순하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또 케플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론의 단순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편이었다. 이러한 개인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미적 취향’의 차이로 본다면, 케플러는 당대의 평균과는 꽤 동떨어진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만약 16, 17세기의 모든 과학자가 평균 취향에 따라 획일적인 선택을 했다면, 코페르니쿠스 이론처럼 이단적인 이론은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했을 것이다. 즉, 쿤에게 개인들의 취향 차이 혹은 주관적인 요소는 혁명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쿤의 철학적인 견해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책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역사서이자 대중과학서다. 이 책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 본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줄 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다양한 반응들 역시 당시 대중 작가들과 성직자들의 입을 빌려 매우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비롯해 역사적으로 등장한 다양한 이론과 방법들을 상세하면서도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교하게 그려진 독창적인 다이어그램들은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기여 중 하나일 수 있는데, 그의 다이어그램들은 교육적인 목적으로 수없이 복제되었을 것이다.

부디 이 멋진 책을 읽고 다채로운 즐거움을 함께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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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의 이중나선 (전파과학사, 1973)

왓슨의 <이중나선>은 수업준비 때문에 학기초에 읽게 되었는데요. 역자 후기를 보다가 빵 터졌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인명, 지명의 표기를 역자는 관례대로 하려 했으나
송상용 형의 고집에 못이겨 원음에 충실하게 했음을 밝혀둔다.”

 

송상용 선생님은 우리 과학사 및 과학철학계의 꼬장꼬장한 원로시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고집이 엄청나셨나 봅니다. 특히 발음 표기에 대해서는 말이죠. ㅎㅎ

 

책에 있는 “원음에 충실한 표기” 몇 개만 알려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란든 타임즈, 캘텍, 지브랄따르, 윌렴즈타운, 패러디학회(Faraday society), 

먹카디 의원, 로스앤질리즈, 캘리포녀, 쉬카고, 린더(Linda), 네덜란트, 포트걸 플레이스

 

위와 같은 표기의 책임은 송상용 선생님에게 있으니, 괜히 번역자에게 뭐라고 하지 마시길.

원음 표기는 정말 좋지 않습니다. 관례를 따릅시다 -_-;;

 

<이중나선>은 궁리 출판사 번역본도 있습니다.

되도록 그 책을 보시길 바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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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노새, 황소

부인님과 함께 진행하던 에저튼의 <구식의 충격: 20세기 기술과 세계사> 번역 원고를 드디어 지난 달 출판사에 넘겼습니다. 원래의 예정일보다 거의 1년이나 늦게 원고를 넘겼지만, 출판사의 관계자분께서는 아래와 같은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여러 일들도 많았습니다만, 무사히 번역 마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혹여나 제가 진행하는 데 있어 언짢게 해드린 부분 있으셨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ㅜㅜ

 

 

언짢기는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희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_-;;

 

어쨌든, 교정이 남았기 때문에 실제 출판일은 내년 3월은 넘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라도 원고를 읽고 비문이나 오탈자를 잡아주실 의향이 있으신 분은 이 글에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메일로 원고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맛보기로 책의 일부를 보여드립니다.^^

 

말, 노새, 황소

 

인간의 목적을 위한 말의 사용은 수천 년 전에 발명되었다. 말의 번식, 사육, 훈련, 유지는 야생에 존재하지 않던 동물을 만들어내는 전문적인 일이었다. 만약 말의 힘이 최대로 사용된 시대를 결정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최근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말은 전(前)기계 시대의 잔재가 아니었다. 말에 의해 굴러가는 1900년의 거대한 도시는 새로운 도시였다. 1900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인 영국에서, 수송을 위한 말의 사용은 19세기 초가 아니라 20세기 초에 정점을 찍었다. 어떻게 ‘철마’가 끄는 기차의 시대에 말이 끄는 수송 수단이 함께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답은 경제 개발과 도시화가 더 많은 승합 마차, 화물 마차, 소형 마차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기차와 배가 상품의 장거리 수송을 담당했다면, 짧은 거리에서는 마차가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일례로, 거대한 철도 조차장과 운하 시스템의 교차점에 있는 런던 캠든 시장(Camden Market)을 방문한 사람들은 그곳의 수많은 낡은 건물들이 마구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건물들은 근처 리전트 파크(Regent’s Park)의 승마용 동물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화물 견인용 동물들을 위한 곳이었다. 1924년 당시 가장 크고 가장 혁신적인 영국 철도 회사 LMS(London, Middleland and Scottish)는 자신이 보유한 기관차(1,0000대)만큼이나 많은 수의 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 회사가 보유한 자동차는 1,000대를 겨우 넘겼을 뿐이었다. 1930년 당시 LNER(London and North Eastern Railway)은 7,000대의 증기기관차와 5,000마리의 말, 그리고 겨우 800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914년 경 세계의 가장 부유한 도시들에서, 말이 끄는 수송수단이 동력 엔진을 단 버스, 화물차, 승용차나 전기로 움직이는 전차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농업의 경우, 말의 최고 전성기는 보다 늦게 찾아왔다. 예를 들어, 핀란드의 말 개체수는 1950년대에 정점을 찍었는데, 이는 목재를 벌채하는 데 말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가장 생생한 사례를 제공한다. 농사용 말의 이용은 1915년에 최고치에 도달했는데, 당시 미국 농장에서는 2100만 마리가 넘는 말이 이용되고 있었다. 이는 1880년의 1100만 마리에서 증가한 수치로,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이때의 수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미국의 사례는 특별히 흥미를 끄는데, 왜냐하면 20세기 초 미국의 농업은 고도로 기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말의 힘에 의존한 농업이었다. 우리는 시골에서의 말에 대한 의존도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 농사용 말의 이용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당시, 경작지의 3분의 1 정도는 말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말은 풀, 건초, 곡물의 거대 소비자였다.  [이러한] 기계화된 농업 덕분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거대 국가이자 1910년 무렵 단연코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 삶의 한 영역에서, 수송용 말의 사용은 특히 두드러졌다. 1, 2차 세계 대전은 산업화된 전쟁이자 공학과 과학과 조직화의 위업으로 간주된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때문에 두 전쟁에는 엄청난 수의 말이 사람처럼 징집되었다. 모든 교전국은 말에 의존했으며, 노새를 비롯해 짐을 나르는 다른 동물에도 의존했다. 1차 세계 대전 이전, 소규모의 영국 군대는 25,000마리의 말을 가지고 있었지만 1917년 중반 대규모의 최신 영국 군대는 591,000마리의 말과 213,000마리의 노새, 47,000마리의 낙타, 11,000마리의 황소를 보유하게 되었다. 1917년 말 서부 전선에만 368,000마리의 영국 말과 82,000마리의 영국 노새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수치는 그곳에 배치된 영국 자동차의 수를 훨씬 상회했다. 이는 기병에 대한 과소평가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탈 것으로 이용된 말은 서부 전선에 배치된 영국 말 중에 겨우 1/3에 불과했으며(그리고 이 중 일부만이 기병 부대에 속해 있었다), 대다수는 현대전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물량을 수송하는 데, 특히 철도의 종점에서 전선까지 운반하는 데, 이용됐다. 이러한 동물 이용은 영국 내에 존재하는 말을 활용하기 위한 예외적인 응급 조치가 아니었다. 말은 정말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동물이었고, 그래서 영국은 429,000마리의 말과 275,000마리의 노새를 미국에서 사들였으며, 막대한 양의 사료도 수입했다. 세계 말 시장을 활용하는 영국의 능력은 영국 군사력에 핵심적이었다.  영국만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1918년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미국 군대는 각 대규모 보병 사단마다 2,000마리의 견인용 말을 비롯해 2,000마리의 타는 말과 2,700마리 이상의 노새를 갖추었다. 이는 병사 4명당 말 또는 노새 1마리가 있는 셈이었다. 

 

말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보여주는 보다 적나라한 예는 2차 세계 대전이다. 흔히 장갑 편대 중심으로 그려졌던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군대는 1차 세계 대전 때의 영국 군대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말을 갖추고 있었다. 말은 ‘독일 군대의 기초 수송수단’이었다. 1930년대 독일의 재무장은 말의 대량 구매를 뜻했으며, 그리하여 1939년 무렵 독일 군대는 590,000마리의 말을 갖추는 한편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 3백만 마리를 남겨두었다. 각 보병 사단은 스스로를 옮기는 데 약 5,000마리의 말이 필요했다. 1941년 소련 침공을 위해서는 625,000마리의 말이 소집됐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독일의 말 군대는 점점 더 거대해졌고, 결국 독일군은 자신이 정복한 나라들의 농업용 말을 약탈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945년 초 독일군은 120만 마리의 말을 갖추었다. 그리고 전쟁 중 손실된 말의 총수는 150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과거 그 어느 전쟁보다도 더 많은 수의 말을 전투에서 볼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방식의 수송 수단이 사용되긴 했지만, 병사 대 견인용 말의 비율 역시 증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히 독일군은 나폴레옹의 대군단(그랑 아르메, Grand Armée)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의 말과 함께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사실, 모스크바에 이르는 데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세기 초반 몇 십 년이 지난 시점부터 전 세계적으로 말과 노새의 개체수가 떨어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은 부유한 도시에서 사라졌고, 부유한 나라의 들판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동물의 견인력이 계속 중요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힘을 대체하는 용도로서 더욱더 중요해지까지 했다. 쿠바의 농업은 1960년대부터 소련과 동유럽의 농기계와 원조를 통해 변화를 겪었고, 결국 동물 견인력의 중요성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9년 구소련 블록이 붕괴하면서, 쿠바 정부는 동물 견인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농업용 말의 개체수도 회복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동물은 황소였다. 황소를 번식시키고 대규모로 훈련시키면서, 그들을 이용하는 데 필요한 기술적 기반도 구축되었다. 황소 개체수의 회복세는 정말 극적이었다. 1960년 500,000마리에서 1990년 163,000마리까지 떨어졌던 황소의 개체수는 1990년대 말 380,000마리까지 증가하여, 40,000대의 트랙터를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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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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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책이 나왔으니 책 20권(사실 나한테는 5권 정도밖에 안 돌아옴)이랑 번역인세를 보내준다는 메일이 왔길래, 한번 yes24에서 검색해봤다. 출간일은 9월 30일로 나와 있지만, 판매는 벌써 시작했나보다.  

http://www.yes24.com/24/goods/3539813

부인님은 <리얼리티 TV>와 <맞춤아기>를, 난 <윤리적 관광>을 번역했다. 그리고 세권이 형이 <동물실험>과 <대체의학>을 번역했다.

많이 사주셈~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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