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비판: 쿤-비트겐슈타인 대 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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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철학연구 기말보고서
  • 제출일: 2006년 12월 6일
  • 작성자: 정동욱
  • 첨부파일: media:tp_pl_2006.hwp

머리말

철학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어떤 방식으로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그러니까 결국 그것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또한 그것의 기초를 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둔다.
-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24, 84쪽.

최근 스티브 풀러(Steve Fuler 2003)는 쿤을 권위주의적인 보수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그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포퍼를 내세우는 도발적인 책을 출판했다. 풀러의 눈에,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정상과학 활동을 유의미한 과학활동이라 말하는 쿤의 주장은 비판적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이와 유사하게, 불완전해 보이는 일상언어를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도 마르쿠제를 비롯한 당시의 정치학자들로부터 현실에 안주하는 보수적인 철학자로 평가받곤 했다. 과연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일까?

이 글에서는 포퍼의 입을 빌어 쿤을 비판하는 풀러의 입장과 비트겐슈타인을 비판하는 정치학자들의 입장을 나란히 제시한 후, 이들의 비판이 비트겐슈타인과 쿤에게 정당하지 못함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초월자로서의 시각을 가진 철학자를 강변하기보다 세속적인 여행자로서의 철학자를 제시하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이 포퍼 등의 관점보다 더 건전한 비판적 자세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와 그에 대한 보수적 해석

쿤의 1962년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에 따르면, 과학은 하나의 ‘패러다임(paradigm)’을 채택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패러다임이란 탐구의 성공적인 모범사례(examplar)와 그것이 미래의 탐구에 제공하는 청사진 모두를 의미한다. 확립된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자들은 근본적인 의심을 삼가고 틀에 박힌 문제 풀이 활동에 매진하게 되는데, 쿤은 이러한 활동을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사소해 보였던 문제가 계속 풀리지 않는다거나 그러한 미해결의 문제가 점점 증가하게 되면 패러다임은 ‘위기’에 처하고, 오직 그 때에만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분야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규범을 정하는 광범위한 토론에 참여하게 된다. ‘혁명’은 실행 가능한 대안적 패러다임이 발견되었을 때에만 일어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과 기존의 패러다임은 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다. 따라서 혁명의 종식은 합리적 논증에서의 승리보다는 정치적 설득, 종교적 개종 그리고 세대 교체에 의해 달성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시작된다(Kuhn 1996).

“과학 혁명이 초래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개종과 흡사하다”는 쿤의 주장은 과학의 합리성을 세속화함으로써 과학의 인식론적 지위를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읽혀졌는데, 이러한 독해에 의하면 과학적 합리성이란 고작해야 특정 시기 과학자들이 합의한 패러다임에 의존할 뿐이었다. 1970년대 후반 이래로, 쿤의 개념들은 객관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1980-90년대에는 인간의 지식(과학)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사회적) 맥락 하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으로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적․사회구성주의적 인식론의 기초가 되었다(홍성욱 1999, 149-150쪽).

흥미롭게도 쿤은 자신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구성주의의 정신적 지주로 간주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상대주의자 또는 비합리주의자로 공격하는 다른 과학철학자들에게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변호해왔다. 사뭇 모순적으로 보이는 쿤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1965년 쿤과 포퍼 사이에 실제로 오갔던 말들은 상당히 유용한 자료가 된다.

쿤과 포퍼 사이의 직접적인 논쟁은 1965년 7월 런던대학에서 단 한번 벌어졌는데, 이 논쟁에는 포퍼의 제자였던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와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도 참여했다. 이 논쟁은 5년 후 라카토스의 제자인 알란 무스그레이브(Alan Musgrave)에 의해 보완되어 󰡔비판과 지식의 성장(Criticism and Growth of Knowledge, 1970. 한국어판 번역: 󰡔현대과학철학 논쟁󰡕, 1987)󰡕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논쟁은 쿤의 비판적 논문으로 시작되는데, 오늘날 이는 포퍼의 과학 방법론에 대한 결정적 비판으로 평가받는다. 쿤에 따르면, “칼 포퍼 경이 강조하는 테스트들은 용납된 이론의 한계를 조사하거나 혹은 현행의 이론을 극도로 긴장시키기 위해 수행되는 것들이다. ... 그러나 그와 같은 에피소드들은 과학의 발전에서 대단히 드물게 나타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때는 언제나 관련된 분야에서 위기가 선행되었거나 현존하고 있는 연구의 규범과 경쟁하는 이론이 출현했을 경우뿐이다(Kuhn 1987, 17-18쪽).” 또한 “모든 이론들은 기존의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서도 다양한 임시방편적인(ad hoc) 조정을 통해 수정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Kuhn 1987, 28쪽).” 쿤은 이론과 맞지 않는 변칙사례가 등장할 때마다 이론 전체를 폐기한다면, 연구활동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점에서, 쿤에게 어떠한 학문이 과학이 된다는 것은 “비판적 논의에 대한 포기임이 분명하다(Kuhn 1987, 19쪽).”

반면, 포퍼는 이러한 과학활동이 비판정신을 말살시키는 교조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과학이 본질적으로 비판적이라고 믿는다. ... 그러나 약간의 교조주의가 필요하다고, 즉 교조적 과학자가 수행할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나는 항상 강조하였다. 그러나 만일 너무 쉽게 비판에 양보한다면 우리의 이론들이 실제로 힘을 발휘할 곳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결코 찾아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Popper 1987, 83쪽).” 포퍼가 보기에 “<정상>과학자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다. ... 그는 교조적 정신을 배웠다. 말하자면 그는 세뇌를 당했다. 그는 왜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서도 응용될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 나는 이런 류의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태도는 엔지니어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로서 훈련된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나는 다만 그런 태도 속에,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 속에, 내가 전문화의 경향 속에서 느끼는 것과 유사한, 커다란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것은 과학에 대한, 실로 우리 문명에 대한 위협이다(Popper 1987, 79-80쪽).”

위에서 인용된 포퍼는 풀러가 20세기 후반 과학의 현실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주고 있다. 풀러가 보기에, 20세기 후반의 과학은 민주적 견제장치가 결여된 과학자들의 자율적인 권력으로 성장해버렸는데, 쿤의 영향력 하에서 진행된 과학에 대한 (철학적, 역사적, 사회학적) 연구들은 이를 조장하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것이다. “쿤의 과학적 변동의 이론에서 철학적 감시는 찾아볼 수 없다. ... 쿤의 정상과학은 마피아와 왕조, 종교적 질서의 특징들만을 결합한 정치적으로 원시적인 사회 구조였다. 그것은 정치가들이 그저 자기 한 몸보다 더 많은 사람을 책임지도록 정식으로 강제하는, 오늘날의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에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조직상의 안전장치들을 결여하고 있었다(Fuller 2003, pp. 45-46).” 우리의 지식이 특정 시기에 형성된 패러다임에 의존한다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지만, “그것을 안정의 원천으로 다루느냐(쿤), 아니면 극복해야 할 문제로 다루어야 하느냐(포퍼)는 다른 문제이다(Fuller 2003, p. 54).” 물론, “비판은 오직 특정 조건에서만 생산적이며, 예를 들어 어떤 연구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는 생산적이지 않다. 쿤은 이점을 분명 포퍼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 ‘위기’의 상태에 접어든 패러다임에 대해서만 비판을 허용하는 쿤의 보수적인 자기만족은 또 다른 극단이었으며, 이 또한 라카토스는 참을 수 없었다(Fuller 2003, p. 60).”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과 그에 대한 보수적 해석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엄밀한 이상언어로 모호한 일상언어의 결함을 ‘교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가 그 자체로 온전하다고 보게 된다. 그러니 형이상학의 ‘해소’를 위해 굳이 일상언어 자체를 뜯어고칠 필요는 없다. 그 자체로 온전한 일상언어가 어떻게 잘못 사용되어 형이상학적 물음을 낳는지 드러내면 그만이다. 이 때문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언어를 교정하려 드는 대신에 그것을 ‘기술’해야 한다고 말하게 된다.(진중권 2006, 340-341쪽)”

󰡔철학적 탐구󰡕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새로운 언어관을 도시건축에 비유한다. 일상언어가 복잡한 미로 같은 구도시라면, 수학, 화학,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형식언어는 잘 계획된 신도시다. “우리의 언어는 하나의 오래된 도시로 간주될 수 있다. 즉 골목길들과 광장들, 오래된 집들과 새집들, 그리고 상이한 시기에 증축된 부분을 가진 집들로 이뤄진 하나의 미로. 그리고 이것을 둘러싼, 곧고 규칙적인 거리들과 획일적인 집들을 가진 다수의 새로운 변두리들(Wittgenstein 1994, §18; 진중권 2006, 341쪽에서 재인용).”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이라면 구도시를 신도시처럼 뜯어고치려고 했겠지만,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신도시가 구도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구도심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제 둘레에 신도시를 개발하듯이, 일상언어 역시 어떤 필요에 의해 자신의 변두리에 인위적으로 형식언어들을 조성한다(진중권 2006, 341-342쪽).” 형식언어도 결국 모호한 일상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판단에 따르면 형식언어로 일상언어를 대체하겠다는 발상은 무모한 짓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양한 언어놀이들을 제시하면서, 그것들이 각각의 체계에서 완전함을 제시한다. 언어에 하나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완전한 언어놀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명제놀이(세계에 대한 기술)가 하나의 언어놀이라면, 건축가와 조수들의 사례도 또 다른 언어놀이이다. 이러한 언어놀이들은,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활동의 한 부분 혹은 삶의 형식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에 삶의 형식이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언어는 삶의 형식을 초월할 수 없으며, 항상 그 안에 내재한다. 따라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삶의 형식에 기반한 (맹목적) 훈련의 일종이다. 각각의 언어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면서 형성되며, 우리가 지금 만들어낼 수도 있다. 보편적인 언어의 토대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언어가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각각의 사회적 규약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규약을 개인이 함부로 버리거나 변경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규약은 언어가 발딛고 서 있는 토대로서, 그것을 어긴 개인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통뿐만 아니라 생존에도 위협이 될 것이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대해, 쿤에 대해 가졌던 것과 유사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마르쿠제(Marcuse)와 젤너(Gellner) 등의 정치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기술주의(descriptivism)와 규약주의(conventionalism)가 상대주의에, 정치적 불구이며, 수동적이라고 의심하면서, 문제가 있는 언어의 현재 상태를 무비판적으로 받쳐주고 있다고 비판했다(Robinson 2006, §38). 즉, 비트겐슈타인이 사람들을 언어게임과 그들의 전통에 속박시켜버렸다는 것인데, 이러한 조건에 놓인 사람들은 그들이 속한 언어게임이나 다른 언어게임(또는 문화)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평가와 비판을 내릴 수 없는 절망적인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비판이다(Robinson 2006, §44).

니리(Nyiri) 등은 비트겐슈타인이 비판을 기피하고, 과거의 것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으며, 삶의 형식(forms of life)에 대한 일치(agreements)를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일치에 대한 강조가 비트겐슈타인으로 하여금 우리가 속한 사회적 관행들 사이의 불일치에 눈감도록 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했다고 비판했다(Robinson 2006, §59).

쿤/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불만의 뿌리

쿤과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자들이 보기에, 전통은 공동체의 안정을 위한 일종의 규약이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지배질서의 안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음으로써 진실을 호도한다. 마치 그 공동체가 기반한 전통이 자연스럽고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정치의 타락으로부터 진실을 지켜내고자 하는 철학자라면 마땅히 그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됐다(Robinson 2006, §29). 이러한 생각은 비판이론의 기본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쿤과 비트겐슈타인은 전통의 필수불가결함을 강조했으며, 과학이론 또는 언어의 진위문제가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전통과 규약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쿤과 비트겐슈타인은 초월적인 입장에서 이론이나 언어게임을 평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러저러한 언어게임이 그것의 맥락 하에서 수행되는 다양한 모습을 ‘기술’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곤 했다.

쿤/비트겐슈타인과 이들에 대한 비판자들의 차이는 진리를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예컨대, “포퍼는 진리란 언제나 탐구자 사회를 ‘초월하는(transcendent)’ 것이라 주장한 반면, 쿤은 진리는 항상 그 사회에 ‘내재하는(immanent)’ 것이라고 주장했다. 쿤이 진리를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 위치시켰다면, 포퍼는 그것을 패러다임의 지식 주장들이 번역되고 평가되어야 하는 ‘메타언어’ 속에서 찾았다(Fuller 2003, p. 56).” 이와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이 진리를 삶의 형식 안에 위치시켰다면, 마르쿠제와 젤너는 진리를 각각의 삶의 형식들을 초월하는 무언가로 생각했다.

이러한 차이는 ‘규약’에 대한 상이한 태도와 연결된다. 포퍼주의자들과 쿤/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지식이 어떤 면에서 규약적이라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명확히 달라진다. 포퍼주의자들이 규약의 지위를 (맘에 들지 않으면) 우리의 결정에 따라 쉽게 뒤엎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반면, 쿤/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그것의 지위를 (그 규약이 이미 우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폐기될 수 없는 전통으로 보았다(Fuller 2005, p. 485).

우리의 지식이 규약적이라고 하는 통찰은 우리의 지식이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전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쿤과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규약적이라 하더라도 그 전통을 함부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비판적 정신을 훼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포퍼주의자들은 이 점을 파고든다. 전통과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전통을 비판할 수 없다고 말이다.

게다가 포퍼주의자들이 보기에, 기술주의자(descriptivist)이자 규약주의자(conventionalist)인 쿤과 비트겐슈타인이 전통에 할 수 있는 비판이란 고작해야 “우리 전통에 속한 지식이 진정한 진리가 아닐 수 있다”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식의 비판은 무기력하며 진정한 비판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을 고수하는 데 일조하고 만다고 포퍼주의자들은 생각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쿤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은 현재 학계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풀러가 보기에, 현재의 지식인 사회는 자신의 전문화된 분과가 가진 자율성에 만족할 뿐 다른 분과(특히 과학)를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 쿤 이후의 과학철학은 과학 내 특정 영역의 증거와 추론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전문적인 분야로 전락해버렸다(Fuller 2003, p. 4). 또한 과학사 분야는 완전히 전문화된 분과로 정립되어, 과거에 대한 평가를 배제한 채 역사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그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 과정을 어쩔 수 없었던 일 또는 예측치 못했던 우연한 일로 그림으로써, 당시 행위자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행위들을 합리화해주고 만다(Fuller 2003, ch. 9, 10).

여기서 풀러는 포퍼의 감수성을 불러낸다. 포퍼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념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 잘못의 책임을 주변 사물과 상황에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평가는 변명에 불과하며, 그러한 평가로는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없다. 포퍼가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의식적인 평가를 통해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과거의 선택(특히 잘못된 선택)을 상황적인 이유들로 설명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선택을 상황에 모두 양도하는 것이 되고, 결국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Fuller 2003, ch. 10-15). 풀러가 보기에, “쿤은 종종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인용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금언, ‘이해하기 위해 먼저 믿어라crede ut intellegas’에 충실(Fuller 2003, p. 114)”함으로써 인간이기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포퍼와 라카토스, 그리고 풀러에 따르면, 역사에는 실현되지 않는 가능성들이 숨어 있다. 즉, 현재는 최선의 결과가 아니다. 현재가 현재처럼 된 것은 과거 행위자들의 특정한 선택 결과이며,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는 현재보다 나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해 평가를 할 수 있고 과거의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되는데, 이 때의 평가란 우리가 놓쳐버린 반사실적 가능성들을 분별해내는 우리의 능력과 관련된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능력 때문일 것이다. 풀러가 보기에, 쿤/비트겐슈타인과 그들을 이어받은 지식인들의 태도는 자기 반성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Fuller 2003, ch. 9-15).

비판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쿤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주요한 불만은 마땅히 현실 사회 밖에 있어야 할 비판의 자리를 현실 사회 내에 안주시켰다는 데에 있다. 포퍼주의자들은 비판의 자리를 실현되지 않은 반사실적 가능성이나 우리가 (끝까지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마땅히 추구해야 할 초월적인 진리에 부여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의 자리라는 것이 가능한가? 또한 그러한 반사실적이거나 초월적인 자리 없이는 비판이 불가능한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복수의 언어게임을 상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언어게임들로 구성된 언어의 도시를 여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각 구역마다 삶의 형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곳의 언어게임에 익숙치 않을 수 있고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훈련’을 통해 2개국어나 3개국어에 통달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상황에 따라 건축가-조수의 언어게임을 할 수도 있지만, 명제놀이를 통해 세계를 기술하는 일도 할 수 있다. 모든 언어게임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언어게임도 없으며, 모든 언어게임을 대체할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언어게임도 없지만, 각각의 언어게임에 통달한 사람은 그것들 사이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복수의 패러다임 사이에는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악명 높은 논제로 인해 상대주의자로 낙인찍혔던 쿤도 위의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한 답변을 제시한다. 두 패러다임 사이에 (등가의 의미를 보존하는)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각 의미는 각각의 패러다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은 가능하다. 이는 마치 우리가 영어 텍스트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과 같다. 많은 번역자들은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한다. 우리는 이들의 작업을 번역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해석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한국어로 옮겨진 텍스트의 의미는 원문과 동일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영어 원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영어에 능통하면 된다. 그러나 2개국어에 능통한다고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 원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완전히 영어권 문화의 사람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한국어로 옮기기 위해서는 다시 한국어권 문화의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우리는 동시에 한국인이자 영국인(또는 미국인)이 될 수 없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동시에 두 곳에 있거나 둘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곳에 있을 수 없더라도, 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는 있다는 사실이다. 즉, 초월적인 관점을 취할 수는 없지만, 둘의 관점을 교대로 취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우리가 겪고 있는 매우 일반적인 일이다. 쿤이 말한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이란 알고 보면 이러한 상황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Kuhn 1983).

이러한 비트겐슈타인과 쿤의 해명은 어떤 점에서 유의미한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확고한 기준이 있어야만 성찰과 비판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을 초월적인 장소에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쿤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바로 그들이 초월적인 관점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고정된 영웅적인 자기 이미지에 사로잡힌 이론가들은 비트겐슈타인적인 이론가가 지닌 수평적 이동의 자유를 보지 못했다(Robinson 2006, §44).” 철학자는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특권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노력하고 훈련하면 다양한 장소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여행자로서의 철학자는 초월적인 기준에 호소하지 않고도 비판의 자원을 기존에 존재하는(또는 존재했던) 다양한 장소에서 추출해낼 수 있다.

“철학자들만은 그동안 그들이 언어를 내려다보며 배회하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해온 것은 모두 언어의 고정된 일부 조각들을 외삽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Robinson 2006, §60).” 예컨대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검증가능성의 원리’나 포퍼주의자들의 ‘반증가능성의 원리’는 그들이 이상적으로 해석한 일부 과학의 언어를 외삽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를 다른 언어에 적용하는 데에는 항상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그들의 원리는 심지어 인접한 과학의 언어에도 적용하는 데 실패하곤 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원리가 언어의 특정 조각에만 기반해 있음을 망각한 채, 그것이 모든 언어에 적용할 수 있는 특권적인 지위를 가졌다고 착각한 결과이다. 우리는 더 솔직해져야 한다. “비판은 세계 안에 진짜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 비판의 자원은 (세계 내의) 다른 장소에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언어게임 사이를 오가면서 발견한다(Robinson 2006, §60).”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보수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감옥과 유사한 하나의 언어게임에 갇혀있는 철학자의 이미지에 의존한다. ... [이들의 비판은] 오직 철학자가 평생 하나의 언어게임에 정착해 있는 한에서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착은 비트겐슈타인이 묘사한 세계 안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복수의 언어게임을 상정하는데, 그것들은 그 자체로 확장하기도 축소되기도 하며, 서로 인접하거나 겹치기도 한다. ... 철학자들의 여행은 언어게임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준다. 일생동안의 여행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언어게임들 사이의 차이들은 비판의 자원이 될 뿐만 아니라 소위 개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Robinson 2006, §61).”

앞에서도 계속 강조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를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지위에 위치시켰다. 그렇지만, 철학을 과학 같은 것과 동등하게 보지는 않았다. “철학은 과학과의 관계에서 인식론적 특권이나 문화적인 권위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철학은 과학의 한계와 그것이 여타의 인간 활동과 공유하는 규약적 토대를 보여줄 수 있다(Robinson 2006, §50).” 그 한계는 초월적인 언어를 통해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다양한 언어게임들을 여행하면서 ‘보여지는’ 것이다.

관조에서 실천으로

위에서 열거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 중에 상당수는 비트겐슈타인을 관념론자나 유명론자로 착각한 데서 온 것이 많다. 이러한 착각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현실에서 무기력한 이론이라는 의심으로 이어졌다. 분명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실재론적인 대응관계를 포기했다. 그렇다고 비트겐슈타인이 관념론자가 된 것도 아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삶의 실천과 연동시키려 한다. 여기에는 유물론적인 측면이 있다. 예전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관조하고, 그렇게 바라본 세계의 모습을 말로 그려내는 게 언어의 본질이라 믿었다. 하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예로 드는 언어놀이 속의 인간들은 세계를 관조하지 않고, 그 속에서 늘 어떤 실천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탐구󰡕에 등장하는 언어놀이에서 조수는 장인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벽돌을 나른다. ... 초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의 본질은 세계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는 세계 속에서 일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 아니다. 세계 속에서 일을 하는 데에 사용되는 ‘연장’이다(진중권 2006, 342-343쪽).”

세계에 대한 관조만으로는 언어가 세계와 제대로 상호작용하는지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다른 이들이 ‘갈색’이라는 단어로써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갈색의 대상을 본다고 그가 (진심으로) 말할 때 그가 진짜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Wittgenstein 2006, 147쪽).” 전통적인 실재론자와 관념론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했지만, 그 논쟁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두 입장 모두가 “언어를 이용한 소통은 화자의 머릿속의 관념을 청자의 머릿속으로 옮겨놓는 것”이라는 그릇된 전제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A가 “갈색책을 갖다 다오”라고 말하자, B가 A에게 갈색책을 건네준다. ‘갈색’이라는 말을 듣고 B의 머릿속에서 ‘청색’이 떠올랐다 할지라도, 그가 A에게 건네준 책의 색깔은 결국 갈색이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는 것이다. ‘갈색’이라는 말을 사용해 A는 원하던 책을 받았고, 그로써 소통은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언어놀이 속에서 B의 머릿속에 무슨 색깔의 상이 떠올랐는지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진중권 2006, 355쪽).“ 이로써 실재론 대 관념론의 대립은 해소되고, 언어는 실천을 통해 세계와 만날 수 있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언어의 기능은 머릿속의 관념을 전달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언어적 소통의 요체를 그것과 맞물려 진행되는 실천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언어는 실제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 언어는 진정한 비판도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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