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의 정확성”: 18세기 후반 화학에서 측정의 정밀성과 추론의 정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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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골린스키(Jan Golinski), 천현득 옮김, "“실험의 정확성” : 18세기 후반 화학에서 측정의 정밀성과 추론의 정밀성", 박민아, 김영식 편, 『프리즘 : 역사로 과학 읽기』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2013).


“실험의 정확성”

18세기 후반 화학에서 측정의 정밀성과 추론의 정밀성


잔 골린스키 (천현득 옮김)


이런 종류의 실험을 두고 그처럼 정확한(nice) 체하다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언젠가 달의 무게도 드램(drams), 스크루플(scruples), 그레인(grain) 단위로까지 말하려 들 것이다. 아니, 일 그레인의 몇 분의 일까지 말해줄지도 모른다! (오히려) 각 사람이 지닌 뇌용량정직성공정함을 확인해 줄 확실한 실험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이것이야말로 과학에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Robert Harrington, 1804)[1]

18세기 과학사 연구에서 정량화(quantification)는 중요한 관심거리였다. 물리과학에서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진보는 측정의 정밀성(precision)을 높이고 수학적 형식으로 표현하는 쪽으로 그려졌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나타난 확실성과 예측력을 본받으려는 분야들은 정밀 측정(precision measurement)의 방법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였다. 최근에 나온 한 연구 모음집에서는 여러 분야에서 “정량화 정신(quantifying spirit)”이 드러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이것이 이루어진 폭넓은 배경을 보여 주고 있다.[2] 이에 따르면 통계적 방법, 정밀 측정, 수학적 형식화, 그리고 소위 기하학적 추론 스타일은 계몽기 풍경(Enlightenment landscape)의 도처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책의 저자들은 기상학 자료와 지도제작용 측량을 편찬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활동 속에서, 이러한 실천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탐구했다. 또한 대수적 분석(algebraic analysis)의 모델이 인공 언어나 식물 분류학과 같은 영역으로 어떻게 뻗어 나갔는지도 고찰했다. 그러면서 도구(instrumentation) 개선의 영향과 급성장하던 국가 관료제가 이런 많은 활동에 배경상황을 제공해 주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1770년대와 1780년대 “화학혁명”에서 정량적 방법들이 화학에 도입된 문제는 다시 살펴볼만한 가치가 있는 듯하다. 앙투완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는 화학 반응에 참여한 물질의 무게를 결정하고 그 때 일어나는 열 교환을 측정하기 위해 저울이나 열량계와 같은 측정 기구들을 사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연소, 하소, 호흡에서 교환되는 것(entity)이 플로지스톤이 아니라 바로 산소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establish) 널리 수용되도록 할 수 있었다. 반응물과 생성물의 양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은 화학 반응에서 무게가 보존됨을 전제한 것이면서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그러한 정밀 측정은 라부아지에가 찾던 증거(proof)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미 수학화된 실험물리학이 라부아지에를 통해 화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즉 그를 그 영향의 전달자로 해석하는 방식이 있었다. 더 정밀한 과학들이 보증한 방법을 흡수함으로써 화학은 성숙기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이 당시 실험물리학의 성격을 다소 일반적으로 특징지어 실험물리학이 이미 수학적 형태를 획득했다는 의심스러운 가정에 근거하기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3]

최근에 이루어진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라우아지에의 무게 측정법은 그 자신의 고유한 탐구 활동(investigative practice) 양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프레데릭 홈즈(Frederic L. Holmes)는 라부아지에의 “생명의 화학(chemistry of life)”에 관한 작업을 예리하게 다룬 바 있는데, 그에 따르면 라부아지에는 매번 무게를 확실히 측정했으며 이는 화학 반응에 관여한 물질들의 총 무게가 어떤 반응에서도 항상 보존된다는 불변의 확신에 이끌린 것이었다. 홈즈는 라부아지에가 이런 확신을 가지고 기록된 자료들을 조정(adjustment)했다는 것을 많은 사례를 통해 드러내보였다. 라부아지에가 반복적으로 사용한 대차대조표(balance sheet)는 무게 보존에 대한 그의 신조를 구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그것이 입증되었음을 보여주는 데에도 사용되었다.[4] 이런 통찰을 확장하여 노턴 와이즈(Norton Wise)와 베르나드뜨 벤소드-뱅상(Bernadette Bensaude-Vincent)은 라부아지에가 대차대조표 방법을 다른 분야들, 예컨대 정치경제학과 같은 분야들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탐구했다. 와이즈는 “balance(저울)”가 계몽기 합리주의에 널리 이용되었던 “중재하는 기술(mediating technology)”을 의미했다고 주장했다. 라부아지에가 저울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 열량계 등 특별한 종류의 실험기구를 사용한 점, 그리고 무게의 보존 관계를 통해 반응물과 생성물을 연결하는 등식을 사용한 점등이 좋은 예에 해당한다.[5] 무게 측정으로 나온 숫자들은 관계식으로 표현될 수 있어서 이제 화학적 변화를 대수적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신속하고 모호하지 않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해 준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나의 취지는 위의 연구들이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가지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즉, 라부아지에의 정밀 측정은 그것이 사용된 특정한 맥락 안에서 그 중요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는 무게 및 다른 양들을 측정하여 대차대조표 안에 배치하려 했는데, 이는 물질의 총량이 보존되는 일반적인 자연의 질서 안에서 화학종들이 변환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량화는 논증(argument)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내가 특별히 검토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 연결이다. 나는 어떻게 이런 측정들이 라부아지에가 옳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설득시키는 데 쓰였는지(혹은 그렇게 의도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측정들이 때때로 설득에 실패했는지를 조사할 것이다. 정밀 측정이 라부아지에의 논증 양식의 일부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단지 피상적인 중요성만을 가진다거나 혹은 정밀성을 수사학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실험적 실천에서 정밀성을 사용하는 것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정밀성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수사법이, 실험적 실천의 특정 양식, 그리고 그것이 동원했던 (도구의 그리고 사회적인) 밑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로부터 그 힘의 많은 부분을 끌어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라부아지에가 수행한 측정의 의미에 대해 쉽게 합의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연구는 화학자들 사이에 오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논쟁에서 정량화의 문제가 분명하게 제기되었다. 정량화가 설득의 밑천인 한, 그것은 논쟁적인 것이었다. 1780년대 내내, 많은 영국의 화학자들은 라부아지에의 주장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1785년 파리에서 행한 물의 분해와 합성에 대한 공개 시연(public demonstration)에서 반응물질의 무게와 기체들의 부피에 대한 이른바 정밀 측정이 이루어졌지만, 라부아지에의 주장은 여전히 거부되었다. 죠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 리차드 커완(Richard Kirwan), 제임스 케어(James Keir),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 등은 이런 측정에 설득되지 않았다. 그들은 라부아지에가 실험적 “사실들”이라고 규정했던 것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던졌다. 이 사례에서 정량화는 그 자체로 논쟁거리였던 “사실” 주장들과 결합되면서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영국의 화학자들에게 정밀성을 강조한 라부아지에의 어법은 분명 수사로 보였다. 영국 화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들이 일군의 대안적인 논증 규약(discursive convention) 내에서 연구했기 때문이지, 그들 스스로가 어떤 수사적 틀의 제약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은 아니다. 특히 프리스틀리와 케어는 화학자들이 해석적 이론에 오염되지 않은, 이른바 사실에 관한 이야기(factual narratives)로 의사소통하기를 기대했다. 라부아지에는 이런 규약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라부아지에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실험도구와 논증의 요소들을 모아 조립해 놓은 새로운 구조물(construction)을 따로 떼어놓아야 했다. 열량계와 저울은 물질적․설득적 밑천들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서, 그것들이 모여 홈즈가 18세기 화학 실험실의 “장기 지속(longue durée)”이라고 불렀던 전통과의 급진적 단절을 만들어 냈다.[6] 정밀 측정은 이 밑천을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라부아지에의 반대자들에게 문젯거리였다. 대체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화학적 실천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였다.

내가 영국의 플로지스톤 화학자들의 저항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그들의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측정과 논증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의심스러울 수 있는지를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정밀 측정과 논증적 추론(때로 “기하학적” 추론으로 불림)이 연결된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라부아지에는 실험의 정확성(accuracy)에서 그 결과가 직접 연역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비판자들은 소위 측정과 논증(demonstration)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므로 그 논쟁에 초점을 맞추면, 이러한 연결이 어떻게 라부아지에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또한 반대자들에 의해 해체되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라부아지에와 같은 편이었던 수학자 비오(Jean Baptiste Biot)는 플로지스톤에 반대하는 화학자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실험의 정확성과 추론의 엄격성을 연결해야한다고 느꼈다.”[7] 반면, 라부아지에의 반대편이었던 케어는 동일한 그룹에 대해서, “그들의 실험 방법에서의 정밀성 덕에 자신들의 추론이나 논증에서도 같은 정도의 정밀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 같다”고 적었다.[8] 그 말의 뜻은, 그런 믿음이 전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측정의 정밀성에 추론(reasoning)의 정밀성을 연결시킨 것이 바로 당면한 문제였다. 비판자들은 라부아지에의 주장을 정확한 측정이 플로지스톤 이론을 결정적으로 반증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정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주장에 콧방귀를 뀌었다. 측정의 정밀성과 추론의 정밀성이 라부아지에의 실천에서는 “정량화 정신”의 두 요소로 긴밀하게 묶여있었지만, 영국 해협의 다른 편에서는 별개의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1760년대에 과학자로서 첫발을 내딛을 때부터 지질 조사에서 온도․기압 측정 방법을 사용했고, 비중측정(hydrometric) 방법을 광천수(mineral-water) 분석에 적용했다. 1780년대에는 전통적인 화학이론에 반대하는 운동에 정밀 측정 방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삐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와의 공동연구는 이 운동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의 협력연구의 결과는 1783년에 “열에 관한 논문(Mémoire sur la Chaleur)”으로 나오게 되었다. 최근에 리사 로버츠(Rissa Roberts)는 어떻게 그 두 사람이 처음에는 이름도 없던 새로운 기계를 제작하고 설명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 기계가 반응시 열 교환을 측정하기 위한 장치로서 손색이 없다고 소개하면서, 그 장치가 열 이론과는 무관하다고 공언했다.[9] 후에 그 장치에 “열량계(calorimeter)”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라부아지에의 『화학 원론(Taité élémentaire de Chimi, 1789)』에서였다. 한편, 죠시아 웨지우드(Josiah Wedgewood)와 아데어 크로포드(Adair Crawford)와 같은 실험가들은 라부아지에와 라플라스의 실험을 재연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그들은) 그 기계의 작동을 문제 삼았다. 1797년 익명의 영국 저술가는 “(프랑스 화학자들의) 새로운 학파가 최대한 정밀하게” 결과를 제시했다고 할지라도, “프랑스 화학자들이 무척이나 뽐냈던 실험 과정의 정확성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고 평했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0]

열량계의 경우는 정밀 측정으로 청중들을 확신시키기 위해 라부아지에가 1780년대 초반부터 매우 정교한 기구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정을 보여준다. 1780년대 초에는 유력한 화학자들 가운데 동지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은 플로지스톤의 존재는 타고 있는 물체에서 빠져나오는 물질이라고 확신했다. 아일랜드 화학자인 리처드 커완은 라부아지에의 연소이론에 대한 정교한 대안을 만들었는데, 이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커완의 관점에서 보면, 타고 있는 물체에서 빠져나온 플로지스톤은 대기 중의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dephlogisticated air)와 결합되어 고정된 공기(이산화탄소, fixed air)를 형성했다. 그러고 나면 이 고정된 공기는 고체 잔여물과 화학적으로 결합해서 금속회나 산을 형성했다. 그의 설명은 플로지스톤의 존재를 유지하면서도, 연소와 하소의 사례에서 발생한다고 여겨온 무게의 증가를 다룰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11]

라부아지에가 자신의 연소 이론에 대한 대안들에 직면하고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논쟁에 끼어든 새로운 문제, 즉 물의 합성 [문제] 덕분이었다. 1781년 헨리 캐븐디쉬(Henry Cavendish)는 가연성 공기(inflammable air, 수소)와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의 혼합물에 전기 불꽃을 일으켜 물을 만들어냈다. 그는 두 가지 설명을 검토하고는, 물은 가연성 공기와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의 혼합물의 일부로, 일종의 응축(condensation) 반응을 통해 그 결합(combination)에서 풀려나온 것이라는 설명이 더 그럴듯하다고 제안했다.[12] 오래 지연되어 캐븐디쉬의 논문이 채 출판되기도 전인 1783년 6월 라부아지에는 그 실험을 되풀이했다. 그는 그 반응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물은 두 기체가 결합했을 때 나오는 유일한 산물이고, 그래서 캐븐디쉬나 다른 화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의 원소가 아니라 화합물(compound)이라고 발표했다.[13] 이러한 해석은 과거 자신의 이론에서 골치 아픈 예외 사례에 해당했던 두 종류의 현상들을 설명했다. 즉, 금속이 산에 녹을 때 발생하는 가연성 공기는 물이 분해된 산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연성 공기에 의해 납 회(Lead calx)와 다른 금속회가 환원되는 현상은 가연성 공기가 금속회(혹은 산화물)에서 나온 산소와 결합하여 물을 합성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아직 반응에 사용된 기체들의 양을 정확히 측정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는 “전체가 그것의 부분들과 똑같다는 것은 기하학에서만큼이나 물리학에서도 명백히 참이기” 때문에, 소비된 기체의 양과 생성된 물의 무게가 같게 나올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고 썼다.[14] 이는 라부아지에의 논증에서 가장 중요했던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즉 그는 정밀측정을 통해 물이 화학물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반응물과 생성물의 무게가 같다는 것을 최대한 정확하게 입증하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들 것이었다. 기하학의 비례식보다는 대수 방정식이 무게의 결정을 포함하는 논증 모형을 제공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 반응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캐븐디쉬는 1784년 드디어 실험보고서를 출판하면서 플로지스톤에 반대하는 라부아지에의 설명을 언급하기는 했으나, 자신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버밍엄의 증기기관 제작자이자 프리스틀리의 친구였던 제임스 와트(James Watt)도 이와 유사하게 “현상을 설명할(solving phenomena)” 대안적인 방식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주장했다.[15] 캐븐디쉬와 와트는 라부아지에의 설명에서 실험 현상을 기술하는 부분과 이론적 해석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을 구분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고, 후자는 기각해 버렸다. 그들은 그 대신에 추측성 설명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무게 방정식에서 이끌어낸 대수적 증명이 가진 잠재적 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와트의 견해에 따르면,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는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물이 잠열(latent heat)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가연성 공기는 플로지스톤에 약간의 물과 잠열을 더해져 있는 것이었다. 두 공기가 결합하면 열과 함께 물이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열과 플로지스톤이, 변환을 나타내는 어떤 방정식에도 포함되어야 하는 반응물질의 구성요소들이라는 것을 내포했다. 그래서 반응 용기에 담겨있는 무게를 잴 수 있는(ponderable) 물질들의 무게 관계가 그 반응에 참여한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 용기의 벽을 관통할 수도 있는 다른 존재자(entity)들은 그것들이 결합되어 있었던 물질의 무게에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을 계기로 라부아지에는 물이 화합물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6월의 시연보다 더 설득력 있는 증명(proof)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1783-84년 가을과 겨울의 몇 달 동안, 그는 그런 증명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그는 반응물과 생성물의 양을 더 정확하게 측정하는 쪽으로 접근했다. 이 점에서 그는 가스파르 몽쥬(Gaspard Monge)의 예를 따랐다. 몽쥬는 메지에르(Mézières)에 있는 공병학교인 왕립 기술학교(École Royale du Génie)에서 실험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1783년 6월과 7월, 몽쥬는 라부아지에의 실험과는 독자적으로 물의 합성에 대한 실험을 했다. 그는 반응 기체들의 부피와 비중(specific weight)을 측정하여, 그 무게가 생성된 물의 무게와 (거의 정확하게) 같음을 입증했다.[16]

이 실험을 반복하기 위해, 라부아지에는 뮤스니에(Jean-Baptiste Meusnier)의 도움을 얻었다. 메지에르에서 몽쥬의 학생이었던 그는, 안에 담긴 기체의 부피를 측정할 수 있게 용기를 설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는 동안 그 둘은 물을 분해해서 구성요소들로 분리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그들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철제 포신에 증기를 통과시켰다. 이 증기는 분해되어서, 그 중 산소는 철과 결합하여 산화물을 형성했고, 가연성 공기는 파이프에서 빠져나와 분해되지 않은 물과 함께 채집되었다. 1784년 4월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성공을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고, 그 결과를 전년도의 합성 실험에 대한 자신의 미출간 보고서에 포함시켰다. 유도 과정은 보여주지도 않은 채로, 그는 물에 대한 두 기체의 조성비를 제시했다. 생명의 공기(산소) 12 대 가연성 공기(수소) 22.924345. 이로부터 그는 1파운드 무게의 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무게를 소수점 8자리까지 계산했다. 생명의 공기 0.86866273 파운드 대 가연성 공기 0.13133727 파운드, 총 합계 몰 1.00000000 파운드.[17] 라부아지에는 더 신빙성 있는 결합비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실험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기는 했으나, 사실 자신의 설득전에 그 이상의 무기를 배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반응물과 생성물의 무게가 동등함을 보여주는 대수적인 증명 형태에 이제 소수점 8자리까지 주어진 무게 측정의 숫자들이 보태졌던 것이다. 그렇게 긴 수치들이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설득력 있는 값인지 의문스러웠지만, 그것은 고도의 정밀한 측정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라부아지에의 주장을 더욱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시금 의견의 차이는 지속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실험에 대해, 커완과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가 그 실험에 부여하려 했던 함축을 거부했다. 그 둘은 물 분해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제안은 당치도 않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물과 금속의 결합에 의해 플로지스톤(가연성 공기)이 철에서 치환된 것이었다.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와 뮤스니에의 실험을 재연해보고, 이것을 1785년 2월에 왕립학회에 보고했다. 여기서 그는 가연성 공기의 출처가 물이 아니라 철이라고 주장했다. 캐븐디쉬와 와트처럼,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가 실험 철학자들의 규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는데, 그 규약이란 실험 철학자들이 현상에 대한 가설적인 이론적 설명을 부과하지 않은 채로 관찰한 것만 기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8]

물이 두 기체의 화합물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이렇게 완고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자, 라부아지에는 더욱 엄격하게 강력하게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실험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실험의 “사실”과 자신의 비판자들이 해석 혹은 “가설”이라고 주장했던 것 사이에 세웠던 경계를 후퇴시키려고 했다. 그는 물이 본질적으로 화합물이라는 것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즉, 의심의 여지없이 실험에서 직접 추론(inference)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새롭고 더 정교한 기구를 활용하여 전례 없이 정확하게 정량적 무게를 측정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다. 그의 노력은 1785년 2월 27일과 28일 파리 아스날(Arsenal)에서 보여준, 물의 분해와 합성에 대한 대규모의 치밀하게 준비된(set-piece) 시연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자리에서 라부아지에는 그의 실험적 실천 양식의 모든 요소들을 끌어 모아 그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했다. 즉, 정확한 도구와 방법이 그 설득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다.[19]

새로운 실험의 분해 부분은 라부아지에와 뮤스니에가 그 전 해에 이루었던 것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을 합성하는 작업은 매우 정교한 새 기구를 사용하여 전례 없는 주의를 기울여 수행되었다. 기구 제작자 삐에르 메그니에(Pierre Mégnié)는 뮤스니에의 설계도에 따라 1783년 말 무렵 새로운 기체 용기(pneumatic vessel)를 만들었다. 그 즈음에 그는 라부아지에를 위해 두 개의 저울을 만들었는데, 새로운 기술들을 사용해서 저울대를 매달고 그것의 진동을 줄였다. 둘 중에서 더 큰 것은 100,000 분의 1 정도로 정확하게(즉, 소수점 5자리까지) 1 파운드의 무게를 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20]

전통적인 공기통(pneumatic trough)에서 유래한 새로운 기체 용기(gas holder)는 물 위에 떠있는 탱크 안에 기체들을 저장하고, 여기에 기체의 부피를 측정할 수 있도록 눈금을 덧붙였다. 조정 평형추를 하나 설치하면 용기 밖으로 나오는 기체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칼리브레이션(calibration, 눈금 조정)을 한 후에 눈금을 읽어내면 용기에 담겨 있는 기체의 부피로 환산할 수 있었다. 다양한 온도와 압력 조건 하에서 산소와 수소의 밀도가 어떻게 되는지를 기록한 표가 준비되어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기체의 무게를 계산할 수 있었다.[21] 매 측정마다 정확성을 얻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버니어(vernier)를 사용하여 부피 눈금을 가리키는 바늘의 위치는 각도 1도의 소수점 둘째자리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버니어는 온도계와 기압계에도 적합한 것으로 보였다. 온도계는 레외뮈르(Réaumur) 1도의 소수점 한자리까지 읽을 수 있었고, 기압계는 (1인치의 1/12가 되는) 수은 한 줄의 소수점 한자리까지 읽을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초기 광물학 연구 이래로 온도계와 기압계의 정확성에 관심을 가져왔었는데, 이제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정밀한 기구들을 이용했다.[22]

라부아지에는 라플라스, 뮤스니에, 몽쥬의 도움을 받아 칼리브레이션을 마친 후, 과학 아카데미가 지명한 12명의 증인들을 포함해 약 30명의 학자들을 시연에 초청했다. 이틀에 걸쳐 두 번의 분해 실험과 한 번의 합성 실험이 행해졌다. 분해 실험에서 발생한 수소는 합성 실험에 다시 쓰여서, 붉은 수은 회(Mercury calx)를 가열하여 얻은 산소와 함께 사용되었다. 사용된 기체들의 무게와 그것들이 결합하여 만든 물의 무게는 주의 깊게 계산되었다.

시연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설득되었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기구를 검사하고, 측정하고, 그리고는 그 결과의 기록에 자신들의 이름을 서명했다. 목격하기, 기록하기, 인증하기의 절차는 그 결과의 신뢰성을 보증해주었을 뿐 아니라, 참가자들이 결과의 타당성에 책임지게 했다. 몽쥬와 아카데미의 많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정밀 측정에 대해 더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인지, 라부아지에의 학설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굳혔다. 그 반면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쥬(Balthazar-Georges Sage)와 보메(Antoine Baumé) 같은 화학자들은 라부아지에의 이론에 계속해서 반대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화학자 베르톨레(Claude-Louis Berthollet)가 라부아지에의 관점으로 전향한 것이었는데, 그는 얼마 후에 물이 사실상 화합물이라는 “아름다운 실험”에 의해 자신이 설득되었다고 전했다.[23]

회의론은 넓은 화학자 사회에서도 살아남았다. 1786년 2월, 그 실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뮤스니에의 이름으로 Journal polytype des sciences et des arts에 실렸다.[24] 아마도 그 원고는 라부아지에가 쓴 초고에 기초했을 것이다. 뮤스니에가 포괄적인 보고서를 만드는 일도 분명히 맡았으나, 보고서는 결코 출간되지 않았다. 논문이 기구를 나타내는 두 개의 삽화를 포함하고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 사용된 정교한 방법에 대해서는 매우 불완전한 인상만을 줄 뿐이었다. 기체계량기(gasometer)를 칼리브레이션하는 과정이나 정확한 측정을 얻기 위해 기울였던 세심한 주의에 관해서는 어떤 묘사도 없었다. 한 분해 실험의 결과 값이 제시되었는데, 여기에는 소비된 물의 무게, 실험 전후의 포신의 무게, 그리고 채집된 가연성 공기의 무게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무게들은 파운드(pound), 온스(ounce), 드램(dram), 그레인(grain) 단위로 보고되었는데, 가장 작은 단위인 그레인으로 측정한 모든 숫자들에까지 정밀성을 기했다. 2드램 3그레인이 모자란 것은 증기와 가연성 공기가 기구의 틈으로 빠져나간 탓으로 여겼다. 합성 실험에서도 그 정도로 정밀하게 결과 값이 제시되었다. 이번에는 물이 반응물의 총 무게보다 30½ 그레인만큼 무거웠는데, 이것은 측정 절차의 정확성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로 해석되었다. 무게 차이는 기체들의 무게를 측정하는 용기가 조금 데워진 탓으로 여겨졌다.

이런 설명에는 정확성에 대한 라부아지에 특유의 수사가 지닌 요소들이 나타나는데, 아마도 논문 작성에 미친 그의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무게는 그레인이나 심지어 몇 분의 1 그레인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리고 부족하거나 초과된 양이 비교적 적다는 것은 정확한 측정이라는 권위를 동원하여 물은 화합물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뮤스니에는 물에서 생명의 공기와 가연성 공기의 비가 85 대 15라고 발표했다. 이 수치는 쉽게 기억되었고, 라부아지에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25] 최종적으로 화학의 앞날을 내다보는 주장들, 즉 화학의 미래는 다른 물리과학들이 상당히 진보할 수 있게 만들어준 방법들을 채택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는 주장들이 그 수치들을 뒷받침해주었다. 무게와 측정으로 조성을 분석하는 것은 현상적 성질들을 비교하거나 친화성을 기록하는 것보다 더욱 객관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제공했다. 높아진 정밀성의 기준에 맞추어 화학 실험을 수행하려면 틀림없이 더 많은 수고를 들여야 할 테지만, 이는 과학이 전혀 되돌릴 필요가 없는 길을 따라 꾸준히 전진한다는 확신에 의해 충분히 보상될 것이었다.

후속 연구에서,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절차가 물의 조성 이론(doctrine)을 확실하게 확립했다고 되풀이하여 보여주었다. 하센프라츠(Hassenfratz)와 아데(Adet)가 세운 새로운 화학기호 체계에 관한 보고서에서, 라부아지에는 정확한 측정과 정확한 추론(reasoning)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언급한 바, 그것은 1787년 6월 27일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다. “가장 굳건히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 현대 이론의 한 가지 핵심은 물의 형성, 분해, 그리고 재결합이다. 가연성 공기 15 그레인과 생명의 공기 85 그레인을 함께 태워 정확히 100 그레인의 물을 얻고, 분해의 방법으로 동일한 원소(principle)들을 똑같은 비율로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나서, 어떻게 그 이론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26]

위의 구절에서, 물의 조성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논증은 다음의 네 가지 구성요소들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각 부분들(가연성 공기와 생명의 공기)의 무게를 더하면 전체의 무게가 된다. 둘째, 이제 결합비가 알려졌다.(15:85) 셋째, 그 무게들은 매우 정확하게 측정되었다(“정확히exactly”). 넷째, 이 절차는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고 물의 조성 이론을 정당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후의 언급들에서는 네 번째 요점이 늘상 주장되었다. 그래서 다음해 커완이 쓴 『플로지스톤에 관한 에세이(Essay on Phlogiston)』의 불어판에 덧붙여진 논평에서, 라부아지에는 정밀한 방법의 사용을, 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증명의 우수성과 직접성에 연결했다. 그는 1785년 시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가장 기억할 만한 실험들 가운데 하나인 이러한 이중의 실험은, 거기에 수반되었던 철저한 정확성으로 인해, 물이 분해되고 재합성될 수 있다는 것과, 산소(oxigene)와 수소(hydrogene)라는 두 원소(principle)들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여준 증명(demonstration)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만, 증명이라는 단어가 어쨌든 자연철학과 화학에서 사용될 수 있다면 말이다. ... 우리가 제시한 증거들은 ... 논증의 순서에 따른 것으로, 동일한 순서에 따른 실험에서 나온 것이다. 즉, 실험이 공략당해야 하는 논증 실험(의 순서)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27]

라부아지에의 비판자들은 상황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라부아지에는 물이 화합물이라는 이론을 정밀 실험이 필요한 논증 실험(demonstrative experiment)이라는 개념과 연결함으로써 사실적 주장을 특정한 과학적 실천의 모형에 연관시켰다. 이런 전략이 라부아지에의 진술에 힘을 실어주기는 했지만, 공격받을 수 있는 점 또한 많이 드러냈다. 반대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사용한 실험기구의 적절성과 신뢰성, 실험의 재연가능성, 실험을 보고하는 논증 형식(discursive form)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라부아지에가 주장한 정확성과, 그 정확성이 기하학적 기준에 맞는 증명을 제공한다는 내포도 그 타당성이 의심되었다.

프리스틀리는 1785년 실험에서 수행된 측정의 정밀성에 대해 다소 불만족스러워했다. 10년도 더 지난 후에 그것을 재검토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볼 때, 실험에 사용된 기구는 결론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정확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과를 끌어내기까지 너무도 많은 수정, 오차 허용(allowance), 계산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정확성 자체는 사실 프리스틀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한 측정은 명백히 그를 설득하지는 못했는데, 주된 이유는 정밀 측정의 방법이 실험의 재연가능성을 줄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던 바, 재연은 프리스틀리가 꿈꾸던 민주적이고 평등한 과학 문화가 가진 중요한 특성이었다. 정교한 실험도구와 복잡한 방법들을 채택하면 그러한 재연은 어려워지게 될 것이었다.[28] 특히, 그는 합성 실험이 “매우 다루기 어렵고 값비싼 실험 기구가 필요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서 자주 실험을 반복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수행된 실험은 산출된 결과의 확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했다.[29]

프리스틀리가 비판한 부분들은 케어(Keir)의 책 『화학사전 1편(First Part of a Dictionary of Chemistry)』(1789)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라부아지에는 화학이 단단한 사실의 기반 위에 세워져서 그[추론의] 결론들이 기하학적 논증에서 보이는 정도의 확실성을 지닐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케어는 이것을 물고 늘어졌다.[30] 라부아지에의 주장과는 달리, 케어는 물의 조성을 포함해서 새로운 화학 이론의 많은 면이 여전히 가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기하학에 사용되는 방법의 정밀성”은 화학에는 적용될 수 없었다. 대신, 화학자들은 물체의 현상적 성질을 조사하고 분류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런 접근 방식은 끊임없는 진보를 약속한 당대의 자연사를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수학적 논증과 확실성을 추구하는 대신, 화학 현상이 관찰되고 정리되는 다양한 방식(mode)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을 비교하는 데 만족한다면... 확실성을 개연성(probability)과, 논증된 진리를 가설과 지속적으로 구분한다면... 우리의 지성은 시간과 반복된 실험만이 가져올 수 있는 진보(improvement)를 경험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31]

따라서 논증된 사실의 지위는 해석되지 않은 현상 혹은 날(raw)것의 현상에만 주어져야 하고, 모든 해석은 똑같이 가설로 판단되어야 했다. 이런 구분을 유지함으로써 화학은 진리를 향해 한 계단씩 전진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었다. 라부아지에가 물의 조성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정밀 측정을 활용했지만, 케어와 프리스틀리는 그런 학설이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합의에 의해 받아들여진 현상이 자연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줄 것이므로, 그들은 그 위에 그들의 인식론을 세우려 했다. 해석은 이런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어떤 가설적 도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그것은 사실 자체에 비해 너무도 확연히 부차적인 타당성(validity)만을 지녔다.[32]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이론이 논증적 증명의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했지만, 영국의 비판자들에게 이는 독단주의로 보였다. 비판자들은 라부아지에가 그런 힘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여, 사실성(factuality)에 대한 평등주의적 수사법을 동원하여 대응했다. 이리하여 케어와 프리스틀리는 정밀 측정이 라부아지에의 증명과 유관함(relevance)을 부정했다. 현상적 사실과 해석의 단절이라고 여겼던 것에 정밀 측정이 다리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다른 비판자들은 정밀 측정의 기획에 보다 호의적이었다. 커완은 1780년대 내내 물의 조성 이론과 플로지스톤에 반대하는 다른 측면들에 대해서는 꾸준히 반론을 폈지만, 그 프랑스 화학자(라부아지에)를 “실험 철학에 거의 수학적인 정밀성을 도입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직접적이고 정확한 측정으로“ 하소(calcination)시 금속의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을 증명했던 것처럼, 그는 정밀 측정이 라부아지에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원칙적으로는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33]

이는 과학 강연가이자 저술가이며 기구 제작자였던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이 라부아지에의 정밀성 추구(practice of precision)에 대해 정교하게 비판하면서 택했던 입장이기도 했다. 1788년 드 푸르크로아(Antoine François de Fourcroy)의 『자연사와 화학의 요소들(Elements of Natural History and Chemistry)』의 번역본에서 니콜슨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런 종류의 실험에서 생성물의 양들에 크게 의지하는 것을 용인한다면, 이 대목에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물을 구성하는 두 원소(principle)들의 결합비에 대해 답을 주는 라부아지에의 결과는 그의 결론에 많은 힘을 실어줄 것이다.”

정밀 측정은 어쩌면 라부아지에의 이 사례에 상당한 힘을 더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이론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그의 방법은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실험 절차와 결론은 운명을 같이 했다. 니콜슨은 오늘날 “실험가의 회귀(experimenters' regress)”라 알려진 문제를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플로지스톤의 옹호자들은 여전히 라부아지에의 실험에 대해 그럴듯한 대안적 설명을 가지고 있었다. 물의 결합 이론을 거부한 캐븐디쉬의 1784년 논문은 그 자체가 “정밀성의 걸작”이었다. 편견 없는 독자라면 “결정적 실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플로지스톤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려야만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밀 측정 자체가 실험을 결정적으로 만들지는 못했다.[34]

커완이 쓴 『플로지스톤 소론』의 영어판(2판)에 실린 서론에서, 니콜슨은 정밀 측정이 라부아지에의 주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다시 논평했다. 그는 소위 증명의 수단으로서 정밀 측정의 수사적 기능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 라부아지에 씨의 실험에서 무게를 언급하는 것은 물의 결합과 분해를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논거(argument)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니콜슨에게 어떤 측정들, 특히 기체의 무게 측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정도의 정확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지적하기를, 기체를 담는 용기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기체의 무게를 라부아지에가 주장하는 만큼 정밀하게 측정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식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많은 자리수를 기입한 비중표(tables of specific gravity)를 사용하거나 분수를 소수점 자리를 늘려서까지 표현한 데서, 혹은 기구의 한계를 넘어선 정확도까지 무게를 기록한 데서 발생했을 것이다. 요컨대 라부아지에는 여섯, 일곱, 심지어 여덟 자리까지 무게를 기록한 데 반해, 니콜슨은 단지 세 자리만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철저한 정확성을 유지해서 논증적 증명을 얻었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결론지었다. 이렇게 라부아지에의 세 번째 요소가 가진 약점을 노출시켜, 니콜슨은 네 번째 요소의 설득력(plausibility)을 손상시켰다.

만일 마지막 자리 숫자까지 이 결과들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부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는 실험의 정확도를 천 배나 과장시켜버린(extend) 이 기다란 수치들은 참된 과학에는 불필요한 숫자의 퍼레이드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만을 할 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험의 실제 정확성이 감춰져 있다면, 우리는 실험의 철저한 정확성(exactitude scrupuleuse)이 정말로 논증 절차(de l'ordre demonstratif)에 따른 증명을 가능하게 해주는지 다소 의심하게 된다.[35]

그런 캠페인은 니콜슨이 『화학의 제일 원리(First Principles of Chemistry)』를 출간한 1790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는 그 책에서 한 장에 걸쳐 저울의 정확성에 대해 썼다. 숙련된 장인이 만든 표준적인 정밀 저울은 최대 다섯 자리의 정확성을 가진다고 여겨졌다. 근래에 램스덴(Jesse Ramsden)이 만든 두 개의 저울은 (하나는 화학자 포다이스(George Fordyce)를 위해, 다른 하나는 왕립학회를 위해) 여섯 자리까지 적절한 추측(reasonable guess)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니콜슨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저울에 대한 이 같은 설명으로부터 젊은 학생들은 다섯, 여섯, 심지어 일곱 자리까지 적힌 비중표를 비롯한 화학에서의 이론적 도출들의 진실성을 온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도출은 무게 측정의 허용된 정확성에 의존하지, 그 자체로 정당화되진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게가 다섯 자리까지 주어지면, 마지막 수치는 추정이거나 추측이다. 그리고 더 많은 자릿수까지 적었다면, 그것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속였거나 아니면 무게를 분수 표현으로 바꿀 재능이 부족해서, 혹은 다른 이유로 속인 것이다.[36]

여기서 니콜슨의 요점은 유효 숫자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울의 정확성이 알려지면 비중표는 정당한 자릿수보다 더 많은 자릿수를 기록해서는 안 되었다. 측정기구의 한계를 넘어 정당한 자릿수보다 더 많은 자릿수까지 결과 값이 늘어나면, 실험가들은 계산을 줄이려 해야만 하고 심지어는 자료에서 숫자들을 버리기까지 해야만 한다. 라부아지에가 그러한 인색함을 실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이론적 도출(theoretical deduction)”의 타당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37]

라부아지에는 그런 비판을 피하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 라부아지에가 『화학 원론』(1789)에 쓴 의견들이 저울의 오차에 대한 니콜슨의 논평을 유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교과서에서, 포탱(Nicholas Fortin)이 1780년대 후반에 자신을 위해 제작해 준 두 기구들이 램스덴의 기구를 제외한 다른 어떤 기구들보다 더 정확하다고 썼다. 그는 각 기구의 정밀성이 어느 정도인지 추정했다.(하나는 약 1/10 그레인의 정확성으로 20 온스까지 측정할 수 있었고, 다른 것은 약 1/100 그레인의 정확성으로 1 드램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기구들로 수행한 측정에서 정당하게 인용할 수 있는 유효 숫자가 어디까지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유효 숫자의 문제를 무시하고, 화학자들에게 온스, 드램, 그레인 대신에 파운드의 소수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도록 권했다. (커(Kerr)가 영역본에서 빠뜨린) 변환(conversion)의 한 예에서, 라부아지에는 기꺼이 일 파운드의 소수점 일곱 자리까지 계산했다. 즉 모두 여덟 자리였다. (역시 커가 생략한) 책의 뒷면에 있는 표에서, 그레인을 아홉 자리로 된 파운드의 소수 표현으로 변환한 값이 독자들에게 제시되었는데, 아홉 자리는 그 당시 존재하던 어떤 저울의 정확성의 한계도 넘어서는 것이었다.[38]

그러므로 니콜슨이 『화학사전(Dictionary of Chemistry)』(1795)에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의 합성 실험을 논의하고, 특히 본래 실험보다 상당히 길게 보고된 푸르크로아(Fourcroy), 보클랭(Vauquelin), 세갱(Séguin)이 수행한 재연실험을 언급하면서, 그는 물이 화합물로 증명되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프랑스 화학자들에게 실험 절차의 한계를 상기하도록 했다. 니콜슨에 따르면, 기체의 무게는 측정된 부피를 통해 계산되었고 온도와 압력에 따라 보정되었으며 단위 부피당 표준 무게 값을 사용하여 무게로 환산되었다. 분명히, 계산의 정확성은 표준을 얼마나 정확하게 정했는가에 달려있었는데, 그것은 무게가 24,179 그레인인 구 안에 들어있는 810 입방 인치의 기체를 가지고 정해졌다. 이 용기 안에서 수소의 무게는 딱 35¼ 그레인이었고, 이는 (니콜슨이 지적한 대로) 저울이 “상당한 정확도”를 가진다고 가정한 결과였다. 이 측정에서 ¼ 그레인의 오차는, 반응한 수소의 무게에서 처음의 두세 자리를 빼고는 전부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그래서 “그 결과에서 처음 세 자리를 뺀 모든 수치는 기껏해야 추정치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었다.” 더 많은 양을 가지고 수행한 실험의 결과라면, 아마도 네 자리까지는 정확했을 것이다.

니콜슨은 이 단계까지는 라부아지에의 기본 주장을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런 철학자들의 충실성(fidelity)을 의심할 수 없기에, 그리고 물의 생성물이 너무나 확연히 태운 공기의 무게와 일치하기 때문에, 그 실험은 생명의 공기와 가연성 공기가 보통 연소하는 온도에서(at temperature of moderate combustion) 어떤 적절한 비율로 결합하여 물을 형성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인정될 수 있다.”[39] 그의 요점은 측정이 매우 정확하다는 것에 호소한다고 해서 언제나 실험 결과가 이론의 그럴듯함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용할 수 있는 기구들이 허용하는 한계를 넘어서 과도하게 정확성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결과의 설득력을 떨어지게 했다. 라부아지에가 측정의 정밀성과 논증의 정밀성을 연결한 반면, 니콜슨은 정밀성의 한계(“실험의 정확성nicety”)를 인식하는 것이 실험의 주장을 제시하는 데 더 적절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당시 실험 과학에서 공유된 생각은 아니었다. 18세기 후반 정밀 측정업에 종사했던 사람들, 예를 들면 삼각 측량이나 기압 측고법(barometric hypsometry)으로 높이를 측정하는 분야 등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대개 유효 숫자의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40] 실험 기구에 관하여 “nice(민감한, 까다로운)” (혹은 니콜슨의 “nicety정확성․미묘함”)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의미하듯이, 민감한 기구들이 특히 오류를 일으키기 쉽다는 인식은 있었다.[41] 하지만 만일 어떤 수치가 기구가 보증하는 것보다 더 큰 정확성을 주장할 경우, 그런 숫자들은 계산 결과에서 버려져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드물었다.

니콜슨이 이런 점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수학 교사이자 화학과 자연철학 강연자로서, 그가 교육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788년 출판된 기압 측도법에 대한 서론에서, 그는 그 분야의 선도적인 종사자들이 계산한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얼마나 많은 소수점 자리들이 늘상 유효 숫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다루어지는지를 보인 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이 계산에서 소수점 자리들이 대부분 유지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단지 어떤 수의 소수점 첫째 자리까지만 유지된다고 해도 충분히 정확하고 수고도 훨씬 덜 수 있을 것이다.”[42] 물론, 이것이 유효 숫자 원칙(doctrine)을 어떤 식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니콜슨은 특정한 기구의 한계를 엄밀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충분히 정확하다”는 느낌에 따라서 쭉 늘어져 있는 소수점들을 줄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그 조항(stipulation)은 기압 측도법의 종사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긴 소수점 자리들에 반대하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규정(ordinance)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니콜슨이 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측정과 계산의 기술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그런 점을 지적했다는 것이 상관있을 수도 있다. 이런 언급을 한 직후, 그는 돈이나 숙련된 기술 같은 실질적인 밑천이 부족한 사람들이 기압을 이용한 측량법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논했다. “충분히 정확한” 측정을 인정한 것에는 가능하면 그런 밑천들에 접근하기 쉬워야 한다는 실험가 집단의 비전(vision)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부아지에의 측정 기술을, 단순히 물리학의 방법을 화학으로 옮긴 것으로 보는 설명방식은 그의 성취에서 문제거리였던 특징들을 포착하지 못한다. 반대자들의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해 보면 이것을 알아볼 수 있다. 라부아지에는 수학자들과 공학자들의 연대를 진척시키고, 세련된 기구들을 만들어내며, 치밀하게 준비된(set-piece) 시연에 청중들을 불러 모음으로써, 국소적인 차원에서 정밀 측정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런 실천들의 설득력을 더 널리 전파하는 데는 처음에는 실패했다. 그 대신에, 프리스틀리나 케어 같은 비판자들은 정확한 측정을 기하학적인 증명 방식에 연결하려는 시도에 분개했고, 그들이 볼 때 그러한 증명 방식은 화학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니콜슨의 비판은, 정확한 측정에 의한 증명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러한 논쟁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1790년대 즈음이면 니콜슨과 많은 화학자들이 플로지스톤에 반대하는 라부아지에의 주장에 기꺼이 동의하려 했고, 그의 측정(예를 들면, 물의 조성 실험)의 폭넓은 타당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합의 형성 과정은 라부아지에가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니콜슨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종교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아니면 과학적이든 간에, 각종 논쟁에서 “올바른 논증의 직접적인 힘이 사람들을 전향하게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자신들의 적들을 논박하려고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repetition)하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변화한다.”[43] 라부아지에는 “올바른 논증의 적접적인 힘”과 같은 것, 즉 청중들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절차와 논증의 정확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니콜슨은 덜 직접적이지만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설득 양식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라부아지에에 앞장서 반대했던 프리스틀리의 나라, 영국에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공공 영역에서 자연 현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실험 방법의 재연에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서 라부아지에에 반대했다. 프리스틀리는 재연의 가능성이 제한적이고, 오류가 생길 가능성이 특별히 높다는 근거에서 정밀 측정의 방법 자체를 비난했지만, 니콜슨은 이 점에서 프리스틀리를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실험 절차가 공공의 조사(public scrutiny)에 열려있어야 하고 오류의 가능성을 분명히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담론 속에서 정밀성의 가치와 그 한계에 대한 인식은 각각 자신의 자리를 갖게 될 것이었다. 이것은 합의 형성에서 라부아지에의 수사법은 끌어들이지 않았던, 일정 정도의 공평한 타협(give-and-take)이 있었음을 뜻한다. 또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측정에서 얻어 냈다고 주장한 정확도를 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라부아지에의 정밀 측정은 그가 의도했던 논증의 정밀성과는 분리되게 되었던 것이다.

주석

  1. Robert Harrington, The Death-Warrant of the French Theory of Chemistry (London, 1804), 217. (칼라일의 별난 외과의사인 해링턴은 19세기의 첫 십년에도 여전히 반-플로지스톤 화학에 반대하여 저항하고 있었다.)
  2. The Quantifying Spirit in the Eighteenth Century, ed. Tore Frängsmyr, J. L Heilbron, and Robin E. Rider (Berkeley, 1990).
  3. Arthur L. Donovan, "Lavoisier and the Origin of Modern Chemistry", in The Chemical Revolution: Essays in Reinterpretation, ed. Donovan (Osiris, 2d ser., 4 (1988), 214-31); Anders Lundgren, "The Changeing Role of Numbers in 18th-Century Chemistry", Quantifying Spirit, 245-66.
  4. Frederic L. Holmes, Lavoisier and the Chemistry of Life: An Exploration of Scientific Creativity (Madison, Wisc., 1985), 특히 pp. xviii-xix, 276-83, 388-402.
  5. M. Norton Wise, "Mediation: Enlightenment Balancing Acts, or the Technologies of Rationalism", in Paul Horwich, ed., World Change: Thomas Kuhn and the Nature of Science (Cambridge, Mass., 1993), 207-56. Bernadette Bensaude-Vincent, "The Balance: Between Chemistry and Politics", in The Eighteenth Centuury: Theory and Interpretation 33 (1992), 217-37.
  6. Frederic L. Holmes, Eighteenth-Century Chemistry as an Investigative Enterpris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89), 특히 5장을 보라. 그리고 Maurice Daumas, "Precision of Measurement and Physical and Chemical Research in the Eighteenth Century", in Scientific Change: Historical Studies, ed. A. C. Crombie (London, 1963), 418-30.도 보라.
  7. Jean Baptiste Biot, 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des Sciences Pendant la Révolution Française (Paris, 1803), 22.
  8. James Keir, The First Part of a Dictionary of Chemistry (Birmingham, 1789), vii.
  9. Lissa Roberts, "A World and the World: The Significance of Naming the Calorimeter", Isis 82 (1991), 198-222.
  10. T. H. Lodwig and W. A. Smeaton, "The Ice Calorimeter of Lavoisier and Laplace and Some of Its Critics," Annals of Science 31 (1974), 1-18. [무명], Critical Examination of the First Part of Lavoisier's Elements of Chemistry (London, 1797), 20-21.
  11. Richard Kirwan, "Remarks on Mr. Cavendish's Experiments on Air", Philosophical Transaction 74 (1784), 154-69; Michael Donovan, "Biographical Account of the Late Richard Kirwan, Esp.", Proceedings of the Royal Irish Academy 4 (1850), lxxxi-cxviii.
  12. Henry Cavendish, "Experiment on Air", Philosophical Transaction 74 (1784), 119-53.
  13. A. L. Lavoisier, "Mémoire dans lequel on a pour objet de prouver que l'eau n'est point une substance simple", in Oeuvres de Lavoisier (6 vols., Paris, 1864-93), II, 334-59.
  14. Ibid., 339.
  15. James Watt, "Thoughts on the Constituent Parts of Water", Philosophical Transaction 74 (1784), 329-53. 특히 329, 333.
  16. Carl Perrin, "Lavoisier, Monge and the Synthesis of Water",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6 (1973), 424-28.
  17. A. L. Lavoisier and J. B. Meusnier, "Mémoire où l'on prouve, par la décomposition de l'eau, que ce fluide n'est point une substace simple", in Lavoisier, Oeuvres, II, 360-73; Lavoisier, "Mémoire dans lequel", 340.
  18. Joseph Priestley, "Experiments and Observation Relating to Air and Water", Philosophical Transaction 75 (1785), 279-309.
  19. Maurice Daumas and Denis Duveen, "Lavoisier's Relatively Unknown Large-Scale Decomposition and Synthesis of Water, February 27 and 28, 1785", Chymia 5 (1959), 113-29; Holmes, Lavoisier, 237-38.
  20. Maurice Daumas, Lavoisier: Théoricien et Expérimentateur (Paris, 1955), 특히 6장; id., "Les appareils d'experimentation de Lavoisier", Chymia 3 (1950), 45-62.
  21. 나는 다른 논문에서 이 시연에 사용된 기구에 대해 보다 상세히 묘사했다. “Precision Instruments and the Demonstrative Order of Proof in Lavoisier's Chemistry", Osiris , 2d ser., 9 (1994), 30-47.
  22. 측정의 정확성은 뉴욕 주 이타카에 있는 코넬 대학 도서관, 과학사 서고의 라부아지에 원고(MSS)에 남아있는 실험 노트를 검토하여 추정하였다. 온도계와 기압계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Theodore S. Feldman, "Late Enlightenment Meteorology", in Quantifying Spirit, 143-77, 특히 pp. 156-57과 p. 166을 보라.
  23. C. L. Berthollet, "Mémoire sur l'acide marin déphlogistiqué", Observation sur la Physique 26 (1785), 321-25. 특히 p. 324; H. E. LeGrand, "The 'Conversion" of C. L. Berthollet to Lavoisier's Chemistry", Ambix 22 (1975), 58-70, 특히 pp. 67-68; Carleton Perrin, "The Triumph of the Antiphlogistians", in The Analytic Spirit: Essays in the History of Science in Honor of Henry Guerlac, ed. Harry Woolf (Ithaca, N.Y., 1981), 40-63, 특히 pp.49, 55-56, 62.
  24. A. L. Lavoisier and J. B. Meusnier, "Développement des derniérs expériences sur la décomposition et la recomposition de l'eau", in Lavoisier, Oeuvres, V, 320-34.
  25. 예를 들어, C. L. Berthollet, "Considérations sur les Expériences de M. Priestley", Annales de Chimie 3 (1789), 63-114, p. 71; Thomas Garnett, Outline of a Course of Lectures on Chemistry (Liverpool, 1797), 74; Jeremiah Joyce, Dialogues in Chemistry (2 vols., London, 1807), I, 219. Holmes, Lavoisier, 237도 보라.
  26. A. L. Lavoisier, "Rapport sur les nouveaux caractéres chimiques", in Lavoisier, Oeuvres, V, 365-78, 특히 pp. 370-71.
  27. Lavoisier quoted in Richard Kirwan, An Essay on Phlogiston and the Composition of Acids, ed. William Nicholson (2d ed., London, 1789), 59-61.
  28. Jan Golinski, Science as Public Culture: Chemistry and Enlightenment in Britain, 1760-1820 (Cambridge, 1992), 3장. John G. McEvoy, "The Enlightenment and the Chemical Revolution", in Metaphysics and Philosophy of Science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ed. R. S. Woolhouse (Dordrecht, 1988), pp. 307-25; id.,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in the Chemical Revolution", Osiris, 2d ser., 4 (1988), 195-213.
  29. Joseph Priestley, Considerations on the Doctrine of Phlogiston and the Decomposition of Water (Philadelphia, 1796l repr. ed. William Foster, Princeton, 1929), 34, 41; id., The Doctrine of Phlogiston Established and that of the Composition of Water Refuted (Northumberland, Penn., 1800), 77.
  30. 앞서 인용된 구절에 덧붙여, 케어는 라부아지에가 『화학원론』에서 주장한 것에 대응했을 수도 있다. 라부아지에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화학은, 기초 기하학과 같이 모든 부분들이 밀접히 연결된 하나의 완전한 과학이 되는데 유리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진보는 급속하고, 최신 이론이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사실들을 정돈하기에, 우리는 우리 시대에도 화학이 성취할 수 있는 완전성에 가까워지는 것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A. L. Lavoisier, Taité élémentaire de Chimi, (2 vols., Paris, 1789), I. p. xii; cf. Lavoisier, Elements of Chemistry in a New Systematic Order, Containing all the Modern Discoveries, trans. Roberts Kerr (Edinburgh, 1790), xx. 또한 라부아지에가 교육 받는 동안에 느꼈던 것처럼, 전통적 화학이 기하학의 엄밀성을 획득하지 못한 것에 관한 언급은 날짜가 없는 다음의 원고에 실려 있다. “Sur la manière d'enseigner la chimie", in Bernadette Bensaude-Vincent, "A View of the Chemical Revolution through Contemporary Textbooks: Lavoisier, Fourcroy and Chaptal", British Journal for History of Science 23 (1990), 435-60, 특히 p.457을 보라.
  31. Keir, Dictionary, ix-x.
  32. Cf. Wilda C. Anderson, Between the Library and the Laboratory: The Language of Chemistry in Eighteenth-Century France (Baltimore, 1984), 83, 96-97.
  33. Kirwan, Essay on Phlogiston, 3, 7.
  34. Antoine François de Fourcroy, Elements of Natural History and Chemistry, tans. William Nicholson (4 vols., London, 1788), I, xvi-xvii. 니콜슨은 화학자들 사이의 계속된 불일치를 반영하여, 1796년까지 자신의 대중적인 교과서인 The First Principles of Chemistry (3d ed., London, 1796)에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삭제하지 않았다.
  35. Kirwan, Essay on Phlogiston, viii, xi.
  36. William Nicholas, The First Principles of Chemistry (London, 1790), 67-69, 인용된 부분은 pp. 69-70.
  37. Guerlac의 다음 언급과 비교해보라. “유효 숫자에 대한 무시나 무지는 오차론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특징적인 것이었다.” (Henry Guerlac, "Chemistry as a Branch of Physics: Laplace's Collaboration with Lavoisier",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7 (1976), 193-276, 특히 p. 253, n. 145.)
  38. Lavoisier, Traité, II, 330-34, 561-63; cf. Lavoisier, Elements.
  39. William Nicholson, A Dictionary of Chemistry (2 vols., London, 1795), II, 1021-23.
  40. Sven Widmalm, "Accuracy, Rhetoric, and Technology: The Paris-Greenwich Triangulation, 1784-88", in Quantifying Spirit, 179-206, 특히 pp. 195-96; Theodore S. Feldman, "Applied Mathematics and the Quantification of Experimental Physics: The Example of Barometric Hypsometry",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Sciences, 15 (1985), 127-97.
  41. Oxford English Dictionary는 로버트 보일의 저작에서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현저한 정밀성, 정확성, 혹은 미세함을 포함하거나 요구하는”을 의미하는 “nice"의 사례를 기록해놓았다. 다른 의미들은 의심스러움과 불확실성, 그리고 (저울이나 다른 기구들의) ”정교하게 준비되거나 조정됨“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니콜슨은 그가 라부아지에의 실험에 대해 썼을 때, 이런 용법을 반영했다. 그의 실험은 ”극단적으로 nice했다. 그래서 관찰의 최대 정확성이 결과를 식별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런 경우에 쉽게 실수할 수 있다. 아니, 좀처럼 실수를 피할 수가 없다.“ A. F. de Fourcroy, Elements of Natural History and Chemistry, ed. Nicholson (2d ed., 3 vols., London, 1790), I. xiii.
  42. William Nicholson, An Introduction to Natural Philosophy (3d ed., Philadelphia, 1788), 320-30, 인용은 p. 328.
  43. Ibid., I,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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