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상징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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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o Biagioli, “Galileo, the Emblem Maker”, Isis 81, 230-258.

갈릴레오, 상징 제작자


마리오 비애지올리 (Mario Biagioli)

김명진 역


1609년 여름, 당시 파도바대학의 수학 교수로 있던 갈릴레오는 이전까지 북유럽에서 만들어졌던 그 어떤 것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망원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그는 주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모순 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천문학적 발견을 해내었다. 1610년 봄에 그는 자신의 이례적인 발견을 󰡔별의 사자(使者) (Sidereus nuncius)󰡕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었는데, 이 책은 분량은 짧지만 혁명적인 의미를 담은 텍스트로 메디치가(家)의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2세(Cosimo II)에게 헌정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달의 표면이 매끈하지 않으며, 예전부터 믿어 왔던 것에 비해 별들의 수가 훨씬 더 많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주류 우주론이 알아채지 못했던 네 개의 행성 ― 그가 메디치가의 별들(Medicean Stars)이라고 부른 ― 이 더 있으며, 이들은 지구가 아닌 목성의 주위를 돈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별의 사자󰡕는 갈릴레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고 메디치가의 후원(patronage)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1610년 9월이 되자 갈릴레오는 고향인 피렌체로 귀환했다. 거기서 이제 그는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가 되었고, 강의 부담 없이 1년에 1,000스쿠디라는 엄청난 보수를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다.

1,000스쿠디의 연봉은 메디치 궁정의 다른 중요한 예술가나 관리들의 봉급에 비해 볼 때 예외적인 액수였다. 궁정 사람들의 수입에 대한 절대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갈릴레오의 연봉은 다른 예술가나 엔지니어들보다 적어도 3배는 더 많았고 벨리사리오 빈타 혹은 쿠르지오 피케나와 같은 대신들의 1.5배는 되었다. 갈릴레오의 연봉은 최고위급 궁정 관리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조각가인 지암볼로냐 ― 17세기 초 메디치 궁정의 예술가들 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자 두 명의 황제에 의해 끊임없는 유혹을 받고 있었던 ― 조차도 갈릴레오가 몇 년 후 받게 되는 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보수를 받았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갈릴레오의 연봉은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

우리는 갈릴레오가 1609년에서 1610년까지 해낸 천문학적 발견들의 과학적 중요성을 당연시하는 문화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메디치가가 갈릴레오에게 후한 보수를 준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의 지위에 오른 것은 그가 코페르니쿠스 가설의 수용에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이 아니었다. 메디치 궁정은 노벨상 이전에 노벨상 본부 노릇을 했던 곳이 아니었고 코시모 2세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도 아니었다. 리처드 웨스트폴은 메디치가가 갈릴레오의 발견에 보상을 제공한 이유는 그것의 기술적 유용성이나 과학적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의 놀라운 볼거리로서, 이색적인 경이(驚異)로서 그것에 포상한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그의 말은 다분히 옳다. 그리고 메디치가는 목성의 위성을 진정 예외적인 경이라고 받아들였음이 분명한데, 메디치 궁정으로 옮기려는 갈릴레오의 노력이 1610년 이전에는 번번이 좌절되었던 반면 목성 위성 발견 후에는 신속하면서도 (우리가 방금 본 바와 같이) 후한 환대를 받으며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외적인 보수가 주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오가 자신의 발견을 표현한 방식과 메디치 궁정의 과학 외(外)적 담화가 서로 들어맞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궁정 사람들 대부분은 천문학과 수학에 문외한이었지만 갈릴레오는 궁정이 자신의 연구를 들어줄 중요한 청중이라고 생각했고, 1604년부터는 대학을 떠나서 궁정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그가 궁정에 매력을 느낀 것은 단지 좋은 보수와 강의 부담으로부터의 자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궁정으로 옮김으로써 대학을 특징짓고 있던 학문분야간 위계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도 갖고 있었다. 당시 대학에서 수학자들은 전문적 지위나 보수 면에서 철학자들보다 못한 위치에 있었다. 철학은 자연 현상의 진정한 원인을 다루는 반면, 수학은 그것의 “우연적 속성들”, 즉 그것의 양적 측면만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수학자들에게는 자연 현상에 대해 정당한 물리적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수학교수좌(座)를 갖고 있는 수학자는 대학에서 철학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궁정에서는 이것이 가능했다. 궁정에서는 어떤 사람의 사회적, 인식적 지위가 그 사람이 속한 학문분야가 아니라 군주의 총애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정은 갈릴레오가 철학자의 칭호를 얻을 수 있는 사회제도적 공간이었고, 이는 다시 그에게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철학적 중요성과 자연 현상의 수학적 분석을 옹호할 수 있는 정당한 지위를 제공해 주었다.

이 논문은 적어도 두 개의 논제를 갖고 있다. 나는 후원을 얻어내기 위한 갈릴레오의 전략을 분석하면서 그가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메디치 궁정의 담화 속에서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아울러 나는 근대 초 과학의 사회적 정당화에서 궁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다.


I. 맥락 속의 별들

메디치가에서 목성의 위성들에 관심을 보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갈릴레오가 󰡔별의 사자󰡕의 헌정사에서 단언했던 것처럼, 이 천체들은 메디치 왕조에 바쳐진 기념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예외적인 지속성을 가졌고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적어도 좋은 망원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물이었다. 그러나 메디치가가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던 배경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코시모 1세(Cosimo I)가 16세기 중엽에 왕조를 창건한 이래 메디치가에서 유포해 온 신화에 친숙했던 당시의 피렌체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명백해 보였다. 이 신화는 코스모스(우주)와 코시모 사이에 상응관계를 설정했고, 종종 목성을 왕조의 창건자이자 “메디치가의 신들(Medicean gods)” 중 첫 번째인 코시모 1세와 연관시켰다. 따라서 비록 갈릴레오가 새로 발견한 행성들을 어떤 후원자에게라도 헌정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들은 특히 메디치가에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들에게 목성의 위성이란 왕조의 상징으로 보일 것이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는 명목상 공화정이었던 피렌체 지방을 이미 15세기 초부터 사실상 통치하고 있었지만, 공국(公國)이 성립된 것은 보다 최근의 일이었다. 코시모 1세는 1537년에 피렌체 공작이 되었고, 그가 토스카나 대공의 지위에 오른 것은 1569년의 일이었다. 1540년대에 그는 새로운 국가의 정치․행정 구조를 새로 만들어내야 했고 아울러 메디치가의 통치를 왕조적인 것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신화도 창조해야 했다. 피렌체에 뿌리를 둔 강력한 가문들은 [지역의] 정치 지도자에서 유순한 궁정 관료로 탈바꿈되어야 했고, 새로운 신화는 공작의 통치를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으로 그려내면서 피렌체의 가문들이 그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을 제시해야 했다.

코시모의 전략은 메디치가의 통치를 받는 것이 피렌체의 명백한 운명이라고 제시하는 것이었다. 중세 이래로 흔히 행해져 왔던 도시의 성점(星占, horoscope)은 메디치가의 통치를 도시의 역사 및 운명에 연결시킴으로써 그 통치가 점성학적으로 필연적임을 제시하기 위해 표준화되었다. 메디치가를 지향한 역사와 메디치가를 고려한 고대 신화의 재해석이 새롭게 쓰여졌고, 메디치가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피렌체의 미술에 등장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문화 프로그램들을 관리하기 위해 메디치가의 통제를 받는 아카데미들 ― 아카데미아 피오렌티나와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가 그런 예들이다 ― 이 설립되었다.

코시모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계보처럼 가족사를 쓰게 하지는 않았지만, 메디치가의 역사와 유사해지도록 그리스-로마 신화를 축도화해 재해석했다. 이와 같은 신화 재해석 프로그램은 팔라쪼 델라 시뇨리아 ― 최초의 메디치가 왕궁으로 나중에는 팔라쪼 베키오로 이름이 바뀐다 ― 에 있는 신들의 거처(Apartment of the Elements)와 레오 10세의 거처(Apartment of Leo X)를 장식한 조르지아 바사리의 프레스코화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기본 계획은 매우 분명했다. 신들의 거처는 여러 개의 방들로 나뉘어 있는 일종의 올림포스 산 같은 곳으로, 각각의 방은 특정한 신들(헤르쿨레스, 주피터, 옵스, 케레스, 사투르누스)이나 태초의 “비바람(elements)” 같은 신 이전의 존재에 헌정되었다(그림 1). 신들의 거처인 올림포스 산 바로 아래층에 레오 10세의 거처가 있었는데, 이곳은 메디치가의 만신전(萬神殿)을 나타내었다. 레오 10세의 거처에서 각각의 방은 왕조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메디치가 성원에 헌정되었다(그림 2).

바사리가 말했듯, 레오 10세의 거처에서 메디치가 사람들에게 헌정된 각각의 방은 바로 위층에 있는 신들의 거처에서 신에 헌정된 방 하나하나와 연직선상에 위치했다. 아래층에 있는 각 방의 프레스코화는 그것이 경의를 표하는 메디치가 성원의 신화화된 역사를 나타냈다. 그리고 각각의 역사는 그에 해당하는 신의 신화적 계보를 가능한 한 가깝게 반영하도록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비바람의 방, 즉 모든 것을 형성한 태초의 존재에 헌정된 방은 레오 10세의 방과 상응했는데, 레오 10세는 메디치가에서 배출한 교황으로 메디치 왕조의 등장을 가능케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바사리의 말을 빌면, “아래층에서 그려진 것에 상응하지 않는 것은 절대 위층에 그리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천상의 질서가 지상의 질서를 정당화․자연화 시켰다. 우아하게 생긴 층계가 두 층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도 잘 어울렸다.

바사리는 이러한 프레스코화에 나타난 메디치가의 신화 전체의 복잡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은 주피터(가장 위대한 신)와 코시모 1세(토스카나 대공국의 창건자) 사이에 설정된 특정한 상응관계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화적 관계가 갈릴레오의 후원 획득 전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주피터의 방과 코시모 1세의 방 사이의 상응관계는 두 거처에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제시된 신화적 내러티브의 중심이다. 주피터의 방에 있는 그림들은 주피터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코시모와도 연관된다. 옵스와 사투르누스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주피터는 아버지의 잔혹행위를 피해(사투르누스는 자기 자식을 먹어 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어머니에 의해 구출되고, 어머니는 그를 크레테 섬의 한 동굴에 숨긴다. 거기서 아기 주피터는 두 명의 님프에 의해 키워진다. 그 중 하나인 아말테아는 염소로 그려졌고 신의 섭리를 빗대어 나타냈던 반면 다른 님프인 멜리사는 신의 지식을 빗댄 것이었다. 여기서 보여주는 메시지는 코시모가 요람 속에서 그러한 덕목을 이미 습득했다는 것이었다. 주피터는 아말테아의 추억을 기려 황도십이궁에 염소자리를 보태었고, 염소자리의 일곱 개 별은 일곱 덕목 ― 세 개는 신학적 덕목, 네 개는 도덕적 덕목 ― 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코시모의 궁도는 염소자리여서, 최초의 대공과 주피터를 결합시킨 운명을 뒷받침하기에는 더욱 편리했다. 결국 핵심은, 코시모가 주피터에 의해 신의 섭리와 지식을 부여받았으며 염소자리로부터는 일곱 덕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별의 사자󰡕를 코시모 2세에게 바치는 헌정사에서,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별들과 코시모 1세의 덕목들 ― 어떤 것들은 도덕적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아우구스투스적인” ― 사이의 유비를 직접 소개하고 있다. 그는 젊은 코시모[코시모 2세]가 그와 동일한 덕목들을 주피터로부터 직접 받았노라고 주장했는데, 목성(주피터)은 그가 태어났을 때 막 지평선 위에 떠 있었다. 그러한 덕목들은 (마치 타고난 덕목들처럼) 항상 목성(주피터) 주위를 매우 가깝게 돌면서 절대로 그를 버리지 않는 네 개의 별들로부터 “발산되고” 있었다. 따라서 갈릴레오는 주피터와 코시모 1세 사이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신화적] 연관에 기대어, 코시모 1세가 메디치가의 별들을 통해 자신의 덕목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고 주장했으며, 갈릴레오 자신은 그 별들의 존재를 밝혀냄으로써 이러한 점성술과 왕조간의 조우에서 일종의 산파 구실을 하고 있다고 내세운 것이었다. 메디치가의 별들과 네 개의 도덕적 덕목 사이에 설정된 이러한 상응관계는 메디치가의 인문주의 조언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나중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후에도 네 개의 도덕적 덕목들을 네 개의 별들이라는 회화적 축도의 형태로 이용하는 관행은 30여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메디치가의 상상력 넘치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궁정의 시, 연극, 회화, 오페라 등의 주요 소재로 쓰였을 뿐 아니라 공공적인 정치 의식(儀式)이나 축제에 사용되는 이미지에도 영감을 주었던 “지배 서사(master narrative)”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궁중 문화의 틀 구조를 제공했다. 필요할 경우 이러한 신화적 이미지는 문장(紋章)의 형태로 탈바꿈하여 더욱 확장될 수도 있었는데, 케사르 리파, 파올로 지오비오, 안드레아 알치아티 같은 사람들이 엮은 16세기의 문장 목록이나 사전을 보면 그러한 문장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문화적 틀 구조 전체는 메디치가에서 통제하는 아카데미아 피오렌티나와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유지되고 표현되었다.

이러한 신화들은 코시모 1세 때부터 궁정 문화에 스며들어 있었다. 궁정 사람들과 피렌체의 상류계급들은 그런 신화에 정통함으로써 메디치가의 의식이나 다른 정치 기호학에서 나타나는 상징 서사들을 해석하는 놀이에 참가할 수 있었다. 발데사르 카스티글리오네가 󰡔궁정인의 서 Book of the Courtier󰡕라는 자신의 책에서 밝혔듯, 궁정 생활에 끼어들고자 하는 사람은 상징학(emblematics)에 능숙할 것이 요구되었다. 궁정 사회는 하층계급과 스스로를 차별화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했는데, 하층계급은 비록 그러한 공공 의식들 중 몇몇에 구경꾼으로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의 완전한 의미는 알아낼 수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 에티켓이 궁정에서의 행동을 관장하는 것이었다면, 상징학은 궁정에서의 큰 행사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사회집단들을 차별화시키고 사회적 위계를 강화했다.

이와 같은 메디치 궁정 사회와 문화의 신화적-상징적 틀 구조는 갈릴레오가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을 메디치 왕조의 상징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만약 갈릴레오가 수학과 같이 지위가 낮은 분야의 실천가들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함으로써 궁정 사람이 되고자 했다면, 그는 궁정 사회가 스스로를 궁정 바깥의 무리로부터 차별화하기 위해 받아들인 약호들을 잘 다룰 수 있어야만 했다.


II. 가신(client)이 되는 길

갈릴레오가 궁정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를 당시 대다수의 다른 이탈리아 수학자들과 차별화시켜 준 중요한 요소였다. 갈릴레오의 이례적인 경력과 그가 추구했던 사회-인식론적(socioepistemological) 정당화의 방식 또한 그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 및 이와 연관된 후원 체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었다.

그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 빈센치오처럼 자신을 젠틀먼으로 내세울 줄 알았다. 그는 지오반니 델라 카사가 쓴 에티켓 북에 대해 알고 있었고 수사학과 작문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가 되기 이전에도 자기가 낸 책 표지에서 자신을 “피렌체의 귀족(Florentine Patrician)”이라고 칭했다. 그는 세련된 라틴어 문체를 구사했고 그가 쓰는 피렌체말의 어투도 그 우아함으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는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비꼬는 문투나 농담으로 가득 찬 라블레 혹은 루잔테 풍의 문체도 썼다. 이 문체는 하층계급의 배경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루잔테(안젤로 베올코) 자신은 결코 하층계급 출신이 아니었고, 그가 사용한 속어나 공격적이고 외설적인 언어는 마을 시장[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류계급을 겨냥한 것이었다. 갈릴레오 역시 궁정에 진출한 똑똑한 “하층계급 출신 인물(man from the street)”은 아니었다. 전 시대를 살았던 루잔테처럼, 그는 “민간 문화”를 잘 써먹을 줄 알았고, 점차 형식에 치우치고 있던 바로크 궁정 에티켓에 신물이 난 상류계급 청중의 주의를 끄는 자연스러움과 가식 없는 재치를 발휘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드레이크가 갈릴레오의 저술이라고 주장했던 ― 나는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 세코 디 론키티의 󰡔대화󰡕는 매우 상스러운 파도바 방언으로 씌어졌지만 상류계급 청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파도바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오 케렝고에게 헌정되었다. 갈릴레오의 문체는 현학 취미에 대해 날을 세워 반응하는 궁정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가 지나친 것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였다. 현학에 대한 궁정에서의 경멸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 대한 갈릴레오의 신랄한 공격에도 반영되어 있다. 갈릴레오가 쓴 대화편들에 나오는 심플리치오(혹은 세코의 󰡔대화󰡕에 나오는 철학자)는 단지 갈릴레오가 비판을 위해 내세웠던 허수아비 정도가 아니라 당시 궁정 문화가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대학의 철학자들은 일찍이 아니발 카로의 저작에서부터 궁정 작가와 아카데미 회원들의 조롱의 대상이었고, 갈릴레오의 친구인 자카포 솔다니의 저작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갈릴레오는 아직 10대였을 때 이미 궁정에 접했고, 거기서 그의 미래의 수학 교사인 오스틸리오 리키를 만났다. 그는 아마 그의 아버지로부터 예전에 피렌체 궁정과 맺었던 관계를 일부 물려받고 궁정에서의 에티켓에 대한 지식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빈센치오는 유명한 음악가이자 음악 이론가였고 피렌체에서 처음 생긴 음악 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는 단체인 카메라타 데 바르디의 회원이었다. 아버지처럼 음악가였던 갈릴레오의 형 미켈란젤로 역시 유럽의 여러 궁정에서 활동하는 삶을 살았음을 감안해 보면, 어린 갈릴레이가 궁정에서 경력을 갖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갈릴레오의 초기 저술들은 모두 당시 피렌체의 아카데미 및 궁정 문화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1588년에 아카데미아 피오렌티나에서 했던 연설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나오는 기하학에 관해 다루었는데, 이 책은 당시 이 단체의 공인 저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가 타소를 비판하고 아리오스토를 칭찬한 것 또한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아카데미 문화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그는 타소에 반대해 아리오스토의 편을 든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 ― 그가 1605년에 회원으로 선출되었던 아카데미 ― 의 공식 입장을 대변한 것에 불과했다. 이와 유사하게, 갈릴레오가 나중에 조각과 회화의 지위에 관해 루도비코 치골리에게 보낸 편지는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그가 1613년에 회원으로 선출된)와 피렌체의 다른 예술 아카데미에서 자주 논의되던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갈릴레오가 이러한 저술 활동에 관여했던 것은 그가 작가로서의 경력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당시 후원을 찾고 있던 모든 야심적인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궁정 및 아카데미 문화에서 자신의 유능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이와 같은 경력의 초기 단계에서 피렌체의 궁정 및 아카데미 문화뿐 아니라 후원 네트워크에도 접하게 되었다. 내가 다른 논문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생애에서의 이 시기 동안 그가 흡수한 문화와 그가 만났던 후원자와 친구들(그는 여름마다 정기적으로 파도바에서 피렌체를 방문해 교분을 유지했다)은 그가 자신의 생애 후반부에 발전시키게 되는 대부분의 후원 획득 전략의 밑천이 되었다.

1592년 이후 갈릴레오가 베네치아와 파도바에서 교제했던 사회집단들은 그가 피렌체에서 친숙했던 집단과 유사했지만, 베네치아에는 중앙집중화된 궁정이 없었기 때문에 파도바와 베네치아의 문화는 피렌체와는 사뭇 달랐고 후원의 주체도 군주가 아닌 귀족이었다. 베네치아에는 피렌체의 필리포 살비아티에 비견할 만한 지오반프란체스코 사그레도와 같은 귀족 후원자가 있긴 했지만, 갈릴레오의 파도바 시기에 코시모 2세[와 같은 군주 후원자]는 없었다. 그러한 후원이 이루어지는 장소 역시 궁정이나 공인된 아카데미가 아니라 살롱이나 별장(casini), 사설 아카데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베네치아가 그 자체의 국가 신화를 유지하는 데 상당히 관심을 쏟긴 했지만(특히 17세기로 접어들 무렵의 쇠퇴기에), 그 신화는 특정 가문의 왕조가 아닌 공화국의 이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와 같은 국가 신화에 대해서는 갈릴레오의 발견을 어떤 식으로건 연관이 있거나 특히 보상을 받을 법한 방식으로 끼워 맞출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그가 망원경을 베네치아 상원에 증정했을 때에도, 이것은 왕조의 기념물로서가 아니라 항해와 전쟁의 도구로서 증정되었다.

피렌체 궁정과 아카데미 문화에 입문했던 경험은 갈릴레오에게 자연 현상을 잠재적인 메디치가의 왕조 상징으로 보는 데 필요한 능력을 제공해 주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에게 절대군주인 후원자가 필요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빈타에게 말한 바와 같이, 그 이유는 오직 군주만이 그가 추구하는 봉급과 여가시간을 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직 절대군주만이 그가 자신과 자신의 연구를 위해 필요로 하고 있던 사회적 정당화를 부여해 줄 수 있었고,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이 발견해낸 경이를 그러한 통치자의 왕조적 담화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1609년 말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을 때, 그는 베네치아가 자신의 경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시장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피렌체에서 보낸 청년기 동안 발전시켰던 후원의 동역학과 아카데미 문화의 약호들에 대한 이해가 파도바와 베네치아에서 전혀 무용지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그레도와 같이 세력이 큰 베네치아의 귀족들과 후원 관계를 가질 수 있었고,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던 살롱들에 출입했으며, 파도바의 아카데미 생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599년에 그는 파도바의 아카데미아 데이 리코브라티의 창립 회원이 되었고, “풀이 죽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이 단체를 위한 아카데미 문장(紋章)을 만드는 일의 책임을 맡았다. 1608년 코시모가 오스트리아의 마리 막달렌과 혼인할 때 갈릴레오가 제안했던 문장은 그가 메디치 궁정의 상징학과 문화에 통달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III. 자철광에서 위성으로

왕조의 주요 행사를 기념하려 할 때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메달을 주조하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갈릴레오는 1608년 9월에 코시모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메달에 쓸 상징을 제안했다. 편지는 메디치가의 왕조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담고 있었고, 이에 덧붙여 메디치가의 통치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나타낼 미묘한 “과학적” 은유를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몇 달 전 코시모 왕자를 위해 사그레도로부터 구입했던 자철광에 대해 언급하면서, 코시모와 같은 미래의 절대군주의 힘을 자철광의 그것에 비유했다. 갈릴레오는 상징학자인 지오비오의 용어를 빌어, 문장의 “형체”(즉, 이미지)는 그 주위에 작은 철조각들이 달라붙어 있는 지구 모양의 자철광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수반하는 문장의 “정신”(즉, 모토)은 Vim facit amor(“사랑은 힘을 낳는다”)였다.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절대왕정의 표상에 내포된 다의성, 즉 한편으로는 그것의 “자연스러움”과 신민들의 복종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진 권력과 일탈 행위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을 강조하기도 하는 양면적 태도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철광과 작은 철조각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러한 정치적 시나리오에 딱 들어맞는 은유를 발견해 내었다. 갈릴레오의 이미지에 따르면, 자철광의 힘은 다른 물질들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철조각들(신민들)은 자철광(메디치가의 권력)을 향해 자발적으로 끌려가는(상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끌어당겨지기를 원했다. 이와 동시에 위로 끌어당기는 힘은 강력했고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에 기반하고 있지만 권력의 외양을 띄었다. Vim facit amor라는 모토는 이미지에 내포된 의미를 잘 담아내었다. 갈릴레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 모토가 빗대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철조각들이 자철광에 의해 들어올려져 붙잡히는 (그러나 일종의 애정을 담은 격렬함을 수반하여 마치 자발적으로 그것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그 돌을 열렬히 추구하는) 것을 보면, 그토록 집요한 속박이 자석이 가진 힘의 결과인지, 철의 자연적인 속성의 결과인지, 아니면 힘과 복종간의 애정을 담은 상호작용의 결과인지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왕자님의 경건하고 예의바른 애정 ― 자철광이 나타내는 ― 이 신민들을 억누르기보다는 오히려 들어올려 그들 ― 철조각들이 나타내는 ― 로 하여금 왕자님을 사랑하고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갈릴레오는 지구 모양의 자철광 그 자체가 코스모스(우주)로서의 코시모에 대한 비유이자 6개의 구를 포함하는 메디치가의 문장에 대한 비유라는 점을 크리스티나에게 설명했다. 이러한 유비는 50년 전에 팔라쪼 델라 시뇨리아에 있는 비바람의 방에서 화가 바사리에 의해 쓰인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염소(코시모의 출생 궁도)가 앞발로 지구를 누르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는 [메디치가의 문장에 있는 6개의] 구들 중 하나라는 의미와 코시모에 의해 장악된 코스모스라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었다. 코스모스로서의 코시모라는 주제는 신들의 거처에 있는 다른 회화 작품들뿐 아니라 왕궁에 있는 지리 지도의 방(Room of the Geographical Maps)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났다. 이 방에는 커다란 천구의(天球儀)가 있었고 방 한가운데 놓인 지구의와 세계 전체를 나타내는 지도도 있었는데, 우주구조론 학자 이그나찌오 단티가 이 모든 것을 설계했고 일부는 직접 만들기도 했다.

“코시모”와 “코스모스” 사이의 유비 ― 몇 년 후 갈릴레오가 󰡔별의 사자󰡕를 코시모 2세에게 헌정하려 협상하는 과정에서 다시 끄집어내게 되는 ― 는 16세기 중반 이후 줄곧 메디치가의 신화에서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코스모스”라는 요소를 그 속에 포함한 이름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예를 들어 1548년 코시모 1세가 엘바 섬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인 포르토페라이오를 점령했을 때, 그는 이 도시를 완전히 요새화한 후 “코스모폴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와 같은 명칭 개정이 가장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것은 아마도 메디치가의 절대 권력을 확고하게 만든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립과 함께 일어났던 “문화혁명”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코시모는 오랫동안 공화국 전통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피렌체의 오랜 수호성인 제노비와 지오반니 대신 성 코스마와 성 다미아노를 내세웠는데, 그들은 살아 있었을 때 임상 의사였다(“메디치”는 이탈리아어로 “의사”라는 뜻이다). 성 코스마와 다미아노 축일(祝日)은 ‘조국의 아버지’ 대(大)코시모(Cosimo il Vecchio)의 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코스마와 마찬가지로 코시모 1세와 대(大)코시모는 피렌체의 의사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도시를 정치적 혼란이라는 치명적인 역병으로부터 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미 1513년에도 당시 레오 10세 ― 피렌체 공국을 메디치가가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메디치가의 교황 ― 가 성 코스마를 기념했다고 전해져 오는 연례 축일 ― 코스말리아 축일 ― 을 제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 코스말리아 축일은 대(大)코시모를 기리는 날이었고 메디치가의 통치를 찬양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1560년대에는 Cosmos Cosmōi cosmos라는 문구 ― “코스모스는 코시모의 세상(혹은 영역)”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 가 메디치가에서 의뢰한 예술 작품에 포함되었다. 코스모스로서의 코시모에 대한 언급은 메디치가와 연관된 문화적 생산물에 계속해서 등장했고, 특히 현재 군주의 이름이 “코시모”일 때는 더욱 그랬다. 메달에 넣을 문장을 제안했던 1608년의 편지에서, 갈릴레오는 메달의 반대면에 코시모의 초상과 함께 Magnus magnes Cosmos라는 모토를 넣을 것을 제안함으로써 코시모-코스모스라는 주제를 더욱 강화했다.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그 모토는] 세상은 거대한 자철광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지만, 은유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문장[紋章]에 담긴 의미를 뒷받침해줄 것입니다.” 코시모를 칭하는 표준적인 라틴어 번역인 “Magnus Dux Cosmos”(“코시모 대공”)에서 “Dux” 대신 “Magnes”를 넣음으로써, 갈릴레오는 자석의 인력과 왕자의 권력 간의 유비를 강화해 통치자에 대한 자석의 은유를 만들어냈다.

이 문장[紋章]은 갈릴레오가 상징학에 놀랄 만큼 능숙하다는 것 외에도 중요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생각건대, 이 문장은 그의 후원 획득 전략에서 하나의 전환점에 해당한다. 1608년경에 이르면 그는 군사용 나침반의 발명 같은 것은 제아무리 유용하더라도 자신이 높은 지위를 갖는 궁정에서의 자리를 얻는 데는 도움이 못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물론 나침반의 발명 덕택에 축성술에 관심이 있던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배우려고 몰려들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그를 주요 군주들 ― 뛰어난 궁정 수학교사를 두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찬양하는 것에 더 몰두하고 있던 ― 이 원하는 가신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곤자가가(家)는 나침반 선물에 감사를 표했고 메디치가는 나침반의 사용법을 설명한 책의 헌정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이 중 어느 군주도 갈릴레오가 찾던 자리를 제안하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수학 교사나 군사 엔지니어가 아니라 젠틀먼으로서 궁정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나침반보다는 덜 기계적인 미덕을 가진 선물을 만들어내야 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1608년에 제안했던 문장은 “신비스럽게” 행동하는 자철광과 같은 경이로운 물건이 유용한 도구들보다 더 큰 보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갈릴레오가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그러한 경이들이 궁정 담화에서의 상징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시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갈릴레오가 1608년의 문장에서 사용했던 이미지는 적어도 발데사르 카스티글리오네의 󰡔궁정인의 서󰡕 이래로 이미 줄곧 궁정 담화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 책에서 카스티글리오네는 궁정인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능력들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공적인 궁정인은 “마치 자철광이 철을 끌어당기듯 보는 이들의 눈을 잡아끌 수 있도록” 자신을 공들여 내세울 줄 알아야 한다. 자철광의 행동과 미덕이 갖는 흡인력간의 유비는 갈릴레오가 메디치 궁정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605년 12월에 갈릴레오는 시프리아노 사라치넬리라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는 갈릴레오와의 우정과 그에 대한 후원을 다짐하면서 끝맺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당신을 몰랐어도 나는 똑같은 일을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름답고 훌륭한 어떤 것, 즉 미덕이란 심지어 그것을 거의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과 의지까지도 멀리서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빈타는 미덕의 흡인력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는 1608년 3월 코시모를 위해 자철광 문장을 구입하는 것과 관련해 갈릴레오에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전하의 은덕은 자석과도 같아서 저를 끌어당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시니, 당신이 원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저를 이용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일주일 후 갈릴레오는 후의를 되돌려 주는 내용의 편지를 빈타에게 썼다. “저는 제가 가진 자철광의 가치가 위대하신 전하의 애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토록 큰 후의를 입을 만한 자질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제가 처한 궁핍한 처지가 자석처럼 작용해서 위대하신 전하의 경건한 애정과 호의를 베푸시는 태도를 움직여 저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시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한 달 후, 갈릴레오는 빈타에게 자신이 고쳐 만든 자철광을 넣은 문장을 보냈고, 마침내 이를 코시모의 혼인 기념 메달로 크리스티나에게 제안했다.

갈릴레오의 문장이 지닌 독창성은 기술적 장치[자석]를 상징에 이용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지오비오가 이미 자신의 상징학 교과서에서 논의한 바 있었다. 갈릴레오가 과학적 경이를 궁정의 담화(혹은 나중에 목성 위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특정 왕조의 담화)로 번역한 것에서 새로웠던 점은, 그가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그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Magnus magnes Cosmos라는 모토가 윌리엄 길버트의 주장처럼 “세상은 거대한 자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코시모의 권력이 가진 흡인력은 정당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길버트의 이론(주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에 반대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이론)을 메디치가의 절대왕정의 자연스러움과 서로 연관시켰다. 그러한 메달을 주조함으로써 메디치가는 길버트 이론의 정당화에 일조하게 되었고, 동시에 메디치가의 권력에 대한 갈릴레오의 “자기적(磁氣的)” 해석은 그러한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려내었다. 갈릴레오가 크리스티나에게 제안했던 메달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 개의 측면과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갈릴레오의 전략은 과학 이론을 후원자들의 권력에 대한 표상 속에 포함시켜 그들의 관여와 인증을 확보함으로써 이론을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갈릴레오가 제안한 문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마도 문장에 들어간 이미지의 모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불규칙하게 생긴 어떤 불분명한 물질 조각들이 구체를 둘러싼 것을 보고서 철조각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자석이라고 알아볼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러나 갈릴레오의 시도는 완전한 실패라기보다는 시행착오 전략에서의 일보전진이었다. 2년 후 그가 메디치가의 이름을 목성의 위성들에 결부시킨 것은 동일한 전략의 반복이었고, 이번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천문학적 발견을 왕조의 상징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는 매우 중요한 가신, 일종의 “우주적 산파(cosmic midwife)”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메디치가의 권력을 자신의 발견과 망원경의 정당화를 위해 전환시켰다.

IV. 비밀 도구에서 왕조의 성점으로

1609년 8월에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상원에 망원경을 기증했고, 그 보상으로 종신재직권과 상당한 급료 인상을 받았다. 그 직후에 그는 자신의 의붓동생 베네데토 란두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기를, 최근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의 삶과 경력은 평생 파도바와 파도바대학에 매여 있게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후 그는 “토스카나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의 자리를 놓고 빈타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1610년 7월에는 공식적으로 그 자리를 얻게 되었다. 사회-전문직업적(socioprofessional) 지위와 후원 획득 전략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네 개의 위성이었다.

1609년 8월 갈릴레오는 망원경에서 여러 주목할 만한 특징들을 찾아낸 후, 이를 군사적 도구로 도게 레오나르도 도나에게 선사했다. 망원경은 하나의 경이였지만, 특정 후원자를 위해 맞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가진 비상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망원경은 후원-일반적(patronage-generic)인 성격,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선물할 수 있지만 특정한 어느 누구에게 주어야 할 이유는 없는 그런 성격을 지녔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이 후원을 얻는 데 있어서는 군사용 나침반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물건이라고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망원경은 나침반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따라서 더 폭넓은 청중의 호기심과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우리는 당시 그가 주고받았던 편지들의 내용으로부터, 그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메디치가로 옮겨가기 위한 수단으로 망원경을 이용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갈릴레오의 경력에서 이 시점까지만 해도 망원경은 여전히 하나의 물건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직 왕조의 운명을 알리는 사자[使者]가 아니었던 것이다. 코시모 2세가 갈릴레오에게 좋은 망원경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망원경에 대한 코시모의 관심은 몇 년 전 사그레도의 자철광에 보였던 관심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갈릴레오의 헌신 정도는 그가 궁정의 후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느냐에 따라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것 같다. 그가 망원경을 베네치아 상원에 선사할 때의 조건을 보면, 당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비밀 무기로서 망원경을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갈릴레오가 망원경의 용도를 제시한 방식은 그보다 먼저 망원경을 발명했던 네덜란드인 한스 리페르세이의 그것과 동일했다. 도게 레오나르도 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갈릴레오는 망원경이 “각하께서 직접 받아 보시고 그 유용성을 판단하실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쓰고, 이어 이렇게 말했다. “이 물건을 각하께 선사하노니 이 발명품의 미래에 대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망원경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만들어지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각하의 판단에 따라 주문과 생산을 하겠습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갈릴레오가 처음에는 망원경이라는 효과적인 도구를 다른 천문학자들에게 공개하지 않을 생각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한 행동을 보면 그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크게 헌신했던 인물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4개월 후 갈릴레오가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면서부터 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적 성향은 다시 등장하게 되고 후원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전략도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1610년 전반기 동안 갈릴레오와 코시모 2세가 빈타를 통해 진행했던 협상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여러 차례 서술된 바 있다. 그러나 목성의 위성들을 메디치가의 신화적 담화 속에서 제시함으로써 자신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메디치가의 별들’에는 인식론적 정당성을 얻어 주려는 갈릴레오의 전략은 그간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는 예전에 그가 자기 현상에 관한 길버트의 견해를 메디치가의 담화 속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점성학적 예정(predetermination)은 갈릴레오가 자신의 발견을 메디치가에 제시할 때 반복해서 나타났던 주제였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관측한 것이 하나의 발견이 아니라 메디치가의 운명에 대한 확증이며, 왕조의 성점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별의 사자󰡕의 헌정사에서 코시모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코시모 2세의 즉위 직후에 “빛나는 별들이 하늘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별들이 목성(코시모 1세의 행성) 주위를 마치 그 자식들처럼 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코시모 왕자가 태어났을 때 목성이 때마침 지평선 바로 위에 떠 있었으며 그럼으로써 왕조 창건자의 미덕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 한 가지 덧붙이자면 ― 코시모 2세와 그 형제들처럼 그 별들의 수가 넷이었다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이러한 왕조적 징조의 출현에서 갈릴레오가 한 역할 역시 범상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었다.

헌정사에서 갈릴레오는 그가 확립하고자 애쓰고 있었던 후원 관계의 경제적 측면은 감추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메디치가에 특별히 잘 들어맞는 헌정물을 팔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메디치가의 관계는 극히 사심 없는 관계였다. 그것은 완전히 자발적인 것,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메디치가와 갈릴레오는 별들에 의해 맺어진 관계였다. 메디치가의 신민이자 다름아닌 군주 코시모 2세의 개인 수학교사였던 갈릴레오가 그 별들을 발견한 것은 우연일 수가 없었다. 오직 그만이 그 별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 별들은 메디치가에 헌정될 필요도 없었다 ― 그 별들은 항상 메디치가의 것이었으니까. 갈릴레오의 말을 빌면, 네 개의 별들은 메디치가의 빛나는 이름을 위해 특별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처음부터 메디치가에 점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갈릴레오 그 자신처럼.

여기에 어울리도록 갈릴레오는 발견이라고 하지 않고 메디치가와 그 운명 사이의 “조우”라는 표현을 썼다. 이 조우에서 그가 맡은 것은 중재자의 역할이었는데, 그때까지는 신분이 낮은 중재자였다. 그가 빈타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갈릴레오 자신을 “고귀한 신분으로 만드는” 것이 메디치가의 이해관계에 가장 부합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조우의 위대성을 크게 손상시키는 요소가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중재자의 비천한 신분과 낮은 지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 . 마음에서 우러나온 최고의 진심어린 축하를 드리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듯, 중재자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은 거룩하신 전하의 재량권 안에 있는 일입니다.” 만약 메디치가가 여기서 주저한다면, 조우의 신성성은 신분이 낮은 중재자의 손에 의해 오염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헌정에 대한 대가로 직함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 “조우”가 이미 운명지어졌던 것이라면, 중재자로서의 그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실상(혹은 신이 보낸) 메디치가의 신탁자였다. 메디치가는 이 점을 인식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갈릴레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음으로써 그들은 결국 그렇게 하게 되었다.

코시모가 갈릴레오를 “고귀한 신분으로 만들어준 것”은 단순히 특권층의 후의(noblesse oblige)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메디치가가 갈릴레오의 “고귀함”과 사심 없음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의 발견은 미리 예정된 천상에서의 운명과의 조우가 되고 따라서 메디치 왕조의 정당성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이 발견이 별들로부터 온 징조(‘별의 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갈릴레오에게 별의 대사, 즉 대공의 철학자라는 지위가 부여되어야 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과학적 도구이자 일종의 왕조 유물로서 메디치가에 선사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1610년 3월에 그가 󰡔별의 사자󰡕의 증정본과 함께 망원경을 코시모 2세에게 보낼 때, 그는 코시모에게 비록 거칠게 보이고 연마되지 않은 도구이지만 망원경을 그 상태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토록 위대한 발견을 이뤄낸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는 계속 말하기를, 대공이 앞으로도 많은 우아하게 생긴 망원경들을 받게 되겠지만, “그 때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라고 했다. 모든 가능한 망원경들 중에서 이것 하나만이 ‘이곳으로부터, 그리고 지금’이라는 특별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단순한 망원경이 아니라 ‘사자’였던 것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갈릴레오는 자신을 메디치가의 “자연스러운” 가신으로 내세운 점에서 전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다. 1609년 말에 위성들을 발견했을 때, 그는 메디치가의 신화 구조나 그가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후원 관계를 감안한다면 메디치가야말로 그가 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후원자(유일한 후원자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라는 점을 깨달았다. 당시 유럽 다른 왕조들의 정치적 신화에서도 주피터(목성)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지만, 갈릴레오가 이를 알고 있었다거나 헌정 교섭이 빠르게 진행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알선자를 해당 궁정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V. 수상쩍은 별들

갈릴레오가 자신의 새로운 도구와 그것으로 해낸 발견 양자 모두를 정당화하기 위해 취한 전략은 1608년 그가 코시모의 문장을 가지고 시도했던 전략과 그 본질에 있어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도구와 발견을 메디치가의 물신(物神)으로 변형시킴으로써 후원자의 이미지와 권력을 그것에 연관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후원자를 정당화 기구로 이용하는 전략이 반드시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후원자들은 가신을 위해서 자신의 지위를 위험에 빠뜨리려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며, 이는 설사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중요한 헌정이 걸려 있는 경우에도 그렇다. 조심성이 많은 코시모 2세는 갈릴레오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맞서 그를 지지할 때 신중을 기울였으며, 그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2세는 훨씬 덜한 지지만을 해주었을 뿐이었다.

1610년 3월 󰡔별의 사자󰡕가 출판된 지 불과 1주일 만에 갈릴레오는 빈타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평판이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남으로부터 존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거룩하신 전하께서 이번 조우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두말할 것 없이 전하의 모든 신민들뿐 아니라 모든 나라들 역시 그것의 중요성을 인정할 것이고, 명망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입을 모아 이번 사건의 영광을 칭송하는 글을 쓸 것입니다.

이어 갈릴레오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나가 있는 메디치가의 대사들을 시켜 유럽의 왕과 군주들에게 󰡔별의 사자󰡕와 망원경을 널리 배포하도록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그의 발견에 정당성이 더해질 뿐 아니라, 그 군주들에게 메디치가의 영광을 관측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관찰도구(viewer)”와 그것에 대한 “사용설명(instructions)”을 제공하는 셈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메디치가는 공식적 외교 채널을 통해 책과 도구[망원경]를 배포하라는 갈릴레오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목성의 위성이 실재하는가 여부에 관해 공식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피했다.

5월 7일에 다시 빈타에게 편지를 쓰면서 갈릴레오는 같은 문제로 되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파도바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논박했고 “황제의 수학자”로부터 자신을 지지하는 장문의 편지를 받은 바도 있다며 빈타와 메디치가를 안심시킨 후, 그 발견과 연관해 메디치가의 이미지는 그간 안전하게 지켜져 왔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 특히 거룩하신 전하께서 ― 는 그와 같이 주목할 만한 진기한 사건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보여줌으로써 그 발견의 중요성과 평판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진지하게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메디치가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계속 견지했다. 메디치가의 예술 작업장을 감독하던 빈센쪼 기우그니는 6월 5일에 갈릴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디치가의 별들의 발견을 경축하는 메달을 주조하기 위한 금형(金型) 제작이 다름아닌 대공 자신에 의해 연기되었다고 썼다. 코시모 2세가 그 별들을 둘러싼 논쟁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기우그니에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를 전후해 갈릴레오는 요하네스 케플러로부터 자신이 갈릴레오의 관측을 입증했다는 내용을 담은 긴 편지(얼마 후 󰡔별의 사자와의 대화 Dissertatio cum Nuncio sidereo󰡕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를 받았다. 케플러의 보증에 의해 자신이 국제적인 신용을 얻었다고 확신한 갈릴레오는, 극단적으로 조심스러운 대공의 태도에 대해 불쾌해 하는 모습을 보였고, 기우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프랑스 국왕이 갈릴레오가 앞으로 발견할지도 모르는 어떤 행성의 헌정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고 말했다. 이어 갈릴레오는 기우그니에게 이렇게 썼다. “전하께서 몸소 여러 차례 관측하신 것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거룩하신 전하의 명성이 드높아지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으시도록 가능할 때마다 전하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행운이 전하께 점지해 주신 것이자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갈릴레오가 이 편지를 보냈을 때쯤에는 이미 빈타로부터 메디치 궁정에서의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던 시점이기는 했지만, 그가 아직 공식 계약서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마 우연은 아니었을 터이다. 계약서는 이후 7월이 되어서야 그에게 도착했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던 것은 코시모 2세 혼자가 아니었다. 피렌체의 아카데미 회원들과 궁정 작가들 역시 갈릴레오가 희망하고 예상했던 것만큼 열정적으로 메디치가의 별들을 찬양하지 않았다. 󰡔별의 사자󰡕가 출판된 지 2주 후에 알레산드로 세르티니 ― 피렌체에 있던 갈릴레오의 오랜 친구이자 아카데미아 피오렌티나의 회원이었던 ― 는 갈릴레오에게 쓴 편지에서, “토스카나의 시인들(Tuscan Muses)”을 움직여 보려고 했던 자신의 노력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메디치가의 궁정 작가들은 그들 중 한 명이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시인들은 다소 느리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명이 먼저 앞에 나서줄 것을 기다리면서 나머지 아홉 명이 발을 질질 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메디치가의 별들에 관해 뭔가를 확실히 쓰도록 하고 싶다면 전하께서 그에게 친히 편지를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세르티니는 갈릴레오에게 보낸 7월 10일자 편지에서, 지오반니 마지니와 마르티누스 호르키가 갈릴레오의 발견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피렌체에 널리 퍼졌으며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도 비판자 진영에 가담한 듯 보인다고 알려 주었다. 그 결과 세르티니는 피렌체의 작가들이 별들을 다룬 소네트를 기꺼이 발표하려 할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별의 사자󰡕를 피렌체말로 더 우아하게 다듬은 ― 메디치가의 별들에 헌정된 소네트를 포함해서 ― 판본을 출판할 것을 대공에게 제안한 바 있었다. 그러한 판본은 피렌체 궁정의 청중들을 겨냥해 구상되었음이 분명한데, 이는 그 안에 포함된 소네트에서 별들과 메디치가의 신화 사이의 연관을 자세히 설명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연관은 처음 나온 󰡔별의 사자󰡕의 라틴어 판본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은 유럽의 청중들은 그러한 연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별의 사자󰡕를 쓸 때 새로 발견된 위성들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빈타에게 자문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빈타는 갈릴레오가 제안한 두 개의 이름 중에서 “메디치가의 별들(Medicea Sydera)”이 “코시모의 별들(Cosmica Sydera)”보다 더 나은 것 같다고 답했다. 빈타는 그 이유로 “Cosmica Sydera”라고 하면 “코시모”가 아닌 “코스모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나는 그 때 빈타가 유럽의 청중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피렌체의 청중이라면 그와 같은 실수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8월에 들어서도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었다. 세르티니는 갈릴레오에게 이렇게 썼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그 시들을] 인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젊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자기 이름이 인쇄되는 대신 ― 피에로 데 바르디처럼 ― ‘크루스카의 아카데미 회원 일동 지음’이라고만 적혀 있게 되면 더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궁정 작가들은 갈릴레오가 이제 그들이 지은 소네트뿐 아니라 자신의 발견에 가해진 공격과 그에 대한 답변을 묶어 󰡔별의 사자󰡕 신판에 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상되는 갈릴레오의 적극적 역공에서 그들이 갈릴레오의 편으로 인식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세르티니는 더 나아가 갈릴레오가 “특정인을 언급하지 말고, 쟁점의 정해진 경계 내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답하도록 제안했다. 세르티니는 덧붙이기를, “그것이 제게는 가장 좋은 대처방안인 것처럼 보이고 또 제가 선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라고 썼다.

메디치가와 궁정 작가들이 비록 갈릴레오의 과학적 동료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과학적 발견을 두고 동료 과학자들이 조심스럽게 평가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얼핏 생각하면 코시모나 궁정 작가들이 갈릴레오의 발견을 인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케플러와 같은 전문적인 엘리트 천문학자의 견해를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듯 보인다는 점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 코시모와 작가들은 궁정이라는 같은 제도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갈릴레오의 동료 내지 선배였다고 할 수 있다. 궁정은 과학단체가 아니라 군주 권력의 표상이 생산되는 장소였고, 갈릴레오는 거기에 천문학자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장대한 왕조 상징의 생산자로서 고용되었다. 따라서 그는 대공의 권력에 대한 궁정에서의 문화적 생산물과 표상들 속에 자신의 발견을 받아들이고 표현해 줄 작가들을 필요로 했다. 반면 피렌체 궁정 사람들은 케플러나 ― 그 문제에 있어서는 ― 갈릴레오 그 자신을 믿을 필요가 없었다. 지도적 천문학자들의 견해는 궁정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권위는 자신의 군주 혹은 군주의 후원자가 가진 권위였기 때문이다.

갈릴레오가 대학에서 궁정으로 옮겨가는 이 단계에서 묘한 지위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위해 확립하고자 했던 사회-전문직업적 정체성이 새로운 것이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갈릴레오는 사회-전문직업적 잡종(hybrid)이었다. 그는 자신을 “새로운 철학자”로 내세웠는데, 이 역할은 ― 당시 대학의 구조를 특징짓고 있던 학문분야간 위계를 감안한다면 ― 오직 궁정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사 갈릴레오의 성취를 판단할 전문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궁정 작가나 젠틀먼이 아니라 수학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케플러가 목성 위성의 존재에 대한 그의 주장을 기각했다면 그가 심각한 곤란에 처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의 발견을 케플러가 인정한 것만으로는 궁정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치 못했다. 갈릴레오는 궁정 사람들과 군주의 인증이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오직 궁정에서만 철학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한 수학자들의 인증은 그가 수학자로서 신용을 얻는 데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일 수 있었지만, 궁정 철학자로서의 갈릴레오의 신용을 보증하는 데는 단지 필요조건에 불과했고 더 이상 충분조건이 되지 못했다.

17세기의 “실험의 집(house of experiments)”에 관한 스티븐 섀핀의 연구는 잉글랜드에서 실험적 실천의 정당화 역시 유사한 사회적 역설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갖춘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큰) 사람들은 “지식 생산의 자격”을 가졌다고 인식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지식 생산의” 사회적 자격을 갖춘 젠틀먼 중 많은 수는 실험 수행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보증을 할 수는 있었지만, 종종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보증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VI. 메디치가의 별들이 겪은 이력

비록 갈릴레오가 궁정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만들려는 최초의 시도에서는 실패를 맛보았지만, 메디치가의 별들은 점차로 궁정 담화의 필수적인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갈릴레오의 위성 발견을 경축하는 메달 역시 결국에는 주조되었다. 주피터가 구름 위에 올라앉아 있고 그 주위를 네 개의 별들이 돌고 있는 모습이 코시모 2세의 상징으로 제시되었고, 메달의 반대쪽 면에는 코시모 2세의 초상이 새겨졌다(그림 3). 그 별들은 메디치가의 신적 계보를 찬양하는 소네트, 연극 상연, 오페라, 메달, 프레스코화 등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1613년 사육제의 가장 중요한 궁정 공연 행사인 2월 17일의 바리에라에서 이를 다시 마주치게 된다.

이는 피티 왕궁의 극장에서 선별된 궁중 청중들을 앞에 두고 피렌체 시간으로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궁정 엔지니어 기울로 파리기가 설계한 극장의 장엄한 기계와 효과들이 대가의 솜씨로 모습을 드러낸 후, 공연은 신화적인 줄거리를 전개했다.

큐핏이 토스카나를 자신의 영토로 정하고 황금기를 일으키지만 평화는 이내 위협받는다. 큐핏과 그의 기사들(여섯 명의 궁정 수습 기사들)은 불꽃과 연기를 내뿜는 괴물같은 용과 네메시스가 이끄는 열두 명의 복수의 여신들과 마주친다. 용, 네메시스, 복수의 여신들은 결국 지옥으로 통하는 덫에 붙잡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큐핏과 토스카나가 아직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스데뇨 아모로소(사랑에 대한 경멸)와 그를 따르는 다섯 명의 사납고 야만인처럼 보이는 “이집트 기사”들이 지옥 입구에서 무대 위로 뛰어올라온다. 새로운 시합이 시작되지만, 평화와 토스카나의 황금기는 신성한 (코시모 1세의?) 개입에 의해 빠른 속도로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천둥소리가 들리고 주피터가 빛나는 구름(이는 구름이 무대 주위를 움직일 때 모양이 바뀌는 매우 복잡한 기계의 일부이다)을 타고 도착한다. 주피터는 혼자가 아니다.

구름 사이 아래로부터 주피터를 둘러싼 네 개의 별들이 나타났다. 이 별들은 대공 전하의 수학자인 피렌체 출신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경이로운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는 하늘에 위대한 영웅들의 이름을 붙였던 고대인들처럼 이 별들을 발견한 후 메디치라는 이름을 붙였고, 첫 번째 별을 대공 전하께, 두 번째 별을 돈 프란체스코 왕자께, 세 번째 별을 돈 카를로 왕자께, 네 번째 별을 돈 로렌쪼 왕자께 바쳤다.

무대 기계는 주피터를 대공 부인 가까이로 이동시키고, 주피터는 그녀에게 아리아를 불러 준다. 그리고 나서 주피터는 서서히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 동안 네 개의 메디치가의 별들은 피와 살을 가진 네 명의 기사로 변신한다. “주피터가 노래를 마치고 나면 천둥소리가 들리고 구름이 사라지면서 네 개의 별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그 자리에 선 네 명의 기사로 탈바꿈한다.” (주피터가 도착하기 바로 전에 무대에 등장한) 사이클롭스가 네 명의 기사들에게 번개를 건네준다. 이 무기를 갖게 된 그들은 주피터의 이름으로 새로운 시합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시합의 명칭은 “메디치가 별들의 기사의 도착”이다. 평화가 곧 뒤를 따른다. 청중 가운데 숙녀들은 무대 위의 기사들과 합세하고 마지막 무도회가 시작된다.

도시의 다른 사람들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메디치가의 별들을 기념했다. 이틀 후 바리에라의 단순화된 버전이 사육제 행렬로 도시의 거리를 지나갔다. 메디치가의 별들은 복수의 여신들, 네메시스와 함께 행렬의 두 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다.

1616년 벨라르민이 갈릴레오에게 [지구중심설 옹호에 대한] 경고를 남기고, 이때쯤 코시모 2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문화적․정치적 정책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졌다. 갈릴레오의 발견이 메디치가의 신화에서 처음에 그토록 찬란하게 누렸던 지위를 계속 갖지 못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메디치가의 별들은 1621년 이후 더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이 해에 코시모 2세가 사망한 후 크리스티나 대공 부인과 그녀의 조언자들이 토스카나 정부와 궁정 문화의 관리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사육제 축제는 규모가 축소되었고 종교극이 주된 장르가 되었다. 게다가 군주의 사실상 부재로 ― 페르디난드 2세는 1628년이 되어서야 성년이 되었다 ― 새로운 군주를 중심에 둔 문화적 생산물을 만들어내기도 어려웠다. 주피터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1628년 페르디난드 2세가 마침내 대공의 지위에 올랐을 때, 갈릴레오는 이미 로마에 새로운 후원자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치가의 별들은 페르디난드의 재위 기간 후반부에 작은 부흥기를 맞았다. 왕궁을 팔라쪼 델라 시뇨리아에서 팔라쪼 피티로 옮기면서 새로운 메디치가의 올림포스 산이 새 왕궁의 행성의 방들(Planetary Rooms)에 그려졌다. 갈릴레오가 󰡔별의 사자󰡕의 헌정사에서 메디치가의 별들을 주피터-코시모 1세의 미덕과 연결시켰던 것처럼, 팔라쪼 피티의 주피터의 방(행성의 방들 중 하나)은 신이 네 개의 주요 미덕을 나타내는 메디치가의 별들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렸다(그림 4).

메디치가의 별들은 코시모 3세의 재위 기간 동안 메디치가의 신화에서 훨씬 더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 대공의 이름이 메디치가의 별들을 언급할 때 직접 오르내렸는데, 그 이유는 특히 그가 다섯 명의 조상을 두어 주피터와 네 개의 별들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그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시모 3세가 메디치가의 별들을 부활시킨 것은 1661년 그가 마거리떼-루이스 오를레앙(루이 14세의 사촌)과 올린 결혼식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승마 무용극인 몬도 페스테기안테는 이 중요한 정치적 행사를 축하하는 기나긴 일련의 예식, 행렬, 공연의 정점을 이루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2만 명의 관중이 이 무용극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공연은 어깨에 코스모스를 짊어진 헤라클레스를 나타내는 엄청나게 거대한 극장 기계가 입장하면서 시작되었다(그림 5). 일단 헤라클레스가 무대 한가운데 도달하면 이 기계는 천천히 아틀라스 산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지구의 네 대륙을 나타내는 수많은 기사들이 무대에 올라와 헤라클레스에게 경의를 표하고, 거기서 축하를 받고 있는 “헤라클레스 같은” 부부에게도 은연중에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유럽과 아메리카의 기사들은 결혼에 대해 기뻐했던 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기사들은 그와 같이 강력한 동맹에 위협을 느꼈다. 두 파벌 사이에 우아한 결투-무용극이 시작되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강력한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구름에 둘러싸인 매우 키가 큰 극장 기계 위에 올라앉은 주피터의 도착을 알렸다. 즉각 모든 기사들은 결투를 중단했다. 이 기계가 주피터를 무대 높이까지 낮추어 주자마자 구름은 걷히고 “네 마리의 우아한 말에 올라탄 네 명의 기사들이 주피터와 매우 가까운 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주피터의 주위를 결코 떠나지 않는[이 대목은 󰡔별의 사자󰡕를 인용하고 있다] 네 개의 메디치가의 별들을 상징했다”(그림 6). 그러자 주피터가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결혼은 코시모의 메디치가의 별들을 더욱 아름답고 빛나게 만들었는데, 이는 마리-루이스의 황금 백합이 내놓은 새로운 광휘 때문이었다. 아폴로가 주피터와 합세해 결혼을 “프랑스의 태양과 메디치가의 별들”의 동맹으로 찬양했다. 공연이 계속되면서 “네 개의 메디치가의 별들은 전하에게로 다가가 그의 주위에, 즉 토스카나의 주피터 주위에 머물렀고 남은 예식 동안 결코 그를 떠나지 않고 항상 수행하면서 행렬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그의 곁에 남아 있었다.”

메디치가의 별들은 코시모 3세의 결혼식 즈음에 주조된 메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문장은 바다에서 메디치가의 별들에 의해 인도되는 배였고 그 위에 Certa fulgent sidera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었다(그림 7). 코시모 3세가 1723년에 사망했을 때는 메디치가의 별들이 그려진 유사한 메달이 관 속에 추서되었다(그림 8). 메디치 왕조는 그가 죽은 후 불과 14년 동안 더 지속된 후 종말을 고했다.

VII. 궁정 문화, 절대주의, 그리고 과학의 정당화

메디치가의 별들이 페르디난드 2세의 재위 동안 궁정 신화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을 무렵에 이르면 이 별들과 갈릴레오와의 연관은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1633년 종교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이 과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613년 사육제의 바리에라에서는 위성의 발견에서 갈릴레오가 한 역할이 언급되었지만, 1661년의 몬도 페스테기안테에서는 그런 언급이 사라졌다. 이때쯤이 되면 메디치 궁정은 메디치가의 별들을 그 발견자는 물론이고 천문학으로부터도 단절시켜 버렸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별이 아니라 왕조의 물신이자 주피터-코시모의 기사들에게 의례적으로 붙여지는 이름이 되었다. 이러한 물신화의 과정을 분석해 보면 메디치 궁정의 후원이 과학의 정당화에 기여한 방식과 그 한계를 모두 엿볼 수 있다.

메디치가의 후원은 궁정의 담화에 부합하는 경이에 대한 포상이었지 과학 이론이나 연구 프로그램에 대한 포상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새로운 우주론을 지지하는 천문학적 발견으로서가 아니라 왕조의 상징으로 내세우려 했으며, 자기 자신도 발견자가 아니라 단지 조우의 중재자일 뿐이라고 했다. 역설적인 것은, 갈릴레오의 후원 획득 전략이 성공을 거두려면 그는 좀더 정당한 저자, 즉 철학자가 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발견에서 그가 지닌 저자로서의 지위를 지워 버려야 했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는 철학자의 칭호를 얻기 위해 자신의 발견이 지닌 천문학적 관련성과 수학자이자 도구 제작자로서 그가 지닌 능력이 발견 과정에서 했던 역할을 지워 버려야 했다. 그렇게 얻은 철학자의 칭호는 다시 그가 실천에 옮겼던 코페르니쿠스 천문학과 자연에 대한 수학적 탐구 모두에 대한 인식론적 정당화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갈릴레오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단지 메디치가에 헌정하기만 해서는 안되었다. 그는 별들의 발견이 결코 자신에게 “속했던” 적이 없었다는 신화적 내러티브를 지어내야만 했다. 그는 메디치가에 한번도 그의 것인 적이 없었고 항상 메디치가의 것이었던 무언가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가장 소중한 경이를 제공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 궁정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서 ― 자신이 아무것도 주고 있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를 내세워야 했다. 몬도 페스테기안테와 메디치가의 별들에 대한 이후의 표상에서 드러난 별들과 그 발견자의 완벽한 소외는 이미 50년 전 갈릴레오가 구사한 후원 획득 전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결국 갈릴레오와 별들의 발견 사이의 무관성 ― 그가 수사적으로 내세웠던 ― 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메디치가의 별들은 메디치의 물신에 다름아닌 것이 되었고, 왕조가 끝날 때까지 메디치 궁정 내에서 그러한 물신으로서 찬양받았다. 갈릴레오가 무대를 떠난 건 그보다 훨씬 먼저였다. 요컨대 갈릴레오는 메디치 물신주의의 약호들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학자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지만,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자연에 대한 수학적 분석을 정당화하려는 자신의 시도에 대해 메디치가의 완전한 후원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메디치 궁정의 후원 관행은 갈릴레오에게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였지만, 이는 갈릴레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갈릴레오가 후원과 메디치가의 별들의 표상을 묶어둔 것에 내재한 역설은 그가 궁정으로 자리를 옮긴 것에 내포된 다른 역설과 연결되어 있다. 궁정은 갈릴레오가 추구하던 새로운 사회-전문직업적 역할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연구의 기술적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공간이기도 했다.

메디치가의 후원 프로그램은 사회적, 인식적 정당화를 추구하던 갈릴레오의 전략과 국소적, 일시적으로만 겹쳐졌지만, 이러한 중첩은 엄청난 역사적 중요성을 지녔다. 갈릴레오가 철학자의 칭호를 얻고 메디치 궁정에 고용된 것은 그 자신의 경력에도 분명 중요했지만, 좀더 일반적인 두 가지 역사적 과정 사이의 접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절대주의 국가의 등장과 연관된 궁정 문화의 형성과 과학의 사회적 정당화 과정 사이의 접점이 그것이다. 아래에서는 먼저 궁정 사회와 문화의 몇몇 특징들을 개관해 보고, 이어서 과학의 사회적, 인식적 정당화를 위한 갈릴레오의 전략 ― 그의 경력에 대한 분석에서 드러나는 ― 이 어떻게 그 문화와 연관된 다른 사회-전문직업적 정당화 방식과 비교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것이다.

근대 초기의 궁정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바로크 궁정들이 다양한 모습을 띄었지만, 궁정 문화 ― 점점 절대화되어 가던 군주의 담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 는 국경을 가로질러 많은 공통된 특징들을 나타냈음을 보여 주었다. 그 중 하나가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이다. 특히 1550년 이후에 궁정 문화는 (문화적, 지리적 양쪽 모두의 의미에서) 주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자기 자신, 군주, 혹은 다른 궁정 문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오로지 그것만을 언급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폐쇄된 극장이라는 궁정 공간이 공공적 볼거리를 대체하며 발전한 것도 이 과정과 연관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궁정 문학과 시가를 보면 그 주제가 통치 가문에 얽힌 신화를 동시대의 사건들(의식, 군대의 영웅적 행동, 공공사업이나 기념물) 및 생존해 있는 궁정인들의 삶과 작품들과 교묘하게 뒤섞어 놓은 것임을 이내 눈치 챌 수 있다. 메디치가의 별들을 찬양해 주었으면 하고 갈릴레오가 내심 바랐던 작가들(가브리엘로 치아브레라, 젊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안드레아 살바도리)과 그의 친구인 살바도레 코폴라의 작품들은 실제 궁정 생활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궁정 회화에서도 비슷한 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문화적 단절이었고, 이는 종종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궁정이 지리적으로 분리되는 것과 병행해 나타났다. 아마도 베르사이유가 이런 과정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겠지만, 피렌체 부근 시골에 위치한 메디치가의 여러 저택들도 베르사이유의 정치적 기능을 공유했다. 이런 저택들은 군주를 위한 “에덴동산”이었다. 궁정이 도시와 그곳에 사는 군중들로부터 문화적-지리적으로 분리되면서, 상업적 기원을 지닌 예전의 귀족과 구분되는 새로운 사회집단인 궁정 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궁정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도시의 군중들과 차별되는 존재라는 감각을 심어 주었고, 그들이 지닌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궁정에 관한 당시의 문헌들을 보면 civiltà라는 특별한 용어를 써서 궁정 문화를 지칭하고 있다. 마테오 페레그리니는 1624년에 “군주는 품위 있는 생활의 심장이고 궁정은 그 수족”이며 궁정의 생활방식은 품위 그 자체라고 썼다.

그러나 궁정 사회의 형성과 하층계급으로부터의 점차적인 분리가 그 속에 포괄되거나 통제를 받는 상류계층의 지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궁정 사회의 발전은 궁정 귀족층의 형성 이상의 것을 필요로 했다. 즉, 군주 권력의 표상에 대해 이와 공모한 청중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표상을 만들어내는 유능한 생산자도 있어야 했다. 예술가들은 항상 권력자의 이미지를 찬양해 왔지만, 바로크 궁정과 중앙집중화된 국가가 등장하면서 군주 권력의 예술적 표상은 전문화된 기관, 즉 공식적인 미술 아카데미에 의해 통제를 받기 시작한다. 아카데미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예술 관료제”에 통합됨으로써 아카데미에 속하지 않고 시각예술 작업을 하는 장인들에 비해 훨씬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궁정 사회와 문화의 발전이 과학의 사회적 정당화 과정과 겹쳐지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메디치 같은 군주들은 절대주의 국가를 발전시키려 노력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켜 줄 표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반면 갈릴레오와 같은 대학의 수학자들은 자신과 철학자들 사이의 지위 격차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러한 격차는 자연 현상의 물리적 차원을 연구하는 수단으로 수학을 사용하는 것의 정당성을 침식했다. 그래서 마치 장인들이 회화, 조각, 건축에서 군주 권력의 신화를 그려냄으로써 아카데미에 속한 예술가가 되었던 것처럼,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 왕조의 상징으로 그려냄으로써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비록 궁정이 과학 아카데미는 아니었지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정당화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제도였고, 그럼으로써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탈바꿈한 [갈릴레오 같은] 학자들의 신용을 확립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분야간 위계, 기존의 사회 제도, 사회문화적 변화의 양식 등이 포함된 이러한 시나리오를 전제로 할 때, 궁정은 갈릴레오가 사회-전문직업적 정당화를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선택지 ― 비록 문제 있는 선택지이긴 했지만 ― 였다.

사회적 정당화를 위한 갈릴레오의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궁정 후원의 특정 측면들 중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궁정에서의 지위에 관해 빈타와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갈릴레오는 파도바와 베네치아에서처럼 여러 후원자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의 후원자만 섬기고 싶다는 바람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공화국이라는 국가 형태는 자신이 찾던 종류의 지위를 제공해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별의 사자󰡕의 헌정사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후원 관계의 경제적 차원을 지워 버리고 이를 “점성학적으로 예정된” 것으로 내세웠다.

나는 다른 논문에서 갈릴레오가 코시모 2세와 맺은 관계는 위대한 후원자와 명성이 높은 가신 사이에 발생하는 후원 유형 ― 주요 궁정에서 만날 수 있는 후원 유형 ― 을 반영하고 있다고 쓴 바 있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와 맺은 관계, 코르네유와 라신이 루이 14세와 맺은 관계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런 후원 유형에서 특이한 점은 양측 모두가 관계의 경제적 기반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후원자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찬양하는 가신을 사들인다고 스스로 내세울 경우 바로 그 이미지를 더럽히게 된다. 당당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어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내게 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요한 가신들은 자신이 “사심이 없음”(즉, “고귀함”)을 내세우기 위해 금전적 관계를 부인하는 경향을 띄었다. 위대한 후원자의 지원을 통해 높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가신은 상점주인 같은 정신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었다. 상점에 들어온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되는 대로 가격을 붙여 물건을 파는 사람처럼 보여서는 안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명성이 높은 가신들이 위대한 후원자와 후원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지 자신의 이해관계를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이 배타적이고 강력한 후원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려면, 혁신적이고 도발적이며 위험을 감수하는 방식으로 후원자의 이미지를 찬양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위대한 후원자의 귀족적인(“영웅적인”) 정신을 공유한다고 내세워야 했다. 그와 같은 고급 후원 관계는 자기 양식화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미켈란젤로 같은 궁정 시각예술가와 라신, 코르네유 같은 궁정 작가들은 그런 수단을 이용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자신들을 덜 독창적이고 덜 과감하며 이익을 쫓는 자기 직업의 다른 성원들과 차별화하려 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그런 목적으로 작업장을 개설한 사람들 같은 부류의 화가나 조각가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비슷한 후원 동역학을 통해 라신과 코르네유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글쟁이가 아니라 문학 작가 ― écrivains ― 로 인식되었다.

갈릴레오의 후원 획득 전략은 미켈란젤로, 라신, 코르네유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발견이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뭔가 유용한 것이라고 내세우지 않았다. 유용한 장치는 엔지니어의 영역에 속했다. 대신 갈릴레오는 왕조의 운명을 매개하는 사심 없는 사자로 스스로를 내세웠다. 자신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부인함으로써, 또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위대한 후원자의 권력을 찬양함으로써 갈릴레오는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얻어진 사회적 신분 상승은 인식적 함의를 지녔다. 사심없음 ― 어떤 사람의 정신이 시장의 우상에 의해 흐려지지 않은 상태 ― 은 신용을 갖추기 위한 전제조건이었고, 수학자를 철학자와 갈라놓는 것은 바로 인식론적 신용에서의 격차였다. 갈릴레오가 코시모 2세와의 사이에 발전시킨 특이한 유형의 후원 관계는 이런 격차를 좁히는 수단이 되었다. 이는 또한 (그가 빈타에게 말했듯이) 왜 갈릴레오가 [공화국인] 베네치아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절대군주를 필요로 했는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게 돈과 자유시간뿐 아니라 인식적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후원자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위대한 후원자들은 궁정을 가진 절대군주인 것이 보통이었다.

이 논문에서 나의 관심은 갈릴레오의 경력이 궁정이나 그에 속한 후원 형태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갈릴레오가 반드시 대학에서 궁정으로 옮겨야만 했던 것은 아니며, 그가 메디치가의 가신이었기 때문에 목성의 위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경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과정, 제도, 후원의 동역학은 그만이 겪은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절대군주의 담화와 연관된 바로크 궁정의 문화와 후원이 보여준 주요 양상들이나, 신학과 철학을 우선시하는 대학의 분야간 위계 속에서 수학이 부여받은 낮은 인식론적 지위는 결코 피렌체의 맥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갈릴레오는 단지 탁월한 과학자였을 뿐이라는 식의 얘기에 대해, 그는 후원 획득 전략에서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이라고 맞받는 것은 그의 예외적인 경력을 가능케 하고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수학적 물리학의 정당화를 위해 그가 취했던 전략을 틀지었던 보다 일반적인 사회역사적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차라리 나는 갈릴레오가 위대한 조각그림 맞추는 사람(bricoleur)이었다고 말하겠다. 망원경부터 궁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력에 중요했던 많은 구성요소들은 이미 거기에 있었지만, 그 모든 구성요소들을 짜 맞추어 조각그림을 완성해낸 것은 바로 갈릴레오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