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실증주의 편집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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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J. Ayer (ed.), Logical Positivism, Editor’s Introduction. 번역자 미상

I.논리실증주의 운동의 역사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라는 말은 1930년 경 자신들을 비엔나 학단(the Vienna Circle)이라고 불렀던 일군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들의 관점을 특징짓는 말로 만들어졌다. 그후, 그 말의 외연은 다른 형태의 분석철학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서, 캠브릿지의 버트런드 럿셀(Bertrand Russell), G.E.무어(Moore), 루드비히 비트겐시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제자들이나 당대에 옥스포드의 언어분석 운동에 참여하였던 철학자들도 논리실증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현대철학이 사변적인 탐구보다는 분석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데 대하여 적대적인 사람들이 특히 이 말을 이렇게 넓게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반대자들은 한번의 붓질로 먹칠하고 싶어한다. 이점은 자기들 사이의 차이점에 훨씬 민감한 분석철학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논리실증주의자”라는 명칭은 비엔나 학단의 특정한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제한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논문집을 편찬하면서 나는 이점을 그리 엄격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주로 비엔나 학단 구성원들과 그들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의 저술에서 골랐지만 이들 밖에 있는 사람들의 글도 몇 편 포함시켰다. 이 글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분석적인 글들이지만 내가 분석철학이라고 간주하는 범위는 좀 넓다. 분석철학은 전문적이고 세세한 부분들에서 뿐 아니라, 분석의 방법과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포함해서 주요한 원칙에 있어서 심각하게 상충하는 견해들을 포괄한다.

비엔나 학단은 1920년대 초 그 중심 인물인 모리츠 쉴릭(Moritz Schlick)이 키일에서 비엔나대학교의 철학교수로 부임하면서 결성되었다. 철학 쪽에서 주도적인 인물로는 쉴릭 이외에 루돌프 카납(Rudolf Carnap),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허버트 파이글(Herbert Feigl), 프리드리히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에드가 질셀(Edgar Zilsel)과 빅터 크라프트(Victor Kraft) 등이 있었고, 과학 및 수학 쪽의 주도적인 인물로는 필립 프랑크(Philipp Frank), 칼 멩거(Karl Menger), 쿠르트 괴델(Kurt Gödel)과 한스 한(Hans Hahn) 등이 있었다. 처음에 비엔나 학단은 조직적인 운동이라기 보다는 클럽에 더 가까웠다. 일군의 어떤 문제들에 대하여 공통의 관심을 갖고 있으며 비슷한 접근 방법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서 그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이 회합은 학단이 지속되는 동안 계속되었으나, 이들은 회합 이외에 다른 활동들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 클럽은 거의 정치 정당과 비슷한 모습으로 되어 갔다. 이 과정은 1929년 “비엔나 학단 - 그 과학적 세계관(Wissenschaftliche Weltauffassung, Der Wiener Kreis)”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출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성명은 그룹의 철학적 지위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수학과 물리 과학 및 사회과학의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개관을 담고 있었다. 카납과 노이라트, 한에 의해 쓰여진 이 팜플렛은 학단이 자신들을 철학사에서 어떻게 위치시키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이들은 자기들이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와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그리고 신학적인 관심 때문에 좀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프란쯔 브렌타노(Franz Brentano) 같은 사람들의 저작을 통하여 19세기 말에 꽃 피웠던 비엔나의 전통을 발전시켜가고 있노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자기네 사상의 주요 선구자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경험론자요 실증주의자로서 계몽주의 철학자 흄(Hume)과 꽁트(Comte), 밀(Mill), 아베나리우스(Avenarius), 마하를 꼽았고; 과학철학자로서 헬름홀츠(Helmholtz), 리이만(Riemann), 마하, 프왱까레(Poincaré), 엔리케(Enriques), 뒤엠(Duhem), 볼츠만과 아인시타인(Einstein)을; 순수 및 응용 논리학자로서 라이프니츠(Leibniz), 페아노(Peano), 프레게(Frege), 슈레더(Schröder), 럿셀, 화이트헤드(Whitehead), 그리고 비트겐시타인을; 공리 수학자(axiomatist)로서 파슈(Pasch), 페아노, 바일라티(Vailati), 피에리(Pieri)와 힐버트(Hilbert)를; 실증주의 성향의 윤리학자 사회학자로서 에피큐로스(Epicurus), 흄, 벤담(Bentham), 밀, 꽁트, 스펜서(Spencer), 포이어바하(Feuerbach), 맑스(Marx), 뮐러-라이어(Müller-Lyer), 포퍼-링케우스(Popper-Lynkeus)와 형 칼 멩거(Karl Menger)를 거론하였다. 이 목록은 놀랄만치 포괄적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저자들의 어떤 특별한 측면만을 고려하여 거론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컨대 라이프니츠는 그의 형이상학 때문이 아니라 그의 논리학 때문에 거론된 것이며, 칼 맑스는 그의 논리학 때문도 그의 형이상학 때문도 아니고 역사에 대한 그의 과학적 접근 때문에 거론된 것이다. 이 목록에서 당대의 인물들을 제외하고 나면 비엔나 학단과 일반적인 관점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흄과 마하이다. 논리실증주의의 특징이라고 생각되는 원칙들 거의 대부분이 이미 흄에 의해서 진술되었거나 적어도 암시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다.

팜플렛의 저자들은 당대의 사람들 중에서 아인시타인과 럿셀과 비트겐시타인이 비엔나 학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꼽고 있다. 사실 비트겐시타인은 비엔나 학단과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캠브릿지에서 럿셀의 학생이었던 그는 1차세계대전 이전에 비엔나로 돌아와서 1921년 그의 «논리학-철학 논고(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en)»이 출판되었을 때 비엔나에 있었다. 그 책의 영역본에 붙여졌던 이름인 «트락타투스(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유명한 책은 비엔나와 다른 곳에서 실증주의 운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비엔나 학단이 그들의 영감을 모두 이 책으로부터 얻어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옳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쉴릭 자신도 1918년에 초판이 발행된 인식론에 관한 그의 저서 «일반 인식론(Allgemeine Erkenntnis­lehre)»에서 독립적으로 철학에 대한 비슷한 견해에 도달하고 있으며, «트락타투스»에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대목들이 있어서 학단의 몇몇 사람들, 특히 노이라트 같은 사람은 이점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들은 그 책을 받아들였고, 그 책은 그들의 견해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설명은 아니었으나 가장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설명이라고 간주되었다. 비트겐시타인은 공식적으로는 학단에 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단의 사람들, 적어도 쉴릭과 바이스만과는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였고 1929년 그가 캠브릿지로 떠난 후에도 그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쳤다. 캠브릿지에서 그는 죽기 4년 전인 1947년까지 가르쳤는데, 거기서 그는 학생들에게 거의 독재적으로 군림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짧은 논문 한 편 이외에 아무런 저술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젊은 세대의 영국 철학자들에게 그의 영향력은, 대개의 경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였어도, 강력하였다. 그 자신은 실증주의를 엄격하게 지켰던 초기의 입장을 상당히 수정하였는데, 이것은 «트락타투스»와 유고로 출간되었던 «철학적 연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를 비교해보면 드러난다. 또한 영국의 현대 철학자들이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 매달리는 성향과 철학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도, 비엔나 학단이 선호하였던 좀더 엄정하고 과학적이고자 하는 방법과 대비되는, 비체계적이고 사례중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도 후기 비트겐시타인과 무어(G.E.Moore)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논리실증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분석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 견해에 대해서는 뒤에가서 좀 더 말하기로 하겠다. 비엔나 학단이 제1차 국제 학회를 조직한 것은 1929년이었다. 그것은 프라하에서 열렸고 30년대를 통하여 쾨니히스버그, 코펜하겐, 프라하, 파리, 그리고 캠브릿지에서 차례로 개최되었다. 이 회합은 논리실증주의를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비엔나 학단의 야심을 더욱 고무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베를린 학파와의 초기의 연대를 형성하기도 하였는데, 베를린 학파는 한스 라이헨바하(Hans Reichenbach), 리쳐드 본 미제스(Richard von Mises), 쿠르트 그렐링(Kurt Grelling)과 후에는 칼 헴펠(Carl Hempel) 등이 지도적인 멤버였다. 이 회합을 통하여 에이노 카일라(Eino Kaila), 아른 네스(Arne Naess), 에케 펫젤(Ake Petzäll), 죄르겐 죄르겐센(Joergen Joergensen) 등의 스칸디나비아 철학자들과 웁살라 경험주의 학파, 그들끼리 기호학(Significs)이라고 부르던 연구를 수행하던 철학자 마누리(Mannoury)를 중심으로 하는 화란 철학자들 그룹, 하인리히 숄츠 지도하의 뮌스터의 논리학자 그룹, 네이글(Nagel), 챨스 모리스(Charles Morris)와 콰인(Quine) 같은 미국의 동조자들, 그리고 수전 스테빙(Susan Stebbing),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브레이쓰웨이트(R.B. Braithwaite), 죤 위즈덤(John Wisdom)과 나를 포함하는 다양한 색깔의 영국 분석철학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졌다. 캠브릿지의 천재 철학자 램지(F.P. Ramsey)는 지지자로 주목받았는데 1930년 26세의 나이로 죽었다. 한편, 폴랜드의 철학자 및 논리학자들로 이루어진 중요한 동맹 세력도 형성되었는데, 루카지비치(Lucasiewicz), 레스니에프스키(Lesnievsky), 코타르빈스키(Kotarbin­ski), 아주키비치(Ajduciewicz), 그리고 타르스키(Tarski)가 아마도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타르스키의 저술은 특히 카르납에게 두드러지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학단의 선교 정신은 출판을 통해서도 분출되었다. 1930년 학단은 «철학연감(Annalen der Philo­­s­­o­phie)»이라는 저널을 내었는데, 이것은 «인식(Erkenntnis)»이라고 개명되어서 카르납과 라이헨바하의 편집으로 출간되면서 실증주의 운동의 주요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이어서 일련의 단행본들이 «통일과학(Einheits­wissen­schaft)»이라는 총서명으로 나오게 되었고, 쉴릭과 필립 프랑크의 편집 감독 하에 «과학적 세계관을 위한 연구(Schriften zur Wissenschaft­liche Weltauffass­ung)»라는 총서명으로 일련의 저술들이 나왔다. 쉴릭 자신이 이 총서에 윤리학에 관한 책 한 권을 기고하였는데, 그 첫 장은 이 책에 실려있다. 또 프랑크는 인과 법칙과 그 한계들에 관한 책을 기고하였다. 이 총서들에 포함된 책들 중에 중요한 것으로, 뒤에 다시 언급하게 될 언어의 논리적 통사론에 관한 카르납의 책과 다소 맑스주의적 성향을 띤 노이라트의 사회학 책, 그리고 과학철학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칼 포퍼(Karl Popper)의 유명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가 포함되어 있다. 포퍼는 사실 학단의 멤버가 아니었으며 실증주의자로 분류되고 싶어한 적이 결코 없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비판하였던 실증주의자들과 그 사이에는 차별점들보다는 유사성이 훨씬 강했다. 어쨌거나 학단의 멤버들 간에도 모든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30년대를 통하여 논리실증주의 운동은 힘을 얻어가고 있었지만 비엔나 학단 자체는 해체의 길을 걸었다. 내가 그 회합에 참석하였던 1933년, 카르납과 프랑크는 프라하대학교의 교수직을 받아들여서 떠났고 토론은 주로 쉴릭, 노이라크, 바이스만, 한에 의해 이끌어졌다. 그런데 한은 1934년 죽었고 두 해 뒤에 쉴릭이 54세에 대학교 입구를 걷던 중에 머리가 돈 어떤 대학생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시 정부 기관지의 부고에서 쉴릭에 대한 적대적인 논조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학생들에게 살해당해도 싸다는 투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곧 학단이 처하게 될 곤경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1차세계대전 종전 무렵 뮈니히의 혁명적 스파르타시스트 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노이라트를 제외하면 학단의 멤버들 중 정치에서 눈에 띄게 활동적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적이고 과학적인 성향 때문에 그들은 돌푸스(Dolfuss)와 슈쉬니그(Schuschnigg)의 우파 정권의 의심을 받았으며 나치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치 하에서 그들 대부분은 유배당하였다. 나치의 등장은 베를린 학파에게도 괴멸적인 것이었으며 폴랜드 그룹은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화란에 망명하고 있던 노이라트는 논리실증주의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인식(Erkenntnis)»의 제명은 «통일과학저널(The Journal of Uni­fied Science)»로 바뀌었고 출판지도 헤이그로 바뀌었다. 카르납이 자리잡고 있던 시카고대학교에서 «국제 통일과학 백과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라는 야심찬 제목으로 일련의 브로셔들을 출판하기로 조정이 이루어졌다. 학회도 열기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몇 년 후 노이라트가 영국에서 죽으면서 운동은 결속력을 잃었다. «백과사전»을 구성하도록 계획되었던 책들은 대부분 실제로 출간되었지만 «통일과학저널»은 바로 출간을 중지하였고 다시는 복간되지 못하였다. 카르납 이외에도 파이글, 괴델, 프랑크, 헴펠, 타르스키 등이 미국의 대학에 있고 바이스만과 포퍼는 영국의 대학에 있다. 숄츠는 뮌스터에 남아 있으며 코타르빈스키와 아주키에비치는 폴란드에 있고, 빅터 크라프트는 비엔나 대학교의 철학교수에 복직하였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아무리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의 학파를 이루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논리실증주의 운동은 이미 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은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영국, 스칸디나비아, 미국에서 강력하게 남아 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헬싱키 대학교에 카일라에게 비트겐시타인의 제자로서 한 때 캠브릿지 대학교에서 철학교수로서 그를 뒤이었던 폰 리히트(von Wright)가 가담하였고, 웁살라 학파는 헤데니우스(Hedenius), 제거스테트(Segerstedt), 마크-워가우(Marc-Wogau)의 지도 하에, 또 스톨홀름에 있는 논리학자 베드버그(Wedberg)의 지원 하에 여전히 융성하고 있으며, 오슬로의 아른 네스는 언어 사용에 관한 그의 사회학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펫젤은 1957년 죽을 때까지 룬트에서 계속 가르쳤으며, 죄르겐센은 비록 그의 실증주의 사상은 맑스주의의 주입으로 변질되었지만 여전히 코펜하겐에서 가르치고 있다. 미국에서는 콰인, 네이글, 넬슨 굿맨(Nelson Goodman) 같은 많은 철학자들이 체계적인 과학적 철학을 추구하는 정신으로 논리적인 분석을 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지금 다른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비엔나 학단의 원래의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넬슨 굿맨의 «현상의 구조(The Struc­ture of Appearance, 1951)»과 콰인의 논문집 «논리적 관점에서(From a Logical Point of View, 1953)»가 특별히 주목할만하다. 콰인과 굿맨은 기호논리학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어서 이점에서 타르스키, 괴델, 처치와 현대 미국의 중요한 논리학자들과 연결되고 있다. 동일한 시각은 카르납과 그의 제자들, 특히 파이글과 헴펠,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힐렐(Bar Hillel)과 에게서도 유지되고 있다. 미국의 다른 철학자들, 노먼 맬컴(Norman Malcolm), 맥스 블랙(Max Black), 모리스 라저로비치(Morris Lazerowitz), 스티븐슨(C.L. Stevenson) 같은 이들은 G.E. 무어와 후기 비트겐시타인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고 있어서 철학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현대 영국의 학파들과 가까운 성향을 보인다.

버드런드 럿셀의 예에도 불구하고 현재 영국의 철학자들 사이에는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식 논리학에 대한 관심도 없고,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서 기호논리학의 기법들이 매우 쓸모 있다는 믿음도 볼 수 없다. 철학을 과학과 연결시키려는 욕구도 그만큼 없다. 1936년 초판이 발간되었던 나의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는 비엔나 학단의 고전적 입장이라고 불리울만한 것을 대중화시키는데 약간 기여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전후 영국의 주류적 성향은 형이상학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과학적 방법을 존중하며 철학적 문제들이 진정한 문제라면 그것들은 논리적 분석에 의해서 깔끔하게 해결되리라고 가정하는 타협없는 실증주의 대신, 정치적인 의미에서 버어크가 경험주의의 옹호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경험적인 철학의 접근을 채택하고 있다. 일반화를 회피하며, 개별적인 사례들이 수없이 찾아서 주의깊게 분해한다. 어떻게든 두드리고 깍아서 하나의 해결책에 도달하려고 하는 대신 문제의 모든 측면들을 검토하는 데 그치며, 상식이 절대군주는 아니라고 해도 입법군주로서 지배하고, 철학적인 이론들은 말들이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시금석 삼아 검사된다. 형이상학자들은 이제 범죄자라기보다는 환자로 취급된다: 그가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하는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위 치료적 기법은 현재 캠브릿지의 교수인 죤 위즈덤에게서 잘 나타나는데, 그의 논문집은 1952년과 1953년에 각각 «다른 정신들(Other Minds)»과 «철학과 정신분석(Phil­os­ophy and Psycho-Analysis)»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좀 더 건강한 형태의 치료법은 옥스포드의 형이상학 교수인 길버트 라일에 의해서 실천되었는데, 데까르트의 “기계 속의 유령” 신화를 공격하고 있는 그의 «정신의 개념(Concept of Mind, 1949)»은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라일은 위즈덤과 비슷한 취향과 재능을 가졌다. 유비와 비유에 능하며 사례들을 쌓아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그러나 일반화를 덜 겁내며 일상적 용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 참지 못하고, 현재의 비트겐시타인주의자들보다 그 방법에 있어서 훨씬 더 직접적이고, 철학적 문제가 올바른 해답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요즘 가끔 옥스포드 학파라고 불리는 연구 성향은 라일보다는 J.L. 오스틴에게서 목소리를 따온 것인데, 언어의 일상적 사용에 대한 관심을 지켜가되 철학적 분석이 문헌학 연구에게 길을 양보했다고 생각될 정도까지 이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향이 완전히 지배적인 것은 아니다. 스튜어트 햄프셔(Stuart Hampshire), 스트로슨(P.F. Strawson), 데이빗 페어즈(David Pears) 같은 철학자들의 연구는 옥스포드 방식의 틀 안에서도 접근의 다양성이 상당히 넓게 허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옥스포드 철학”을 스콜라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된 증거를 가진 기소는 못된다.

현재 철학계는 묘하게 분할되어 있다. 실증주의라는 말을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해서 모든 형태의 분석적, 언어적 또는 극단적인 경험론적 철학들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실증주의는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고, 화란과 벨기에 그리고 호주와 미국에서 강력한 동맹을 얻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실증주의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실증주의는 맑스주의와 모든 면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이 둘은 적어도 어떤 공통의 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는 공산국가에서 번성할 수 없는데, 그것은 레닌이 1905년 그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에서 마하와 그의 지지자들을 공격하면서 그것이 부르주아 관념론의 한 형태라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에서 철학자들은 신토머스주의(neo-Thomism) 또는 신칸트주의(neo-Kantianism) 또는 신헤겔주의(neo-Hegelianism) 또는 실존주의 또는 여타 형태의 독일 형이상학들을 천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는 점은 특히 주목할만하다. 반대로 금세기를 통하여 영어권 국가들은 독일의 무절제한 사변적 사고의 흐름을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이러한 민족적인 분리는 참으로 개탄스럽다. 그들은 다른 어떤 학문 분야에서도 이런 정도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철학의 성격이 워낙에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주제 자체의 본성과 그것이 추구되어야 할 방법에 대해서도 일치를 보지 못하는 성향이 있기는 하다. 비엔나 학단은 다른 학문에서처럼 철학에서도 이런 불일치가 구제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철학을 확실한 학문의 길 위에 올려 놓는” 방법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칸트가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것은 달성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철학에서 진보가 있을 수 있으며 실증주의 운동은 여러가지 점에서 이것을 성취하고 있다.

II.형이상학 공격

“우리가 이러한 원칙들을 접수하고서 도서관으로 달려갔을 때 어떤 소동을 일으켜야 하는가? 손에 아무 책이나, 예컨대 신에 관한 책이든 강단 형이상학에 관한 책이든, 집어든다면, 이렇게 물으라: 그것은 양이나 수에 관한 어떤 추상적인 추리를 담고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나 존재의 문제에 관한 어떤 실험적인 추리를 담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불에 던져 버려라. 그것은 궤변과 착각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담고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인용문은 데이빗 흄의 «인간 오성의 탐구(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실증주의의 입장을 탁월하게 제시한 진술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경우에, 그들은 현대 논리학의 발견을 덧보태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특히 그들이 믿기에 프레게, 페아노, 럿셀에 의해서 발전되었던 기호논리학이 그들에게 유용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논리”라는 접두사를 붙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일반적인 관점은 흄의 관점과 거의 동일하다. 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의미한 명제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첫째로 논리학과 순수 수학의 명제들과 같은 형식적 명제들은 내가 이제 곧 설명하게 될 의미에서 동어반복적이라고 주장된다. 둘째로 사실적 명제들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검증가능(verifiable)해야 한다는 조건이 요구된다.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제3의 명제들은 없다. 따라서 만일 어떤 문장이 형식적으로 참 또는 거짓인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에서도 성공하지 못하고 또 경험적으로 검사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데에서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명제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 문장은 감정적인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인식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절대적 또는 초월적 존재들에 대한 논의들, 실재에 관한 논의들 또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논의들 등, 철학적 담론들의 매우 많은 부분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여겨졌다. 그러한 발언들은 형이상학적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만일 철학이 진정한 지식의 한 분야를 이루고자 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실증주의자들은 모든 형이상학적인 작업들이 불에 던져져 마땅하다고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소 겉치레의 언사였지만, 그런 작품들이 시적인 가치를 가질 수도 있고 또는 인생에 대한 어떤 재미있거나 관심을 둘만한 태도를 표명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들의 요점인즉슨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진술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지식의 확장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적인 발언들은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공격당한 것이 아니었다. 감정적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는 거의 없다. 그것들은 인식적인 체하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어떤 것을 가장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당하였다. 철학사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은 꽤 자주 나타난다. 나는 흄을 인용하였지만 칸트를 인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오성이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나아갈 때 그것은 모순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독창성은 그들이 알려질 수 있는 것의 본성에 기초하여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주장하지 않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의 본성에 기초하여 그것의 불가능성을 주장했다는 점에 있다. 형이상학자들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형이상학자가 어떤 발언이 유의미한 것이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어겼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이 규칙들을 비트겐시타인이 럿셀로부터 물려받아서 그의 «트락타투스»에서 완전히 명시적으로 밝혔던 하나의 언어관과 연결시켰다. 그 밑에 깔린 가정은 이렇다. 진술들 중에는 참이라면 절대적으로 단순한 사실들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기초적인 진술들이 있다.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언어는 그런 진술들을 표현할 수단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진술들 어느 것도 전적으로 기초적이지는 않지만 좀 더 복합적인 진술들은 여전히 기초적 진술들의 토대에 의존하고 있어야 한다. 비록 그 토대가 감추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복합적인 진술들은 그것들이 어떤 기초 진술들을 긍정하고 어떤 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말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궁극적인 “원자적” 사실들의 참된 또는 거짓된 그림을 줌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것들의 진위가 전적으로 기초 진술들의 진위에 의존하는 식으로 연언과 부정이라는 두 가지 논리적 연산에 의해서 기초 진술들로부터 구성되어져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p와 q가 기초 진술들이라고 하면 “p or q”라는 “분자적” 진술은 “not (not-p and not‑q)”(이것은 p와 q가 둘 다 거짓인 경우에 거짓이며 나머지 세 경우, 즉 p와 q가 둘 다 참인 경우와 p가 참이고 q가 거짓인 경우와 p가 거짓이고 q가 참인 경우에, 참임을 의미한다)와 동치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유한수 n에 대하여 n개의 기초 진술이 주어지면 그것들 사이에 진위를 분배하는 방법은 2n가지가 있게 된다. 기초 진술들로부터 구성될 수 있는 복합 진술들의 의미는 그것들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진리치 분배들을 선택함으로써 결정된다.

대체로 한 진술은 어떤 진리치 분배는 인정하고 어떤 분배는 인정하지 않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에 그것이 다루는 가능한 사태들 중에서 어떤 것은 그 진술을 진리로 만들고 어떤 것을 거짓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가 있으니, 한 진술이 모든 진리치 분배를 인정하는 경우와 한 진술이 그 어떤 진리치 분배에도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그 진술은 참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거짓이다. 비트겐시타인에 따르면 이 두 극단적인 경우가 동어반복(tautology)과 모순(contradic­t­ion)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논리학의 모든 진리들은 동어반복들이다. 그리고 수학이 논리학에로 환원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럿셀과 화이트헤드의 시도가 성공적이라면 수학의 진리들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시타인 자신은 수학의 진술들이 동어반복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수학의 진술들은 동일성들(identities)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전문적인 고려사항을 접어둔다면 이것은 마찬가지 말이다. 요점인즉슨, 그것들은 세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지식에 보탬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의 진술에서 다른 진술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의 함축들을 끌어낼 수 있게 해준다.

동어반복은 극단적으로 겸손하게 말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든 가능한 사태를 인정하기 때문에 사실에 관하여 어떤 주장도 세우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내가 사자들은 육식동물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사자들의 습성에 대하여 참이든 거짓이든 어떤 정보를 얻는다. 또 사자들은 육식동물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사자들은 육식동물이거나 육식동물이 아니라고 내게 말해주는 것은 사자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순은 극단적으로 고약하게 말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가능한 사태들을 부인하는 것 역시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자들은 육식동물이며 동시에 육식동물이 아니라고 듣는다면 나는 사자들의 습성에 관하여 아무 것도, 심지어 거짓인 그 어떤 정보도 배우지 못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동어반복과 모순은 사실적 진술들의 퇴행적인 경우들이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진술들은 사실과 아무 관련도 맺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그것들은 기초 진술들로부터 그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구성되어 나올 수가 없다.

비트겐시타인은 어떤 진술들을 기초 진술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대목에서 형이상학에 접어들게 되는 건지에 대해서 썩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실재를 전체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들, 우주는 영적이라거나 모든 것들은 모든 가능 세계들 중 최선의 세계에서 최선으로 발생한다거나 하는 주장들은 그에게 틀림없이 형이상학적인 진술일 것이다. 그러한 진술들은 세계 내에서 가능한 사태들 간에 어떤 구별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영적인 거라거나 최선으로 발생한 거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사실에 관한 주장이 아닌 것이다. 그것들은 또한 사실적 진술들로부터 동어반복을 구성하듯이 구성되어져 나올 수도 없을 것 같다. 설사 그렇게 구성되어 나온다고 해도 여전히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비트겐시타인 자신의 견해가 어떤 것이든 그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의미 기준을 위한 기초 진술들은 당연히 관찰 보고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뒤에 보게 되겠지만, 이 보고의 성격에 관하여 그들은 곧 의견이 갈라지게 된다. 그것들이 무오류적인가, 그것들이 화자의 사적 감각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공적인 물리적 사건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떤 형태로건 다른 모든 진술들을 경험적으로 검증해주는 초석을 제공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었다. 그리고 비트겐시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그것들만이 진술들에 사실적 내용을 제공하므로 그것들은 진술들의 유의미성을 책임진다. 그리고 이 견해는 한 명제의 의미는 그것의 검증 방법이라는 유명한 슬로건으로 요약되었다.

이 슬로건 배후의 가정은 말해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기초 진술들을 가지고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장 추상적인 과학적 가설들을 포함해서 모든 고차적 진술들은 결국에는 관찰 가능한 사건들의 압축된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유지하기 매우 어려웠다. 이것은 기초 진술들이 주관의 직접 경험의 기록들이라고 간주할 때에 특히 취약하였다. 왜냐하면, 가끔 물리적 대상들에 관한 진술들은 감각 자료들에 대한 진술들로 충실하게 번역될 수 있다고 주장되어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번역은 성취된 적이 없었으며, 실제로 그런 번역이 성취될 수 없다고 믿을만한 좋은 이유들이 있다. 더구나 이러한 기반을 선택하는 것은 유아론(solip­sism)의 문제, 즉 주관의 사적 경험들로부터 타자의 경험과 공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데에 문제를 일으킨다. 실제로 카르납은 그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Der logische Aufbau der Welt, 1928)»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적 개념 장치들을 유아론적 토대 위에, 즉 “기억된 유사성”이라는 단 하나의 무정의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재구성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그의 기획이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였다. 기초 진술들이 물리적 사건들의 기술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이렇게 간주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제로 남지만, 좀 더 편한 입장에 있었다. 적어도 그들은 유아론의 문제나 물리적 대상들을 감각 자료들에로 환원하는 난제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난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아마도 전칭의 법칙 진술의 경우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한 진술의 진리성은 지지 사례들의 축적에 의해서 입증될 수 있지만 그것들로부터 형식적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또 다른 사례가 있어서 그 진술이 논박될 가능성이 언제나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이러한 종류의 진술들은 결정적으로 검증가능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그것들은 하나의 부정적 사례가 그것들을 형식적으로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으로 반증(falsify)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칼 포퍼는 그의 «발견의 논리»에서 사실적 진술에 요구되는 것은 이론 내에서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라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기준의 논리적 우월성과는 별개로 이것이 과학의 실천과 더 잘 부합한다고 주장하였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반례를 찾는 방식으로 그것을 검사하기 때문이다. 반례가 하나 발견되면 그 가설은 무너지거나 수정된다. 그렇지 않은 한 그 가설은 유지된다. 그러나 포퍼의 기준은 나름대로 단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기준은 불특정한 존재 진술을 부정하는 것은 허용해도 그것을 긍정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설인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설인을 발견하면 반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인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 말은 반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설인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 않는다. 어떤 설인이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다는 진술은 반증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 진술은 이러한 가외의 규정이 붙여질 때에만 정당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진술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간주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전선을 너무 가깝게 끌어들이는 셈이 된다.

이런 난점과 다른 몇 가지 난점들 때문에 진술이 결정적으로 검증가능할 것 또는 결정적으로 반증가능할것을 요구하는 것은 둘 다 지나치게 엄격한 의미 기준이라는 견해가 논리실증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대신 그들은 좀 더 약한 기준에 만족하는 편을 택하였는데, 이 약한 기준에 따르면 하나의 진술은 관찰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입증(confirmation)될 수 있거나 반입증(disconfirmation)될 수 있을 것만 요구된다. 그 진술 자체가 기초 진술이 아니라면, 기초 진술들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 진술이나 그 부정이 기초 진술들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필요는 없다. 불행히도 “지지한다”거나 “입증”이라는 개념은 아직 적절하게 정식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약한 형태의 “검증 원리(verification principle)”를 철저하게 정확한 표현으로 담아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결과는 아직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 원리의 사용은 적절한 정식화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앞에서 그 원리를 적용해서 제거하려는 여러 종류의 철학적 진술들 사례를 언급하였지만, 원리의 파괴적인 힘은 두드러지는 형이상학적 진술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비엔나 실증주의자들이 이 원리를 적용하였을 때 철학의 영원한 문젯거리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예컨대, 일원론과 다원론의 문제, 실재론과 관념론의 문제 등도 존재의 제약에 관한 문제나 초월적인 가치의 세계에 관한 문제 못지 않게 가짜 문제라고 여겨졌다. 세계가 하나인가 다수인가 또는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들이 우리의 정신 밖에 존재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결정해줄 수 있는 경험적인 검사가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실재론과 관념론 같은 경합하는 철학적 입장들의 특징은 양자 모두가 모든 현상들, 그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관계없이 모든 현상들과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점이 바로 그 입장들을 공격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실증주의의 반대자들은 재빠르게 잡아낸, 검증 원리에 대한 한 가지 명백한 반론은 그 원리 자체가 검증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 원리를 하나의 경험적 가설로, 즉 사람들이 “의미”라는 말을 실제로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가설로 간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경우에 이 가설은 거짓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발언들이 의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언어사용과 상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원리의 지지자들 역시 이 원리를 그러한 경험적 연구의 결과로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원리가 어떤 지위를 갖는다고 생각한 것인가? 이 원리 자체는 형이상학적인 것 아닌가? 놀랍게도 비트겐시타인은 이런 공격을 받아들였다. «트락타투스» 말미에서 그는 “나의 명제들은 이런 점에서 해명적이다. 나를 이해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그들이 그 말들을 통하여, 그것들 위로, 그것들을 넘어서 올라섰을 때, 그것들이 헛소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다음에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타고 올라서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똑바로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양편을 다 취하려는 헛된 시도다. 어떤 헛소리가 다른 헛소리보다 시사하는 바가 더 많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헛소리가 어떤 논리적인 힘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검증 원리가 정말로 헛소리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진술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 것도 진술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진술하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비엔나 학단은 이 난점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실제로 검증 원리를 하나의 약속, 규약으로 채택하고 있었던 것이 꽤 분명하다. 그들은 의미에 대한 하나의 정의, 경험적으로 정보적이라고 간주되는 진술들이 실제 만족시키는 조건들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상 용법과 부합하는 정의를 제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험적 진술에 대한 그들의 견해도 그런 진술들이 실제로 기능하는 방식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작업은 기술적(descriptive)이다. 오직 이런 두 종류의 진술들만이 참이거나 거짓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진술들만이 유의미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은 점에서 그들의 작업은 규범적(prescriptive)이다.

그러나 이런 규범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껏해야 증명된 것이라고는 형이상학적 진술들은 논리학의 법칙이나 과학의 가설들이나 역사적인 서술이나 또는 지각의 판단이나 또는 “자연” 세계에 대한 다른 상식적 기술들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라는 결론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하물려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어떻게 내릴 수 있는가?

그렇다.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또는, 억지로 그런 결론이 나오게 만들지 않는 한, 그런 결론은 안 나온다. 문제는 형이상학적 진술들과 상식적이거나 과학적인 진술들의 차이가 이런 식으로 선을 긋는 것이 쓸모있을만큼 그렇게 분명하다고 생각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의 결함은 이것이 형이상학적 질문들이 가질 수 있는 관심을 못 보게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장점은 이것이 형이상학자들을 일종의 과학적 대군주로 간주하려는 유혹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형이상학자들이 과학자들과 같은 일을 하되 단지 그것을 더 심오하게 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그는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사실들을 들춰내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된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자가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실도 기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맥타가아트처럼 시간은 비실재라고 말하는 것, 또는 버어클리처럼 물리적 대상들은 신의 정신 속의 관념들이라고 말하는 것, 또는 하이데거처럼 “무가 무화한다”고 말하는 것의 요점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대하여 하나의 일반적인 대답이 있으리라고, 즉 형이상학자들은 늘 같은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먼저 그러한 발언이 나타나게 된 맥락을 들여다보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발언은 그의 장황한 말의 한 토막이지만 그것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가 세계의 존재가 경이로운 일이라는 자신의 주제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 “왜 무가 아니라 뭔가가 존재하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이거야말로 사람들이 철학자들이 할 법한 말이라고 기대하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다. 이 말에는 심오한 분위기가 있다. 문제는 이것이 어떤 대답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비실재라는 맥타가아트의 주장도 액면 그대로 보면 말이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어떤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이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면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답은 맥타가아트의 논증들을 보면 찾을 수 있다. 그는 시간의 경과라는 생각이 당혹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건들이 계기적으로 미래, 현재, 과거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나쁜 무한퇴행을 담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 증명은 부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다. 맥타가아트의 논증에 반대해서 우리의 시간적 표현들의 용법들을 옹호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이 함축하는 모든 것들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버어클리 역시 물리적 대상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알아내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물리적 대상들을 말할 때 우리는 지각됨으로써 곧 존재하게 되는 “감각 성질”들의 무리들을 가리켜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그럴법한 논증에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서 그는 모든 것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영원한 감각기로서 신을 끌어들였다. 그의 논증들에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하여 하는 진술들의 의미와 정당화에 관한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비엔나 실증주의자들은 주로 형식 과학과 자연과학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철학과 과학을 동일시하지는 않았으나, 철학이 과학적 지식의 진전에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형이상학이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형이상학을 공격하였다. 오늘날의 논리적 분석가들은 좀 더 관대하다. 그들도 역시 형이상학에 반대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장되어 있을 경우에만 그렇다. 윤리학의 영역에서도 그들은 철학을 설교와 분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형이상학자들이 가끔 세계를 새롭고 흥미있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형이상학자들은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을 불만스러워할, 그래서 그것들을 수정하자고 제안할 좋은 이유를 갖고 있을 수 있다. 많은 경우에 형이상학자들이 논리적인 오류의 희생자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들도 가르침을 줄 수 있다. 비트겐시타인이 생각했듯이, 만일 철학적 문제들이 우리 언어의 어떤 특징에 의해서 오도되어서 생겨나는 거라면 형이상학자들은 그들의 그 과장에 의해서 철학적 문제들의 해소에 기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III. 언어와 사실

비엔나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을 제거하면서 인식론도 뒤로 접어두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이점에서 그들은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곤경의 첫번째 원천은 기초 진술 개념이었다. 그것들의 성격과 지위 둘 다 논란거리가 되었다.

앞서 말하였듯이, 처음에 지배적인 견해는 이 진술들이 주관의 내성 가능한 또는 감각적인 경험들을 지시한다는 것이었다. 이 견해는 한 진술의 의미를 그것의 검증 방법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채택되었다. 어떤 진술이든 실제로 검증되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어떤 경험을 갖는 것을 통해서 뿐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검증을 어떤 물리적 대상의 지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럿셀과 궁극적으로는 버어클리를 따라서, 물리적 대상들을 지각함이란 감각들을 가짐, 또는 럿셀이 말한대로 하면, 감각 자료를 감각함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물리적 대상들은 공적으로 접근가능하겠지만 감각 자료들은 사적인 거라고 간주되었다.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사고와 심상과 느낌을 말 그대로 공유할 수 없는 것처럼 서로의 감각 자료들을 말 그대로 공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한 기초 진술의 진위는 그 진술이 가리키는 경험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서만 직접 검사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판단은 최고의 주권을 가질 뿐 아니라 대부분의 양호한 경우들에서 그의 판단은 무오류적이라고 주장되었다. 우리는 장래에 가지게 될 경험에 대해서 틀릴 수 있다. 심지어는 과거에 가졌던 경험에 대해서도 틀릴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이 우리를 속일 수 없다고 주장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견해에 따르자면, 내가 지금 실제로 갖고 있는 경험을 그냥 기록하는 일이라면, 오류는 가능하지 않다. 거짓말이라는 게 있으므로 사람들의 진술은 거짓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진리성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틀릴 수 없다. 그것이 거짓이라면 우리는 그게 거짓인 줄 안다. 이 논점은 가끔 이런 종류의 진술들이 “수정불가능(incorrigible)”하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기초 진술들에 대한 이런 생각은 다양한 근거에서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떤 경험적인 진술도 이런 의미에서 수정불가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의 경험의 성격에 대해서 틀릴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을 기록한다고 제시되는 진술들이 다른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오류에 대해 열려 있거나, 아니면 이러한 “경험의 직접 기록들”은 확실성을 얻기 위하여 모든 기술적 내용(descriptive content)들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른 것들로서 진정한 진술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초 진술들이 지시하는 대상들의 사적인 성격에 있었다. 만일 우리는 각각이 어떤 진술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사적인 경험들을 기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지 알기 어렵다. 심지어는 “우리들 각각”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선결문제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 견해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들에 대한 나의 관찰들에 관한, 즉 나 자신의 실제적이거나 가능적인 경험 과정에 관한, 하나의 가설로 해석하지 않는 한 나에게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입장이 내포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 유아론은 단지 방법론적인 것일 뿐이라고 카르납과 다른 이들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의도가 순수하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이론에 대한 반론들을 약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처음에 의사소통의 난점 문제는 경험의 내용과 경험의 구조를 구별함으로써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주장인즉슨 이렇다. 내용은 소통불가능하다. 다른 사람들은 냐의 감각 자료들을 감각하거나 나의 생각이나 느낌들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내가 그것들에 대해서 만든 진술들을 검증할 수 없다. 또한 나도 그들이 자기들의 경험에 대해서 만든 진술들을 검증할 수 없다. 그리고 만일 내가 그것들을 검증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전적으로 상이한 세계에 거주한다. 그러나 검증가능한 것은 이 세계들이 비슷한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그가 통증을 느낀다고 말할 때에 기록하고 있는 느낌이 내가 통증이라고 부르는 느낌과 비슷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나는 그가 어떤 말을 사용해서 가리키는 색깔이 내가 그 말들을 사용해서 가리키는 바 내게 보이는 색깔과 같은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우리가 그 말들을 동일한 경우에 사용한다는 것, 대상들을 색깔에 따라서 분류하는 그의 분류방법이 나의 분류방법과 일치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그가 통증을 느낀다고 말할 때 그는 내가 적절한 징후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보여준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의사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이다. 나의 이웃의 경험이 실제로 어떠한가 하는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알 수 있는 한 그것들은 나의 경험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각각의 세계들의 구조가 그가 내게 주는 정보를 의존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비슷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공통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지 이런 의미일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 사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동일한 캔버스를 갖고 있다. 따라서 과학의 명제들처럼 간주관적인 의미를 갖는 명제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구조의 기술들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견해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은 이 견해가 앞뒤 안맞게도 다른 사람들의 “사적 세계”를 자신의 사적 세계와 동렬에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이하고도 실제로 모순적인 다수 유아론(multiple solipsism)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이 견해가 구별하려고 하는 바, 내용과 구조 사이의 구별은 유지될 수 없는 것같다. 오직 구조만을 지시하는 진술의 예가 무엇이겠는가? 여기에는 록크의 “제1성질”의 흔적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대상들의 “기하학적” 속성들, “모양, 외연, 수, 운동”을 지시하는 진술들은 색깔이나 소리를 지시하는 진술들이나 마찬가지로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만일 내가 나의 이웃이 그의 색 단어들로 내가 의미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다면, 마찬가지 이유에서 나는 그가 공간적인 관계나 수량을 지시하는 말들을 사용할 때에도 나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가 같은 말로 여기는 것이 그에게도 같은지도 알 수 없다.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우리의 행동의 겉보기의 조화 뿐이다. 더구나 기술적인(descriptive) 언어의 테두리 내에서 소통될 수 있는 것과 소통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자가당착적인 것 같다. 이것은 램지가 “철학”이라는, 이 책에도 실려 있는 그의 짧은 논문에서 주목하였던 다음과 같은 모순에 도달한다: “다음의 대화에서 어린아이의 입장: ‘아침이라고 말해봐.’ ‘못해요.’ ‘뭐라고 못하는데?’ ‘아침이라고 말 못해요.’”

이런 난점들 때문에 노이라트는, 그리고 후에는 카르납도, 기초 진술이라는 생각 전체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만일 기초 진술들이 과학의 간주관적 진술들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 자체가 간주관적이어야 한다고 논증하였다. 그것들은 사적인 소통불가능한 경험을 지시해서는 안되고, 공적인 물리적 사건들을 지시해야 한다. 더 일반적으로, 자신의 것이든 다른 어떤 사람의 것이든, 경험이나 또는 “심적” 상태나 과정들을 명시적으로(ostensively) 지시하는 진술들은 모두 “물리적 진술들”과 동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만 그것들은 공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물리주의 논제다. 나는 이 문제를 길게 논하는 카르납의 “물리적 언어에 있어서 심리학”이라는 논문을 이 책에 포함시켰으므로 여기서 이것에 대해서 더 얘기하지 않겠다.

그것들이 “물리적 언어”에 포함된다는 견해는 기초 진술들, 또는 노이라트와 카르납이 부르는 식으로 하면 “프로토콜(protocol)” 진술들로부터 그 특별한 지위를 박탈하였다.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수정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들의 진위는 다른 물리적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의문에 대하여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로, 그것들은 심지어 심판자로서의 지위로 잃어버렸다. 만일 프로토콜 진술들이 과학의 가설들 같은 더 상위의 어떤 진술과 상충한다면 그것들 중 어느 것인가 포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반드시 과학의 가설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 대신 프로토콜 진술을 거부하는 것이 더 편리할 수도 있다.

지식의 토대에 관한 그의 논문(«지식의 토대에 관하여(Über das Fundament der Erkenntnis)») 쉴릭은 이러한 귀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관찰의 보고들, 프로토콜 진술이 바로 이런 거라고 여겨졌었는데, 관찰 보고들을 이렇게 격하시키는 것은 과학의 가설들과 모든 경험적 진술들의 후보들을 사실의 통제 밖에 두는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그러나 노이라트와 카르납은 이런 논증에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미 그들은 진술들을 사실들과 비교한다고 말하는 것이 형이상학적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이러한 비교라는 게 논리적 관계가 아니라면 이 비교는 대체 무엇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하나의 진술이 어떤 논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또 다른 진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정합설을 채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정합론 버전은 헤겔주의적인 관념론자들이 친숙하게 만들었던 버전보다는 반박될 여지가 상당히 적은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내가 검증과 경험이라는 나의 논문에서 제시했던 이유들 때문에 이것은 내게는 전혀 유지될 수 없는 걸로 보인다. 카르납은 타르스키에 의해 의미론이 존중할만한 것임을 확신하게 된 이후에 이 견해를 포기하였다. 의미론이 문장들과 그것들이 나타내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시할 수단을 주는 것이다. 타르스키가 보여주었듯이 그것은 진리대응설을 올바로 재정식화할 수 있게 해준다. 반면에 내가 아는 한 카르납은 물리주의 논제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아직도 그 논제를 지지한다면 그가 틀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가리키는 진술들은 그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관한 진술들과 논리적으로 동치일 수 없다는 것이 이제 내게는 분명해 보인다. 반면에, 내가 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하는 진술들이 나의 신체의 공적으로 관찰가능한 조건들에 관한 진술과 동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램지가 말했던 것처럼 무감각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제가 대처하려고 했던 난점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도 여전히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곤경의 대부분은 두 개의 틀린 가정을 받아들인 데에서 생겨난 거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한 언어가 공적인 것이기 위해서 그 언어가 공적인 대상들을 지시해야 한다는 가정이고, 둘째는 경험적인 진술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경험들을 지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경험적 진술들이 검증가능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지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지시는 어떤 한 사람의 경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검증 원리를 이렇게 “중립화”하려는 시도가 그것 나름의 상당한 난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IV. 윤리학

물리주의 논제가 갖는 매력, 특히 노이라트에게 갖는 매력 중의 하나는 그것이 과학의 통일이라는 원칙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면에서 이것은 원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프로그램이었다. 상이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서로 그리고 철학자들과 보통 때에 하는 것보다 더 긴밀하게 협력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하나의 공통의 언어를 말하고 있다고 또는 그래야 한다고, 즉 과학들의 어휘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따라서 비엔나 학단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견해를 거부하였다. 사회과학자들이 다루는 현상들의 규모와 다양성 때문에 사회과학은 과학적 법칙들을 확립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으나, 이것은 실천 상의 어려움이지 원리 상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사회과학자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물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리주의 논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과학의 다양한 분과들 사이에 목적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사회과학에서도 자연과학에서 못지 않게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가설들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윤리학을 사회과학의 하나라고 꼽았던 쉴릭은 윤리학의 결과들이 도덕적 직관 같은 어떤 특별한 정신 기능을 발휘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윤리학에서 생기는 문제들은 사실의 문제들이다. 즉, 왜 사람들은 그들이 받아들이는 원칙들을 받아들이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욕구는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일반적 입장은 공리주의의 입장과 아주 비슷했다. 아주 비슷한 장점들을 갖고 있었고 결함들도 비슷하였다.

전반적으로 비엔나 학단은 윤리학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윤리학의 진술들이 과학의 영역안으로 들어오려면 그것들은 그가 제안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하리라는 쉴릭의 견해에 반대하지 않았다. 유일한 문제는 윤리학의 진술들이 과학의 영역 안에 속하는가, 그것들이 정말 사실에 관한 진술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카르납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위장한 명령문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이런 제안을 발전시키지 않았으나 그후에 그의 견해는 헤어(R.M. Hare)의 «도덕의 언어(The Language of Morals, 1952)»에 의해서 알맹이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윤리학의 명령법 이론은 주로 영미 철학자들의 저술을 통하여 논리실증주의와 가장 가까운 것으로 연상되게 된 이른바 감정론(Emotive Theory)의 한 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입장의 특징은 윤리적 진술들은 자연의 사실들을 기술하는 게 아니며 소위 비자연적인 가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기술하고(descriptive)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 감정이론을 처음으로 자세히 전개하고 있는 스티븐슨(C.L. Stevenson)의 책 «윤리학과 언어(Ethics and Language, 1944)»에서 윤리적 진술들은 이중의 목적, 즉 화자의 승인이나 불승인을 표현하고 동시에 문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태도를 공유하도록 권유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는 윤리적인 단어들의 설득적(persuasive) 용법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의 견해에 대해서 그의 일반적인 관점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비판이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비판자들이 제시했던 윤리학에 대한 대안적 설명들도 처지는 비슷하였다. 논리실증주의를 말할 때 윤리학의 이론은 체계의 주변부에 속한다고 생각해서 비율상 매우 불공평한 주목을 받기 쉽다. 이것의 한 가지 이유는 아주 잘못되게도 논리실증주의가 도덕에 관한 공격이라고 생각되어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험적인 증거라고는 그림자도 없는데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젋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까지 주장되었다. 사실 이 이론은 일찍이 흄이 제시하였던 바, 규범적 진술들은 기술적 진술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는, 흄이 말했듯이, “해야한다”는 “이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논리학의 건전하고 존중할만한 한 가지 포인트의 귀결들을 탐구하는 것 뿐이었다. 도덕적 판단들이 사실-진술이 아니라는 것이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며, 그런 진술들을 지지하는 논증들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런 논증들은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논증들이 가는 방식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직관주의자들이 감정론자들이 빼앗으려 하였던 도덕 판단의 논리적 판단의 기반들을 발견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스트로슨이 그의 논문 “윤리적 직관주의(Ethical Intuitionism)”에서 보여주듯이 직관주의자들은 도덕 판단들의 어떤 기반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미덕의 수호자인 것처럼 나설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그런 것 뿐이다.

V. 철학적 분석

윤리학의 감정주의 이론에 의해서, 실제로는 논리실증주의 일반에 의해서, 일어난 불만들 중 몇 가지는 사람들이 여전히 철학을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안내자로 간주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철학에 대해서 이러한 기능이 부정될 때, 심지어는 현상의 베일을 뚫고 들어가서 실재의 감추어진 심오함을 탐색할 가능성이 부인될 때, 그들은 철학이 시시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느낀다. 이 오랜 세월동안 존경받아온 프로그램이 헛소리라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램지가 말하듯이, “철학은 뭔가 쓸모가 있어야 하며, 우리는 철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이 수행할 어떤 기능을 남겨놓고 있는가?

비트겐시타인의 «트락타투스»의 관점에서 보면 철학의 기능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처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부정적인 것으로 보였다. 비트겐시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이것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 즉 자연과학의 명제들, 즉 철학과 무관한 어떤 것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 그렇다면 누군가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 싶어할 때에는 언제나 그가 만든 명제들의 어떤 기호들에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하였음을 그에게 보여주라. 이 방법은 그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엄격하게 올바른 유일한 방법이다.” 비트겐시타인 자신은 철학의 의무에 대한 이러한 다소 의기소침한 견해를 엄격하게 지키지 않았다. «철학적 연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명제의 어떤 기호들에 아무 의미도 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증명들을 훨씬 넘는 얘기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철학함이란 진창으로 들어가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거기서 구해내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철학이란 “언어에 의한 우리의 지성의 현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이다. “철학에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파리에게 파리병에서 나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 그렇지만 파리에게는 그 안에 남아 있는 게 차라리 잘 된 일일 것이다. 현혹당하는 것은 비판적 지성이다.

«트락타투스»는 철학적 명제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유의미한 담론의 전체 영역은 한편으로는 형식적 진술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적 진술들에 의해서 점유되었다. 철학이 개입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비트겐시타인이, 그리고 쉴릭도, 철학이란 원칙이 아니고 활동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쉴릭은 철학함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의 재고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명제들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명제들은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럿셀이 «트락타투스»에대한 그의 서문에서 지적하였듯이 비트겐시타인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다, 또는 너무 제한된 정도로만 이것을 허용하는 것 같다. 그는 언어의 구조를 언어 사용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과 대비되는 바, 언어의 구조를 기술하려는 시도는 헛소리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어쩌면 쉴릭에 의해서는 공식적으로 접수되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비엔나 학단은 그것을 무시하였다. 예컨대 카르납은 그의 «세계의 논리적 구조»에서 그가 “구성 체계(Konstitution-System)”라고 부른 것을 제안하면서 공공연하게 언어의 구조를 기술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구성 체계는 하나의 연역적 위계질서 내에서 다양한 유형의 언어적 표현들, 개념들에게 적절한 위치를 할당하는 체계였다. 만일 그가 그의 철학적 진술들의 지위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내 생각에 그는 그것들이 분석적이라고 대답하였을 것 같다. 그는 그것들이 정의와 그 논리적 귀결들로 이루어지므로 형식적 진리의 영역에 속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정이 어떻든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명제들이 유의미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비엔나 학단과 함께 그것들이 철학자가 마땅히 제시하리라고 기대되는, 그런 종류의 진술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철학을 논리학의 영역 내에로 들여오는 카르납의 시도는 그의 책 «언어의 논리적 통사론(Logical Syntax of Language)»에서 더 이루어졌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철학은 과학의 논리학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이것은 철학이 과학의 개념들과 문장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으로 대치되어야 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과학의 논리학이란 과학의 언어의 논리적 통사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의 유일한(the) 언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는 과학의 언어가 유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안적인 언어 체계가 고안될 수도 있으며, 그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문제는 편리성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시타인의 «트락타투스»의 입장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중요한 점이었다. 카르납에 따르면 한 언어는 기호들의 어떤 나열이 그 언어의 적법한 문장으로 간주되는지를 명시하는 형성 규칙(formation-rules)과 문장들이 다른 문장들로부터 타당하게 도출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변형 규칙(transformation-rules)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 언어가 경험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려면 그 언어의 표현들을 관찰가능한 사태들과 대응시키는 규칙, 즉 의미 규칙(meaning-rules)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납은 그의 철학에서 당시의 형식주의적인 시기에는 이것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잘못되게도 말들끼리의 동치 진술들이 의미론적 진술들의 역할 뿐 아니라 명시적(ostensive) 정의의 역할까지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카르납이 그의 유명한 실질적 화법과 형식적 화법 구별을 제시한 것도 바로 이 책이었다. 그는 세 종류의 문장들을 구별한다. “5는 솟수다” 또는 “바빌론은 큰 도시다”와 같은 “대상 문장(object-sentence)”, “5는 사물이 아니라 숫자다” “바빌론은 어제 강의에서 다루어졌다”와 같은 “사이비 대상 문장(pseudo-object sentence)”, 그리고 “5는 사물-단어가 아니라 수-단어다” “‘바빌론’이라는 단어는 어제 강의에서 나왔다”같은 “통사적 문장(syntactical sentence). 사이비 대상 문장은 대상 문장의 가면을 쓴 통사적 문장들이기 때문에 “준 통사적(quasi-syntactical)” 문장이라고도 불린다. 그것들은 실질적 화법으로 말해진 “준-통사적 문장들”이다. 실질적 화법에서 형식적 화법에로 번역함에 의해서 그것들은 동치의 통사적 문장들로 대치된다. 좀 덜 전문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형식적 화법으로 말할 때 우리는 겉으로도 단어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실질적 화법으로 말할 때 우리는 사물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어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별은 물론 대상 문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몇몇 비판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카르납이 실제로 모든 담론이 단어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범주의 존재, 즉 사이비 통사적 문장의 범주를 간과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면서 겉보기에는 단어에 관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이다. 이것을 간과한 결과, 그는 이런 문장들도 마치 통사적 문장들인 것처럼 다루는 오류에 빠지는 성향이 있었다.

그는 대개의 다른 철학자들이 이와 반대의 오류에 빠진다고 꾸짖었다. 그는 철학적 진술들은 통사적 문장들인데, 그것들이 실질적 화법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대상 진술들인 것처럼 다루어져 왔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들었던 예들을 몇 개 보자면, 그는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다”라는 비트겐시타인의 «트락타투스»의 첫 명제는 “과학은 이름의 체계가 아니라 문장의 체계다”라는 것과 동치이며; “이 상황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이 문장은 분석적이다,… 모순이다,… 모순이 아니다”와 동치이다. 또 “신은 자연수를 창조하였고 수학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라는 경구는 “자연수 기호들은 원초(primitive) 기호들이며, 다른 수 표현들은 정의에 의해서 도입된다”라는 것을 말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유일한 원초 자료는 경험들 간의 관계이다”는 “경험 표현들을 항으로 갖는 2항 또는 그 이상의 다항 술어들이 기술적인(descriptive) 원초 기호들이다.” “시간은 양 방향으로 무한하다”는 “모든 양의 또는 음의 실수 표현들이 시간 좌표로 쓰일 수 있다.” 심지어는 결정론의 문제도 자연 법칙의 체계에서 통사적 차이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경합하는 철학 논제들은, 그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면, 언어가 구성되는 방식에 관한 대안적 제안들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것들은 참이거나 거짓이 아니라 단지 더 편리하거나 덜 편리할 뿐이다.

나는 실질적 화법과 형식적 화법의 카르납의 구별이 많은 철학적 진술들이 위장한 언어에 대한 진술들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가장 잘못 생각한 것은 그것들이 통사적이라고 생각한 데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다루는 것은 말들의 형태나 순서가 아니라 그것들의 사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르납의 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은밀하게 통사론에 의미론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표현을 “경험 표현”이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특별한 형태를 가져서가 아니라 어떤 경험을 지시하도록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무엇을 하나의 경험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어느 것도 임의적인 결단에 의해서 해결될 수 없다.

좀 더 최근 저서에서 카르납은 의미론의 합당성을 인정하고, 의미론적 이론을 전개하고 의미론 체계를 세우는 데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결과 그의 철학적 엄격성이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는 점이다. 말들이 사물들을 지시하여 말할 권리를 획득하게 되자, 그는 거의 모든 유형의 단어들이 자신의 특별한 대상들을 지시하도록 허용하게 되었고, 결국은 럿셀이 수를 줄이려고 노력했던 그 바로크적인 세계를 다시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명백한 방종에 대한 그의 옹호는 “경험주의, 의미론, 존재론(Empiricism, Semantics and Ontology)”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 그는 주어진 개념 틀 내에서 발생하는 “내적” 문제와 그 틀 자체의 지위와 정당성을 다루는 “외적” 문제를 구별한다. 그 자신은 늘 주로 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두어 왔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될 언어 체계들을 고안하고 개념들을 정교화하는 것이 철학자로서 그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누구도 이것이 심각하고 정당한 활동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은 외적인 문제들이 어떤 심각한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며 단지 언어 형태의 선택 문제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가정한 데에 있다.

언어적인 틀의 지위에 관한 문제들을 이렇게 무시하는 데에서 카르납은 콰인과 굿맨 같은 미국 철학자들과 갈라진다. 이들은 철학에 대한 체계적 접근에 있어서, 그리고 형식적 기법들을 좋아했던 점에서 카르납을 닮아 있다. 이 철학자들은 그들이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것, 언어의 선택이 우리가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존재한다는 것은 한 변항의 값이라는 것이다”라고 콰인은 말한다. 이것은 럿셀이 세계의 “가구들”이라고 불었던 것의 범위가 그것을 기술하는 데에 필요한 술어들의 범위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콰인과 굿맨은 둘 다 이 가구가 가능한한 검소하기를 바랬다. 그들은 “추상적 실재들을 거부”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논리적 재능을 발휘해서 그런 것들 없이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지 보일 수 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런 실재들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 정신으로 굿맨은 실제적 사물과 대비되는 바 가능한 존재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과 인과적 연결과 우연적 연결을 구별하는 것, 분석적 진술과 종합적 진술을 구별하는 것을 금하였다. “당신은 이러한 조심스러움을 비난하면서 하늘과 땅에는 나의 철학 안에서 꿈꾸어지는 것들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하늘과 땅에 있을 것들보다 내 철학 안에서 꿈꾸어지는 것들이 더 많아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나 콰인의 경우에서 이러한 엄격한 경제성의 요구가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실제로 콰인은 나중에 가서는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는 실용주의적 기반 위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다시 카르납에 편을 든다. 그러나 그의 실용주의는 훨씬 덜 고요한 것이다.

무엇이 있는가의 문제를 접근하는 또 다른 방법이 범주에 대한 관심인데, 이것은 비트겐시타인의 후기 작품에 영향받은 영국 철학자들이 보여준 특징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들은 어떤 유형의 실재를 제거하거나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하려 하기보다 겉보기에 그것들을 지시하는 진술들의 작동에서 유사성과 차이성들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비트겐시타인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였던 한 가지 기법은 그가 언어게임(language game)이라고 불렀던 것을 고안해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언어의 단순화되고 왜곡된 모델들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 더 명료한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경우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조사하고 들여다보는 대신 어떤 것이 성립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우리의 언어가 어떤 물체를 시사하는 자리에 아무 것도 없으면 우리는 거기 귀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 설명을 하는 진술을 버리자는 것이다. 우리가 상정하게 된 심적인 과정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는 매우 많다. 예를 들어서 한 명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스켓치를 그리는 것보다 그것과 연결된 어떤 것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이 더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말들은 라일의 “기계 속의 유령” 신화에 대한 공격을 예감하게 한다. 비트겐시타인이 카르납의 방법을 싫어했던만큼, “‘내적인 과정’은 외적인 기준을 필요로한다”는 그의 경구에는 물리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말들이 일상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최근의 큰 관심이, 물론 무어의 영향도 만만치 않지만, 주로 비트겐시타인이 주로 비트겐시타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무어는 일상 언어 자체에 그리 큰 관심을 두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세계에 대한 “상식적 견해”를 지지하는 데에, 그리고 그것을 예시하는 명제들을 분석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러한 분석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상적 용법들에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 그가 일상 용법에 호소하는 경우는 주로 다른 철학자들을 다루는 무기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의 말들이 말 그대로 이해된다면 그들은 그 말들을 사용해서 명백하게 거짓인 진술을 하고 있는 거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아주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은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만일 그들이 말들을 일상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 내 생각에 “일상언어철학”의 주된 업적은 언어의 “비과학적” 사용을 검토하고 분석한 데에 있었다. 좋은 예가 오스틴의 수행적(performative) 진술에 대한 연구이다. “나는 …를 안다”거나 “나는 …를 약속한다”는 진술은 그저 어떤 사실을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화자가 어떤 식으로 태도를 취하거나 모종의 보장을 제안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접근에서 이러한 커다란 유연성이 어떤 상상력 풍부한 결과들을 낳는가 하는 것은 이 책에 포함된 바이스만 박사의 논문에서 지적되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분석에 대한 최근의 생각들이 철학이란 단지 정의들을 만들어내는 거라는 램지의 생각을 훨씬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철학이 “우리의 사고를 명료화하고 조직화하는 중요한 작업을 전담”한다고 말한 데에서 램지는 옳았다.

VI.

이 논문집을 편찬하면서 나는 논리실증주의의 역사적인 발전과 그것의 관심의 범위와 주요 논쟁점들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나는 지면의 부족으로 포함시키고 싶었던 많은 논문들을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선험적 진술에 대한 실증주의자들의 설명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콰인의 논문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과 카르납의 영향력 있었던 논문 “검사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를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특히 유감스럽다. 비트겐시타인의 어떤 글도 담지 못한 것도 특히 후회된다. 그러나 «트락타투스»와 «철학적 연구»는 유명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둘 다 부분적으로 발췌해서는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책들이다. 그것들은 전체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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