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방법

여타의 활동과 비교해 볼 때, 과학은 매우 인상적인 성공을 보여주었다. 과학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믿음은 그러한 과학의 성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과학은 어떻게 해서 객관적일 수 있는가? 그리고 과학 활동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이에 대한 유력한 답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과학적 방법이다. 과학은 신뢰할만한 나름의 방법에 따라 수행되기 때문에 객관성과 합리성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답변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과학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정말 그것이 과학 활동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가?

선험적 방법

데카르트가 제안한 방법. 부정할 수 없는 명징한 진리(제1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연역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최초의 전제가 참이라면 그 연역적 귀결의 참도 보장된다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전체 추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명징한 제1원리를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 데카르트는 이를 "방법적 회의"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버린다고 해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이로부터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끌어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3가지 자연법칙을 끌어낸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시도는 세 가지 정도의 문제가 있다.

  1. 명징한 제1원리를 얻는 방법의 타당성이 의심된다. 만약 이러한 명징한 진리를 찾는 작업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선험적 방법의 매력은 사라질 것이다. 실제로 데카르트가 제안한 제1원리를 현재까지도 명징한 진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 만약 그러한 명징한 진리를 찾는다 하더라도, 과학의 모든 지식들이 그 출발점으로부터 엄밀하게 연역될 것이라 보장하기 어렵다. 실제로 데카르트가 스스로 제안한 제1원리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자연법칙을 끌어내는 과정은 헛점 투성이이며, 데카르트 본인도 세계의 구체적인 지식(예컨대 입자들의 구체적인 크기, 운동량 등)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적 방법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3. 이러한 선험적 방법에는 우리의 경험이 반영될 여지가 없다. 실제 과학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관찰과 실험이 우리의 과학에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반직관적이다. 만약, 우리의 과학 활동을 반영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경험의 역할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귀납적 방법

귀납적 방법의 주창자들은 과학 활동이 경험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과학 활동은 개인들의 편견 없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또 그런 한에서 합리적이다. 선험적 방법을 거부하고 귀납주의를 채택한 대표적 과학자는 뉴턴이며, 귀납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베이컨이다. 귀납주의자들은 이론적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 잡혀서, 불편부당하게 사물과 사태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들은 자연의 책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고, 이로부터 과학이론을 공정하게 구성하려 노력하였고, 뉴턴은 자신의 체계가 귀납적으로 도출된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사변적으로 흐를 수 있는 데카르트 식의 과학에 대한 저항이며, 상향식 방법론에 대한 천명으로 보인다.

귀납주의는 현상으로부터 가설을 이끌어내는 과정에도 논리가 있으며, 그 과정이 방만해지지 않도록 제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귀납적 방법론은 다음의 세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개별 사실들의 수집
(2) 현상으로부터 귀납적으로 가설을 추론
(3) 법칙으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고 점검.

개별 사실의 수집은 이론적 편견에 사로 잡히지 않고 공정한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아야 함을 말한다. 이렇게 수집된 사실들을 귀납적 추론을 통하여 일반화함으로써 법칙적 진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렇게 도달한 법칙적 진술들로부터 새로운 사실을 예측해내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가설을 한번 더 평가한다. 만일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귀납주의는 다양한 비판에 직면한다. 우선 1단계부터가 만만치 않다. 헴펠은 개별 사실의 수집이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대개의 경우 가설의 안내를 받아서 이루어짐을 보여주었다. 젬멜바이스의 예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사실의 수집이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매우 비효율적이게 될 것임을 지적한다. 비판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현상으로부터 가설을 이끌어내는 절차를 귀납으로 제한한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19세기 이후 이론적 용어를 상정하고 그것에 특성을 부여하는 이론들이 등장했다. 귀납추론은 전제 속에 담겨진 술어만이 결론에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이론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화학혁명이나 광학혁명 통해 그러한 용어들을 활용한 이론들은 성공을 거두게 되고, 귀납주의는 그런 이론의 성공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현대의 과학철학자들은 과학이론을 고안해내는 과정에 귀납추론을 넘어선 과학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개입된다는 견해를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제기 중 하나는 귀납 자체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시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시험 단계에서도 입증과 관련한 많은 문제가 있는데, 이는 귀납적 방법뿐 아니라 가설연역적 방법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므로, 이는 다음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문헌

가설연역적 방법

뉴턴의 성공 이후 주류 방법론으로 자리 잡은 귀납적 방법은 19세기에 들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19세기에는 관찰 사실들을 귀납적으로 일반화하여 가설을 수립하는 것을 넘어, 관찰할 수 없는 이론적 용어를 포함하는 가설들이 제안되고, 화학과 광학 등의 분야에서는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론들이 채택하고 있던 방법론을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귀납적 방법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가설의 방법>을 표방한 인물은 제본스(Jevons)로 알려져 있고, 이를 우리는 가설연역적 방법론이라 부른다.

에이어, 브레이스웨이트, 헴펠과 같은 20세기 가설연역론자들은 과학의 논리와 심리․사회적 탐구를 엄격히 구분한다. 개별과학자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착상해내는 문제는 과학철학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개인 수준의 심리학이나 집단 수준의 사회학을 포함한 역사적인 작업을 통해 규명될 수 있겠지만, 과학철학의 적법한 관심은 이론체계의 내적인 구조, 수학과 논리학의 역할, 귀납 논리의 토대, 이론을 받아들이는 근거나 이유(reason) 등에 국한되었다. 다시 말해, 원인(cause)에 대한 탐구는 경험적인 탐구에 맡기고, 과학철학은 이유(reason)에 대한 탐구, 정당성과 합리성의 문제, 규범적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설이나 이론이 관찰된 자료들로부터 얻어내는 일반적이고 기계적인 절차는 없다고 강조한다. 이론은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탐구는 넓은 의미에서 여전히 귀납적이다. 가설을 받아들일지의 판단은 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을 구분한 라이헨바흐의 구분법을 활용하여 전개되었다. 가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추측과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가설을 평가하는 과정은 논리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설연역적 방법에 따르면, “발견의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가설에 이르는 과정은 논리적 비약이지만, 인과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가설연역적 방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i) 가설들의 제시 (상상력, 추측)
(ii) 가설에서 새로운 예측을 연역해내고, 관찰과 실험을 통해 시험하고 평가

가설연역적 방법의 문제들

가설연역법이 과학적 실천(scientific practice)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Feynman),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한다. 첫 번째 문제는 입증 사례의 문제인데, 헴펠의 까마귀 역설로 알려져 있다. 두 번째는 무차별적 입증의 문제와 무관한 연언의 문제이다. 여기서는 두 번째 문제에 집중해보자. 이론 체계가 계층적인 구조를 갖는다고 하자. 예컨대, 뉴턴의 운동 법칙과 중력 법칙(N)은 케플러의 법칙(K)이나 갈릴레오의 낙하법칙(G)보다 상위에 있다. (N에서 K와 G가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그리고 경험과 직접 맞닿아 있는 부분은 경험적 일반화에 가까운 케플러나 갈릴레오 법칙이다. 즉, 뉴턴의 법칙도 경험적 자료를 통해 시험되기 위해서는 K 혹은 G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K는 자신의 증거들(e1)을 갖고, G도 자신의 증거들(e2)를 갖는다고 하자.

가설연역론자들에 따르면, K가 예측하는 개별적 사실들(e1)은 K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증거(e1)은 G를 위한 간접적인 증거로도 기능한다. 이런 주장을 일반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CC) 증거 e가 가설 h를 입증하고, 가설 g가 가설 h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면, e는 g를 입증한다.
(SC) 증거 e가 가설 g를 입증하고, 가설 g가 가설 h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면, e는 h를 입증한다.

(CC)를 역귀결 조건(converse consequence condition)이라 하고, (SC)를 특수귀결 조건(special consequence condition)이라고 한다. 두 조건은 과학 활동에서 일상적으로 활용되는 주장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두 조건을 결합할 때 나타난다. 역귀결 조건과 특수귀결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면, 어떤(some) 진술을 입증하는 어떠한(any) 진술이라도 모든 진술을 입증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무차별적 입증의 문제”라고 한다. e가 가설 h를 입증하면, (CC)에 의해 h&h'도 입증하는데, 다시 (SC)에 의해 h'도 입증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h'에 임의의 가설을 붙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한 가설을 입증하는 증거는 임의의 가설을 입증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입증이 선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무차별적 입증의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임의의 가설 h’이 증거 e를 논리적으로 도출하는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h의 지위에 무임승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를 피하려면, h가 e를 논리적으로 도출하면서 그 도출과정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경우에만, e가 h를 입증한다고 해야한다. h를 함축하는 상위 가설의 경우에도 e와 입증관계를 맺으려면, h 경우만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직관을 구현하는 한 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다.

(제안1) e가 h를 입증한다. iff
(i) e가 (h&b)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그리고
(ii) e는 b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b는 배경신념들의 집합)

그러나 조건의 h를 h&h'으로 대체하면, e가 h&h'을 입증하는 것을 허용한다. 즉, 무차별적 입증은 막았지만 h'의 무임승차를 허용함으로써 “무관한 연언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즉, e와는 무관한 가설 h'이 h와 동등한 입증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강화된 제안을 제시할 수 있다.

(제안2) e가 h를 입증한다. iff
(i) e가 (h&b)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된다.
(ii) e는 b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iii) e를 도출하는 h의 진부분집합 h*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제안은 무관한 연언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는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강한 조건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h' 없이도 h가 e를 연역적으로 도출한다고 하자. 그러면 e로 인해 h&h'과 h&-h'에 대한 믿음은 증가하고, -h&h'과 -h&-h'에 대한 믿음은 감소할 것이다. 따라서 e가 h&h'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입증의 정도'를 정량적으로 다룰 수 있는 틀이 필요해 보인다.

무차별적 입증의 문제에 대해 질문이 있어서 이곳에 답변을 올려드립니다.

무차별적 입증의 문제는 h를 입증하는 e가 그와 무관한 임의의 h’ 또는 h&h’도 입증하게 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을 활용하는 방법은 h의 자리에 문제가 되는 가설을 대입해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제안의 입증 조건을 만족하는 e와 h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에 h와 무관한 h’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h’은 첫 번째 제안의 입증 조건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h’&b로부터 e가 도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h&h’)은 그 조건을 만족할 수 있습니다. 왜나하면 (h&h’&b)로부터 e가 도출되지만, b로부터는 e가 도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제안에서, e를 도출하는 h의 진부분집합 h*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래와 같은 경우를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h가 h1&h2&h3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h1&h2만으로도 e가 도출된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h3는 e를 도출하는 데 불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 두 번째 제안은 e가 h를 입증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왜냐하면 e를 도출하는 h의 진부분집합 h1&h2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너무 과도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스넬의 법칙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강의 때 다루었던 첫 번째 실험은 스넬의 법칙을 입증한다고 볼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두 번째 제안은 거의 모든 입증을 불가능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0마리의 까마귀가 검다(e)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증거가 "모든 까마귀는 검다”(h)는 가설을 입증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해봅시다. 이때 h로부터 e가 도출되지만, h의 진부분집합인 e도 e를 도출하게 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제안은 e가 h를 입증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너무 과도해 보이죠?

반증주의

포퍼는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특징지워지는 현대과학의 빛나는 성취는 결코 귀납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한다. 데이비드 흄 이래로 제기된 귀납의 문제가 여전히 큰 걸림돌이었고, 증거에 의해 가설이 입증되는 정도를 확률 이론을 통해 해명하려 했던 카르납의 시도도 큰 난관에 부딪혔다. 카르납이 도달한 결론은, 사례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상관없이 보편진술 형태의 법칙적 진술을 지지하는 정도는 0이거나 0에 가깝다는 것이다. 카르납 본인은 이미 관찰된 사례들로부터 다음 번 관찰하게 될 사례들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경험적 지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후퇴하지만, 포퍼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는 귀납의 논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그것 없이도 과학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물론 포퍼가 염두에 두고 있던 과학 활동이란 기본적으로 가설연역적인 활동이다. 새로운 가설이 제시되고, 이것이 예측하는 결과와 실제 관찰/실험을 통한 자료가 맞는지를 검토한다. 잘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그 가설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설이 옳다거나 입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만일 잘 들어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가설을 거부해야 한다. 이 과정은 후건부정이라는 타당한 연역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포퍼가 볼 때, 입증이라는 귀납적 절차가 결코 완결되지 않는 무한한 절차임에 비해서, 반증이라는 연역적 절차는 단 하나의 반증사례를 통해서 일회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제안은 내어 놓는다.

"가능하면 반증가능성이 큰 가설을 제안하고, 그 가설을 지속적으로 반증하려는 시도를 하라."

이것이 포퍼가 그린 <추측과 논박>의 그림이다. 포퍼에게 좋은 이론이란, 반증가능성이 큰 이론이다. 반증가능성은 참/거짓에 중립적인 개념으로, 세계에 대해서 더 정확한 주장을 할수록, 더 광범위한 주장을 할수록 커진다. 이렇게 반증가능성이 큰 과감한 가설을 제안하고, 그것을 엄격한 시험에 붙임으로써 가설을 시험한 후, 살아남은 이론을 “잘 용인된” 이론이라 한다. 반증주의에 따르면, 이론을 사실과 비교함으로써 사실에 반하는 이론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인 행위이다. 만일 반증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설을 유지하려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는 비합리적이게 될 것이다.

포퍼의 반증주의는 다양한 비판에 직면한다. 첫 번째 문제는 반증의 모호성이다. 통상적인 경우 한 가설은 다양한 보조가설들과 함께 관찰 귀결을 예측해낸다. 그래서 예측이 틀렸다고 밝혀지는 경우에도 그 책임이 제안된 가설에 있는지 아니면 보조가설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반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가설 혹은 보조가설”이 틀렸다는 것뿐이다. 두 번째 문제는 기초진술의 확보 문제이다. 반증을 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는 토대가 있어야 하고, 포퍼에게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기초 진술이다.(예, 이 분필은 희다) 그런데 과학적 진술이려면 반증가능해야 한다는 포퍼의 제안에 따르면, 기초 진술조차도 오류의 여지가 있고 반증가능해야 한다. 만일 그 기초 진술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시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는 결국 무한퇴행으로 빠진다. 포퍼의 대응은 과학자들의 사이의 규약에 호소하는 것이다. 기초 진술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존재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약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그러한 규약에 의존하는 반증의 절차와 반증 여부에 대한 판정도 결국은 시간에 의존하게 된다. 게다가, 존재 진술의 경우에는 반증이 불가능해보인다. 이 경우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이 역전된다. 입증은 쉽지만, 반증은 무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존재 진술이 반증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실재론자인 포퍼에게 어려운 숙제를 남겨준다. 세 번째 비판은 합리적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새먼의 주장이다. 합리적 예측이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귀납적인 추론이다. 그런데 귀납 추론을 거부하며 과거의 자료는 미래를 예측하는 적절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만일 포퍼가 용인이라는 개념으로써 합리적 예측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포퍼는 예측에 필요한 귀납 추론을 용인이라는 개념 속에 감추었다고 비판받을 것이다. 네 번째 비판은 포퍼의 방법론이 역사적 사례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과학자들도 단 하나의 반례 때문에 이론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이론을 고수하면서 다양한 보조가설들을 덧붙여 새로운 예측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참고문헌

귀추적 방법

참고문헌

역사적 접근

쿤의 방법론

쿤은 여러 면에서 포퍼와 견해를 같이 한다. 현상으로부터 이론이 유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귀납주의를 반대한다. 발견의 논리는 없고, 과학은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정당화에 대한 쿤의 견해는 포퍼와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역사적 접근방식을 채택한 쿤에게, 반증주의는 역사적 사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떤 가설에 대해서 반증사례는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증주의를 엄격히 적용한다면, 어떤 이론을 계속 유지하려는 과학자의 고집은 비합리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정상과학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변칙사례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것이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 이상 단순한 반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쿤의 견해이다. 따라서 변칙사례가 있다고 해서 이론을 단순히 포기하는 것은 합리적인 행위가 아니고, 반증사례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정상과학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정상과학은 무엇이고, 또 위기는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의 발전 단계에 대한 쿤의 그림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숙한 과학은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이 교대로 나타나면서 발전한다. 정상과학이란 쿤이 통상적인 과학 활동을 개념적으로 포착해낸 것으로,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일군의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과학적 탐구를 말한다. 과학 활동을 분석하는 쿤의 틀 자체가 기존의 논의들과 결별하는데, 첫째 개별 과학자가 아닌 집단으로서의 과학자를 행위자로 간주한다는 것이고, 둘째 과학자들이 이론이 아니라 패러다임을 공유한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상과학의 성격은 (i) 패러다임의 지침 하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수집하고, (ii) 이론과 사실들을 비교하여 일치시키며, (iii) 이론을 정교화하고 적용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쿤의 독특한 생각은 기존 견해와 비교함으로써 잘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기존 견해에서는 이론이나 가설이 사실의 수집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제 어떤 사실이 중요한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패러다임이다. 둘째, 기존 견해에서 이론은 사실을 토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쿤의 견해에 따르면, 사실과 이론을 일치시키는 작업은 이론에 대한 평가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퍼즐 풀이 과정으로서, 이론이 옳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고 과시하는 과정이다. 만일 이때 평가받는 것이 있다면 과학자의 퍼즐 풀이 능력이다. 셋째, 기존 견해에서 이론을 정교화하고 확장하는 과정은 이론을 정당화하는 관심의 연장으로 이해되지만,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이미 수용된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패러다임의 잠재적인 힘을 현실화해서 보여주는 과정에 불과하다.

정상과학 활동을 단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개념이 “퍼즐 풀이 활동”이다. 이 개념은 문제 풀이와 대조될 수 있는데, (i) 문제 풀이 활동에는 답이 없을 수도 있지만, 퍼즐 풀이 활동에는 이미 답이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 있다. (ii) 문제 풀이의 경우 규칙의 성격이 분명치 않은 것에 반해, 퍼즐 풀이의 경우 해답을 얻는데 따라야할 규칙이 있다. 즉, 정상과학 시기동안 과학자들은 이론을 시험하려 들지 않으며, 혁신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이론이 맞는 것으로 전제된 활동이기 때문에 새 이론을 추구할 필요가 없고, 기존 이론을 새롭게 적용하는 것만 가능하다. 그래서 누적적인 발전의 패턴을 보인다. 정상과학 하에서의 과학활동이 이미 맞는 것으로 인정된 이론의 참됨을 확인하는 것뿐이라면, 과학자들은 왜 그토록 헌신적으로 연구활동에 매달리는 것일까? 쿤은 그 대답을 퍼즐 풀이 활동에서 찾는다. 이미 답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풀이가 완성되기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를 풀어낸 과학자는 연구자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게 된다. 그것이 과학자들의 열정을 설명해준다.

쿤은 성숙한 과학이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을 교대로 겪으며 발전한다고 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혁명이 도래하는가? 정상과학 시기에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칙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풀리지 않거나 그 수가 늘어나는 추세라면,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을 의심하고 이탈을 감행하게 된다. 이로써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는다. 위기가 도래하고, 경쟁하는 패러다임이 성립한다면, 과학자들은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에 부딪힌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어떻게 패러다임을 선택할 수 있는가?

패러다임간의 선택은 패러다임 내부의 평가절차를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럴 경우 순환의 문제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은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를 종교적 개종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쿤은 패러다임 선택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가치들”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단순성, 정확성, 일관성, 광범위성, 다산성 등의 가치들은 과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토대이다. 그것은 범-패러다임적인 기초이며 이론 선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방법론적 규칙이 아니라 가치들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모두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은 목록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것의 해석과 상대적인 가중치 부여에서 뜻을 달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하게 되고 이론 선택에서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이 개제된다. 그럼에도 과학 활동의 연속성을 위해서는 그러한 불확실성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모두가 한 배에 타고 다함께 몰락하는 것보다는, 배를 나누어 탐으로써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를 통한 이론 선택은 과학적 합리성에 우리의 시각을 바꾸도록 요구한다. 그것이 개인을 강제할 수 있는 규범적인 규칙은 아니더라고, 공유하는 가치들에 의해 선택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과학자들이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을 선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장점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이 완결되고 인상적으로 합의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쿤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은 자연주의적 오류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이러저러하게 과학 활동을 수행해 왔다는 것으로부터 이러저러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쿤은 자신의 과학사 기술로부터 얻어낸 통찰이, 기술적(descriptive)이면서 동시에 처방적(prescriptive)이라고 말하는데, 과학자들의 특정한 행동방식이 성공적이라면, 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 성공을 위해서는 그런 행동방식을 고수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비판은 이론 선택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 선택을 종교적 개종에 비유한 쿤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지만, 쿤은 가치에 의한 패러다임 선택이 가능하므로 합리적이라고 대응한다. 이는 과학 활동의 자율성에 대한 쿤의 견해와 관련되어 있다. 전통적 방법론자들은 과학자들의 행위가 외부로부터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쿤은 과학자 사회의 내적인 자율성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다.

세 번째 비판은 상대주의에 대한 우려이다. 패러다임들이 서로 공약불가능하고 평가가 순환적이라면, 과학이 발전해왔다는 진보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가? 쿤은 자신이 모든 과학이 동등하다고 주장한 것을 아니라고 항변하며, 이론들의 우열이나 서열은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적어도 진화적인 순서를 가질 수 있고 그 순서는 비가역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리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이다. 이론이 참이라는 것은 그 이론 내에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지, 이론을 떠난 진위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네 번째 비판은 공약불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두 경쟁 패러다임이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다면, 그것들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쿤은 자신이 말한 공약불가능성은 상호 번역불가능성이고 국소적 성격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공약불가능성으로부터 비교불가능성이나 의사소통불가능성이 따라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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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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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상과학 비판

핵심주장

(i) 이론다원론 : 경쟁이론은 많을수록 좋다(비판의 극대화). 한 이론만 볼때 드러나지 않는 문제점들이 경쟁이론의 관점에서는 드러난다.
(ii) 반-규칙(counter-rule)을 제안 : 기존의 규칙들과 일관되지 않을 것을 채택하라.
(iii) 과학적 사실들에 반하는 이론들을 개발하라 : 관찰은 이론에 적재되어 있다. 그리고 알려진 사실을 모두 설명하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과학철학의 자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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