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실재론: 과학은 어떻게 진리를 추적하는가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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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illos, S. (1999). Scientific realism: How science tracks truth. introduction. Routledge.

과학적 실재론: 과학은 어떻게 진리를 추적하는가 (도입)


Stathis Psillos


이한슬 옮김


현대 과학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왔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이 우리의 감각이 보여주는 방식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자와 과정들, 예를 들어, 전자기파, 전자, 양성자, 중성미자와 DNA 분자들이 세계를 채우고 있으며, 관찰가능한 현상들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체 우리는 왜 과학 이론을 참이라고, 또는 거의 참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이론이 상정하는 존재자들이 모두 실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왜 이론이 상정한 보이지 않는 존재자들에 실재성을 부여하지 않은 채, 이론을 관찰가능한 현상의 체계화와 예측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여기면 안되는가? 또는, 관찰할 수 없는 존재자에 대한 이론이 내놓는 진술의 진리값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이론들이 단지 경험적으로 적합할 뿐이라고, 즉 무엇이 되었든 이 이론들이 관찰가능한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리고 오직 그것만을 참이라고 믿으면 안되는가?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대다수의 철학적 논쟁은 앞선 물음들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이 책은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고자 한다. 성숙한,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적인 과학 이론은 거의 참이라고 인정되어야 한다. 나는 늘 과학적 실재론이 직관적으로 설득력있는 철학적 입장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철학에 체계적으로 몸담으면서, 나는 내 직관이 명료화되어야 하고 논증에 의해 더 보강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모두가 나와 같은 직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학적 실재론에 반대하는 몇몇 논증은, 이 논증들이 건전하다면, 실재론의 직관적 설득력을 깎아내릴 만큼 강력해보인다. 따라서 나는 과학적 실재론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옹호가 필요하다는 데 동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쓴 이유와 목표는 과학적 실재론이 자신에게 제기되어온 고도로 체계화된 논증들로부터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보임으로써, 과학적 실재론의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지위를 다시금 주장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 초판 서문 서두의 몇 줄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철학(더 분명히 말해, 형이상학)을 끝없는 논쟁들의 '전장'이라고 했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과학적 실재론에는 수많은 논쟁들이 엮여있다. 한 논쟁은, 과학이 마음 독립적 세계를 기술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여기서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학이 기술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마음 독립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유의미한가? 다른 논쟁은, 과학이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지, 현상의 관찰되지 않은 원인에 대한 진리를 밝혀낼 수 있는지를 다룬다. 세 번째 논쟁은, 과학 이론이 정확히 어떻게 이해되여야 하는지를 다룬다. 과학 이론을 세계의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에 대한 진리를 밝히려는 시도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관찰가능한 현상을 체계화하고 분류하기 위한 복잡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네 번째 논쟁은, 과학의 성공과 과학적 실천의 특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과학 이론의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지를 다룬다. 이와 대조되는 견해는, 과학 이론을 관찰불가능한 세계를 기술하려는 시도로 이해하지만 그러한 이론에 의해 제시된 기술들이 참인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을 유지한다. 이것이 모든 ‘논쟁’을 망라한 목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주의 깊은 독자는 이러한 논쟁이 서로 겹친다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전장'에서 나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이러한 논쟁들이 어떻게 적절히 분석되고 해명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독자들은 나의 희망이 충족될 것인지 충족된다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판단하게 될 것이다. 과학적 실재론은 이러한 논쟁들에서 상처없이 벗어날 수 없다. 실재론은 상대편의 논증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전략이 성공적이라면, 과학적 실재론은 여전히 최선의 입장이다.

과학적 실재론 논쟁의 역사는 깊다. 역사 속에서 철학적 의제의 항목들이 바뀌어 온 것처럼 철학적 입장 또한 진화하고 변화해왔다. 예를 들어,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실재론에 대한 철학적 논증은 언어에 대한 논의를 초점로 했다. 도대체 이론적 논의(discourse)가 의미 있을 수 있는가? 또는, 이론적 용어가 어떤 것을 지시할 수 있는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논증들의 초점은 인식적 문제로 옮겨졌다. 이론은 관찰불가능한 실재에 대한 진리를 밝힐 수 있는가? 또는 우리는 현재 이론을 참 또는 거의 참이라고 믿어야 하는가? 여기서 이러한 질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다시금 드러난다. 그리고 변화한 철학적 입장들이, 기존 입장들이 새로운 자료와 상황에 따라 수정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 책은 20세기에 벌어진 과학적 실재론 논쟁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본다. 그리고 최근 논증들의 철학적 기원을, 물리학의 거대한 혁명이 일어난 20세기 초에 활동한 저명한 과학자 및 철학자들이 옹호한 입장에서 찾을 것이다. 이 책은 현대의 많은 논쟁이, 20세기 초입에 벌어진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앙, 앙리 푸앵카레와 다른 이들이 벌인 논쟁의 연속이자 변형이라는 것을 보일 것이다. 20세기는 원자론이 그 근거를 확보하면서, 과학이 외양(appearance)을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던 시기였다. 또한 실재론의 대안인 경험주의의 발전을 추적할 것이다. 이를 위해 이론적 존재자에 대한 진술이 관찰가능한 존재자에 대한 진술로 완전히 환원될 수 있다는 초기 루돌프 카르납의 시도와 경험주의는 실재론-도구주의 논쟁에 기꺼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한 후기 카르납의 시도, 그리고 허버트 파이글의 ‘경험적 실재론’ 옹호를 따라간다.

하지만 이 책의 주된 초점은 실재론에 대한 최근의 논쟁이다. 따라서 래리 라우든의 비관적 귀납과 증거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으로부터 실재론을 옹호하고, 바스 반 프라센의 유망한 대안인 구성적 경험주의를 비판하는데 책의 많은 부분이 투자될 것이다.

보다 넓은 인식론적 쟁점과 관련하여 이 책은 하나의 의제를 담고 있다. 책은 폭넓은 외재주의적-자연주의적 관점을 전제하면서, 실재론적 동기(cause)가 이러한 관점에서 가장 잘 옹호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나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두 철학자, 데이비드 파피노와 리처드 보이드로부터 이러한 교훈을 얻었다. 실재론을 지지한다는 것은 인간 지식에 대한 자연주의적 접근과 세계에 객관적인 자연종 구조가 있다는 믿음을 포함하는 철학적 묶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실재론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나는 과학적 실재론을 형이상학적/의미론적/인식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세 논제(또는 태도)의 결합으로 간주한다. 각 논제는 과학 이론에 대한 특정한 비실재론적 견해의 배제, 또는 각자의 제안을 표현하도록 의도되었다.

  1. 형이상학적 논제는 세계에는 명확한(definite) 마음-독립적인 자연종 구조가 있다고 주장한다.
  2. 의미론적 논제는 과학 이론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과학 이론을, 이론이 의도한 관찰가능한 영역과 관찰불가능한 영역 모두에 대한에 진리-조건적인 기술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론은 참 또는 거짓이 될 수 있다. 이론적 주장들은 관찰가능한 것들의 움직임에 대한 주장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관찰가능한 것들 사이의 관계를 세우기 위한 유용한 도구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이론에 사용되는 이론적 용어들은 잠정적으로(putative) 사실적(factual) 지시체를 가진다. 따라서 만약 과학 이론이 참이라면, 이론이 상정하는 관찰불가능한 존재자들은 세계에 존재한다.
  3. 인식적 논제는 성숙하고 예측적으로 성공적인 과학 이론을 잘 입증된 것으로 그리고 세계에 대한 근사적 참으로 여긴다. 따라서 이론이 상정한 존재자들은, 최소한 상정된 존재자들과 매우 유사한 존재자들은 정말로 세계에 있다.

첫 번째 논제는 과학적 실재론의 기본적인 철학적 전제다. 이 논제는 과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유형의 모든 반실재론적 해명으로부터 과학적 실재론을 구분하고자 의도되었다. 고전적인 관념론과 현상주의, 마이클 더밋의 보다 현대적인 검증주의, 그 이후 제시된, 인식적 실천과 조건들로부터 허가된 것들로 세계의 내용을 환원하려는 힐러리 퍼트남의 견해. 특히 형이상학적 논제는, 만약 이론이 상정한 관찰불가능한 자연종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면, 그 존재가 인간이 그 대상을 알 수 있는, 검증할 수 있는,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과학 이론 그리고 과학적 이론화 일반은 어떤 구조를 세계에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 이전에 이미 구조화된 마음-독립적인 세계를 밝혀내고 그려낸다. 카르납의 평화적인 입장에 대응한 나의 실재론 옹호는 (3장)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어떤 유효한 옹호든지 형이상학적 논제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 논제는 의미론적 실재론의 핵심으로, 과학적 실재론을 제거적 도구주의 또는 환원적 경험주의(이들은 1장과 2장에서 분석된다)와 구분한다. 간단히 말해, 제거적 도구주의란 과학 이론의 '액면가'는 그 이론이 관찰가능한 세계에 대해 말하는 내용에 의해 완전히 포착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보통 이론적 주장을 진리 조건이 없는, 따라서 어떤 주장적 내용도 없는, 구문론적-수학적 구성물로 생각한다. 나는 제거적 도구주의를 내가 '구문론적 도구주의'라 부르는 견해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나는 제거적 도구주의를 다른 종류의 구문론적 도구주의인 비제거적 도구주의와 구분한다. (비제거적 도구주의는 피에르 뒤앙의 반설명주의 입장과 연관지어질 수 있다) 비제거적 도구주의는 현상 너머에 관찰불가능한 실재가 있다고 전제할 필요도, 그리고 과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위해서 실재를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한편, 환원적 경험주의는 이론적 논의를 관찰가능한 것들과 이들의 실제 (그리고 가능한) 거동에 대한 위장된 진술로 취급한다. 환원적 경험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진리값을 가진다는 것과는 일관적이지만, 그 진리 조건을 환원적으로 이해한다. 진리 조건은 관찰 어휘로 완전히 번역가능하다. 환원적 경험주의가 관찰가능한 존재자를의 존재에 개입하는 한, 그리고 특정한 이론적 진술이 오직 관찰 어휘만 포함된 진술로 완전히 번역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한, 환원적 경험주의는 '이론적' 주장의 진리값을 허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관찰불가능한 존재자의 존재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두 입장과는 다르게, 과학적 실재론은 ‘존재론적으로 확장적’이다. 실재론적으로 이해된 이론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허용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세계는 다양한 관찰불가능한 존재자와 과정들로 가득 차있다. (적어도 차있을 수 있다)

과학적 실재론의 세 번째 논제는, 인식적 낙관주의라 불릴 수 있는데, 과학적 실재론을 불가지론 또는 회의주의 형태의 경험주의와 구분한다. 이 실재론적 논제의 요지는, 과학 이론이 관찰적 참 못지않게 이론적 참도 확보할 수 있고 또 실제로 확보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론적 참'은 과학 이론이 관찰불가능한 존재자와 과정에 대해 말한 참을 의미하며, '관찰적 참'은 이론이 관찰가능한 존재자와 과정에 대해 한 참을 의미한다. 이 논제에는 과학자들이 이론적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확장적-귀추적(ampliative-abductive) 방법이 신뢰할만하다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들은 근사적으로 참인 믿음과 이론을 만들어 낸다. 불가지론적 경험주의자가, 과학이 이론적 참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론적 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오직 우연에 의한 것이다. 그들은 과학이 이론적 참을 달성해왔다고 적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과학적 실재론의 인식적 낙관주의는, 과학이 이론적 참을 달성해왔다고 믿는 것이, 적어도 때때로는 합리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세 번째 실재론 논제는 이론적 주장이 참이라는 (또는 거의 참이라는)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가 주로 과학자가 사용하는 확장적-귀추적 방법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불가지론적 경험주의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소박한 형태는 이론적 주장의 참에 대한 유일하게 합리적인 선택지는 판단유보라고 강조한다. 반 프라센의 접근과 결부될 수 있는 세련된 형태는 불가지론을 취하는 것이 실재론을 취하는 것보다 덜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다음을 반 프라센의 핵심 입장으로 간주한다. 설령 이론적 참을 우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실재론이 합리적인 설득력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 참의 추구, 이론의 참에 대한 믿음에 대한 대안적인 경험주의 과학 상이 있으며, 이러한 상이 과학의 실천에 대한 어떤 손실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반 프라센의 구성적 경험주의는, 과학을 철학적으로 반성함에 있어, 과학의 눈에 띄는 특징들과 그 경험적 성공을 이해하기위해, 과학을 이론적 참을 탐색, 수용하는 활동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 실재론자는 이에 반대하며 과학이, 이론적 참을 목표로 하고, 이론의 참을 수용하는 것과 관련없다고 보는 태도는, 경험주의자들도 인지하고 있을 과학의 몇몇 구체적인 측면에 대해 궁색한 설명만을 내놓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세부 사항들은 9장에서 논의될 것이다.

과학적 실재론의 기본 논제들과 주된 경쟁자에 대한 지형도를 그리기 위해, 몇몇 용어법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사람들은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따라서 내가 이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철학자들은, 특히 미국의 철학자들은 과학적 실재론의 경쟁자라면 어떤 것이든 '반실재론'이라 부른다. 나는 이런 용어법을 따르지 않는다. 이 책의 목적을 위해, 나는 '실재론'으로 '과학적 실재론'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실재론'이라는 용어를 마이클 더밋의 철학적 입장과 이와 연관된 입장을 위해 남겨둔 채, 과학적 실재론의 다른 경쟁적 입장에는 더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내가 수용하고 있는, 참이 비인식적 개념이라는 견해와 실재론을 결부시키는 실재론 논쟁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다. 이러한 이해는 두 가지를 함축한다. 첫째, 주장은 진리 제조자를 가진다. 둘째, 진리 제조자는 궁극적으로 세계가 어떠한지에 달려있다. 참 개념에 대한 비인식적 이해는 이론적 논의가 ‘마음 독립적인’ 세계에 대한 것이라는 직관을 포착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점을 그 동기로 한다. 즉, 세계의 구조와 내용은 과학이 이론들을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식적 표준들과 논리적으로, 개념적으로 독립적이다. 이와 경쟁하는 반실재론적 견해는 참 개념이 그 본질상 인식적으로 제약된다고 간주한다. 어떤 주장의 참은 그 참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과 개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형적인 반실재론적 이해에 따르면, 만약 어떤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없으면, 또는 주장을 참으로 인식할 수 없으면, 그 주장은 참이 될 수 없다. 참은 ‘정당화된 주장가능성’, ‘이상적 정당화’, 또는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세계에 대해 참인 것과 세계에 대해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차이가 없다.

이와 관련된 내용들은 10장에서 설명된다. 내가 지금 강조하려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반실재론자는 더 이상 존재론적 경제성도, 이론적 논의의 관찰적 논의로의 환원 가능성도, 이론적 논의의 제거도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들은 이론적 존재자, 예를 들어 전자가 존재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이러한 동의가 그들을 과학적 실재론자로 만드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적 실재론자는 참 개념에 대한 비인식적 이해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현대 반실재론자들은 이전의 경험주의자들과의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재 주장이 어떤 종류의 검증가능성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공유한다. 그리고 실재론자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분명히 검증이라는 강한 개념은 ‘정당화된 주장가능성’과 같은 보다 약한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어떤 존재자의 실재성이나 존재에 대한 주장을 어떤 인식적/개념적 조건으로 대체될 수 있는 축약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요점은 현대 반실재론자에게도 남아있다. 퍼트남은 존재 주장을 다음과 같이 대체하는 것을 선호한다.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적으로) 합리적으로 수용할 만하다.’ 반대로 더밋은 존재 주장을 정당화된 주장가능성과 관련 짓는다. 그러나 과학적 실재론자는 세계의 내용이 인간이 (심지어 이상적인 관찰자의) 인식적으로 접근가능한 것을 원리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전형적으로 주장하므로, 현대 반실재론자들 중 누구도 과학적 실재론자는 아니다.

과학적 실재론에 결부된 인식적 낙관주의를 옹호하는 핵심 논증은 다음과 같은 퍼트남의 표어에 기반하기 때문에 기적 불가 논증(no miracle argument)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과학철학이다.' 현대의 실재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아이디어를 자신의 실재론 옹호의 기반으로 둔다. 이론이 현상 너머에서 작동한다고 상정하는 존재자들, 과정들, 인과적 메커니즘들을 우리가 실재한다고 수용하지 않는다면, 과학의 놀라운 예측적, 설명적 성공은 해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실재론자들은 과학 이론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명들이 과학의 성공을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고 지적함으로써 도구주의를 기각한다. 만약 이론이 그저 ‘블랙 박스’에 불과하다면, 이론의 유일한 덕목은 관찰가능한 현상에 대한 가장 경제적인 분류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이, 프랑스 철학자이자 과학자 피에르 뒤앙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예언가’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어떤 이유도 없다. 이에 대해 ‘블랙 박스’가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즉, 모든 형상을 구제함) 말함으로써 응수한다고 해서 도구주의에 어떤 유의미한 개선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 이론이 현상을 구제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현상을 구제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명이 필요한 것을 단지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가능한 한 가지 비판은, 경험적 성공이 얻기 너무 쉽다고 지적한다. 그저 이론에 올바른 관찰 결과들을 ‘적어 넣기’만하면 된다. 그러면 이론은 그 결과들을 예측하는데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실재론 논증은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 자신을 함축하는 이론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를 지지할 수 있는 오직 그러한 종류의 예측, 즉 참신한 현상의 예측이 있다. 왜 이론이 참신한 현상의 존재를 예측할 수 있는가에 대한, 유일하지는 않을지라도, 최선의 설명은, 현상을 야기한다고 상정된 이론적 메커니즘이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신한’ 예측은 때때로 ‘시간적으로 참신한’ 예측, 오직 이론이 그 존재를 제안한 후에 밝혀진 현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론은 이미 알려진 현상을 설명하는 능력을 통해서도 지지받을 수 있으므로, ‘시간적 참신성’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따라서 실재론자는 ‘시간적 견해’을 넘어서는 ‘참신성’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존 워럴과 존 어만을 따라, 5장에서는 예측에 대한 ‘사용 참신성’ 견해를 옹호한다. 이미 알려진 현상에 대한 예측은, 어떤 이론의 경우 그 현상에 관한 정보가 이론 구성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용-참신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성공에 대한 실재론적 설명은 더 많은, 아마도 더 근본적인 철학적 도전에 직면한다. 첫 번째 도전은, 실재론자의 핵심 논증인 '기적 불가 논증'이 악순환과 논점 선취(question-begging)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기적 불가 논증이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또는 귀추)의 합리성과 신뢰성을 옹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바로 이 논증 자체가 자신이 옹호하려 시도하는 추론 규칙의 사례이기 때문에 제기된다. 두 번째 도전은 이른바 과학사로부터의 논증이다. 과학사는 현상에 대한 실패한 ‘최선의 이론적 설명들’의 무덤이라고 주장되고는 한다. 그러므로 과학사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최선의 설명들이 근사적 참이라는 실재론자의 낙관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신뢰도를 떨어트린다. 이것이 ‘비관적 귀납’ 논증의 핵심이다. 세 번째 도전은, 하나 이상의 이론이 정확히 동일한 내용의 증거를 함축할 수 있으며, 실제로 종종 그러하다는 관찰로부터 제기된다. 따라서 증거는 이론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증거가 합리적 이론 선택의 지침이 될 수 없다고 주장된다. 같은 증거를 함축하는 둘 이상의 이론 사이에서 어떤 이론을 선택할지 직면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떤 이론이 참인지의 판단을 유보하고 우리의 선택을 실용적 기반에 두는 것이다.

이러한 도전들은 모두 4장-8장에서 상세하게 논의된다. 나의 논의가 성공적이라면, 실재론에 반대하는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당한 인식적 낙관주의를 취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같은 관찰적 귀결을 함축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 실재론은 강력한 역사적 도전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과거의 성숙한, 그리고 진정으로 성공적인 이론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이 이론들이 단순히 평범하게 틀려서 버려진 것이 아니며, 경험적으로 지지받고 성공에 기여한 이론적 부분들이 후속 이론들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과학의 이론 변동에는 매우 놀라운 정도의 실질적인 이론적 연속성이 있다. 실재론자는 새로운 이론이 선행 이론의 많은 이론적 요소들을, 특히 선행 이론의 경험적 성공을 이끈 요소들을 포함할 것이란 사실을 자신의 인식적 낙관주의에 대한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래도 실재론은 상대이 논증을 통해 배움으로써 강해졌다. 그렇다면, 과학이 완전한 진리, 다른 것도 아닌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이 과학 이론이 관찰불가능한 세계의 구조에 대한 어떤 중요한 진리, 또는 진리 근처를 포착해오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 변동 내의 실질적 연속성은 오히려 이론적 원리들의 안정적인 연결망과 설명적 가설들이 혁명적인 변화에도 살아남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진화하는 과학적 상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가 이미 이어질 장들의 내용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목차를 차례로 간단히 소개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1장은 환원적 경험주의의 실패를 설명하고 의미론적 실재론을 옹호한다. 2장은 제거적 도구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실재론-도구주의 논쟁 사이에 중도적 기반을 세우려한 뒤앙의 시도를 상세하게 논의한다. 3장은 이론에 대한 램지-문장 접근에 대한 후기 카르납의 재발견과 이를 기반으로 실재론-도구주의 논쟁에 중도적 기반을 세우려한 그의 시도를 체계적으로 살펴본다. 4장은 과학적 실재론을 지지하는 ‘기적 불가 논증’을 명료화하고 설명한 후, 악순환 비판으로부터 옹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옹호를 철저한 외재주의적-자연주의적 인식론적 관점의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5장은 비관적 귀납에 집중하여 실재론자가 이 논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 분할통치전략을 제시한다. 6장은 비관적 귀납에 대한 실재론자의 옹호를 사례를 통해 강화한다. 그 특징상 거짓이라 주장되는 성숙하고 진정으로 성공적이었던 두 이론, 열에 대한 칼로릭 이론과 19세기 광학이 사례로 제시된다. 7장은 구조적 실재론을 옹호함으로써 ‘기적 불가 논증’과 ‘비관적 귀납‘을 화해시키고자 한 워럴의 시도를 살펴본다. 구조적 실재론은 형식적-수학적 수준에서는 이론 변동 사이에 의미있는 연속성이 있다는 논제이며, 워럴은 푸앵카레를 따라 이 연속성이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이론은 세계의 구조에 ‘달라붙어’있다는 것은 암시한다고 간주한다. 8장은 이론의 증거 미결정성 논증에 주목하고 이 논증이 과학에 합리적 이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실패한다고 논증한다. 또한 규범적 자연주의를 옹호하고자 한 래리 라우든의 최근 시도와, 참은 과학의 인식적 목표로 간주될 수 없는 ‘유토피아적 목표’라는 그의 논증을 논의한다. 라우든에 반대하여, 참은 기본적인 인식적 덕목이며, 본질적으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논증한다. 9장은 소박한 불가지론적 경험주의와 반 프라센의 세련된 대안을 고려한 후, 구성적 경험주의가 실재론만큼 과학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는데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10장은 아서 파인의 ‘자연스러운 존재론적 태도’를 상세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해, ‘존재자 실재론은’ 불안전한 철학적 중재자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으로 마친다. 그 중간에 실질적 ‘대응론적’ 참 이론을 옹호한다. 11장은 ‘진리 근접성’ 개념을 살펴보고, 개념적 명료화의 요구와 식화의 요구로부터 피해갈 수 있는 ‘직관적 접근’을 제시한다. 12장은 이론적 용어를 위한 혼합 지시 이론을 개괄한다. 나는 데이빗 루이스를 따라 이 이론을 ‘인과적-기술적’ 이론이라 부른다.

언제나처럼 독자들은 이 책의 포부가 현실적인지 평가할 것이다. 내 입장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풍부하고 중요한 논증, 예리한 비판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실재론 반대에 대한 이 책의 논조가 비판적이고, 아마도 때때로 격정적이라 하더라도, 나는 과학적 실재론의 반대자들로부터, 특히 반 프라센과 라우든으로부터 실재론 옹옹호자들부터 배운 것만큼 많이 배웠다. 만약 이 책이 실재론 논쟁에 도움이 된다면, 이 책이 가능한 많은 전선에서 도전들에 응답함으로써 실재론을 옹호하고, 경쟁하는 견해의 가장 강력한 논증들에 대해 설득력있는 실재론 옹호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본문에 인용된 일차 사료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필요하겠다. 나는 가능한 한, 주로 18세기 그리고 19세기 과학자들의 작업의 원본 출판 년도를 제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페이지 숫자는 언제나 최신 개정판이나 논의되는 판본의 페이지를 따랐다. 독자들은 페이지 숫자가 참조하는 판본이 몇 년도 판인지 참고문헌 목록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