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새로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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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laist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3월 10일 (목) 13:4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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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버킷, "관광객의 새로운 이름", 「윤리적 관광: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 (이음, 2009). 원문 : Dea Birkett, "New Branding of Tourist", in Ethical Tourism: Who Benefits? (Institute of Ideas, 2002).

번역

관광객의 새로운 이름


디 버킷(Dea Birkett) 지음

정동욱 옮김


언젠가 관광객은 사라질 것이다. ‘모험가’, (자원 단체 그린포스(Greenforce)와 함께 하는) ‘현지 조사원’, (여행사 익스플로어월드와이드(Explore Worldwide)의 고객인) ‘탐험가’, (환경단체 지구감시연대(Earthwatch) 또는 사기업 i-to-i와 함께 하는) ‘자원 활동가’는 살아남을 것이다. 물론 ‘여행가’(앱솔루트 아프리카(Absolute Africa)의 중저가 모험 캠핑 사파리 브로셔 2000-1을 보면 “앱솔루트 아프리카는 관광객보다는 여행가를 모집합니다”라고 적혀 있다)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관광객’이라는 단어는 사라질 것이다. 순전히 놀기 위해서만 조용히 외국으로 떠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그것은 몰래 해야 할,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될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그들 중 하나’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불법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이미 일각에서는 세계의 일부 지역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투어리즘컨선(Tourism Concern)을 비롯한 많은 단체에서는 미얀마 관광 보이콧을 주장한다. 영국 미얀마 캠페인(Burma Campaign UK)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전면 보이콧 주장이 실패할 경우에는 영국 여권 소지자들의 버마 여행을 금지시킬 것을 영국 정부에 요구할 계획이다. 미국 여권 소지자가 쿠바를 여행하면 기소당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보이콧을 주장하는 그룹들 사이에서조차 금지 지역에 대한 합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 목록도 계속 바뀌고 있다. 2000년, 여행작가조합(Travel Writers Guild)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개입을 이유로 회원들에게 발리에 대한 판촉용 취재여행(press trip) 청탁이나 원고 청탁을 받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얀마 보이콧을 주장하는) 투어리즘컨선은 최근의 회보 『투어리즘 인 포커스』(Tourism In Focus) 2001/2년 겨울호에 ‘관광객에게 맡기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는데, ‘환경주의자이자 발리 관광지의 약초상’이라는 사람이 쓴 이 기사에서는 2001년 9월 11일부터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의 관광객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

발리와 미얀마는 특정 지역에 대한 관광을 금지하자는 흐름의 극단적인 사례일 뿐이다. 지금도 새로운 나라들이 가지 말아야 할 지역 목록에 추가되고 있다. 투어리즘컨선은 관광 때문에 피해를 입은 나라로 중국, 보츠와나, 벨리즈, 잔지바르, 동아프리카, 페루, 태국을 지목한다. 그곳에서 관광객은 말썽을 일으킬 뿐이다. 관광객은 자연 환경을 파괴할 뿐이다. 관광객은 현지 문화를 거세할 뿐이다. 관광객은 돈 빼고는 갖다 주는 것이 없는 이들이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멈춰 세워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관광의 새로운 국면

40년 전만 해도, 관광은 문제될 것이 없는 좋은 것으로 장려되었다. 패키지 휴가와 전세 비행기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관광은 대중적인 놀거리가 되었다. 유엔은 1967년을 국제 관광의 해로 선언했다. 관광이 “모든 사람과 모든 정부로부터 찬사와 격려를 받을 만한 매우 바람직한 인간의 기본 활동”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이 되었다. 1980년대 말에는 2천만 명에 달하는 영국 국민이 해외로 휴가를 떠났다.

이렇게 덩치 큰, 그리고 계속 그 덩치가 커져가는 무리를 없애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매해 ‘관광객 입국 횟수’는 7억이 넘는다. 세계관광기구(World Tourism Organization)는 2020년이 되면 15억 6천만 명의 관광객이 항시적으로 동시에 여행을 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처럼 관광 산업에 피해만을 줄 것 같은 사건조차도 이러한 증가 추세에 장기적인 충격은 주지 못했다. 그 사건으로 관광객이 영향을 받은 것은 어디로 여행을 갈 것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관광지로 인식되고 있는 반면, 미국과의 교역과 미국 항공에 의존하는 카리브 해는 급격한 관광객 감소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금방 달라질 수도 있다. 이동의 양상이 바뀔 뿐, 전체적인 수는 바뀌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관광기구는 연 성장률을 5% 정도로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억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에 가지 못하도록 강제로 막겠다는 포부는 무지막지한 일이다. 사실 너무나 무지막지해서 불가능에 가깝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무엇인가를 하지 못하도록 당신이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일이 세계의 번영에 지나친 피해를 입히는 일이라서 진짜 악의적이고 정말 이기적이며 완전히 무책임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그것을 해볼까 고민조차도 하지 않을 그런 일이라는 것을 당신이 설득력 있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터무니없는 일이다. 관광 때문에 이익이 증가하든 또는 그렇지 않든 간에, 뭐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피해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중립적일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그것이 대단히 좋은 일의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관광객은 전면전보다는 미묘한 방법으로 공격을 받는다. 임시로 콘사이니아(Consignia)로 이름을 바꾸었던 체신청처럼, 예전의 못마땅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관광객은 새로운 이름으로 단장 중이다. ‘관광객’이라는 말은 휴가 광고지를 비롯해 휴가라는 단어가 붙어 있던 모든 곳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그 결과 관광객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모험가, 현지 조사원, 탐험가, 자원 활동가, 여행가가 점점 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뭔가 다르다고, 즉 관광객이 하던 것과는 뭔가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거의 똑같은 일을 하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관광객에 대한 이러한 새 이름 짓기에는 끝이 없다. 관광객을 둘러싸는 것이면 무엇에든 새 이름의 붓질이 더해진다. (체신청의 실수는 그 구성 요소들의 이름은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자기 이름만 통째로 바꾸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체부는 이제 체신청이 아닌 콘사이니아에서 일하지만, 그 ‘우체부’는 게임의 비밀을 누설한다. 일관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지우기 위해, 콘사이니아는 자기네 일꾼들의 이름도 바꾸었어야 했다.) 즉 관광객의 이름이 바뀌면, 곧이어 ‘휴가’도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모험가, 현지 조사원, 탐험가, 자원 활동가, 여행가는 휴가를 가지 않는다. 휴가란 1년에 2주 정도 일상에서 벗어나 그저 놀고만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다. 비-관광객(이제부터는 그들을 이렇게 부르겠다)은 ‘문화적 체험’, ‘탐험’(“이것은 탐험이지 휴가가 아니다!”라고 한 산호초 보호탐험 비행가는 주장한다), ‘프로젝트’, ‘작은 모험’, 가장 명시적으로는 ‘미션’(산호초 보호 자원 활동가의 미션은 생계유지를 돕고 가난을 덜어주는 것이다)이라 불리는 것들을 수행하러 간다.

새로운 전도사?

미션이란 말은 정말 꼭 들어맞는 말이다. 이 새로운 이름은 여행에 대한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접근을 제시하는 것처럼 간주되지만, 사실은 빅토리아 시대의 경험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흥미롭게도, 비-관광 문헌에서 흔히 발견되는 다른 말로 ‘발견’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 역시 빅토리아 시대 여행가들의 언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19세기 탐험가와는 달리 비-관광객은 더 이상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발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인들과 아시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행가들처럼, 현대의 비-관광객은 자신들의 모험의 주된 동기는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탐험가들은 전도사였으며, 많은 전도사들은 탐험가였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을 들 수 있다). 대중 관광객은 반윤리적이기 때문에 방문하는 지역과 으르렁대는 관계인 반면, 비-관광객의 정신은 그들이 다니는 지역의 필요와 천부적으로 잘 어울린다. 지구감시연대는 그들이 “당신과 환경의 삶을 바꾸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면서 “세계를 체험하고 세상에 미래를 선물하자”고 주장한다. 여행사 에코-리조트(Eco-resorts)는 “함께,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여행 한 번”을 외친다. 이들 현대의 전도사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에콰도르에서 보낼 2주를 위해 1,500파운드짜리 수표를 끊으면서도 그것이 그저 놀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관광을 의미 있고 자기희생적인 여행으로 재포장하는 일은 관광에 가해진 구속을 풀어준다. 이는 통상적인 관광객에게는 윤리적으로 금지될 만한 모든 종류의 지역에 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즉, 비-관광객은 정치적으로, 환경적으로, 문화적으로 취약하거나 민감한 지역을 ‘미션’을 가장하여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구감시연대의 ‘유카탄(Yucatan) 반도의 선인장과 난초’라는 생물다양성 프로그램은 자원 활동가 지망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유카탄 반도의 건조한 북부 해안에 서식하는 희귀한 가시 식물군은 멕시코에서도 가장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생태계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이는 … 가축 목장과 코코넛 농장을 짓느라, 또는 관광 리조트를 마구잡이로 개발하느라, 해안사구의 식물들이 모두 불태워지거나 제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생태계가 붕괴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당신은 … 이러한 잘못된 흐름을 되돌리는 데 보탬이 되는 …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강조는 논자).

다음과 같은 말도 들려온다.

[그린포스의 ‘아마존 탐험’은] 세계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다양하지만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합니다. 매년 2백만 헥타르의 비율로 사라져가는 이 아마존 우림이 지구 생태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페루 남동부에서 진행되는 우리 프로젝트에서는 우림을 보존하고 우림의 무한한 비밀을 한층 벗겨내기 위한 활동을 합니다 …

사실, 더욱 큰 위험에 처한 지역일수록 비-관광객에게는 더욱 더 그곳에 가야 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그곳을 구하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역설적으로, 이들 비-관광객은 많은 경우에 관광객에게라면 금지되었을 장소에 가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비-관광은 배타성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여행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여행을 막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대중 관광객들은 정의상 이 새로운 종류의 비-관광에서 자동적으로 배제되며 패키지 관광객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배제는 특히나 자기기만적이다. 사파리든, 연구 프로그램이든, 문화 교류든 간에 이 새로운 비-관광 여행의 거의 대부분은 패키지로 예약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거기에 도착해서 할 일의 상당수는 거의 완전히 정해져 있으며, 이는 그 어떤 대규모 패키지 여행사가 감행할 수 있는 관광 계획보다도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당신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 ― 즉, 휴가 가기 ― 을 하지 않는 체하는 것이 바로 비-관광객의 핵심 전략이다. 경험의 모든 측면들은 포장되어야 한다. 그 결과 광택나는 휴가 브로셔들, 그러니까 주로 각 호텔의 전면 사진들로 채워져 있으면서 그 하단에는 항공편과 방 가격이 꼭 적혀 있는 그런 진지한 정보지들이 사라진다. 대신에 생태 혹은 문화적 문제를 다루는 잡지와 무척이나 흡사한 출판물을 통해 탐험, 프로젝트, 모험에 대한 광고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들이 휴가를 광고하고 있다는 점이 당장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그 가격은 보통 잘 숨겨져 있다. 그 돈이 어디로 가든 그리고 그 돈이 어떻게 분배되든 간에 이것이 본질적으로는 상업적 거래라고 하는 점을 인정하기가 꺼려지는 모양이다. 좋은 일을 하는데 돈을 써야 한다는 것에는 꺼림칙한 무엇인가가 있는 법이다. 내가 ‘디너 데이팅’, 즉 주선자 역할을 하는 여자와 함께 작은 그룹을 지어 저녁 파티를 즐기는 일종의 데이트 대행업에 관한 신문 기사를 쓸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그곳에 모인 손님들 사이에서는 일시적인 대량의 기만행위가 벌어졌다. 그들 전원은 자신이 짝을 찾으러 75파운드짜리 입장권을 사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저녁 파티에 온 것처럼 행세했다. 한 손님은 나에게 그 데이트 대행 주선자인 힐리를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그녀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잡지 『타임 아웃』(Time Out)에 그녀가 낸 싱글들을 위한 디너 데이팅 대행 광고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친구의 친구’라며 나는 우물쭈물 말했고, 자기기만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긴장을 풀었다.

비-관광 산업이 배포하는 다양한 소책자, 프로그램, 브로셔들은 자선단체가 주최하는 트레킹이나 자전거 마라톤과 같은 기금 마련 행사의 광고를 모범으로 삼고 있다(전부는 아니지만, 사실 비-관광 체험을 제공하는 몇몇 회사들은 ‘비영리’ 기관으로 설립되어 있다). 미션 활동과 휴가 여행 사이의 혼동은 여기서 완성된다. 2002년 영국 적십자의 에티오피아 트레킹 브로셔는 비-관광 체험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데, 아마 그렇게 봐야 마땅할 것이다. 잡지 『글로벌 어드벤처』(Global Adventure)는 기금 마련 행사(예컨대, 장애 생명 재단의 케냐 산행이나 결장암 재단의 베트남 트레킹)와 상업적 휴가 여행(엑소더스 여행[Exodus Travel]의 ‘태국 인도 중국 탐험대’와 컨티키 휴가[Contiki Holiday]의 ‘4륜구동 오지 모험’)을 뒤섞어서 매년 ‘최고의 모험 99선 안내’를 펴낸다.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구감시연대는 사실 자선단체이다. 환경보호 자선단체인 BTCV[British Trust for Conservation Volunteers]는 현재 "휴가를 떠나라. 그리고 세계를 구하라"는 기치 아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비-관광의 모순된 이데올로기

비-관광이 자신의 배타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이용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간단한 방법은 참여자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패키지는 작은 그룹으로 꾸려지며, 12명을 넘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모든 비-관광객 브로셔에서는 탐험, 사파리, 또는 프로젝트의 규모가 엄격히 제한될 것을 약속한다. 이는 그곳의 환경과 문화에 주는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12명의 인원이라면 버스를 가득 채운 단체 여행객 전체가 줄 피해는 입히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물과 같은 자원이 제한되어 있는 곳의 경우, 한 명이라도 더해지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불필요한 부담을 주게 되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또 문화적 접촉이 위험하다고 한다면, 몇 번이건 간에 그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1명이 가서 아마존 인디언에게 콜라 캔을 건넬 것 같다면, 이는 2명이든 20명이든 200명이든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쁜 영향을 주는 일을 조금 적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저 나쁜 영향을 조금 적게 줄 뿐이다. 비-관광객은 대중 관광객보다 인간과 자연 환경에 피해를 덜 준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의 논거에 따르면 그들은 미션을 수행하며 좋은 일을 해야만 한다. 비-관광객은 높은 도덕 수준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상당한 신경을 쓴다. 연상 작용에 의해 (명예가) 더럽혀질 것을 걱정하여, 호텔처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관광객 시설은 기피한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비-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비-관광객은 개발도상국을 주된 목적지로 삼는다. 그와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비-관광 산업에서는 환경오염이라는 이유로 항공 여행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에콰도르나 감비아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천막, 오두막, ‘현지 스타일의 집’(유르트[몽골식 이동주택], 초가집 등) 또는 전형적인 예로 ‘전통 말레이식 오두막’에 머물기를 선호한다. (‘전통’이란 복잡하지 않고 쉽게 파악 가능하며 원래부터 긍정적인 특성으로 전제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현지 문화’라 부르는 무엇인가를 보존하는 데 어떻게든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현지 문화’가비-관광객에게는 매우 중요한 반면, 대중 관광객은 그것을 외면하는 동시에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현지 문화라는 것은 지역에 따라 달리 적용되곤 한다. 이 말은 거의 항상 개발도상국의 문화에만 적용될 뿐 선진국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의 경우에는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장려한다. 케냐의 생태 리조트 ‘우먼 인 퍼스펙티브 사파리(Women in Perspective Safari)’의 참가자들은 니에리(Nyeri) 마을의 여성 자조 그룹을 만나도록 되어 있다. i-to-i ‘프로젝트’에는 인도에서 ‘다양한 미디어를 이용해 여성 및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풀뿌리 조직’을 지원하는 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쿠미카 탐험(Kumika Expeditions)은 ‘현지 생활 방식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모험적인 여행가들’의 요구를 들어준다. 익스플로어월드와이드는 자신들이 제공하는 휴가를 “소규모 그룹을 꾸려 세계에서 가장 특이한 200개 지역의 사람과 문화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발견의 대서사시”로 묘사한다. 태국 북부 지방의 고산족, 필리핀의 ‘문신을 새기는 이푸구아족(tattoed Ifugua)’, 모로코의 ‘고대 베르베르족(ancient Berbers)’을 만나는 여행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선진국을 여행할 경우, ‘현지인’은 그리 관심을 끌지 못하며 우리는 그들과의 만남을 삼가라는 주의를 받는다. 뉴욕에 방문하면서, 브롱크스의 사회주택 프로젝트를 이용하라고 요청받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문화적 접촉’은 가게 점원, 호텔 심부름꾼, 웨이터, 티켓 판매원과의 상거래 정도로 제한된다. 이에 대해 크게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에서는 더욱 더 의미 있는 접촉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 있는 접촉의 일환으로, 우리는 ‘현지 문화와 관습을 존중’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는 정확히 무슨 뜻일까? 다시 한번, 당신이 얘기하는 곳이 세계의 어느 지역이냐에 따라 이 내용은 달라진다. 선진국의 ‘현지 문화’에 대한 태도와 개발도상국의 ‘현지 문화’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영국인이 즐기는 행동들 중에는, 완전히 무례한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프랑스나 미국, 스페인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것들이 꽤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나라에 휴가를 가면서 우리의 활동이나 태도를 억제해야한다는 어떠한 의무감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외국인이고 그들과는 다르며 그쪽 나라에서 어떻게 일이 처리되는지 모른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너그럽게 대할지 깐깐하게 대할지는 상대하는 사람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그들의 사회가 그들과 다른 행동이나 옷차림 또는 언어 능력이나 방식을 용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이 우리를 용인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상호 존중을 기대하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우리는 매우 다른 태도를 취한다. 여기서 ‘현지 문화에 대한 존중’이란, 그 문화에는 그들 자신과 다른 생활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능력이 원천적으로 없다는 가정 위에서 이야기된다. 그들은 사실상 우리가 주는 새로움에 혼란을 겪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개발도상국의 문화가 억압적인 것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특히 현지인들이 그 족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겠다면서 선봉에 서서 과거처럼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비-관광객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셋째로, 제3세계의 현지 문화는 한 줌에 불과한 서구 관광객(우리 그룹의 크기가 결코 12명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의 출현으로도 엄청난 위협을 받을 정도로 매우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것으로 제시된다. 이 문화들 중 상당수가 그 어떤 선진국의 문화보다도 뿌리 깊고, 오랫동안 생존해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실, 그 문화들은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튼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에 해당된다. 가장 큰 문제는, 이곳의 문화들이 위의 세 가지 특징을 한꺼번에 가진 것처럼 그려진다는 점이다. 즉 그들에게는 차이를 이해할 능력이 없고(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놀래키면 안 되고), 억압적이며(대개의 경우에는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서), 연약하다(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모순적인 특징들을 한꺼번에 불러내고 있다. 즉 연약한 동시에 억압적이고, 비관용적이지만 매우 관용적으로 보인다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 현실에서, 비-관광객에게 있어 ‘현지 문화와 관습에 대한 존중’이란 현지인들의 믿음이 무엇이든 간에 (심지어 그 믿음이 억압적인 것일지라도) 그들을 배려하여 자신의 원칙과 믿음을 일시적으로 (아마도 2주가 넘지 않는 기간 동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개발도상국에서의 관광은 최악의 경우에는 절대악으로 간주되고 제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선진국에서의 관광은 어느 정도 좋은 일로 간주되곤 한다. 개발도상국와 선진국에 대한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2001년 9.11 사건 이후의 미국 관광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세계무역센터의 파괴 이후, 세계 일주를 하는 관광객에게 그 도시는 빠뜨리지 말아야 할 곳으로 자리잡았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그곳 자체가 시민들의 묵인 속에서 관광 명소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논쟁도 없었다. 관광은 산산이 부서진 도시를 재건하는 데 기여하는 무엇인가로서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활동으로 간주되었다. 관광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는 비-관광 옹호자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관광객의 유입이 맨해튼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에 관한 토론도 없었다. 환경적 영향도 언급되지 않았다. 현지 사회에서 관광객은 확실히 좋은 것으로, 즉 관광이 되살아나면 현지 사회가 이득을 얻고 침체하게 되면 손해를 입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왜? 미국 문화가 다른 문화에 비해 어쨌든 견고하거나 외부의 영향에 덜 취약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경계 내에서 미국은 외부로부터의 영향에 대해 극단적이라 할 만큼 열려 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문화는 항상 변화하며 매우 유동적이다. 이민 세대들은 미국인의 의미를 거듭 재정의해왔다. 그렇다면 왜 뉴욕의 관광객에 대해서는, 관광객들이 자신의 다른 문화적 영향과 요구를 가지고서 다른 문화를 손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뉴욕 시의 본질을 ― 즉 뉴욕의 ‘현지 문화와 관습’을 ― 손상시킨다고 보지 않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 하다보면, 이러한 비일관성이 부각시키는 것이 문화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차이라는 것은 금새 명백해질 것이다.

결론

이 어떤 문제도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지출액으로 따졌을 때, 비-관광의 규모는 전체 관광 산업의 4%에도 미치지 못한다. 실제 비-관광객의 수는 그보다도 더 적다. 왜냐하면 비-관광객의 1인당 지출은 통상적인 관광객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이름을 꽤나 성공적으로 안착시켰고, 그 결과 좋은 관광객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즉 정중한 관광객이나 생태적 관광객, 또는 책임관광객 따위로 정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96%의 관광객은?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도 비-관광객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매년 2주 동안은 스페인 남부에서 술독에 빠진 채 지내는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닌가? 아니면 그들 역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 이름으로 바꾸게 될까? 우리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 노력의 거의 대부분은 휴가 시장의 상층부에 극도로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럽에서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보다는 훨씬 더 오래 관광객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가, 현지 조사원, 자원 활동가, 탐험가, 모험가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갈 것이고, 관광객은 이탈리아나 유럽의 다른 곳으로 가게 될 테니까 말이다. 전세계에 적용될 수 있었던 관광이라는 말은 고아(Goa)나 타이의 해안 리조트 같은 몇몇 통속적인 장소를 제외하면 지리적으로 제한된 지역에서의 여행만을 뜻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관광은 더 이상 이국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관광 산업의 극히 일부에서 규범을 세우고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독립관광업자협회(AITO)가 실감하고 있듯이, ‘책임관광’과 ‘대규모 시장’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휴가객들이 지역 사람들과 만나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면서 그들의 돈이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는’ 프랑스 교외의 휴양소처럼 유럽의 많은 휴가들은 원래 ‘환경 친화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독립관광업자협회는 “표준적인 패키지 휴가가 환경 친화적이라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과감한 결단을 필요로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관광의 해로운 부작용을 억제하는 데 가장 중요하면서도 간단한 대책이 취해지는 곳은 대중 관광의 영역이다. 많은 호텔 체인들은 물 소비를 줄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조치는 600개의 침실이 딸린 콘크리트 구조물 자체에 환경 친화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을 가지면서도 관광객에게 자신의 고유한 속성까지 바꾸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여전히 휴가를 가고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당신을 받아준 나라에 성의를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휴가객에게 부과된 유일한 미션은 선탠이나 하는 것이다.

모든 관광은 환경 자원과 인간 자원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갖는 동시에 그들을 소중히 대해야만 한다. 어떤 관광 개발이나 관광객은 그렇지 않기도 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구분은 값비싼 돈을 지불하는 소수의 특권적 관광객과 대중 관광객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다른 것을 하고 있는 양 포장되었을 뿐 완전히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독립관광업자협회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여행객 대다수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논쟁을 하는가? 이 논쟁에 참가한 우리는 비-관광객의 좋은 먹잇감이다. 우리는 대다수 영국인들의 해외 여가 시간을 줄이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자신의 즐거움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데 굴복하고, 불명예스러워 보이는 말을 붙이기 거부한 이유이다. 지금까지 당신은 몇 번이나 기꺼이 관광객임을 시인했는가? 당신은 자신을 묘사하는 데 몇 번이나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싶어했는가?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휴가를 가기보다는 ‘자원 활동가’가 되고 싶은 것일까? 당신은 정말로 새로운 전도 운동에 가담하고 싶은가? 이제는 새 이름 붙이기에 일격을 날릴 시점이 된 것이 아닐까? 다음 번에 오악사카(Oaxaca)의 방 두 개짜리 현지 호텔에 묵을 때는, 정말 당신이 하는 일에 맞는 이름을 이용하라. 혹시라도 어떤 모험가나 현지 조사원, 탐험가, 자원 활동가가 “팔렝케(Palenque)에서는 여행가들이 어디에 묵나요?”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고전적인 비난을 거꾸로 뒤집어 이렇게 대답하라. “나는 여행가가 아닙니다. 나는 관광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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