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실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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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에 따르면, 성숙한 과학 이론의 (수학적) 구조는 근사적 참으로 인정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실재론은 현대 과학 이론의 엄청난 경험적 성공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 덕분이라는 억지스러운 설명을 받아들이기보다 그 경험적 성공이 이론의 근사적 참에 기인한다는 보다 직관적인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실재론자들은 과거 경험적으로 성공적이었던 이론들이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현재 이론의 근사적 참 역시도 믿을 이유가 없다는 비관적 귀납 논변을 제기한다. 존 워럴(John Worrall)은 과학의 이론적 내용은 급진적인 변화를 겪더라도 과학의 경험적 내용은 축적적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직관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절충적인 입장인 구조적 실재론을 제안한다.[1] 그에 따르면, 성숙한 이론의 경험적 성공은 이론의 근사적 참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근사적 참이었다는 점에 의해 설명되며, 이 수학적 구조는 급진적인 이론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보존된다. 이로서 구조적 실재론은 과학의 비축적적 성격(이론적 내용)과 축적적 성격(경험적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과학의 경험적 성공을 기적이 아닌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이때 워럴이 제안하는 '성숙한 과학 이론'의 기준은 사용-참신한 예측의 성공, 즉 이론 구성에 사용되지 않은 종류의 현상을 예측하여 성공한 것이다.

워럴의 핵심 논변

Worrall, John (1989), “Structural Realism: The Best of Both Worlds?”, Dialectica 43: 99-124.

존 워럴(John Worrall)은 1989년 논문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수용했다. 첫째, 과학의 경험적 성공은 우연의 일치, 즉 기적에 호소하여 설명되어선 안 된다(기적 금지 논변). 둘째,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과학들은 대부분 거짓으로 드러났다.

퍼트넘과 보이드 등의 실재론자들은 경험적으로 성공적인 옛 이론들이 근사적으로 참이라는 점에 호소하여 실재론을 옹호하려고 하지만, 이론의 근사적 참에 호소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보이드는 과학자들이 옛 이론에서 제안된 "이론적 존재자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설명"을 보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 퍼트넘은 과학자들이 "옛 이론의 메커니즘"을 가능한 보존하려고 한다는 점을 보였으나, 라우든은 옛 이론의 핵심적인 이론적 존재자가 새 이론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에서, 옛 이론의 인과적 관계나 메커니즘은 근사적으로도 보존될 수 없다는 점을 제대로 지적했다.

보이드와 퍼트넘 등의 실재론자들은 축적적 발전이 "성숙한" 과학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실재론에 불리한 사례들(플로지스톤 이론 등)을 제외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성숙성"에 대한 독립적인 기준을 제공하지 않았다. 워럴은 그 기준으로 "진정한 예측적 성공"을 제안한다. 진정한 예측적 성공을 거둔 이론은 그 경험적 성공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필요한 반면, 그렇지 않은 이론의 경험적 성공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워럴에 따르면, 이 기준을 이용하면 플로지스톤 이론이나 창조과학 등은 진정한 예측적 성공을 거둔 적이 없기 때문에 근사적 참의 대상에서 쉽게 제외될 수 있다. 또한 이론의 예측적 성공이 이론적 요소보다는 경험적 일반화에만 의존한 "약한" 예측의 사례들도 진정한 예측적 성공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경험적 성공과 연관된 이론들 역시 근사적 참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 워럴에게 진정한 예측적 성공이란 "이론에 이미 기입된 현상 외의 새로운 종류의 현상의 예측"에 제한된다.

그럼에도 워럴이 제안한 성숙성의 기준에도 불구하고 빛의 파동 이론은 성숙한 과학 이론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론에서 프레넬이 가정했던 에테르는 맥스웰의 전자기장으로 대체되었다. 이 상황에서 프레넬의 이론적 주장이 맥스웰의 이론적 주장이 근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하다. 그럼에도 프레넬과 맥스웰 사이에는 중요한 연속성이 있으며, 그것은 단순한 경험적 내용의 보존보다는 크면서 완전한 이론적 내용의 보존보다는 작다. 워럴은 이를 내용적 연속성보다는 형식 또는 구조의 연속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계는 뉴턴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이론 사이의 관계(대응 원리)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뉴턴의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극한을 통한 특수한 사례로 이해될 수는 없지만, 그 수학적 구조에서는 그러한 극한 관계, 즉 근사적 연속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옛 이론과 새 이론 사이의 대응 원리가 일반적으로 성립한다는 점은 완전한 실재론에 대한 증거라기보다 구조적 실재론에 대한 증거가 된다.

코멘트

첫째, 플로지스톤 이론의 성숙성 : 워럴은 플로지스톤 이론의 진정한 예측의 성공을 거두지 못한 미성숙한 이론으로 평가함으로써, 플로지스톤 이론의 근사적 참, 또는 그 이론의 구조의 근사적 참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하석은 플로지스톤 이론이 다음과 같은 예측에 성공을 거두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플로지스톤 이론에 따르면, 금속회에 플로지스톤을 첨가하면 금속으로 환원된다. 만약 금속회가 공기 중의 플로지스톤을 빨아들여 금속이 된다면, 그 공기는 플로지스톤이 결핍된 공기가 될 것이고, 그 '플로지스톤 빠진 공기'는 양초를 잘 타게 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2] 프리스틀리는 이러한 예측에 따라 실험에 착수했고, 그 예측은 성공했다.[3] 둘째, 플로지스톤 이론에 따르면, 금속이 산에 녹으면 플로지스톤이 방출되며, 그 플로지스톤은 금속회를 금속으로 환원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프리스틀리는 이러한 예측에 따라, 금속을 산에 녹일 때 방출되는 '가연성 공기'를 이용해 수은회를 금속으로 환원시키는 데 성공했다.[4] 플로지스톤 이론의 예측 성공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경우, 플로지스톤 이론은 워럴의 기준에 부합하는 성숙한 이론으로 인정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구조적 실재론에 따르면, 플로지스톤 이론의 구조는 근사적 참이어야 한다. 구조적 실재론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둘째, 에테르에 대한 맥스웰의 이해 방식 : 워럴은 맥스웰이 에테르라는 실체를 부정하고 오직 전자기장만 믿은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에테르에 대한 맥스웰의 견해는 그보다 복잡하다. 맥스웰은 탄성 매질로서의 에테르를 구체적인 모형으로 구현하여 전자기장 이론을 구성한 바 있다. 그러나 맥스웰은 그 구체적인 모형을 실재로서 간주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에테르의 작동을 흉내낼 수 있는 모형은 한 가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맥스웰은 전자기 작용을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에테르의 구체적인 속성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며, 죽을 때까지 에테르가 적어도 회전 운동과 탄성 변형이 가능한 매질이라고 믿고 있었다.[5]

셋째, 대응 원리의 해석 문제 : 보이드, 퍼트넘 등의 실재론자들은 과학자들이 대응 원리를 이론 구성의 중요한 원칙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실재론 옹호 논변에 사용하고자 한다. 이 점은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과학자들은 기존 이론과 양립불가능한 새로운 이론을 만들면서도 기존 이론의 성과를 최대한 보존하고 싶어한다. 대응 원리는 기존 이론의 성공적인 경험적 귀결들이 (대부분) 새 이론에 의해서도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장치이다. 실재론자들은 이를 통해 혁명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옛 이론과 새 이론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옛 이론의 근사적 참 또는 구조의 근사적 참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론 사이의 환원에 대해 논의한 토머스 니클즈(Thomas Nickles)에 따르면, 이러한 대응 원리는 후속 이론의 경험적 정당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즉 후속 이론은 선행 이론과의 대응 원리를 통해 선행 이론의 방대한 경험적 증거들을 통째로 전달받는다. 선행 이론의 성공은 후속 이론을 통해 일종의 설명이 이루어질 수는 있으나, 이는 선행 이론 또는 선행 이론의 구조에 대한 정당화와는 무관하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 : 대응 원리를 이용한 환원을 매개로 한 후속 이론의 정당화는 실재론자들을 불편하게 할 만한 다음의 논변을 만들어낸다. 후속 이론은 선행 이론과의 대응을 목표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후속 이론이 참이 아니더라도 선행 이론이 설명한 현상들을 설명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후속 이론이 대응 원리를 통해 선행 이론을 포섭한다는 점은 후속 이론의 참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는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넷째, 예측주의와 구조적 실재론 사이의 갈등 : 워럴은 다른 논문에서 예측주의적 논변을 이용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좋은 경험적 증거를 얻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6]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의 경험적 성공을 이전받기 위해 행성의 운동이 태양의 운동과 동기화된 지구 중심의 모형을 태양 중심의 모형으로 변환한 것에 불과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행성 위치의 관측에 관한 한, 두 모형은 경험적으로 완벽하게 동등하며, 두 모형 사이의 변환은 간단한 기계적인 작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천문학적 자료에 비추어 (자연스러운 예측에 성공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사후 포섭에 성공했을 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더 좋은 증거를 얻는다는 워럴의 논변은 힘을 얻기 힘들다. 왜냐하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천문학적 자료에 대한 사후 포섭에 성공한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단순한 기하학적 변환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이론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과 달리 새로운 예측에 성공할 수 있는 이론이 애초에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구조적 실재론으로서도 결함이 된다. 결국 천문학 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무엇인가? 태양 중심의 행성 배치인가? 아니다. 20세기 상대성 혁명의 결과까지 고려할 경우, 고대 이래 지금까지 죽 보존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서 밝혀낸 태양, 지구, 행성들 사이의 상대적 각도 관계이며, 코페르니쿠스 이래 보존된 것은 태양, 지구, 행성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 관계이다. 워럴은 '태양과 동기화된 것처럼 보이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관측 자료'들을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자연스럽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태양이 행성 공전의 공통 중심"이라는 점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이 그점에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점은 보존되지 않았다. 상대론적으로 볼 때에는 지구도 태양도 행성 운동의 중심이 아니다. 코페르니쿠스로부터 비롯되어 현재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과학적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태양이 행성 운동의 기하학적 중심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구조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케플러에 의해 제안된) 태양이 행성 운동의 물리적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은 한편으로는 너무 약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강하다. 첫째, 진정한 예측에 성공한 이론의 구조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 포섭에 성공했던 이론의 구조도 보존될 수 있다(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주장했던 지구, 행성, 태양 사이의 상대적 각도 관계). 둘째, 예측에 기여한 수학적 구조 중 일부(태양이 행성 운동의 중심이라는 기하학적 구조)가 버려지기도 하며, 오히려 심층적인 물리적 원인에 대한 주장((태양이 행성 운동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보존되기도 한다. 요컨대, 어떤 이론의 어떤 성분이 미래에 보존될 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석

  1. Worrall, John (1989), “Structural Realism: The Best of Both Worlds?”, Dialectica 43: 99-124.
  2. 유리병 속의 양초가 꺼지는 이유는 플로지스톤의 포화로 설명되었었다.
  3. 장하석 (2014),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EBS미디어, 229-300.
  4. 장하석 (2014), 『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EBS미디어, 232-235.
  5. 정동욱 (2010), 『패러데이&맥스웰 : 공간에 펼쳐진 힘의 무대』. 김영사. 다만 2010년 책을 쓸 당시 일차 문헌들을 완전히 꼼꼼하게 분석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6. Worrall (2010), Error, Tests, and Theory Confi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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