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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9일 (월) 21:38 판

  • Worrall, J. (1989). Structural Realism: The Best of Both Worlds?. Dialectica, 43(1-2), 99-124.

존 워럴(John Worrall) 이한슬 옮김


0. 요약

과학적 실재론의 주요 논증은 우리의 현재 과학 이론은 경험적으로 성공했고 이러한 성취는 우연으로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과학 이론은 우주의 청사진에 어떻게든 달라붙어(latch on) 있어야 한다. 과학적 실재론에 반대하는 주요 논증은 한때 수용되었지만 지금은 거짓으로 여겨지는 엄청나게 성공적인 이론들이 있어 왔다고 말한다. 본 논문은 두 입장 모두를 만족시킬 합리적인 노선이 있는지를 중심 문제로 다룬다. 즉, 과학 혁명에서 끌어낸 논증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물리학과 다른 영역의 현재 수용된 이론에 어떤 실재론적 태도를 수용하는 노선 말이다. 나는 푸앵카레에 의해 수용되고 발전, 옹호된 구조적 실재론이 그러한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1. 도입

현재 수용된 물리 이론들은 휘어진 시공간 구조, 다양한 종류의 근본적 입자와 힘을 상정한다. 우리가 관찰에 근거해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오직 거시적 물체들의 운동에 관한 사실과 특정 상황에서 안개상자에 나타난 궤적뿐이다. 대다수 물리학 이론의 기본적인 내용은 (직접 관찰의 개념을 어떤 식으로 완화해서 이해하더라도) “직접적 관찰”을 “뛰어넘는”다. 현재 수용된 이론들의 진정으로(genuinely) 이론적인, 관찰 초월적인 내용의 지위는 무엇인가? 대다수는 이를 고찰해보지 않은 채, 이론의 관찰 초월적인 부분의 문장들을 관찰 가능한 현상 “뒤에” 놓여있는 실재를 기술하려는 시도로 간주한다. 즉, 이러한 이론들은 다음을 진정으로 직접(straightforwardly) 주장한다. ‘물질에 의해 시공간이 휘어진다.’ ‘전자와 중성자, 그리고 다양한 흥미로운 입자가 존재한다.’ 더 나아가 대다수는 어떠한 고찰도 하지 않고 이러한 이론들의 엄청난 경험적 성공이 실재에 관한 기술이 정확하다는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또는 “근사적으로” 정확하다는) 가정을 정당화한다고 간주한다. 내가 이해하기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견해를 반성해본 후에도 여전히 이를 고수할 좋은 이유가 있는지의 여부가 과학적 실재론의 주요 문제다.

 당연히 반실재론적 대안이 있다. 가장 널리 논의된 실용적, 도구주의적 견해의 한 형태는 이론의 관찰 초월적 내용이 그 명백한 논리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전혀 기술적이지 않으며, 대신 실험적 법칙을 위한 단순한 “사다리”라고 말한다. 이론은 조직화 도식(codification-scheme)이다. ’전자’, ‘약력’ 같은 이론적 용어들이 참된 존재자를 지시한다고 간주해서는 안 되고, 대신 단순히 실험적 법칙을 조직하기 위해 도입된 허구적 이름으로 간주해야 한다.  최근에 제시된 반 프라센(Van Fraassen)의 반실재론적 입장에 따르면, 이론적 용어들은 참된 존재자를 (적어도 어느 정도는(at any rate purportedly)) 정말로 지시한다. (말하자면 이 용어들은 그저 복잡한 관찰용어들의 축약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의 이론들도 그 이론들이 참, 또는 근사적 참이라고, 심지어 과학의 목표가 참된 이론을 만드는 일이라고 상정할 이유는 없다. 대신 한 이론의 수용은 오직 이론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 ‘현상을 구제한다’는 주장에만 관련된다고 간주해야 한다. 
 최근 논의에 등장하는 논증도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논증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잘 알려진 두 논증은 매우 오래되었다. 이 둘은 분명히 푸앵카레(Poincare)와 뒤앙(Duhem)에서 찾을 수 있다. 내 생각에, 과학적 실재론 문제가 흥미로운 것은 잘 알려진 두 논증이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실재론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만족스러운 입장은 두 논증을 양쪽에 모두 취하고 있어야 한다. 본 논문의 관심사는 두 논증 사이의 긴장을 살펴보고, 오래된, 그리고 지금까지 소외된 입장이 둘을 화해할 최선의 희망일 수 있다고 (단지) 제안하는 것이다.


2. ‘기적 불가(no miracle)’ 논증과 실재론

 어떤 이를 실재론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주된 논증을 (아마도 ‘고려(consideration)’가 더 정확하리라) ‘기적 불가’ 논증이라 부르겠다. (요즘은 때때로 이 논증의 한 형태가 ‘궁극적’ 실재론 논변이라 불리지만 ) 매우 거칠게 말해 논증은 다음과 같다. 만약 어떤 이론이, 우주의 근본적 구조에 대해 말하는 바가 옳지 않음에도, “본질적으로도(essentially)” 또는 “기본적으로도(basically)” 옳지 않음에도, 일반 상대성 이론 또는 빛에 대한 광자 이론만큼이나 옳은 경험적 예측들을 많이 내놓는다면, 이는 기적이나 천문학적 수준의 우연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기적적이지 않은 대안이 있다면, 우리는 기적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약 이론들이 현상을 “넘어서” 말하는 바가 정말로 참 또는 “근사적 참”이라면, 현상을 맞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 수용된 이론들이 정말 “본질적으로는”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그럴듯하다. 결국 양자이론은 “램 이동(lamb shift)”의 소수점 아래 여섯 번, 일곱 번째 자리까지 예측했다. 몇몇 과학자의 관점에 따르면, 오직 논리적 가능성에 과도하게 몰입한 철학자만이 이러한 사실[예측적 성공]을 양자 이론이 실재에 대한 근본적으로 참된 기술로서 실패했다는 생각과 양립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증이 이론의 경험적 성공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길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론의 경험적 귀결 그리고 귀결이 옳게 된 것 전부가 이론이 어떻게든 “우주의 청사진”에 달라붙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직관적 지지를 보내지는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후에(post hoc) 이론에 쓰여진(written into) 어떠한 경험적 귀결도 배제되어야 한다. 틀림없이 한 이론이 이미 알려진 사실과 부합하도록 고안되었다면, 그 이론이 사실과 맞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만약 고려 중인 사실이 이론의 구성에 사용되었다면, 예를 들어 자유변항의 값을 결정했다면, 이론은 사실에 맞도록 묶여있다(bound). (반면 고려중인 실험 결과가 이론에 끼워 넣어지지 않았다면, 실험 결과가 이론이 “본질적으로는 옳다”를 지지하는 것은, 분명히 그 결과가 이론이 정식화되기 전에 이미 알려졌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
 이러한 직관적 ‘기적 불가’ 논증을 다양한 방식으로 더 엄밀하게 만들 수 있다. 이들 전부는 문제가 있고 그중 일부는 꽤 큰 문제다. 예를 들어 종종 논증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 또는 퍼스의 ‘귀추’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라우든(Larry Laudan)과 파인(Arthur Fine)이 지적했듯 , 반실재론자는 과학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의 타당성을 부정하므로, 이를 철학에서 실재론을 주장하는 수단으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몇몇 철학자들이 설명력을 근거로 실재론이 과학적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좋은 과학적 설명과 현재 이론의 성공에 대해 실재론 논제가 제공하는 “설명” 사이에는 중대하고 실용적인 차이가 있다. 설득력 있는 과학적 설명은 독립적인 시험을 요구한다. 행성 궤도에 대한 뉴튼(Newton)의 설명은 좋은 설명인데, 이는 이론이 행성 궤도 외에도 다른 시험 가능한 것을 많이 내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구의 편평도, 핼리 혜성의 귀환 등이 해당한다. 그러나 현재 이론의 성공에 대한 실재론의 “설명”의 경우, 당연하게도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한 질문이 없다. 분명히 어떤 흥미로운 의미에서 과학적 실재론을 과학적 성공에서 추론할 수는 있다. ‘기적 불가’ 논증은 과학적 실재론을 수립할 수는 없다. 이는 그저 다른 상황이 같다면, 한 이론의 예측적 성공이 그 이론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든 진리에 붙어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일견 그럴듯한 논증을 제공하는 주장이다.
 물론 심지어 통상 반실재론과 도구주의의 위대한 영웅으로 여겨지는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살펴보겠지만) 철학자 피에르 뒤앙과 앙리 푸앵카레도 이 논증의 심리적 설득력을 선명하게 느꼈다. 예를 들어 뒤앙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러므로 한 이론에 대한 최상의 시험은 오직 미래만이 밝힐 수 있는 것을 미리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험이 행해지고 이론이 내놓은 예측이 입증될 때, 우리는 이성을 통해 추상적 개념들 사이에 수립한 관계와 대상들 사이의 관계가 서로 대응한다는 신념이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푸앵카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말하자면 뉴튼의 법칙을 언급할(enunciate) 권리가 있는가? 많은 관측들이 법칙과 부합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결과는 아닌가? 그리고 게다가 우리가 어떻게, 많은 세대 동안 참이었던 법칙이, 다음에 거짓이 되지 않을지 알 수 있는가? 이러한 반론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러한 일이 매우 일어날 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뉴튼의 중력 이론은 놀랄 만큼 넓은 영역에서 예측에 성공했다. 엄밀한 케플러 타원에서 벗어나는 행성 궤도의 섭동, 지표면에 걸친 중력의 변화, 핼리 혜성의 귀환, 분점의 세차운동 등. 심지어 뉴튼 주의자들은 경험적 난점을 (천왕성의 변칙적 운동을) 주요한 성공으로 (이후에 해왕성으로 이름 붙여진 천왕성 너머 있는 행성의 예측으로) 바꿔 놓았다.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뉴튼 이후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곤 했다. 그들은 ‘세계의 체계’에 대해 밝혀질 진리가 단 하나 있는데, 그 진리를 뉴튼이 이미 밝혀냈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매우 설득력 있는 기적 불가 논증은 명시적으로 뉴튼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질 수 있다. (그리고 세워졌다) 뉴튼 이론이 행성의 운동, 해왕성과 핼리 혜성에 대해 매우 정확하게 맞추고, 아주 멀리 떨어진 쌍성계가 이론에 따라 운동하는 것은 놀랍다. 이러한 예측이 참이면서 이론은 참이 아니라면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뉴튼 이론은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에 의해 거부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단순히 뉴튼 이론의 확장이라면, 즉 그저 뉴튼 이론을 특수 사례로서 포함하면서 더욱 많은 것을 말한다면,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과학의 발전이 누적적이라면 과학적 변화는 실재론과 ‘기적 불가’ 논증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뉴튼의 이론이 옳은 현상들을 확보한 것은 이론이 완전한 진리는(whole truth) 아닐지라도 여전히 [부분적] 참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단순한 뉴튼 이론의 확장이 아니다. 두 이론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참이라면 뉴튼 이론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물론 현대의 실재론자 전부도 이를 받아들인다. 심지어 “성공적”이고 “성숙한” 과학에서도, 이론적 수준에서의 과학적 진보가 엄밀한 의미에서 누적적이지 않고 대신 개정과 수정을 포함한다는 인식 때문에, 현대 실재론자들도 현재 수용된 이론들을 참이라고 여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론들을 “근사적” 또는 “본질적” 참이라고 여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주장을 ‘완화된(modified) 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편의를 위해 이후에는 ‘완화된’을 생략하겠다. 그러나 나의 실재론은 오직 우리가 성숙한 과학의 현재 이론이 근사적 참이라 볼 근거가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 ‘기적 불가’ 논증과 비관적 귀납 평가

 실재론적 주장은 명료화하기 어렵기로 악명높은 두 용어를 다룬다. 나는 “성숙한” 과학에 대한 나의 짧고 거친 규정(characterize)을 제안하겠다. “근사적 참”에 대해서는, 이를 면밀하게 분석하려는 시도가 가진 주요한 난점들이 잘 알려졌다. 실제로 “근사적 참”을 특징지으려는 다양한 시도(포퍼의 ‘증가하는 진리 근접성’ 같은)가 겪는 중대한 형식상의 결점이 밝혀졌다.  직관적인 수준에서는 근사적 참의 개념을 꽤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근사적 참 개념을 원초적인 개념으로 남겨둬도 문제가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실재론자가 필요로 하는 작업을 위해서는 이 개념이 이행적(transitiv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재론자는 현재의 몇몇 수용된 이론이 나중에 수정되고 대체된다 하더라도 “근사적 참”이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된 이론은 단지 대체한 이론에 비춰보았을 때뿐만 아니라, 대체한 이론을 대체한 이론에 비춰보았을 때도 “근사적 참”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나 설령 직관적 의미에서라도 근사적 참 개념이 이행적인가?
그러나 어쨌든 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형식적 분석에 앞서 직관적으로 말해, 과학사가 (또는 과학사의 선택된 일부가) 연속된 과학 이론들을 갈수록 더 좋은 “참으로의 근사”라고 옹호하는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이는 분명히 과학에서의 표준적 이론 변화가 얼마나 급진적인가에 달려있다. 물론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기서 또 모호한 용어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현재 이론들이 근사적 참이라 여길 근거가 있다는) 실재론적 주장의 설득력은 뉴튼 이론을 근사적 아인슈타인 이론이라고, 어느 정도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논증의 설득력은 과학의 발전이 (좌우간 성공적인 “성숙한” 과학의 발전)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인지의 여부와, 단지 이론의 성공적인 경험적 귀결만이 아니라, 물러난 이론 그 자체가 일반적으로 “혁명” 이후에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는지에 달려있다. 반대로 만약 과학 이론 변화가 대체로, 진정한 이론적 가정의 전면적 거부와 같은, “급진적” 변화를 겪는다면, (성공적 경험적 내용이 보존된다 하더라도) 실재론은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이론 변화가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이라는 주장과 실재론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해보자.

우선 실재론자가 이론적 과학의 발전은 정말로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이라고 설득하려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는 다음과 같이 거칠게 실재론을 주장할 수 있다. “성숙한” 과학의 발전은 지금까지 모든 수준에서 (이론 그리고 관찰)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이었다. 따라서 앞으로의 발전도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일 것이라는 귀납적 추론은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짐작건대, 현재 이론이 대체된다 할지라도, 대체하는 이론에 비춰보았을 때 여전히 “근사적” 참으로 드러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전은 물론 현재 수용된 이론과 미래에 수용될 운명인 이론의 진정한 이론적 가정이 전적으로 거짓인 것과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경험적 성공을 완전히 신비로운 일로 만들기 때문에 전혀 일어날 법하지 않다. 반면에 현재 이론이 근사적 참이라는 가정은 경험적 성공이 기적이 아니라고 충분히 설명한다. 내가 보기에 (앞선 지적들을 다시 언급하면) 이러한 논증이 완전히 탄탄하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히 과거의 “본질적 누적성”에서 미래의 “본질적 누적성”으로의 “추론”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근사적 참이 정확히 무엇인지의 문제, 현재의 이론을 근사적 참으로 가정하면 정말로 경험적 성공이 설명되는지의 문제가 남아있다. 직관적으로 말해 이론이 “본질적으로는” 또는 “근사적으로” 참이라면 이론의 귀결 대부분도 “본질적으로는” 옳다고 가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아 보인다. 간단한 경험적 예를 살펴보자. 내가 은행 잔고를 더하던 중, 약간의 계산 실수를 해서 전 재산이 사실은 £ 103인데 £ 100로 착각했다고 해보자.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론이 거짓이지만 여전히 믿을 만한 삶의 지침을 주는데, 이를 “기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어쨌든 내가 관심을 가질 법한 대부분의 결과들은,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 휴일을 보낼 수 없다든가 하는 결과는, 사실 참된 이론과 거짓된 이론 둘 다에서 따라 나온다. 그러나 [거짓 이론이] 그럴 듯 하든 아니든, 거짓 이론에는 엄청난 형식적 난점이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거짓 이론은 (무수히 많은 참된 귀결과 함께) 무수히 많은 거짓 귀결을 갖는다. 그리고 “거의 참”인 내 이론에는 완전히 틀린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파운드화로 표현했을 때 내 전 재산이 소수라는 것은 참이지만, “거의 참”인 이론은 합성수라고 (완전히 틀리게) 말한다. 더욱이 [기적 불가] 논증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론 T가 이론 T’에 근사되고, 이론 T’가 이론 T’’에 근사된다면 이론 T는 이론 T’’에 근사된다. (현대 수용된 이론을 대체할 이론도 아마도 결국에는 또다른 이론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실재론자는 현재의 이론을 직후에 대체한 이론에 비춰보았을 때만이 아니라 이후 계속되는 이론의 연쇄에 비춰보았을 때도 근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음을 보장해야한다) 그러나 이행성 가정이 옳은가? 우리가 올챙이의 발달을 1초 간격으로 찍는다면, 각각의 사진은 직전 사진에 “근사”하겠지만 전체 과정은 올챙이에서 시작해서 결국에는 개구리로 끝난다. 개구리가 올챙이에 “근사적”인가? 지금으로선 나는 이러한 난점 모두를 다루지는 않겠다. 적어도 만약 실재론자가 “성숙한” 과학의 발전이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이어 왔다는 주장을 고수하려면 그는 이 주장에 대한 논증을 제시해야한다. 반대로 만약 실재론자가 성숙한 과학의 역사에서 조차 이론적 수준의 급진적 변화가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는 분명히 깊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숙한 이론의 사례, 한때 수용되었으며 예측에 성공적이었으나 그런데도 그 아래 깔려있는 이론적 가정은 의심의 여지없이 완전히 틀린, 그러한 이론의 사례들이 있다고 해보자. 실재론자는 과거 이론가가 이론의 경험적 성공을 근거로 그 이론을 근사적 참이라 간주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그는 이제 과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의 경험적 성공을 근거로 그러한 새 이론을 근사적 참이라 여기도록 격려한다. 이론적 수준에서 과거 이론과 새 이론은 근본적으로 배치된다(at odd with). 짐작건대 만약 우리에게 이론 T를 근사적 참이라 생각할 좋은 근거가 있다면, 이는 T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T’를 거짓이라 (“근사적 참”이 아니라 그저(plain) 거짓이라) 여길 좋은 근거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재론자는 그가 이전에 근사적 참이라 여길 좋은 근거가 있다고 말한 이론에 대해 지금은 거짓이라 여길 좋은 근거가 있다고 말하는 달갑지 않은 입장에 서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면] 왜 그가 현재 수용된 이론에 대해 제시하는 판단이 이와 비슷한 실수라고 밝혀져서는 안 되는가? 그렇다면 실재론자가 추측적(conjectural)이고 파기될 수 있는(defeasible) ‘좋은 근거’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으며, 실재론이 과학의 (또는 어느 정도 성숙한 과학의) 급진적 이론 변화와 양립 불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실재론에 반대하는 핵심 논증인 과학 혁명에서 끌어낸 논증은 바로, 수용되었던 이론에 혁명적 변화가 있어왔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그리고 “근사적” 개념이 모호하고 신축적이라 인정하더라도, 오직 [그 의미를] 한계점을 넘겨서 늘릴 때만, 이러한 변화에서 과거 이론이 새 이론에 “근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 언뜻 보기에도 이러한 주장은 옳아 보인다. 가령 광학의 역사를 살펴보자. 역사를 근대로 좁힌다 할지라도, 빛의 기본적 구성에 대한 이론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 왔다. 18세기에는 빛줄기가 매우 작은 물질적 입자의 흐름(shower)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이 널리 퍼져있었다. 단순 반사, 굴절, 프리즘 분산과 같은 이론의 몇몇 경험적 귀결은 옳았다. 그러나 이 이론은 빛이 물질이 아니라 특정 진동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발상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운동은 광학 에테르(luminiferous aether)라는 편재하는 매질에 의해 형성되고 운반된다) 확실히, 빛을 역학적 매질의 파동이라 보는 이론을 빛은 물질적 입자로 구성된다는 이론의 “확장” 또는 “약간의 수정을 가한 확장”이라 주장하기는 어렵다. 역학적 매질의 파동과 텅 빈 공간을 지나는 입자 사이의 관계는 진짜 분필과 치즈보다 더 분필과 치즈 같다. [분필과 치즈: 완전히 다르다] 실제로도 두 이론은 매우 다르다. 프레넬의 파동 이론 그 자체는 곧바로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으로 대체되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맥스웰은 대담하게 전자기장을 그 기저에 있는 역학적 매질을 바탕으로 설명하려 분투했다. 그러나 그와 다른 학자들의 시도는 실패했고, 결국 전자기장은 원초적인 것으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빛의 기본 구조에 대한 수용된 설명에서 다시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빛의 구조는] 탄성 매질에 의해 운반되는 진동 대신에, 매질 없는(disembodied) 전자기장의 파동적인 변화의 연쇄로 이해되었다. 역학적 진동과 (‘변위’) 전류는 분명히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에 속한다. 결국 광자 이론의 수용은 빛을 다시금 이산적인(discrete) 존재자로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역학을 따르는) 구성했다. 이론들이 빛을 분필에서 치즈로 그리고 이어서 초분필로 변형하는 동안, 광학의 경험적 내용은 확보되고 체계화되었으며, 기본적으로 꾸준하게 누적적으로 발전했다. 물질적 입자 이론은 간단한 반사와 굴절, 그리고 약간의 다른 현상을 만족스럽게 다뤘다. 고전적 파동 이론은 여기에 간섭, 분산, 그리고 마침내 편광 효과까지 추가했다. 전자기 이론은 빛과 전기, 자기효과를 연결하는 다양한 결과들을 추가했다. 광자 이론은 광전 효과를 포함해 많은 것을 추가했다. (적절하게 이해된) 경험적 수준에서의 과정은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이다. 일시적인 문제들은 있었다. (예를 들어 고전적 파동 이론이 이전에 빛의 (“본질적인”) 직선 전파를 지지한다고 간주하던 현상을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예외없이 빠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그라들었다. 뉴튼-아인슈타인 사례로 돌아가 보자. 직관적으로, 경험적 수준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일종의 뉴튼 이론에 “수정을 가한 확장”이라 말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험적 수준에서 조차 두 이론이 내놓는 물체의 운동에 대한 귀결들을 최대한 정확하게 고려한다면, 엄밀하게 말해서 두 이론은 항상 모순이다. 그러나 모든 범위의 사례에서 (물론 이 사례들에서 물체들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매우 낮다) 두 이론의 예측들은 엄밀히 다를 것이지만 관측상으로는 구별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뉴튼의 방정식이 이에 대응하는 상대론적 방정식의 극한 사례(limiting case)라는 것 또한 참이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은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표현하는 단순한 수학적 방정식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 방정식들은 매우 일반적인 이론적 가정들의 집합 안에서 해석된다. 여기에는 공간이 무한하다는 가정, 시간은 절대적이고 따라서 한 관찰자에게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은 모두에게 동시적이라는 가정, 물체의 관성 질량이 일정하다는 가정을 포함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반대로 공간은 (유계는 아니지만) 유한하고 시간은 뉴튼적 의미에서 절대적이지 않으며, 물체의 질량이 그 속도와 함께 증가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두 이론의 가정 전체는 서로 철저하게 모순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발전에 대한 상은 분명히 경험적 수준에서는 본질적으로는 누적적이면서 최상위 이론적 수준들에서는 완전히 비누적적인 급격한 변화가 동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거 이론의 변화에 대한 이러한 상은 현재 수용된 이론들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그것들의 경험적 성공은 보존된 채로 대체될 것이라고 간주할 좋은 귀납적 기반을 제공한다. 새 이론의 이론적 가정 하에 있는 기반들이 완전히 현재의 이론들과 완전히 배치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이는 소위 비관적 귀납으로 보통 최근의 방법론적 발견으로 간주되나 사실은 푸앵카레에 의해 분명히 언급된 바 있다. 이론들이 (아마도) 존재론적으로 거짓이라 여길 외견상으로 강력한 역사적, 귀납적 근거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현재 이론들이 “근사적” 또는 “본질적으로는” 참이라 고수할 좋은 근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론 변화에 대한 이러한 상이 부정확한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실재론은 명백히 유지되기 힘들고 오직 두 가지 (매우 다른) 열린 가능성이 남는다. 첫 번째는 다음과 같은 동기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 과학은 합리성이 지배하는 분야다. 나중에라도 역사가 우리의 사고의 기반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리라 생각할 합리적 이유는 없다. [즉, 역사는 사고의 기반이다] 일반적으로 한때 수용되었던 이론의 성공적인 경험적 내용은 새 이론으로 전달된다. 그러나 기초 이론적 주장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론들은 직접적인 경험적 귀결들 너머에 대해서는 어떤 실질적(real) 주장들을 내놓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이 최선이다. 만약 이론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론적 주장들을 참 또는 근사적 참으로 수용하는 것은 과학의 합리적 절차의 일부가 아니다. 이는 우리를 일종의 실용주의적(pragmatic) 또는 ‘구성적’ 반실재론으로 이끈다. 이러한 입장은 과학에 (즉, 과학의 “참된 부분”에) 만족스럽고 누적적인 (또는 준-누적적인) 발전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이는 ‘기적 없음’ 논증을 완전히 희생하는 비용을 치르게 된다. 예상과는 달리, 실용주의자들이 실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순전히 조직화(codificatory)의 역할만을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적 과학이 실제로는 종종 생산적이라고 증명되었다. 즉, 문자 그대로 해석된, 그래서 세계의 구조에 관한 주장으로 간주되는 이론들은 경험의 조직화에 덧붙여 시험 가능한 귀결들을 생산해왔고, 이 귀결들을 경험적으로 확인했을 때 옳다고 밝혀졌다. 왜 그런가? 실용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답은 없다고 주장한다. 경험적으로 누적적이면서 이론적으로는 누적적이지 않은 과학 변동의 상을 수용하면서 실용주의를 피하려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순수한 포퍼주의의 추측적 실재론이다. 이는 포퍼의 입장에서 그의 핵심 논제와 항상 마찰을 빚었던 진리 근접성(verisimilitude) 개념을 제거한 입장이다. 추측적 실재론에 따르면 과학 이론의 진정으로 이론적인, 관찰 초월적인 부분들은 단지 조직화 도식이 아니다. 이 부분들은 현상 너머에 숨져진 실재에 관한 기술로 시도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최선의 이론들은 진리를 향한 현재 최선의 시도다. 분명히 우리는 현재 최선의 이론이 진리를 향한 현재 최선의 시도라 생각할 이유가 있다. (이 이론들은 알려진 어떤 경쟁 이론보다 현재 증거와 잘 부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 이론이 참이라거나 심지어 이 이론들이 이전에 거부된 이론들보다 참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할 진짜(real) 이유는 없다. 사실 과학사를 고려할 때, 심지어 현재 이론들은 “근사적” 참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그럴듯하다. 물론 이 이론들은 일반적으로 선행 이론들보다 더 많은 경험적 결과들을 포착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주에 대한 신의 청사진”을 붙잡는데 가까워졌다는 표지는 아니다. 완전히 방법론적으로 의식적인 이론 과학자는 그가 거의 확실히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고귀하게 진리를 향한 끝없는 탐구를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성공에 대한 어떤 참된 지표도 없으며, 그는 그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틀림없이 추측적 실재론은 온건하고 겸손한 입장이다. 이는 지금까지 논의한 의미의 실재론의 한 형태로 정식화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최선의 이론이 참이라 생각할 가능한 최선의 근거가 있다. (이 이론들은 현재 증거에 의해 가장 잘 입증되거나 가장 잘 ‘용인’된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것보다 더 좋은 근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내일의 가장 잘 용인된 이론이 오늘의 가장 잘 용인된 이론과 근본적으로 모순일 수 있으므로, 이론이 참이라 생각할 우리가 가진 증거는 불가피하게 추측적이며 (단지 원리적으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파기될 수 있다. 나는 이전의 논문에서 나 자신의 추측적 실재론을 옹호했다. 이러한 입장의 표명에는 자주 (거의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반응이 따라 나온다. 추측적 실재론은 반실재론과 실질적 차이가 없거나 있더라도 미미하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핵심은 추측적 실재론은 ‘기적 불가’ 논증에 조금도 양보(concession)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측적 실재론의 입장에 따르면, 뉴튼의 이론은 공간과 시간이 절대적이며, 중력의 원격 작용이 있으며, 질량이 일정하다는 것을 정말로 주장한다. 이 주장들은 모두 완전히 틀렸지만 그런데도 이에 기반을 둔 이론은 고도로 경험 적합적이었다. 이는 단순한 사실로서 기록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이를 더 놀라운 사실로 여긴다면 그건 당신의 자유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모든 거짓 이론들이 참인 귀결들을 (사실 무한히 많은 참인 귀결) 가진다는 초보적인 논리적 사실을 내면화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용주의자와 추측적 실재론자들은 무한 회귀가 발생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로, 이론이 과학적 증명의 작동을 간소화하는 일만을 하고 근본적으로 틀렸지만 생산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명백히, 두 견해에 대한 어떤 ‘결정적 반박’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어떤 발전된 입장이 ‘기적 불가’ 논증을 뒷받침하는 직관을 포섭하면서 동시에 과학의 이론 변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일관될 수 있다면, 주장건대 이러한 입장은 실용주의와 추측적 실재론보다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이론 변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지 않으면서 (얼마나 잠정적이든지 간에) 이론적 과학의 경험적 성공을 해명하는, 일거양득이 가능하겠는가? 리처드 보이드(Richard Boyd)와 때때로 힐러리 퍼트남은 실재론이 그 자체로 이미 일거양득이라 주장해왔다. 그들은 다소간 명시적으로 내가 그려낸 이론 변화의 상이 부정확하며 따라서 과학 혁명에서 끌어낸 논증은 거짓 전제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어느 정도 “성숙한” 과학의) 과학사에서 실제로는 급격한 이론적 혁명이 나타나지 않는다. 보이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숙한 과학의 역사적 진보는 대체로 진리를 향한 연속적인 더 정확한 근사들의 문제다. 이 진리는 관찰 가능한 현상과 관찰 불가능한 현상 모두와 관계된다. 전형적으로 후속 이론들은 이전 이론에 담겨있는 (관찰적 그리고 이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다른 지면에서 그는 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다음의 (실재론적) 원리를 채택한다고 주장했다. ‘새 이론들은 현재 이론들과 이론적 존재자들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설명(account)의 측면에서 닮아야(resemble) 한다’ 이와 비슷하게 퍼트남은 한때 ‘과학자들이 시도하는 작업은’ ‘이전 이론의 메커니즘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하거나 ‘새로운 메커니즘의 “극한 사례”임을 보이는 것’이라는 점을 이론 변동의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나는 먼저 내가 왜 이러한 주장이 그 자체로서 틀렸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어서 나는 이러한 주장 아래에 타당한 직관이 있으며, 그 직관이 구조적 실재론 또는 구문론적 실재론이라 불릴 다소 다른 입장에 의해 더 잘 파악된다고 주장하겠다. 래리 라우든은 플로지스톤, 칼로릭, 에테르 같은 많은 이론적 존재자의 목록을 인용하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존재자들이 한때 성공적인 이론들에 중요했지만 현재 완전히 거부된 점을 근거로 보이드와 퍼트남의 주장에 반대했다. 라우든의 말처럼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의 이론적 존재자를 완전히 거부했다면, 어떻게 새로운 이론이 낡은 이론과 ‘이론적 존재자들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설명의 측면에서’ 닮을 수 있겠는가? 프레넬의 설명에 따르면 빛의 전파는 편재하는 탄성 매질의 주기적인 진동에 의해 발생하고, 상대론에 따르면 그러한 매질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상대론적 물리학이 빛의 전파에 대한 프레넬 설명의 ‘메커니즘’을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중의 이론들이 프레넬 이론의 핵심 이론적 존재자의 존재를 완전히 거부했는데, 어떻게 과학자들이 프레넬 이론에 ‘새로운 이론들은 지금 이론과 이론적 존재자들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설명의 측면에서 닮아야 한다’는 원리를 적용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보이드는 고전 물리학의 메커니즘이 상대론 물리학 메커니즘의 극한 사례로 다시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라우든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물론 몇몇 고전적 법칙이 상대론의 극한 사례라고 하더라도, 현대 역학의 극한 사례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다른 법칙들과 일반적 주장들이 있다. (예를 들어, 에테르 미세구조의 밀도에 관한 주장, 에테르와 물질 간의 상호작용 특성에 대한 일반 법칙, 에테르의 압축률에 대한 구체적인 모형과 메커니즘들) 이유는 간단하다. 이론은 그 이론의 언어에 등장하지 않는 변수에 값을 할당할 수 없다. … 고전적 에테르 물리학은 많은 메커니즘 가정, 특히 에테르에서의 빛의 전파를 다루는 메커니즘을 포함한다. 이러한 메커니즘들은 특수 상대성 이론 같은 후속 이론에서 도저히 재등장할 수 없다. 후속 이론은 에테르성 매질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며 에테르를 통해 행해졌던 설명적 작업을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으로 성취한다. 라우든의 비판에 대한 실재론자의 적법한 응수가 있는가? 분명 라우든의 예시 중 몇몇은 꽤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보이드와 퍼트남은 세심하게 “본질적” 누적성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성숙한” 이론으로 제한해왔다. 그들에게 라부아지에 이전의 화학은 미성숙한 과학의 대표적인 예고, 따라서 그들은 플로지스톤이 후속 이론에서 완전히 거부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짐작건대 한 때 과학적으로 수용되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라우든의 존재자 목록 중 몇몇도 비슷하게 처리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응수의 설득력은 상당 부분 ‘성숙한’ 과학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어떤 적절하게 엄밀한 설명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보이드와 퍼트남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 것이 없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실재론자가 매우 유용한 사후 설명적(ad hoc) 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는다. 어떤 기존에 수용되었던 이론이 지금 완전히 거부된 것이 분명해 보일 때마다, 그 이론이 수용되었던 시기에 해당 이론이 속한 과학은 자동으로 “미성숙”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적절하게 엄밀하고 독립적인 “성숙함”의 기준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사실 이것이 실재론을 지탱하는 주요한 논증, ‘기적 불가’ 논증으로 “읽힌다(read off).” 앞서 언급한대로 이 논증은 오직 진정한 예측적 성공을 이룬 이론에만 적용된다. 성공은 단순히 이론이 옳은 경험적 귀결을 가지는 것 이상을 의미해야 한다. [단순한 옳은 경험적 귀결은] 이론이 기술하는 어떤 결과는 그것의 발생이 관찰된 이후 고려되어 이론의 틀에 끼워 넣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화학 실험 결과가 플로지스톤 이론에 포섭될 수 있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 그 자체가 플로지스톤 이론을 그럴듯한(likely) 참으로 이끄는 어떤 논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창조과학이 경험 적합해질 수 있다는, 예를 들어 화석 기록에 관해서, 사실이 창조에 대한 창세기(Genesis) 설명의 그럴듯한 참을 지지하는 논증을 수립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물론 이러한 경험 적합성은 쉽게 성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이 그저 “화석”이 찾아지도록 바위와 함께 창조했다는 고시(Gosse)의 단순한 가정을 통해 가능하다. (아마도 우리의 신앙심을 시험하는 것이 신의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들인 형태의 창조론이 화석 기록에 관한 경험적 세부사항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기적이 아니며 이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지표도 아니다. 이러한 예측적 “성공”에 대한 당연한 설명은 단지 이미 알려진 결과를 주어진 틀에 사후적으로(ad hoc) 포섭하는 일이 대개는 쉽다는 것이다. 이론이 이미 알려진 종류의 개별적 사건을 예측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이것이 그 자체로 이론을 지지하는 ‘기적 불가’ 논증을 지탱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가장 임시방편적이고 “꿰어 맞춰진” 이론도 그것이 흡수한 다양한 결과들이 미래에도 지속할 것을 함축한다는 의미에서는 표준적으로 예측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비오(Biot)가 전개한 주전원 입자 빛 이론(heavily epicyclic corpuscular theory of light)은 결정 광학의 몇몇 결과들에 기반을 구고 결정된 파라미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론은 이러한 결과들의 “자연스러운” 일반화가 미래에도 유지될 것을 암시한다) 이론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의 약한 예측성을 지닐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은 (포퍼든 아니든) 실제로 지금까지 항상 같은 결과들을 내놓은 잘 통제된 실험의 결과들을 직관적으로, 귀납적으로 일반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납적 작업의 성공은 물론 그 자체가 충분히 기적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개별 설명적 이론의 그럴듯한 진리 근접성(likely truth-likeness)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기적 불가’ 논증을 뒷받침하는 직관을 끌어내는 것으로 보이는 예측적 성공의 종류는 훨씬 더 강하고 두드러진 형태의 예측적 성공이다. 강한 예측적 성공의 경우에, 단순히 오래된 경험적 일반화의 새로운 사례가 아니라 이론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반화가 도출되고 실험적으로 입증된다. 이러한 사례로는 뉴튼 이론이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행성 궤도의 존재를 예측한 일이 있다. 또한 프레넬의 빛의 파동 이론이 내놓은 불투명 원반의 그림자 중심에 생기는 흰 점의 예측과 당시까지 완전히 생각하지 못했던 원뿔 굴절 현상의 예측이 있다. 따라서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성숙함 개념을 관례처럼 정의하지 않고 남겨두는 대신에, 실재론자들은, 어떤 과학에 포함된 이론이 다음의 쉽게 만족되지 않는 형태의 예측성을 확보한 경우에, 그 과학을 성숙하다고 간주해야 한다. 성숙한 과학의 이론은 현상을 이론에 “적어 놓지” 않은 채로 현상의 일반적인 유형들(types)을 예측한다. 성숙함에 대한 다소 엄밀한 규정(characterize)을 통해, 라우든의 목록 중 수정된 실재론자들이 다루기 어려운 사례가 상당히 줄어든다. 라우든이 ‘한 때 성공적이었던’ 이론들의 예시로 하틀리와 르사주(Hartley and LeSage)의 중력 에테르 이론을 언급한 것을 볼 때, 그는 방금 설명한 예측적 성공의 개념보다 훨씬 약한 경험적 성공의 개념을 다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추측건대 그에게 이론이 성공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론이 기존에 알려진 다양한 관찰 결과들을 포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에] 방금 제시한 종류의 강한 예측적 성공을 요구한다면, 분명히 하틀리와 르사주의 추측적 가설은 이러한 성공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예측적 성공의 기준을 얼마나 강하게 세우든지 간에 그의 목록의 일부 사례는 실재론자에게 문제로 남는다. 나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장 뚜렷한 문제로 보이는 사례인 고전역학의 에테르에 집중해보자. 사실 이 문제는 프레넬이 제안한 고전적인 빛의 파동 이론과 관계된 탄성 고체 에테르에 주목할 때 더욱 선명해진다. 프레넬의 이론은 빛이 광원에서 시작된 주기적인 진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재하는 역학적 매질에 의해 전달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 프레넬 자신이 매질의 ‘실제 존재’를 믿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매질[에테르]은 매우 희석되어 있고 보기 힘들긴 하지만 매질의 어느 ‘부분’이든 평형상태에서 벗어나면 탄성 복원력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여느 역학적 매질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프레넬의 이론이 진정한 예측적 성공을 누렸다는 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러한 성공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단일 슬릿에서 발산하는 빛이 불투명 원반의 그림자 중앙에 만드는 흰 점의 예측을 들 수 있다. 프레넬의 탄성 고체 에테르가 후속 물리학 이론에서 유지 또는 “근사적으로 유지”되었는가? 물론 내가 지금까지 반복해 말했듯이 그리고 실재론자들도 대게 인정하듯이, 한 이론적 존재자가 다른 것으로 근사된다는 개념 또는 한 인과적 메커니즘이 다른 메커니즘의 극한 사례가 된다는 개념은 극도로 모호하고 따라서 대단히 신축적이다(elastic). 그러나 만약 이 개념이 너무 확장된다면 분명히 실재론은 공허한 입장이 된다. 만약 검정이 하양으로 “근사”되고 입자가 “근사적” 파동이며 시공간 곡률이 원격 작용하는 힘으로 “근사”된다면,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론이 미래의 이론과 근사적으로 비슷할 것이라 자신하는 실재론자는 분명히 옳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말하는 바가 거의 없다. 내가 보기에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 프레넬의 탄성 고체 에테르가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유일하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상대론이 등장하기 한참 전에, 맥스웰 이론이 수용되었을 때 이미 일어났다. 맥스웰 자신이 그의 전자기장이 어느 날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역학적 기저(substratum, 본질적으로 프레넬이 믿었던 에테르)로 ‘환원’될 것이란 희망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환원’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장은 결국 원초적 존재자로 수용되었다. 빛은 탄성 매질이 아니라 ‘매질이 없는(disembodied)’ 전자기장의 주기적 진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자기 관점에서 빛을 만드는 변위 전류와 프레넬 이론에서 빛을 만드는 매질의 탄성 진동보다 더 상이한 쌍을 찾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하딘과 로젠버그는 라우든에 대응하여, 프레넬의 탄성 고체 매질이 맥스웰 이론에서 ‘근사적으로 보존’되었다고 볼 것을 (주장한다기보다는) 제안한다. 실재론자는 프레넬이 그동안 계속 전자기장에 대해 말해왔다고 ‘합리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놀라운 제안이다! 라카토슈에 영향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내가 역사의 합리적 재구성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실 과학자가 자기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고 보는 견해는 역사학자가 합리적으로 남겨둘 수 있는 선택지로 보인다. 그러나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은 전적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으며, 사실 그의 사후 50년이 되기까지 이론의 진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허용하는 것, 프레넬이 “사실은”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는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확실히 ‘합리적 재구성’을 너무 멀리까지 끌고 갔다. 과도한 ‘관용’을 베풀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명백히 프레넬은 빛을 운반하는 ‘광학 에테르’가 탄성 고체이며 이것이 본질적으로는 역학의 일반 법칙들을 따른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즉, 에테르는 ‘부분’을 가지며 이러한 부분들이 평형 상태의 위치에서 벗어났을 때 탄성 복원력이 발생한다. 분명히 그는 그렇게 주장했으며, 만약 프레넬 이후의 과학이 옳다면 그는 틀렸었다. 하딘과 로젠버그의 주장은 이에 대한 확고한 자포자기의 표현이다.


4. 구조적 실재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보이드도 무언가 옳은 말을 했다. 프레넬에서 맥스웰로 전환될 때 지속된 중요 요소가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새 이론으로 전달된 성공적인 경험적 내용 이상이다. 동시에 이것은 완전한 이론적 내용의 전달 또는 완전한 이론적 메커니즘의 (“근사적” 형태라 하더라도) 전달보다는 다소 적다. 그리고 이렇게 전달된 것은 하딘과 로젠버그의 믿기지 않는 가정, 프레넬의 이론이 “실제로는” 전자기장에 대한 것이었다는 가정 없이도 포착된다. 전환에는 연속과 누적이 있다. 그러나 내용의 연속이 아니라 형식 또는 구조의 연속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푸앵카레에 의해 고안되고 옹호되었다. 그리고 푸앵카레는 프레넬에서 맥스웰로의 전환 사례를 일반적인 형태의 구문론적 또는 구조적 실재론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러한 입장은 종종 그에게 부여되는 반실재론적 도구주의와는 상당히 다르다. 대체로 잊힌 푸앵카레의 논제가 내게는 ‘기적 불가’ 논증에 동의하면서 과학 이론 변화의 정도에 대한 정확한 해명을 수용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보인다. 거칠게 말해서 프레넬이 빛의 본성을 전적으로 잘못 규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경험적인 예측적 성공을 누린 것은 기적이 아니다. 프레넬 이론의 성공이 기적이 아닌 것은, 이후의 과학이 밝혀냈듯이, 이 이론이 빛에 올바른 구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푸앵카레의 관점은 과학과 가설 에 있는 다음의 구절로 요약된다. 구절은 현재 유행하는 ‘비관적 귀납’에 대한 또렷한 예상으로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과학이론들이 얼마나 단명하는지를 보고 놀란다. 그는 이론들이 짧은 시간 동안 번창하고 차례차례 버려지는 것을 본다. 그는 폐허 위에 폐허가 쌓여 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는 지금 유행하는 이론이 머지않아 차례로 굴복할 것이라 예상한다. 또한 그는 이론들이 결국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바로 이것이 과학의 파산(bankruptcy of science)이다. 그러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의 회의주의는 표면적이다. 그는 과학 이론의 목표와 이론이 작동하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만약 이러한 것을 고려했다면 폐허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좋을 수 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어떤 이론도 빛에 에테르의 운동을 부여한 프레넬의 이론보다 더 탄탄한 기반 위에 세워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만약 맥스웰의 이론이 오늘날 더 선호된다면 이는 프레넬의 작업이 헛된 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프레넬의 목표는 에테르가 진짜로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테르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이러한 원자들이 진짜로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목적은 광학 현상의 예측이었다. 프레넬의 이론은 오늘날의 우리, 그리고 맥스웰의 이전에서도 그러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프레넬의 미분 방정식은 언제나 참이다. 아마 방정식은 항상 같은 방법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통합의 결과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가치를 유지한다. 물론 여기까지는 완벽한 실증주의적 도구주의의 진술로 보인다. 프레넬의 이론은 사실 그것의 경험적 내용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후속 이론에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푸앵카레는 이것이 그의 입장이 아니라고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물리 이론이 단순한 실용적 레시피로 환원된다고 할 수는 없다. 방정식들은 관계를 표현한다. 그리고 식들이 여전히 참이라면 그것은 관계가 실재를 보존하기 때문이다. 식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떤 것과 다른 것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관계가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단지 우리가 전에 그 관계를 운동이라 불렀다면 지금은 전류라 부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저 자연이 우리로부터 계속해서 숨겨놓을 실제 대상을 대체하는 이미지의 이름일 뿐이다. 이들 실제 대상 사이의 참된 관계들 만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실재이다… 비록 맥스웰 이론의 관점에서지만, 푸앵카레는 프레넬이 빛의 본성을 완전히 잘못 규정했으며, 그의 이론이 단순히 빛의 관찰 가능한 효과뿐만 아니라 빛의 구조까지 정확하게 기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탄성 고체 매질은 없다. 대신 이후의 관점에서, (매질이 없는) 전자기장이 있다. 장은 어떤 분명한 의미에서도 에테르의 근사가 아니다. 다만 장의 진동은 역학적 매질의 탄성 진동을 지배하는 법칙과 형식적으로 비슷한 법칙을 따른다. 프레넬은 무엇이 진동하는지에 대해서는 틀렸지만, 이후의 관점에서 보면, 광학적 현상에 대해서 옳았을 뿐 아니라 그 현상이 빛의 진행방향에 수직인 진동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도 옳았다. 따라서 수학적 방정식의 수준으로 제한한다면, (현상 수준이 아님에 주의하라) 실제로 프레넬의 이론과 맥스웰의 이론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다. 프레넬은 다양한 상황에서 반사광과 굴절광의 상대적 세기를 표현하는 유명한 방정식들을 고안했다. 편광되지 않은 일반적인 빛은 입사면에 평행한 성분과 입사면에 수직인 성분으로 나뉜다. I^2, R^2, X^2를 각각 입사면에 평행한 입사광, 반사광, 굴절광의 세기라 하고 〖I'〗^2, 〖R'〗^2, 〖X'〗^2를 각각 입사면에 수직인 입사광, 반사광, 굴절광의 세기라 하자. 마지막으로 입사광과 굴절광이 각각 반사면에 수직인 직선과 이루는 각을 i 와 r 이라 하자. 그러면 프레넬의 방정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R / I =tan⁡(i-r)/ tan(i+r) R' / I'=sin⁡(i-r)/ sin(i+r) X / I = (2sinr∙cosi) / (sin(i+r) cos⁡(i-r)) X' / I'= (2sinr∙cosi) / sin(i+r)

프레넬은 빛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림을 기반으로 방정식들을 전개했다. 빛은 역학적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진동으로 구성된다. 이 진동들은 빛의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발생한다. 편광되지 않은 빛의 경우 진동은 빛의 진행 방향과 수직인 평면 전체에서 발생하며, 이는 진동을 입사면에 평행한 성분과 수직인 성분의 합으로 간주하여 기술될 수 있다. 즉, 진동이 더 클수록 진동을 통해 입자가 평형 위치에서 벗어나는 최대 거리가 커지며 빛이 세진다 (I,R,X 등이 커진다) 진동의 강도와 빛의 세기 측정은 이 값들의 제곱으로 주어진다.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종국에 수용된 맥스웰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위의 설명은 완전히 틀렸다. 어떻게 탄성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는데 진동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프레넬의 이론은 정확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맥스웰 방정식이 진동한다 말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강도,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I,R,X 등을 관련된 전기적 벡터의 진동 강도로 해석한다면, 프레넬 방정식은 맥스웰 이론에서 직접 그리고 완전히 유도된다. 따라서 프레넬 이론이 특정 옳은 예측을 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라 광학 현상 사이의 특정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다, 대체한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프레넬은 빛의 본성에 관해서 전적으로 틀렸다. 그가 상정한 이론적 메커니즘은 새로운 이론의 이론적 메커니즘의 근사도, 극한 사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광학 현상 전체 영역에서 상당히 옳았을 뿐만 아니라, 이 현상들이 주기적 변화를 겪는 빛에 수직인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도 옳았다. 그러나 이어서 푸앵카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레넬의 동시대 사람들이 프레넬이 빛의 본성을 밝혀냈다고 간주하는 것보다, 푸앵카레의 동시대 사람들이 맥스웰이 빛의 본성을 결정적으로 밝혀냈다고, 빛이 진짜로 전자기장의 진동으로 구성됨을 밝혀냈다고 간주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맥스웰이 빛의 본성을 밝혔다는 생각은 만약 맥스웰이 프레넬이 드러낸 관계들을 기반으로 당시까지 서로 관련 없던 것으로 여겨지던 광학 현상과 전자기 현상 사이의 추가 관계를 밝혀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면 실수일 것이다. [즉, 맥스웰이 빛의 ‘본성’을 밝혀냈다고 볼 근거는 없다. 맥스웰 또한 빛의 구조, 관계를 드러냈을 뿐이다] 과학에서의 이러한 중요 사례는 이론 변화가 존재론적 개념의 근본적 대체와 더불어 구조적 수준에서의 누적적 성장을 드러내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사례는 구조적 실재론을 지지한다. 구조의 보존은 단순히 개별 사례의 특징인가? 아니면 성숙한 (즉, 성공적으로 예측적인) 과학에서 일어나는 이론 변화의 일반적 특징인가? 사실 이 개별 사례는 적어도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서 대표성을 결여한다. 프레넬의 방정식은 온전한 형태로 후속 이론에 완전히 넘겨졌다. 방정식은 새롭게 해석되어 다시 등장했지만, 그 자체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더 일반적인 패턴은 이전 방정식이 새 방정식의 극한 사례로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전 방정식과 새 방정식은 엄밀히 말해 서로 일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전 방정식은 새 방정식에서 몇몇 값을 극한으로 취한 형태가 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론이 진정으로 예측적 성공을 성취했다면, 그 이론이 후속 이론으로 대체될 때마다, ‘대응 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가 적용되는 것이 물리학사의 규칙으로 보인다. 규칙은 이전 이론의 수학적 방정식이 새로운 이론의 수학적 방정식의 극한 사례로 재등장할 것을 요구한다. 학자들은 대응 원리를 점점 더 깨닫고 있다. 대응 원리는 새 이론이 현재 이론보다 나은지 평가하는 사후적 요구 조건만이 아니라 종종 새 이론의 실질적 고안을 위한 발견법적 도구로도 작동한다. 보이드는 실제로 대응 원리의 일반적 적용 가능성을 그의 실재론의 증거로 언급했다. 그러나 원리는 순수하게 수학적 수준에 적용되며, 따라서 새 이론의 이론적 기본 가정이 이전 이론의 가정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어떤 분명한 의미에서도 중력의 원격 작용은 시공간 곡률의 “극한 사례” 또는 “근사”가 아니다. 또한 원격 작용 중력 이론의 ‘이론적 메커니즘’이 일반 상대론으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특정한 극한 사례에서 뉴튼의 방정식이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조의 “근사적 연속성”이 있다. 보이드가 지적했듯이, 새 이론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선행 이론의 방정식을 자신의 방정식의 특수 사례로 취함으로써, 선행 이론의 성공적 경험적 내용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대응 원리의 일반적 적용 가능성은 분명히 완전한(full-blown) 실재론의 증거는 아니다. 대신 대응 원리는 오직 구조적 실재론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특별히 이론의 구조적 근사에 관해 더 많은 분류 작업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푸앵카레의 해명이 두 입장을 모두 고려한 과학 이론의 지위에 대한 실재론적 희망이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해명임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푸앵카레의 해명은 과학에서 이론 변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중요성을 충분히 수용하는 동시에 ‘기적 불가’ 논증을 뒷받침한다. 이는 보이드의 실재론에서 맞는 부분을 포착하는 동시에 (“성숙한” 과학에는 순수하게 경험적인 수준보다 높은 다른 수준에서 “본질적인 누적”이 있다) 라우든의 실재론 비판에서 맞는 부분을 포착한다. (누적은 완전히 해석된 최상위 이론적 수준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과학적 실재론에 제기되어 왔던 한 가지 비판이 (맞든지 틀리든지) 구조적 실재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며 끝내겠다. 아서 파인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했다. 실재론은 죽었다… 이 죽음은 양자이론의 해석에 대한 논쟁에 의해 앞당겨졌다. 논쟁에서 보어의 비실재론 철학은 아인슈타인의 열정적인 실재론에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재론은 이전에도 사망선고를 받았었다. 18세기 몇몇 과학자들은 실재론의 죽음이 만유인력의 근원에 대한 논쟁에 의해 앞당겨졌다고 믿었다. (물론 암시적으로 믿었다. 그들은 이를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이 사례에서 실재론이 ‘살해’당한 것은, 암살자[비실재론자]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판명된 추가적인 주장을 실재론이 떠안았기 때문이 분명하다. 이 주장은 과학 이론은 원격 작용과 같은 “이해되지 않는(unintelligible)” 개념을 원초적인 것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재론적 해석은 이해 가능성을 요구하고 이해 가능성은 이론적 기초 개념을 이전에 수용된 (이른바 이전에 “이해된”) 몇몇 형이상학적 틀로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물론 뉴튼 사례에서 틀은 데카르트 접촉 작용의 틀이다) 내가 양자역학의 기초에 대한 (그리고 외람되지만 이론의 모든 특이사항에 대한) 전문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양자역학에 대한 실재론적 입장을 아인슈타인의 입장이라 규정하는 것은, 파인이 뉴튼의 사례와 비슷하게 사실 실재론이 할 필요가 없는 주장을 실재론에 떠넘기는 것으로 보인다. 실재론자는 양자역학적 상태가 원초적일 수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고전적 용어로 이해되거나 환원되거나 정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파인이 실재론에 떠넘기려 하는 주장] 그러나 적어도 구조적 실재론자는 이런 주장에 개입하지 않는다. 사실 그러한 주장과 명시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구성하는 기초 요소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실수라고 주장한다. 그는 종국에 뉴튼 사례에서 일어난 일을 반긴다. 뉴튼 이론은 지속해서 자신이 경험적으로 성공적이라 증명했고, (진정한 원격 작용으로 이해된) 중력은 지속적으로 ‘기계적 환원’을 저항하여 원초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개념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원격 작용은 정전기학 같은 다른 이론의 완전히 수용 가능한, 실재론적으로 해석된 구성요소가 된다) 구조적 실재론자의 관점에서 뉴튼이 실제로 밝혀낸 것은 이론의 수학적 방정식으로 표현된 현상과 진정하게 원초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론적 용어 사이의 관계다.

 구조적 실재론자의 태도가 위와 비슷하게 양자역학에 적용되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관점은 아인슈타인의 ‘고전적’ 형이상학적 편견과 명시적으로 거리를 둔다. 이 편견에 따르면 동역학적 변수는 항상 뚜렷한 값을 가져야 하고 모든 물리적 사건은 초기 조건으로부터 충분히 결정되어야 한다. 대신 구조적 관점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우주의 실제 구조에 달라붙어 있는 듯하며, 미시 시스템의 모든 종류의 현상은 실제로 시스템의 양자 상태에 의존하고 이 상태는 양자 역학이 기술하는 대로 전개되고 변화한다. 물론 이 상태가 ‘거시 시스템’과 상호작용해서 불연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도 중력 상호작용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발생한다고 가정한다. (사실 당연하게도 어떤 이론도 무한 회귀를 감수하면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불연속적 상태 변화를 꼭 설명해야 할 것 같다면, 이는 특정 고전적 가정이 그 본성상 깊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원격 작용이 설명을 “간절히 바라는(cry out)” 것이 데카르트식 역학의 깊게 밴 편견의 반영이라는 생각처럼)

다른 말로, 구조적 실재론자는 그저 이론의 엄청난 경험적 성공의 관점에서 세계의 구조는 (아마도) 양자역학과 비슷할 것이라 주장한다. 양자 상태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실수다. 그리고 고전적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a fortiori) 실수다. (물론 이것이 숨은 변수 프로그램이 명백하게 시작도 할 수 없다거나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게 어쨌든 명백하게 실수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력을 데카르트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시작부터 운명을 다 했다고 구조적 실재론자가 주장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증거가 길을 이끌리라는 것이 유일한 주장이다. 만약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론도 우리가 선호하는 형이상학적 가정과 조화롭게 구성되지 않는다면, 원리들이 얼마나 견고하게 확립되었든, 얼마나 이러한 원리들이 생산적이라고 과거에 얼마나 증명되었든, 궁극적으로 원리들을 포기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가 구조적 실재론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 양자역학을 근거로 하는 실재론의 사망선고는 크게 과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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