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충분히 주의할 수 있는가?" 문서와 "윤리적 짐의 무게" 문서 사이의 차이

PhiLoSci Wiki
(문서 사이의 차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새 문서: {{제목|윤리적 짐의 무게}} 짐 부처(Jim Butcher) 지음, 정동욱 옮김 관광은 전통적으로 느긋한 휴식, 모험, 쾌락 등과 결합되어 있었다....)
 
1번째 줄: 1번째 줄:
폴 골드슈타인 지음, 정동욱 옮김, "우리는 충분히 주의할 수 있을까?", 「윤리적 관광」, 『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 (이음, 2009).


== 번역 ==
{{제목|우리는 충분히 주의할 수 있는가?}}


{{제목|윤리적 짐의 무게}}




폴 골드슈타인(Paul Goldstein), 정동욱 옮김
짐 부처(Jim Butcher) 지음, 정동욱 옮김


<blockquote>관광 산업의 원료는 사람과 문화의 살과 피다.


- 말레이시아 인권 활동가, 세실 라젠드라(Cecil Rajendra)</blockquote>


* 마요르카(Mallorca), 6월, 안젤로의 바 : 영국 신사 차림의 백인 휴가객이 “Paco, dos cervesa por favor”(파코, 맥주 두 잔 줘요!)라고 주문하더니 능글맞게 웃으면서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이 스페인 말투, 정말 쉽지 않냐?”
관광은 전통적으로 느긋한 휴식, 모험, 쾌락 등과 결합되어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휴가는 과중한 업무로부터의 탈출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족과 사회가 정한 도덕적 규제로부터의 탈출 기회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커져가는 윤리적 관광의 압력에 의해 오늘날에는 휴가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때 주로 거론되는 것은 우리의 여행 욕구를 가로막는 자연적, 문화적 장벽들이다.  
* 탄자니아 세렝게티(Serengeti), 1월, 이주 기간 : 사람들이 8대의 소형 버스 사이에 암컷 치타 한 마리를 가둔 채 사냥을 방해한다. 이 40마리의 두 발 달린 포식자들은 이미 점심식사로 배를 채웠으며 저녁도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치타는 아니다. 암컷 치타와 그 새끼는 이제 그들의 먹을거리를 찾아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할 것이다. 아니면 굶거나.
* 인도 뭄바이(Mumbai), 3월, 빈민가 거리 : 울고 있는 아이가 음식을 구걸하며 손을 내미는 장면을 잘 차려입은 행인이 스쳐지나갈 때를 포착해 사진으로 찍는다. 아이의 비참함은 행인의 미끈한 옷과 함께 완벽하게 포착된다.
* 볼리비아 라파스(La Paz), 5월 : 1980년대의 티셔츠를 너무나 갖고 싶었던 한 관광객이 한 시간에 걸친 흥정 끝에 결국 알파카 스웨터 한 벌을 15달러에 사는 데 성공한다.
* 잔지바르 눙위(Nungwi) : 일광욕을 하는 이탈리아 여성 관광객이 자신의 벗은 가슴에 암갈색 선탠 오일을 바르고 있다.
* 카리브 해 도미니카 공화국 : 집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타러 가기 전에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한 관광객이 묵고 있는 비치 호텔의 선물 가게에서 20달러를 쓰고 있다.
* 런던 플리트가(Fleet Street) : 한 언론인이 북부 스리랑카에서 발생한 타밀 호랑이(Tamil Tiger) 습격 사건에 관한 짧은 기사의 교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 티베트 라사(Lhasa) : 한 여행객이 포탈라 궁전(Potala Palace)에 들어가기 앞서 관광 그룹에 합류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이 사례들은 모두 흔히 벌어지는 일이며 또한 모두가 부주의한 행동들이다. 이 모두는 사람들이 현지의 의무와 감수성을 전혀 존중하지 않았거나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했음을, 간단히 말하자면 윤리적 파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종류의 수많은 일들은 어떻게 해서든 억제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제 관광의 타고난 권리 따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게 것이다. 핵심적인 질문은 매우 단순하다. ‘우리는 우리가 여행하는 나라에 대해 주의하고 있는가?’ 만약 이에 ‘별로 그렇지 않다’라고 답한다면, 국제 관광의 앞날은 암담할 것이다. ‘바다, 모래, 섹스, , 값싼 쇼핑’의 풍조는 사려 깊고 안목 있는 여행가를 위해 남겨진 소중한 소수 민족 집단의 멀쩡한 정신까지 삼켜 버릴 것이며,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까지도 파멸과 타락으로 몰고 갈 것이다.  
전통적인 패키지 관광 대신에,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몇 가지의 대안을 제안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태관광, 공동체 관광, 문화적 관광, 녹색 관광 등이 텐데, 이들 모두는 자연을 무척 권장하는 반면에 군중, 리조트, 경솔한 언행, 재미를 금지한다. 그들이 옹호하는 새로운 종류의 관광이 권장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현지 환경을 훼손하고 현지 문화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한때 결백했던 휴가는 이제 유죄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윤리적인 것으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제는 명백하다. 그러나 해법은 어렵고 복잡하며, 많은 경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한 관련된 모든 이들 ― 관광객, 여행사, 관광업자, 호텔 그룹, 항공, 국가의 관광협회 ― 이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끈기를 갖고 행동에 임해야만 한다. 다음은 아주 중대한 질문이다. 쉬운 말로 해보자. 관광객은 무엇을 가지고 오는가, 그들은 무엇을 남기는가,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나는 윤리적 관광이란 ‘비윤리적인’ 패키지 휴가객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그것은 평균적인 관광객에 대한 공격일 뿐이다. 과도한 윤리적 조언은 휴가를 휴가이게 하는 것들을 위축시킨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 의해, 재미는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되고 모험심은 통제받게 된다.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의 조언은 관광객과 현지인이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 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결국 차이를 벌리고 오해를 만들어 낸다.


=== 책임관광의 탄생 ===
=== 윤리 vs. 대중 ===
1970년대에 접어들 무렵, 최초로 자동차들이, 보통은 옛 군용 트럭들이 유럽을 가로질러 아프가니스탄, 네팔, 인도와 같은 전통적인 보루들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이는 몇 안 되는 주류 여행사들이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 땅을 발견하기 위한 값싸고 모험적인 방법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방식의 매력이었으며, 비록 그 시장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스타일로 여행하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오르고 있다. 이들 초창기 탐험대는 길을 내지 않았고 미래의 여행가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지역을 오염시키지도 않았다. 이는 신선한 여행 방식이었고, 여행가와 여행지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개발도상국은 이런 스타일의 여행이 주는 기회로 개발도상국은 돈을 벌었고, 관광객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현지인들의 이익도 증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훈훈한 옛날 이야기는 미래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 새로이 공급된 수많은 비행기와 더불어 더 값싸고 더 자주 다니는 항공편이 등장하면서, 욕구는 많지만 교육은 받지 못한 대중이라고 하는 잠재적 재앙이 등장하게 되었고, 아직 여행의 유아기에 있던 세계는 그 대중에 의해 위태로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관광은 엄청나게 성장해서, 1950년대에 5천만 명이었던 국제 휴가 여행객은 오늘날 8억 명이 되었다(이 수치가 세계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관광이 성장함에 따라 순전히 여가만을 목적으로 햇볕 쨍쨍한 모래사장, 눈 덮인 산, 세계적인 도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졌다. 어쨌든 이는 축하할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관광에서 양심의 목소리가 성장하면서, 매우 드물기는 했지만 그것이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의 일이었다. 불행히도, 대기업, 단체, 주류 여행사들은 아무런 경계심도 갖지 않았던 토착 인구에 수백만 명의 여행객을 쏟아 넣었고, 이는 관광 시장을 성장시키는 동시에 수많은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많은 경우, 그들은 ‘이익’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지역들에 무자비한 상업적 ‘가치’를 부여했으며, 그 영향은 해로운 것이었다. 다른 경우에도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극미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짜증나는 일은 부족한 정보와 무지 때문에, 다수의 관광객들은 어떻게 하면 현지인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휴가를 마치게 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나쁜 의도도 없었다. 다만 부주의와 무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패키지 관광 혁명은 환경 파괴와 문화 충돌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수백만 명에게 여가 여행의 기회를 안겨준 산업은 종종 암울한 색으로 칠해지거나 ‘콘크리트 정글’, ‘술꾼’, 문화적 평준화의 전조로 희화화된다. 위에서 언급한 수치는 축하할 만한 일이 아니라 관광이 너무 멀리 또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인용된다. 대중 관광의 성장에 따른 문제의 예상 규모는 묵시록적 제목이 달린 조나단 크롤(Jonathan Croall)의 책 『보존이냐 파괴냐: 관광과 환경』(''Preserve or Destroy: Tourism and the Environment'')[1995]에 정리되어 있다.


다수의 관광객은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꼴불견인 옷, 햇빛 차단제인 앙브르 솔레르(Ambre Solaire), 면세점에서 사온 술. 그들은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거의 없다. 그들의 돈은 보통 국제 체인점이나 오늘날 관광의 최대 거머리인 일체포괄형(all-inclusive) 호텔에 사전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선탠으로 벗겨진 피부, 흐릿한 행복의 순간들, 콧물과 배탈(runny tummy), 방문지에 관한 유해한 지식.
지난 30여 년 동안, 대중 관광은 경치를 훼손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부족한 자원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문화를 평준화하고, 획일성을 양산하고, 우리 행성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혐오스런 가죽 거래가 매력을 잃어가던 무렵, 일군의 전직-여행가들이 여행사를 차리더니 주류 여행사의 근시안적인 시각에 대항해 외국에 대한 보다 폭넓고 동정적인 시각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여행사들은 분명 여행하러 가는 지역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개발도상국으로의 여행에 진정으로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매출을 내고 있는 곳은 그 중 극소수에 불과하다. 또 자신을 ‘생태(eco)’ 회사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면서도, 그들이 높은 도덕적 기초에 바탕한 항구적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취미 조직으로, 부유한 애호가 임원들의 방랑 욕구를 충족시켜주거나 혹은 사회적 양심을 위한 재빠른 해법을 제공함으로써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중요하다. 물론 그들이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은 책임관광에 정통해 있는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킬 뿐, 아직까지 젖을 떼지 못한 수준인 대중의 요구는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윤리적 관광은 대중 관광에 '''대항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대중관광은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것으로 희화화되어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게, 대중 관광이란 관광객의 숫자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관광객의 유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중’이라는 말은 용법상 경멸적인 함의를 갖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지각없고 무지하며 단순히 군중을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내 사전에서 찾아낸 정의, 즉 ‘대중: 개성이 없는 집단’은 이에 딱 들어맞는다. 이런 점에서 슈퍼마켓과 값싼 음식과 더불어 대중 관광은 현대 산업 대중 사회에서 나타나는 끔찍한 대중 소비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히며, 윤리적 운동가들에게 이는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태’는 주요한 작명 어구로서, 이 동정적인 말은 무엇인가 더욱 암울한 결과에 두루뭉수리한 이름만 제공해줄 뿐이다. 1990년대 초반, 여행 업계에는 두 종류의 ‘생태’ 문구가 신물이 날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이자 관광 컨설턴트인 알루왈리아 푼(Ahluwalia Poon)은 논쟁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관광객이 아닌 여행가가 되자, 사진만 찍고 발자국만 남기자 ===
관광 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 이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적 파괴를 불러온 대중 관광의 위기로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뿌리째 바뀌어야 하는 것은 대중 관광이라는 행위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달콤한 말장난의 고전적인 사례이다. 이 문구들은 사회적 여행의 정체성은 만족시키지만, 실제로는 생색내기용 문구에 불과한 것으로서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자신을 무엇이라고, 예를 들어 본인이 좋아하는 별명이든 보호용 이름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골라 무엇이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장기 비자를 받지 않은 채 자신의 주거지를 떠나 있다면 우리는 모두 관광객으로 정의된다. 이것이 ‘해외’를 여행 중인 우리들 대부분에 대한 정확하고도 정직한 표현이다.  


사진과 발자국이라는 두 번째 슬로건은 교묘하고 사악하다. 이 매끈한 문장은 좋은 의도를 표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진짜 의미를 따져보면 별다른 알맹이가 없다.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면 돈을, 특히 경화(hard currency)[달러처럼 국제적으로 교환 가능한 통화]를 남겨라. 많은 돈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현지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 지역에서 관광이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그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그 가장 좋은 방식은 보상이다. 방문객과 업체를 명백하게 환영하지 않는 경우라면 이것도 존중되어야 한다. 가장 나쁜 것은 관광이 원주민 사회를 ‘보호’한다는 이데올로기적인 미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진보를 방해하는 경우이다. 가난한 사람과 야생동물을 돕는 자선단체 모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방문과 기부가 훨씬 더 진지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관료제와 부패로 점철된 개발도상국에서 국민들에게까지 파급될 수 있는 기부나 보상을 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것이 핑계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과장된 주장에 힘입어, 윤리적 관광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대중 패키지 관광에 비해 높은 도덕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유럽연합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테네리페(Tenerife)섬의 지속가능한 관광 프로젝트는 ‘위협받는 전통 공동체’를 지원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도 대중 관광 개발 집단은 ‘오래된 문화를 멸종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죄를 선고받았다.'''#1''' 이러한 주장들은 패키지 관광과 관광 리조트를 표적으로 삼으면서, 근본적으로 보호주의적인 견해 ― 윤리적 관광의 핵심에 있는 견해 ― 를 피력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들은 해변 가득한 리조트들을 경멸적인 (그러나 아마도 가끔씩은 부러워하는) 눈으로 깔보면서, 느긋한 목동(goat herders)의 신화 연구를 돕고 거기에 거름을 주고 있다.  


‘생태관광’이라는 말을 거부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그 비판의 근거이다. 이 공허한 구절은 개발도상국에 침입한 죄에 대한 무조건반사에 불과할 뿐, 거기에는 아무런 결과물도 없다. 지속가능한, 윤리적인, 책임있는 관광은 이 영역의 유익한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이 복잡하고 감성적인 장기(long-term) 방정식에서 다양한 배역의 참가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아래에서는 각각이 맡을 역할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윤리적 관광은 특정한 성격의 대중 관광과 대중 관광객에 대한 치사한 반대 운동이다. 일례로, 3S(sun, sea, sand: 태양, 바다, 모래)를 제공하는 여타의 여행사와는 달리 독자적인 길을 간다고 주장하는 ‘3T(travelling, trekking, trucking: 여행, 도보 여행, 트럭 여행)’ 회사들을 생각해보자. 그런 여행사들 중 하나인 익스플로어(Explore)는 자신들이 제공하는 휴가를 “휴가에서 싸구려 와인이나 선탠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광고한다. 공동체 관광 가이드(Community Tourist Guide)는 재빠르게도 자신의 휴가를 ‘개성 없는 외양의 주류 관광’이나 ‘피곤하고 따분한 관광’과 차별화시킨다. 몇몇 윤리적 운동가들은 휴가를 즐기는 대중이란 개성 없이 균질적이고 생각 없는 군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휴가를 개인적인 도덕적 미션의 일부로 보지 않고 뻔뻔하게 즐기려고만 드는 우리들은 너무나 천박하고 명랑한, 즉 버릇없고 단순한 인간으로 경멸당하게 된다.


=== 관광객 ===
=== 반(反)재미와 반(反)인간 ===
국제 관광은 조금도 간편해지지 않았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행 예약은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다. 많은 닷컴 기업들 ― 온통 과대 선전에 실체가 없기 일쑤였던 ― 이 최근 문을 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컴퓨터 통신을 통해 직접 휴가를 예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정확히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또는 현지의 생활 방식으로부터 정확히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의 목적지에서 뭔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으로 가는 여행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a) 주류 여행객 (b) 배낭 여행객 (오퍼레이션 롤리(Operation Raleigh)와 같은 단체를 포함해서) (c) 소그룹 여행객.
걱정을 잊고 재미있게 노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휴가의 전부이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재미는 우려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영국의 윤리적 관광 운동 단체 투어리즘컨선(Tourism Concern)의 앨리슨 스탠드클리프(Alison Standcliffe)에 따르면, 걱정을 잊는다는 것은 ‘당신이 평상시 주의하던 것들에 눈을 감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2''' 환경운동가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주류 관광의 음침한 관점을 요약하면서, ‘관광이란 대체로 비윤리적인 활동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재미있게 놀도록 우리를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 이렇게 암울한, 흥을 깨는 견해는 오늘날의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에게 그다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쾌락지상주의 철학’을 윤리적, 지속가능한 관광과 대립되는 것으로 지목한다. 한때 휴가는 순결과 재미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윤리적 관광이란 것이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려 하고 있다.


==== 주류 여행객 ====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의 소설 『천국의 소식』(''Paradise News'')의 등장인물인 인류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는 흥을 깨는 윤리적 옹호자들이 갖는 전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쉘드레이크는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프로이드가 가족에 했던 일을 나는 관광에 하고 있다. 즉 그것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쉘드레이크는 홀로 여행한다. 그의 예민한 약혼녀는 약혼을 파기해버렸다. “그녀는 내가 시종일관 휴가를 분석하느라고 그녀의 휴가를 망쳤다고 말했다.” 윤리적 관광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경험을 해체할 것을, 우리의 행동을 숙고할 것을, 우리의 문화적 환경적 영향을 의식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매년 홀로 영국을 떠나 개발도상국을 방문하는 수백만 명의 여행객들과는 진짜로 차이가 날 수 있는 범주이다. 현재 인기 있는 여행지는 도미니카 공화국, 브라질, 케냐, 탄자니아, 스리랑카, 감비아 등이며 이곳에서는 흔히 전세 버스가 제공된다. 이 때 현지인들은 해변 행상을 하거나, 술집 혹은 음식점을 차리거나, 택시나 보트를 운전하거나, 사찰 관리인을 하거나, 보호구역 관리인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다수의 여행객들이 호텔에서 사육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주변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중에는 가난한 어부를 몰래 사진찍고자 ‘용감하게’ 외출을 감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행동이 침해라거나 결례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다른 문제도 있다. 관광객은 현지 환경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곤 하는데, 이것이 부도덕한 국제업체들에 의해 감추어진다는 점이다. 바디샵(Body Shop)의 창시자인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이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길, “여행을 하면 할수록, 당신은 관광의 어두운 면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쓰레기 청소에 헌신적인 관광업자를 본 적이 없다. 문화는 침략당하고 음식, 언어, 산호초, 토지는 사라져간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윤리적 관광이 재미를 좇는 사람들의 목을 옥죄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이 전체적인 경험을 향상시켜주는 ‘부가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본다. 예컨대, 최근에 발간된 윤리적 관광 잡지 『거기에 있기』(''Being There'')는 ‘휴가로 방문하는 여행지와 그곳 사회에 무엇인가를 보답하고자 하는 펑키하고 모험심 강하며 재미있고 호기심 많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윤리적 소비의 선구자이자 위 잡지의 공동 설립자인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은 당신이 방문하는 곳이 “휴가를 누리던 곳에서 당신이 나누고, 배우고, 성장하는 곳으로 말 그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덧붙인다.'''#4'''


관광객과 관광업자는 단단히 얽혀 있다. 양쪽 모두의 성실한 노력이 없다면, 특히 교육이 없다면 별다른 변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순진한 패키지 관광객이 놓치고 있는 놀라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휴가에서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윤리적 여행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인가? 윤리적 브랜드는 관광객에게 더 즐겁고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휴가를 만드는지에 대한 판단은 왜 관광객에게 맡기지 않는가? 소비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정당한가?[이 문장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되네요]


==== 배낭 여행객 ====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지향형 휴가와 달리, 생태관광과 같은 윤리적 브랜드는 ‘사람’에 대한 독특한 환멸감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자연의 고상함을 찾아 경솔한 행동과 군중, 도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사회를 멀리하자는 것이 아닌가? 생태관광은, 덜 현대적인 존재들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여타의 관광 형태들과 마찬가지로(대부분의 윤리적 관광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자기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듯하다. 흔히 이러한 관광은 자기 자신의 사회가 아닌 보다 자연에 가까워 보이는 문화에서의 고독한 명상을 통해 자아가 발견될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객이 소중히 여기는 원시적인 환경과 다양한 문화는 사실 그들 자신의 탈근대적인 공포와 명백히 반근대적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 반면 대중 관광은 잔치와 군중을, 또 당연히 사람을 즐긴다. 그렇다면 관광의 두 가지 유형 중에서 정말로 ‘사람중심’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무엇일까?
배낭 여행객은 현지 사회에 많은 것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배낭 여행객은 대부분 통상적인 관광객보다는 더 긴 시간을 보내지만 지갑 사정은 일반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윌리엄 서트클리프(William Sutcliffe)의 『당신은 체험당하고 있는가?(''Are You Experienced?'')라는 히스테리컬한 책은 인도를 돌아다니는 극히 질나쁜 배낭 여행객들의 유형을 속속들이 해부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그려낸 광경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책에 묘사된 유형의 젊은 여행객은 매우 오만하고 무례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뒷주머니에 가이드북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을 꽂고서는 돼지우리 같은 여인숙을 뒤지고 다닌다. 아무리 가난해도 낯선 이들을 반갑게 받아주는 사람들의 호의 ― ‘현지인들은 매우 친절하다’ ― 를 등쳐먹고 다니면서, 그들은 자신이 현지 문화에 푹 빠져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배낭 여행객 무리에게 어떤 문도 열어주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마저 존재할 정도이다. 예를 들어 부탄(Bhutan)에서는 현지 정서에 부합하는 방식의 관광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조심스러운 제한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원컨대 그 세금이 부적절한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없기를(이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제 배낭 여행객은 대신 네팔에 가고, 그곳에서도 조직적인 것이라면 모두 멀리 하면서 어떤 것이든 싸게 구하려고 애쓰고 있다. 머리 한편에서는 자신이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보다 거슬리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인도에서 발이 묶인 두 소녀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는데 트럭 운전사가 10루피(각각 15펜스[약 280원] 가량)를 요구했다. 내릴 때쯤 둘 한 명이 가이드북을 훑어보더니 요금이 5루피여야 하는데 운전사가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며 빽빽거렸다 한다. 런던의 택시 운전사한테 그런 행동을 한번쯤 시도해보길 바란다. 원색적인 욕을 들어보고 싶다면 말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휴가에서의 윤리적 행동에 관한 관심이 클럽 18-30(club 18-30)[토머스 쿡의 여행사]류의 ‘술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패키지 관광객에까지 뻗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이 제기했던 논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바퀴를 돌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원래는 환경적 의식이 있던 관광객과 관광업자와 비정부단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중 관광 산업의 파괴 행위를 비판하고 생태관광, 대안적 관광, 녹색 관광, 공동체 관광 등 보다 진보적인 형태의 ‘새로운’ 관광을 제안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제안되었던 해법 일부가 지금은 스스로에게 재검토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주장은 대중 관광이 현지 환경과 전통 문화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흉측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는, 생태관광과 같은 ‘윤리적’ 대안들 또한 관광 산업을 위한 트로이 목마일 뿐이라고 내부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즉 생태관광객이 밟은 곳은 곧이어 덜 모험적인 관광객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주장이지만, 관광객들을 ‘관리할’ 수 있고 ‘한 곳에 함께 모아둘’ 수 있는 장소에 머물게 함으로써, 관광객의 발자국이라는 위협으로부터 야생을 해방시키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블랙풀(Blackpool)과 베니도름(Benidorm)은 지속가능한, 윤리적 관광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인기가 높아진 여행지는 다양한 가이드북에 수록되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가이드북이 앞으로 몇 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 책들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은 채 거기에 어떻게 가는지, 어디서 먹고 묵을 수 있는지, 관광 명소가 어디에 있는지만 가르쳐준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불평을 늘어놓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수록된 가격들은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격 문제로 가게 주인이나 호텔업자와 빈번히 싸우게 된다. 이러한 밉살스러운 하위문화는,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마주하겠다는 의도보다는 누가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많은 장소를 여행할 수 있는지를 놓고 벌이는 동료 여행객과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남들을 신경쓰지 않는 만큼이나 진저리나는 일종의 스포츠 경주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광객을 통제되어야 할 문제거리로 여기는 뿌리 깊은 냉소주의를 전제로 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관광객은 양떼처럼 해변의 감옥에서 살아가는 자발적 죄수가 된다.  


'''진정한''' 스키광 ― 오로지 스키를 타기 위해 아무 일이라도 해치우는 사람들 ― 처럼, 마음씨 넓은 배낭 여행객들도 상당히 많다. 그들은 인정도 많고 씀씀이도 후하다. 꼭 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동정심 그리고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은 현지의 게스트 하우스, 술집, 음식점에 자주 가고 현지 사회의 수입원이 되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가이드북은 묵지 말아야 할 곳을 찾는 일에만 사용된다. 이 사람들은 거의 기본적으로 책임관광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많은 동시대인들이 더럽혀놓은 서구인에 대한 인상을 지우기 위해 그들은 친선 대사처럼 행동한다.
=== 모험의 금지 ===
윤리적 관광은 무엇이 윤리적이고 무엇이 비윤리적인지에 대해 분명한 목록을 갖고 있지 않다(물론 대체적으로 보아 어떤 유형의 휴가는 좋은 것이라고 혹은 나쁜 것이라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신 관광객의 지나친 자유라든가 여행지의 환경적 문화적 연약함이라는 개념에는 상당히 유동적인 도덕관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배낭여행객이나 소위 ‘대중 배낭여행객’이라는 명칭이 붙은 사람들 역시 그 틀 안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 소그룹 여행객 ====
사실, 오늘날의 젊은이들처럼 여행하는 것은 윤리적 여행 집단으로부터 노골적인 적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냉소를 받고 있다. 리비 퍼브스(Libby Purves)는 2001년 『더 타임즈』(''The Times'')에 쓴 글에서 젊은 여행객들에게 ‘분별없는 여행’을 삼가달라고 간청하면서, 영국의 외국 배낭여행객들을 “트라팔가 광장 분수대 주변의 수많은 쓰레기통처럼 널브러져 … 거대한 몸집으로 어슬렁거리는 쇠똥구리”라고 묘사한다. 배낭여행객은 엄청난 자유를 누리지만, 한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우리를 집어삼킬 위험’이 있는 자유이다. 점점 더 많은 장소와 문화가 자유분방한 여행객의 ‘목적지’가 되어감에 따라 더욱 그러해지고 있다. 윤리적 관광은 우리가 지구를 더럽히고 문화를 평준화하는 잠재적 공모자라는 비판적 자기인식을 통해 이 자유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여행자 윤리 수칙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결코 성인(saint)의 수준은 아니지만, 다른 여행객들에 비한다면 희망적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나홀로 여행’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안심과 친교를 위해 그룹에 참여한다. 이들의 가이드는 대체로 현지인이며, 8명에서 16명 규모의 그룹을 이끈다. 에어컨 나오는 전세버스에 앉은 40~59명의 응석받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여행의 최대 즐거움은 교통이나 숙박을 별다른 개성도 없는 국제 호텔에서 허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롱하우스(long house)[북미 인디언들의 전용주택]나 론더벨(rondavel)[아프리카식 원형주택]이나 유르트(yurt)[몽골식 이동주택]에서의 숙박이 소중한 일이 되고, 휴가의 성공도가 인력거, 카누, 3류침대차 여행 등에 의해 측정된다. 그다지 단정한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파티에 자주 참석하며 주인에게도 환영을 받는다.


1990년대에 남부 아프리카 지역의 지상 경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대규모 현지 여인숙들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여행객들은 이 부류의 여행객들을 매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로부터 1년쯤이 지난 후, 현지 관광당국은 방 8개짜리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500달러를 쓰는 소수의 멋쟁이 신사들보다 18명의 여행객으로 꽉 채워진 트럭 한 대가 실제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멸당했던’ 이 여행객들은 경화(hard currency)[달러처럼 국제적으로 교환 가능한 통화]로 비용을 지불했고, 그 돈은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의 손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자유를 누린다는 것, 그것은 내가 평소대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을 하도록 충동질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휴가를 떠나 있더라도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 자제하며 행동할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거나 화나게 만들지 않으면서 즐기고 싶다.


=== 여행업자 ===
통찰력 있는 관광(Tourism With Insight) ‘행동 수칙’
많은 경우에, 악덕 여행업자들은 수년간 윤리적 관광을 정체시킨 주범이다. 여행업자로서의 그들이 지속가능성의 견지에서 볼 때 현지 경제에 상당히 많은 것을 제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행지 국가에 제공해야 할 만큼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달갑지 않은 아이러니이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조직은 소매업체, 주류 도매업체, 그룹 여행 조직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소매업체 ====
여행객과 관광객을 위한 행동 수칙은 많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조언이 담겨 있다. “아이들에게 돈이나 사탕을 주지 마라”(투어리즘컨선). “참고, 친절하고, 신중하라. 당신이 손님이라는 점을 명심하라”(투어리즘컨선). “관광은 세계에서 매우 큰 산업이다. 이 산업은 토착 문화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소중한 외화 공급원이다. 조금만 배려한다면 당신은 미래 세대를 위해 이 진기한 지역을 보존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보호의 벗 Friends of Conservation). “지구의 연약함에 유의하라. 모두가 이를 보존하기 위해 함께 힘쓰지 않는다면, 미래 세대가 즐기려할 때에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여행지들이 여기에 없을지 모른다는 점을 명심하라”(생태관광 십계 ― 미국여행사협회[American Society of Travel Agency]).
20년 전부터 많은 소매업체들은 도매업체와 위계적으로 통합되면서 전혀 다른 중요성을 갖게 되었고,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거대한 합병이 일어났다. 10년 전에도 그들이 냉혹한 비즈니스에서 주로 고려했던 것은 회계사와 주주의 만족이었다. 이것이 ‘시장 점유율’을 위한 경주와 얽혀들면서 윤리적 파국으로 가는 완벽한 조리법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온라인 예약자의 증가와 더불어 무자비한 경쟁 및 소매 대리점 과잉으로 인해, 구두 서비스는 비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소매상들이 변함없이 팔고 있는 것은 할인 상품이다. 즉 적어도 15%가 할인된 가격으로 대량 판매되는 400파운드짜리 휴가 상품으로서, 이런 상품들은 여행객 한 사람 당 몇 파운드에 불과한 차익을 남긴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비스가 회복될 때까지는 거대 비즈니스의 이념이 여행객과 작은 개인 소매업체 모두를 인질로 삼은 채 돈을 뜯어낼 것이다. 소매업체들의 직원은 초라한 임금을 받으며 고객 서비스는 예전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영국 대중이 자신의 휴가를 희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 가는 것은 재앙일 뿐이라는 불길한 예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향후 10년 동안은 전적으로 여행 대행사를 통해 예약을 할 것이다.


전문적인 회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할인과 서비스라는 이름의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은 작은 회사들도 꽤 있으니까 말이다. 몇몇 복합회사(multiple)들 역시 살아남을 것이다(나머지는 가치를 잃고 점차 잊혀져갈 테지만). 그러나 작은 체인이나 독립업자들은 점점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인색해져가고 있는 항공 수수료도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수칙들의 증가는 전통적으로 독립심과 실험정신과 결합하여 추구되어온 활동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오늘날, 배낭여행객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에 가고 어디에 가지 말아야 하는지, 어디서 돈을 써야 하는지에 관해 넘쳐나는 설교들로 둘러싸여 있다. 모험을 찾는 많은 젊은 배낭여행객들에게, 윤리적 관광은 ‘머릿속 부모’의 역할을 한다. 즉 다닌 곳은 청소하고, 정숙하게 지내며, 인도 위로만 걸어다니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윤리적 관광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수록, 소매업체들이 고객 기반에 대해 더 나은 정보를 알게 될 것은 분명하다. 최근 티어펀드(Tearfund)의 조사에 따르면, 65%의 여행객이 휴가를 갈 때 여행 대행사나 여행업자로부터 현지 경제에 기여하고 환경을 보존하며 책임 있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절반 이상은 좋은 노동 조건을 보장하고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문화된 규약을 가진 회사에서 휴가를 예약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무적인 통계는 여전히 묵살당하고 있다.  
(이제는 『러프 가이드』(''Rough Guides'')나 비행기 탑승 비디오나 현지 관광사에서까지도 듣게 되는) 윤리적 행동 수칙의 증가는 중요한 경향을 보여준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와의 협상은 갈수록 어려운 일로 묘사되는 추세이다. 관광객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현지 문화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동시에 그 문화로부터 경의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지에게 돈을 줄지 말지조차도 수칙에 포함된다. 인간의 기본 활동에서 윤리적 문제로의 이러한 전환은 때때로 충격적이어서, 우리는 우리가 휴가처럼 평범한 일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까먹기 쉽다.


==== 주류 도매업체 ====
윤리적 수칙의 제작자는 젊은 여행객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해결할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는 면에서 볼 때 이러한 가정은 여행의 긍정적 기능을 떨어뜨린다. 이는 문화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이 실수로부터 배울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억제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한다. 결국 윤리적 수칙은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기도 전에 무엇이 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여행은 우리를 다른 장소, 다른 문화로 데려가지만, 윤리적 관광은 우리에게서 위험을 꺼리고 조심스러워 하는 정신이 함께한다는 보장을 얻고 싶어한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멋대로 진짜 모험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도매업체들은 순전히 이윤에 따라 움직인다. 자신들이 환경을 돌본다는 거짓말을 적어 넣은 몇 해 전의 300쪽짜리 브로셔는 그들의 양심을 살짝 엿볼 있게 해준다. 그 브로셔는 다양한 환경 단체에서 쓰던 녹색 상징을 멋대로 갖다 쓰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각 여행객으로부터 일정액을 적립해 기부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는 빈말에 불과하다. 그 액수는 한 사람 당 1파운드 정도에 불과했으며,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기록도 거의 남지 않았다. 주주들에게 보고를 하게 될 정도로 회사가 크게 성장하면 이러한 작은 양보 조치들마저도 중단되고, 그 회사에는 그런 조치들이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지게 된다. 이는 그들의 대략적인 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식당 주인, 생태-환경주의자, 소형 호텔업자, 해변 노점상에 이르기까지, 분노에 찬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은 현재의 상태를 바꾸기에는 너무 약하다. 과거에 도미니카 공화국은 카리브 해의 작고 가난한 섬이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지금도 여전히 작고 가난한 섬이다. 이제는 747 제트기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비행기는 날아다니면서 세계에서 가장 고요한 바다를 순항하는 커다란 수상 호텔에 승객들을 쏟아붓는다. 수상쩍게도 이 수상 호텔은 호텔이 아닌 배로 분류되어 있다. 승객들은 각 섬을 방문하면서 미리 정해진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게 되며, 그들의 잠자리는 선내에 정갈하게 마련되어 있다.
1902년에 작품 『어둠의 심장』(''The Heart of Darkness'')에서 여행에 대한 갈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묘사했던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여행에 대해 무척이나 남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카리브 해의 다른 많은 호텔들처럼, 현재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대다수의 호텔은 일체포괄형(all-inclusive) ― 그 안에 모든 것이 갖추어진 ― 고립지역이다. 여행객을 실어나르는 것은 호텔 버스이다. 그들은 호텔로 단체 소풍을 온 것이고 혼자서는 절대로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거기 있는 동안에는 경화가 되었든 연화가 되었든 간에 단 한 푼도 현금을 쓸 필요가 없다. 요금은 일체포괄 방식으로 선불로 지불되고, 일체포괄의 개념은 그저 편리한 패키지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그 함의는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슈퍼클럽(Superclubs)[초대형 리조트 회사의 하나]이나 샌달(Sandals)과 같은 국제 체인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리지만, 현지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보잘 것 없는 파이 조각뿐이다. 이는 어떻게 보아도 괘씸한 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지도에 열광했었다. 나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시간을 꿈꾸었고, 영광스러운 탐험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당시의 지구상에는 공백이 많이 있었고, 지도상에서 유난히도 나를 초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을 볼 때면(사실 모든 곳이 그렇게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어른이 되면 여기에 갈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일체포괄형 숙박시설에는 많은 잠재적인 문제 사례들이 있다.
이 구절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켜왔고, 비록 현재의 지구상에는 ‘공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단지 모험과 호기심이라는 의미에서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과 관련된 윤리적 짐은 여행객의 모험 정신에 수갑을 채울 위험이 있다. 오늘날의 여행객들은 사람과 장소에 미칠 영향에 유의하고 조심할 것과 ‘무언가를 돌려줄 것’을 권고받는다. 그러나 만약 여행이 정말 삶을 확장해주는 활동이나 특별한 경험이기 위해서는, 무모하든 신중하든 충동적이든 준비성 있든 간에 그들을 믿고 맡겨야만 한다. 윤리 수칙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는 모험과 발견의 정신보다는 신중의 정신만을 키울 뿐이다.


* 세인트루시아(St Lucia)의 고통받던 현지 상인, 식당, 술집, 가게들은 수지를 맞추기 위해 모든 일체포괄형 여행객에게 2%의 세금을 도입해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정부는 그 제안에 호의적이었지만, 강력한 일체포괄형 회사들의 압력에 굴복해 결국 거부하게 되었다.  
사실, 휴가에서의 개인 행동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오도된 것이다. 제시된 조언은 보통 개발보다는 자연을 우선시하자는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서 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칙인 것처럼 제시된다. 개발도상국으로 가는 관광객이 호텔보다 현지 사회에서 휴가비를 쓰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이는 시골에 일정한 이익을 산출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써 도시 내 서비스 산업의 이익은 줄어들 수도 있는 것이다. 산호 목걸이를 사지 않으면 산호 보호에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상인은 조금 더 가난해질 수도 있다. 골프장의 과도한 물 사용 때문에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면, 우리는 물은 보호할 수 있지만 고액을 지불하는 골프 관광객으로부터 사람들이 수입을 얻어 인프라를 개선할 가능성은 부정하는 셈이 된다. 결국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나 수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수칙들은 여행지 국가를 돕는 것보다는 관광객을 규제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개인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심사숙고하고 논쟁해야 할 문제이다. 윤리적 지침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결정을 규제하려는 노력은 바보짓이다. 그것은 대리 부모를 연상시킬 뿐이다. 젊은 여행객들이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 사람들 말이다. 더욱더 바보스러운 것은 보호를 그 출발점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수칙이 빈번히 적용되는 개발도상국들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보호라는 강요된 관념이 아니라 개발이기 때문이다.
* 감비아의 외국계 관광업자들은 정부의 일체포괄형 리조트 금지령을 반대했다. 그러나 관광과 관련이 있는 감비아 국민들 중 99%가 금지령에 호의적이었으며, 실제로 선윙(Sunwing) 호텔은 이 금지령 때문에 문을 닫기도 했다. 이는 마치 주민의 승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이 금지령은 해제될 참이기 때문이다.
* 1989년 멕시코 정부는 개발을 이유로 칸쿤 반도(Cancun Peninsula)의 와툴코(Huatulco)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가게 주인이었던 마리나 가르시아(Marina Garcia)는 이렇게 증언한다. “해변에 위치해 있던 우리 마을에는 500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기념품 가게나 노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어떤 달엔 벌이가 괜찮지만 어떤 달엔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월세 80파운드도 지불하지 못할 정도이다.


주민들이 ‘공공’ 해변에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자메이카에서는 해안에서 주민들이 노는 것이 불법이다. 할인, 시장 점유율, 일용품 판매, 대안 결여, 이 모든 것들이 해로운 하위문화를 더해가고 있는데, 이는 매년 현지인들과 환경으로부터 희망을 앗아가고 있다. 이들 중 가장 큰 범죄는 여행객들이 보다 윤리적인 휴가를 위해 추가적인 돈을 지불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추가적인 돈을 지불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대형업자들도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자신이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현지 주민과 윤리적 관광 단체 외에 그들에 대한 '''실제적인''' 압력이 조금이라도 있는가? 없다. 있을 것 같지도 않다.  
=== 오해의 야기 ===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휴가를 가고 싶어하는 자유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특정한 유형의 자유, 즉 관광객(혹은 적어도 나쁜 관광객)으로부터의 자유는 간절히 기원한다. 사회, 특히 시골 사회는 관광으로 인해 위험에 직면한 것으로 간주되며, 자칭 그 사회의 대변인들은 자신들이 전통 사회의 정수로 여기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 그룹 여행 조직 ====
이런 분위기에서 프로옉토 앰비엔털 테레리페(Proyecto Ambiental Tenerife)[테네리페 환경 계획]의 지속가능한 관광 프로젝트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삶의 풍부한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프로젝트는 그 목적을 위해, 자원 활동가들에게 보호여행을 가서 전통기법의 농사와 수제품 판매를 돕고 오라고 독려한다. 대중 관광과 같은 외부 영향은 ‘획일성의 단조로운 바다’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윤리적 선봉대는 자신의 역할을 이러한 문화적 공습에 직면해 있는 시골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의 미션 진술에는 그 역할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현지 문화를 존중하라. … 이는 절대적이다.
이들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은 올바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면, 경쟁적인 항공 요금 하에서는 이익을 남기기에 충분한 수의 항공편을 띄우지 못해 이들 중 많은 수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시장 점유율’, ‘다양성’, ‘고객 관리’와 같은 마케팅 교리뿐만 아니라 이 관광 분야의 성장 과정에 주입되고 있는 논란 많은 ‘신규’ 자본 때문에, 그들의 미래는 이중으로 불확실하다. 만약 그들이 시장에서 사장된다면 이는 전체 산업에 손실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잘 하는 것은 동정적인 눈과 현지 지불용 경화를 준비시켜 여행객 그룹을 세계 구석구석의 개발도상국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많은 배낭 여행객들처럼 그들 역시 현지 가이드를 채용하고 낙후지역의 관광명소를 찾아 간다.  


이 회사들은 자금이 풍부하지 않고, 그들 모두는 점점 회계사의 요구, 손익 재무제표의 횡포 그리고 ‘벤처 자본’이라는 이름의 트로이 목마의 주입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특히 벤처 자본은 회사의 영혼을 거세한다. 훌륭하고 철저했던 원칙들은 종종 타협의 대상이 되고 곧 소진된다. 전부가 암울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여행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를 고수하는, 윤리적으로 건전한 작은 회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것들을 막아내기에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그들은 현지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지속가능한 원칙을 사용하며, 고객이 방문하는 많은 나라에 대해 진지하게 걱정한다. 많은 보상을 주면서 적은 영향을 주는 관광, 이는 주류 업체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원칙이다.
현지 문화에 대한 이러한 경외감은 현지인과 관광객이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이는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에게는 핵심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는 출발점으로 가정되는 반면에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소망과 욕구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문화적 접촉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심스러워 하는 접근법이 등장하게 된다.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의 인류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의 방식처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의 접촉은 항구적인 문화적 딜레마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윤리적 수칙의 증가는, 관광객과 현지인은 너무 달라서 우리를 안내해줄 한 벌의 윤리적 규칙 없이는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관점을 드러내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덜 드는 저가 휴가는 관광 달력의 일부가 되었지만 이는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수준과 질이 떨어지는 휴가를 종종 맛보게 되는 소비자의 경우에는 특히 그럴 것이다. 근거리 관광 시장의 경우, 지리적으로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저가 관광의 질주는 붙잡아 세우기에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러나 저가 관광의 윤리적, 금전적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해법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보다 단순하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이 세인트루시아(St Lucia)에서 보낸 휴가 얘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그는 여종업원에게 어떻게 사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는데, 이는 당연히 윤리적 관광객이 해야 하는 종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여종업원은 손님의 기대에 맞추어 전통 의상을 입고서, 본토에서의 삶의 방식을 어설프게 읊어댔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 연기(role playing)의 맥락에서는 공감이나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나의 지인은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고, 그 젊은 여성은 여행을 위해, 잘 되면 외국에서의 유학을 위해 열심히 저축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술을 좀 더 마시고 문화적 규범이 느슨해지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소망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들을 갈라놓은 장벽은 물질적 불평등이었지 물신화된 ‘문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의 짜릿함은 장벽이 제거되고 서로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윤리적 관광은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그들을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관광객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른바 문화적 차이에 대한 과도한 조심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의 인간성을 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서로 배우고 친구가 될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 개발도상국으로의 저가 관광 상품을 모두 중단한다.
문화를 통해 현지인과 관광객을 보는 것은 관광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 특징이다. 윤리적 관광은 현지인과 관광객을 문화적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분리된 세계에 사는 것으로 그린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관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들은 관광을 일종의 문화 변용(acculuturation), 즉 “둘 또는 그 이상의 문화적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발생하는 문화적 변화”라고 간주했다.'''#5''' 분명, 우리가 서로 다른 ‘문화적 시스템’에서 출발하게 된다면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으로 가진 것은 간과되기 쉬울 것이다. 현지인의 문화에 위협을 가하는 관광객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동정심(sympathy)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공감(empathy)에 대해서는 장벽을 만들 뿐이다.  
# 이 중단 선언을 널리 공표한다.
# 그동안 저가 상품을 내놓느라 손해 본 만큼의 돈을 개발도상국의 지속가능한 관광 자선단체에 내놓는다.


이 지역으로의 여행은 전체 여행 목적지의 작은 부분밖에 차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공표의 효과는 아주 클 것이다. 여행객은 이 윤리적 운동을 ‘구매’할 것이고, 회사는 아무런 금전적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저가 할인으로 인해 빠져나갔던 돈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구감시연대(Earthwatch) 아마존 전통 문화 휴가의 자원 활동가들은 피라바스(Pirabas) 사람들의 풍부한 구전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통은 ‘현대 문화, 즉 텔레비전의 공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지구감시연대의 공공 유인물). 우리 문화로부터 현지 문화를 보호하겠다는 바람은 그들에게 텔레비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바람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윤리적 관광객은 현지인들에게 무엇이 적합하고 무엇이 적합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식으로 현지의 규정된 문화를 도덕적으로 격상시키는 작업은 크리스핀 티켈 경(Sir Crispin Tickell)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는 경제적으로 덜 발달한 지역에서의 관광을 언급하면서, 인간본성은 “어떤 회색의 중도적 기준에 우리를 가두기보다는 우리의 차이를 찬양”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6''' 이러한 주장들에서 평등에 대한 침해가 시작되는데, 윤리적 관광객은 관광지 국가가 가난하더라도 보존되는 것을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 현지업체 ====
BBC의 『고아의 사람』(''Our Man in Goa'')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클리브 앤더슨(Clive Anderson)은 “[관광객은 고아와 같은 곳이 아닌] 다른 갈 곳을 찾아야만 한다. 유로 디즈니처럼 … 별로 연약하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손상될 만한 가치도 거의 없는 그런 곳으로 말이다”(BBC TV, 1995)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고아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관광객의 문화보다 연약하면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지 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감수성이 낳는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장벽을 쌓을 뿐이다. 실제로, 많은 고아 사람들은 관광에 긍정적이다. 특히 관광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익과 더 나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윤리적 옹호자들이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다. 문화에 주목하다보면 사람을, 즉 우리와 비슷한 욕망을 가진 사람을 놓치기 쉽다.
윤리적 관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현지 매니저가 갖는 도덕적 임무는 국제적인 주류 도매업체만큼이나 크다. 그들은 어느 호텔에서 묵을지, 무슨 버스업체를 이용할지 등등을 말 그대로 ‘현지에서’ 결정한다. 비용 삭감이나 엉터리 서비스를 초래할 수도 있을 압력을 업체로부터 받기도 하지만,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몇몇 나라의 경우, 그들은 정부로부터 엄중한 통제를 받는다.


===== ''티베트'' =====
문화적 차이의 우선성에 대한 가정은 많은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의 쓸모없는 교의가 되었다. 현지인 문화 대 관광객 문화라는 틀에 박힌 문화적 대립 구도는,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이 공통점이라는 시각에서는 거의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의 요구, 바람, 열망을 공유할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크게 늘고는 있지만 아직은 여전히 극히 제한된 부류에만 허용되어 있는 국제 관광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도 그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오직 경제 성장과 문화적 변화의 맥락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감수성을 장려하던 중 어딘가에서, 이해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사라져버린 듯하다.
중국은 티베트의 현지 관광 가이드를 중국인 직원으로 교체하고 있다. 티베트 사람인 가이드가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을 서구 관광객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중국은 허용할 없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이 점령 권력으로서 통상적으로 자행하는 윤리적 유린이나 부도덕한 행동의 일부 사례일 뿐이다. 자기 나라로의 입국을 금지당한 달라이 라마는 여행객들에게 계속 티베트를 방문해줄 것을 간청하면서, 특히 티베트인들의 관광 시설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현재 세계적인 국제업체들 중에서는 단 두 곳만이 중국/티베트에서 독자적인 차량을 운행하면서 중국 정부가 정해준 것이 아닌 여행객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쿠바'' =====
관광은 다른 지역과 문화에서 온 사람들 사이의 접촉과 관련된다. 어떤 이들은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말에서 그 위험성을 느끼지만, 차이에 대한 통념은 무너질 수도 있다. 문화적 역충격 ― 엄청난 차이를 예상했지만, 매우 다른 상황에 있음에도 우리와 같은 것을 바라고 비슷한 질문과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그것 ― 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여행의 짜릿함에는 우리 사회나 문화 바깥의 사람과 만나서 관계를 맺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행지를 문화적 상징으로, 즉 현대적인 삶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사회의 대표로 보는 것은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서 관광을 통해 얻을 있는 경험의 잠재성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지나친 조심성은 공통의 인간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만다.
관광업체들이 그려낸 쿠바의 이미지는 푸른 바다, 향기 나는 담배 연기, 삼바와 살사의 쾌활한 리듬들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바라데로(Varadero)의 엄격히 통제된 거처에서 이를 경험하게 되니까 말이다. 지역 화폐로 보통의 시민은 기초적인 생필품만을 구입할 수 있으며, 그래서 100달러를 벌기 위해 쿠바의 춤 강사는 일주일 내내 관광객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33살의 춤 강사인 다미안 디아즈(Damian Diaz)에 따르면 이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만약 춤을 배우는 학생들과 함께 내가 공공장소에 있으면, 경찰은 나를 멈춰 세우고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거예요. 내가 마약 밀매를 하지는 않을까 의심하기 때문이지요. 관광지에서 뭔가를 먹고 싶거나 관광지 해변에 가고 싶어도, 나는 그럴 없어요. 쿠바인들은 그곳에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이는 단지 호텔의 문제가 아니며, 정부와도 관련된 문제이다. 이는 잠시 후에 논의할 것이다. 쿠바 내국인에 대한 이런 제한 조치들 중 일부는 카스트로가 만든 것이다.  


==== 항공사 ====
=== 결론 - 집에 있는 게 더 낫다? ===
그들이 도울 수 있을까? 그렇다. 그것도 아주 쉽게. 개발도상국으로의 새로운 항로를 하나 개척하고 나면, 그들은 곧 그 나라와 국민에 대해 엄청난 권력을 얻게 된다. 자신이 실어 나른 관광객들이 항공사만이 아니라 현지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곳 정부와 관광 부서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현지 국민들과 가깝게 일해야 한다. 가난한 세계로의 여행에 대한 여행객들의 걱정은 개발도상국에서의 관광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높아진 인식을 항공사가 보여줌으로써 완화될 수 있다. 영국 항공(British Airways)의 호소문 ‘좋은 일을 위한 거스름돈’은 승객들의 잔돈이나 거스름돈을 모아 현지 자선 사업에 기부하는 사업으로서, 하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의 윤리 정책은 임원에서부터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져야 하며 또 소화되어야 한다. 항공사의 엄청난 영향은 그런 후에야 적절하게 제어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 비판에 얹혀 있는 불안의 논리에 따르면, 관광은 무엇인가,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이 아닌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 생태관광의 옹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관광은 수천 여행객의 수동적인 사치로 남아 있다. 이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 관광협회 / 정부 ====
사치의 장소에서, 윤리적 관광의 신조는 관광이란 특정한 도덕적 의제 ― 그 기초에 문화를 위치시키고 천한 관광객을 주요한 위협으로 지적하는 ― 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장소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형태의 관광(윤리적 관광)은 좋지만, 순전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해로운 것으로서 암묵적인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행 경험이 많은 녹색 옹호자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는 여행은 ‘여행으로 인해 마음이 넓어지는 극히 소수에게’만 유익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백만 명 중 십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소수의 계몽은 분명 관광이 그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7'''고 이야기한다. 성인군자 행세를 하는 휴가 비판가들에게 있어, 관광은 다양한 문화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관점을 따르는 도덕적 의제의 일부일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윤리적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는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보편적인 기준으로서 제시된다.
개발도상국에서는 이 둘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 관광협회는 정부로부터 전액 또는 일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운영되며, 시장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협회의 활동은 이 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미지는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공개적인 선전을 통해 이미지를 높이는 것은 좋은 관광협회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재난과 같은 사건으로부터 입게 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능력 또한 핵심적이다. 홍콩, 뉴질랜드,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유럽 국가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현재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관광협회들은 대부분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관광협회들은 직원도 부족하고 재정도 너무나 부족하다. 그들의 정부가 저지르는 잘못이 여기에 있다. 관광객의 달러는 간절히 원하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우는 소리만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긁어모으는 돈은 어마어마하지만 현지 경제와 실제 여행객이 얻는 이익은 보잘 것이 없다.  
만약 이 의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윤리적 관광객이며, 조지 몽비오의 판단에 따르면 자연 세계의 기형물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집에 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사실, 이는 녹색당(Green Party)의 제니 존스(Jenny Jones)가 내렸던 결론과 완전히 동일하다. 존스는 뉴버리(Newbury) 우회로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 ''케냐'' =====
얼마나 많은 뉴버리 사람들이 거기에 가보았겠는가.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잃게 될 것을 깨닫는다면, 우회로에 대한 지역적인 반대는 꺾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될 것이다. 과연 그들이 도로 건설을 허가하고, 결국 그 길을 이용해 유럽으로 드라이브를 가서는, 자기 집 현관 앞에 버려져 있는 장소와 별반 다를 것도 없을 시골 어딘가에서 휴가를 보내려 하겠는가?
관광으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면서도 동아프리카의 이 나라에 놓인 도로는 왜 최악인 것일까? 본국을 떠나기 전에 각 관광객이 내는 50달러의 비자 비용은 어떻게 된 것일까? ‘돈과 현재’만을 생각하는 태도는 엄청난 해악을 끼치고, 전망의 결여는 실제적인 개발을 방해하고 있다.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처럼 부패와는 거리가 먼 정치가가 관여할 때 외국의 원조도 급증하고 관광에서도 그 이익이 현지 주민과 야생 동물 모두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 ''우간다'' =====
‘관광은 친환경적일 수 있는가?’(Can Tourism Be Green), ''Green World'', 1996년 3월
지역적인 문제는 도덕적 의무 또한 포함하고 있다. HIV/에이즈 초창기에 무세베니(Museveni) 대통령은 전국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그것을 세계에 알렸다. 지금 그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질병율이 여전히 높기는 하지만, 감소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 ''남아프리카'' =====
이러한 입장은 관광객을 순진하거나 부주의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러한 자제 요구에는 모종의 위선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스는 그녀의 글 말미에 그녀의 여행 목록을 나열했는데, 그녀는 세이셸(Seychelles)과 레소토 왕국(Lesotho)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터키, 크레타, 에티오피아, 키프로스, 이집트, 아부다비에서 일과 여행을 했다. 이것을 과연 지행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음베키(Mbeki) 대통령은 모든 의학적 소견을 무시한 채 HIV의 기원에 관해 얼토당토 않은 말들을 퍼뜨림으로써 언론과 의학 종사자들 모두로부터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포스트-만델라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말았다. 세상 최고의 관광협회를 가졌다 할지라도, 만약 당신의 정부가 추락하고 있다면 모든 활동은 무위가 될 것이다.  


===== ''브라질'' =====
이제 관광은 도덕적 금지와 비판적 자기인식의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여행은 더 이상 좋은 일이 아니게 되었다. 관광에는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고와 윤리적이 되라는 경고가 항상 따라다닌다. 환경단체 아크(Arc)의 소책자 ‘태양, 모래사장, 그리고 세계 구하기’에서부터 꼭 여행할 필요가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하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의 조언에 이르기까지, 관광은 이제 윤리 수칙의 영역이 되었고 꼬치꼬치 죄를 캐묻는 곳이 되었다. 유럽을 횡단하겠다거나 조금 더 먼 지역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충동적이고 무모한 욕망은 이제 더 이상 그리 좋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모험을 좇는 여행가는 제약을 받는다. 태양 숭배자는 눈총을 받는다. 재미 애호가는 ‘파괴적 산업’의 공범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휴가 여행이 윤리적 관광에 의해 그러한 도덕적 금지의 대상이 된 적은 없으므로 우리는 그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의 휴가를 더욱더 즐기면서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가고자 한다.
몇 해 전까지 브라질 관광협회에는 영국 지부가 없었다. 그래서 브라질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축구, 암살단, 강도, 파벨라(favellas)[브라질의 빈민촌], 우범 지대와 같은 것들만을 떠올렸다. 이 모두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에서 접한 내용들이었다. 현재 이러한 시각은 바뀌었다.


===== ''모리셔스(Mauritius)'' =====
미주
가끔은 압력이 효과를 가질 때가 있다. 최근에 환경부는 블루 베이(Blue Bay) 해양 국립공원에 호텔을 신축하겠다는 건설 신청을 기각시켰다. 생태계를 망가뜨리기 쉽고 해양 오염의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러한 성공은 보기 드문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려는 너무나 자주 무시되기 때문이다.


===== ''잔지바르'' =====
1. Proyecto Ambiental promotional literature, 1997
영국 단체 투어리즘컨선(Tourism Concern)의 엄청난 압력이 없었더라면, 현재 섬의 북부 끝자락에서는 골프장, 공항, 호화로운 호텔을 짓는 40억 달러짜리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을 것이다. 원래의 계획에서는 반도에 거주하는 2만 명의 주민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결정과정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으며, 칸쿤(Cancun)의 멕시코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던 집에서 쫓겨날 참이었다. 정부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선 중 하나에 거대한 얼룩을 남기면서도 이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게스트하우스나 작은 호텔, 어부와 농부의 생계까지도 위협을 받았고 섬세한 산호초들 역시 위험에 처했었다.


이는 관광 개발의 어두운 측면들로서, 외부인을 상대로 한 홍보 방송들은 이런 내용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빈번히 원칙을 무시하는 정부와 결탁한 이들은 인권 침해에 대한 어떠한 목소리도 손쉽게 짓밟아버린다. 호의적인 정부의 지원을 받아 풍부한 재정으로 정직하게 운영되면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관광사무소,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장기적인 관광 산업이 지속가능한 성공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2. 『보존이냐 파괴냐: 관광과 환경』(''Preserve or Destroy: Tourism and the Environment''), 1995, p. 56


==== 미디어 ====
3. 『가디언』(''Guardian''), 1999년 5월 15일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는 격한 표제나 과장된 보도를 통해 한 나라 관광의 성장 잠재력을 꺾어버리는 능력이 있다. 편집자와 광고주에게는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이다. 한 나라를 칭찬하는 것보다는 비난하는 것이 훨씬 쉽다. 몇 분 사이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린다. 과도한 일반화에 빠지지 않고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인 것이다.


‘터키에서의 지진’은 흑해 지역 전체를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는다. 한 소녀가 말라위(Malawi)에서 살해당하면, 아프리카 동남부 전체가 그런 곳이 되어버린다.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5년 전보다 명백하게 더 위험한 곳이 되었지만, 어떤 잔학 행위에 관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보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행 책자들 또한 그다지 나을 것이 없는데, 이들은 윤리적 관광에 대해 얄팍한 립 서비스만으로 일관하고 있다. 감비아에 동정적인 척하는 최신 책자를 보면, ‘신선한 것, 식상한 것’(What's hot and what's not)이라는 소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의심스러운 조언이 붙어 있다. “호텔 밖으로 나서는 관광객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위협받게 될지 모른다.”
4. Tourism Concern Press Release, 2001


민주적 권리를 외쳐대는 정치가들 역시 별 도움은 주지 않는다. 짐바브웨는 정의를 위해 울부짖고 있었지만 이웃 나라들은 발뺌하기에 바빴고, 영연방 회원국들은 제명 문제를 두고 말을 흐렸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중대한 3월 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이 분쟁에 큰 무게를 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분쟁 지역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떨어진 서부 아프리카를 방문했고, 거기서 그가 무기를 판 것은 물론이고 다이아몬드와 기름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상투적인 립 서비스들을 더욱더 부정직해 보이게 만들었다.
5. D. Nash, 『관광 인류학』(''The Anthropology of Tourism'') 1996, 나의 강조


근래의 휴가 관련 방송 프로그램은 구독률이나 시청률 수치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에, 주류 미디어는 평범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마이클 펄린(Michael Palin)의 프로그램은 따라 하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그가 방문한 나라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안락의자에 앉아서 보고 즐기는 프로그램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주류 프로그램들은 지루하고, 예측가능하며, 생색내기에 가깝다. 작거나 가난한 나라에는 별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대형업체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 보다 야심찬 텔레비전 프로가 나올 때까지는, 시청자들은 또 다른 주디스, 줄리엣, 존 혹은 샹카(Shanka)가 또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전부 다 먹을 때까지 그 모습만을 지켜보거나, 또 하나의 뜨거워진 수영장 옆에 또 하나의 일광욕실이 들어앉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 프로그램에서처럼 B급 유명인들이 개발도상국에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는 경악스러운 행위는 그들의 미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바이버』(''Survivor'') 시리즈는 영락없는 주류 프로로서, 현지인들에게는 보잘 것 없는 보상만을 해주고 있고, 촬영으로 인한 자연 훼손은 촬영 기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6. 『생태관광: 지속가능한 선택지』(''Ecotourism: A Sustainable Option''), 1994, 서문


사람들이 휴가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휴가지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며, 따라서 그들은 ‘전문가’의 조언에 의존하기 쉽다. 영국 정부를 대변하는 외무부 웹사이트는 사람들에게 시리아, 이란, 스리랑카, 수단, 에티오피아, 우간다는 무조건 피해야 할 나라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사실 이 나라들에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호의적이고 친절하다고 할 수 있을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다른 나라와의 정상적인 접촉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7. ''The Green Travel Guide'', 1998
 
관광과 관련된 보다 기초적인 환경 문제들도 있다.
 
# 등산 활동의 증가는 배수 및 하수 처리 문제, 산길 침식, 동식물 생활 침해 등을 일으킬 수 있다.
# 장기 순항 여객선은, 제대로 관리되고 확실히 자급자족하지 않는 경우에는 오염을 일으켜 현지인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으며, 오수를 방류함으로써 수생 식물들을 파괴할 수도 있다.
# 호텔과 골프 리조트는 식물과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해변과 절벽을 침식시키고 지리적 특성을 파괴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물을 낭비한다.
# 모든 관광 개발에서의 물 수요 증가는 흔히 관광객이 몰리는 시즌의 물 부족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고통 받는 것은 현지 사회이다.
 
이들은 단순하고 명백한 사례들이지만, 관광 개발 업체에서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 '''결론''' ===
도입부의 사례들을 재검토해볼 시간이다.
 
* 마요르카(Mallorca), 6월, 안젤로의 바 : 윤리적 관광은 개발도상국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몇 기초적인 말을 흉내내는 걸 갖고 현지 말투를 완전히 이해하는 척하는 것은 무식하고 무례한 일이다. 제대로 배우는 수고를 하라, 그러고 나서 당신의 진정한 노력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반응하는지 보라.
* 탄자니아 세렝게티(Serengeti), 1월, 이주 기간 : 집을 떠나기 전에 그 지역과 야생동물에 대해 숙지하라. 일단 가이드와 운전사의 조언을 잘 듣고, ‘가까이 가달라’며 돈을 건네지 마라. 당신이 들어서게 된 땅이 사람의 것이든 짐승의 것이든 존중하라.
* 인도 뭄바이(Mumbai), 3월, 빈민가 거리 : 가난한 사람의 궁핍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면모 따위는 없다. 그래서 그 사진으로 그 굶주린 아이를 얼마나 돕겠다는 말인가? 꼭 찍어야 한다면 찍어도 좋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사진을 보내줄 이름과 주소를 물어보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하라.
* 볼리비아 라파스(La Paz), 5월 : 개발도상국이라는 이유만으로 통화의 가치가 갑자기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옷값을 깎으려고 조르는 그 손님에게 15달러라는 돈이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무척 적은 돈이겠지만, 그 옷을 팔아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노점상에게는 간절한 돈일 것이다. 그러니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라.
* 잔지바르 눙위(Nungwi) : 이슬람 국가에 가면 그곳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라. 그러기 싫다면 그런 노출이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곳으로 여행하라. 약간의 교육과 배려는 개발도상국에 큰 도움이 된다.
* 카리브 해 도미니카 공화국 : 최소한 현지 가게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려고 노력하라. 현지 상인들에게 조금이나마 이익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다.
* 런던 플리트가(Fleet Street) : 뉴스는 뉴스다. 그러나 그 짧은 기사가 그 나라의 관광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의 지리학적 지식은 몹시 엉성하기 때문에 잠재적 관광객들은 쉽게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관계되어 있는 좁은 지역을 정확하게 명기하고 무서운 얘기를 과장하지 말라.
* 티베트 라사(Lhasa) : 당신의 여행사를 조심스럽게 선택하라. 대부분은 비민주적인 독재 정부의 암묵적인 후원자일 테니까 말이다.
 
희망은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현재처럼 모든 관광에서 보다 윤리적인 접근이 철저히 무시된다면 그 희망은 소진될 것이며, 윤리적 임계 질량(critical mass)은 파탄날 것이다. 이 산업의 주요 참가자들은 윤리적 관광을 위해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 하며, 대의를 실천하라며 작은 회사들의 등만 떠밀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작은 회사들은 정부만 믿고 긴장을 풀면 안 된다. 리우(2001)와 남아프리카 공화국(2002)에서 큰 대가를 치른 지구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신문의 한 귀퉁이를 얻어낸 것을 빼면 별 소용이 없었다. 직접행동이 곧장 뒤따라야만 한다.
 
관광은 사업이다. 그러나 초대형 개발을 통해 국제적인 재벌 그룹, 사장, 주주의 호주머니로는 사자와 같은 동물들의 몫마저도 흘러 들어가는 반면 현지 국가에 돌아가는 몫은 거의 없는, 그런 식의 재산 분배와 이윤 분배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새로이 가게 될 여행지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일 수 있다. 인도, 네팔, 페루, 멕시코는 백만 명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파운드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들은 관광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관광은 많은 이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관광은 너무 잦은 부작용을 동반하며, 또 그 이익은 현지 주민들을 빼놓고 분배되기 일쑤이다.
 
정부, 관광협회, 미디어뿐만 아니라 여행사와 항공사들 역시 장기적인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지 국가들과 협력해야 하고, 그들의 관심사를 경청해야 한다. 새로운 사업의 금전적 결과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을 현지의 요구에도 민감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꼭 얻어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으로 수행되기만 한다면, 양쪽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관련 항목 ==
윤리적 관광 목차
{{윤리적 관광 목차}}

2022년 3월 8일 (화) 13:43 판


윤리적 짐의 무게


짐 부처(Jim Butcher) 지음, 정동욱 옮김


관광은 전통적으로 느긋한 휴식, 모험, 쾌락 등과 결합되어 있었다. 지난 몇 세대 동안, 휴가는 과중한 업무로부터의 탈출뿐만 아니라 어쩌면 가족과 사회가 정한 도덕적 규제로부터의 탈출 기회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커져가는 윤리적 관광의 압력에 의해 오늘날에는 휴가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때 주로 거론되는 것은 우리의 여행 욕구를 가로막는 자연적, 문화적 장벽들이다.

전통적인 패키지 관광 대신에,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몇 가지의 대안을 제안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태관광, 공동체 관광, 문화적 관광, 녹색 관광 등이 될 텐데, 이들 모두는 자연을 무척 권장하는 반면에 군중, 리조트, 경솔한 언행, 재미를 금지한다. 그들이 옹호하는 새로운 종류의 관광이 권장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현지 환경을 훼손하고 현지 문화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한때 결백했던 휴가는 이제 유죄 상태가 되었다. 그것이 윤리적인 것으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윤리적 관광이란 ‘비윤리적인’ 패키지 휴가객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그것은 평균적인 관광객에 대한 공격일 뿐이다. 과도한 윤리적 조언은 휴가를 휴가이게 하는 것들을 위축시킨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 의해, 재미는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되고 모험심은 통제받게 된다. 그렇게까지 나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의 조언은 관광객과 현지인이 어울릴 수 없을 것이라 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결국 차이를 벌리고 오해를 만들어 낸다.

윤리 vs. 대중

관광은 엄청나게 성장해서, 1950년대에 5천만 명이었던 국제 휴가 여행객은 오늘날 8억 명이 되었다(이 수치가 세계 인구의 15%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관광이 성장함에 따라 순전히 여가만을 목적으로 햇볕 쨍쨍한 모래사장, 눈 덮인 산, 세계적인 도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아졌다. 어쨌든 이는 축하할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패키지 관광 혁명은 환경 파괴와 문화 충돌로 가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수백만 명에게 여가 여행의 기회를 안겨준 산업은 종종 암울한 색으로 칠해지거나 ‘콘크리트 정글’, ‘술꾼’, 문화적 평준화의 전조로 희화화된다. 위에서 언급한 수치는 축하할 만한 일이 아니라 관광이 너무 멀리 또 너무 빨리 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인용된다. 대중 관광의 성장에 따른 문제의 예상 규모는 묵시록적 제목이 달린 조나단 크롤(Jonathan Croall)의 책 『보존이냐 파괴냐: 관광과 환경』(Preserve or Destroy: Tourism and the Environment)[1995]에 정리되어 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대중 관광은 경치를 훼손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부족한 자원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문화를 평준화하고, 획일성을 양산하고, 우리 행성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윤리적 관광은 대중 관광에 대항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대중관광은 비윤리적이고 무책임한 것으로 희화화되어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에게, 대중 관광이란 관광객의 숫자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관광객의 유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중’이라는 말은 용법상 경멸적인 함의를 갖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지각없고 무지하며 단순히 군중을 따라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말이다. 내 사전에서 찾아낸 정의, 즉 ‘대중: 개성이 없는 집단’은 이에 딱 들어맞는다. 이런 점에서 슈퍼마켓과 값싼 음식과 더불어 대중 관광은 현대 산업 대중 사회에서 나타나는 끔찍한 대중 소비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히며, 윤리적 운동가들에게 이는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이자 관광 컨설턴트인 알루왈리아 푼(Ahluwalia Poon)은 논쟁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관광 산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 이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환경적 파괴를 불러온 대중 관광의 위기로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 뿌리째 바뀌어야 하는 것은 대중 관광이라는 행위이다.

이러한 과장된 주장에 힘입어, 윤리적 관광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대중 패키지 관광에 비해 높은 도덕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유럽연합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테네리페(Tenerife)섬의 지속가능한 관광 프로젝트는 ‘위협받는 전통 공동체’를 지원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는데, 여기서도 대중 관광 개발 집단은 ‘오래된 문화를 멸종의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죄를 선고받았다.#1 이러한 주장들은 패키지 관광과 관광 리조트를 표적으로 삼으면서, 근본적으로 보호주의적인 견해 ― 윤리적 관광의 핵심에 있는 견해 ― 를 피력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후원자들은 해변 가득한 리조트들을 경멸적인 (그러나 아마도 가끔씩은 부러워하는) 눈으로 깔보면서, 느긋한 목동(goat herders)의 신화 연구를 돕고 거기에 거름을 주고 있다.

윤리적 관광은 특정한 성격의 대중 관광과 대중 관광객에 대한 치사한 반대 운동이다. 일례로, 3S(sun, sea, sand: 태양, 바다, 모래)를 제공하는 여타의 여행사와는 달리 독자적인 길을 간다고 주장하는 ‘3T(travelling, trekking, trucking: 여행, 도보 여행, 트럭 여행)’ 회사들을 생각해보자. 그런 여행사들 중 하나인 익스플로어(Explore)는 자신들이 제공하는 휴가를 “휴가에서 싸구려 와인이나 선탠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광고한다. 공동체 관광 가이드(Community Tourist Guide)는 재빠르게도 자신의 휴가를 ‘개성 없는 외양의 주류 관광’이나 ‘피곤하고 따분한 관광’과 차별화시킨다. 몇몇 윤리적 운동가들은 휴가를 즐기는 대중이란 개성 없이 균질적이고 생각 없는 군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휴가를 개인적인 도덕적 미션의 일부로 보지 않고 뻔뻔하게 즐기려고만 드는 우리들은 너무나 천박하고 명랑한, 즉 버릇없고 단순한 인간으로 경멸당하게 된다.

반(反)재미와 반(反)인간

걱정을 잊고 재미있게 노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휴가의 전부이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재미는 우려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영국의 윤리적 관광 운동 단체 투어리즘컨선(Tourism Concern)의 앨리슨 스탠드클리프(Alison Standcliffe)에 따르면, 걱정을 잊는다는 것은 ‘당신이 평상시 주의하던 것들에 눈을 감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2 환경운동가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는 주류 관광의 음침한 관점을 요약하면서, ‘관광이란 대체로 비윤리적인 활동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희생을 대가로 재미있게 놀도록 우리를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 이렇게 암울한, 흥을 깨는 견해는 오늘날의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에게 그다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저자는 ‘많은 사람들의 쾌락지상주의 철학’을 윤리적, 지속가능한 관광과 대립되는 것으로 지목한다. 한때 휴가는 순결과 재미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윤리적 관광이란 것이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려 하고 있다.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의 소설 『천국의 소식』(Paradise News)의 등장인물인 인류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는 흥을 깨는 윤리적 옹호자들이 갖는 전형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쉘드레이크는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프로이드가 가족에 했던 일을 나는 관광에 하고 있다. 즉 그것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쉘드레이크는 홀로 여행한다. 그의 예민한 약혼녀는 약혼을 파기해버렸다. “그녀는 내가 시종일관 휴가를 분석하느라고 그녀의 휴가를 망쳤다고 말했다.” 윤리적 관광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의 경험을 해체할 것을, 우리의 행동을 숙고할 것을, 우리의 문화적 환경적 영향을 의식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윤리적 관광이 재미를 좇는 사람들의 목을 옥죄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이 전체적인 경험을 향상시켜주는 ‘부가 장치’로서 기능한다고 본다. 예컨대, 최근에 발간된 윤리적 관광 잡지 『거기에 있기』(Being There)는 ‘휴가로 방문하는 여행지와 그곳 사회에 무엇인가를 보답하고자 하는 펑키하고 모험심 강하며 재미있고 호기심 많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윤리적 소비의 선구자이자 위 잡지의 공동 설립자인 아니타 로딕(Anita Roddick)은 당신이 방문하는 곳이 “휴가를 누리던 곳에서 당신이 나누고, 배우고, 성장하는 곳으로 말 그대로 움직이게 된다”고 덧붙인다.#4

여기에는 순진한 패키지 관광객이 놓치고 있는 놀라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휴가에서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윤리적 여행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인가? 윤리적 브랜드는 관광객에게 더 즐겁고 더 만족스러운 것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무엇이 좋은 휴가를 만드는지에 대한 판단은 왜 관광객에게 맡기지 않는가? 소비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항상 정당한가?[이 문장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되네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지향형 휴가와 달리, 생태관광과 같은 윤리적 브랜드는 ‘사람’에 대한 독특한 환멸감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자연의 고상함을 찾아 경솔한 행동과 군중, 도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사회를 멀리하자는 것이 아닌가? 생태관광은, 덜 현대적인 존재들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여타의 관광 형태들과 마찬가지로(대부분의 윤리적 관광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자기내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듯하다. 흔히 이러한 관광은 자기 자신의 사회가 아닌 보다 자연에 가까워 보이는 문화에서의 고독한 명상을 통해 자아가 발견될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윤리적 관광객이 소중히 여기는 원시적인 환경과 다양한 문화는 사실 그들 자신의 탈근대적인 공포와 명백히 반근대적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경에 불과하다. 반면 대중 관광은 잔치와 군중을, 또 당연히 사람을 즐긴다. 그렇다면 관광의 두 가지 유형 중에서 정말로 ‘사람중심’이라고 불릴 만한 것은 무엇일까?

주목할 만한 것은, 휴가에서의 윤리적 행동에 관한 관심이 클럽 18-30(club 18-30)[토머스 쿡의 여행사]류의 ‘술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패키지 관광객에까지 뻗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이 제기했던 논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바퀴를 돌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원래는 환경적 의식이 있던 관광객과 관광업자와 비정부단체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중 관광 산업의 파괴 행위를 비판하고 생태관광, 대안적 관광, 녹색 관광, 공동체 관광 등 보다 진보적인 형태의 ‘새로운’ 관광을 제안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제안되었던 해법 중 일부가 지금은 스스로에게 재검토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주장은 대중 관광이 현지 환경과 전통 문화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흉측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최근에는, 생태관광과 같은 ‘윤리적’ 대안들 또한 관광 산업을 위한 트로이 목마일 뿐이라고 내부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즉 생태관광객이 밟은 곳은 곧이어 덜 모험적인 관광객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주장이지만, 관광객들을 ‘관리할’ 수 있고 ‘한 곳에 함께 모아둘’ 수 있는 장소에 머물게 함으로써, 관광객의 발자국이라는 위협으로부터 야생을 해방시키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블랙풀(Blackpool)과 베니도름(Benidorm)은 지속가능한, 윤리적 관광의 궁극적 목표가 아닐까?

이러한 주장에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광객을 통제되어야 할 문제거리로 여기는 뿌리 깊은 냉소주의를 전제로 하는 논리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관광객은 양떼처럼 해변의 감옥에서 살아가는 자발적 죄수가 된다.

모험의 금지

윤리적 관광은 무엇이 윤리적이고 무엇이 비윤리적인지에 대해 분명한 목록을 갖고 있지 않다(물론 대체적으로 보아 어떤 유형의 휴가는 좋은 것이라고 혹은 나쁜 것이라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신 관광객의 지나친 자유라든가 여행지의 환경적 문화적 연약함이라는 개념에는 상당히 유동적인 도덕관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배낭여행객이나 소위 ‘대중 배낭여행객’이라는 명칭이 붙은 사람들 역시 그 틀 안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의 젊은이들처럼 여행하는 것은 윤리적 여행 집단으로부터 노골적인 적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냉소를 받고 있다. 리비 퍼브스(Libby Purves)는 2001년 『더 타임즈』(The Times)에 쓴 글에서 젊은 여행객들에게 ‘분별없는 여행’을 삼가달라고 간청하면서, 영국의 외국 배낭여행객들을 “트라팔가 광장 분수대 주변의 수많은 쓰레기통처럼 널브러져 … 거대한 몸집으로 어슬렁거리는 쇠똥구리”라고 묘사한다. 배낭여행객은 엄청난 자유를 누리지만, 한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우리를 집어삼킬 위험’이 있는 자유이다. 점점 더 많은 장소와 문화가 자유분방한 여행객의 ‘목적지’가 되어감에 따라 더욱 그러해지고 있다. 윤리적 관광은 우리가 지구를 더럽히고 문화를 평준화하는 잠재적 공모자라는 비판적 자기인식을 통해 이 자유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여행자 윤리 수칙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집을 떠나 자유를 누린다는 것, 그것은 내가 평소대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짓을 하도록 충동질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휴가를 떠나 있더라도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러한 위험을 피하고, 자제하며 행동할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을 다치게 하거나 화나게 만들지 않으면서 즐기고 싶다.

통찰력 있는 관광(Tourism With Insight) ‘행동 수칙’

여행객과 관광객을 위한 행동 수칙은 많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조언이 담겨 있다. “아이들에게 돈이나 사탕을 주지 마라”(투어리즘컨선). “참고, 친절하고, 신중하라. 당신이 손님이라는 점을 명심하라”(투어리즘컨선). “관광은 세계에서 매우 큰 산업이다. 이 산업은 토착 문화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소중한 외화 공급원이다. 조금만 배려한다면 당신은 미래 세대를 위해 이 진기한 지역을 보존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보호의 벗 Friends of Conservation). “지구의 연약함에 유의하라. 모두가 이를 보존하기 위해 함께 힘쓰지 않는다면, 미래 세대가 즐기려할 때에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여행지들이 여기에 없을지 모른다는 점을 명심하라”(생태관광 십계 ― 미국여행사협회[American Society of Travel Agency]).

이러한 수칙들의 증가는 전통적으로 독립심과 실험정신과 결합하여 추구되어온 활동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오늘날, 배낭여행객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에 가고 어디에 가지 말아야 하는지, 어디서 돈을 써야 하는지에 관해 넘쳐나는 설교들로 둘러싸여 있다. 모험을 찾는 많은 젊은 배낭여행객들에게, 윤리적 관광은 ‘머릿속 부모’의 역할을 한다. 즉 다닌 곳은 청소하고, 정숙하게 지내며, 인도 위로만 걸어다니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러프 가이드』(Rough Guides)나 비행기 탑승 비디오나 현지 관광사에서까지도 듣게 되는) 윤리적 행동 수칙의 증가는 중요한 경향을 보여준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화와의 협상은 갈수록 어려운 일로 묘사되는 추세이다. 관광객은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며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현지 문화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동시에 그 문화로부터 경의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지에게 돈을 줄지 말지조차도 수칙에 포함된다. 인간의 기본 활동에서 윤리적 문제로의 이러한 전환은 때때로 충격적이어서, 우리는 우리가 휴가처럼 평범한 일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까먹기 쉽다.

윤리적 수칙의 제작자는 젊은 여행객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해결할 기회를 봉쇄해버린다는 면에서 볼 때 이러한 가정은 여행의 긍정적 기능을 떨어뜨린다. 이는 문화적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회피함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이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억제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자유로운 사고를 제한한다. 결국 윤리적 수칙은 우리가 문제에 직면하기도 전에 무엇이 답이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여행은 우리를 다른 장소, 다른 문화로 데려가지만, 윤리적 관광은 우리에게서 위험을 꺼리고 조심스러워 하는 정신이 함께한다는 보장을 얻고 싶어한다. 우리가 그것을 잊고 멋대로 진짜 모험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1902년에 작품 『어둠의 심장』(The Heart of Darkness)에서 여행에 대한 갈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묘사했던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는 여행에 대해 무척이나 남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나는 지도에 열광했었다. 나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시간을 꿈꾸었고, 영광스러운 탐험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당시의 지구상에는 공백이 많이 있었고, 지도상에서 유난히도 나를 초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을 볼 때면(사실 모든 곳이 그렇게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어른이 되면 여기에 갈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이 구절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을 고무시켜왔고, 비록 현재의 지구상에는 ‘공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단지 모험과 호기심이라는 의미에서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과 관련된 윤리적 짐은 여행객의 모험 정신에 수갑을 채울 위험이 있다. 오늘날의 여행객들은 사람과 장소에 미칠 영향에 유의하고 조심할 것과 ‘무언가를 돌려줄 것’을 권고받는다. 그러나 만약 여행이 정말 삶을 확장해주는 활동이나 특별한 경험이기 위해서는, 무모하든 신중하든 충동적이든 준비성 있든 간에 그들을 믿고 맡겨야만 한다. 윤리 수칙을 정식화하려는 시도는 모험과 발견의 정신보다는 신중의 정신만을 키울 뿐이다.

사실, 휴가에서의 개인 행동을 위한 지침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오도된 것이다. 제시된 조언은 보통 개발보다는 자연을 우선시하자는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서 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규칙인 것처럼 제시된다. 개발도상국으로 가는 관광객이 호텔보다 현지 사회에서 휴가비를 쓰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이는 시골에 일정한 이익을 산출할 수도 있겠지만, 이로써 도시 내 서비스 산업의 이익은 줄어들 수도 있는 것이다. 산호 목걸이를 사지 않으면 산호 보호에는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상인은 조금 더 가난해질 수도 있다. 골프장의 과도한 물 사용 때문에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는 운동을 한다면, 우리는 물은 보호할 수 있지만 고액을 지불하는 골프 관광객으로부터 사람들이 수입을 얻어 인프라를 개선할 가능성은 부정하는 셈이 된다. 결국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나 수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수칙들은 여행지 국가를 돕는 것보다는 관광객을 규제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개인들은 다른 상황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심사숙고하고 논쟁해야 할 문제이다. 윤리적 지침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결정을 규제하려는 노력은 바보짓이다. 그것은 대리 부모를 연상시킬 뿐이다. 젊은 여행객들이 집에 두고 왔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 사람들 말이다. 더욱더 바보스러운 것은 보호를 그 출발점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그 수칙이 빈번히 적용되는 개발도상국들이 절박하게 요구하는 것은 보호라는 강요된 관념이 아니라 개발이기 때문이다.

오해의 야기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휴가를 가고 싶어하는 자유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특정한 유형의 자유, 즉 관광객(혹은 적어도 나쁜 관광객)으로부터의 자유는 간절히 기원한다. 사회, 특히 시골 사회는 관광으로 인해 위험에 직면한 것으로 간주되며, 자칭 그 사회의 대변인들은 자신들이 전통 사회의 정수로 여기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프로옉토 앰비엔털 테레리페(Proyecto Ambiental Tenerife)[테네리페 환경 계획]의 지속가능한 관광 프로젝트에서는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의 삶의 풍부한 다양성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프로젝트는 그 목적을 위해, 자원 활동가들에게 보호여행을 가서 전통기법의 농사와 수제품 판매를 돕고 오라고 독려한다. 대중 관광과 같은 외부 영향은 ‘획일성의 단조로운 바다’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윤리적 선봉대는 자신의 역할을 이러한 문화적 공습에 직면해 있는 시골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음의 미션 진술에는 그 역할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현지 문화를 존중하라. … 이는 절대적이다.”

현지 문화에 대한 이러한 경외감은 현지인과 관광객이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이는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에게는 핵심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는 출발점으로 가정되는 반면에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소망과 욕구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이로부터 문화적 접촉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심스러워 하는 접근법이 등장하게 된다. 데이비드 로지(David Lodge)의 인류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의 방식처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의 접촉은 항구적인 문화적 딜레마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윤리적 수칙의 증가는, 관광객과 현지인은 너무 달라서 우리를 안내해줄 한 벌의 윤리적 규칙 없이는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관점을 드러내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보다 단순하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이 세인트루시아(St Lucia)에서 보낸 휴가 얘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그는 여종업원에게 어떻게 사는지를 진지하게 물었는데, 이는 당연히 윤리적 관광객이 해야 하는 종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여종업원은 손님의 기대에 맞추어 전통 의상을 입고서, 본토에서의 삶의 방식을 어설프게 읊어댔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 연기(role playing)의 맥락에서는 공감이나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나의 지인은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사람이었고, 그 젊은 여성은 여행을 위해, 잘 되면 외국에서의 유학을 위해 열심히 저축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술을 좀 더 마시고 문화적 규범이 느슨해지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공통된 소망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들을 갈라놓은 장벽은 물질적 불평등이었지 물신화된 ‘문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행의 짜릿함은 장벽이 제거되고 서로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윤리적 관광은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그들을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관광객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른바 문화적 차이에 대한 과도한 조심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의 인간성을 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서로 배우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문화를 통해 현지인과 관광객을 보는 것은 관광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 특징이다. 윤리적 관광은 현지인과 관광객을 문화적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분리된 세계에 사는 것으로 그린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흐름에서 관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들은 관광을 일종의 문화 변용(acculuturation), 즉 “둘 또는 그 이상의 문화적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발생하는 문화적 변화”라고 간주했다.#5 분명, 우리가 서로 다른 ‘문화적 시스템’에서 출발하게 된다면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으로 가진 것은 간과되기 쉬울 것이다. 현지인의 문화에 위협을 가하는 관광객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동정심(sympathy)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공감(empathy)에 대해서는 장벽을 만들 뿐이다.

예컨대, 지구감시연대(Earthwatch) 아마존 전통 문화 휴가의 자원 활동가들은 피라바스(Pirabas) 사람들의 풍부한 구전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통은 ‘현대 문화, 즉 텔레비전의 공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지구감시연대의 공공 유인물). 우리 문화로부터 현지 문화를 보호하겠다는 바람은 그들에게 텔레비전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바람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윤리적 관광객은 현지인들에게 무엇이 적합하고 무엇이 적합하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식으로 현지의 규정된 문화를 도덕적으로 격상시키는 작업은 크리스핀 티켈 경(Sir Crispin Tickell)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는 경제적으로 덜 발달한 지역에서의 관광을 언급하면서, 인간본성은 “어떤 회색의 중도적 기준에 우리를 가두기보다는 우리의 차이를 찬양”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6 이러한 주장들에서 평등에 대한 침해가 시작되는데, 윤리적 관광객은 관광지 국가가 가난하더라도 보존되는 것을 오히려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BBC의 『고아의 사람』(Our Man in Goa)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클리브 앤더슨(Clive Anderson)은 “[관광객은 고아와 같은 곳이 아닌] 다른 갈 곳을 찾아야만 한다. 유로 디즈니처럼 … 별로 연약하지 않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손상될 만한 가치도 거의 없는 그런 곳으로 말이다”(BBC TV, 1995)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고아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관광객의 문화보다 연약하면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현지 문화에 대한 낭만적인 감수성이 낳는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장벽을 쌓을 뿐이다. 실제로, 많은 고아 사람들은 관광에 긍정적이다. 특히 관광은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익과 더 나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윤리적 옹호자들이 자주 간과하는 부분이다. 문화에 주목하다보면 사람을, 즉 우리와 비슷한 욕망을 가진 사람을 놓치기 쉽다.

문화적 차이의 우선성에 대한 가정은 많은 윤리적 관광 옹호자들의 쓸모없는 교의가 되었다. 현지인 문화 대 관광객 문화라는 틀에 박힌 문화적 대립 구도는, 윤리적 관광의 옹호자들이 공통점이라는 시각에서는 거의 문제에 접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공통의 요구, 바람, 열망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 크게 늘고는 있지만 아직은 여전히 극히 제한된 부류에만 허용되어 있는 국제 관광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도 그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은 오직 경제 성장과 문화적 변화의 맥락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감수성을 장려하던 중 어딘가에서, 이해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사라져버린 듯하다.

관광은 다른 지역과 문화에서 온 사람들 사이의 접촉과 관련된다. 어떤 이들은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말에서 그 위험성을 느끼지만, 차이에 대한 통념은 무너질 수도 있다. 문화적 역충격 ― 엄청난 차이를 예상했지만, 매우 다른 상황에 있음에도 우리와 같은 것을 바라고 비슷한 질문과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그것 ― 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여행의 짜릿함에는 우리 사회나 문화 바깥의 사람과 만나서 관계를 맺는 일이 포함된다. 그러나 여행지를 문화적 상징으로, 즉 현대적인 삶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사회의 대표로 보는 것은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서 관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의 잠재성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지나친 조심성은 공통의 인간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만다.

결론 - 집에 있는 게 더 낫다?

윤리적 비판에 얹혀 있는 불안의 논리에 따르면, 관광은 무엇인가, 즐거움이나 기분 전환이 아닌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한 생태관광의 옹호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관광은 수천 여행객의 수동적인 사치로 남아 있다. 이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사치의 장소에서, 윤리적 관광의 신조는 관광이란 특정한 도덕적 의제 ― 그 기초에 문화를 위치시키고 천한 관광객을 주요한 위협으로 지적하는 ― 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장소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형태의 관광(윤리적 관광)은 좋지만, 순전히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것은 해로운 것으로서 암묵적인 비난을 받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행 경험이 많은 녹색 옹호자 조지 몽비오(George Monbiot)는 여행은 ‘여행으로 인해 마음이 넓어지는 극히 소수에게’만 유익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백만 명 중 십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소수의 계몽은 분명 관광이 그 기괴함에도 불구하고 비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7고 이야기한다. 성인군자 행세를 하는 휴가 비판가들에게 있어, 관광은 다양한 문화의 가치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관점을 따르는 도덕적 의제의 일부일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윤리적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이는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보편적인 기준으로서 제시된다.

만약 이 의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윤리적 관광객이며, 조지 몽비오의 판단에 따르면 자연 세계의 기형물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집에 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사실, 이는 녹색당(Green Party)의 제니 존스(Jenny Jones)가 내렸던 결론과 완전히 동일하다. 존스는 뉴버리(Newbury) 우회로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얼마나 많은 뉴버리 사람들이 거기에 가보았겠는가. 만약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잃게 될 것을 깨닫는다면, 우회로에 대한 지역적인 반대는 꺾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 될 것이다. 과연 그들이 도로 건설을 허가하고, 결국 그 길을 이용해 유럽으로 드라이브를 가서는, 자기 집 현관 앞에 버려져 있는 장소와 별반 다를 것도 없을 시골 어딘가에서 휴가를 보내려 하겠는가?

‘관광은 친환경적일 수 있는가?’(Can Tourism Be Green), Green World, 1996년 3월

이러한 입장은 관광객을 순진하거나 부주의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러한 자제 요구에는 모종의 위선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스는 그녀의 글 말미에 그녀의 여행 목록을 나열했는데, 그녀는 세이셸(Seychelles)과 레소토 왕국(Lesotho)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 터키, 크레타, 에티오피아, 키프로스, 이집트, 아부다비에서 일과 여행을 했다. 이것을 과연 지행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이제 관광은 도덕적 금지와 비판적 자기인식의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여행은 더 이상 좋은 일이 아니게 되었다. 관광에는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경고와 윤리적이 되라는 경고가 항상 따라다닌다. 환경단체 아크(Arc)의 소책자 ‘태양, 모래사장, 그리고 세계 구하기’에서부터 꼭 여행할 필요가 있느냐며 문제를 제기하는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의 조언에 이르기까지, 관광은 이제 윤리 수칙의 영역이 되었고 꼬치꼬치 죄를 캐묻는 곳이 되었다. 유럽을 횡단하겠다거나 조금 더 먼 지역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충동적이고 무모한 욕망은 이제 더 이상 그리 좋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모험을 좇는 여행가는 제약을 받는다. 태양 숭배자는 눈총을 받는다. 재미 애호가는 ‘파괴적 산업’의 공범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휴가 여행이 윤리적 관광에 의해 그러한 도덕적 금지의 대상이 된 적은 없으므로 우리는 그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의 휴가를 더욱더 즐기면서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가고자 한다.

미주

1. Proyecto Ambiental promotional literature, 1997

2. 『보존이냐 파괴냐: 관광과 환경』(Preserve or Destroy: Tourism and the Environment), 1995, p. 56

3. 『가디언』(Guardian), 1999년 5월 15일

4. Tourism Concern Press Release, 2001

5. D. Nash, 『관광 인류학』(The Anthropology of Tourism) 1996, 나의 강조

6. 『생태관광: 지속가능한 선택지』(Ecotourism: A Sustainable Option), 1994, 서문

7. The Green Travel Guide,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