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거대과학과 거대정치: 사멸한 SSC와 살아남은 휴먼게놈프로젝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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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케블레스, "미국의 거대과학과 거대정치: 사멸한 SSC와 살아남은 휴먼게놈프로젝트", 『프리즘: 역사로 과학 읽기』.


미국의 거대과학과 거대정치

사멸한 SSC와 살아남은 휴먼게놈프로젝트에 대하여


다니엘 케블스(Daniel Kevles)

김봉국 역



초전도 고속 충돌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이하 SSC)와 휴먼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에 대한 아이디어는 1980년대 초에 등장했으며,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미 연방 정부의 대표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두 프로젝트는 모두 거대과학(Big Science)이라 불렸고 대규모 과학 사업의 일종이기는 했지만, 각각에서 거대과학은 완전히 다르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두 프로젝트의 마지막 운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두 과학 분야가 각각 겪었던 냉전이라는 상황이 끝나고, 과학에 대한 새로운 의제가 미국에서 정착되었던 것이다.


1. 기원

충돌기

SSC는 둘레 52마일의 원형 터널에서 양성자(protons)와 반(反)양성자(antiprotons)를 20조 전자볼트(eV) 에너지에 이르도록 가속할 수 있는 거대한 기계장치이다. 이 장치에서 양성자와 반양성자는 다른 전하를 띠고 있으므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다가 40조 eV 에너지로 충돌하게 된다. 물가 상승까지 감안하면, SSC를 건설하는 데는 10년 동안 약 60억 달러의 비용이 필요했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SSC를 간절히 원했는데, SSC가 표준모델(Standard Model)이라 불리던 기본입자 이론의 핵심 체계를 더욱 진전시키는 데 꼭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표준모델에 따르면, 모든 물질은 쿼크와 렙톤 입자로 구성되며 이 입자의 형태와 성질은 여러 종류의 역장들(force fields)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로 이런 장들은 기본입자들이 교환되면서 서로 상호작용 한다. 이론상 표준모델은 자연계의 세 가지 근본 힘, 전자기력(electromagnetic force), 약력(weak force), 강력(strong force)을 하나로 통합한다. 표준모델 이론이 포괄하지 못한 힘은 네 번째 힘인 중력뿐이다. 1970년대까지 축적된 간접적 실험 증거들은 중요한 성취 중 하나인 표준모델의 이론적 예측을 지지했다. 그것은 바로, 에너지가 충분히 높을 경우 약력과 전자기력에서 대칭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그 결과 두 힘이 단일한 전기약력(electroweak force)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예측이었다. 또한 당시 표준모델은, 우주대폭발로 우주가 막 생겨난 순간, 즉 좁은 공간에 막대한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을 때 우주의 특성이 어떠했는지 규명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즉, 우주가 식으면서 전기약력의 강한 대칭성이 깨어졌고, 그로부터 분화되어 전자기력과 약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표준모델에는 해명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1964년에 에든버러 대학의 피터 힉스(Peter Higgs, 1929- )가 가장 명료히 가정하여 그의 이름이 붙은 힉스 역장(Higgs force field)의 징후를 조사하고 싶어 했다. 당시 힉스 역장은 통일된 전기약력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 또한 전자기력과 약력이 상호작용 할 때 ― 실제로는 질량이 없는 ― 입자들이 질량을 얻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힉스 역장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론적인 근거에서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힉스 역장의 정체가 힉스 보존(boson)이라는 교환 입자의 존재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 기대했다. 또한 그들은 힉스 보존의 질량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SSC의 에너지 수준에서 작동하는 장치만이 힉스 보존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또한 고에너지 물리학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기본입자 물리학에서 미국의 주도권이 약해져간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SSC를 더욱 원했다. 유럽은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Counseil Européen de la Recherche Nucléaire)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붙여진 ― 다국적 거대 입자가속기 CERN을 건설하도록 지원했으며, 미국의 두 배에 달하는 GNP 대비 예산을 고에너지 물리학 연구에 투자하고 있었다. 1983년 상반기에 CERN이 보존이라 불리던 무거운 세 가지 입자 Z0, W+, W- ― 전기약력 이론에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을 매개한다고 예상했던 입자들 ― 를 직접 탐지했다고 발표함에 따라, 미국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SSC의 가속 에너지는 CERN 입자가속기의 60배 이상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양성자 가속기로 1990년대까지 준비될 수 있으며,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미국의 우위를 되찾아줄 것이었다. 페르미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레온 레더만(Leon Lederman, 1922-)과 전기약력 이론에 공헌하여 와인버그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했던 셸던 글래쇼(Sheldon Glashow, 1932-)는 1985년 SSC를 다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만약 우리들이 SSC를 통해 제공될 기회들을 상실한 채 1990년대를 보내게 된다면,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적 자존심과 기술적 자신감에서도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미국은 모든 방면에서 최고였습니다. 그와 같이 다시 한번 최고여야 합니다.”

비록 1988년에 가서야 상을 타게 되지만, SSC의 주요 대변인 중 한명이었던 레더만은 1960년대 표준모델을 발전시킨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뛰어난 고에너지 실험물리학자였다. 레더만은 충돌기 관련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의회에 출석했으며, 충돌기의 필요성이 기본적으로 지적 호기심 충족에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면서도, SSC의 가치를 열정적이고 세련되며 대중적으로 주창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레더만이나 동료 지지자들은 모두 망설임 없이 SSC가 미국 경제에 상당한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 주장했다. 첨단 과학의 성취를 예측하기 힘드므로, 레더만과 동료들은 SSC의 장래성에 대해 그리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입자 물리학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모은 후, 과거 입자 물리학의 부산물들을 지적하고 이로부터 SSC의 실용적 전망을 추정했다. 고에너지 입자가속기들을 통해 드러난 자연에 관한 지식 그 자체가 실용적으로 가치 있지는 않았지만, 기계장치들이 유용한 부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어 식품과 원료를 가공하고 암을 치료하는 데 방사선이 사용되었다. 또한 강한 광선은 반도체 칩에 집적회로를 고밀도로 새기는 데 무엇보다도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전산화된 방법과 정교한 기술은 막대한 데이터를 검사하고 분석하는 데 유용했다.

SSC 지지자들은 댈러스(Dallas)에 세워질 텍사스 대학(University of Texas) 사우스 웨스턴 의료센터(Southwestern Medical Center)에서, 저에너지 분사 가속기로부터 나온 양성자를 암 치료용으로 전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의료적 측면이 예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득은 아니었다. 레더만과 글래쇼는 SSC의 주된 파급효과로 초전도 기술이 발전할 것이라 전망했다. 하원 예산 위원회에서, 레더만은 페르미 연구소와 다른 입자가속기에 필요한 초전도 자석을 연구한 덕분에 효과적인 의료진단 장비 “자기공명영상”(magnetic resonance imaging, 이하 MRI)이 보급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어서 그는 “현재 대략 25개의 기업들이 연간 1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새로운 산업에서 MRI를 제조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변호사이자 전직 루이지애나(Louisiana) 주 의원이었던 W. 헨슨 무어(W. Henson MooreⅢ) 에너지부 차관은 레더만보다 훨씬 더 열성적이었다. 일례로 그는 하원 위원회에서 SSC에 필요한 초전도 자석 연구 덕분에 MRI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한편, 막대한 초전도 전류를 보내는 데 필요한 니오븀-티타늄선이 개량되고 가격이 인하될 것이고, 의료 분야를 넘어서는 이런 진척은 전력 발전과 자기부상열차 수송의 혁신에 기여할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전체 물리학에 대한 연방 정부의 지원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연방 기금 자체는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비롯한 레이건 정부의 국방력 증강 계획과 경제 경쟁력을 강조하는 분위기에 힘입어 크게 늘어났다. 첨단 기술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서, SSC는 미국의 거의 모든 고에너지 물리학을 지원했던 에너지부의 승인을, 그리고 1987년 1월에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SSC에 투자될 60억 달러로부터 나올 직․간접적인 이익 배당금을 알아차리는 데 물리학자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충돌기로 인해 무수한 산업 하청계약이 생겨나게 될 것이었다. 또한 한 의원이 말했듯이, 충돌기가 건설되는 곳에서만 약 5000에서 8000명이 고용될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막대하게 많은 일자리들”이 창출될 수 있었다. 미국의 절반 이상의 주들이 1987년 4월 1일에 시작된 부지선정 경쟁에 참여하기 위한 조치를 강구했다. 뉴 리퍼블릭(New Republic) 신문에서는 이를 “쿼크 보조금쟁탈 정치”(quark barrel politics)로의 초대라고 불렀다.

조지 부시(George Bush) 대통령 당선 다음날인 1988년 11월 10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존 해링턴(John S. Herrington) 에너지부 장관은 텍사스 주 왁사하키(Wasahachie)에 SSC가 건설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곳은 댈러스로부터 남서쪽으로 25마일 가량 떨어진 인구 1만8000명의 작은 마을이었다. 1988년 1월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부지선정위원회는 여덟 개 주의 후보 부지 목록을 에너지부에 제출했는데, 이 중 왁사하키는 거의 모든 주요 선정기준에서 높은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설비시설 용도로 200평방 마일의 부지를 제공해야 하는 텍사스 주도 다른 주와는 달리 프로젝트에 1억 달러를 내놓기로 선뜻 약속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차기 대통령이 텍사스를 고향으로 여겼으며, 그곳 의회 대표단에 세력가들이 많았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세력가로는 연방하원 의장이었던 짐 라이트(Jim Wright), 민주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한 로이드 벤슨(Lloyd Bentsen) 상원 의원, 그리고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기 전에 왁사하키 의원이었으며 재정적자감축법의 공동 제안자였던 필 그램(Phil Gramm)이 포함되었다.

1989년 의회는 투표를 통해 SSC 건설에 자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의회는 1990년에 일단 2억2500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하고 전체 건설비용으로 59억 달러의 예산을 수락했다. 2년이 지난 1991년 여름 의회는 충돌기에 2배 이상의 자금 지출을 승인했다. 한편, 상원에서 프로젝트를 백지화하려는 조처는 2 대 1의 표차로 실패하게 되었다.

지난 4년간 연간 5억 달러 정도의 일정한 액수를 유지해왔던 기존의 고에너지 예산에, SSC에 지원될 자금이 추가되었다. 1991년까지 이러한 추가액은 30여개 주의 90여개 대학 및 연구소에 있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에게 SSC 연구를 위한 1억 달러 이상의 자금지원 및 하청계약을 성사시켜 주었다. 1990년에 150여명의 물리학자들이 왁사하키에서 연구에 열중했다. 이들은 1989년 1월 SSC의 책임자로 임명된 로이 슈비터스(Roy Schwitters) 밑으로 들어와 활동했던, 1000명에 달하는 전체 SSC 고용 인력의 한 부분이었다. 저명한 고에너지 실험물리학자, 전직 하버드 대학 교수, 페르미 연구소의 프로젝트 팀장으로서 40대 중반 두각을 나타냈던 슈비터스는 페르미 연구소의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아 실제 작동하는 가속기를 만들어냈던 사람으로, 외관상으로는 SSC의 책임자로 딱 맞는 인물이었다.

게놈

1980년대 중반 미국 사회에서는 휴먼게놈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다양한 기법과 기술이 개발됨에 따라, 유전자를 분리하고 염색체상에서 그 위치를 찾아내며 유전정보를 암호화하는 DNA 염기쌍 서열을 얻어내는 작업이 가능해졌다. 이와 함께, 질병 유발 유전자에 대한 발견성과도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심장병의 원인인 가족성 콜레스테롤 과다증상과 같은 잠재적 사인이 열성 유전자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또한 암이 부분적으로는 발암 유전자의 작용으로 발생하며, 이런 발암 유전자가 변이와 조절장애로 인해 기능 이상이 생긴 정상세포의 유전자임이 확인되었다. 게놈프로젝트의 열광적 지지자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 1932- )는 몇몇 영향력 있는 과학자들에게 게놈프로젝트의 가치를 설득해 나갔다. 이런 과학자 중에는 DNA 구조의 공동 발견자이자 롱 아일랜드(Long Island) 콜드 스프링 하버 생물학 연구소(Cold Spring Harbor Biological Laboratory) 소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 1928- )이 포함되었다. 길버트는 인간 유전자에 대한 서열분석(sequencing) 작업을 강행해야 하며, 이 과업에 필요한 제반 기술들이 이미 마련되었으므로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1986년 6월 콜드 스프링 하버 모임에서, 길버트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이 연구에 동참하도록 하면 게놈프로젝트를 훨씬 빨리 진척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또한 그는 한 쌍의 염기마다 1달러의 서열분석 비용이 필요하다고 보면서, 30억 달러의 비용으로 인간의 전체 염기서열을 밝혀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생물학에서 이 연구는 매우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그럼에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서 왔던 왕립암연구기금(Imperial Cancer Research Fund)의 연구책임자 월터 보드머(Walter Bodmer)는, 이 연구가 입자 물리학이나 우주 비행의 엄청난 시도와 닮은 점이 있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이득 면에서 훨씬 더 확실하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화성으로 가는 길의 1/4 혹은 1/3에 도달한 것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 하지만 전체 유전체(genome) 서열의 1/4 혹은 1/3만으로도 […] 가장 쓸모 있는 응용을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찰스 델리시(Charles DeLisi)는 거대과학의 과업에 거리낌이 없었다. 물리학을 전공했고 국립보건원의 수리생물학 연구책임자 경력이 있었던 델리시는 워싱턴D.C.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이하 DOE)에서 보건환경국장직을 맡았다. 전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때 생긴 DOE는, 방사선이 생물체에 미치는 효과, 특히 유전 변이에 관한 연구를 오랫동안 지원해왔다. 또한 DOE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의 생명과학부(Life Sciences Division)를 후원했으며, 1983년 로스알라모스에 DNA 서열 정보를 모아놓은 거대 데이터베이스인 “유전자은행”을 설치했다. 델리시는 DOE의 1987년 예산에서 게놈프로젝트에 450만 달러를 책정했고, 이 프로젝트를 부서의 주력 프로그램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분주히 활동했다. DOE가 방사선이 건강에 미치는 효과에만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입자가속기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던 DOE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거대과학 프로젝트에 이미 익숙했다. 또한 1970년대 초반 이후 변덕스러웠던 국방 및 에너지 정책으로 인해, DOE는 불안정한 예산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특히 DOE는 국립 무기연구소 ―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캘리포니아 리버모어 연구소(Livermore Laboratory) 등 ― 의 활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끌어안으려고 항상 노력했다.

1986년 델리시가 야심찬 휴먼 게놈 5개년 계획을 제안했을 때, DOE는 이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유전자 지도 작성, 자동화된 고속 서열분석 기법 개발, 서열 데이터 전산 분석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1987년 9월 에너지부 장관은 부서의 부설 연구소인 로스앨러모스, 리버모어,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Lawrence Berkeley)에 휴먼 게놈 연구센터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뉴멕시코 주 상원의원 피트 도메니치(Pete Domenici)는 DOE가 게놈 연구에 주력하자 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뉴멕시코 주 소재 국립 무기연구소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도메니치는,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할 때 이런 연구소들이 겪을 운명을 염려했던 것이다. 1987년 도메니치는 의회 청문회를 열어 휴먼게놈프로젝트를 의회 안건으로 상정했고, 국립연구소의 재활성화와 연계하여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의도된 법안을 제출했다.

게놈프로젝트의 강력한 지지자들은 국회 의사당(Capitol Hill)에도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생물의학 연구자들 외에도 제약 산업과 생명공학 산업의 대표들이 포함되었다. 생물의학 연구자들은 게놈프로젝트가 의료의 측면에서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의 대표들은 미국이 세계의 생명공학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히 일본과 제대로 경쟁하려면 게놈프로젝트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SSC와 마찬가지로, 게놈프로젝트의 지지자들이 가장 강조한 부분은 첨단 기술에서 미국의 경쟁력 유지였다. 몇 가지 기준으로 볼 때, 확실히 미국은 생명공한 전반과 특히 휴먼 게놈 연구에서 유럽을 앞서고 있었고, 일본과의 격차는 더욱 컸다. 하지만 일본은 지원을 집중해가며 분자생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듯 했다. 일본도 나름의 게놈프로젝트를 향해 나아갔으며, 1980년대 초부터 자동 서열분석 기술을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해왔다. 일본의 한 연구집단은 1990년대 초 정도면 그들의 자동 서열분석 장치를 이용해 하루에 100만개의 염기쌍을 규명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다. 이는 당시 전 세계에서 1년 동안 밝혀지는 염기서열보다 많은 양이었다. 또한 이들은 서열분석 비용을 염기쌍 당 17센트까지 이미 낮추었다고 발표했다. 한편 1987-88년 유럽에서는 게놈 연구와 서열분석 연구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네덜란드, 심지어 소련 등지에서 한창 힘을 얻고 있었고, 이에 유럽공동체는 게놈프로젝트의 착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1990년이 되자 유럽공동체는 적정 수준의 자금을 준비하고 프로젝트의 우생학적 이용을 막는 강력한 규제 조치를 마련한 후 게놈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소련의 당정치국(Politburo)은 1989년의 휴먼 게놈 예산으로 경화(硬貨) 500만 달러 외에도 2500만 루블을 추가로 승인했다. 이 예산은 소련의 다른 비군사적인 연구들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금액이었다.

많은 생물학, 의학 종사자들한테 자기 분야의 중요 프로그램에 DOE가 뛰어드는 것은 분명 난처한 일이었다. 유전학을 비롯한 생명 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연방 기관은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이하 NIH)이었다. 이 기관은 생물의학 연구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대개는 연구보조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특정 종류의 연구를 수행하라 지시하지 않았으며, 전통적으로 소규모 연구와 지역의 자발성을 중시했다. 이와 달리 DOE는 물리과학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또한 DOE의 연구 프로그램은, 국립연구소에서 잘 드러나듯이, 규모가 크고 관료적이며 목표 지향적인 경향을 보였다. 많은 생물의학 연구자들이 우려하기를, DOE가 게놈 연구 경쟁에 참여함에 따라 NIH에서 나오던 자금이 전용(轉用)될지도 모르며, 지도 작성과 서열분석 연구가 전제군주와 흡사한 중앙집권적 통제 아래 놓일 위험이 있었다. 1986년 6월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RFLP(Restriction Fragment Length Polymorphism mapping) 지도 작성법의 창안자 중 한명인 데이비드 보트슈타인(David Botstein)은 거대과학의 무분별한 서열분석 연구에 종속된 “계약노동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모임에 참석했던 생물의학 연구자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뛰어난 의사이자 NIH의 소장이었던 제임스 윈가르덴(James Wyngaarden, 1924- )은 한동안 게놈 연구 경쟁에 뛰어들기를 꺼려했다. 윈가르덴이 보기에, 게놈 연구는 과학적으로 유망한 투자가 아닌 듯했다. 또한 그 비용으로 인해 NIH의 다른 연구 프로그램들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물의학의 핵심 연구자들은, NIH가 연구 경쟁에 참여하여 게놈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통제권을 DOE로부터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윈가르덴을 설득하여 동의를 구했고, 도메니치 법안에 반대하기 위해 NIH를 지지하는 믿을만한 의원들을 동원했다. 이들 중 상원 노동복지위원회(Senate Committee on Labor and Human Services)의 의장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M. Kennedy)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은 위원회에서 NIH의 권한이 행사되도록 힘썼고, 상원 세출위원회(Senate Appropriations Committee)의 일원이었던 로튼 차일즈(Lawton Chiles) 플로리다 주 상원의원은 그 기관 분과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87년 초 윈가르덴은 게놈프로젝트를 승인하는 성명을 의회에서 발표했다. 또한 그해 가을에 도메니치 안은 위원회에서 기각되었던 생명공학 일괄 법안으로 흡수되었다. 곧이어 11월에 의회는 NIH와 DOE 모두를 위해 1988년도 예산에서 게놈 연구에 필요한 상당한 초기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승인했다.

하지만 NIH가 게놈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고 하여, 프로젝트에 대한 반대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실은 이를 계기로 반대 의견이 오히려 강해졌는데, 1987년에 생물의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이제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훨씬 마음에 드는 NIH가 맡게 될지 모르지만, 게놈프로젝트는 월터 길버트가 부여한 이미지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말하자면, 게놈프로젝트는 DNA 서열 분석에만 전념하면서 몇 년 안에 그 과업을 성취하려 조급해 하는, 관료화된 몇몇 거대 연구소를 중심으로 급조된 30억 달러짜리 거대과학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비판자들은 이 연구가 지루하고 반복적이며 지적으로 보람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그들이 보기에, 인간 유전체의 전체 서열을 분석하는 작업은 미숙하고 낭비적인 과학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인간 DNA의 염기쌍들 중에서 유전 정보를 암호화하고 있는 부분은 단 5%에 불과하다고 추정된다. “엑손”(exons)이라 불리는 암호부분(coding regions)은 DNA에 넓게 퍼져 있는 광대한 비암호부분(non-coding regions) 사이에 산재되어 있다. 비암호부분의 공식 명칭은 “인트론”(introns)이며 흔히 “쓰레기 DNA”(junk-DNA)라고 불린다. MIT의 생물학자이자 암유전학의 권위자인 로버트 와인버그(Robert Weinberg)는, 자신의 관점에서 “유전자는 허튼 소리의 광대한 바다 한복판에 흩어져 있는 정보의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군도 같다”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와인버그는 그 대부분이 인간의 질병이나 발생 과정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 시간과 재원을 들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용의 상당 부분을 NIH가 부담해야 했다는 점에서, 다른 많은 생물학자들도 게놈프로젝트를 무분별한 연구로 여겼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MIT 화이트헤드 생물의학연구소(Whitehead Institute for Biomedical Research)의 소장이었던 분자생물학자 데이비드 볼티모어(David Baltimore, 1938- )는 당시에 널리 퍼졌던 우려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서열 분석에 필요한 새로운 자금이 쉽게 마련될 것이라든지, 이 프로젝트가 다른 긴급한 연구들과 경쟁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 생물학에서 우선순위가 낮은 거대한 프로젝트는 현재 최우선의 과학에 자금이 지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무력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1988년 2월 국립연구협의회(National Research Council)의 한 위원회는 뜻밖에도 휴먼게놈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발표가 예상 밖이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보트슈타인과 다른 과학자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가 실은 거대 생물학(big biology)을 반대했고, 애초에 게놈프로젝트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게놈프로젝트가 광범위한 생물학적 관심사를 충족시키고 급작스럽게 계획․운영되지 않는다면 상당한 장점을 지니는 연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고서에서 강조된 바는, 프로젝트를 단계적으로 조정해가며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프로젝트에 15년의 기간을 할애하면서 매년 2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하며, 그 자금을 기존의 생물의학 연구로부터 전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자금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다른 생물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데에 우선적으로 사용되어야 했다. 이러한 지도는 질병 유발 유전자를 더 빨리 찾을 수 있게 해주며, 여하튼 많은 생물학자들이 수행하고 싶어 하는 유형의 연구였다. 또한 자금의 일부를 빠르고 값싼 서열분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 개발에 투자하여, 얼마 안 되는 거대 연구소가 아니라 수많은 보통의 연구소들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위원회는 이러한 기술들을 전국에 소재한 십여 개의 다분야협력 연구센터(multidisciplinary center)에서 개발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생물학 연구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즉 경쟁의 원리와 동료연구자의 상호검토(peer-reviewed)에 근거하여 유능한 연구자들에게 ―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 연구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윈가르덴의 생각은 보고서 내용과 일치했다. 그는 1988년 3월초에 버지니아 레스턴(Reston)에서 게놈프로젝트에 관한 고관 과학자문모임을 갖기 위해 준비했고, 이 모임의 의장직을 맡겠다고 승낙한 데이비드 볼티모어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설명했다. 모임에 참석했던 볼티모어, 보트슈타인, 왓슨, 그리고 나머지 자문위원들은, 국립연구협의회 보고서에서 추천한 방침에 따라 게놈프로젝트가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프로젝트의 배후에서 결속을 다졌다. 윈가르덴은 휴먼게놈프로젝트를 담당할 별도의 부서를 NIH에 마련하겠다고 발표했고, 1988년 10월 왓슨은 이 부서의 팀장 직을 수락했다. (훗날 윈가르덴은 “나는 A명단과 B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왓슨은 A명단에 올라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왓슨이 임명됨에 따라, 어느 기관이 프로젝트의 생물학적 부분을 주도해 나갈 것인가에 관한 지리한 논쟁은 사실상 NIH에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되었다. 한편 의회가 재촉하는 가운데, 두 기관은 향후 5년간 게놈 연구들간의 기본적인 관계를 규정하는 협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NIH가 지도 작성을 담당했고, DOE는 서열 분석과 이와 관련된 기술 및 정보화 기법의 개발을 담당했으며, 중복되는 부분에서는 두 기관의 공동연구가 허용되었다.

자신이 게놈 연구의 윤리적 문제에 관한 권위자라 자부하지는 않았지만, 왓슨은 게놈 연구의 사회적․윤리적․법적 영향에 관한 연구와 논쟁을 NIH의 게놈 프로그램을 통해 촉진시키는 것이 적절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목적에서 왓슨은 자신이 게놈연구부서의 책임자임을 알렸던 1988년 기자회견에서, NIH의 게놈 예산 일부를 연구의 윤리적 함의를 검토하는 데 쓸 것이며, 이 활동에 전체 예산의 3% 정도를 할당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생명 윤리를 NIH 생물학 연구 프로그램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포함시킨 조치나, 윤리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별도의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공약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모든 생물학자들이 왓슨의 방침을 지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마도 지지자는 게놈프로젝트에 연루된 사람의 수보다도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왓슨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89년 게놈 관련 학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정말로 끔찍했던 과거의 우생학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여기 미국과 독일에서, 불완전한 지식이 매우 교만하고 끔직한 방식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DNA가 공개되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신시켜야만 합니다.”

왓슨은 대담했을 뿐만 아니라 빈틈없어 보였다. 확실히 그의 방침은 윤리적으로 제어하기 힘든 게놈프로젝트의 장래를 우려하던 목소리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에 신경을 쓴다 하더라도, 왓슨의 방침은 기본적으로 의회 패널과 청문회를 지배했던 프로젝트의 의학적․경제적 부산물에 관한 것이었다. 1988년 의회는 NIH와 DOE의 다음해 게놈프로젝트 예산으로 모두 합쳐 3900만 달러를 책정했다. 1989년 10월 보건복지부 장관 루이스 설리반(Louis Sullivan)은 NIH의 왓슨 부서를 국립 휴먼게놈연구센터(National Center for Human Genome Research)로 격상시켰다. 1990년 연방 정부가 지원한 게놈 연구는 대략 8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운영되었으며, 전체 자금의 2/3 정도가 국립 휴먼게놈연구센터에 지원되었고, 나머지를 DOE가 받았다. 한편 왓슨은 전국에 몇 개의 게놈 연구센터들을 세우고 운영하는 데에 국립 휴먼게놈연구센터 예산의 절반 정도를 사용할 것이며, 이 연구센터들에 한해 200만-300만 달러씩 5년간 지원하여 각 센터들이 프로젝트의 특화된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왓슨은 국립 휴먼 게놈 연구센터 지분의 몇 퍼센트를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회의와 연구에 할당했고, 별도의 윤리 문제 자문회의를 설치하였다. 이 회의에는 낸시 웩슬러(Nancy Wexler)를 비롯한 다섯 명의 과학자들 외에도 변호사들과 윤리학자들이 포함되었다.

연방 정부 공식 프로그램으로 발족한 해인 1991년에, 휴먼게놈프로젝트는 대략 13,500만 달러를 지원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그 하부 조직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다. 전부 여덟 개였던 NIH 연구센터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일곱 개는 인간 유전자의 지도 작성에, 나머지 한 연구센터는 쥐 유전자의 지도 작성에 초점을 맞췄다. 로렌스 리버모어, 로렌스 버클리,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 마련된 게놈 연구시설은 관련 기술과 정보화 기법을 개발하는 데 전념했다. DOE와 NIH가 공동으로 지원한 네 개의 추가 프로젝트는 대규모 서열분석(large-scale sequencing)과 이와 관련된 기술혁신에 집중했다. 수십 개의 다른 연구소들도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각각 NIH가 지원한 연구자 주도 활동(investigator-initiated-activity)이었다.

게놈 데이터는 비록 태평양 서쪽은 아니었지만, 대서양 양쪽의 연구소들에서 쏟아져 나왔다. 일본은 새로운 서열분석 장치(supersequencing machines) 개발과 관련하여, 자신들의 역량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따라서 일본은 하루에 10만개의 염기쌍 서열을 밝혀내는 것으로 목표를 낮추고, 게놈 예산도 1년에 800만 달러로 축소했다. 인간 유전자 지도에 대한 정보는 존스 홉킨스 대학의 중앙집중식 데이터베이스로 계속 모아졌고, 1990년 10월까지 2000여개의 인간 유전자에 대한 지도가 작성되었다. 또한 유전자 염기서열 정보는 유럽 분자생물학 연구소(European Molecular Biology Laboratory)와 로스앨러모스 유전자은행의 데이터베이스로 모아졌는데, 이제 이 목록에는 인간의 500만개 염기쌍 서열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물 종으로부터 얻어진 6000만개 염기쌍 서열이 포함되게 되었다.

2. SSC의 종언

1980년대 중반 SSC 계획이 실제 공공정책으로 발의되자마자, 물리학 연구자들 내에서 SSC에 대한 반대가 일어났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의 권력과 권한에 대한 오래된 불만과, 특히 장기간에 걸친 예산 장악을 향한 분노가 폭발하여 밖으로 분출되었다. 처음에 비판을 주도했던 사람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유능한 재료과학자 러스텀 로이(Rustum Roy)였다. 1985년 로이는 2차대전 후의 미국 과학정책을 비판한 󰡔프런티어에서 길을 잃다󰡕(Lost at the frontier, 1985)를 공동 집필하면서, 추상적이고 난해한 연구 분야로 집중된 정부 지원을 문제 삼았다. 또한 이 책에서 로이는, 연간 적자 2000억 달러에 달하는 시기에 수십억 달러짜리 입자가속기를 탐내는 물리학자들은 “철부지들”(spoiled brats)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로이는 미국 과학정책에 불만이 많은 괴짜 정도로 여겨졌다. 좀더 효과적인 반대는 메이저(masers), 응집물질(condensed matter), 초전도 분야를 전공한 저명한 과학자들로부터 나왔다. 이런 비판자들 중에서도 노벨상 수상자인 존 로버트 슈리퍼(John Robert Schrieffer, 1932- )와 니콜라스 블룀베르겐(Nicolaas Bloembergen, 1920- ),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SSC를 비판했던 필립 앤더슨(Philip Warren Anderson, 1923- )이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모두 입자 물리학을 존중했고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입자가속기 건설안의 “충성스러운 반대자”라고 자칭했던 슈리퍼처럼,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수십억 달러가 든다는 점에서 SSC 건설을 공적 재원의 정당한 사용이라 보지 않았다.

1990년 이후 정부의 예산 압박으로 인해, 고속 충돌기 프로젝트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물리학회(American Physics Society)의 한 고위관계자는 “아마 물리학 연구자들이 지금까지 직면했던 쟁점들 중에서 가장 큰 분열을 일으킬 사안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의회에서 앤더슨과 슈리퍼는 응집물질 물리학의 법칙들이 어느 면에서나 기본입자 이론의 법칙들만큼 근본적이며, 더 중요하게는 응집물질 분야가 기본입자 연구에 비해 훨씬 값싼 비용으로 더 큰 이득을 창출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또한 의회에서 앤더슨은 “달러를 벌기 위한 달러”라고 공언하면서, “우리 응집물질 물리학 전공자들은 입자 물리학자들보다 수십억 달러 이상의 이득을 창출해왔고 […] 솔직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는 많은 동료 연구자들의 확신을 밝혔다. 이제까지 고에너지 연구는 정부의 기초물리학 예산에서 지나치게 큰 비율을 차지해왔는데, 앤더슨은 다른 분야들에 비해 1인당 열 배 이상의 자금이 고에너지 연구에 할애되었다고 추정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고에너지 입자가속기를 통해 부가이득이 창출된다는 주장에 언짢아했다. 특히 레더만이 넌지시 비쳤고 무어 에너지부 차관이 노골적으로 공언했던, MRI 개발에 입자가속기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는 주장이 문제시 되었다. 1991년 니콜라스 블룀베르겐은 초전도 자석 산업이나 MRI 모두 입자가속기의 발전에 힘입어 개발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증언했다. 또한 블룀베르겐은 ― 1992년 봄에 청문회 증거로 채택된 ― 페르미 연구소 관계자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페르미 연구소가 설립되지 않았더라도 MRI는 등장했을 것이며 오늘날까지 잘 발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앤더슨에게, “무엇보다 애석한 광경은 에너지 공급을 책임지는 부서의 관리들이 고의로 거짓 주장을 해가며 의회와 대중을 기만하는 모습과, 대부분 존경해마지 않는 동료 입자 물리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행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1989년 입자가속기 설계 변경이 검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장치의 성능과 신뢰도를 향상시킬 수는 있었지만 이와 함께 전체 비용이 늘어났다. DOE는 건설비용이 1990년도 가치로 82억 4900만 달러까지 증가할 것이라 추정했고, 다른 위탁 기관은 118억 달러에 달한다고 예상했다. 비용이 늘어감에 따라 프로젝트에 대한 의회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특히 1992년 봄 의회조사관들이, 전년도 예산 중 2만 달러 이상이 사무실 화초를 구입하고 관리하는 데 낭비되었으며, 추가로 수천 달러가 술을 비롯한 유흥에 소비되었다고 보고했을 때 비판이 거세졌다. 레이건 정부와 부시 정부는 전체 건설비용의 최소 1/3 이상을 연방 정부 이외의 재원에서 끌어오겠다고 의회에 약속한 바 있는데, 입자가속기 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이 비용은 27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원래 이 비용 중 10억 달러는 텍사스 주에서 내놓기로 했고, 나머지 17억 달러는 외국의 원조로, 특히 대부분을 일본의 자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5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인도의 물자원조를 제외하면, 1990년까지 해외로부터의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몇 차례 일본에 파견된 미국 대표단들은 SSC에 관해 어떤 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심지어 조지 부시 대통령은 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치(Kiichi Miyazawa) 수상을 방문했을 때 이 문제를 제기조차 하지 않았으며, 미야자와를 1993년 4월과 7월에 워싱턴과 도쿄에서 만났던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경제 불황이 한창이었던 1992년 봄, SSC를 향한 공격은 국회의사당에 큰 상처를 입혔다. 6월 17일 밤 하원은 232 대 181의 상당한 표차로 프로젝트를 종결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놀란 SSC 지지자들은 상원에서 이 결정을 철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1993년 초 워싱턴 소식통은, 새로운 의회와 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다음해 SSC 계획의 존속이 불투명하다고 전망하고 있었다. 유권자들은 초선 의원 113명을 하원으로 보냈는데, 하원의 1/4 이상이 예산 감축이라는 선거공약을 내걸고 당선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SSC안을 승인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을 되풀이하였지만, 그의 집권 첫 예산 집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를 추가로 3년간 연장해야만 했다. 이는 SSC의 연간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일반회계국(General Accounting Office)은 이런 조치에 대해 SSC 프로젝트의 전체 비용을 110억 달러까지 상승시키는 것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1993년 5월 일반회계국은 SSC가 예정보다 지연되고 있으며 할당된 예산을 이미 초과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하원 표결 직전인 6월말 SSC 비판자들은 에너지부 자체 감사원(Inspector General)에서 작성된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터무니없는 계약 경비와 걷잡을 수 없는 비용 상승을 묵인했던 프로젝트의 관리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92년처럼 SSC는 이제 하원에서 쉴새없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비판자는 뉴욕주 오나이더(Oneida) 출신 의원 셔우드 뵐러트(Sherwood Boehlert)로, 독설가이자 자존심 강한 온건파 공화당원이었다. 전년도에 뵐러트는 SSC가 끊임없이 비용만 늘어가는 잡동사니이고 다른 과학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며 경쟁력을 위한 파급효과를 잘못 예측한 것에서 비롯된 계획이라 비웃었다. 또한 그는 “온갖 과대선전과 달리 향후 SSC가 암을 치료해줄 수도 없고 남성 탈모증의 해결책도 아니며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봄에 열린 하원 청문회에서, 뵐러트는 하원에서 SSC안을 종결시켰다고 하더라도 “시체에서 다시 부활해 계속 우리의 예산을 갉아 먹는다”고 설명하면서, 이 회의에 “살아난 시체들의 밤”(The night of the living dead)이라는 제목을 붙일 만하다고 항의했다. 1993년 6월 24일 뵐러트와 캔자스 주 터피카(Topeka) 출신 중도파 민주당원 짐 슬래터리(Jim Slattery)는 프로젝트에 대한 종전의 비판을 반복하고 프로젝트에 불리한 일반회계국 조사결과를 덧붙이면서, SSC를 종결시키는 예산 개정안을 다시 한번 상정했다. 뵐러트는 SSC에 반대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요컨대, 비용은 즉각적이고 실질적이며 마구 치솟고 있습니다. 반면 그로부터 얻어지는 이득은 요원하고 이론상의 것이며 제한적입니다. 손익 계산이 어찌될지 알기 위해 당신이 원자핵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SSC를 받아들일 여유가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SSC에 대한 방어는 보수적인 공화당원 조 바턴(Joe Barton) 왁사하키 의원이 주도했다. 그는 1992년도에 균형예산법(balanced-budget)을 개정하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SSC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던 플로리다 출신 민주당원 로렌스 스미스(Lawrence J. Smith) 의원은, 예산 조정자(budget balancer)인 바턴이 “재정 정책의 양 편에 동시에 서 있는 곡예사가 틀림없다”고 비꼬았다.) 국방비 삭감에 큰 타격을 입었던 캘리포니아 주 동료들은 바턴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으며, 이는 텍사스 인근 지역의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국방산업의 민간전환에 필요한 수억 달러가 SSC로부터 나왔고, 이 자금을 통해 거의 모든 주에 걸쳐 일자리 수천 개가 생겨나고 2만 여건의 사업 계약이 성사되었으며, 이에 관련된 회사들 중 10% 이상이 여성 혹은 소수집단 소유 회사였다고 강조했다. 당시 흑인 여성으로서 하원의원에 새로이 선출되었던, 플로리다 마이애미 출신의 캐리 미크(Carrie P. Meek)와 댈러스 출신의 에디 버니스 존슨(Eddie Bernice Johnson)도 SSC를 칭찬했다. 특히 미크는 “SSC는 우리들, 이 나라의 소수자들에게 […] 과학과 기술에 의해 창출된 직업들에 종사할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6월 24일 하원은 280 대 150의 초당적 지지로 SSC안을 다시 한번 종결시켰다. 표차가 상당했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지지자들은 이번엔 상원에서도 압도적인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8월에 열린 상원 청문회에서,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1933-)는 봄에 진행된 여덟 번의 감사가 프로젝트를 지나치게 철저히 감독하려는 처사였다고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와인버그는 “페르미 연구소를 가져다준 체제를 B-1 폭격기를 가져다준 체제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있는 듯 하다”고 이야기했다. 5월에 열린 하원 청문회에서, 와인버그는 SSC를 잃게 되면 “고에너지 물리학을 책임질 연구 프로그램과 작별을 고해야 하며, SSC를 이용해 […] 우리 세대에 이 나라에서 자연에 대한 최종 이론을 발견할 희망도 버려야한다”고 증언했다. 그러고 나서 와인버그는 SSC 계획의 종결이 “이 나라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 중단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상원에서 SSC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루이지애나 주 출신 상원의원 J. 베넷 존스턴(J. Bennett Johnston)이었다. 그는 충돌기 프로젝트의 관할권을 가진 두 위원회, 에너지 및 천연자원 위원회(Energy and Natural Resources Committee)와 에너지 및 수자원 개발을 위한 분과위원회(Energy and Water Development Appropriations Subcommittee)의 의장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 존스턴은 SSC에 반대했지만, 제너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사가 가속기의 초전도 자석 생산을 담당하여 루이지애나 주 해먼드(Hammond)의 대형공장을 가동하면서부터, SSC의 강력한 지지자로 입장을 바꿨다. 존스턴은 상원의 소식통이었으며, 매력적이고 박식하며 유능한 입법가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루이지애나 주가 국방 계약으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받는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면서 그가 사는 주의 석유․가스 산업을 능란하게 옹호했다. 또한 그는 자주적이고 활동적인 지식인으로, 전략방위구상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이런 존스턴은 탈냉전 시기의 첨단 기술 경제에서 충돌기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보았다. 또한 그는 힉스 보존이란 탐구 목표를 추구하는 순수한 지적 열망을 키워나갔고, 가끔 상원에서 이론 물리학을 가르치려 시도하기도 했다. 1993년 존스턴은 “내가 이해한 바로는, SSC가 다루는 문제들은 신학과 과학의 경계에 걸쳐 놓인다”고 언급한 후 말을 이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패턴, 복잡성, 대칭성에서, 그리고 물질, 쿼크, 렙톤의 단순성과 그것들이 짜 맞춰지는 방식에서 신의 손길을 엿보게 된다는 사실만 말해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바를 살짝 엿본 정도로도, 저는 그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존스턴은 다시 한번 마술을 걸었고, 9월 30일 아침 상원은 57대 42의 표차로 SSC를 종결시킨 결정을 번복하게 되었다. 이에 SSC 계획은 상하원연석회의(House-Senate Conference)에서 수십억 달러의 에너지 및 수자원 세출법안에 포함된 채 넉넉한 예산으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10월 19일에 하원에서 다시 한번 282 대 143의 압도적인 표차가 남에 따라, SSC안은 다시는 의회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존스턴은 “SSC가 구타당해 죽었으며, 이제 그 시체를 묻어야만 한다”고 날카롭게 말했다.

3. 휴먼게놈프로젝트의 존속(The Survival of the Human Genome Project)

거대과학의 징후

SSC의 경우처럼, 1990년대 초반 휴먼게놈프로젝트에 반대하던 과학자들도 계속 늘어갔다. 1990년 2월 유타 대학의 생화학 교수 마틴 렉스타이너(Martin Rechsteiner)는 미국 전역의 동료들에게 편지를 보내 휴먼게놈프로젝트가 “국가 재원 낭비”라 역설했고, 뜻을 같이 하는 과학자들이 대통령 과학자문관을 비롯한 정부 핵심관료들에게 프로젝트에 대해 항의하도록 촉구했다. 그해 4월 미국 전 지역에 걸친 6명의 생물학자들은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Dear Colleague)이라는 공동서신을 전국의 분자생물학 연구소에 연결된 전자사서함 바이오넷(BioNet)에 게시했다. 서신 내용은 “휴먼게놈프로젝트를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동참해주십시오”였다. 그해 7월 버나드 데이비스(Bernard Davis)는 하버드 의대 미생물학과 및 분자유전학과의 동료학자 22명과 함께, 정부의 프로젝트 개입을 재고하라 촉구하는 서한을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했다. 같은 달 렉스타이너와 데이비스는 의회 청문회에서 프로젝트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진술했다. 1991년초 한 상원보좌관은 게놈프로젝트의 상황에 대해 “프로젝트를 지원하라는 목소리는 잠잠하며, 이에 반대하는 여론만 들끓고 있다”고 논평했다.

논제 측면에서 볼 때, 프로젝트를 향해 재개된 비판은 1987년에 제기되었던 프로젝트 반대 이유를 얼마간 되풀이했다. 즉, 게놈프로젝트가 통제적이고 위계적인 거대과학의 연구방식에 생물학을 예속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데이비스와 동료연구자들이 강조하기를, 게놈프로젝트는 공교롭게도 이 나라의 대표적 거대과학 수행기관인 DOE의 “생물학 연구 활동을 확장시키는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프로젝트 반대자들은 일정 예산을 게놈 연구센터들을 쓰겠다는 왓슨 결정의 증거를 요구했다. 한편 렉스타이너는 피트 도메니치 상원의원을 지목하면서, “자기가 사는 주의 국립연구소를 지원하길 원했던 유력한 상원의원 덕분에 프로젝트가 추진될 수 있었다”고 단언했다.

렉스타이너는 쓰레기 DNA에 대한 서열분석이 돈 낭비일 뿐이라는 원래의 비판에 새로운 해석을 더해가면서, 심지어 암호부분의 서열을 밝혀낸다 하여도 생물학이 반드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보를 얻으려는 노력으로 DNA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야 있겠지만, 이런 지식은 데이터를 통해 제기될지 모르는 가설과는 무관하며, 더군다나 유전자가 작용하는 생리적․생화학적 환경에 충분히 주목하지도 않는다. 또한 렉스타이너는 DNA 데이터가 반드시 의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콜레스테롤 대사나 암 유전학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데 인간 유전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며, 유전 변이에 관한 상세한 지식이 치료제나 치료법으로 이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렉스타이너는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 기자에게 “휴먼게놈프로젝트는 나쁜 과학이고, 신중하지 못한 과학이며 과대 선전된 과학”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앞으로 초래될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 즉, 게놈프로젝트는 다른 많은 기초 생물학 연구로부터 자금을 빼돌릴 것이며, DNA 서열분석과 자료입력에만 능숙한 “전문 기능인 군대”(armies of technicians)를 게놈 연구센터들에서 양성하면서 독창적인 연구 기회를 제한할 것이다.

게놈프로젝트 반대자들은, 프로젝트가 번창함에 따라 생물학 전반의 기초 연구들이 재정 압박을 받는 현실에 곤란해 했고 더러는 분노했다. NIH 연구보조금지원과(Division of Research Grants) 유전연구부문(Genetic Study Section)의 책임자였던 존 루체시(John C. Lucchesi)는 󰡔사이언스지󰡕 보낸 서한에서 장래를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연구보조금이 지금과 같은 비율로 몇 차례 더 지급되면, 얼마 되지 않아 활동 가능한 연구소의 수가 현재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입니다. […] 게놈프로젝트가 새로운 기술을 낳는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사용할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입니까?”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전례 없을 정도로 많은 자금이 소수의 게놈 연구자들에게 지급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며 분개했던 렉스타이너의 반응 또한 전형적인 것이었다.

반대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매년 게놈프로젝트에 할당되는 2억 달러의 자금을 좀더 가치 있게 사용하면 기초 생물의학 연구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시킬 수도 있었다. 렉스타이너는 국방부 기준에서야 그 정도 액수가 거액이 아니겠지만, “고군분투하는 젊은 조교수”에게는 “세상에 있는 돈 전부”로 여겨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비판자들은 대개 건당 21만2000 달러 정도 되는 기초 생물의학 연구보조금 중에서 게놈프로젝트 예산으로부터 나온 보조금이 몇 건이나 되는지를 지적했다. 특히 버나드 데이비스는 1991년 게놈프로젝트 예산이 NIH와 DOE를 합쳐 1억 540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 예산으로 385건의 연구보조금을 지원하면 “목표 지향적이지 않은 연구(untargeted research)의 열악한 상황을 구제하는 데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기술과 방법론상의 혁신을 의식적으로 강조한다는 점에서, 휴먼게놈프로젝트는 생물의학 연구자들의 전통과 선호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몇몇 레토릭은, 기술은 순수 생물학 연구를 보조하는 데 그 의미가 있고, 기술이 생물학 연구 활동과 다소 이질적인 측면조차 있으며, 간단한 도구와 장치를 이용하는 고독한 연구자가 생물의학에서 진정한 진보를 달성한다고 권하는 듯 했다. 생명 연구란 페트리 접시(Petri dishes) 같은 비자연적인 환경에서 수행할 수 없다는 19세기말 자연사학자들의 비판을 실험 생물학자들이 쉽게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이런 비판은 20세기 실험 생물학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도 종종 제기되어 왔다. 또한 1954년 노벨상 수상식에서 캐롤라인 왕립연구소(Royal Caroline Institute)의 한 회원이 “오늘날 전자공학, 방사선 동위원소, 난해한 생화학으로 인해 의료과학이 위험할 정도로 기술을 닮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의학의 근본인 생물학적 원리를 종종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런 레토릭은 흔한 표현이 되었다.

하지만 생물의학에서의 진보는 실제로 초원심분리기(ultracentrifuge), 방사성 동위원소, x선 회절, 크로마토그래피(chromatography) 기법, 전기영동(electrophoresis), 전자현미경 등과 같은 정교한 장치와 기술에 의해서 상당부분 가능해지고 촉진되었다. 이 기술들 중 그 무엇도 생물학 고유의 기술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기술들은 모두 물리과학 혹은 생물학의 변경에서 활동한 물리학자들의 노력의 산물이었으며, 이 중 많은 기술들이 물리학의 성과를 생물학 연구에 이용하기 위해 지원되었던 자선단체의 자금이나 상업적인 자금을 통해 개발되었다. 예컨대, 사이클로트론(cyclotrons)을 세웠던 사람들은 초창기 재정 후원의 대부분을 의료를 중시한 자선단체들로부터 얻어냈다. 사이클로트론은 방사선 동위원소를 제공한 제1의 공급처였는데, 자선단체들은 이를 값싸고 풍부하게 공급해줄 장치의 건설을 촉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부터는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와 그 후속 기관의 원자로가 방사성 동위원소의 주요 공급처가 되었다.

물론 당대의 실험 생물학에 기술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게놈프로젝트 비판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기술이 과학 일터(scientific workplace)의 활동에 영향을 미쳐왔던 방식은 마찬가지로 중요하지만, 그리 분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유전자 서열분석이 생물학 연구를 지루하고 단조롭게 만들 것이라는 비판이 위와 같은 쟁점에 해당한다. 이런 비판은 다음과 같은 낭만적 가정, 즉 전통적 생물학에는 단조로운 작업이 없으며, 모든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현장에서 지적으로 보람찬 난제들에 도전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연구실에서 사람들이 실제 행하는 바를 잠시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전제가 일반적으로 들어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분자생물학자들이 수행하는 작업의 일부는 진부하고 틀에 박힌 물리화학과 생화학으로, 예컨대 제한효소(restriction enzymes)를 밝혀내고, 단백질․DNA․RNA 서열을 분석하며, 유전자를 합성․복제하는 작업 같은 것들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들은 클론과 제한효소 같은 규격화된 재료들을 제공하여, 분자생물학으로부터 연구실의 지루한 일상을 얼마간 덜어주었다. 또한 학계에서 개발된 자동 서열분석 장치나 서열합성 장치 같은 기술들은 연구자들을 수많은 지루한 잡무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주었다. 예컨대, H. 고빈드 코라나(H. Ghobind Khorana, 1922- )는 작은 유전자 하나를 합성하는 데 한 무리의 공동연구자들과 5년여의 시간을 필요로 했고 최종적으로 1970년에 이르러서야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는 하루 만에 탁상용 실험기구를 사용해서 훨씬 거대한 유전자를 합성해낼 수 있다.

게놈프로젝트의 기술에 대한 강조는 분명 프로젝트의 거대과학 이미지가 형성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것은 생물의학 분야에서의 전통적인 소규모 연구를 바람직한 대안으로 찬양하도록 부추기는 데도 일조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연구 활동을 ‘작은 과학’(small science)이라 찬양하며 옹호하는 것은 전문적인 관점이 부족한 견해이기도 하다. 자본과 운영비용, 대학원생․박사후 연구원․기술전문가의 숫자, 연구 공간과 장비,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결합되어 연구 과제를 ― 이것들 모두가 거대과학은 아니라면 ― 대규모화 했다. 이러한 대규모화는 특히 다음과 같은 과학에 비하여, 말하자면 토마스 헌트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현미경, 초파리 병, 썩은 바나나 먹이, 소수의 대학원생들에 비교할 때, 혹은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Francis H. C. Crick, 1916-2004)의 조립식 장난감(tinker-toy), 종이로 오려 만든 DNA 구조 모형과 비교할 때 두드러진다.

과학 저널이나 언론에서 게놈프로젝트를 거대과학과 동일시하는 방식은 문제를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논의는 선별적이고 분별력이 없는데, 게놈프로젝트는 거대과학인 반면 연간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AIDS 프로그램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또한 게놈프로젝트가 초전도 고속 충돌기나 우주 정거장 계획과 한데 묶여 다루어지곤 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막대한 자금뿐만 아니라 거대한 기계장치와 거대한 관리기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게놈프로젝트가 거대과학의 한 가지 유형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비판자들이 책망하는 유형의 거대과학은 아닌 것이다.

거대과학의 유형에 대한 간단한 분류는 미국 맥락에서의 거대과학을 다음의 세 가지 형태로, 즉 그 기능에 따라 중앙집중식, 연방식, 혼합식으로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중앙집중형(centralized form)에서는 거대 기술 임무(big technological missions)의 특징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아폴로 프로그램(Apollo Program),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우주 정거장을 제작․발사․가동하기 위한 계획이 중앙집중형 거대과학에 해당한다. 이런 거대 임무 과학(big-mission science)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주요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을 만들고 작동하기 위해 진행되는 광범위한 노력들에 대한 중앙집권화된 통제가 포함된다.

연방형(federal form)은 거대 주제(big subjects)에 관한 지식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대륙의 자연지도나 지질도 작성, 항성과 은하계의 목록 작성, 혹은 암과 같은 주요 질병에 관한 연구가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식을 추구하는 프로그램들의 특징으로는, 지역의 자발성에 대한 조화로운 장려, 과제에 필요한 기법들을 개발하기 위한 다원적이고 분산된 노력들, 획득된 정보를 종합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조직된 데이터베이스 등이 두드러진다.

혼합형(mixed form)에서는 거대한 설비 과학(big-facility science)의 표준적 특징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고에너지 입자가속기, 행성 무인탐사선, 일군의 전파 망원경들처럼, 거대한 기술적 장치에 의존하는 연구 프로그램이 혼합형 거대과학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형의 과학에서, 설비를 만들고 정비하며 작동시키는 일은 핵심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중앙집권화된 통제와 관리 아래 놓이게 되는데, 초전도 고속 충돌기의 경우 입자가속기와 검출기를 설계하고 개발하는 데 편성된 일군의 사람들이 이런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에 연구를 위한 설비의 용도는 연방의 차원에서, 다양한 연구소에 흩어져 있는 연구자 집단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왜 거대과학 SSC는 사라졌는가

SSC는 혼합형 거대과학의 전형이며, 바로 그것이 SSC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지었다. 많은 분석가들처럼, 존스턴 의원은 SSC 종결안의 시행을 초선 상원의원 탓으로 돌리며 그들을 비난했다. 또한 그는 이런 초선 의원들이 “프로젝트 수를 줄이고 특권을 타파하길 원했던 분노한 유권자들의 대표적 산물”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미 의회는 중요한 국가 목표를 위한 지출에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곤 하면서 예산삭감에 선별적인 태도를 취해왔으며, 특히 이런 예산 지출이 지역의 정치적․경제적 이득과 관련될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SSC의 운명이 결정되는 데에는, 초선 의원 효과나 외국 원조의 부족보다는 국가적이고 지역적 기반에서 SSC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2차대전 이래로 고에너지 분야를 비롯한 물리학을 그토록 중요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 국가적 수준에서 어긋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실제적이든 가상적이든 간에 물리학이 국가 안보에 공헌한다는 논리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1945년 이후, 미국 물리학자들은 일종의 사회 지배층이 되었다. 그들은 정책을 좌우하고 국가 재원을 대량으로 얻는 권한을 가졌으며, 정치적 통제에서 얼마간 자유로운 부러워할 만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물리학과 국가안보의 동일시는 물리학자들에게 권력을 가져다주었으며, 지난 반세기 동안 그 지위를 상당 정도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리학자의 전쟁이라 불렸던 2차대전 동안, 그들은 원자폭탄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레이더, 로켓, 근접신관(proximity fuzes)을 포함한 수많은 경이로운 기술들을 개발했다. 냉전 시기 물리학자들은 미국의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국방 정책의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 대해 조언했으며, 대학, 산업체 및 정부 연구소, 국방 무기시설에 몰려든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또한 그들은 간접적으로는 국방연구의 부산물을 통해서, 직접적으로는 트랜지스터, 컴퓨터, 레이저, 광학섬유 같은 수많은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면서, 전후 첨단 기술 경제에 공헌했다.

이런 물리학자들 중에서도, 기본입자 물리학자들이 가장 두드러지고 영향력 있었다. 1980년대에 입자 물리학자들은 미국 물리학자 집단에서 약 10%를 차지했다. 입자 물리학의 선도자들은 미국인에게 수여된 노벨상 중 다수를 수상했고, 국가의 전략방위구상과 의회의 과학정책 입안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후 몇 십년동안 기본입자 물리학자들은 상당히 번영했다. 물리학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입자 물리학자들에게 충분한 자금을 지원해야한다는 정책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핵물리학의 연구가 결국 원자폭탄이라는 실체가 있는 결과로 이어졌듯이, 입자 물리학을 통해 경이롭고 실용적인 결과가 산출될 수도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냉전의 맥락에서, 입자 물리학자들은 국가 안보에 중요한 무엇이 예기치 않게 등장하면 소련보다 먼저 그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면서, 일종의 보험정책(insurance policy)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일반회계국은 상원과 하원에서 진행된 몇 차례의 논쟁을 정리하여 그 논점을 간략히 요약한 보고서를 준비했고, 버지니아 출신의 보수적 민주당원 존 워너(John Warner) 상원의원은 1993년 5월 18일에 이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좀더 강력한 초전도 자석이나 국방 하청산업체로의 자금 전환과 같은 간접적인 원조로 군부를 보조할 수는 있겠지만, SSC 자체는 국가 안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93년 랄프 홀(Ralph M. Hall) 텍사스 주 의원은 “SSC가 다시 한번 1950년대 초반의 재정 상태를 가져다 줄 것도 아니며, 그 당시 우리의 지정학적 강대함을 되찾아 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아쉬운 생각에 잠겼다. 더군다나 SSC에 대한 적극적 지지는 전략방위구상 ― 좀더 특정하지만 역시나 간절히 바라던 계획 ― 에 찬성표를 던졌던 소수의 상원의원들에서만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적인 전망은 SSC에 불리했는데, 미네소타의 공화당원 데이브 듀렌베르게(Dave Durenberger)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를 말할 것도 없이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만약 우리가 이전 시기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과 과학 분야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국가 안보를 향상시켜준다면, 나는 기꺼이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 우리는 그러한 위협에 직면해 있지 않습니다.”

국가 안보와의 관계가 끊어지자, SSC는 대통령이나 의회 활동과 같은 국내 정치 놀음의 대상이 되었다. 하원에서 첫 번째로 SSC안이 기각된 직후인 1992년 7월, 부시 정부는 프로젝트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로비에 열중했다. 부시 대통령은 SSC에 찬성하는 물리학자 대표단의 백악관 방문을 환대했고, 결정을 유보 중이던 상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하여 격려했다. 또한 부시는 왁사하키를 방문해서 초전도 고속 충돌기를 “미국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라고 격찬했고, 기초 연구를 위해서 “결국 모든 것이 하나로 모이므로 SSC는 루브르 박물관이자 피라미드이자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1993년 로이드 벤슨 의원이 내각에 등용되고 짐 라이트 하원 의장이 사임함에 따라, 텍사스 주 의회 대표단의 영향력은 약해져갔다. 또한 백악관의 주인이 텍사스 주의 양자에서 빌 클린턴으로 바뀌었다. 프로젝트에 향한 클린턴의 지지는 아칸소(Arkansas) 주의 동료 ― 상원에서 프로젝트 반대를 주도했던 ― 데일 범퍼스(Dale Bumpers) 같은 내부자들의 미온적인 반응 때문에 난항을 겪었다. 클린턴의 지지는 우주 정거장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던 그의 또 다른 노력과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SSC가 거부되기 전날인 1993년 6월에 하원은 단 한번의 투표로 우주 정거장 계획을 승인했던 것이다.

우주 정거장을 지지했던 정치, 경제 세력은 SSC 지지 세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우주 정거장에 들어가는 예산은 충돌기 예산의 두 배가 넘었고, 이에는 외국 자본으로부터 지원된 약 80억 달러의 자금도 포함되었다. 또한 항공우주 산업체가 우주 정거장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이 프로젝트의 이름 아래 생겨난 일자리도 보고된 것만 7만5000개에 달했다. SSC의 경비가 거의 모든 주에 걸쳐 지출되었다고는 하지만, 하원에서 짐 슬래터리는 대부분의 주들이 프로젝트로부터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프로젝트에 지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건설에 착수한 1989년 10월부터 1992년 4월 사이에 체결된 정부 조달계약들의 대다수는 매사추세츠 주, 뉴욕 주, 일리노이 주, 캘리포니아 주, 텍사스 주에 집중되었다. 특히 텍사스 주는 2위를 기록한 캘리포니아 주나 3위를 기록한 일리노이 주보다 4배나 많은 정부 조달자금을 지원받았다. 텍사스 주는 전적으로 SSC를 지지했다. 하지만 나머지 4개 주들은 SSC안을 부결시키는 데 압도적인 표를 던졌다. 뵐러트는 당시의 정치적 지형을 약간의 과장을 섞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저의 동료들은 SSC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출신지가 텍사스, 또 텍사스, 역시 텍사스, 다시 한번 텍사스, 그리고 루이지에나주, 어쩌면 캘리포니아 출신의 누군가도 포함됨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동료들은 프로젝트의 반대자들이 […] 전국 도처에 있음을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과학에 경의를 표하든 아니든 간에, SSC 반대자들은 이 프로젝트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이 반대자의 관심사가 예산을 절약하는 것에만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의회의 논쟁에서도 잘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이 예산을 삭감하기 위해 충돌기안을 부결시키려 했던 와중에, 다른 다수의 SSC 반대자들은 의료보험, 영양상태, 예방접종, 교육, 도심 빈민가 재개발과 같은 사회복지 프로그램 예산이 삭감되는 한 SSC에 대한 예산 지출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993년의 SSC 하원 투표를 다른 쟁점들에 관한 투표 기록에 비추어 분석해보면, 보수적 성향의 의원들과 자유주의적 성향의 의원들이 제휴해서 프로젝트에 반대했으며, 그 비율에서 자유주의자들이 더 많았음이 드러난다. 프로젝트를 옹호했던 의원들은 보수주의자들의 비율이 높았으며, 이는 그해 상원의 투표 성향에 반영되었다. 상원에서 민주당의 경우 과반수를 약간 넘는 의원들이 충돌기에 찬성했으며, 공화당의 경우 2 대 1 이상으로 찬성자가 많았다. 결국 SSC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의원들이 탈냉전 시기의 정치적 질서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음에 따라 냉전 보수주의의 산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탄력 있는 거대과학으로서의 휴먼게놈프로젝트

SSC와 달리, 휴먼게놈프로젝트는 중앙집중형이나 혼합형의 범주가 아니라 연방형의 거대과학에 해당한다. 그러한 것으로 휴먼게놈프로젝트가 미국 정부가 후원했던 과학 연구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새로운 유형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선례를 전국 해안지도를 만들기 위해 1807년 시작되었던 미국 해안측량조사(United States Coast Survey)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해안측량조사는 결국 전국의 측지 지도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되었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 수많은 지역 연구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유사한 것으로, 1879년 의회는 존 웨슬리 파웰(John Wesley Powell, 1834-1902)의 책임 아래 미국 지질조사국(United States Geological Survey)을 설립했다. 파웰은 서부 내륙 지역의 지질도를 만들기 위해서 이 기관을 조직했고, 일부분은 기관 고용원을 활용하고 나머지는 보조금 지원 체제를 활용하는 연구 프로그램을 도입 시행했다. 이러한 연구보조금 지원 체제는 지질학자, 고생물학자, 광물학자와 같은 많은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이 연구에 동참하도록 해주었다.

게놈프로젝트의 거대 주제는 당연히 인간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그 염기서열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런 게놈프로젝트는 주로 전국에 흩어져 전체 목표와 관련된 과제 연구와 유기체에 대한 연구를 착수하려는 수많은 소규모 과학자 집단들에게 연구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1991년 NIH는 175건의 개별 게놈프로젝트에 평균적으로 건당 31만2000 달러의 연간 연구보조금을 지원했다. 이는 NIH의 기초연구보조금의 1.5배 정도 되었고 AIDS 연구보조금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분명 NIH는 기술 개발에 특화된 연구와 대규모 지도 작성 및 서열 분석 연구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덟 개의 별도 연구센터를 세웠다. 하지만 개별 연구보조금의 경우처럼, 이런 연구센터들은 경쟁의 원리와 동료연구자의 상호검토(peer-reviewed)에 근거하여 유지되었고, 어떤 경우에서나 그 규모면에서 적당함을 유지했다. 1991년 가장 많은 예산을 지원받은 연구센터의 자금은 400만 달러 정도였으며, 이 예산은 몇몇 개별 연구자 집단들에게 나뉘어 지급되었다. 프로젝트의 수나 운영 방식으로 볼 때, 휴먼게놈프로젝트를 특징짓는 것은 중앙의 지시, 위계적 제도, 중앙으로의 집중이 아니라, 느슨한 조정, 지역의 자율, 다원성을 존중하는 계획과 제도라는 점이 확실해진다.

또한 프로젝트의 목표가 생물의학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었던 기술 혁신의 역사적 전통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이 전기영동이나 크로마토그래피와 같은 기술들이 생물학 연구에서 유용해졌다는 의미에 그치지는 않는다. 이러한 기술 중 몇몇은 처음에 거대하고 값비싸며 상당히 독점적인 기술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입자 가속기와 달리, 이러한 기술들은 점차 작고 값싸며 널리 퍼져 쉽게 얻을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 게놈프로젝트의 경우, 유전체 클론(genomic clone)을 확인하고 그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서열표지부위(sequence-tagged site, STS)를 이용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프로젝트가 시행되는 15년에 걸쳐 6,000만 달러가 들어갈 것이라 추정되던 클론 라이브러리(clone libraries)를 설치할 필요가 없어졌다. 일단 특정 클론의 서열표지부위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면, 누구나 자신의 실험실에서 ― 대규모 실험실이든 소규모 실험실이든 간에 ― 클론을 정확하게 다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휴먼게놈프로젝트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보트슈타인은 “게놈프로젝트는 개별 연구자들에게 지도를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줄 것이며, 그 사람이 로스앨러모스에 합류할 필요는 없다”고 일찍부터 말했었다.

보다 우수한 서열분석 기술을 개발하려는 게놈프로젝트의 노력은 부분적으로 서열 처리량 ― 단위 시간당 확인되는 염기쌍 숫자 ― 을 증가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목표는 확실히 야심적이었는데, 하루에 5000개의 염기쌍 서열을 처리할 수 있는 현재의 자동 DNA 서열분석 장치의 속도보다도 100배에서 1000배정도 높은 속도를 달성하려고 했다. 프로젝트 지지자들은 처리량을 점진적으로 증가시켜 염기쌍 당 2달러에서 15달러 정도 되는 당시의 DNA 서열분석 비용을 최소 100분의 1로 가까이 낮출 수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소규모 연구소의 자금만으로도, 어떠한 생물의 DNA 중 중요한 부분을 골라 그것에 대한 대규모의 서열분석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염기쌍 당 서열분석 비용은 1달러 미만까지 낮아졌다.) 많은 값싼 서열분석 장치들은 게놈 연구를 더욱 분산적인 연구로 만들어줄 것이며, 독립적인 프로젝트와 접근을 위해 더욱 많은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또한 이런 장치들은 결과를 더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해주며, 계속적인 기술 혁신을 촉진시킬 것이다.

게놈프로젝트에 열광했던 사람들이 앞으로 직면하게 될 무수한 기술적 난관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필수적인 유전자 지도와 서열분석 기술을 만들어낼 때에 부딪히게 될 어려움과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염기쌍 당 서열분석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지지 않는 한 실질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인간 유전자의 전체 염기서열을 직접 밝혀내는 작업을 완수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술과 과학에서 불확실한 결과가 나오고 있는 만큼, 게놈프로젝트는 기술에 의존하는 다른 많은 새로운 연구들보다 더 나은 것으로서 확실히 성공적인 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작동하지 않거나 완성되기 전에 폐기된 거대한 입자가속기는 어떤 과학적 가치가 있다 치더라도 거의 아무것도 가져도 주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 유전자 서열의 단편 하나를 얻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특히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포함된 단편을 찾아내면 과학적․의학적으로 굉장한 이득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게놈프로젝트가 완전하게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성공하면,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S. Collins)가 “정보의 떠들썩한 잔치”(an orgy of information)라 부른 결과가 산출될 것이다.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유발 유전자의 공동발견자인 누군가는 이러한 게놈프로젝트의 성과가 “최소한 다음 백년간의 연구 활동을 추동할만하다”고 평했다. 빅터 맥쿠식(Victor Mckusick)은 인간 유전자 지도와 서열 정보를 확장해 가는 연구를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 인체해부학의 현대적 판본을 만드는 작업에 비유했다. 그는 이러한 노력의 성과가 장래 의학의 기본이 될, 근원적인 지식에 대한 개설서가 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헌팅턴 병(Huntington's disease) 유발 유전자의 위치는 운 좋게도 쉽게 발견되었지만, 낭포성 섬유증에 관련된 유전자의 위치를 추적해내기까지는 실로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낭포성 섬유증처럼 DNA의 미묘한 변화가 원인이긴 하지만, 그것과 달리 훨씬 낮은 빈도로 발생하는 질병들에 대해서도 유전적인 원인이 앞으로 더 많이 발견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마 더 정확한 유전자 지도와 무수히 많은 서열 데이터가 필요해질 것이다.

서열 정보는 종 사이의 서열 패턴을 비교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를 통해 생물 진화 연구의 획기적인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서열 정보는 노벨 수상자 폴 버그(Paul Berg, 1926- )가 “유전자에 대한 편협한 정의”를 표현한 것이라 했던 관점에 대한 평가를, 즉 포유류 DNA의 대부분이 실제로 쓰레기(junk)인지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 버그는 중요한 조절 신호를 담고 있는 많은 인트론과 함께, 유전체 서열의 50%정도가 아마 유전적으로 기능하는 부분일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유전자 내부와 주위에 있는 이른바 비암호부분들이 우리가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분석 방법을 배우지 못한 신호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을, 우리 한번 무시해 볼까요? 킬로베이스(kilobase)가 아니라 메가베이스(megabase) 이상의 간격에서 서열의 배열을 관찰할 때 드러날지도 모르는 경이로움을 우리는 걷어치울 준비가 되었나요?”

지도 제작과 서열 분석을 하면서 쏟아져 나올 막대한 정보를 처리, 저장, 분석, 분배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법이 필요해질 것이다. 새로운 기법이 이용됨에 따라 다시 새로운 유형의 생물학자들이, 즉 정교한 기술과 데이터 분석 방법을 생물학의 근본적이고 흥미로운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빅터 맥쿠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전체학 연구소들은 새로운 유형의 과학자를 훈련시키는 최상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학자들은 분자유전학 혁명과 컴퓨터 혁명 양쪽 모두를 이용할 수 있도록 훈련될 것입니다. 이들이 21세기 생물학의 선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SSC에 대한 공격과 달리, 휴먼게놈프로젝트를 향한 비난은 몇 가지 이유에서 프로젝트를 중지시키는 데 실패했으며, 결국 전반적으로 효과 없이 끝이 났다. 1991년 NIH가 게놈프로젝트에 지출한 자금은 80억 달러인 NIH의 전체 예산에서 1%만을 차지했다. 만약 국립과학원에서 권한 연간 2억 달러의 자금을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된다면, NIH의 분담금은 1999년도 전체 예산의 1.5% 혹은 외부 연구보조금을 위해 할당된 예산의 3%정도가 될 것이었다. 예산 규모가 어떻든 간에, 게놈프로젝트는 ‘작은 과학’의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게놈프로젝트는 생물의학 연구자 집단들에게 자금을 아낌없이 분배했고, 이러한 자금을 지원받은 연구자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게놈프로젝트는 그것이 없었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정부 예산을 생물의학 연구에 계속해서 끌어다주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추가된 금액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다른 NIH 프로그램 마찬가지로, 게놈프로젝트는 그것이 생물의학 연구 예산을 지원했다는 근거에서 자신을 방어할 필요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정당화는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것이었는데, 프로젝트를 통해 육성된 기술, 데이터, 방법, 훈련된 사람들은 생물의학 연구의 하부 구조를 상당히 튼튼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게놈프로젝트는 생물의학 지원금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NIH의 연구소나 연구센터 중에서, 의회 제출안 대신에 국립과학원의 보고서로부터 파생된 것은 게놈프로젝트가 유일할 것이다. 게놈프로젝트는 거대과학의 일종이다. 하지만 SSC와 달리 다원적이고, 실용적이며, 많은 이득을 산출하는, 정치 체제가 기꺼이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려 했던 거대과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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