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증과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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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re Lakatos, “Falsification and the Methodology of Scientific Research Programs”, in Criticism and the Growth of Knowledge.

반증과 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

임레 라카토슈 지음, 정동욱 옮김


과학 : 이성인가, 종교인가?

수 세기 동안 지식은 — 지성의 힘을 통해서든 감각 증거를 통해서든 — 증명된 지식을 의미했다. 지혜와 지적 정직성은 증명되지 않은 주장을 멈추고 사변과 확립된 지식 사이의 간극을 (사고에서도) 최소화해야 함을 요구했다. 지성 또는 감각의 증명력은 이천 년 전부터 회의주의자들에 의해 문제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뉴턴 물리학의 승리에 의해 당혹에 빠지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결과는 또 다시 이를 역전시켰고, 지금은 극소수의 철학자나 과학자만이 여전히 과학 지식이 증명된 지식이라고 또는 증명된 지식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함께 지적 가치들의 고전적 구조 전체가 무너져 새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증명된 참의 이상을 (일부 논리경험주의자들처럼) ‘확률적 진리’[1] 또는 (일부 지식사회학자들처럼) ‘[변화하는] 합의에 의한 진리’[2]으로 약화시킬 수는 없다.

포퍼의 구분은 역사상 최고로 수용되었던 과학 이론 — 뉴턴 역학과 뉴턴 중력 이론 — 의 붕괴가 뜻하는 완전한 의미를 간파함으로써 제시된 것이다. 그가 보기에, [과학의] 미덕은 오류를 피하는 조심스러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류를 제거하는 무자비함에 있다. 과감한 추측과 엄격한 반박, 이것이 포퍼의 처방전이다. 지적 정직성은 그것을 증명(또는 ‘입증’)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굳히거나 확립하려는 노력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입장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조건을 정확하게 명시하는 것에 있다.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프로이트주의자들은 그러한 조건을 명시하길 거부한다. 이는 그들의 지적 부정직성의 징표이다. 믿음(belief)은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생물학적 약점으로 비판의 통제 하에서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헌신(commitment)은 포퍼에게 명백한 범죄이다.

쿤의 생각은 다르다. 그도 과학이 영속적인 진리의 축적을 통해 성장한다는 이상을 거부한다.[3] 그의 주된 영감도 아인슈타인에 의한 뉴턴 물리학의 전복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주된 문제 역시 과학 혁명이다. 그러나 포퍼에 따르면 과학은 ‘영구 혁명’이고, 비판은 과학 활동의 핵심인 반면, 쿤에 따르면 혁명은 예외적인, 사실은 과학외적인(extra-scientific) 일이며, 비판은 ‘정상적인’ 시기에는 금기시된다. 실제로 쿤에게 비판으로부터 헌신으로의 이행은 진보가 — 그리고 ‘정상’ 과학이 — 시작되는 시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에게 ‘반박’에 의해 우리가 이론의 거부하고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소박한’ 반증주의이다.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이론의 제안은 ‘위기’라는 드문 시기에만 허용될 뿐이다. 이 마지막 쿤의 논제는 광범위하게 비판받아 왔으며 나는 이에 대해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나의 관심은 쿤이 정당화주의와 반증주의 모두 과학적 성장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합리주의로 물러서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포퍼에게 과학적 변화는 합리적이거나 적어도 합리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으며, 발견의 논리의 영역에 속한다. 쿤에게 —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 과학적 변화는 이성의 규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지배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발견의 (사회) 심리학의 영역에 속하는 신비한 개종이다. 과학적 변화는 일종의 종교적 변화이다.

포퍼와 쿤의 충돌은 인식론의 단지 기술적인(technical) 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핵심적인 지적 가치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론 물리학뿐 아니라 미발달된 사회 과학과 심지어는 도덕 및 정치 척학에도 함의를 가진다. 과학에서도 이론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 지지자의 수와 신념과 목소리의 강경함을 평가하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면, 사회 과학에서는 더 심각할 것이다. 진리는 권력에 있다. 따라서 의도적이진 않더라도, 쿤의 입장은 현재의 종교적 광신자들(‘학생 혁명가들’)의 기본적인 정치적 신조(credo)를 분명히 변호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나는 우선 포퍼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두 가지 다른 입장이 혼재되어 있음을 보일 것이다. 쿤은 그중 하나인 ‘소박한 반증주의’(나는 ‘소박한 방법론적 반증주의’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지만)만을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에 대한 그의 비판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며, 나는 심지어 그의 비판을 보다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쿤은 ‘소박한’ 반증주의에 기초한 합리성과는 다른 합리성을 가진 세련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 세련된 포퍼주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 그리고 강화하려고 — 하는데, 나는 이 입장이 쿤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현재의 과학 혁명을 종교적 개종이 아닌 합리적 진보로 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류 가능주의 대 반증주의

세련된 방법론적 반증주의 대 소박한 방법론적 반증주의. 진보적 문제 전환 대 퇴보적 문제 전환

세련된 반증주의는 소박한 반증주의와 수용 (또는 ‘구획 기준’) 규칙뿐 아니라 반증 또는 제거 규칙도 다르다. 소박한 반증주의자에게, 실험적으로 반증가능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든 이론은 ‘수용가능’하거나 ‘과학적’이다. 반면 세련된 반증주의자에게, 이론은 선행 이론(이나 경쟁 이론)을 넘어서는 경험적 내용이 입증될 때에만, 다시 말해 그것이 새로운 사실의 발견을 인도할 때에만, ‘수용 가능’하거나 ‘과학적’이다. 이 조건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으로 분석될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이론이 추가적인 경험적 내용을 가진다는 것(‘수용기준1’)이고, 다른 하나는 이 추가적인 내용 중 일부가 검증되는 것(‘수용기준2’)이다. 첫 번째 조건은 선험적인 논리적 분석을 통해 즉각적으로 검사될 수 있고, 두 번째 조건은 오직 경험적으로만 검사될 수 있으며 이에 걸리는 시간은 정해지 않을 수 있다.

다시, 소박한 반증주의자에게, 이론은 그것과 충돌하는 (또는 그가 그것과 충돌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로 결정한) ‘견고한’ 관찰 진술에 의해 반증된다. 세련된 반증주의자는 과학 이론 T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진 다른 이론 T'이 제안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반증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1) T'은 T를 넘어서는 경험적 내용을 가진다. 즉 그 이론은 새로운 사실, 다시 말해 T에 의해서는 일어날 법하지 않거나 금지되는 사실을 예측한다.[4] (2) T'은 T의 성공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T의 반박되지 않은 모든 내용은 T'의 내용에 (관찰 오차의 한계 내에서) 포함되어 있다. (3) T'의 추가적인 내용 중 일부가 입증된다.[5] [...]

이제 T1, T2, T3, ... 로 이어지는 이론들의 연쇄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 각 후속 이론은 앞선 이론의 일부 변칙 사례를 포섭하기 위해 앞선 이론에 보조 진술들을 추가함으로써 만들어지고, 각 이론은 적어도 선행 이론의 반박되지 않은 내용만큼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각각의 새 이론이 선행 이론을 능가하는 경험적 내용을 일부 가지고 있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몇 가지 새로운, 지금까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예측한다면, 그러한 이론의 연쇄는 이론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혹은 ‘이론적으로 진보적인 문제교체(problemshift)’를 구성한다고) 말하자. 만약 이 추가적인 경험적 내용 중 일부가 입증되면, 즉 각각의 새 이론 덕분에 우리가 몇몇 새로운 사실을 실제로 발견하게 되면, 그러한 이론적으로 진보적인 이론들의 연쇄가 경험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말하자.[6] 마지막으로, 어떠한 문제교체 과정이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진보적일 경우에만 그 문제교체를 진보적이라고 말하고, 그 외에는 퇴보적이라고 부르자.[7] 우리는 어떠한 문제교체가 적어도 이론적으로 진보적일 경우에만 그것을 ‘과학적’인 것으로 ‘수용’하고, 그 외의 문제교체는 ‘사이비과학적’인 것으로 ‘거부’한다. 진보는 문제교체가 진보적인 정도, 이론들의 연쇄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정도에 의해 측정된다. 우리는 그 연쇄 중에 있는 한 이론이 입증된 내용을 더 많이 가진 이론에 의해 교체될 때 그 이론이 ‘반증’되었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진보적 문제교체와 퇴보적 문제교체의 구분은 과학적 — 혹은 어쩌면 진보적 — 설명을 평가하는 데 새로운 빛을 던져 준다. 만약 우리가 이전의 이론과 반례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내용을 증가시키는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대신 내용을 감소시키는 (언어적) 재해석만을 제공하는 그러한 새 이론을 제안한다면, 그 모순은 단지 의미론적인, 비과학적인 방식으로만 해결된 것이다. 주어진 사실은 오직 새로운 사실도 함께 설명될 경우에만 과학적으로 설명된다.[8]

따라서 세련된 반증주의는 어떻게 이론을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를 어떻게 이론들의 연쇄를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로 변환한다. 고립된 이론이 아니라, 이론들의 연쇄만이 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으로 얘기될 수 있다. 즉 하나의 단일 이론에 ‘과학적’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것은 범주 오류이다.[9]

만족스러운 이론에 대한 오래된 경험적 기준은 관찰 사실과의 일치이다. 이론들의 연쇄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기준은 그것이 새로운 사실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의 아이디어와 경험적 성격의 개념은 하나로 결합된다.

방법론적 반증주의의 이 수정된 형태는 많은 새로운 특징을 갖는다. 첫째, 이는 ‘과학적 이론의 경우, 우리의 결정은 실험 결과에 의존한다. 만약 그 결과가 이론을 입증하면, 우리는 더 나은 이론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것을 수용한다. 만약 그 결과가 이론과 어긋날 경우, 우리는 그 이론을 거부한다.’[10]는 생각을 부정한다. 이는 ‘이론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시험 결과, 즉 기초 진술과의 일치이다.’[11]라는 생각을 거부한다. 소박한 반증주의와 반대로, 실험이나 실험 보고, 관찰 진술, 잘 입증된 저수준 반증 가설은 단독으로는 반증을 이끌어낼 수 없다. 더 나은 이론의 출현 없이 반증은 존재하지 않는다.[12] 그러고 나면 소박한 반증주의의 뚜렷이 부정적인 성격이 사라진다. 비판은 더욱 어려워지면서, 더욱 긍정적이고 더욱 건설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물론, 반증이 더 나은 이론의 출현, 새로운 사실을 예견하는 이론의 발명에 의존한다면, 반증은 단지 이론과 경험적 기초 사이의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경쟁 이론들, 원래의 ‘경험적 기초’, 경합에 따른 경험적 성장 사이의 다자 관계이다. 따라서 반증은 ‘역사적 성격’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13] 더구나, 반증을 야기한 어떤 이론들은 종종 ‘반증 사례(counterevidence)’ 이후에 제안된다. 이는 소박한 반증주의에 물든 사람들에게는 모순처럼 들릴지 모른다. 실제로, 이론과 실험의 관계에 대한 이 인식론은 소박한 반증주의의 인식론과 분명하게 다르다. ‘반증 사례’라는 말은 어떠한 실험 결과도 직접적으로는 ‘반증 사례’로 해석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는 거부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오래된 용어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해야 한다. ‘T1에 대한 반증 사례’란 (T2가 T1의 경험적 성공을 만족스럽게 설명한다는 가정 하에서) T1과 모순되거나 독립적인 T2의 입증 사례를 의미한다. 이는 ‘결정적 반증’ — 또는 ‘결정적 실험’ — 이 수많은 변칙 사례들 중에서 모종의 대체 이론의 관점에 의한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14]

따라서 반증의 핵심 요소는 새로운 이론이 선행 이론에 비해 모종의 새로운, 추가적인 내용을 제공하는지와 이 추가적인 내용의 일부가 입증되는지이다. 정당화주의자는 이론의 ‘입증’ 사례를 중시하고, 소박한 반증주의자는 ‘반박’ 사례를 강조한다. 방법론적 반증주의자에게 중요한 것은 — 비교적 드문 — 추가적인 내용의 입증 사례이며, 이것이야말로 모든 관심을 받는다. 우리는 더 이상 수천 개의 사소한 검증 사례나 수백 개의 사소한 변칙 사례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소수의 추가 내용-입증 사례가 결정적이다.[15] 이러한 검토는 다음의 옛 속담을 되살린다(재해석한다). 모범적인 사례 하나는 교훈적이지만, 여럿은 가치가 없다.

소박한 반증주의에 따른 ‘반증’(입증된 반증 사례)은 특정한 이론을 제거하기 위한 충분 조건이 아니다. 수백 개의 알려진 변칙 사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이론을 얻기 전까지 그것을 반증된 것으로 (즉, 제거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16] 소박한 반증주의에 따른 ‘반증’은 세련된 의미의 반증을 위한 필요 조건도 아니다. 진보적 문제교체는 ‘반증’과 동반될 필요가 없다. 과학은 ‘반증’을 앞세우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다. 소박한 반증주의자는 과학의 선형적인 성장을 제안한다. 즉 이론을 제거하는 강력한 반박 다음에 이론이 뒤따르고, 새 이론이 나온 다음에는 다시 반박이 뒤따른다.[17] n번째 이론에 대한 ‘반박’이 n+1번째 이론에 대한 입증처럼만 보이는 그러한 빠른 승계 과정을 통해 이론들이 ‘진보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완벽하게 가능하다. 과학의 과열은 반증 사례나 변칙 사례보다는 경쟁 이론의 증식에 의해 일어난다.

이는 이론의 증식이라는 슬로건이 소박한 반증주의에 비해 세련된 반증주의에서 훨씬 더 중요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소박한 반증주의자에게 과학은 끊임없는 이론의 실험적 전복을 통해 성장하며, 그러한 ‘전복’ 이전에 제안된 새로운 경쟁 이론은 성장 속도를 증가시킬 수는 있겠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18] 이론의 지속적인 증식은 선택 사항일 뿐 의무 사항이 아니다. 세련된 반증주의자에게 이론의 증식은 수용된 이론이 ‘반박’될 때까지 (혹은 이론의 주창자들이 쿤식 위기[불신]에 빠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19] 소박한 반증주의가 ‘반증된 가설을 더 나은 가설로 교체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20] 세련된 반증주의는 어떤 가설이든 더 나은 가설로 교체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증은 ‘이론가에게 더 나은 이론을 탐색하도록 만들지’ 않는데,[21] 이는 반증이 더 나은 이론에 앞서지 않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포퍼식 연구 프로그램 대 쿤식 연구 프로그램

이제 쿤-포퍼 논쟁을 요약해 보자.

우리는 소박한 반증주의를 반대하고 과학적 성장의 연속성과 일부 과학 이론의 고집을 강조한 쿤의 지적이 옳았음을 보였다. 그러나 소박한 반증주의를 폐기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반증주의를 폐기했다는 쿤의 생각은 틀렸다. 쿤은 포퍼식 연구 프로그램 전체를 반대하면서, 과학의 성장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어떠한 가능성도 거부한다. 흄, 카르납, 포퍼에 대한 왓킨스(Watkins)의 간결한 비교에 의하면, 과학은 성장이 흄에 따르면 귀납적이면서 비합리적이고, 카르납에 따르면 귀납적이면서 비합리적이고, 포퍼에 따르면 비귀납적이면서 합리적이다.[22] 그러나 왓킨스의 비교는 다음을 덧붙여 확장될 수 있다. 과학은 쿤에 따르면 비귀납적이면서 비합리적이다. 쿤의 관점에서 발견의 심리학만 가능할 뿐 발견의 논리는 불가능하다.[23] 예를 들어, 쿤의 개념에서, 변칙 사례, 비일관성은 과학에서 항상 널려 있지만, ‘정상적인’ 시기에는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성장의 패턴을 보호해 준다. 이는 결국 ‘위기’에 의해 전복되는데, ‘위기’는 심리적인 개념으로, 그것은 집단적 공황 상태이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는데, 이는 선행 패러다임과 공약불가능하다. 그들 사이의 비교를 위한 합리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패러다임은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위기는 옛 이론과 규칙뿐 아니라 우리가 이론을 평가하는 기준까지도 쓸어 버린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완전히 새로운 합리성을 가져온다. 범패러다임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는 밴드왜건 효과에 불과하다. 즉 쿤의 견해에서 과학혁명은 비합리적이며, 군중 심리학의 문제이다.

과학에 대한 심리학을 통한 과학철학의 환원은 쿤이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심리주의’의 앞선 유행은 정당화주의의 붕괴 이후에 나타났다. 많은 이들에게, 정당화주의는 합리성의 유일한 가능한 형태를 표상했기에, 정당화주의의 종말은 합리성의 종말을 의미했다. 과학 이론이 증명될 수 있다는 논제와 과학의 진보가 축적적이라는 논제의 붕괴는 정당화주의자들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만약 ‘발견이 곧 증명’이나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면, 발견도 불가능하며, 오직 발견-주장만 가능할 뿐이다. 즉 좌절한 정당화주의자들 — 옛-정당화주의자들 — 은 합리적 기준의 개선이 가망 없는 일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유명한 과학자들에 의해 예화된 과학적 마음을 연구하는 — 그리고 흉내내는 —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뉴턴 물리학의 붕괴 이후, 포퍼는 새로운, 비-정당화주의적 비판적 기준을 만들어냈다. 이제 정당화주의적 합리성의 붕괴를 이미 배운 사람들의 일부는 소박한 반증주의를 제안한 포퍼의 화려한 슬로건들의 붕괴도 (대개는 소문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 슬로건들이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소박한 반증주의의 붕괴를 합리성 그 자체의 종말과 동일시했다. 합리적 기준의 개선은 또 다시 가망 없는 일로 간주되었고, 그들은 또다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과학적 마음을 연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24] 비판적 철학은 폴라니(Polanyi)가 ‘비판 이후의(post-critical)’ 철학이라고 부른 것에 의해 교체될 것이었다. 그러나 쿤식 연구 프로그램은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개별 과학자의 마음이 아니라 과학자 공동체의 마음을 연구해야 한다. 이제 개인 심리학은 사회 심리학으로 교체되고, 위대학 과학자에 대한 흉내는 공동체의 집단 지성에 대한 굴복으로 교체된다.

그러나 쿤은 포퍼의 세련된 반증주의와 포퍼가 시작한 연구 프로그램을 간과했다. 포퍼는 고전적 합리성의 핵심 문제, 즉 토대에 대한 오래된 문제오류 가능한-비판적 성장의 새로운 문제로 교체했으며, 이 성장의 객관적 기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나는 그의 프로그램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고자 했다. 나는 이 작은 발전만으로도 [포퍼식 연구 프로그램이] 쿤의 비난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