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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9일 (화) 13:41 기준 최신판

Kathleen Okruhlik, “Gender and the Biological Sciences”, in Martin Curd and J. A. Cover, eds., Philosophy of Science: The Central Issues (New York and London: W. W. Norton & Company, Inc., 1998), pp. 192-208; originally from Biology and Society,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Supplementary vol. 20 (1994), 21-42.


젠더와 생명과학들


케이틀린 오크룰릭(Kathleen Okruhlik)

정동욱 옮김


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들은 사회적 영향이 과학의 내용을 형성할 수도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데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많은 저자들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출신이며, 철학자 출신도 있다. 과학철학의 경우, 과학의 성차별주의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편향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많은 과학 분야의 발전이 젠더 이데올로기에 의해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증하는 증거를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방식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생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들은 성평등을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특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생물학적 결정론적인 논변들은 여성의 억압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무척 자주 인용되기 때문이다. 그 논변들은 왜 여성이 사회적으로 종속적인[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지’, 왜 남성은 여성보다 더 똑똑하고 더 공격적인지, 왜 여성은 집에 있기를 좋아하기 마련인지, 왜 남성은 강간을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유전자, 호르몬, 진화 과정들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순리에 대한 결정요인으로 인용되며, 궁극적으로는 더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들이 소용이 없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는 증거로 인용된다.

생물학에 대한 비판들은 인식적으로(epistemically)도 중요한데, 이는 생물학이 과학의 통상적인 위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 물리학과 사회과학 양쪽 사이의 어딘가 ― 때문이다. 사회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들은 사회과학은 아예 과학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과학철학자들의 고려 대상에서 매우 빈번히 제외되곤 한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비판들이 아무리 충격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 과학의 본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으로 얘기됐다. 그러나 생물학을 사이비과학으로 일축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으며, 따라서 이 분야에서의 비판들은 추가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만약 우리가 여성주의적 비판의 시각에서 과학의 본성에 대한 무언가(과학의 합리성, 객관성, 사회적 영향으로부터의 단절 정도, 개인적 혹은 집단적 활동으로서의 성격)를 추론하고자 한다면, 생명과학은 아마도 최선의 출발지점이 될 것이다. 이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작성되었다. 이 글은 4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절에서는, 생명과학의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몇 가지 사례 연구들을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의 검토는 논의를 위한 일반적인 사례들을 제공하는 한편, 그것들에 대해 과학철학의 표준적인 입장이 얼마나 부분적인 해명만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매우 간략하게 보여주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2절에서는, 이 사례 연구들(과 그와 같은 다른 사례들)의 가능한 인식적 중요성이 여성주의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과학에 대한 대안적인 이해방식들의 시각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이 에세이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젠더 편향에 의해 예화되는 과학에 대한 다양한 사회문화적 영향의 여지를 남기면서도, 상당히 튼튼한 객관성과 합리성의 관념을 위한 여지도 허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4절에서는, 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 속하는 다른 견해들과 비교하여 이 이해방식을 위치지우는 시도를 할 것이다.

몇 가지 사례 연구들

우선 스워스모어 칼리지(Swarthmore College)의 생물학과 젠더 연구 그룹(Biology and Gender Study Group)이 작성한 “현대 세포 생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중요성”이란 제목의 1988년 글을 보자.[1] 이 글은 어떻게 현대의 연구가 여전히 생식 과정에서 난자와 정자가 맺는 관계에 대한 낡은 모델에 의해 구속받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특히, 난자와 정자에 대한 '잠자는 공주/완벽한 왕자(Sleeping Beauty/Prince Charming)' 모델에 대한 믿음은 연구자들과 이론가들에게 인간 생식에 관한 일부 사실들을 보지 못하게 했을지 모른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남성은 능동적으로 보이듯이, 난자와 정자도 전통적인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정자는 영웅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적대적인 자궁과 맞서 싸운 후, 난자에게 구애하고, (만약 성공적이라면) 모든 경쟁 구혼자들을 물리치고 뚫고 들어가는 반면, 그동안 난자는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한다. 이 영웅담 속 난자의 유일한 역할은 어느 구혼자가 성공할지 맞추는 것뿐이다.

남자의 정액이 잠자는 난자를 깨운다는 생각은 이미 1795년부터 등장해서 그 이후로 줄곧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지난 15년 사이에, 몇몇 대안적인 견해들이 난자를 생식과정의 활동적인 동반자로 여기면서 이 오래된 이야기에 도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자현미경을 이용하면, 정자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냥 난자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신에, 난자는 세포 표면에 작은 손가락 같은 돌기를 성장시켜 정자를 움켜잡고서 천천히 안으로 끌어당긴다. 정자에게 뻗어 나오는 이 미세융모 돌기는 성게의 생식에 대한 최초의 사진이 발표된 1895년에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발견은 최근까지 거의 무시되었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중요한 문제는 새로운 이론이 전적으로 옳은 이론인지가 아니다(그것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러나 보다 확립된 견해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 이론이 존재한다는 것 바로 그 자체는 오래된 모델의 의심스러운 가정들을 선명하게 돋보이게 해준다. 새 이론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기존의 이론적 가정들에 의해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할지, 무슨 가설을 탐구할지, 어떤 자료를 증거로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하기로 결정할지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고려들은 때때로 발견의 맥락으로 격하되고 실제 과학의 내용과는 인식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얘기되는데, 이 문제는 우리가 뒤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그 사이에, 자료의 증거적 중요성이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 즉 같은 자료가 서로 다른 이론적 믿음에 따라 해석이 이루어지는 경우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영장류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많은 여성주의 비판들은 남성의 싸움, 남성의 경쟁, 남성의 발명이 인간의 진화를 위한 기초로 묘사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루스 허버드(Ruth Hubbard)와 다른 비판가들에 의해 인용되는 『인간의 유래』의 익숙한 구절에서, 다윈은 인류의 진화적 발달을 거의 전적으로 남성의 활동 덕분이라고 본다.

[남성은] 그들의 아이들뿐 아니라 여자들을 모든 종류의 적들로부터 보호해야 했으며, 공동의 생계를 위해 사냥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적을 피하거나 공격하고, 야생 동물들을 잡고, 무기를 만드는 일은 높은 정신적 능력, 즉 관찰이나 추론, 발명, 상상력 등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능력은 어른(manhood)으로 있는 동안 지속적으로 시험에 부쳐져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 논의는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따라서 남성은 결국 여성보다 우월해지게 되었”고, 남성이 자신의 형질을 그들의 아들뿐 아니라 딸에게까지 물려준다는 것은 다행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의 정신적 재능은 수컷 공작의 장식 깃털이 암컷 공작보다 훨씬 우월한 것처럼 여자보다 훨씬 우월해졌을 것이다.”[2]

다윈의 남성중심적 편향의 영향은 진화 생물학에만 제한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은 많은 다른 분야에서 보조가설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류학을 생각해보자. 만약 누군가가 수렵-남성(man-the hunter)이 인간의 진화적 발달에서 주된 역할을 했다는 견해를 가진다면, 그는 남성의 변화하는 행동에 비추어 화석 증거를 해석할 것이다. 예를 들어, 헬렌 롱기노(Helen Longino)와 루스 도엘(Ruth Doell)은 “몸, 편향, 행동: 생명과학의 두 영역에서의 추론에 대한 비교 분석”이란 제목의 매우 중요한 1983년 글[3]에서, 남성중심적 견해가 도구 사용의 발달을 남성의 사냥 행동의 결과로 보는 방식들을 추적한다. 그러나 일부 최근 연구는 수렵-채집 사회라 불려온 사회에서 생계를 유지한 식량의 80%는 여성 채집인으로부터 왔다고 제안했다. 만약 그 견해가 누군가의 증거 해석에 영향을 주는 배경 이론이라면, 같은 증거에 대한 매우 다른 설명이 나올 것이다. 롱기노와 도엘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요점을 정리한다.

[남성중심적 견해와] 반대로, 여성중심적 이야기도 도구 사용의 발달을 여성 행동의 결과로 설명해준다. 즉 도구 사용의 발달은 여성들이 임신 기간에 겪는, 그리고 임신 후 젖과 주변 사바나에서 채집한 음식을 이용해 아이를 먹이는 과정에서 겪는 더 큰 영양상의 압박에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수렵-남성 이론가들은 돌 도구에 주목하는 반면, 채집-여성(woman-the-gatherer) 이론가들은 도구 사용이 훨씬 일찍부터 나뭇가지나 갈대와 같은 유기 재료들을 통해 발전해 왔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여성은 더 큰 지능과 유연성과 같은 소위 인간적인 특성들의 발달에 남성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혁신가로 묘사된다. 여성은 채집하는 동안 포식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땅을 파고 운반하고 음식 준비를 하기 위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도구의 사용을 발명한 것으로 얘기된다.

또 다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중심적 가설이 인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설 덕분에 인류학적 증거에 대한 표준 해석이 남성중심적 편향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검토된 사례들은 성과 젠더에 관한 기존의 이론적 믿음에 의해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무슨 자료가 설명되어야 하는지, 무슨 자료는 안전하게 무시될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적합한 해석들 중 어떤 것이 실제로 채택되어야 할지에 관한 결정이 영향을 받는 방식에 대해 관찰의 이론-적재성(theory-ladenness of observation)이나 자료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underdetermination of theory by data)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사례들이었다. 뒤앙-콰인 논제(Duhem-Quine Thesis)를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사례들도 있다. 정립된 선호되는 해석에 대해 일군의 유관한 자료들이 이미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시험 가설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명백한 반증이 되는 정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어느 정도 열려 있다. 누군가는 간단하게 시험 가설을 거부할 수 있겠지만, 실패한 예측을 산출하는 데 사용된 배경 가정들 중 하나에 그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 역시 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후건 부정 논법(modus tollens)’의 화살은 시험 가설에서 방향을 틀어 하나 이상의 보조 가설로 향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실패한 예측에 대한 완벽히 수용가능하면서도 유용한 대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증으로부터 일부 가설을 보호하는 결정이 (‘인지적’인 요인뿐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인 요인까지 포함해서) 어떤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또한 이론 평가에서 우리의 배경 가정들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게 만드는데, 그 역할은 지금의 논의에서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sex)과 젠더(gender)에 관한 우리의 배경 가정들은 대부분 그동안 체계적인 검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가설들은 잇따른 반증에도 언제나 믿음 체계의 다른 부분에만 실패의 책임과 계속된 수정을 씌우면서 살아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여성과 남성의 지적 차이, 특히 소위 수학과 공간적 능력에 관한 소위 남성의 우월성과 관련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신경 해부학의 최근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앤 파우스토-스털링(Anne Fausto-Sterling)은 자신의 책 『젠더의 신화(Myths of Gender)』[4]에서 그 몇몇 최근 이론들을 검토했는데, 다음의 사례들은 그의 논의에서 가져온 것이다.

지금까지 제안된 주장들에 따르면, 공간적 능력은 X염색체에 연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성보다 남성에서 더 잘 발현되고, 높은 수준의 태내 안드로겐은 지능을 높여주며, 낮은 수준의 에스트로겐은 ‘재구조화’ 능력이 뛰어난 남성의 능력을 만들어낸다. 일부는 여성의 두뇌가 남성의 두뇌보다 좌우불균형이 심하며, 보다 높은 좌우불균형은 공간적 기능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여성의 두뇌가 남성의 두뇌보다 좌우불균형이 덜하며, 약한 좌우불균형은 공간적 능력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성염색체에 연계된 공간 유전자는 테스토스테론이 존재할 때에만 발현될 수 있다고 제안함으로써 공간적 능력의 X염색체 연계 가설을 그에 대한 반박 증거로부터 구제하고자 했다. 다른 이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요산을 가지기 때문에 더 똑똑하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들 중 어떤 것도 증거에 의해 잘 뒷받침되지 않으며, 대부분은 분명히 반박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목적에서 흥미로운 것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그들이 다루기 힘든 자료에 직면해서도 포기하지 않고자 하는 이론적 네트워크의 한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여성의 열등한 지적 성취에는 주되게 생물학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가정이다.

어떤 이들은 이 상황으로부터 열등한 여성의 지능을 두뇌 크기에 호소하여 설명하고자 했던 19세기 두개계측학의 유명한 시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는 파우스토-스털링도 다룬 사례이다. ‘클수록 좋다’는 가설은 코끼리 문제 때문에 기각됐다(만약 절대적인 크기가 지능의 진정한 척도라면, 코끼리가 사람보다 똑똑해야 했다). 그래서 지능의 진정한 척도는 신체 질량에 대한 두뇌 질량의 비율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 비율은 여성에 유리했고, 따라서 이 가설은 곧장 거부됐다. 더 높은 지능이 두개골에 대한 안면골의 더 낮은 비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제안은 ‘새 문제’와 충돌했다. 그래서 전두엽이 지능의 자리라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남성은 더 큰 전두엽을 가지는 반면, 두정엽은 여성이 더 크다. 이 가설은 새로운 연구가 두정엽을 지능의 자리로 지적하자 기각됐다. 그래서 실제로는 여성이 더 작은 두정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료가 재평가되었고, …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계속 되었다. 과학자들이 명백한 반증에 직면하고서도 포기하지 않고자 했던 이론적 네트워크의 한 가지 요소는 바로 여성이 남성보다 덜 똑똑하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암묵적인 가정이었다. 여성주의 비판가들이 젠더와 수학적 능력에 관한 현재의 논쟁에서 되풀이된 똑같은 패턴을 찾아내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앞의 사례들에서는, 어떻게 이론 평가에 대한 상당히 표준적인 이해방식 하에서도 젠더 이데올로기가 생명 과학에 침투할 수 있었는지를 제안하기 위해 관찰의 이론-적재성, 이론미결정성 논제, 뒤앙-콰인 논제와 같은 표준적인 철학적 논제들에 호소해 왔다. 이 사례들에서, 우리는 외적 가치들이 과학에 침투해 왔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들은 이 사례들에서 암묵적이며, 보통 상충하는 가치를 품은 경쟁 가설에 비추어서만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이 짧은 문헌 검토에서 마지막으로 다루게 될 사례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의학에서는, 가치나 규범이 종종 매우 명시적이다. 누가 건강하고 누가 질병을 앓고 있는지, 어떤 신체 유형이 바람직하고 어떤 것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할 때, 관련된 개념들은 기술적(descriptive)일 뿐 아니라 분명히 규범적(normative)이다. 이는 위에서 논의된 것과는 다른 유형의 젠더 편향을 보여주는 문을 열어준다. 한 유형에서는, 서로 다른 이상이 남성과 여성에 정해져 있다. 두 가지 이상은 ‘상보적’인 것으로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남성만이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또 다른 유형의 편향은 단일한 기준(norm)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될 때 발생하지만, 실제로 그 기준은 인간적 기준이라기보다 남성적 기준이다.

상보성 문제의 좋은 역사적 사례는 론다 쉬빈저(Londa Schiebinger)의 탁월한 책 『두뇌는 아무 성도 가지지 않는가? 현대 과학의 기원에서 여성들(The Mind Has No Sex? Women in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5]에서 볼 수 있다. 쉬빈저는 18세기 해부학에서 젠더 차이를 확립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이 이루어지는 동안 남성과 여성의 해부학적 표상에서 나타난 변화들을 기록한다. 만약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차이가 그들의 내부구조, 즉 신체의 에 위치할 수 있다면, 차이에 대한 근대적인 과학적 설명이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그 일을 하기 위해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오래된 열 모델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 시대 전까지, 남성과 여성의 골격은 비슷하게 그려졌었다. 그들은 성적으로 차별화되지 않았다. 때로 골격의 성은 규정되지 않았으며, 때로 앞모습은 남성으로, 뒷모습은 여성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730년과 1790년 사이에 달라졌다.

그 시대의 유물론에 의해 해부학자들은 골격을 신체의 가장 단단한 부분으로서 신체의 “기본 계획”을 제공하고 근육을 비롯한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그것에 붙게 될 “확실하고 자연스러운” 지침을 주는 것으로 처음 보게 되었다. 만약 성차가 골격에서 발견될 수 있다면, 성 정체성은 더 이상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열의 다른 정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성차는 (베살리우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중립적인 인간 신체에 붙은 성기관의 문제도 아닌 것이 될 것이다. 대신, 성은 골격에 붙거나 골격에 의해 빚어진 모든 근육, 정맥, 기관을 관통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6]

그렇게 등장한 남성과 여성의 이상은 서로 매우 달랐다. 남성의 골격은 큰 머리와 강한 어깨를 특징으로 했으며, 그것의 동물적 유비는 말로, 종종 남성의 골격 그림의 배경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골격은 큰 골반과 길고 우아한 목과 자그마한 머리를 가졌다. 여성의 골격은 자주 그 그림의 장식으로 사용된 타조와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화적 이상과 매우 밀접하게 근접했던 이 골격들은 바로 그 이유에서 어떤 의미에서 더 정확한 그림들보다 선호됐다.

여성의 커다란 골반과 작은 머리를 강조하는 한 가지 방법은 흉곽을 매우 좁게 그리는 것이었는데, 이 점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파우스토-스털링은 여기에 작용한 것이 단지 이데올로기의 힘만이 아닐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그림들의 모델이 된 시체들의 일부는 코르셋의 장기 사용에 의해 꽉 눌린 흉곽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신체가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기반이 되고 젠더라는 사회-문화적인 불순물은 그 기반 위에 부착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 루스 허버드[7]와 다른 이들이 옳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비록 생물학적으로 규정된 ‘성(sex)’과 사회적으로 규정된 ‘젠더(gender)’ 사이의 구분이 많은 측면에서 여성주의 이론 작업에 잘 쓰이긴 했지만, 이 구분은 종종 모든 생물학적 속성들이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낳기도 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젠더뿐 아니라 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키, 골밀도, 근육계와 같은 ‘물리적으로 주어진 것들’도 상당 부분 문화적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골격 사례는 남성과 여성의 기준이 상보적인 것으로 얘기되는 경우지만, 남성은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 취급된다. 다른 사례들에서는, 단일한 인간적 기준이 상정되긴 하지만,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남성적인 기준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월경, 임신, 출산을 질병이나 응급상황으로 취급하는 것은 그것들이 이상적인 건강한 인간, 즉 당연히 남성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로 소급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상적인 건강한 실험쥐 역시 남성이다. 그의 신체, 호르몬, 행동이 기준을 정의해준다. 따라서 그가 실험에 사용된다. 여성의 호르몬과 그 효과들은 실험에서 남성 모델에 의해 대표되는 쥐의 순수하고,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는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연구를 망치는 성가신 변수들일 뿐이다. 그 종의 여성은 진정으로 쥐(또는 진정으로 인간)이기에, 그녀는 남성에 기반한 연구에 의해 다루어진다. 그녀가 그 연구에 포함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녀가 자기 종의 전형적인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 절차의, 특히 생의학에서의, 위험한 결과는 이제 막 기록되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이러한 실험 설계의 이면에 놓인 (남성이 기준이라는)가정은 그야말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엘리자베스 로이드(Elisabeth Lloyd)는 여성 오르가즘의 발생에 대한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이란 책을 쓰고 있는데, 이 책은 인간의 기준을 가장한 남성의 기준의 멋진 사례를 담고 있다. 다양한 사회생물학자들은 여성 오르가즘의 진화적 기원에 대한 이론들을 발전시킬 때 그들의 기원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오르가즘의 성격, 길이, 빈도, 반복성에 대한 상세한 통계를 인용해왔다. 그들의 각주를 추적했을 때, 로이드는 (여성의 오르가즘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던) 이러한 통계들이 실제로는 남성의 오르가즘에 대한 자료에 기초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속임수의 전형적인 방법은 남성 개체들을 남성들 대신 ‘개인들’로 인용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여성주의적 비판

위에서 살펴본 것들과 같은 사례 연구들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그 연구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도 던져준다. 나는 그 질문이 제기되는 두 가지 맥락에 특히 관심이 있다.

  1. 여성주의 문헌에서 지난 몇 년 사이에 가장 중요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 이러한 사례 연구들은 ‘나쁜 과학’의 사례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 연구들은 과학이 본질적으로 남성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2. 과학철학에서 그 질문은 상당히 자주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 이것은 과학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두 질문은 연결되어 있으며, 나는 둘을 함께 다루고 싶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여성주의 인식론에 대한 샌드라 하딩(Sandra Harding)의 3가지 분류는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8] 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의 혼란스러운 다양성을 다루기 위해, 하딩은 이를 여성주의적 경험주의(feminist empiricism), 관점 인식론(standpoint epistemology)#역자주1, 여성주의적 포스터모더니즘(feminist postmodernism)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여성주의적 경험주의’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실패를 과학이 자기 자신의 이상에 부응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진단한다. 남성중심적 편향은 과학적 방법의 엄격한 적용을 방해해 왔다. 그러나 과학의 규율(canon)이 충실히 지켜졌다면, 위와 같은 일들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성주의적 경험주의의 입장에서, 인식 주체의 관점은 인식적으로 무관하며, 그 관점에서 유래한 어떤 편향도 객관적 방법의 적절한 적용으로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지식 주장의 자격이 부분적으로 인식 주체의 상황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관점 인식론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헤겔의 노예가 주인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성(또는 여성주의자)도 남성(또는 비여성주의자)에 비해 인식적 장점을 누릴 수 있다. 관점 인식론에 따르면, 여성의 관점에 기초한 과학은 현재 과학을 넘어서는 진보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는 여전히 ‘계승자 과학(successor science)’#역자주2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인식적으로 우월한) 설명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접근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들이 지적되었지만,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단일한 여성주의 관점이 없다는 문제제기였다. 여성의 관점이 남성의 관점과 다른 것처럼, 가난한 여성의 관점 역시 부유한 여성의 관점과 다르고, 흑인 여성의 관점은 백인 여성의 관점과 다르고, 레즈비언의 관점은 이성애자 여성의 관점과 다르고, 등등. 어떤 근거에서 이들 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세계를 기술하는 관점으로서의 특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정체성의 균열과 그로 인한 관점의 균열로 인해, 일부 이론가들은 더욱 더 객관적이 되기 위한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대안적인 서술들의 환원불가능한 다원성의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하딩이 ‘여성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 접근을 수용하게 되었다. 문화, 시간, 장소의 제약을 뛰어넘게 해줄 것 같은 과학적 방법의 관념은 여성주의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의해 완전히 거부되었다. 합리성과 객관성에 대한 이론초월적인 기준은 남성적 신화의 산물로 기각되고, ‘계승자 과학’ 프로젝트는 폐기된다.

하딩의 분류는 여성주의 비판가들의 다양한 철학적 입장에 대한 용이한 분석으로는 매우 유용하지만, 나는 이 분류가 유망한 가능성을 가리는 경향도 있다는 걱정이 든다. 즉, 합리적 이론 선택의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 (젠더 관습과 같은) 사회적 구조가 과학의 내용 자체에 영향을 주는 방법을 고려하는 가능성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입장을 소개할 것이다.

과학과 공유된 사회적 가치들

전통적으로, 과학철학은 (아마도 젠더를 비롯한) 사회적 심리적 요인이 과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매우 기꺼이 인정해 왔다. 그러나 그 역할은 엄격하게 제한된 것으로, 소위 발견의 맥락에서만 허용되거나, 아니면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합리성의 규율을 분명히 위반한 ‘나쁜 과학’으로 일컬어지는 사건에서만 허용되었다(리센코 사건은 이에 대한 표준적인 사례이다). 전통적인 얘기에 따르면, 발견 또는 이론 생성의 맥락에서는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누군가의 가설의 원천은 인식적으로 무관하며, 중요한 것은 정당화의 맥락이 된다. 만약 당신이 찻잎을 읽다가(점을 치다가) 당신의 가설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그 가설이 정당화의 맥락에서 입증되거나 용인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은 자연의 법정에서 가설을 시험해서, 만약 그 가설이 시험을 견딘다면 당신은 그것을 계속 고수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 가설의 기원이 무엇이든 말이다. 여기서의 아이디어는 가설이 한 맥락에서 다음 맥락으로 통과할 때 과학적 이론 선택의 기준이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오염물을 걸러주는 일종의 필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가설이 직접적으로 자연과 비교된다는 이론 평가 모델이 있었던 20세기 전반세기에는 어느 정도 말이 됐다. 그러나 발견이나 이론 생성의 맥락에서 모든 인식적 의미를 제거한 이러한 견해는 이론 선택이 결국 상대평가(comparative)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현재의 과학적 합리성 모델 하에서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예’ 또는 ‘아니오’(‘참’ 또는 ‘거짓’)라는 답을 얻겠다는 바램으로 정말로 시험 가설을 자연과 직접 비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또한 시험 가설을 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경쟁 가설들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란 것을 이제 알고 있다. 우리는 가설을 그것의 현존하는 경쟁 가설 ― 즉, 동일한 영역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실제로 명료화되어 시험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된 다른 가설 ― 과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론 선택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 깔려 있는 그림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이론 생성과 상대 평가.jpg

각 노드들은 과학자가 대안 가설들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결정 시점을 나타낸다. 방법론적 객관론자들은 적절한 이론 평가 절차가 각 노드마다 가해지기만 하면, 과학의 합리성은 보존된다고 주장한다. 매 단계마다 올바른 선택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처음에 각 노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무관하다. 다양한 대안 가설의 생산에 관해서는 흥미로운 사회학적인 이야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노드들에서 작동하는 결정 절차에 의해 사회학적 영향들이 과학의 내용에 영향을 주는 것은 효과적으로 차단된다. 이러한 절차는 우리에게 순수하게 객관적인 근거에서 어떤 이론이 그것의 현존하는 경쟁 상대들에 비해 선호될 만한지를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요점은, 논의를 위해 과학적 방법 그 자체는 비-인지적 요인에 의한 오염의 염려가 없으며 결정 절차가 각 노드에서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사회학적 영향들이 정말로 이론 생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이 절차의 어떤 부분도 과학의 내용을 사회학적 영향들로부터 격리해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경쟁 가설들 중에서의 선택이 이 모델이 가정하는 대로 결국 상대평가일 수밖에 없다면, 과학적 방법은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따르더라도) 선호된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으며, 고작해야 그 이론이 실제로 접할 수 있는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인식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만 보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경쟁자들이 사회학적 요인들에 영향을 받았다면, 이 평가 절차의 어떤 부분도 성공적인 이론을 완전히 ‘정화’할 수 없을 것이다.

사례를 위해, 위의 그래프가 여성의 행동에 관한 이론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가정해보자. 이 이론들은 많은 측면에서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이론들이 모두 매우 성차별적인 문화에서 활동하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그 모두가 성차별주의에 오염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성차별주의적 경쟁 상대는 만들어진 적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평가의 기준에 의해 선택된 이론은 단지 성차별주의적 경쟁 이론들 중 가장 나은 이론일 뿐일 것이며, 정당화의 맥락에서 우리가 객관적 평가 기준을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는지와 상관없이, 과학의 그 내용은 성차별주의적일 것이다. 사실, 성차별주의적 이론들 중 가장 나은 이론은 성공적인 시험들을 거친 후 더욱 더 많이 입증된 이론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약 나의 설명이 옳다면, 과학 내 남성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합리적 이론 선택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학에서 성차별주의나 남성중심주의를 제거하는 데 현재 이해된 대로의 과학적 방법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결론이 정말로 도출된다. 방법론적 합리주의자들은 여전히 (근사적으로) 단조로운 진보를 얻을 수 있다는 데 주의하라. 대안들 사이의 모든 선택은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과학은 (원리적으로) 점점 더 좋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과학의 내용이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보장하지 못한다. 일단 사회적 요인들이 이론 생성의 맥락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인정하고 나면, 당신은 그 요인들이 과학의 내용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론 생성은 사회과학자들에게 넘겨주고서 인식적 기준[덕목]의 엄격한 적용을 통해 얼마 후엔 그들을 배제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는 말이 달아단 뒤에야 마구간 문을 닫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요점은 다른 방식으로도 얘기될 수 있다. 이론 내용에 대한 사회적 영향을 뒷받침하기 위해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가[9] 내세우는 논변은 잘 알려진 미결정성 논제에 기초해 있다. 당연히, 이 논제는 자료가 그것을 유일하게 설명해주는 단 하나의 이론을 골라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원리적으로,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경쟁자들의 수는 무한하다. 따라서 만약 자료가 이론 선택을 완벽하게 결정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무언가가 그 일을 해줄 것이라는 것이 블루어의 주장이고, 그가 내세우는 그 무언가의 후보는 그 성격상 당연히 사회학적이다.

래리 라우든(Larry Laudan)은[10] 최근의 문헌에서 미결정성을 과대평가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다고 대응한다. 그가 말하길, 만약 우리가 실제로 무한한 혹은 적어도 한 쌍의 경험적으로 적합한 경쟁 이론에 직면했다면 미결정성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길, 사실 우리는 그러한 난처한 풍요로움에 직면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에게 이론 수용 기준에 비추어 받아들일 만한 경쟁 이론이 두 개라도 된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분명 우리는 한줌이 넘는 경쟁 이론들과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적어도 시간이 지나면) 이들 중 다른 것들보다 하나를 선호할 만한 좋은 인지적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결론에 따르면, 비록 미결정성 논제가 원리적으로는 좋은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더라도, 그 문제가 실제 이론 선택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이는 이론 선택이 그 본성상 상대평가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을 다르게 말한 것일 뿐이다. 즉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유한한 수의 현존하는 대안들 중에서 이루어질 뿐, 원리적으로 가능한 무한한 수의 대안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현존하는 경쟁 이론들 중에서 하나를 다른 것들보다 선호할 좋은 이유가 항상 있을 것이기에, 그는 사회적 결정 요인들에 대한 블루어의 주장이 효과적으로 약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에서, 이러한 논증 전략은 단지 또 다른 의문을 낳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우리는 왜 하필 이러한 종류의 경쟁자들이 생성되었는지 물을 수 있다. [그들 외의] 다른 경쟁자들도 똑같이 자료와 양립가능하다고 할 때 말이다. 일단 경쟁자들이 완전히 형성되고 나면 그들 중에서의 우리의 선택은 합리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우리의 선택지들이 그와 같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정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선결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다. 비-인지적 요인들이 질문을 제기하고 문제의 비중을 정하고, 이론을 처음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을 라우든이 인정하는 한, 그는 이러한 요인들이 정당화의 맥락에서 제거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유지하려 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관점은 발견의 논리가 규범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두 번째 관점은 이론 평가가 그 본성상 상대평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단 두 번째 주장이 만들어지고 나면, 우리는 이론 생성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도 규범적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의 주장은 우리가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사이의 구분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상대 평가 모델에서는 이론 개발과 이론 생성에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우리의 입증 활동과 결국에는 과학의 내용 자체에까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입증 활동에 대한 이 주장은 시험 가설뿐 아니라 관련된 배경 이론을 함께 구성하는 보조 가설들에도 적용된다는 점이 여기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하나의 증거가 한 가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상당 부분 거기에 개입되는 부수적인 가정들에 의존한다. 바로 여기서 생물학과 사회과학의 관계가 특히 흥미로워지는데, 왜냐하면 둘 사이의 교류가 대체로 이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이 논문 앞부분에서 내가 인용한 일부 사례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수렵-남성 사례에서, 관련된 보조 가정들은 진화 생물학에서 들어온다. 특히, 무엇이 증거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상당 부분 지정해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진화 과정을 추동하는 것은 남성의 생존 경쟁이라는 가정이다. 역으로, 난자-정자 상호작용에 대한 잠자는 공주/완벽한 남자 모델에서, 생물학적 자료는 적절한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학적 가정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영장류학에 대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연구[11]는 어떻게 실험 설계가 배경 가정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그는 영장류학의 발전과정을 1900년부터 추적함으로써, 위계와 남성 지배의 정치적 원리가 어떻게 그 학문에 내장되었고, 그 원리에 의해 크고 공격적인 남성이 위계적으로 조직된 무리와 영역을 보호하면서, 먹이와 섹스와 털 손질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권을 누리고 무리 이동을 결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영장류 사회 조직 이론이 어떻게 다시 강화됐는지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카펜터(Carpenter)가 극찬을 받은 자신의 붉은털원숭이 연구를 수행했을 때, 그는 사회적 질서의 원천에 대한 그의 조직화 가설을 시험하기 위해 지배적인 남성들을 제거했지만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을 제거하는 대조 연구는 수행하지 않았다. 우리는 실험 설계에서 모든 가능한 변수들을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변수를 [통제에] 넣을지는 무엇이 유관할 것 같은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배경 이론에 의존하게 된다. 만약 그 배경 이론이 심각한 경쟁 상대로부터 의심을 받거나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실험 활동은 잠재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정들을 계속 안고 갈 것이다.

여기서의 주장은 보조 가정들의 교환이 치명적인 형태의 전체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거나 이 보조 가정들이 그 자체로 (잠재적으로) 시험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12] 그 보조 가정들을 통해 한 분야에서 유래한 젠더 편향들이 쉽게 다른 곳으로 건너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문화 내에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 가정들은 일반적으로 의문시되지 않으며 때로는 아예 인식도 되지 않는다. 보통 그것들은 경쟁 가설이 존재할 때에만 드러나기 마련이다.

여기서의 주장은 가설-연역적 형태의 입증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클라크 글리모어(Clark Glymour)의 ‘구두끈묶기(boot-strapping)’ 모델[13]에 호소하는 것도 이를 피할 수 없다. 구두끈 입증은 배경 가정들을 불필요하게 만들어주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가설들은 홀로 시험되지 않으며, 이론 내에 있는 그들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시험된다. 입증은 2자 관계가 아니라, 3자 관계이다. 이론의 상당 부분은 주어진 증거로부터 그 이론의 어떤 가설을 입증하든 [항상] 사용될 것이다.”[14]


나는 지금까지 내내 우리가 이론 평가의 기준이 비-인지적 요인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비-인지적 가치는 과학의 실제 내용에 스며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 이 논제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유용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 자체가 문화에 얽매인 채 진화하는지에 관한 복잡한 논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방법의 초월성을 인정하더라도, 과학적 산물 자체는 철저하게 문화에 묶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논의를 위해 인정했던 것이 아마도 최종 분석에서는 합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로 이러한 노선의 논증을 마무리할 것이다. 과학적 방법 그 자체는 문화에 얽매여 있는 개인들에 의해 발전하고 명료화되며, 따라서 이론 내용의 대상 수준에 적용했던 이 논증은 아마도 이론 평가의 메타 수준에도 충분히 잘 적용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방법론적 변화들을 일으킬 (예를 들어, 단일 맹검 실험에서 이중 맹검 실험으로 옮길) 좋은 이유들을 가질지 모르지만, 우리의 방법론적 선택지들은 이미 명료화된 대안들의 범위로 한정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합리성 모델의 적용 범위와 과학 정책에 대해 지금까지의 논증이 갖는 함의를 매우 짧게 건드릴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안이 있는 것 같다. (1) 우리는 간단히 합리성 모델의 줄어든 적용 범위를 인정하고 과학의 객관성에 대해 더 온건한 주장을 할 수 있다. (2) 우리는 우리의 합리성 모델을 확장하여 이론 생성의 맥락도 고려하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즉, 만약 우리가 이론 생성의 맥락이 규범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론 생성에 대한 새로운 규범적 견해에 비추어 과학 정책을 바꾸고 싶을 수 있다.

일단 과학의 내용이 그 수행방식과 생산을 좌우하는 사회적 질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러한 사회적 질서들은 그러한 사회적 질서들을 바꾸기 위해 취해지는 차별 철폐 조처 프로그램들 등의 개입 조처들을 시행할 만큼 인식적 중요성을 얻게 된다. 적합한 과학철학이라면 이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상황의 재검토[15]

위에서 그려낸 견해는 여성주의적 과학 비판에 대한 하딩의 분류 중 어디에 들어갈까? 분명 이 견해는 확립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객관성과 합리성을 계속 증가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계승자 과학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소위 ‘여성주의적 경험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 견해는 여성주의적 경험주의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갈라진다. 첫째, 이 견해는 현재의 방법론이 과학자들이 수행하는 활동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산물을 좌우하는 사회적 질서의 인식적 중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적합한 방법론이라면 편향의 다른 원천들을 통제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적 질서에 의해 들어오는 편향들도 통제해야 할 것이다. (최근 ‘편향’에 대한 얘기는 그러한 얘기가 편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과학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기피되는 추세이다. 나는 그러한 함축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젠더 편향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언젠가는 완전히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편파성의 다른 형태들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일한 규제적 이상은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논의에도 완벽히 들어맞을 것 같다.)

둘째, 하딩이 묘사한 여성주의적 경험주의는 과학적 공동체의 합리성이 확실히 개인적 합리성과 같다는, 즉 개인적 합리성들의 단순 총합일 뿐이라는 극히 전통적인 방법론의 가정을 의심하는 것 같지 않다. 위에서 그려진 견해에서, 개인적 수준에서의 다양한 전략들을 포함시킴으로써 증진되는 것은 과학적 공동체의 합리성이다. 위에서 논의된 종류의 편향들은 공동체 수준에서만 체계적으로 거론될 수 있다. 어떠한 적절한 개인적 교정 프로그램도 사전에 처방될 수 없다. 오직 다양한 관점을 포함시키는 것만이 변화가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제안은 일종의 관점 인식론인가? 엄밀하게는 그렇지 않다. 이 분석에서 인식적 특권은 개별 여성(이나 여성주의자)이 아니라 그녀의 관점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관점까지 포함한 공동체에 부여된다. 이 견해에서 개인의 관점들은 시작점이다. 게다가, 이 분석은 남자나 다른 ‘앎의 방식’과 구별되는 다른 심리적 기질을 가진 여성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된 여성주의적 비판가들의 연구가 가진 특징적인 표식은 그것이 전체론적이라거나, 직관적이라거나, 주관적이라거나, 감정적이라거나, 돌봄적이라거나, 비선형적이라는 데 있지 않다. 대신, 그것이 중요하고 차별화되는 것은 그것이 과학과 과학 연구들을 지금까지 지배해 왔던 사회․정치적 관점과 다른 관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있다.

남성은 정확히 똑같은 연구를 할 수 없었을까? 할 수 있었다. 이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의 관련성은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연성에 관한 것이다. 즉 그것은 작용하는 인과적 요인들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신의 관점이나 무한히 긴 시행에서가 아니라 여기서 지금 현재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과학적 가설들이 학계와 과학적 공동체들 내에서 여성의 정치적 힘과 대표성이 증진되던 시기에 함께 출현한 것은 논리적 필연도 아니지만 우연도 아니다.

여기서 개진된 입장은 여성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겹치는 부분은 극히 작지만,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입장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대한 거부(어쩌면 이는 필수적일지도 모른다)와 완벽하게 양립 가능하지만, 객관성과 합리성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과는 양립 가능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이 둘(형이상학적 실재론과 객관성)이 분리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 점은 포스터모더니즘의 문헌에서 너무 많이 가려져 있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견해로부터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라는 인상을 자주 받곤 한다.)

나는 여성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평범한 이유에서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과학에서 여성주의적 이론들이 성차별적인 경쟁자들보다 우월하다(인지적으로 더 선호할 만하다)고 믿지만, 그 이론들이 정말로 대안적인 서술을 제공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인식적 상대주의뿐 아니라 파편화된 정체성들을 강조하는 점 때문에 여성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적절한 토대를 제공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국소적 문제풀이의 필요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강조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 젠더 편향은 서로 다른 과학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편향을 드러내고 제거할 단일한 ‘여성주의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서부터 [일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여성주의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으며,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의 젠더 편향이 생물학에서의 편향과 같은 종류이거나 같은 정도일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과학에서의 진정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분야에 철저하게 뿌리를 박고서 과학의 사회적 질서에 의해 들어온 편향들에 의심을 제기하기로 마음먹은 과학자들에 의해 특정한 경쟁 이론들이 개발될 때에만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전통적인 객관성과 합리성의 이상을 완전히 희생하지 않고서도 생명과학들 내의 젠더 편향의 범위와 깊이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사회적 구조에 대한 설명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의 첫 부분에서 요약된 종류의 사례 연구들은 사회적 요인들이 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을 확실히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며, 그 사례들은 일부 표준적인 철학적 도구들에 의해 과학의 이데올로기적 편향들의 기원과 다양성이 부분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정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도구들이 발견의 맥락에서의 사회적 요인들의 영향을 제한하는 과학적 과정에 대한 시대에 뒤떨어진 용납되기 어려운 이해방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그 도구들은 당면한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 주류 과학철학이 과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들을 계속 무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16]

  1. The Biology and Gender Study Group, “Importnace of Feminist Critiques for Contemporary Cell Biology”, in Feminism and Science, Nancy Tuana, ed.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9), 172-87.
  2. Charles Darwin, The Descent of Man (1871) [한국어 번역본 : 김관선 옮김, 『인간의 유래』 1-2권 (한길사, 2006)]. “Have Only Men Evolved?” in Biological Woman: The Convenient Myth, Ruth Hubbard, Mary Sue Henifin, and Barbara Fried, eds. (Cambridge, MA: Schenkman, 1982), 17-45에서 루스 허버드가 인용했다.
  3. Helen Longino and Ruth Doell, “Body, Bias, and Behavior: A Comparative Analysis of Reasoning in Two Areas of Biological Sciences,” Signs 9 (1983), 206-27.
  4. Anne Fausto-Sterling, Myths of Gender: Biological Theories About Women and Men (New York: Basic Books, 1985).
  5. Londa Schiebinger, The Mind Has No Sex? Women in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9), 189-213. [한국어 번역본 : 조성숙 옮김, 『두뇌는 평등하다 : 과학은 왜 여성을 배척했는가?』 (서해문집, 2007)]
  6. Ibid., 191.
  7. The Politics of Women’s Biology (New Brunswick: Rutgers University Press, 1990)를 보라.
  8. Sandra Harding, The Science Questions in Feminism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86) [한국어 번역본 : 이재경, 박혜경 옮김, 『페미니즘과 과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2)]. S. Harding, Whose Knowledge? Thinking From Women’s Lives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1991)도 보라.
  9. David Bloor, Knowledge and Social Imagery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76) [한국어 번역본 : 김경만 옮김, 『지식과 사회의 상』 (한길사, 2000).
  10. Larry Laudan, “The Peudo-Science of Science?,”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11 (1981), 195-97.
  11. 예를 들어, “Primatology Is Politics by Other Means,” PSA 1984, vol. 2 (East Lansing, MI: Philosophy of Science Association, 1985)를 보라.
  12. Helen Longino, Science as Social Knowledg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를 보라. [관련된 부분은 Curd and Cover, Philosophy of Science: The Central Issues, pp. 170-91에도 수록되어 있다.]
  13. Clark Glymour, Theory and Evid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0).
  14. Ibid., 151.
  15. 이 절의 논증은 나의 에세이 “Birth of a New Physics or Death of Nature?” in Women and Reason, E. Harvey and K. Okruhlik, eds. (Ann Arbor, MI: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1)에도 스케치되어 있다.
  16. 이 프로젝트의 연구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연구위원회(Social Science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에서 제공한 연구비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에 감사드린다. 또한 이 프로젝트의 초창기에 유용한 토론을 나누었던 J. R. 브라운(J. R. Brown)과 앨리슨 와일리(Alison Wylie)에게도 감사를 드리며, 이 논문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 내 누이 페기 오크룰릭(Peggy Okruhlik)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이 논문은 널리 회람했던 앞선 두 개의 원고를 합친 결과이기도 하다. 첫 번째 원고는 “과학에서 가치들의 자리(A Locus of Values in Science)”라는 제목으로 1984년부터 회람되었고, 두 번째 원고는 “젠더 이데올로기와 과학(Gender Ideology and Science)”으로 1988년에 처음 초고가 작성됐다.

역자주

  1. ‘입장 인식론’이라는 번역이 존재한다. ‘standpoint’라는 영어 단어는 원래 ‘서 있는 지점’이라는 뜻으로 ‘처지’, ‘견지’, ‘입장’이라는 번역이 잘 어울리긴 하나, ‘입장’이라는 우리말이 때로는 ‘주장’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문맥에 따라 ‘standpoint’를 ‘입장’으로 번역하면 오해를 초래할 만한 부분들이 있기에, 이 글에서는 ‘standpoint’의 번역어를 ‘관점’이라는 말로 통일했다.
  2. 샌드라 하딩에게, ‘계승자 과학’이란 현재의 (남성중심적인) 과학의 목표와 이상을 그대로 계승한 과학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