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혁명/전통의 재구성 :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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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4장.


13세기까지 유럽의 과학과 학문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우주론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거의 5세기 뒤에 살았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의 마지막 위대한 천문학자였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죽기 전까지, 그 두 사람의 글은 서구의 천문학적 사고와 우주론적 사고를 지배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들의 직계 상속인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죽음과 코페르니쿠스의 탄생 사이의 13세기 동안 그들의 작업에는 큰 지속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멈춘 곳에서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사이에 아무런 과학도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실, [그 사이에는] 매우 강력하지만 산발적인 과학 활동이 있었으며,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시작과 성공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 역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외관상의 역설일 뿐이다. 13세기 동안의 산발적인 연구는 연구자들의 실질적인 믿음들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스승들은 여전히 우주의 구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묘사된 대로라고 믿었으며, 그들의 믿음은 그들을 옛 전통 안에 묶어 두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개념 체계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나이를 먹는다. 16세기 초에 사람들은 여전히 우주에 대한 고대의 얘기를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에 대해 다르게 평가했다. 그들의 개념은 같았지만, 그들은 그 개념에서 새로운 강점과 약점을 보았다. 우리가 고대 천문학 전통의 근원과 힘을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그것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그것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옛 전통이 어떻게 유실되었다가 재발견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에 대한 유럽인들의 첫 번째 태도 변화는 그것을 되찾을 필요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서구의 고대 과학 유실은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났다. 그 첫 단계는 과학 활동의 질과 양의 점진적 감소였고, 둘째 단계는 전통적 학문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기원전 2세기 이후, 지중해 문명은 점차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기원후 첫 몇 세기 동안 로마의 헤게모니가 약해지면서 그 문명도 함께 쇠퇴했다. 프톨레마이오스(천문학자)와 갈레노스(의사)는 고대 과학의 마지막 위인들로, 그들은 둘 다 기원후 2세기에 살았다. 그들의 시대가 지난 후, 서구의 주된 과학적 작업은 주석과 백과사전이 되었다. 7세기 이슬람교도들이 지중해 유역을 침략했을 때, 그들이 찾아낸 것은 그 문헌들과 고대 학문의 전통뿐이었다. 그 활동은 거의 중단되어 있었다.

이슬람의 침략은 유럽 기독교 왕국의 지리적 중심을 지중해에서 북쪽으로 이동시켰으며, 따라서 이는 서구 교육의 지속적인 쇠퇴를 가져왔다. 7세기에 유럽인들은 고대의 학문 전통이 담긴 문헌들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에우클레이데스(Euclid, 유클리드)는 6세기 초 보이티우스(Boethius)가 만든 불완전한 라틴어 번역본으로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버전은 매우 중요한 정리들만을 수록했고, 증명은 담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완전히 잊혀진 것 같았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몇 안 되는 논리학 서적으로만 대변되었다. 보이티우스와 세비야의 이시도루스(Isidore of Seville)와 같은 사람들의 백과사전식 모음집들은 고대 과학의 조각들을 보존해 주었지만, 이 조각들마저도 부정확하거나, 지적으로 질이 떨어지거나, 우화와 심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모든 종류의 학문 활동이 거의 사라졌다. 유럽 기독교 왕국의 경제 수준은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과학은 특히 방치되었는데,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보게 될 것처럼, 처음에는 가톨릭교회가 과학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학문이 바닥에 이른 수 세기 동안 이슬람에서는 과학의 엄청난 르네상스가 있었다. 7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 세계는 아라비아의 오아시스에서 지중해 제국까지 빠르게 확대되었고, 이 새로운 제국은 기독교 왕국이 잃어버린 원고들과 전통을 물려받았다. 이슬람 학자들은 우선 시리아어 버전의 원 그리스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함으로써 고대 과학을 복원했으며, 다음에는 그들 자신의 기여를 더했다. 수학, 화학, 광학에서 그들은 독창적이고 근본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천문학에서 그들은 새로운 관찰들과 새로운 행성 위치 계산 기법들 모두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대개 과학 이론의 급진적인 혁신가가 아니었다. 특히 그들의 천문학은 거의 전적으로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확립된 전문적 전통과 우주론적 전통 내에서 발전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제한된 관점에서 이슬람 문명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문명은 고대 그리스 과학의 기록을 후대의 유럽 학자들을 위해 보존하고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기독교 왕국은 고대의 학문을 일차적으로는 아랍인들로부터 보통은 아랍어 번역의 형태로 되찾았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된 연구가 담겨 있는 『알마게스트(Almagest)』의 제목은 그 책의 그리스어 제목이 아니라, 9세기 이슬람 번역가가 붙인 아랍어 제목의 축약된 말이다.[옮긴이 주1]

유럽인들은 전반적인 유럽의 회복기 동안 고대의 학문을 이슬람에서 재발견했는데, 이 시기는 중세 후기의 분위기를 암흑시대의 분위기와 무척 다르게 만들었다. 10세기에 천천히 시작되어 오늘날 12세기 르네상스로 알려진 시기에 절정에 도달한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삶은 모든 측면에서 템포가 점진적으로 빨라졌다. 첫째로 기독교 왕국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그와 함께 인구와 교역량이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을 포함해서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슬람과의 지적 접촉은 무역 증가와 함께 크게 증가했다. 새로 얻은 부와 안정은 새롭게 열린 학문의 지평을 탐구할 여유를 제공했다. 아랍어의 라틴어 번역은 10세기에 시작되어 그 후에는 빠르게 증가했다. 11세기 말 유럽 전역의 학생들은 몇몇 마스터가 고대 문헌의 신규 번역을 읽고 그에 대해 논평하는 것을 듣기 위해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 수는 점차 많아졌다. 12, 13세기에 이 비공식적 모임들은 너무 커져서 규제와 인가를 요구했고, 이로 인해 공식적으로 그 모임들은 유럽 특유의 새로운 종류의 학문 기관인 대학이 되었다. 고대 학문의 구두 전파를 위한 중심지로 시작된 이 대학들은 유럽 학문의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전통, 즉 스콜라주의로 알려진 비판적·전투적 철학 전통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고대 천문학의 재발견은 고대 세계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더 방대한 길들이기 과정의 일부였다. 유럽인들이 널리 활용한 첫 번째 천문표는 11세기에 톨레도에서 수입됐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과 물리학 저술 대부분은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됐으며, 다음 세기에 점진적으로, 그러나 선택적으로, 중세 대학의 교과 과정 속에 통합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것들을 15세기 말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이러한 고대 과학 고전들과의 재회는 그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상속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물려받은 유산을 그들 자신의 작업으로 거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된 문제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사라져 버렸고, 새로운 문제들이 (때때로 사이비 문제에 불과했지만) 그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복원된 학문 전통의 목적과 방법은 고대의 학자들을 인도했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몇몇 새로운 문제들은 순전히 문헌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대의 문헌들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그 순서는 논리보다는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다. 아랍어 원고들은 그리스어 원본이나 시리아어 원본에 완전히 충실한 경우가 별로 없었고, 그 원고들이 재번역되어야 할 중세 라틴어는 처음에는 그 원고들의 전문적이고 추상적인 주제에 적합한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좋은 번역조차도 그 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 옮겨 적는 동안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가 특정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대개 어려웠으며 때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중세 학자들은 자기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기에 앞서 끈질기게 고대의 사고를 반복적으로 재구성했다. 그들이 물려받은 예기치 않은 유산의 우수성과 범위와 정합성은 암흑시대에서 나온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었으며,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들의 첫 임무가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완전히 소화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따라서 해석과 재통합의 문제들은 스콜라 학문의 주된 부분을 차지했다.

짧은 역사적 시야로 인해 중세 스콜라 학자의 임무는 기묘하게 더 꼬였다. 스콜라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을 본떠 폭넓은 정합적 지식 체계를 재확립하기를 기대했으며, 그 체계가 유래한 ‘고대’가 엄청나게 많은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해 수많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늘 깨닫지는 못했다. 스콜라 학자들은 깨닫기 힘들었겠지만(대개 전달이나 번역의 오류에 호소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일관됐던 것이 아니었다. 동시대인들이 그의 모든 견해를 수용했던 것도 아니었다. 가끔씩 보이는 모호함과 모순들은 고대 전통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특징이었다. 그 양은 헬레니즘 시대와 이슬람의 논평가들에 의해 엄청나게 확대됐는데, 아리스토텔레스와 유럽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의 15세기 동안 쓰여진 그들의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과 함께, 때로는 그보다 앞서, 발견됐다. 우리에게 그 전통의 이러한 비일관성들은 그 진화와 전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처럼 보이지만, 중세 스콜라 학자들에게 그것들은 대개 단일한 지식체, 즉 가상의 단위인 ‘고대 지혜’의 내적 모순처럼 보였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혼동 때문에, 상충하는 권위들을 비교하고 화해시키는 일은 스콜라 사상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 더 구체적으로 보겠지만, 복원된 학문 전통은 고대의 학문 전통에 비해 덜 경험적인 반면, 더 언어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었다.

그 전통에 포함된 비일관성들 중 하나는 천문학의 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천구들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주전원과 주원 사이의 명백한 갈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앞서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정말로 구별되는 두 고대 문명인 그리스 문명과 헬레니즘 문명의 특징적인 산물이었다.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가 지중해 유역을 지배했던 시기 동안 그리스 본토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이 낳은 과학은 대부분 질적인 방법을 사용했고 우주론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과학 최고의 대표인 동시에 최후의 대표였다. 그의 죽음 직전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를 정복하고 소아시아, 이집트, 인더스 강까지의 페르시아를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에 편입시킨 시기에 그리스 과학의 진화는 때 이른 정체기에 들어섰다. 알렉산더의 정복 이후에 출현한 헬레니즘 문명은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상업적이며 국제적인 거대도시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서 많은 나라와 인종의 학자들은 그들의 다양한 문화의 요소들을 결합해 이전의 그리스 과학에 비해 덜 철학적이면서 더 수학적이고 수치적인 과학을 만들어 냈다. 천문학은 그 차이를 완벽하게 보여 준다. 고대 천문학의 우주론적 틀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에서 절정을 이룬 그리스 전통의 산물이다.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수리 천문학은 천문학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2세기 남짓 동안만 번성한 헬레니즘 전통에 속해 있다.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고, 별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행성들의 문제와 씨름한 헬레니즘 천문학자들은 이전의 그리스 천문학자들이 개발한 우주론에 분명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우주론적 세부 사항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확립된 표준과 극단적으로 다른 우주론의 저자들을 비웃었고, 가끔 짧은 우주론적 논고를 썼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전적으로 우주론적인 저작인 『행성들에 대한 가설들(Hypotheses of the Planets)』을 지었으며, 그 책은 주전원 운동에 대한 다소 미흡한 물리적 메커니즘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는 수학적인 체계를 설계할 때 헬레니즘 천문학자들은 그들의 기하학적인 관념들에 대한 기계적인 대응물을 만들어 낼 가능성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천구들과 그 내부의 행성들을 계속 움직이게 해 주는 메커니즘의 물리적 실재성은 기껏해야 부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요컨대 헬레니즘 과학자들은 뚜렷한 불편함 없이 천문학과 우주론의 부분적인 분화를 묵인했으며, 행성 위치를 예측하는 만족스러운 수학적 기법은 우주론적 그럴듯함이라는 심리적 요구 조건을 전부 따를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분화는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에게 중요한 선례를 제공했다. 그 역시도 천문학을 본질상 수학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구들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움직이는 주전원의 물리적 부조화는 움직이는 지구의 물리적 부조화를 어렴풋하게 예견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 분화의 일차적인 기여가 아니었다. 4세기 초,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유럽인들이 처음 되찾았을 당시, 그것은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여는 데에도, 매우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도움을 주었다. 앞선 세기들에 대한 무지로 인해 역사 감각이 짧아졌기 때문에, 스콜라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거의 동시대인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단일 전통인 ‘고대 학문’의 대가들로 보였고, 그들 체계 사이의 차이는 단일 학설 내부의 비일관성과 흡사한 것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에게는 그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5세기 동안 일어난 지식의 자연스러운 진화로 보였던 변화들이 스콜라 학자들에게는 자주 모순들로 보였으며, 그 모순들은 화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들이 화해가 힘들 뿐 아니라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 뚜렷한 모순들은 중세 사상의 다른 갈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 그 전통 전체에 대한 의심을 던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중세 시대에 되살아났기에 고대의 학문 전통은 새로운 모습을 얻게 되었으며, 앞의 페이지들은 중요한 새로움들 중 일부가 단지 복원의 필요성에서 나왔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되살아난 전통에서는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고유의 특징에 의해 만들어진 더 실질적인 변화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과학은 중세 후기의 사상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지배적인 지적 힘은 신학적이었으며, 신학적 환경에서 과학 활동은 과학적 전통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변화시켰다. 게다가, 중세 과학 자체도 고정되어 있진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스콜라적 비판들은 그의 일부 학설들에 대한 중요한 대안들을 발전시켰으며, 이 대안들 중 몇몇은 코페르니쿠스로 가는 길을 닦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6세기경에는 다른−지적, 경제적, 사회적−힘들도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는 천문학과 지구의 운동에 관한 문제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들도 일부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이제 그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천문학과 교회

중세 내내,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상당 기간 동안 가톨릭교회는 유럽의 지배적인 지적 권위였다. 중세 유럽의 스콜라 학자들은 성직자에 속해 있었으며, 고대 학문이 모이고 학습되던 대학들은 교회 학교였다. 4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과학과 우주 구조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천문학의 진보 또는 지체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태도와 그 행동은 이 기간 동안 단일하지 않았다. 암흑시대 이후 교회는 이 세상 누구 못지않게 추상적이고 섬세하고 엄격한 학문 전통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세기 이전, 그리고 16세기 이후에는 다시 교회의 영향이 반과학적인 편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교회의 지원과 지지를 받는 학문 전통 내에서 진화했으며,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주교의 조카이자 프라우엔부르크 성당 참사회원이었지만, 1616년 교회는 지구의 운동의 실재성을 옹호하는 모든 책을 금지했다. 단일한 일반화로는 과학에 대한 교회의 압도적인 영향을 기술할 수 없을 텐데, 왜냐하면 그 영향이 교회의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기원후 초기 몇 세기 동안 교부들은 새로운 신앙의 운동가이자 전도사로서, 그것의 존립을 위해 싸웠다. 그들의 소명 자체는 선대의 이교도 학문을 비난하고 학문 세계를 빨리 축소시킴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극대화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그들은 성서와 가톨릭의 해석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고 깊게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과학은 세속적인 학문이었다.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그것은 기껏해야 쓸모가 없었고, 최악의 경우엔 위험하게도 마음을 어지럽혔다. 따라서 초창기 교부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그의 기독교인용 길잡이 『엔키리디온(Enchiridion)』에서 다음과 같이 신도들에게 조언했다.

이제, 종교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경우, 그리스인들이 물리학자(physici)라고 부른 이들이 했던 것처럼 사물들의 본성을 탐구할 필요는 없으며, 기독교인이 원소들의 힘과 개수에 대해−그리고 천체들의 운동과 질서와 식에 대해, 하늘의 형태에 대해, 동물, 식물, 돌, 샘, 강, 산의 종류와 본성에 대해, 연대기와 거리에 대해, 다가오는 폭풍의 징후에 대해, 그리고 그들 철학자들이 알아냈거나 알아냈다고 생각하는 수천 가지 다른 것들에 대해−간과하지 않을까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 기독교인은 창조된 모든 것들에 대해, 천상의 것이든 지상의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것들의 유일한 원인이 창조자, 즉 유일한 참된 신의 선의이며, 그로부터 그 존재가 유래하지 않은 것은 신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1]

이러한 태도는 적어도 이슬람의 침략 전까지는 고대 학문의 지식을 존경하는 것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그리스 과학을 면밀히 읽었으며, 그의 글들은 그것의 정확성과 범위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과학적 문제들에 대한 적극적인 추구와는 양립 불가능하며,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쉬웠다. 그보다 덜 자유로웠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동시대인들과 후계자들의 글에서는, 이교도 과학에 대한 그의 정신적 평가 절하가 보통 그것의 내용에 대한 완전한 거부와 결부되었다. 천문학은 점성술과의 연관 때문에 특히 경멸을 받았는데, 이는 점성술의 명시적인 결정론이 기독교의 교리와 양립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4세기 초, 예를 들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의 개인교사였던 락탄티우스(Lactantius)는 자신의 『신성 기관(Divine Institutions)』 제3권을 “철학자들의 잘못된 지혜”에 쏟아 부었으며, 구형 지구 개념을 조롱하는 데 한 장을 할애했다. 그에게 이는 사람이 머리를 아래로 둔 채 매달려 있는 지역의 불합리함과 땅 아래에 있는 하늘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같은 세기 후반에 가발라(Gabala)의 주교는 성서 속의 증거를 가지고 같은 효과를 냈다. 하늘은 구가 아니라 텐트나 성막인데, 왜나하면 “하늘을 커튼처럼 펼치고 그것을 텐트처럼 펼쳐 그 안에서 살 수 있게 해 준 것은 바로 그분”(이사야서 40:22)이기 때문이다. “물은 … 하늘 아래에”(창세기 1:3) 있었다. 땅은 평평한데, 왜냐하면 “태양은 롯(Lot)이 소알(Zoar)에 들어설 때 땅 위로 떴”(창세기 19:23)기 때문이다. 6세기 중반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수사 코스마스(Kosmas)는 이교도 체계를 기본적으로 성서에 기원한 상세한 기독교 우주론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그의 우주는 주님이 모세에게 황무지에 짓도록 지시했던 성막과 같은 모양이다. 그것의 바닥은 평평하고, 옆면은 수직으로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구식 여행용 트렁크 같은 반원통 모양이다. 땅은 주님의 발판으로, 길이가 폭의 두 배인 직사각형이며, 우주의 평평한 바닥 위에 놓여 있다. 태양은 밤에 땅 아래로 다니지 않고, 땅의 최북단 지역−남쪽 지역보다 높다−뒤에 숨어 있다.

락탄티우스와 코스마스 같은 사람들의 우주론은 결코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보다 학술적인 중세 백과사전의 단편적인 기록들 속에 남아 있던 고대의 구체 우주를 완전히 대신하지도 않았다. 중세 전반기 동안 기독교 내에선 우주론에 대해 일치된 의견이 없었다. 과학과 우주론은 그것을 필요로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박한 감각 지각과 수박 겉핥기식 성서 이해로 구성된 이러한 우주론들은 결코 공식적인 이해 방식은 아니었지만, 전형적인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암흑시대를 특징짓는 세속 학문의 쇠퇴를 보여 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훗날의 기독교 학자들이 11∼12세기에 고대 지식의 재발견을 맞이할 때의 놀라움과 경외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독교 유럽이 비잔틴의 동방 교회와 스페인, 시리아,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와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시 대등해질 무렵, 이교도 지혜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변화를 겪게 된다. 유럽 대륙의 중심 지역들은 [기독교로의] 개종이 완료되었고, 교회의 지적·정신적 권위는 완벽해졌으며, 기독교적 행정의 위계질서는 잘 정착되었다. 교회가 그들을 흡수함으로서 지적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교도의 세속 학문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새로 찾은 번영을 통해 얻은 여가의 일부를 재발견된 학문을 정력적으로 추구하는 데 쏟았다. 기독교 학문의 수용 가능한 지식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그들은 학문에 대한 가톨릭의 독점을 5세기 더 지켜 냈다. 12세기에 하늘과 땅을 비롯한 ‘만물의 본성’은 다시금 집중적인 연구에 적합한 주제가 되었다. 적어도 13세기 무렵이 되면, 교육받은 기독교인들의 논의 속에서 2구체 우주의 주된 내용이 다시 한 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세 후기에 기독교인의 삶은 지상계와 천상계 모두 완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 속에 놓여 있었다.

여태까지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과정을 고대 학문의 회복이라고 불렀지만, “회복”은 분명 부적절한 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기독교 사상과 고대 과학적 전통 양쪽 모두의 혁명에 훨씬 더 가까웠다. 4세기부터 쭉,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학자들은 성직자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우주론적 견해와 성경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한 갈등들은 12, 13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했고, 이미 알려져 있었다. 1210년 파리의 지방 공의회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그보다 약하긴 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아리스토텔레스 금지령을 공표했다. 다른 금지령들도 그 세기 내내 교황에 의해 공표됐다. 이러한 금지령들은 말만 앞섰을 뿐 실패에 그쳤지만,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 금지령들은 고대의 세속 학문에 기존의 중세 신학을 단순히 추가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증명한다. 새로운 구조의 정합적인 기독교 교리를 창조하려면 고대의 문헌들과 성경 양쪽 모두 수정이 필요했다. 새로운 구조가 완성되자, 신학은 중심의 고정된 지구라는 고대의 개념에 중요한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새로운 기독교 우주의 물리적·우주론적 구조는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적이었다. 그 구조의 최종판에 대부분을 기여한 스콜라 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는 천체 운동의 완벽함과 적절함을 묘사하는 데 그 명료함만 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썼을 만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하늘의 물질이 그 고유한 본성에 의해 생성과 소멸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화 가능한 물체 중 가장 으뜸이 되는 종류이며,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들과 그 본성이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기독교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 것은 신뿐이며, 그로부터 땅과 하늘의 모든 변화가 유래한다]. 이는 하늘이 극히 최소한의 변화만을 경험하는 이유다. 운동은 그것이 겪는 유일한 종류의 변화이며, 이러한 종류의 변화는 [크기, 무게, 색깔 등의 변화와 달리] 그것의 고유한 본성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다. 게다가, 가능한 모든 종류의 운동 가운데 그것이 취하는 운동은 원운동뿐이며, 원운동은 극히 최소한의 변화만을 산출하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구 전체는 장소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2]

아리스토텔레스가 언제나 정말 문자 그대로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많은 스콜라 학자들은 진공의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한 그의 증명을 포기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그 증명이 함부로 신의 무한한 힘을 제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기독교인도 우주가 항상 존재해 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성경의 첫 구절에 따르면, “태초에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더구나, 창조는 악의 존재에 대한 가톨릭의 설명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양보를 해야 했고, 우주는 시간의 진정한 첫 순간에 창조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더 많은 양보를 했는데, 보통은 은유적인 해석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예컨대, 성경 구절 “물 가운데 하늘이 만들어져 물과 물을 나뉘게 하라”(창세기 1:6)에 대한 논의에서, 그는 그 구절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보존할 수 있는 우주론적 이론을 처음으로 개괄한 다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확실한 근거에 의해 거짓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의 뜻대로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모세가 무지한 사람들에게 얘기하면서, 그들의 무지에 대한 우월감을 내려놓고 그가 그들에게 감각적으로 분명해 보이는 것들만 가지고 말을 전했다고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땅과 물이 물질이라는 것은 교육을 가장 받지 못한 사람들도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지만, 공기도 물질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명백한 것이 아니다. … 그렇다면, 모세는 물과 땅을 분명히 언급하는 동안,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지식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말하지 않기 위해 공기는 그 이름으로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3]

‘물’을 ‘공기’ 또는 ‘투명한 물질’로 읽으면 성경의 진실성은 보존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성경은 어떤 면에서 무지한 청중을 위해 만들어진 선전 도구가 된다. 이러한 방책은 전형적인 것으로, 스콜라 학자들은 그것을 몇 번이고 계속 사용했다.

아퀴나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화해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휘한 고된 철두철미함은 예수의 승천에 대한 성경의 설명에서 그들이 발견한 어려움을 통해 잘 드러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모든 하늘 너머로 올라, 만물을 가득 채우고자 했다”(에베소서 4:10). 아퀴나스는 기독교 역사의 이 작은 조각을 구체 우주에 끼워 맞추는 데 성공했지만, 이를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에 관하여』 2권에서) 완벽의 상태에 있는 것들은 운동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선함을 유지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벽의 상태에 있었다. … 그 결과, 그는 운동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선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승천은 운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승천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

게다가, 하늘 너머에는 『하늘에 관하여』 1권에 증명되어 있듯이 아무런 장소도 없다. 그러나 만물은 장소를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하늘 너머로 올라가지 않았다. …

게다가, 두 물체는 같은 장소를 차지할 수 없다. 그러면, 중간의 공간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장소에서 장소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의 수정구들]이 갈라지지 않는 한 그리스도는 모든 하늘 너머로 올라갈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4]

아퀴나스의 해법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충격적인 것은 문제 제기 그 자체로, 예수의 승천은 문제가 된 기독교 역사의 일부에 불과하고 아퀴나스 또한 그러한 문제들에 몰두한 많은 성직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의 인용문 대부분을 가져온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은 기독교 지식의 개요서로, 보통 12권의 두꺼운 세트로 출판되었다. 그 모든 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또는 그의 존칭 “그 철학자”)은 몇 번이고 계속 등장한다. 이와 같은 수많은 연구를 거친 뒤에야, 고대의 학문,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다시 서구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아퀴나스와 그의 13세기 동시대인들은 기독교적 믿음과 고대 학문의 상당 부분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보증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정통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은 그의 우주론이 기독교 사상의 창의적 요소가 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 연구의 엄청난 상세함과 박식함은 중세 후기에 나타나고 있던 새로운 기독교적 우주의 전체 구조를 보기 어렵게 했다. 만약 중심의 안정된 땅, 그리고 그것이 중세와 르네상스 정신에 미친 영향을 비롯해 그 우주에 부여된 중대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 포괄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그러한 더 넓은 관점은 13세기에는 거의 전혀 발견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승인된 후에야 발달했으며, 이탈리아 시인 단테(Dante)의 작품, 특히 그의 대서사시 『신곡(Divine Comedy)』은 그것이 아마도 처음으로, 그리고 분명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 작품일 것이다.

문자 그대로 보면, 단테의 서사시는 14세기 기독교인이 생각한 우주를 두루 여행한 시인의 기록이다. 그 여정은 구 모양의 땅 표면 위에서 시작해서, 위쪽 9개의 천구를 대칭적으로 반영한 지옥의 9개 원을 거쳐 점점 땅속으로 내려가,[5] 모든 지역 중 가장 끔찍하고 가장 타락한 곳인 우주의 중심, 즉 악마와 그의 군단을 위한 장소에 도달한다. 그 후 단테는 그가 들어갔던 곳의 정반대 지점에서 땅의 표면으로 나와, 거기서 땅에서부터 공기층 너머의 영역까지 뻗어 있는 연옥의 산을 찾아낸다. 연옥을 통과하면서, 그 시인은 공기와 불의 지상계 구체를 거쳐 그 너머의 천상계까지 여행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천구 각각을 차례차례 여행하며, 거기에 사는 영혼들과 대화를 나누고, 최종적으로는 가장 높은 마지막 천구에서 신의 옥좌를 바라본다. 『신곡』의 설정은 히파르코스의 주전원과 교회의 신에 맞게 각색된 문자 그대로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새로운 우주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었으며, 단테가 보여 주고자 했던 대부분은 바로 그 기독교적 상징체계였다. 우화를 통해 그의 『신곡』은 중세의 우주가 아리스토텔레스ᐨ프톨레마이오스 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가 그린 것처럼, 구체들로 이루어진 우주는 인간의 소망과 운명 모두를 반영하고 있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인간은 중심의 무기력한 흙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의 순수 정신에 이르기까지 존재들의 위계적 사슬로 채워져 있는 이 우주 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물질적인 몸과 정신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다른 모든 존재는 물질이거나 정신이다. 인간의 장소 또한 중간적이다. 즉 땅의 표면은 천하고 물질적인 중심에 가깝지만 그것을 대칭적으로 둘러싼 천상계의 시야 안에 있다. 인간은 누추하고 불확실한 곳에 살며, 그는 지옥에 매우 가까이 있다. 그러나 그의 중심적 위치는 전략적인데, 왜냐하면 그는 어디서나 신의 눈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중적 본성과 그의 중간적 위치는 둘 다 기독교적 드라마의 핵심인 선택을 강요한다. 그는 그의 물질적인 흙의 본성을 따라 타락한 중심에 있는 그의 본연의 장소로 내려갈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영혼을 따라 더 정신적인 천구들을 차례로 거치며 올라가 신과 만날 수도 있다. 한 단테 비평가가 말했듯이, 『신곡』에서는 “모든 주제 중 가장 방대한 주제인 인간의 죄와 구원이 우주의 거대한 배치도에 알맞게 조정되어 있다”.[6] 일단 이러한 조정이 이루어지고 나면, 우주 배치의 어떠한 변화도 기독교적 삶과 기독교적 죽음의 드라마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땅을 움직이는 것은 창조물의 연속적인 사슬을 끊는 일이 된 것이다.

우주 구조(대우주) 속 인간의 운명과 자연(소우주)을 반영한 상징체계는 중세 사상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도 온전히 되살리기가 어렵다. 아마도 우리는 이 상징체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와 천구들이 얻은 완전한 종교적 의미를 더 이상 파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그것을 단지 은유로 무시하거나 그것이 기독교인의 천문학 외적 사고에서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피할 수 있다.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의 서사시 해석을 돕기 위한 전문 안내서 목적으로도 쓴 단테의 한 산문 작품은 중세 천문학에서 사용된 천구들과 주전원들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물리적 묘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수정 천구들] 너머에, 가톨릭교도들은 가장 높은 하늘을 위치시킨다. …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의 물질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자기 자신 속의 모든 부분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제1운동자[또는 아홉 번째 천구]가 엄청난 속도로 운동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이 가장 고요한 하늘의 모든 부분과 결합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거의 불가사의한 속도가 만들어질 정도의 커다란 욕구로 자신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늘은 홀로 완전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최고신의 거처다.[7]

이 구절에서 천문학자는 신의 거처에 해당하는 위치(와 다른 데서는 크기)를 정하고 있다. 그는 신학자가 되었으며, 14, 15세기 천문학자의 신학적 역할은 항상 하늘의 측정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단테와 그의 일부 동시대인들 또한 천문학에 도움을 청했는데, 그것은 신의 정신적 왕국에 거주하는 천사들의 종류와 때로는 심지어 그 수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단테 자신은 『성찬(The Banquet)』에서 위의 천구들에 관한 묘사 바로 다음 구절에 정신적 위계와 천구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하나의 전형적인 중세 이론을 개괄한다.

이 … 하늘이 무엇인지와 그것이 자기 자신 안에서 어떻게 정렬되어 있는지는 앞의 장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움직이는 그들은 누구인지를 보일 차례다. 우선 이들은 물질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들로, 일반인들이 천사라고 부르는 정신들이다. … [이 천사들의] 수, 순서, 위계는 9개의 움직이는 하늘에 의해 나타나고, 10번째 하늘은 신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들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알려 준다.”
그런 까닭에 달 하늘의 원동력[즉, 천구들을 움직이는 존재들]이 천사 급이고, 수성은 대천사 급이며, 금성은 좌품천사 급이라고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이 [금성의] 하늘을 관장하는 데 배정되어 있는 이 좌품천사들은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점성술사들[또는 천문학자들]은 [이 하늘의] 회전의 가짓수에 대한 의견 차이에 따라 그 수를 다르게 센다. 그럼에도 모두는 그들의 수가 그 회전의 가짓수와 같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다. 『별들의 무리에 관한 책(Book of the Aggregation of the Stars)』에 따르면, 그 회전은 세 가지로, 첫째 회전은 이 별[금성]이 그 주전원 내에서 도는 것이고, 둘째 회전은 그 주전원과 전체 하늘이 태양과 똑같이 도는 것이고, 셋째 회전은 이 모든 하늘이 항성 천구의 [세차] 운동을 따라 100년에 1도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도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운동에 대해 세 원동력[좌품천사 급 천사 셋]이 있게 된다.[8]

천사들이 주전원과 주원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면, 신의 군단에 속한 다양한 정신적 존재들은 천문학 이론의 복잡성과 함께 증가할 수 있다. 천문학은 더 이상 신학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땅을 움직이려면 신의 왕좌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스콜라적 비판들

이러한 통합은 신학을 여러 구체로 이루어진 우주의 보호막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중세 학문의 결과가 모든 면에서 그처럼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주석가들은 스콜라적 연구를 위한 불변의 출발점이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에 대한 엄청난 연구 강도는 주장이나 증명의 비일관성을 금방 알아차리게 해 주었고, 이 비일관성들은 종종 중요한 창의적 성취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 중세 학자들은 16, 17세기 후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질 새로운 천문학과 우주론을 거의 조금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확장했고, 그의 증명의 오류를 발견했으며, 그의 많은 설명들을 경험적 시험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와 같은 사람들의 성취에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된 수많은 개념과 도구를 만들어 냈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앞서 보여 주는 중요한 예고편들은 당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파리 유명론 학파의 일원인 니콜 오렘(Nicole Oresme)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늘에 관하여』에 대해 14세기에 쓴 비판적 논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렘의 방법은 전형적인 스콜라주의의 방법이었다. 그의 긴 원고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몇 문장 단위의 단편들로 해체되어 있고, 각 단편들은 긴 비판적 혹은 설명적 논평들로 채워져 있다. 이 작업이 끝나는 곳에서, 독자는 오렘이 거의 모든 실질적인 문제에서 창조를 제외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동의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동의하는 이유들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오렘의 훌륭한 비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많은 증명들을 파괴하고 수많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들에 대한 중요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이 대안들은 스콜라 학자들에게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 학자들은 계속 그것들을 논의했으며, 그러한 논의는 천문학자들이 움직이는 땅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사고실험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예를 들어, 오렘은 땅의 유일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논증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9]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우주 안에 두 개의 땅이 있다면(지구[earth]가 행성이 될 경우, 여섯 개의 ‘땅[earth]’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들은 모두 우주의 중심으로 떨어져 합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땅은 자연히 중심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오렘의 말에 따르면, 이 증명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운동 이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땅은 자연스레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까이 있는 다른 땅들을 향해 움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땅에는 중심이 있을 것이고, 떨어뜨린 돌이 돌아가는 곳은 바로 그 중심일지 모른다. 그 땅이 우주 어디에 있든 말이다. 이 대안적인 이론에서 물체의 자연스러운 운동은 절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공간 내에서의 위치가 아니라, 물질의 다른 부분들에 대한 그 물체의 상대적 위치에 좌우된다. 그러한 종류의 이론은 16, 17세기의 새로운 우주론, 즉 땅이 유일하지도 않고 중심에 있지도 않은 우주론의 전제조건이었다. 이와 비슷한 이론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코페르니쿠스적 논증의 더욱 중요한 예고편들은 중심의 땅에 동쪽 방향의 축 회전을 상정해 별들의 일주 운동을 설명했던 피타고라스주의자 헤라클레이데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박을 오렘이 비판할 때 등장한다. 오렘은 땅이 회전한다고 믿지 않는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안정된 땅과 회전하는 땅 사이의 선택이 신앙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이고 싶어 한다. 그가 말하길, 어떤 논증도, 그것이 논리적이든 물리적이든 심지어 성서적이든, 땅의 일주 회전 가능성을 반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별들의 겉보기 운동으로부터는 어떤 결론도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오렘이 말하길

나는 위치상의 운동이 오직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대한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바꿀 때에만 지각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만약 부드럽게 움직이는 배 안의 사람 a가 a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두 번째 배 b밖에 보지 못한다면, … 그에게는 어느 배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리고 만약 a가 정지해 있고 b가 움직인다면, 그에게는 b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만약 움직이는 것이 a이고 b는 정지해 있다면, 여전히 그에게는 a가 정지해 있고 b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따라서 만약 앞서 말한 우주의 두 부분 중 위쪽[천상계]이 오늘은 원래대로 일주 운동을 하고, 아래쪽[지상계]이 정지한 채 있다가, 내일은 반대로 아래쪽이 일주 운동을 하고 다른 쪽, 즉 하늘이 정지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감지할 수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은 오늘이든 내일이든 똑같을 것이다. 움직이는 배 안의 사람에게는 배 밖의 나무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우리 쪽이 정지해 있고 우주의 다른 쪽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10]

이는 시각적 상대성에 근거한 논증으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글에서도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오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논문은 곧이어 더욱더 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적 논증을 무너뜨리는데, 그것은 수직으로 위로 던져진 물체가 항상 그것이 출발한 땅의 지점으로 돌아온다는 것으로부터 [땅의] 부동성을 결론짓는 논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논증에 대응하여] 어떤 이는 공기 중으로 똑바로 쏘아 올린 화살이 [그 또한] 그것이 통과하는 공기와 함께, 또 위에서 묘사한 우주의 맨 아래쪽 부분[지상계] 전체 덩어리와 함께 동쪽으로 빠르게 움직여, 그 전체[땅과 공기와 화살]가 일주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화살은 그것이 쏘아 올려진 땅 위의 지점으로 돌아온다. 이는 다음과 같은 유비에 의해 가능해 보인다. 만약 사람이 빠르게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배 위에 있으면서 그것의 운동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고, 또 그가 배의 돛대를 따라 자신의 손을 빠르게 내리며 직선을 그린다면, 그에게 그의 손은 오직 수직 운동만 한 것으로 보일 것이며, 똑같은 논증은 화살이 우리에게 똑바로 올라가거나 똑바로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려 준다.[11]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갈릴레오의 유명한 변론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ue on the Two Principal Systems of the World)』는 정확히 이러한 종류의 논증들로 가득 차 있으며, 갈릴레오는 틀림없이 오렘을 비롯한 코페르니쿠스의 스콜라적 선배들로부터 얻은 힌트를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렘을 코페르니쿠스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지구의 일주 운동[자전]조차 결론짓지 않는 데다, 우주의 중심을 도는 궤도 운동[공전]은 꿈도 꾸지 않으며, 그는 움직이는 땅을 상정함으로써 천문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그 문제에 대해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동기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러한 동기가 없다는 점 때문에 그의 작업은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오렘의 논증들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글에 다시 등장할 때, 그 논증들은 다른 기능, 더 창의적인 기능을 가진다. 후대의 과학자들은 땅이 정말로 움직인다면 천문학이 얻게 될 이점들을 이용하기 위해 땅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 했다. 오렘은 단지 땅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 보이고 싶어 했으며, 단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탐구했을 뿐이었다. 스콜라식 과학의 다른 여러 유익한 기여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코페르니쿠스적 논증들은 중세 후기의 지성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부여했던 권위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에 동의한 사람들은 단지 그 증명들이 거장에 의해 이루어진 증명이었기 때문에 그의 증명을 탐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탐구는 종종 그 스승의 최종적인 타도에 일조했다.

물론 우리는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오렘을 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학자와 과학자에게 그의 출처를 밝힐 것을 요구하는 전통은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을 거치고서 한참 후까지도 정착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많은 스콜라적 논평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작성한 수많은 원고들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 베껴졌다. 오렘이 논평을 작성하고 5세기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존하는 중세 원고 사본이 여섯 개 남아 있으며, 그 사본 중 몇몇의 작성 시점은 오렘이 죽은 후인 15세기로 추정된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날 시점에는 분명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스콜라적 비판의 전통은 연속적인 전통이었다. 14세기 파리에서 기인한 핵심 개념들은 같은 세기 옥스퍼드와 15, 16세기 파도바(Padua)까지 추적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에서 공부했으며, 갈릴레오는 거기서 가르쳤다. 코페르니쿠스가 『회전에 관하여』의 어떤 특정한 논증을 어느 특정한 스콜라적 비판에서 끌어왔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의 집단으로서 논평가들이 그러한 논증의 생산을 용이하게 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최소한 그들은 땅의 운동과 같은 주제가 대학 토론의 적법한 주제가 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마도 틀림없이 코페르니쿠스의 핵심 논증 중 몇몇은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출처들에서 빌려온 것일 것이다.

오렘에 대한 앞의 논의는 스콜라적 비판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에 대한 시험과 가능한 대안적 학설의 탐구가 바로 그것인데, 다만 그 대안들은 일단 그 논리적 가능성이 밝혀지고 나면 보통 폐기된다. 그러나 모든 중세 과학이 이렇게 제한적으로만 비판적이고 덧없어 보이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스콜라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과학 전통에 몇몇 새로운 탐구 영역을 도입하고 몇몇 영구적인 수정을 가하기도 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거운 물체들이 지상과 (중세 이후에는) 하늘에서 어떻게 운동하는지를 다루는 운동학(kinematics) 분야와 역학(dynamics) 분야에서 나타났다. 갈릴레오의 가장 중요한 기여 중 일부는, 특히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그의 연구는, 중세 학자들이 힘들게 얻은 (이전에는 흩어져 있던) 물리적·수학적 통찰들을 창조적으로 재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그것들을 새로운 역학으로 엮어 낸 17세기 이전에도, 이들 통찰 중 하나인 임페투스(impetus) 운동 이론은 천문학적 사고에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임페투스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체계에서 가장 취약한 설명 중 하나였던 투사체 운동에 대한 설명이 무너진 자리 위에 세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은 외부의 밀침이 없는 한 정지해 있거나 땅의 중심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수많은 현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이었지만, 투사체의 행동에 대한 관찰과는 쉽사리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손이나 투석기로 던져질 때, 돌은 땅으로 똑바로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돌은 처음의 발사자(손 또는 투석기)와 접촉이 끊어진 후에도 처음에 추진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인다. 예리한 관찰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었고, 최초의 추진 장치와 접촉이 끊어진 후에도 투사체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밀침의 원천이 교란된 공기라는 생각을 이용해 자신의 이론을 땜질했다. 그는 이 해법에 썩 만족하지 않은 것 같은데, 왜냐하면 그가 양립 불가능한 버전의 해법을 적어도 두 개 제안한 데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조금 논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의 근본적인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투사체를 부차적인 문제로만 취급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그 문제가 그의 이론에 어려움을 낳을 수 있다는 점뿐인 것 같다.

그것은 정말로 어려움을 만들어 냈으며, 그 어려움은 거의 곧바로 나타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반론을 남긴 6세기 기독교 논평가 존 필로포노스(John Philoponus)는 자신의 불완전한 임페투스 이론적 해법이 헬레니즘 시대의 천문학자 히파르코스에게서 온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다른 논평가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중 이 부분 때문에 적어도 골치를 앓았다. 아마도 그 저자[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해 어떤 사람도 공기가 추진체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그리 진지하게 채택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투사체 문제를 온전히 마주하고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상당 부분 수정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문헌 속의 문제가 그들 자신의 문제가 된 14세기에 이르러서다. 지상의 문제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 수정은 천문학에도 직접적인 함축을 가진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문제와 그에 대한 중세적 해법 모두는 오렘의 스승 장 뷔리당(Jean Buridan)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여덟 권에 대한 질문들(Questions on the Eight Books of Aristotle's Physics)』에 있는 훌륭하고도 자세한 설명을 통해 복원될 수 있다.

발사자의 손을 떠난 투사체가 공기에 의해서 움직이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지를 알아내고자 한다. … 이 질문은 내가 판단하기로 매우 어려워 보이는데,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잘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 [한 지점에서] 투사체가 그것이 있던 자리를 신속하게 떠나고,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은 진공을 채우기 위해 재빨리 뒤로 공기를 보낸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공기는 투사체와 부딪혀 그것을 민다. 이는 일정한 거리 동안 계속 반복된다. …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많은 경험은 이러한 진행 방법에 대해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뷔리당이 든 많은 사례 중 하나로]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뾰족한 원뿔 모양의 뒷부분을 가진 창을 던지면 뾰족한 원뿔 모양의 뒷부분을 가지지 않은 창을 던졌을 때와 똑같은 속도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 뒤따르는 공기는 이렇게 뾰족한 끝을 밀어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공기는 뾰족한 점에 의해 쉽게 갈라질 것이기 때문이다[반면 공기는 뭉툭한 끝을 밀 수 있을 것이므로, 뭉툭한 끝을 가진 창을 더 멀리 보낼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돌을 비롯한 투사체 안에 그 투사체의 추진력이 되는 각인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공기가 투사체를 [계속] 밀어 준다는 말에 기대는 것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공기는 운동에 저항할 뿐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발사자는] 움직이는 물체에 모종의 임페투스 또는 추진력을 각인시키고, 그 임페투스는 발사자가 그 움직이는 물체를 이동시킨 방향으로−그것이 위든 아래든, 옆이든 원형이든−작용한다. 그리고 발사자가 그 움직이는 물체를 더 빠르게 이동시킬수록 그 물체에는 그만큼의 더 강한 임페투스가 각인될 것이다. 발사자가 운동을 멈춘 후에도 돌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 임페투스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임페투스는 임페투스에 의한 자연스러운 운동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물체를 이끄는 공기의 저항과 돌의 무게 때문에 점점 감소한다. 그리하여 돌의 무게가 임페투스를 이겨 내고 돌을 그것의 자연스러운 장소로 내려보낼 정도로 임페투스가 감소하거나 사라질 때까지 돌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진다.[12]

이는 뷔리당의 정교한 논의 중 고작 한 부분일 뿐이며, 셀 수 없이 많은 비슷한 방식의 논의가 그의 후계자들의 작업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14세기 말엽 임페투스 역학은 뷔리당의 것과 매우 비슷한 수많은 형태로 중세의 주요 과학자들의 연구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을 대체했다. 이 전통은 쭉 지속되어, 파도바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거기서 공부할 무렵 교육되었고, 갈릴레오는 피사에서 그의 스승 보나미코(Bonamico)로부터 그것을 배웠다. 그들의 동시대인들과 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는 그것을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사용했다. 여러 국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임페투스 이론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역할들 중 하나는, 지적하진 않았지만 이미 우리가 본 것이다. 땅의 부동성을 옹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적인 논증에 대한 오렘의 반박은 임페투스 이론 또는 그와 매우 비슷한 어떤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에서 수직으로 던져진 돌은 공간에 고정된 반지름 선분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만약 돌이 공기 중에 있는 동안 땅이 움직인다면, 그 돌(이나 화살)은 땅을 따라갈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돌이 발사자와 계속 접촉하고 있는 동안 동쪽으로 움직이는 땅의 운동이 돌에게 동쪽 방향의 임페투스를 부여한다면 임페투스는 지속될 것이고 접촉이 끊어진 후에도 돌이 움직이는 땅을 쫓아가도록 만들 것이다. 임페투스 이론은 움직이는 땅이 지상의 물체들에게 내적 추진력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해 주며, 그 추진력은 후에도 그들에게 땅을 쫓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그의 스승 뷔리당과 마찬가지로, 오렘은 임페투스 이론을 믿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그 이론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진 않았더라도, 그의 반박은 그 이론 없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든 임페투스 이론은 중세와 르네상스 양 시기 동안 지상의 물체들을 뒤처지지 않게 하면서도 땅을 움직일 수 있게 해 준 대부분의 논증에 함축되어 있다.

임페투스 이론의 일부 지지자들은 즉시 그것을 땅에서 하늘로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다가올 코페르니쿠스주의를 향한 두 번째 긴 걸음을 밟았다. 뷔리당은 『질문들』 중 앞의 인용문 거의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또한, 성서에는 적절한 [천사와 같은] 지성들이 천체들을 움직인다는 말이 없기에, 어쩌면 이런 종류의 지성들을 가정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신이 세상만사의 조력자로서 나설 때 행사하는 일반적인 영향력을 제외하면, 그것은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각각의 천구들을 그가 원하는 대로 돌렸고, 그 천구들을 돌리면서 더 이상 그가 직접 돌리지 않고도 천구들을 돌려 주는 임페투스를 그 안에 각인시켰다고 해도 [똑같이 좋은]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작용과 열정을 차례로 다른 것들에게 넘김으로써 일곱째 날에 그는 자신이 수행하던 모든 일을 쉬었다. 그리고 그가 천체들 속에 각인시킨 이 임페투스들은 그 후로 감소하거나 사라지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천체들에게는 다른 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임페투스를 소멸시키거나 억누르는 저항도 없었다.[13]

뷔리당의 글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하늘과 땅은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단일한 종류의 법칙들을 따랐으며, 똑같은 제안은 그의 제자 오렘에 의해 더 진행되었다. 그는 “신이 [하늘을] … 창조할 때, 지상의 물체들에 … 무게를 각인시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하늘(천구)들에 일정한 성질과 운동의 힘을 각인시켰으며, 그것은 사람이 시계를 만들어 스스로 돌도록 두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다. 즉 신은 하늘(천구)들이 [그가 확립한] 질서를 따라 계속 돌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14] 그러나 하늘을 지상의 메커니즘이나 일종의 시계장치처럼 상상하는 것은 달 위 세계와 달 아래 세계 사이의 절대적인 이분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임페투스 이론가들은 그 제안을 적어도 중세 시대 동안은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지만, 땅이 행성이 되고자 할 때 반드시 깨져야 했던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 모두로부터 도출된 이 이분법이었다.

땅의 운동 가능성과 지상의 법칙과 천상의 법칙 사이의 부분적 통합은 임페투스 이론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가장 직접적으로 기여한 두 가지였다. 그러나 임페투스 이론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간접적인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장에서 짧게 다시 다룰 것이다. 임페투스 이론은 뉴턴 역학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그 혁명이 코페르니쿠스가 죽고서 한 세기 넘게 지난 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는 행성들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수학적 묘사만을 제공했을 뿐이며, 행성들이 왜 그가 말한 대로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처음에 그의 수리 천문학은 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러한 문제들은 뉴턴의 역학이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체계에 비어 있던 퍼즐 조각을 제공함으로써 비로소 해결되었는데, 운동에 관한 이전의 스콜라적 분석들에 대한 의존도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보다도 뉴턴의 역학이 더 높았다.

임페투스 역학은 뉴턴 역학이 아니지만, 새로운 문제들, 새로운 변수들, 새로운 추상적 개념들을 제시함으로써 뉴턴의 연구로 가는 길을 닦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임페투스 이론 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실험도 오직 정지만이 지속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뷔리당과 몇몇 다른 임페투스 이론가들은 저항이 없다면 운동 역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즉 그들은 현재 우리가 뉴턴의 제1법칙으로 알고 있는 것을 향한 긴 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위의 설명적 인용문에서 빠진 한 구절에서, 뷔리당은 움직이는 물체의 임페투스의 양이 물체의 속력과 그 물질의 양의 곱과 같다고 보았다. 임페투스 개념은 운동량이라는 현대적 개념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매우 비슷해졌으며, 갈릴레오의 작업에서는 ‘임페투스’라는 말과 ‘운동량’이라는 말이 대개 호환 가능하게 사용되었다. 끝으로 한 가지 사례만 더 들자면, 다른 곳에서 뷔리당은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무게가 그 물체에 동일한 시간 간격마다 동일한 증분의 임페투스를(따라서 속도를) 각인시킨다는 말과 매우 비슷한 얘기를 하기도 했다. 뷔리당의 후계자 가운데, 정확히 이런 말을 하고서 그것과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다른 분석 도구의 도움으로 낙하 시간과 거리 사이의 현대적인 정량적 관계를 도출한 최초의 인물은 갈릴레오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기여들은 뉴턴 역학의 발전 과정에서 스콜라적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 주며, 뉴턴 역학은 코페르니쿠스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우주 구조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그것의 완전한 유용성이 최초로 밝혀진 17세기에, 스콜라적 과학은 완전히 새로운 사고 체계를 짜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콜라 학자들은 쉬운 놀림거리가 되었고, 그 이미지는 고착되었다. 중세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자연보다는 글에서 더 많이 발견했고, 그 문제들 중 다수는 현재 전혀 문제로 보이지 않으며, 현대 기준에 따르면 중세 시대의 과학 활동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 과학이 달리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었겠는가? 스콜라주의의 시대는 고대 과학과 철학의 전통이 동시에 재구성되고, 소화되고, 그 적합성이 시험되던 시대였다. 허점들이 발견되자, 그 허점들은 곧바로 현대 세계의 효과적인 첫 연구를 위한 초점이 되었다. 16, 17세기의 위대한 새 과학 이론들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 체계가 스콜라적 비판에 의해 찢어진 곳들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그 이론 대부분은 스콜라적 과학에서 창조된 핵심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 과학자들이 중세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태도로, 자연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고인이 된 화이트헤드 교수가 지적했듯이, “현대 과학 이론의 발전에 앞서 형성된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중세 신학의 무의식적 파생물이다”.[15]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전통에 대한 중세 후기의 수정들을 살펴보는 동안, 우리는 전문적인 행성 천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았다. 사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는데, 일부는 수학적 문헌 자체의 고유한 어려움 때문이었고, 일부는 행성들의 문제가 상당히 난해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하늘에 관하여』는 전체 우주를 상대적으로 단순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정교한 『알마게스트』는 대부분 행성의 위치 계산만을 다루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들은 12세기 말에 번역되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철학, 우주론은 전문적인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보다 훨씬 더 빨리 소화되었다. 13세기 형이상학은 그 깊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견줄 만했고, 14세기 물리학과 우주론은 그 깊이와 논리적 정합성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능가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15세기 중반이 될 때까지도, 어쩌면 그 후에도, 프톨레마이오스에 견줄 만한 고유의 천문학 전통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처음으로 널리 알려진 유럽의 천문학 논문은 1233년경 홀리우드의 존(John of Holywood)이 쓴 것으로, 이 논문은 초보적인 아랍 논문을 그대로 모방했으며 행성에 할애한 분량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아홉 장에 비해 훨씬 적은 단 한 장뿐이었다. 다음 두 세기 동안에는 그의 책에 대한 논평들과 몇몇 성공적이지 못한 경쟁작들만 양산됐을 뿐이었다. 1473년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나기 20년 전까지 기술적으로 숙련된 행성 천문학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다. 그것은 독일의 게오르크 포이어바흐(Georg Peuerbach, 1423∼1461)와 그의 제자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üller, 1436∼1476) 같은 사람들의 저작에서야 나타났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 세대의 유럽인들에게 행성 천문학은 거의 새로운 분야였고, 그것은 그때까지 천문학이 수행된 그 어떤 환경과도 매우 다른 지적·사회적 환경 속에서 수행되었다. 부분적으로 그러한 차이는 우리가 아퀴나스와 단테의 작업에서 살펴보았던 천문학 전통에 증착된 신학적 첨가물들에서 비롯되었다. 훨씬 더 본질적인 변화들은 뷔리당과 오렘 같은 사람들의 논리적 우주론적 비판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중세의 기여들이었고,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시대에 살지 않았다. 1473년부터 1543년까지의 그의 생애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한복판을 차지했으며, 이 시기의 특징적인 새로움들 또한 그의 연구가 시작되고 형성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고정 관념은 전반적인 격동기에 가장 쉽게 폐기되기 때문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기간 동안 유럽의 격동은 그 자체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적 혁신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한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는 다른 분야에 존재하는 고정 관념들에 대한 믿음도 감소시킨다. 과학의 급진적인 혁신들은 국가적 혹은 국제적 격변기 동안 반복적으로 발생해 왔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생애도 그러한 시기였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제는 민족국가가 중세 군주제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왕조 간 경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유럽의 광대한 영역을 또 다시 차지하기 위해 위협했다. 경제 제도와 기술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성장한 새로운 상업적 귀족은 오래된 교회 귀족과 지주 귀족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뱅은 가톨릭의 종교적 헤게모니에 대한 최초의 성공적인 반란을 이끌었다.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삶에서 일어난 그러한 명백한 격변들로 가득했던 한 시대에, 행성 천문학에서 일어난 혁신은 처음에는 전혀 혁신처럼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구체적인 특징들은 천문학에 더 구체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는 항해와 탐험의 시기였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나기 50년 전,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포르투갈인의 항해들은 유럽인들의 상상력과 욕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가 19살 때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첫 아메리카 상륙은 이러한 초창기 탐험들을 대표하는 한 사례일 뿐이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항해들의 기초를 제공했다. 성공적인 항해는 향상된 지도와 항해 기술을 요구했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하늘에 대한 더 많은 지식에 의존했다. 항해왕자 엔히크(Prince Henry the Navigator)는 초창기 포르투갈 항해의 조직자이자 책임자로서 최초의 유럽 천문대들 중 하나를 건립했다. 따라서 탐험은 전문적인 유럽 천문학자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데 기여했고, 그렇게 탐험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것은 그 분야에 대한 태도를 부분적으로 변화시켰다. 각각의 새로운 항해는 새로운 영토, 새로운 산물, 새로운 사람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땅에 대한 고대의 묘사가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 빠르게 배웠다. 특히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도 배웠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 겸 점성술사일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지리학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인이 결국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을 교정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금방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글에도 나온다−천문학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자신의 분야에서도 변화를 준비하게 되었다.

달력 개혁에 대한 요구는 르네상스 천문학의 실천 양식에 더욱 직접적이고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는데, 왜냐하면 달력에 대한 연구는 천문학자에게 기존 계산 기법들의 부적합성을 대면하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력의 누적 오차들은 훨씬 일찍부터 인식되었고, 달력 개혁의 제안 시점은 13세기 혹은 그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제안들은 점점 대형화되던 정치, 경제, 관료 기구들이 효율적이고 균일한 날짜 결정 방법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된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실질적인 효력을 얻게 되었다. 그제야 달력 개혁은 공식적인 교회의 사업이 되었고,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자서전에도 잘 그려져 있다시피 천문학에 영향을 주게 된다. 16세기 초 코페르니쿠스는 달력 개혁에 대해 교황의 자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며 달력 개혁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기존의 천문학적 관찰들과 이론들이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달력을 설계하기에 아직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급진적인 이론을 고려하게 만든 당대의 천문학의 양상들을 열거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왜냐하면 첫째로, 수학자들은 태양과 달의 운동에 대해 너무나 확신이 없어서 1년(계절년)의 일정한 길이를 설명하지도 관측하지도 못합니다”(p. 137을 보라). 코페르니쿠스가 말하길, 달력 개혁은 천문학의 개혁을 요구했다. 그의 『회전에 관하여』의 서문은 그의 새로운 이론이 새로운 달력을 가능케 할지 모른다는 제안으로 끝을 맺었다. 1582년에 처음 도입된 그레고리력은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을 이용한 계산에 기초했다.[옮긴이 주2]

천문학 계산을 위한 기존 기법들의 부적합성에 대한 인식은 르네상스 삶의 또 다른 측면에 의해서도 강화되었다. 15세기, 유럽은 고전적 모델에 대한 제2의 재발견과 결합한 제2의 거대한 지적 부흥을 경험했다. 앞선 12세기의 부흥과 달리, 르네상스 학문 부흥은 원래 과학의 부흥과 거리가 멀었다. 새롭게 회복된 문서들 대부분은 고대의 문학, 예술, 건축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주제들의 위대한 전통은 당시 서구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이슬람 문화가 그것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세기에 발견된 원고들 중에는 헬레니즘 수학의 몇몇 중요한 작업들과 더 중요하게는 이전에는 아랍어로만 알려져 있었던 과학 고전들의 원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버전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천체 운동을 올바르게 예측하는 데 실패한다는 점은 더 이상 전달과 번역 과정에서 누적된 오류에 책임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천문학자들은 더 이상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 이후로 쇠퇴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포이어바흐는 이슬람에서 전해진 『알마게스트』의 간접 번역본들을 가지고 한 연구를 통해 천문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 책들을 통해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해 그전까지 알려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적합하고 완전한 설명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그에게 진정으로 적합한 천문학은 아랍어 자료로는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의 느낌에, 천문학자는 그리스어 원본을 가지고 연구를 해야 마땅했으며, 그는 1461년 죽기 전에 이탈리아로 떠나 거기에서 입수할 수 있었던 원고들을 검토하려고도 했다. 요하네스 뮐러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은 정말로 그리스어 버전들을 가지고 연구를 했으며,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원래 공식도 부적합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고대 저자들의 믿을 만한 문헌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15세기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직속 선배들에게 이제는 바꿀 때가 되었다는 깨달음을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위에서 논의한 것들과 같은 발전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왜 그때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들은 천문학의 격변을 위한 분위기의 핵심적인 요소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조금 다른 역할을 수행했던 르네상스의 다른, 더 지적인 측면들도 있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학문 운동이었던 인문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혁명의 시기보다는 혁명의 모습에 영향을 주었다. 대개 인문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학자들과 전체 대학 학문 전통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그들의 원천은 새롭게 되찾은 문학 고전들이었고, 다른 시대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대다수는 과학 분야를 통째로 거부했다. 초기 인문주의 시인 페트라르카(Petrarch)는 신기하게도 앞서 보았던 과학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평가 절하를 떠올리게 할 만한 전형적인 의견을 들려준다. “이 모든 것들이 참일지라도, 그것들은 행복한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인류의 본성에 무지하고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거나 간과한다면, 동물과 새와 물고기와 파충류의 본성을 아는 게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16] 만약 인문주의가 르네상스의 유일한 지적 운동이었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오래 연기되었을지 모른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동시대 천문학자들의 연구는 인문주의자들이 극도로 조롱했던 바로 그 대학 전통에 정확히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은 과학을 멈추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르네상스 기간 동안 대학 외부의 주류 인문주의 전통은 대학의 담장 안쪽에서 계속되던 과학 전통과 공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인문주의자들의 독단적인 반(反)ᐨ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첫 번째 과학적 효과는 다른 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과학의 핵심 개념들과의 단절을 용이하게 한 것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효과는 인문주의 사상의 특징이었던 강한 초현실적 경향으로 인해 과학이 놀라운 생산성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페트라르카의 인용문에서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인문주의의 이러한 측면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와 같은 일부 르네상스 과학자들은 확실히 비(非)ᐨ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이디어 두 가지를 끌어낸 것 같다. 그 하나는 자연에서 단순한 산술적·기하학적 규칙성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중요하다는 새로운 믿음이며, 다른 하나는 태양이 우주의 모든 주요 원리와 힘의 원천이라는 새로운 관점이다.

인문주의의 초현실성은 잘 확립된 한 철학적 전통으로부터 유래했는데, 그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초기 교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지만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되찾으면서 잠시 잊혀 있던 것이었다. 그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달리 일상의 흘러가는 일들 속에서보다 변치 않는 영혼의 세계 속에서 실재를 발견했다. 그 전통의 궁극적 출처였던 플라톤은 대체로 이 세계의 대상들을 공간과 시간 너머에 존재하는 이데아 또는 ‘형상[또는 형식]’들로 이루어진 영원한 세계의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이라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은 스승의 사상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고서 이러한 경향만을 강조했다.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모델로 삼았던 그들의 신비주의 철학은 오직 초월적인 실재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신비주의에도 불구하고, 신플라톤주의에는 르네상스 시기의 과학에 상당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요소들이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자는 일상의 변화 가능하고 소멸 가능한 세계로부터 순수 정신의 영원한 세계로 단숨에 뛰어올랐고, 수학은 그에게 그 비약의 방법을 보여 주었다. 그에게 수학은 지상 세계의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한 모습 가운데에서 영원하고 실재하는 것의 본보기가 되었다. 평면기하학의 삼각형과 원들은 모든 플라톤적 형상의 전형이었다. 그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종이 위에 그려진 어떤 선이나 점도 유클리드의 가정들을 만족하지 못한다−그들은 어떤 영원하고 필수적인 속성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속성들은 정신만 가지고도 발견할 수 있었고, 일단 발견되면 실세계의 대상들 속에 희미하게 반영되어 관찰될 수 있었다. 실세계를 수학의 영원한 세계의 그림자로 생각한 또 다른 무리인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은 길이가 1:3/4:2/3:1/2의 간단한 비율을 만족하는 균일한 현들이 화음을 만들어 낸다는 발견 속에서 지상계 과학의 이상을 보았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의 수학적 경향은 종종 피타고라스에 기인한 것으로서 신피타고라스주의로 간주되기도 한다.

플라톤 자신은 형상을 추구하는 정신 수련의 일환으로 수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아카데미 문 위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나의 문을)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17]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더 나아갔다. 그들은 수학에서 신과 영혼과 세계 영혼, 즉 우주의 본성을 알아내기 위한 열쇠를 찾았다. 5세기 신플라톤주의자 프로클로스(Proclus)의 전형적인 구절은 수학의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의 일부를 완벽하게 보여 준다.

따라서 [세계의] 영혼은 결코 이성이 결여된 매끈한 노트와 비교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 글자들을 새겨 넣으며 끊임없이 써지는 노트로, 그는 그 노트의 지성으로부터 끝없이 많은 것들을 끌어낸다. … 따라서 모든 수학적 종(species)은 일차적으로는 그 영혼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감각을 통해 지각되는 수들에 앞서, 그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수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살아 숨 쉬는 도형들이 눈에 보이는 도형들에 앞서고, 이상적인 조화의 비율들이 화음에 앞서고, 보이지 않는 구들이 원형으로 회전하는 물체들에 앞설 것이다. …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영원히 활기 있게 지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눈에 보이는 수, 도형, 이성, 운동의 원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수학적 형식들로부터 그 영혼의 기원을 끌어내고 그 구조를 완성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을 그 영혼의 성격 속에 안치시킨 티마이오스의 교리를 따라야 한다.[18]

프로클로스와 그의 이상을 지지한 인문주의자들은 물리과학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들은 가끔 그들보다 과학적으로 경도된 동시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많은 후기 르네상스 과학자들은 자연의 단순한 기하학적·산술적 규칙성을 향한 새로운 탐색을 개시했다. 볼로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도메니코 마리아 드 노바라(Domenico Maria de Novara)는 프로클로스와 그 학파의 다른 저자들[의 글]을 번역한 피렌체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친한 동료였다. 노바라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이론을 신플라톤주의적 이유에서 처음으로 비판한 사람들 중에 속했는데, 그는 그렇게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체계는 절대로 자연의 참된 수학적 질서를 나타낼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노바라의 제자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천문학자들은 “운동의 균일성이라는 제1원리를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은 “우주의 형태나 그 부분들의 불변의 대칭성과 같은 중요한 사항을 도출해 낼 수 없게 되었다”고 불평했을 때(p. 138을 보라), 그는 같은 신플라톤주의 전통에 동참하고 있었다.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은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한 계승자 케플러에게서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난다. 앞으로 보겠지만, 단순한 수치 관계에 대한 탐색은 케플러의 연구 대부분을 관통하는 동시에 그 동기를 제공한다.

신플라톤주의와 태양 숭배 사이의 연관은 그 기원이 더 불명확하지만, 그들을 묶어 주는 연결고리에 대한 힌트는 프로클로스의 앞선 인용문에서 찾을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결코 실세계를 없앨 수 없었다. 프로클로스가 세계의 영혼 또는 신 안에서 찾아낸 “살아 숨 쉬는 도형들”과 “보이지 않는 구들”은 제1의 철학적인 존재로서, 완전한 실재성과 존재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자는 그의 감각에 의해 입증된 불완전한 물체들에게도 어떤 종류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을 “살아 숨 쉬는 도형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류 복제물로 간주했다. 프로클로스의 말에 따르면, 세계 영혼의 본성을 결정하는 수학적 형식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순수 지적 존재인 자기 자신의 물질화된 저질 복제물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 냈다. 신플라톤주의자의 신은 자가복제의 생식력을 갖춘 원리로, 신으로부터 나온 형식들의 그 다양성은 신의 엄청난 생식력을 잘 보여 주었다. 물질적인 우주에서 이 다산의 신은 태양에 의해 적절히 표상되었는데, 태양으로부터 나온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은 우주에 빛과 따뜻함과 비옥함을 가져다주었다.

태양과 신 사이의 이러한 상징적 동일시는 르네상스 문학과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15세기 인문주의와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했던 피렌체 아카데미의 핵심 인물인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는 논문 <태양에 관하여(On the Sun)>에서 그것의 전형적인 화법을 보여준다.

[태양의] 빛보다 신의 성격을 완전하게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첫째, 빛은 감지되는 것들 중 가장 눈부시고 분명하다. 둘째, 빛만큼 쉽고, 넓고, 빠르게 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셋째, 어루만지듯이, 빛은 모든 것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가장 부드럽게 침투한다. 넷째, 빛과 동반되는 열은 모든 것을 기르고 키우는, 우주의 원천이자 원동력이다. … 비슷하게 신은 그 자체로 모든 곳에 퍼져 있으며, 모든 것을 달래고 유혹한다. 신은 강요를 통해 일을 하지 않고, [빛과 함께 동반되는] 열처럼, 그와 동반되는 사랑을 통해 일을 한다. 이 사랑은 모든 것들을 유혹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기꺼이 신을 수용한다. … 아마도 빛은 먼 거리에서부터 작동하여 모든 것을 하늘과 연결해 주지만 하늘을 떠나지도 않으며 외부의 것들과 섞지도 않는, 그 자체로 천상의 정신이 가진 시각이거나 그것의 보는 행위일 것이다. … 나는 당신이 천국의 시민인 하늘을 바라보길 바란다. 태양은 당신에게 신 자신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감히 누가 태양이 거짓이라고 말하겠는가.[19]

프로클로스와 마찬가지로 피치노도 과학과 거리가 멀다. 피치노는 천문학을 이해한 것 같지 않다. 그는 확실히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태양은 피치노의 우주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지만, 그것의 오래된 위치는 유지된다. 그러나 그 위치는 더 이상 알맞은 자리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피치노는 태양이 최초로 창조되어 하늘의 중심에 있었다고 썼다. 분명 공간이나 시간상의 다른 위치는 태양의 위엄과 창조적 기능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위치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과 양립할 수 없었으며, 이것이 신플라톤주의에 야기한 어려움은 코페르니쿠스로 하여금 태양을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체계를 상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태양의 새로운 위치를 논의한 직후,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새로운 우주론의 적합성에 대해 언급했다(p. 179를 보라). 그가 호소하는 권위들은 매우 신플라톤주의적이다.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태양이 왕좌 위에 앉아 있다. 이 가장 아름다운 사원에서 이 빛나는 옥체가 전체를 한꺼번에 밝힐 수 있는 곳이 이곳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 그는 우주의 등불, 우주의 정신, 우주의 통치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히 적절한 이름이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는 그에게 ‘보이는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Electra of Sophocles)는 그를 ‘모든 것을 보는 자’라고 불렀다. 따라서 태양은 그 주위를 돌고 있는 그의 자식들, 즉 행성들을 통치하는 왕좌에 ‘앉아 있다’.

신플라톤주의는 태양과 수학적 단순성 모두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태도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그의 우주관을 낳은 지적 분위기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서 보이는 어떤 특정한 신플라톤주의적 태도가 그의 새로운 천문학 발명 후에 나타난 것인지 그 전에 나타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후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이와 비슷한 모호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잘 작동하게 만든 인물인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을 선호한 이유를 상당히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태양은] 유익한 열이 풍부한, 우리 눈에 가장 공정하고 맑고 깨끗하게 보이는 빛의 원천이자, 시각의 원천이자, 자기 자신은 색이 없지만 모든 색을 그려 내는 화가로, 그의 운동 때문에 행성들의 왕으로 불리고, 그의 힘 때문에 세계의 심장으로 불리고, 그의 아름다움 때문에 세계의 눈으로 불린다. 또한 홀로 최고신으로 평가받을 만한 그는 주목할 만한 거주지에 만족하며 축복받은 천사들과 함께 살 장소를 선택할 것이다. … 왜냐하면 독일인들이 전체 제국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황제로 그를 선출한다면, 천상계 운동에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빛의 은총을 통해 이미 다른 모든 운동과 변화를 지배하고 있던 그에게 투표하는 것을 누가 주저하겠는가? … [따라서] 우리가 태양을 선출하는 것은 최고로 올바른 판단이며, 그 태양은 제1원동력(신)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위엄과 힘을 통해 홀로 이러한 원동력을 발휘하는 임무에 알맞아 보이고 신 자신의 보금자리가 될 만해 보인다.[20]

케플러의 연구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수학적 마법과 태양 숭배는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뒤에도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와 새로운 천문학을 명시적으로 이어 주는 주요한 접점들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는 신플라톤주의의 세 번째 측면이 코페르니쿠스주의와 결합해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구조를 변모시키는 데 기여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그의 엄청난 생식력에 의해 완벽함이 측정되는 데 반해,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자신의 완벽함을 창조의 단정함과 질서 속에서 보여 주는 건축가처럼 생각되었다. 아퀴나스의 신은 유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 잘 맞았지만,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한계를 설정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만약 신의 완벽함이 그 생식력의 정도와 다양성에 의해 측정된다면, 더 크고 더 많이 채워진 우주일수록 더 완벽한 신을 함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신플라톤주의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의 유한함은 신의 완벽함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들이 느끼기에, 신의 무한한 선은 오직 무한한 창조 행위를 통해서만 만족될 것 같았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그와 같이 무한히 많은 것들로 채워진 우주에 대한 상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로부터 벗어나는 중요한 이견들을 제시했다. 르네상스 시기 동안 신의 무한한 창조성에 대한 재강조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을 낳은 지적 분위기의 중요한 요소였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것은 분명 코페르니쿠스의 유한한 우주가 뉴턴주의적 세계ᐨ기계의 무한한 공간으로 변모하는 르네상스 이후의 전환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적어도 여기서 검토하는 바에 따르면, 신플라톤주의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위한 개념적 무대 설정을 완성해 준다. 천문학 혁명을 고려할 때 그 무대는 당혹스러운 무대인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천문학적 요소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그 설정을 중요하게 만들어 주는 요인이 된다. 한 과학에서의 혁신이 꼭 그 과학 내에서 나타난 새로움에 대한 대응이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코페르니쿠스에게 고대 천문학의 부적합성이나 변화의 필요성을 납득시킨 것은 어떠한 근본적인 천문학적 발견도, 어떠한 새로운 종류의 천문학적 관찰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고서 반세기가 지날 때까지 천문학자들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 내에서는 혁명의 소지가 있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혁명의 시기와 그 혁명을 일으킨 요인들에 대한 가능한 이해 방식을 찾는다면, 어쨌든 그것은 주로 천문학 바깥의 환경, 즉 천문학의 실행가들이 살았던 더 큰 지적 환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장의 도입부에서 제안했듯이,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우주론적·천문학적 연구를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멈췄던 곳 바로 근처에서 시작했다. 그 점에서 그는 고대 과학 전통의 직계 상속자다. 그러나 그가 받은 유산은 그에게 도달하는 데 거의 2천 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있었던 재발견 과정 자체, 중세시대의 과학과 신학의 통합, 스콜라적 비판의 세기들, 르네상스 삶과 사상의 새로운 흐름들, 이 모든 것이 결합해 학교에서 배운 과학적 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 변화가 정확히 얼마나 엄청날 수 있었는지,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리만치 작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을 다루는 다음 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St. Augustine, 『Works』, ed. Marcus Dods(Edinburgh: Clark, 1871~1877), IX, 180∼181.
  2. St. Thomas Aquinas, 『Commentaria in libros Aristotelis De caelo et mundo, in Sancti Thomae Aquinatis … Opera Omnia』, III (Rome: S. C. de Propaganda Fide, 1886), p. 24. 나의 번역.
  3. St. Thomas Aquinas, 『The “Summa Theologica”』, Part I, Questions L~LXXIV, trans.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2nd ed.(London: Burns Oates & Washbourne, 1922), p. 225(Q. 68, Art. 3).
  4. Aquinas, 『Summa Theologica』, Part III, Questions XXVII~LIX(London:Washbourne, 1914), pp. 425, 433(Q. 57, Arts. 1, 4). 출판사와 Benziger Brothers, Inc., New York의 허락을 받아 인용.
  5. 중세 천문학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아홉 번째 천구는 분점들의 세차 운동과 천극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슬람 천문학자들에 의해 고대 우주론의 여덟 천구에 추가되었다(상세 부록 2절을 보라). 이 이슬람 체계에서 옛 체계의 항성 천구처럼 24시간마다 회전하는 것은 아홉 번째 천구다.
  6. Charles H. Grandgent, 『Discourses on Dant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24), p. 93.
  7. Dante, 『The Banquet』, trans. Ketharine Hillard(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889), pp. 65∼66.
  8. Ibid., pp. 69, 79∼80.
  9. Nicole Oresme, 『Le livre du ciel et du monde』, ed. A. D. Menut and A. J. Denomy, in 『Mediaeval Studies』, III∼V(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aeval Studies, 1941~1943), IV, 243.
  10. Ibid., IV, 272. 오렘의 논평에 있는 이 구절과 다음 구절들을 번역하면서 나는 위스콘신 대학의 마셜 클래겟(Marshall Clagett)이 작성한 등사판 소책자 『Selections in Medieval Mechanics』의 더 긴 영문 발췌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그 저자는 친절하게도 그것을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오렘과 다른 많은 중세 과학 저술가들에 대한 클래겟 교수의 번역은 “Mechanics in the Middle Ages”라는 제목으로 곧 나올 예정이다.
  11. Ibid., p. 273.
  12. 허락을 받아 (주 10의) Marshall Clagett, 『Selections in Medieval Mechanics』, pp. 35∼39에서 요약함. 원문은 Jean Buridan, 『Quaestiones super octo libros physicorum』 (Paris, 1509), Book VIII, Question 12다. 나는 순전히 스타일상의 변화를 조금 주었고 한 부분의 이탤릭 강조를 제거했다.
  13. Clagett, 『Selections in Medieval Mechanics』, p. 40, from Buridan, 『Quaestiones super octo libros physicorum』.
  14. 『Mediaeval Studies』, IV, 171.
  15. Alfred North Whitehead,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New York: Macmillan, 1925), p. 19.
  16. John Herman Randall, Jr., 『The Making of the Modern Mind』, 2nd ed.(Boston: Houghton Mifflin, 1940), p. 213에서 인용.
  17. Sir Thomas L. Heath, 『A History of Greek Mathematics』 (Oxford: Clarendon Press, 1921), I, 284.
  18. Edward W. Strong, 『Procedures and Metaphysic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36), p. 43, from Thomas Taylor, 『The Philosophical and Mathematical Commentaries of Proclus on the First Book of Euclid's Elements』[London, I(1788) and II(1789)]에서 인용.
  19. Marsilio Ficino, 『Liber de Sole』, in 『Marsilii Ficini Florentini, … Opera』 (Basel: Henric Petrina, 1576), I, 966. 나의 번역.
  20. 케플러의 초기 논쟁 중 하나의 일부를 Edwin A. Burtt, 『The Metaphysical Foundations of Modern Physical Science』, 2nd ed.(New York: Harcourt, Brace, 1932), p. 48에서 인용 및 번역 인용.

(옮긴이 주1) 『알마게스트』의 원 그리스어 제목은 ‘수학 논문’이라는 평범한 뜻의 ‘마테마티카 신탁시스(Μαθηματικὴ Σύνταξις)’였다. 이후 ‘위대한 논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책의 아랍어 번역본은 ‘가장 위대한’이란 뜻의 ‘알-마지스티(al-majisṭi, المجسطي)’가 되었고, 이후 라틴어로 재번역된 이 책은 그로부터 파생된 ‘알마게스트(Almagest)’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옮긴이 주2) 이 구절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레고리력에서 채택한 1년의 길이(365.2425일)는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기초하여 13세기에 발행된 알폰소 천문표에서 계산한 1년의 길이(365.24255일)를 따르고 있다. 그레고리력이 발표되기 전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기초한 프로이센 천문표가 발행되었으나 그 천문표는 비교와 참고용으로만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센 천문표에 따른 1년의 길이는 365.2472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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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원문 :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