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혁명/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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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6장.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에 대한 반응

코페르니쿠스는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해인 1543년에 죽었으며,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둔 자리에서 필생의 역작의 첫 인쇄본을 받아보았다고 한다. 그 책은 저자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못한 채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이 싸움을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거의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 냈다. 그는 그 책을 당대의 학식 있는 천문학자 말고는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만들었다. 천문학의 세계 바깥에서 『회전에 관하여』는 처음에는 거의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일반인과 성직자들에 의한 광범위한 반론이 나올 무렵이 되었을 때, 책이 겨냥했던 유럽 최고의 천문학자들 대부분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이러저러한 수학적 기법들은 불가피한 도구가 되어 있었다. 당시 그 연구를 완전하게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는데, 특히 중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연구가 오렘이나 뷔리당의 연구와 같은 원고 형태가 아니라 인쇄된 책에 담겨 있었다는 점이었다. 의도했든 아니든, 『회전에 관하여』의 최종 승리는 침투에 의해 성취된 것이었다.

자신의 핵심 저작을 출판하기 20년 전부터 코페르니쿠스는 유럽의 일류 천문학자들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새로운 가설을 포함한 연구 보고서들은 1515년 무렵부터 회람되었다.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은 손꼽아 기다려지던 일이었다. 책이 등장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동시대인들은 아마도 그의 핵심 가설에 회의적이었을 것이고 그 천문학 이론의 복잡성에 실망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 책을 깊이와 완전성 면에서 『알마게스트』에 필적할 수 있는 최초의 유럽 천문학 저작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뒤 15년 동안 나온 많은 전문 천문학 저서들에서는 그를 “제2의 프톨레마이오스” 또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실력자”로 불렀으며, 이 책들은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구의 운동과 무관한 부분까지 포함해 점점 더 많은 데이터와 계산, 다이어그램들을 빌려 왔다. 16세기 후반세기 동안 이 책은 천문학 연구의 수준 높은 문제들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의 표준 참고서가 되었다.

그러나 『회전에 관하여』의 성공이 그 핵심 가설의 성공을 의미하진 않았다.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지구의 안정성에 대한 신념은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식을 칭송하거나, 그의 다이어그램을 빌려 오거나,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에 대한 그의 계산 결과를 인용한 저자들은 보통 지구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황당무계한 것으로 일축했다.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정중하게 언급한 몇 안 되는 글조차도 그 가설을 변호하거나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몇몇 눈에 띄는 예외도 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대한 초기의 가장 우호적인 반응은 대체로 영국 천문학자 토머스 블런드빌(Thomas Blundeville)의 다음 언급과 유사했다. “코페르니쿠스는 … 지구가 돌고 태양이 하늘의 중심에 가만히 서 있다고 주장했으며, 그 잘못된 가정의 도움으로 그는 천구들의 운동과 회전에 대해 이전의 어떤 설명들보다 참된 설명을 해냈다.”[1] 블런드빌의 언급은 1594년 지구의 안정성을 당연하게 간주한 기초적인 천문학 책에 나와 있다. 그러나 블런드빌의 반대 논조는 오히려 그의 더 기민하고 유능한 독자들을 『회전에 관하여』로 똑바로 인도했을 것이며, 어쨌든 유능한 천문학자라면 아무도 그 책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회전에 관하여』는 널리 읽혔지만, 그것은 책의 이상한 우주론적 가설 때문이 아니라 그 가설에도 불구하고 읽힌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넓은 독자층 덕분에 적지만 점점 많은 수의 독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조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기꺼이 증거로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몇몇 개종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연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관한 지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첫 제자 게오르크 요아힘 레티쿠스(Georg Joachim Rheticus, 1514∼1576)가 쓴 『나라티오 프리마(Narratio Prima, 최고의 설명)』는 1540년에 처음 출판된 이래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천문학적 방법에 대한 최고의 전문적 요약 해설서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의 천문학자 토머스 딕스(Thomas Digges, 1546?∼1595)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변호하기 위해 1576년에 발표한 쉽고 대중적인 글은 지구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천문학자들의 좁은 울타리 너머로 퍼뜨리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튀빙겐대학 천문학 교수 미하엘 마에스틀린(Michael Maestlin, 1550∼1631)의 교육과 연구는 케플러를 비롯해 새로운 천문학에 대한 몇몇 개종자를 낳았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교육과 저술과 연구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움직이는 지구라는 관념에 지지를 표명하는 천문학자는 소수였다.

그러나 스스로 코페르니쿠스주의자라고 밝힌 사람들의 수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이 성공했음을 보여 주는 적절한 지표가 아니다. 많은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운동을 부인하거나 그에 대해 말을 삼가면서도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체계를 탐구하고 새로운 천문학의 성공에 기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헬레니즘 천문학자들은 선례를 제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기 위해 『알마게스트』에서 사용된 모든 원이 물리적으로 실재한다고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원들은 유용한 수학적 장치일 뿐, 그 이상일 필요는 없었다. 비슷하게, 르네상스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궤도를 나타내는 원을 계산만을 위한 수학적 허구로 자유로이 간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지구의 운동에 대한 물리적 실재성을 스스로 믿지 않으면서도 지구가 도는 것처럼 행성의 위치를 계산할 수 있었고 때로는 정말로 그런 계산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원고를 인쇄 중에 본 루터주의 신학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는 『회전에 관하여』 앞에 코페르니쿠스의 허락 없이 익명의 서문을 덧붙이면서 실제로 이러한 입장을 독자들에게 권고했다. 이 가짜 서문이 아마도 많은 천문학자들을 속이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들 중 상당수는 그가 제안한 입장을 잘 활용했다. 지구의 물리적 운동을 지지하지 않은 채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회전에 관하여』 속에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천상의 조화와 지상의 부조화로 인한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간편한 방법을 제공했다. 이는 또한 지구의 운동이 황당무계하다는 천문학자들이 가진 애초의 확신을 점차 완화해 주기도 했다.

에라스무스 라인홀트(Erasmus Reinhold, 1511∼1553)는 지구의 운동을 지지한다고 스스로 표명하지 않고서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공헌을 한 첫 천문학자였다.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지 겨우 8년이 지난 1551년,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방법으로 계산한 일련의 새로운 천문표들을 완전한 세트로 발표했고, 이 표들은 지구의 위치와 운동에 관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금세 천문학자들과 점성술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그의 후원자인 프로이센의 공작을 기념해 이름을 지은 라인홀트의 『프로이센 표(Prutenic Tables)』는 유럽에서 3세기만에 처음으로 나온 완전한 표였으며, 애초에 약간의 오차가 있었던 오래된 표들은 이제는 전혀 맞지 않게 되었다. 즉 시계가 너무 오래 돈 것이다. 라인홀트는 13세기 표를 계산했던 사람들이 입수할 수 있었던 것보다 조금 더 많고 조금 더 좋은 데이터에 기초한 지극히 세심한 작업을 통해 대부분의 경우에서 오래된 표들보다 상당히 우월한 표들을 만들어 냈다. 물론 완벽하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체계의 정확성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월식을 예측하는 데 하루의 오차는 흔한 것이었고, 『프로이센 표』에 따른 1년의 길이는 사실 이전의 표에서 계산된 길이보다 약간 덜 정확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교에서는 라인홀트의 작업이 우수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그의 표는 점차 천문학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 표가 『회전에 관하여』의 천문학 이론으로부터 도출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위신은 높아지게 되었다. 『프로이센 표』를 사용한 모든 사람은 적어도 암묵적인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묵인하고 있었다.

16세기 후반세기 동안 천문학자들은 『회전에 관하여』도, 그에 기초한 천문표들도 버릴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은 느리지만 분명 거침없이 세력을 얻고 있었다. 경험과 훈련 속에서 지구의 안정성을 당연하게 간주하는 성향이 줄어들면서, 다음 세대의 천문학자들은 새로운 조화를 지구의 운동에 대한 더욱 강력한 근거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세기 말에는 첫 개종자들이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만약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와 전통적 우주 사이의 선택이 천문학자들만의 관심거리였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은 거의 확실히 조용하고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천문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데다 천문학자들이 주관하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논쟁은 천문학의 울타리 밖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극도로 시끄러워졌다. 천상의 운동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은 터무니없고 불경스러워 보였다. 그에 대해 이해를 했다 하더라도, 그 장점으로 치켜세워진 조화들은 전혀 증거로 보이지 않았다. 그에 따른 아우성은 광범위했으며 강경하고 격렬했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출발이 느렸다. 처음에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대해 알고 있는 비천문학자들이 거의 없거나, 알더라도 대부분은 그것을 과거에 유행했던 많은 것들처럼 한때 지나가는 개인적인 일탈로나 인식했을 뿐이었다. 16세기 후반세기 동안 사용된 대부분의 기초적인 천문학 문헌들과 교본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살기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것이었으며−홀리우드의 존(John of Holywood)의 13세기 입문서는 기초적인 교육에서 여전히 최고였다−『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교본들은 보통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하지 않거나 한두 문장으로 그의 혁신을 일축했다. 일반인에게 우주를 소개하는 대중적인 우주론 책들은 그 논조와 내용이 훨씬 더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이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그 저자들이 모르거나 알더라도 보통 무시되었다. 아마도 몇몇 개신교 중심지를 제외하면,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코페르니쿠스 사후 몇십 년 동안 우주론적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의 테두리 바깥에서는 17세기 초까지도 거의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16세기 비천문학자들의 반응은 조금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보통 완전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엄청난 논쟁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몇 안 되는 추종자들은 움직이는 지구 개념이 황당무계하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사긴 했지만, 코페르니쿠스주의가 까다롭고 위험한 상대가 될 것임이 분명해진 시점에 개발된 정교한 변증이나 신랄함은 동반되지 않았다. 1578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되어 다음 세기와 사반세기 동안 그곳과 영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긴 우주론적 시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묘사를 제시한다.

저 계산원들의 생각에 따르면 (얼마나 황당한 농담인지 생각해 보라)

이 거대한 둥근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도 별들도 전혀 돌지 않고 춤도 추지 않는다.

그러나 땅 그 자체, 이 커다란 우리의 구는

24시간마다 한 바퀴씩 돈다.

그리고 우리는 해상 모험을 처음 떠나게 되어

해안에서 출발할 때 처음에는

배가 정지해 있고 땅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육지에서 자란 애송이들과 같을 뿐이다. …

따라서 똑바로 쏘아올린 화살은 절대로

사수와 똑같은 장소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바다의 배 위에서

똑바로 위로 던진 돌은

갑판 안에 떨어지지 않고 물에 빠질 것이며

바람이 적당하다면 배 후미에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새들은 빠르게 날기 위해

서쪽에서부터 아침의 빛을 향해 질주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그 포효가 하늘의 천둥소리도 삼키는)

대포의 목구멍에서 발사한 대포알은

되돌아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땅의 빠른 움직임 때문에

즉, 여기서 우리의 둥근 지구가 매일 질주하기 때문에

새들과 대포알과 바람이 빠르게 날기 위해서는

그들의 날개와 그 힘과 그 속도가 100배도 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별들의 겉보기 운동을 더 잘 구제하기 위해

지구에게도 세 가지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장담하는

코페르니쿠스의 근거들을 공격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2]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이렇게 시적으로 거부한 저자가 과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시인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우주론적 보수성과 고전에 대한 집착은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16, 17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에 대해 배운 것은 천문학자들을 통해서라기보다 시인과 대중작가들을 통해서였다. 위의 인용문이 발췌된 뒤바르타스(Du Bartas)의 『일주일, 혹은 천지창조(The Week, or the Creation of the World)』는 『회전에 관하여』보다 훨씬 널리 읽힌 영향력 있는 책이었다.

어쨌든, 코페르니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제기된 무분별한 비난은 독창성 없는 보수적인 대중 작가들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16세기의 가장 진보적이고 창의적인 정치철학자 중 하나로 유명한 장 보댕(Jean Bodin) 역시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을 거의 똑같은 말로 폐기했다.

제정신이 있는, 혹은 물리학의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무게와 큰 덩어리를 가진 육중하고 광대한 지구가 자신의 중심과 태양의 중심을 위아래로 비틀거리며 돌고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가 조금이라도 돈다면, 우리는 도시와 성, 마을과 산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신하 아울리쿠스(Aulicus)는 궁정의 어떤 점성술사가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공작 앞에서 옹호하고 있을 때, 팔레르노 포도주를 따르고 있는 하인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병을 엎지르지 않게 조심하게.”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똑바로 위로 쏜 화살도 탑 꼭대기에서 떨어뜨린 돌도 수직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앞이나 뒤로 떨어질 것이다. …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쓰길, 자기 본성에 적합한 장소를 찾은 모든 것은 그곳에 머무른다고 했다. 따라서 지구는 자기 본성에 맞는 장소에 배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운동 외의 다른 운동에 의해서는 빙빙 돌려질 수 없다.[3]

이 구절에서 보댕은 전통주의자로 보이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위의 인용문이 들어 있던 그 책은 대체로 급진적이고 무신론적인 어조 때문에 1628년 가톨릭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 저자는 가톨릭교도였으나, 책은 지금까지도 그 목록에 남아 있다. 보댕은 분명 기꺼이 전통을 깨뜨리고자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 사람을 코페르니쿠스주의자로 만들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그뿐만 아니라 천문학에 대한 이해와 그 문제에 대한 매우 진지한 고려가 거의 예외 없이 필요했다. 천문학적 편향을 가진 사람 외에는 지구의 운동이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에도 전과 다름없이 거의 황당무계한 얘기로 보였다.

뒤바르타스와 보댕이 제시한 반코페르니쿠스주의 논변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에 대한 3장과 4장의 논의로부터 예상되는 노선을 따라 상당히 정교해질 수 있다. 그러한 논변은 우리가 깊이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지구의 운동에 대한 논쟁이 격렬해지고 극심해지는 17세기 전반세기 동안 모습을 바꿔 가며 계속 되풀이해서 나타난다. 이에 따르면, 지구의 운동은 상식의 제1규칙을 위반하고, 오랫동안 확립된 운동 법칙과 충돌하며, 혁명을 일으키기엔 극히 작은 고려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별들의 겉보기 운동을 더 잘 구제하기 위해서”만 제안되었다. 이것들은 강력한 논변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을 납득시키기에 극히 충분했다. 그러나 그 논변들은 반코페르니쿠스주의 포대의 가장 강력한 무기도 아니었으며, 논쟁을 가장 뜨겁게 달군 것도 아니었다. 그 무기는 바로 종교, 특히 성서였다.

코페르니쿠스에 반하는 성서의 인용문은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 전에도 시작되었다. 1539년에 있었던 그의 ‘탁상담화들’ 중 하나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인용된다.

사람들은 하늘(혹은 창공)과 태양과 달이 아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한 한 신진 점성술사에게 귀를 기울였다. … 이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서[여호수아서 10:13]에는 여호수아가 지구가 아닌 태양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고 나온다.[4]

루터의 왼팔 멜란히톤(Melanchthon)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개신교의 점증하는 반대 목소리에 곧 동참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지 6년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눈은 하늘이 공간 속에서 24시간마다 회전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기발한 재주를 보여 주고 싶어서인지 지구가 돈다고 결론짓고서 여덟 번째 천구도 태양도 돌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이제, 그러한 주장을 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진실성과 품위의 부족을 드러낼 뿐이며, 그러한 경우는 죄악이 된다. 진리를 신에 의해 계시된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순순히 따르는 것은 선량한 마음의 일부다.[5]

당시 멜란히톤은 코페르니쿠스에 반하는 성서 구절들을 계속 모았는데, 유명한 절을 강조하자면, 전도서 1:4∼5에는 “땅은 영원히 머무른다” 그리고 “태양도 뜨고 지지만, 떠오른 자신의 자리로 빨리 돌아간다”고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의 불경을 규제하기 위해 엄격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다른 개신교 지도자들도 곧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거부에 동참했다. 『창세기 주해(Commentary on Genesis)』에서 칼뱅(Calvin)은 시편 93편의 시작하는 절 “땅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도다”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따져 물었다.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 위에 놓으려 하는가?”[6] 갈수록 성서 인용은 반코페르니쿠스주의 논변으로 인기 있는 자원이 되었다. 17세기 초 몇십 년 동안은 온갖 신념을 가진 성직자들이 지구의 운동에 대한 지지자들을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구절을 찾기 위해 성서를 샅샅이 뒤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점점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에게는 “불신자”나 “무신론자”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고,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코페르니쿠스주의와의 싸움에 참여한 1610년 경 이후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공식적인 이단이 되었다. 1616년에는 『회전에 관하여』를 비롯해 지구의 운동을 주장하는 다른 모든 저술이 금서 목록에 올라갔다. 가톨릭교도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읽는 것도 금지했는데, 움직이는 지구와 중심의 태양에 대한 모든 언급이 지워진 수정 버전은 금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앞의 스케치는 코페르니쿠스와 그 추종자들과의 전투를 위해 진열된 무기고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강력한 무기들을 보여 주지만, 이는 그 전쟁이 실제로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를 거의 알려 주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의 운동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혹은 권위에 위배되는 것으로 거부할 준비가 너무나 잘되어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장차 코페르니쿠스주의가 전체 사고 체계의 파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지 않으며, 처음에는 그들도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수 있다. 그들의 독단주의 그 자체는 그들의 동기를 가려 준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동기를 없애 주진 않는다. 여기에는 한 장의 우주 그림 이상의, 또는 성서 몇 줄 이상의 것이 걸려 있었다. 기독교 삶의 드라마와 그에 의존해 만들어진 도덕은 지구가 여러 행성들 중 하나에 불과한 우주에는 융화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주론, 도덕, 신학은 14세기 초 단테가 묘사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 체계에서 오랫동안 서로 얽혀 있었다. 3세기 후 코페르니쿠스주의 논쟁이 한창일 때 나타났던 격렬함과 적대감은 그 전통의 강인한 생명력을 증명해 준다.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은 진지하게 고려할 경우 기독교를 믿는 데 거대한 문제들을 많이 낳았다. 예를 들어, 만약 지구가 여섯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면, 기독교 삶과 엄청나게 관련되어 있는 타락과 구원의 이야기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지구와 본질적으로 같은 천체들이 있다면, 신의 선의로 인해 분명 거기에도 사람이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행성에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도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 될 수 있겠으며, 어떻게 그들도 원죄를 물려받을 수 있겠는가? 만약 원죄를 통해 설명하지 않는다면 선하고 전능한 신이 인간에게 만들어 준 지구 위에서 벌이는 인간의 여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행성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영생의 가능성을 열어 준 구세주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혹 만약 지구가 행성이고 따라서 우주의 중심에서 떨어진 위치에 있는 천체라면, 악마와 천사 사이에 끼어 있는 인간의 중간적이면서도 중심적인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약 지구가 행성으로서 천체의 본성을 가진다면, 지구는 인간이 신성한 순수함을 가진 하늘을 향해 벗어나고 싶어 하는 죄악의 소굴일 수 없다. 만약 행성 지구에서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악과 불완전함이 하늘에서도 나타난다면, 하늘은 신의 적절한 자리가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만약 많은 후기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우주가 무한하다면, 신의 왕좌는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무한한 우주에서, 인간은 어떻게 신을 찾을 수 있겠으며, 반대로 신은 어떻게 인간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들에는 답이 있다. 그러나 그 답들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사소한 것도 아니었으며, 결국 일반인의 종교 경험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수용하려면 인간과 신의 관계 및 인간 도덕의 근거에 관한 견해를 변화시켜야 했다. 그러한 변화는 하룻밤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증거가 『회전에 관하여』에서처럼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로 있는 동안에는 거의 시작도 되기 어려웠다. 그 변화가 완수되기 전까지, 예민한 독자들은 전통적인 가치가 새로운 우주론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며,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이 무신론으로 비난받은 잦은 빈도는 많은 독자들에게 행성 지구 개념이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졌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러나 무신론이란 비난은 간접적인 증거일 뿐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낀 사람에게서 나온다. 일찍이 1611년, 영국의 시인이자 사제였던 존 던(John Donne)은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에게 “당신들의 그러한 견해는 참일 수도 있다. … [어쨌든, 지금 그 견해는] 온갖 사람들의 정신에 스며들고 있다”[7]고 말했으나, 그는 눈앞에 닥친 혁명에서 나쁜 점 말고는 거의 발견한 것이 없었다. 그가 지구의 운동 가능성을 마지못해 인정하던 그해, 그는 곧 다가올 전통적 우주론의 파국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세계의 해부(The Anatomy of the World)>에 그렸는데, 그 작품은 “이 온 세계의 허약함과 쇠락을 표현”한 시였다. 던의 불만 중 일부는 특히 코페르니쿠스주의에서 온 것이었다.

새로운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 속으로 불렀네.

불의 원소는 완전히 방출되고,

태양은 잃어버리고, 지구도.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안내해 줄 수 있는 인간의 지혜는 어디에도 없네.

그리고 행성들과 하늘에서

너무나 많은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이 세계가 소진되었다고 하네. 그러고는 이 세계가

다시 원자들로 산산조각 날 것이라 보고 있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고, 모든 정합성이 사라지고,

모든 본성과 모든 관계도 사라질 것이니,

군왕, 신하, 아버지, 아들은 잊힐 것들이리라.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만

불사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말고는 아무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네.[8]

56년 후, 지구의 운동과 행성으로서의 지위가 적어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압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을 때,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영국의 시인 존 밀턴에게 기독교적 도덕의 똑같은 문제를 제공했지만, 그는 그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던과 마찬가지로 밀턴은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이 충분히 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실낙원』에는 두 개의 대립하는 세계 체계, 즉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긴 설명이 들어 있는데, 그는 둘 사이의 난해한 기술적 논쟁으로 서술한 문제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것”[9]을 목적으로 한 그 서사시에서, 그는 전통적인 우주론의 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실낙원』의 우주는 단테의 우주와 똑같지는 않다. 밀턴은 천국과 지옥의 위치를 단테의 우주보다도 오래된 전통으로부터 가져온다. 그러나 밀턴이 인간의 타락을 그린 지상의 무대는 여전히 신이 인간을 위해 창조한 유일하고 안정적인 중심에 위치한 물체여야 한다.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고서 한 세기가 넘게 지났지만, 이러한 설정에 의존해 만들어진 기독교적 드라마와 도덕은 지구가 행성이면서 “행성들과 하늘에서” 새로운 세계들이 계속 발견될 수 있는 우주에 융화될 수가 없었다.

던의 불편함과 밀턴의 우주론적 선택은 17세기 코페르니쿠스주의 논쟁의 핵심 부분이었던 과학 외부의 문제들을 보여 준다. 이 문제들은 과학계 바깥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이 맞닥뜨린 적대감에 대해 그것의 명백한 황당무계함이나 기존 운동 법칙과의 충돌보다도 더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적대감의 강도나 반코페르니쿠스주의를 공식적인 교회의 교리로 만들어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의 박해를 정당화하곤 했던 개신교와 가톨릭 지도자 양쪽 모두의 바람을 그리 잘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대한 강한 저항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그것의 명백한 황당무계함과 파괴적 성격은 실질적인 증거에 의해 상쇄되지 않았다−그 저항이 종종 취했던 극단적인 형태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6세기 중반 이전까지 기독교의 역사에는, 주요 종교 집단의 공식적인 지도자들이 과학이나 우주론적 이론을 억압하기 위해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텍스트를 적용하는 엄격함을 보인 선례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락탄티우스와 같은 저명한 교부들이 고전적인 우주론을 파괴하기 위해 성서를 적용했던 가톨릭교회의 초기 세기 동안에도, 영성체를 받는 사람들이 지지해야 하는 가톨릭의 공식적인 우주론적 입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가톨릭 쪽보다는 개신교 쪽의 공식적인 반대에서 나타난 격렬함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쉽다. 왜냐하면 개신교도들의 반대는 교회의 분열 과정에서 제기된 더 근본적인 논쟁과 잘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예수와 초기 교부들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태초의 순수한 기독교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성서는 기독교 지식의 유일한 근원이었다. 그들은 잇따른 권위적인 교회 위원회에서 신자와 그 믿음의 근원[즉, 성서] 사이에 끼워 넣은 의식 절차와 교묘한 변증들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그들은 성서에 대한 정교한 은유적·비유적 해석을 혐오했으며, 우주론적 문제에서 보인 그들의 성서에 대한 문자적 집착은 락탄티우스, 바실리우스(Basil), 코스마스(Kosmas)의 시대 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코페르니쿠스는 중세 후기에 기독교도들을 그들의 믿음의 토대로부터 떼어 놓은 온갖 복잡한 재해석들의 상징처럼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공식적인 개신교가 코페르니쿠스에게 보인 엄청난 폭력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관용은 성서와 지식 일반에 대한 어떤 태도에 대한 관용이 되었을 것이고, 개신교도들이 보기에 기독교를 타락시킨 것은 바로 그 태도였다.

즉, 코페르니쿠스주의는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커다란 종교 전쟁과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관련성은 코페르니쿠스 논쟁이 불러일으킨 지나친 고통의 일부를 설명해 줄 것이다. 루터, 칼뱅, 멜란히톤과 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은 코페르니쿠스에 반하는 성서를 인용하고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에 대한 억압을 촉구하는 데 앞장섰다.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회에 있는 경찰 기구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억압 조치들은 나중에 가톨릭교도들이 취한 조치들만큼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그것들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증거가 강력해졌을 때 훨씬 쉽게 폐기되었다. 그럼에도 개신교도들은 최초의 효과적인 제도화된 반대를 보여주었다. 『프로이센 표』를 계산하는 데 사용한 수학적 체계의 물리적 타당성에 대한 라인홀트의 침묵은 보통 비텐베르크 개신교 대학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공식적으로 반대했음을 보여 주는 지표로 해석된다. 『회전에 관하여』 앞에 위조된 변명을 추가한 오시안더 역시 개신교도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한 최초의 공개 옹호자 레티쿠스도 개신교도였지만, 그의 『나라티오 프리마』는 그가 비텐베르크를 떠나 있는 동안 『회전에 관하여』가 등장하기 전에 작성되었다. 비텐베르크에 돌아온 이후 그는 더 이상 코페르니쿠스주의 저술을 출판하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 사후 60년 동안 가톨릭에서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개신교의 반대에 상응할 만한 반대가 거의 없었다. 개별적인 가톨릭 성직자들은 지구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믿지 못하겠다거나 혐오한다는 표현을 했지만, 교회 자체는 조용했다. 주요 가톨릭 대학들에서는 『회전에 관하여』를 읽었고 적어도 가끔은 가르치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체계에 기초한 라인홀트의 『프로이센 표』는 그레고리우스 13세가 1582년 가톨릭 세계에서 반포한 달력 개혁에 사용되었다.[10] 코페르니쿠스는 성직자로 평판이 좋았으며, 천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로 그의 판단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책은 교황에게 헌정되었고, 그에게 출판을 종용한 친구들 중에는 가톨릭 주교와 추기경도 있었다. 14, 15, 16세기 동안 교회는 신자들에게 일치된 우주론을 강요하지 않았다. 『회전에 관하여』 자체는 과학과 세속적인 철학의 문제들에 대해 성직자들에게 허용되었던 자유의 산물이었으며, 『회전에 관하여』 전에는 교회에서 훨씬 더 혁명적인 우주론적 개념도 신학적인 분쟁 없이 등장했다. 14세기 저명한 추기경이자 교황 특사였던 쿠사의 니콜라스는 급진적인 신플라톤적 우주론을 제기했지만, 그의 견해와 성서 사이의 충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지구를 태양과 다른 별들처럼 움직이는 별로 그렸음에도, 그리고 그의 연구는 널리 읽혀지고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교회로부터 책망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비판도 받지 않았다.

따라서 1616년, 더 명시적으로는 1633년,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는 것을 가르치거나 믿는 것을 교회가 금지했을 때, 교회는 수 세기 동안 가톨릭의 관행을 통해 암묵적으로 유지하던 입장을 뒤집은 셈이었다. 그 전환은 수많은 독실한 가톨릭교도들을 경악시켰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증거가 거의 매일 발견되고 있던 물리적 학설을 교회가 반대한다는 것을 공언한 셈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교회가 가질 수 있는 대안적인 태도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12, 13세기에 교회가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똑같은 조치는 17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에도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한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러한 조치는 이미 적용된 적이 있었다. 지구의 일주 운동에 관한 오렘의 14세기 논의는 지구의 부동성에 대한 성서의 증거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두 성서 구절을 인용한 다음 이렇게 답했다.

태양이 돈다고 말하는 성서에 근거한 논증에 대해, 누군가는 그것이 여기서도 평범한 인간이 말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여러 [다른] 곳의 신이 뉘우친다거나 그가 화를 내고 진정한다는 구절처럼 적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모든 구절을 해석할 때와 마찬가지다. 우리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적합하다. 우리는 신이 하늘을 구름으로 덮는다고 읽는다. … 그러나 실제로는 하늘이 구름을 덮는다.[11]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의해 요구되는 재해석은 더 과격하고 많은 대가가 뒤따르겠지만, 똑같은 종류의 논증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도 비슷한 논증들이 사용되었고,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금지하는 공식적인 결정이 이루어진 17세기에도 소수의 가톨릭 지도자들은 그러한 광범위한 재정식화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1615년 벨라르미노(Bellarmine) 추기경−이듬해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금지한 교회 당국의 지도자−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 포스카리니(Foscarini)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지구가 세 번째 하늘에 있으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지 않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진정한 증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 반대를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성서의 구절들을 설명하는 데 엄청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우리는 참으로 증명된 견해를 거짓으로 선언하기보다 그 구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12]

분명 벨라르미노는 실제로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편지의 다음 문장은 “그러나 내 경우에, 나는 그 증명이 내게 보이기 전까지 그러한 증명이 있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였으며, 그 문장은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대한 강력한 새로운 증거를 제공하는 데 사용한 망원경 관찰들을 다 알고서 쓴 것이었다. 우리는 벨라르미노가 어떤 종류의 증거를 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구절에 대항할 수 있는 “진정한 증거”로 간주할 것인지 궁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성서의] 재해석을 필요로 하게 만들 증거의 가능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가톨릭 당국이 지난 세기들보다 성서 증거에 더 많은 무게를 부여하고 사변적인 이견에 더 적은 자유를 허용한 것은 오직 1610년대뿐이었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가톨릭의 금지 조치 이면에는 더욱 강화된 근본주의적 입장이 깔려 있으며, 내 생각에 그 대부분은 개신교의 저항으로 인해 교회가 감당하게 된 압력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반종교개혁 시기에 금지됐는데, 그 시기는 바로 교회가 개신교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내적 개혁에 의해 극심하게 흔들리던 때였다. 반코페르니쿠스주의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개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0년 이후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더욱 민감해진 데는 아마도 지구의 운동에 따른 보다 완전한 신학적 함축을 뒤늦게 깨달은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16세기에 그 함축들은 대부분 분명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600년 로마에서 철학자 겸 신비주의자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를 화형에 처하면서, 그 함축들은 유럽 전역에 걸친 시끄러운 소란과 함께 드러나게 되었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주의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를 비롯해 일련의 신학적 이단들 때문에 처형당했으며, 이는 전에도 가톨릭교도들의 처형 이유가 되었다. 그는 흔히 얘기되는 과학의 순교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이 다산의 능력을 가진 신에 의해 생성된 무수히 많은 세계를 가진 무한한 우주라는 자신의 신플라톤주의적이면서 데모크리토스적인 비전과 잘 통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영국과 대륙에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설파했고, 『회전에 관하여』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의미를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부여했다(7장을 보라). 분명 교회는 브루노의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은 그들의 반작용도 촉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1616년 교회는 정말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교리적인 문제로 만들었고, ‘지구의 운동’과의 전쟁에서 가장 극단적인 일들−코페르니쿠스적 견해의 금지, 갈릴레오의 입장 철회와 ‘감금’, 저명한 가톨릭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의 해임과 추방−이 그해 또는 그 후에 일어났다.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놓고 종교재판이란 조치가 한번 시작되자, 그것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1822년이 되어서야 교회는 지구의 운동을 물리적 실재로 다루는 책의 출판을 허용했고, 그때는 가장 엄격한 정통 개신교 종파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설득된지 한참이 지난 시점이었다. 지구의 안정성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인정은 가톨릭 과학과 (나중에는) 교회의 위신 양쪽 모두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었다. 1633년 나이 든 갈릴레오에게 강요된 한심한 입장 철회는 가톨릭 문헌에서 교회를 비판하는 일화로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적절하게 언급된 일화다.

갈릴레오의 입장 철회는 코페르니쿠스주의와 벌인 전쟁의 절정을 보여 주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조치는 전쟁의 결과가 예견될 수 있었던 시점 이전에는 취해진 적이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대한 반대가 집결된 시점인 1610년 이전에는 지구의 운동에 대한 가장 광신적인 옹호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증거가 약하고 반대되는 증거가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회전에 관하여』의 근본적인 전제는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633년 무렵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17세기 초 이삼십 년 동안 더 강력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고,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는 새로운 증거로 인해 갈릴레오의 입장 철회가 있기 전부터 이미 승산 없는 싸움이 되어 있었다. 이 장의 뒷부분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직속 후계자 세 명이 하늘에서 얻은 새로운 증거를 살펴볼 것이다.

티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가 16세기 전반세기 유럽 최고의 천문학자였다면,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는 후반세기의 걸출한 천문학적 권위자였다. 그리고 순수히 기술적인 능력만으로 판단하자면, 브라헤가 더 우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교는 거의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그 둘은 한 명의 개인에게는 쉽게 합쳐질 수 없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데다, 그 두 장점은 모두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핵심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주론과 천문학의 이론가로서, 브라헤는 비교적 전통적인 사고틀을 보여 주었다. 그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전통을 깨뜨리는 데 중요했던, 그리고 처음에는 지구의 운동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공했던 수학적 조화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적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천문학 이론에서 오래 기억될 만한 혁신을 하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 코페르니쿠스주의를 평생 반대한 인물로, 그의 엄청난 명성은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으로 전향하는 것을 늦추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는 천문학적 개념의 혁신가는 아니었지만, 천문 관측 기법과 천문 자료에 필요한 정확성의 기준을 엄청나게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모든 맨눈 관측가 중 최고였다. 그는 많은 새로운 기구를 설계하고 제작했는데, 그가 제작한 기구들은 과거에 사용하던 것들보다 크고 안정적이며 잘 보정되어 있었다. 대단한 재능을 발휘하여 그는 이 기구들을 이용할 때 발생하는 많은 오차들을 검토하고 수정함으로써, 행성과 별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들을 총체적으로 확립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늘에서 움직이는 행성을 몇몇 특별히 좋아하는 배치에 있을 때만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관찰하는 실천을 시작한 것이다. 현대의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에 따르면, 브라헤가 항성의 위치를 정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을 때 그의 자료는 한결같이 각도 1' 이내의 정확성을 보였는데, 이는 맨눈으로 얻은 경이적인 성취였다. 행성의 위치에 대한 그의 관찰은 보통 대략 4' 이내의 신뢰성을 가진 것 같으며, 이는 고대의 최고 관측가들이 성취한 것의 두 배가 넘는 정확성이었다. 그러나 브라헤의 개별 관측들의 정확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가 수집한 전체 자료의 신뢰성과 범위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와 그가 훈련시킨 관측가들은 유럽의 천문학을 고대의 자료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나쁜 자료에 기인한 온갖 종류의 겉보기 천문학 문제들을 제거해 주었다. 그의 관측은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명세서를 제공했고, 이 새로운 명세서는 문제 해결의 전제 조건이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사용한 자료들은 어떠한 행성 이론으로도 화해시킬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신뢰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최신 자료는 행성들의 문제 해결에 브라헤가 기여한 것들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빠르게 대체한 어떤 천문학 체계의 저자로서도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또 다른 큰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의 체계는 지구의 운동을 수용할 수 없었던 브라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숙련된 천문학자들을 위한 재집결지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을 거부한 브라헤의 이유들 대부분은 평범한 것들이지만, 그는 그것들을 대부분의 동시대인들보다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특히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관찰 가능한 시차 운동의 부재를 설명하겠다는 목적만으로 토성 천구와 항성 천구 사이에 벌려 놓은 거대한 쓸모없는 공간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스스로 거대한 새로운 기구를 이용해 시차를 찾아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지구의 운동을 거부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의 관찰과 양립 가능한 유일한 대안은 항성 천구와 토성 사이의 거리가 토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의 700배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헤는 대단히 실력 있는 천문학자였다. 그는 지구의 운동을 거부하긴 했지만, 『회전에 관하여』가 천문학에 제공한 수학적 조화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새로운 조화들은 그를 개종시키지 않았지만−그에게 그것들은 지구의 운동에 내재한 어려움을 상쇄시킬 만큼 충분히 강한 증거는 아니었다−분명 적어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그의 불만을 증가시켰을 것이고, 그는 결국 그 체계를 거부하고 자신이 발명한 제3의 체계를 선택했다. 그의 ‘티코 체계’는 그림 37에 그려져 있다. 또다시 지구는 항성 천구의 기하학적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항성 천구의 일주 운동은 별들의 일주권들을 설명해 준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와 같이, 태양, 달, 행성들은 바깥 천구에 의해 별들과 함께 매일 서쪽으로 움직이며, 추가적으로 그들은 각자 동향 궤도 운동을 가진다. 다이어그램에서 이러한 궤도 운동들은 원으로 그려져 있지만, 완전한 티코 체계에서는 미세 주전원, 이심원, 이퀀트도 필요하다. 달과 태양의 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다. 여기까지 이 체계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적이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행성의 궤도 중심은 지구의 중심에서 태양으로 옮겨진다. 아마도 의식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브라헤의 체계는 수성과 금성에 태양 중심의 궤도를 부여했던 헤라클레이데스 체계의 확장판으로 볼 수 있다.

그림 37. 티코 체계. 또다시 지구는 회전 중인 항성 천구의 중심에 있고, 달과 태양은 오래된 프톨레마이오스식 궤도를 돈다. 그러나 다른 행성들은 태양을 공통 중심으로 가지는 각각의 주전원 위에 고정되어 있다.

티코 체계의 놀라우면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특징은 그 체계가 『회전에 관하여』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절충적인 해법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는 점이다. 지구는 중심에 정지해 있으므로,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에 대한 유력한 반론들이 모두 사라진다. 성서, 운동 법칙, 별의 시차 부재에 의거한 반론 모두가 브라헤의 제안에 의해 해소되며, 이러한 화해는 코페르니쿠스의 주된 수학적 조화를 하나도 희생시키지 않고서 이루어진다. 사실 티코 체계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수학적으로 정확히 동등한 체계다. 거리 계산이나 내행성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겉보기 이상 현상들을 비롯해 코페르니쿠스에게 지구의 운동을 확신시켰던 다른 새로운 조화들은 모두 보존된다.

티코 체계의 조화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살펴볼 때 사용된 똑같은 기법을 통해 각각 상세하게 전개될 수도 있지만, 지금의 목적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티코 체계의 수학적 동등성에 대한 다음의 축약된 증명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림 37의 항성 천구가, 움직이는 태양 위의 관찰자가 태양 궤도의 양 반대쪽에서 더 이상 별의 시차를 조금도 관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확장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이러한 확장은 행성의 운동에 대한 이 체계의 수학적 설명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제 이 확장된 항성 천구 안에서 다양한 행성들은 그림 38a에서 지구, 태양, 화성을 가지고 도식적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시계 장치에 의해 궤도를 돌게 된다고 상상해 보자. 다이어그램에서 태양은 중심의 지구와 고정된 길이의 팔을 통해 연결되어 지구를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화성은 태양과 고정된 길이의 또 다른 팔을 통해 연결되어 움직이는 태양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움직인다. 두 팔의 길이는 운동하는 내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시계 장치는 그림 37에 그려진 원 궤도만을 산출할 것이다.

그림 38. (a) 티코 체계와 (b)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기하학적 동등성. (a)에서 태양 S는 단단한 팔 ES에 의해 고정된 지구 E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움직인다. 동시에 행성인 화성 M은 팔 SM의 꾸준한 회전에 의해 S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움직인다. ES는 SM보다 빨리 회전하기 때문에, 화성의 알짜 운동은 SM이 ES를 지나치는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동쪽 방향이 된다. 둘째 다이어그램 (b)에서는 똑같은 팔들이 고정된 태양 S를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그려진다. E, S, M의 상대 위치들은 (a)에서와 똑같으며, 두 다이어그램의 팔들이 도는 동안 그 상대 위치들은 똑같이 유지될 것이다. 특히 (b)에서 ES는 SM보다 태양을 중심으로 빨리 회전하기 때문에 각 ESM이 (a)에서처럼 줄어들어야 한다는 점에 주의하라.

이제 그림 38a에서 팔을 돌리는 기어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은 채 전체 기계 장치를 들어 올린 후, 전과 똑같이 팔이 돌도록 유지하면서 태양만 전에 지구가 있던 중심 위치에 고정시켜 다시 내려놓는 상상을 해 보자. 이는 그림 38b에 그려진 상황이다. 팔들은 전과 똑같은 길이를 가지고 있고, 똑같은 메커니즘으로 똑같은 속도로 움직이며, 따라서 그들은 매순간 똑같은 상대 위치를 유지한다. 그림 38a의 다이어그램 속 지구, 태양, 화성의 모든 기하학적 공간 관계는 그림 38b의 배치 방식에서도 그대로 보존되며, 그 메커니즘의 고정점만 변했기 때문에 모든 상대 운동은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그림 38b의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는 운동은 코페르니쿠스식 운동이다. 즉, 두 번째 다이어그램에서 보이는 고정된 팔들은 지구와 화성을 모두 태양 중심의 원 궤도로 움직이게 하며, 이러한 궤도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묘사한 바로 그 기본 궤도들이다. 그림 38의 가설적 메커니즘과 똑같은 논증을 모든 행성을 포함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수행하면 그 동등성이 일반적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조화와 아무 관련이 없는 미세 주전원과 이심원을 생략할 경우, 티코 체계는 단순히 지구 대신 태양을 고정시키는 것만으로 코페르니쿠스 체계로 탈바꿈된다. 행성들의 상대 운동은 두 체계에서 동일하며, 따라서 조화도 보존된다. 수학적으로 두 체계의 운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차이는 별의 시차 운동이나, 그 운동은 시차를 관찰할 수 없을 때까지 항성 천구를 확장함으로써 시작부터 제거되었다.

티코 체계는 그 나름의 부조화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행성들은 중심에서 몹시 벗어나 있고, 우주의 기하학적 중심은 더 이상 대부분의 천체 운동의 중심이 아니며, 브라헤의 체계와 근사적으로라도 비슷한 행성 운동을 산출할 수 있는 어떠한 물리적 메커니즘도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티코 체계는 케플러와 같은 극소수의 신플라톤주의 천문학자들은 전향시키지 못했는데,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대단한 대칭성 때문에 그 체계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티코 체계는 당대의 기술적으로 숙련된 비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자들을 대부분 전향시켰다. 이는 그 체계가 광범위하게 인식된 딜레마로부터의 탈출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즉 티코 체계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가진 수학적 장점을 물리적, 우주론적, 신학적 문제 없이 유지해 주었다. 이 점은 티코 체계의 진정한 중요성이다. 그 체계는 거의 완벽한 절충안이었으며,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그 체계는 그 존재 자체가 그러한 절충안에 대한 절실한 요구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거의 모든 학식 있는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천문학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티코 체계는 『회전에 관하여』의 즉각적인 부산물로 보인다.

브라헤 자신은 이러한 평가를 부정했을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그의 체계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가해진 압력을 거의 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체계를 생각하기 전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모두 완전하게 알고 있었으며, 분명히 자신의 체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 그 체계의 즉각적인 성공은 그러한 요구가 얼마나 강하고 널리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지표다. 두 명의 다른 천문학자는 브라헤의 우선성을 공격하며 스스로 비슷한 절충적 해결책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회전에 관하여』의 역할과 그에 따른 티코 체계 탄생 무렵의 천문학계의 분위기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브라헤와 그의 체계는 앞 장을 마무리하면서 제시한 주요 일반화들 중 하나에 대한 최고의 사례를 제공한다. 즉, 『회전에 관하여』는 모든 천문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천문학의 상태를 변화시켰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브라헤의 비판들과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절충적 해법이 보여 준 바에 따르면, 브라헤는 그 시대 대부분의 천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운동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깨뜨릴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후계자들 중 브라헤는 엄청난 수의 보수적 인물들 중 하나다. 그러나 그의 연구로 인한 영향은 보수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그의 체계와 관측 모두는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아리스토텔레스ᐨ프톨레마이오스 우주의 중요한 측면들을 거부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들을 점차 코페르니쿠스 진영 쪽으로 몰아갔다. 우선, 브라헤의 체계는 천문학자들에게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의 수학적 문제들에 친숙해지도록 일조했는데, 이는 티코 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기하학적으로 동등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래에서 살펴볼 그의 혜성 관측에 의해 강화된 브라헤의 체계가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수정 천구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인데, 과거에 그 수정 천구는 행성들을 각자의 궤도를 따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 티코 체계에서는, 그림 37에 그려져 있듯이, 화성의 궤도가 태양의 궤도를 가로지른다. 따라서 화성과 태양은 둘 다 그들을 실어 나르는 천구에 박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천구는 언제나 서로의 천구를 관통하며 움직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태양의 천구는 수성과 금성의 천구도 관통한다. 수정 천구를 폐기했다고 그 사람이 꼭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천구를 사용했다. 그러나 천구는 여러 수정 버전 중 하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론 전통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성공을 가로막는 중요한 장벽으로 작용했다. 전통과의 어떤 단절도 코페르니쿠스주의자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고, 티코 체계는 전통적인 요소들이 있긴 했지만 중요한 단절이었다.

브라헤의 능숙한 관측은 그의 동시대인들을 새로운 우주론으로 이끄는 데 그의 체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관측들은 케플러의 연구에 핵심적인 기초를 제공했으며, 케플러에 의해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은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최초의 해법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개조하는 데 사용되기 전부터, 브라헤가 수집한 새로운 자료는 고전적인 우주론으로부터 또 하나의 중대한 결별이 필요함을 제기했다. 즉, 그 자료는 하늘의 불변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1572년 후반, 브라헤가 천문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할 무렵, 북극성을 사이에 두고 북두칠성 정반대편에 있는 카시오페이아자리에 새로운 천체가 나타났다. 처음 관측되었을 때 그 천체는 매우 밝아서, 금성이 가장 밝을 때만큼 분명하게 보였다. 그 후 18개월 동안 이 새로운 하늘의 방문객은 점차 희미해졌고, 결국 1574년 초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 새로운 방문객은 유럽 전역의 과학자와 비과학자들에게 관심을 받았다. 그 천체는 천문학자와 점성술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유일한 종류의 천상계 유령인 혜성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천체는 꼬리가 없었으며 항성 천구에 비추어 항상 같은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분명 그것은 어떤 징조로 여겨져, 점성술적 활동이 증가했으며, 천문학자들은 어디에서나 자신들의 관측과 저술을 하늘의 ‘새로운 별’에 쏟아 부었다.

‘별’이란 말은 새로운 현상의 천문학적, 우주론적 중요성에 대한 열쇠다. 만약 그 천체가 별이라면, 불변의 하늘은 변화를 겪은 것이 되고, 달 위 세계와 부패 가능한 지구의 기본적인 대비는 의문시될 수 있었다. 만약 그 천체가 별이라면, 지구는 더 쉽게 행성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었다. 왜냐하면 지상의 일들에만 부여되었던 일시적인 성격이 이제는 하늘에서도 똑같이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헤와 그의 동시대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정말로 그 방문객을 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림 39에 그려진 것과 같은 관측은 그 천체가 달 천구 아래, 심지어는 달 아래 세계 근처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 천체는 별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관측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 천체는 별들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즉 우주론적 격변의 또 다른 원인이 발견된 것이다.

그림 39. 별 아래에 있는 물체의 일주 시차. 만약 S가 지구와 항성 천구 사이에 있다면, S는 지상의 관찰자가 O와 O’에서 관찰할 때 별들을 배경으로 다른 위치에서 보여야 한다. 두 명의 관찰자가 필요하진 않다. 지구의 동향 회전(또는 그와 동등한 관측 대상과 항성 천구의 서향 회전)에 의해 관찰자는 6시간 후 O에서 O’로 옮겨지며, 회전에 의해 물체 S는 계속 자리를 이동해 24시간 후에는 별들 사이에서 자신의 시작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만약 S가 달만큼 가깝다면, 6시간 동안의 겉보기 시차는 거의 정확히 1°가 될 것이다. 지구로부터 더 멀리 있는 물체는 더 작은 시차를 보인다.
현대적인 기구를 이용하면, 위에서 설명한 방법은 달과 행성들까지의 거리를 결정하는 데 유용하지만, 맨눈 관측은 이를 적용할 만큼 충분히 정확하지 않다. 달의 큰 크기와 빠른 궤도 운동은 시차 효과를 감춰 버리고, 행성들은 너무 멀리 있다.

하늘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16세기의 발견은 달 위 세계의 변화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1572년의 새로운 별, 즉 신성으로부터만 얻은 것이었다면 상대적으로 효과가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브라헤의 자료를 거부하기로 한 사람들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 자료가 출판된 시점에 그 별은 사라졌고, 신성을 달 아래에 위치시키기에 충분한 시차를 관측한 다소 부주의한 관측가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다행히 달 위 세계의 변화에 대한 추가 증거는 1577년, 1580년, 1590년, 1593년, 1596년에 브라헤가 세심하게 관측한 혜성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공되었다. 이번에도 측정 가능한 시차는 전혀 관측되지 않았고, 따라서 혜성 역시 달 천구 너머에 놓여 있었으며, 즉 혜성은 과거 수정 천구로 채워져 있던 영역을 헤치며 다닌 것이다.

신성에 대한 관찰과 마찬가지로, 혜성에 대한 브라헤의 논의는 당대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7세기 초반 브라헤는 일군의 사람들로부터 자주 공격당했고, 때로는 코페르니쿠스를 향해 표출됐던 똑같은 격렬함까지 동반됐는데, 그들은 다른 자료에 의해 혜성과 신성이 달 아래 현상임이 증명되었고 따라서 하늘의 불가침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헤는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이 가진 기본적인 약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며, 더 중요하게는, 회의론자들에게 그의 결론을 계속해서 검사할 수 있는 논증 방식을 제공했다. 맨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밝은 혜성은 몇 년에 한 번씩 나타난다. 그들이 달 위에 있다는 것이 관측으로부터 도출되어 널리 논쟁되고 난 후, 혜성들이 제공한 하늘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증거는 무한정 무시되거나 왜곡될 수 없었다. 또다시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수혜를 받았다.

어찌 됐든, 코페르니쿠스 사후 남은 세기 동안, 천문학적 관측과 이론에서 새로운 모든 것들은 코페르니쿠스주의자에 의해 제공되었든 아니었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한 증거로 전환되었다. 말하자면, 그 이론은 자신의 생산성을 증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혜성과 신성의 경우에 그 증명은 매우 이상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혜성과 신성의 관측은 지구의 운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 관측은 코페르니쿠스주의자만큼이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에 의해서도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 관측은 티코 체계와 같은 『회전에 관하여』의 직접적인 부산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관측들이 『회전에 관하여』 또는 적어도 그것이 만들어진 분위기와 완전히 무관했다고 할 수는 없다. 혜성은 16세기 후반의 몇십 년 이전에도 빈번하게 보였다. 신성은 혜성보다는 맨눈으로 덜 자주 보이긴 했지만, 그 역시도 브라헤 시대 이전의 관찰자들에게 가끔 보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가 죽기 전에 하나가 더 나타났고, 1604년에는 세 번째 신성이 나타났다. 신성과 혜성이 달 위에 있음을 알아내는 데 브라헤의 정밀한 기구는 필요하지도 않았는데, 1°의 시차는 그러한 기구 없이도 측정될 수 있었고, 브라헤의 많은 동시대인들은 수 세기 전부터 알려져 있던 기구를 사용해 혜성이 달 위에 있다는 결론을 독자적으로 도출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 마에스틀린이 1572년의 신성이 달 너머에 있다는 것을 결정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실 하나뿐이었다. 요컨대, 브라헤와 그 동시대인들이 전통적인 우주론의 몰락과 코페르니쿠스주의의 부상을 가속화하는 데 사용된 관측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언제라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 현상과 관측 기구는 브라헤가 태어나기 2000년 전부터 있었지만, 그러한 관측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이루어졌더라도 널리 해석되지 않았던 것이다. 16세기 후반세기 동안 그 해묵은 현상은 의미와 중요성이 빠르게 변화했다. 그러한 변화는 과학적 사상의 새로운 분위기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어 보이며, 코페르니쿠스는 그것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다. 앞 장의 끝에서 얘기했듯이, 『회전에 관하여』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요하네스 케플러

브라헤의 연구는 1543년 이후 코페르니쿠스주의의 반대편조차도 적어도 가장 재능 있고 정직한 학자라면 천문학과 우주론의 주요한 개혁을 촉진하지 않을 여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코페르니쿠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코페르니쿠스는 그들의 분야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브라헤와 같은 반코페르니쿠스주의자의 연구는 그러한 변화의 정도를 보여 주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 사후 천문학에 생겨난 새로운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지표는 브라헤의 가장 유명한 동료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의 연구로부터 제공된다. 그는 한평생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 그는 처음에 튀빙겐 개신교대학 시절 마에스틀린 덕분에 코페르니쿠스 체계로 전향한 것으로 보이며, 그 체계에 대한 그의 신념은 학생 시절 이후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는 평생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특유의 거창한 어조로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에 부여한 역할의 적절성을 얘기했다. 1596년에 출판된 그의 첫 번째 중요 저작 『우주의 신비(Cosmographical Mystery)』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긴 옹호로 시작했는데, 그는 우리가 5장에서 살펴본 조화에 기초한 온갖 논증들을 강조하면서 그 밖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논증들도 많이 추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은 왜 화성의 주전원이 목성의 주전원보다, 목성의 주전원이 토성의 주전원보다 훨씬 컸는지를 설명해 주고, 태양 중심 천문학은 하늘의 모든 떠돌이들(행성들) 중에서 왜 태양과 달만 역행을 하지 않는지를 보여 준다는 것 등이다. 케플러의 논증들은 그 수가 더 많긴 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논증들과 똑같았다. 그러나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그 논증들을 상세한 다이어그램과 함께 길게 발전시켰다. 처음으로 새로운 천문학에 대한 수학적 논증의 완전한 힘이 발휘된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태양 중심의 행성 체계 관념을 구구절절 칭찬하긴 했지만, 코페르니쿠스가 개발한 특정한 수학 체계에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케플러의 글들은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진면목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과, 태양과 지구의 자리바꿈이라는 첫 도약 이후 체계의 세부 사항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그가 프톨레마이오스에 너무 가까이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케플러는 『회전에 관하여』 속의 어울리지 않는 낡은 유산들을 몹시 불편하게 느꼈으며,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지배를 받는 행성으로서 지구의 새로운 지위를 완전하게 파헤침으로써 그 유산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중심의 체계에서 지구를 평범한 행성으로 다루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회전에 관하여』 1권의 정성적인 스케치와 달리, 이후 권들에서 개발한 행성 체계에 대한 수학적 설명은 지구에 몇 가지 특별한 기능을 부여했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모든 행성 궤도면은 지구의 중심을 지나도록 만들어졌는데, 코페르니쿠스는 모든 궤도면이 지구 궤도의 중심을 지나도록 그림으로써 앞선 지구의 기능을 새로운 형태로 보존했다. 케플러는 태양이 행성들을 지배하고 지구는 특별한 지위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궤도면들이 태양을 가로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이렇게 재설계함으로써, 그는 행성들의 황도 남북 편차를 설명하는 데서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처음으로 중대한 진보를 이루었다. 케플러는 엄격한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적용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체계를 개선했다.

행성들의 동등한 지위에 대한 비슷한 주장 덕분에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을 꼬이게 만들었던 여러 사이비 문제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는 수성과 금성의 이심 폭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그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체계에 원들을 추가했다. 케플러는 그 겉보기 변화의 원인이 코페르니쿠스가 이심 폭을 정의할 때 범한 비일관성 때문일 뿐이라는 것을 보였다. 『회전에 관하여』에서 지구 궤도의 이심 폭은 태양으로부터 측정된 반면(그것은 그림 34a에서 SOE의 길이다) 다른 모든 궤도의 이심률은 지구 궤도의 중심으로부터 측정되었다(화성의 이심 폭은 그림 34b에서 OEOM이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모든 행성의 이심 폭이 똑같은 방식으로 태양으로부터 계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체계에 새로운 방법이 결합되자, 몇몇 이심 폭의 겉보기 변화들은 사라졌고, 계산에 필요했던 상당수의 원들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각각의 사례들은 지나치게 프톨레마이오스적이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수학적 기법들을 그의 태양 중심적인 우주 기획에 어울리도록 조정하려는 케플러의 고군분투를 보여 주며, 케플러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기 위한 코페르니쿠스의 복잡한 체계를 지극히 단순하고 정확한 기법으로 변모시킴으로써 마침내 행성들의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발견들은 화성의 운동을 연구하는 도중에 이루어졌는데, 이 행성의 심한 이심 궤도와 지구와의 가까운 거리로 인해 발생하는 불규칙성은 언제나 재능 있는 수리 천문학자들의 도전 과제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것의 운동을 다른 행성들만큼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었고,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능가하지 못했다. 브라헤는 특별히 그 목적만을 위한 장기간의 관측에 착수하며 새로운 해법을 시도했지만,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면서 문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브라헤의 생애 마지막 수 년 동안 브라헤와 함께 작업하면서 새로운 관측들을 물려받은 케플러는 브라헤 사후에 스스로 그 문제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것은 케플러가 거의 10년 동안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두 궤도, 즉 화성의 궤도와 화성을 관측하는 지구의 궤도를 계산해 내야 했다. 계속해서 케플러는 두 궤도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 원들의 조합을 바꾸고 또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여러 체계들이 계속 시도되었다가 폐기되었다. 그 체계들이 브라헤의 훌륭한 관측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간에 시도된 모든 해법은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보다 우수했으며, 일부는 각도 8' 이내의 오차밖에 나지 않았는데, 이는 고대 관측의 허용 범위 안에 충분히 들어가는 오차였다. 케플러가 폐기한 대부분의 체계는 이전의 모든 수리 천문학자들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브라헤 이전에 살았으며, 브라헤의 자료는 각도 4' 이내로 정확했다. 케플러는 신이 우리에게 티코 브라헤라는 최고의 성실한 관측가를 주었기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선물을 진정한 천체 운동을 찾아내는 데 사용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기나긴 일련의 실패한 시도들로 인해 케플러는 합성된 원에 기초한 어떠한 체계도 이 문제를 풀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틀림없이 모종의 다른 기하학적 도형이 열쇠를 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다양한 종류의 계란 모양을 시도했지만, 어떤 것도 그의 잠정적인 이론과 관찰 사이의 불일치를 제거하지 못했다. 그때 우연히 그는 그 불일치 자체가 익숙한 수학적 형태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규칙성을 조사함으로써 그는 만약 행성이 그가 정한 단순한 법칙을 따라 변화하는 속도로 타원 궤도를 돈다면 이론과 관찰이 화해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1609년 프라하에서 처음 출판된 『화성의 운동에 관하여(On the Motion of Mars)』에서 케플러가 발표한 결과다. 아폴로니오스와 히파르코스 때부터 사용된 그 어떤 기법보다도 단순한 수학적 기법은 과거의 그 어떠한 예측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예측을 산출했다. 행성들의 문제는 결국 해결되었고,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에서 해결되었다.

그림 40. 케플러의 제1, 2법칙. 다이어그램 (a)와 (b)는 타원을 정의하며, 케플러의 제1법칙을 따르는 모든 행성은 이 기하학적 곡선을 따라 돌아야 한다. (a)에서 타원은 평면이 원뿔을 자를 때 만들어지는 폐곡선으로 그려져 있다. 그 평면이 원뿔의 축과 수직일 경우, 그 교선은 타원의 특수한 경우인 원이 된다. 평면이 기울수록, 교차에 의해 만들어지는 곡선은 더 전형적인 타원의 모습으로 길쭉해진다.
타원에 대한 좀 더 현대적이고 유용한 정의는 다이어그램 (b)에서 주어진다. 만약 느슨한 줄의 양끝이 평면상의 두 점 F1과 F2에 묶여 있고, 연필 P를 느슨한 줄 안에 넣은 후 줄이 항상 팽팽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움직인다면, 연필의 점은 타원을 만들어낼 것이다. 줄의 길이를 변화시키거나 초점 F1과 F2 사이를 좁히거나 벌리면 다이어그램 (a)에서 평면의 기울기를 바꿀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타원의 모양이 바뀌게 된다. 대부분의 행성 궤도는 거의 원형에 가까우며, 그 타원의 두 초점은 서로 매우 가까이에 있다.
다이어그램 (c)는 케플러의 궤도 속도를 관장하는 제2법칙을 보여 준다. 태양은 제1법칙에 따라 타원의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해 있으며, 그 중심과 직선으로 연결된 여러 행성 위치 P와 P'는 세 개의 각 빗금 친 부채꼴 SPP'가 같은 면적을 가지도록 그려져 있다. 제2법칙에 따르면, 행성은 동일한 시간 동안 면적이 같은 각 부채꼴의 호 PP'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태양과 가까이 있을 때 행성은 상대적으로 빨리 돌아야 하는데, 그래야만 짧은 선 SP가 단위 시간당 훑는 면적이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멀어져 더 느리게 움직일 때 긴 선 SP가 훑는 면적과 똑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성들의 문제에 대한 케플러(와 우리)의 최종 해결책을 구성하는 두 법칙은 그림 40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행성은 단순한 타원 궤도로 돌며, 태양은 각 타원 궤도의 두 초점 중 하나를 차지한다. 이는 케플러의 제1법칙이다. 그의 제2법칙은 제1법칙을 구현하는 묘사를 완성하면 바로 뒤따라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각 행성의 궤도 속도는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이 동일한 시간 간격마다 타원의 동일한 면적을 지나가도록 변한다. 타원이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공통된 기본 원 궤도를 대체하고, 동일 면적 법칙[이하 면적 법칙]이 중심 또는 그 근처의 점을 기준으로 한 등속 운동의 법칙을 대체하고 나면, 이심, 주전원, 이퀀트를 비롯한 다른 별도의 장치들이 모두 필요 없어진다. 사상 처음으로 합성되지 않은 단일한 기하학적 곡선과 단일한 속도 법칙만으로 행성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예측은 사상 처음으로 관측만큼 정확해졌다.

따라서 현대 과학이 물려받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체계는 케플러와 코페르니쿠스의 공동 작품이다. 타원 여섯 개로 이루어진 케플러의 체계는 태양 중심 천문학을 작동하게 해 준 동시에, 코페르니쿠스의 혁신에 내포되어 있던 경제성과 생산성을 드러내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그것의 현대적 형태인 케플러 체계로 이행하는 데 무엇이 필요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케플러의 연구를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은 이미 명백하다. 그는 확신에 찬 코페르니쿠스주의자여야 했다. 즉, 그는 지구를 평범한 행성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더 적합한 궤도에 대한 탐색을 시작해서 모든 행성의 궤도면이 태양의 중심을 통과하도록 만들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또한 그는 브라헤의 자료가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한 유럽의 선배들이 사용한 자료들은 오류로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궤도들의 집합으로는 어떻게 해도 설명될 수 없었으며, 설사 오류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자료들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브라헤의 관측보다 덜 정확한 관측들은 케플러 자신도 보였듯이 고전적인 합성된 원들의 체계로도 설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케플러가 그의 유명한 법칙에 도달한 과정은 그가 정확한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는 점과 행성 지구를 이미 믿고 있었다는 점 외에 다른 것에도 의존한다. 케플러는 열렬한 신플라톤주의자였다. 그는 수학적으로 단순한 법칙이 모든 자연 현상의 기초를 이루며 태양이 모든 천체 운동의 물리적 원인이라고 믿었다. 천문학에 그가 남긴 기여들은, 그것이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이든 가장 짧게 지속된 것이든, 모두 이러한 그의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신플라톤주의 신념의 두 측면을 잘 보여 준다.

그림 41. 케플러의 초기 속도 법칙. 다이어그램 (a)는 태양에서 방출되는 아니마 모트릭스의 전형적인 광선들을 나타낸 그림으로, 케플러가 그 법칙을 도출하는 데 사용한 물리적 이론을 보여 준다. 다이어그램 (b)는 그 법칙이 어떻게 이심원 위를 돌고 있는 행성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4장 끝부분에 인용한 한 구절에서, 케플러는 태양을 “제1원동력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위엄과 힘을 통해 … [행성들을 그들의 궤도로 돌려주기에] 알맞아 보이고 신 자신의 보금자리가 될 만해 보이는” 천체로 묘사했다. 이러한 확신은 위에서 살펴본 모종의 내적 부조화와 더불어 그가 티코 체계를 거부한 이유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연구에서, 특히 제1법칙이 의존하고 있는 제2법칙의 도출 과정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기원의 측면에서 제2법칙은 대강의 관찰만 빼면 관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태양에서 나오는 원동력, 즉 아니마 모트릭스(anima motrix)의 광선들이 행성들을 그들의 궤도를 따라 밀어 준다는 케플러의 물리적 직관에서 나온다. 케플러의 믿음에 따르면, 이 광선들은 모든 행성이 공전하는 타원의 평면에만 제한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행성에 부딪치는 광선의 수와 그에 따라 행성을 태양 주위로 밀어 주는 힘은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증가할수록 감소할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거리가 두 배가 되면 행성에 도달하는 아니마 모트릭스의 수는 절반이 되고(그림 41a), 그에 따라 행성의 궤도 속도는 태양과 원래의 거리에 있을 때의 궤도 속도의 절반이 될 것이다. 이심원이나 모종의 다른 폐곡선을 따라 태양 S 주위를 도는 행성 P(그림 41b)는 SP에 반비례하는 속도로 돌아야 한다. 그 속도는 행성이 태양과 가장 가까운 근일점 p에 있을 때 최대가 될 것이고,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가장 먼 원지점 a에 있을 때 최소가 될 것이다. 행성이 궤도를 도는 동안, 그 속도는 그 양극단 사이에서 계속 변화할 것이다.

타원 궤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거나 면적 법칙을 익숙한 현대적인 형태로 정식화하기 한참 전에, 케플러는 고대의 등속 원운동 법칙과 이퀀트에 대한 등속 운동도 허용한 프톨레마이오스적 버전 모두를 대체하기 위해 이 역거리(inverse-distance) 속도 법칙을 생각해 냈다. 이 초창기의 속도 법칙은 태양의 지배를 받는 우주를 통제하는 힘에 대한 이상한 직관−그의 후계자들은 곧바로 폐기한 직관−에 의해 거의 “마술처럼 뚝딱 만들어진” 것이었다. 더구나 이 초창기 형태는 완전히 옳은 것도 아니었다. 나중의 면적 법칙, 즉 케플러의 소위 제2법칙은 역거리 법칙과 완전히 동등한 것이 아니며, 면적 법칙은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제공한다. 그러나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었을 때, 두 형태의 속도 법칙은 거의 똑같은 예측을 도출한다. 케플러는 둘이 원리적으로 동등하다고 착각했고 평생 동안 둘을 호환해서 사용했다. 그것의 공상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초기 신플라톤주의적 속도 법칙은 케플러의 가장 유익한 연구에서 근본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속도 법칙을 도출할 때와 달리, 타원 궤도에 대한 케플러의 연구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천문 관측에 대한 엄청나게 고통스럽고도 철저한 연구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었다. 시도된 궤도들은 거듭 폐기되어야 했는데, 힘든 계산 결과가 브라헤의 자료와 딱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궤도를 객관적 자료에 맞추기 위한 케플러의 세심한 노력은 종종 최고의 과학적 방법의 초기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타원 궤도의 법칙, 즉 케플러의 제1법칙조차도 관찰과 계산만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었다. (케플러의 연구 이후의 궤도처럼) 정확히 재진입 가능한 행성 궤도를 가정하지 않는 한, 맨눈의 자료로부터 궤도의 모양을 계산하는 데는 속도 법칙이 필요하다. 브라헤의 관측을 분석할 때, 케플러는 그의 초창기 신플라톤주의적 추측을 계속 사용했다.

궤도와 속도 법칙과 관측 사이의 관계는 천문학 이론에 대한 이전의 논의에서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고대와 중세의 천문학자들이 이미 단순한 속도 법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케플러 이전에 천문학자들은 행성을 돌려 주는 각각의 합성된 원들이 중심 또는 그 근처에 있는 점에 대해 균일하게 회전한다고 가정했다. 그런 종류의 가정 없이는 그들은 궤도를 관측과 맞추는 정교화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속도 법칙 없이는 궤도가 정해지더라도 행성이 특정 시점에 별들 사이의 어디에서 보일지 거의 혹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속도 법칙도 궤도도 독립적으로는 관측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고, 관측에 비추어 시험될 수도 없다. 따라서 케플러가 고대의 등속 운동 법칙을 거부했을 때, 그는 그것을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행성에 대한 계산을 모조리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자기 자신의 법칙을 개발한 후에야 (아마도 그 때문에) 고대의 법칙을 거부했다. 그의 신플라톤주의적 직관이 그에게 알려 준 법칙은 태양의 지배를 받는 우주에서 천체의 운동을 통제하는 데 고대의 법칙보다 더 잘 어울렸다.

케플러의 역거리 법칙 도출은 수학적 조화에 대한 그의 믿음뿐 아니라 태양의 인과적 역할에 대한 신념도 보여 준다. 아니마 모트릭스의 관념을 고안한 케플러는 그것이 대강의 관찰과 어울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행성들이 근일점에서 가장 빨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역거리 법칙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자료는 거의 가진 게 없었고, 정량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수적 조화에 대한 케플러의 믿음과 더불어 이러한 믿음이 그의 연구에서 수행한 역할은 그가 현대 천문학에 물려준 법칙들 중 다른 하나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케플러의 소위 제3법칙으로, 1619년 『세계의 조화(Harmonies of the World)』를 통해 발표되었다.

제3법칙은 새로운 종류의 천문학 법칙이었다. 제1법칙과 제2법칙은 그에 상응하는 고대와 중세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궤도에 있는 개별 행성들의 운동만을 통제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3법칙은 서로 다른 궤도에 있는 행성들의 속도 사이의 관계를 밝혀냈다. 그 법칙에 따르면, 만약 두 행성이 각자 궤도를 한 번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이 T1과 T2이고, 또 각 행성과 태양 사이의 평균 거리가 R1과 R2라면, 공전 주기의 제곱의 비는 태양과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의 비와 같다. 즉, (T1/T2)2 = (R1/R2)3이다. 이 법칙은 대단히 흥미로운 법칙으로, 이전까지는 한 번도 인식된 적이 없었던 행성 체계의 규칙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케플러의 시대에는 그게 전부였다. 제3법칙만으로는 행성 이론을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천문학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전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어떠한 값도 계산해 내지 못했다. 각 행성 궤도에 결부된 크기와 주기는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유용성이 거의 없었다 하더라도 제3법칙은 그의 경력을 통틀어 케플러를 가장 매혹시킨 바로 그런 종류의 법칙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이 단순한 수학적 규칙성을 예증하며, 그러한 수학적 규칙성을 찾는 것이 과학자의 사명이라고 믿은 수학적 신플라톤주의자 또는 신피타고라스주의자였다. 케플러를 비롯해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단순한 수학적 규칙성은 그 자체로 설명을 제공했다. 그에게 제3법칙은 그 자체로 자연히 행성 궤도들이 왜 지금과 같은 특정한 방식으로 신에 의해 배치되었는지를 설명해 주었으며, 수학적 조화로부터 끌어낸 그러한 종류의 설명은 케플러가 하늘에서 계속해서 추구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와 같은 종류의 다른 법칙들을 다수 제안했는데, 그 법칙들은 이후에 폐기되었다. 조화롭긴 했지만 의미가 있다고 하기엔 관찰과 별로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케플러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수학적 규칙성들을 다수 발견하고 증명했다고 생각했으며, 그 법칙들은 그가 가장 좋아한 천문학 법칙들이었다.

그림 42. 케플러의 다섯 정다면체 사용법. 다이어그램 (a)는 정다면체 자체를 보여 준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정육면체, 정사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정팔면체가 배열되어 있다. 이 순서는 케플러가 행성 천구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순서다. 다이어그램 (b)는 정다면체가 사용되는 방식을 보여 준다. 토성 천구는 정육면체에 외접하고, 목성 천구는 그에 내접한다. 정사면체는 목성 천구에 내접해 있고,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케플러의 첫 주요 저작인 『우주의 신비』에서 그는 행성의 수와 그 궤도의 크기 모두를 행성 천구와 다섯 정다면체 혹은 ‘우주’ 다면체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다면체란 그림 42a에 그려진 정다면체들로, 각 다면체의 모든 면이 똑같은 정다각형으로만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대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러한 다면체는 정육면체, 정사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정팔면체 다섯 개밖에 없다. 케플러는 만약 토성 천구가 외접한 정육면체에 목성 천구가 내접하고, 목성 천구 바로 안쪽에 정사면체가 놓이는 동시에 화성 천구가 그에 내접하고, 나머지 세 정다면체와 세 행성 천구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 놓인다면, 그 모든 행성 천구들의 상대 크기는 코페르니쿠스가 측정을 통해 계산해 낸 바로 그 값들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러한 구성은 그림 42b에 그려져 있다. 만약 이것이 적용된다면 세계엔 다섯 정다면체에 들어맞는 여섯 행성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것이 적용될 경우 행성 천구의 허용 가능한 상대크기도 결정된다. 케플러의 말에 따르면, 이는 왜 세계에는 여섯 행성만 존재하는지와 왜 그들이 그렇게 배열되어 있는지에 대한 답이 된다. 신의 본성은 수학적이다.

케플러의 정다면체 사용은 단지 젊은 시절의 일탈이 아니었으며, 만약 그렇다면 그는 전혀 자라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똑같은 법칙의 수정된 형태는 20년 후, 제3법칙을 발표했던 책이기도 한 『세계의 조화』에도 나온다. 또한 그 책에서 케플러는 행성의 최대 궤도 속도와 최소 궤도 속도를 음계의 협화음정과 결부시키는 새로운 부류의 신플라톤적 규칙성을 정교하게 만들어 내기도 했다. 오늘날 이러한 수적 조화에 대한 강한 신념은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중 하나는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그러한 조화를 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여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케플러가 조화에 대한 신념을 사용한 방식은 순진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신념 자체는 당대 최고의 몇몇 연구를 추동했던 신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분명히, 현재 폐기된 케플러의 ‘법칙들’에서 보이는 과학적 태도는 현재 유지되고 있는 세 가지 법칙의 발견을 이끈 그의 태도와 구별할 수 없다. 그 ‘법칙들’과 세 가지 법칙 모두는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적 전통과 단절하고 지구가 정말로 움직인다는 것을 납득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수학적 조화의 존재에 대한 똑같은 신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케플러의 연구에서는, 그리고 그중 특히 현재 폐기된 부분에서는, 신이 자연에 숨겨 둔 수학적 조화를 발견하고자 했던 신플라톤적 열망이 더욱 순수하고 독특한 형태로 나타났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는 행성들의 문제를 해결했다. 결국 그의 버전에 따른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은 특히 1626년 케플러가 『루돌프 표(Rudolphine Tables)』를 발표한 후 모든 천문학자를 코페르니쿠스주의자로 전향시켰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루돌프 표』는 그의 새 이론으로부터 도출된 천문표로, 그 전까지 사용된 그 어떤 천문표와 비교해도 확실히 우월했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천문학적 요소에 관한 이야기는 케플러의 연구가 점차 수용됨에 따라 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 연구는 천문학 내에서 혁명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의 천문학적 요소는 거기서 끝이 나지 않는다. 1609년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보았으며, 그 결과 천문학은 고대 이래 접한 적이 없었던 질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자료를 얻게 되었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하늘이 천문학자에게 제시했던 수수께끼의 조건을 변화시켰으며, 그 덕분에 수수께끼는 훨씬 풀기 쉬워졌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손에서 망원경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증거를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수께끼에 대한 갈릴레오의 새로운 접근은 그 수수께끼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된 뒤에야 나타났다. 만약 그것이 더 일찍 알려졌다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이야기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는 갈릴레오의 천문학 연구는 승리가 확실히 눈앞에 다가온 이후에 수행되면서 주로 마무리 작업에 기여했다.

1609년에 망원경은, 정확히 얼마나 새로웠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새로운 기구였다. 갈릴레오는 어떤 네덜란드 렌즈공이 렌즈 두 개를 결합해 멀리 있는 물체를 확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스스로 다양한 조합을 시도하다가 저배율 망원경을 재빨리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전에는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어 보이는 행동을 했다. 그는 망원경을 하늘로 돌렸고, 그 결과는 정말 놀라웠다. 모든 관찰은 하늘에서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것들을 밝혀냈다. 익숙한 천체들인 태양, 달, 행성들을 향해 망원경을 돌렸을 때에도, 이 오래된 친구들에 관한 놀랄 만한 새로운 측면들이 발견되었다. 망원경을 알기 몇 년 전부터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던 갈릴레오는 어떻게 해서든 각각의 새로운 발견을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옹호 논변으로 둔갑시켰다.

망원경을 이용한 첫 발견은 겨우 2년 뒤에 던의 불만을 산 창공의 새로운 세계였다. 망원경을 돌릴 때마다 갈릴레오는 새로운 별들을 발견했다. 가장 빽빽한 별자리들도 거주민의 수가 증가했다. 은하수는 맨눈으로는 그저 하늘의 은은한 빛으로만 보이지만(이는 보통 혜성처럼 달 아래의 현상으로 설명되거나 태양과 달에서 퍼져 나온 빛의 반사로 설명되었다), 이제는 거대한 무리의 별들로 드러났다. 그 별들은 너무 희미하고 서로 너무 가까이 있어서 맨눈으로는 분간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하늘은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거주자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일부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이 가정했던 우주의 막대한(아마도 무한한) 확장은 갑자기 덜 불합리해 보였다. 우주의 무한한 크기와 무한한 거주민이 신의 무한한 생식력을 보여 준다고 한 브루노의 신비스런 상상은 거의 다 감각 자료로 변환되었다.

별에 대한 관찰은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이 직면했던 더 기술적인 어려움도 해결해 주었다. 맨눈 관찰자들은 별의 각지름을 추정하고 지구와 항성 천구 사이의 거리에 대한 수용된 수치의 도움으로 그 각지름을 실제 지름에 대한 추정으로 변환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에서 이러한 추정치들은 불합리한 결과를 제공하지 않았다. 별들은 태양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브라헤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공격할 때 거듭 강조했듯이, 별의 시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가 크다면, 별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야 한다. 브라헤의 계산에 따르면, 하늘의 더 밝은 별들은 지구의 전체 궤도를 덮고도 남을 정도로 커야 했으며, 그가 이를 믿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았을 때, 브라헤의 문제는 겉보기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별들은 그가 추정한 만큼 클 필요가 없었다. 망원경은 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수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지만, 그들의 겉보기 크기를 증가시키진 않았다. 태양과 달과 행성들은 모두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확대되었지만, 이와 달리 별들은 이전의 크기를 유지했다. 별들의 각지름이 맨눈 관찰에 의해 엄청나게 과대평가되었음이 분명해졌다. 오늘날 그 오류는 대기 난류의 효과로 설명되는데, 그로 인해 별의 상은 흐려지는 동시에 정상 영역보다 더 넓게 번지게 된다. 똑같은 효과는 별들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준다. 이 효과는 더 많은 수의 광선을 눈에 모아 주는 망원경에 의해 상당히 억제된다.

그러나 그 별들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유일한 증거도, 최선의 증거도 아니었다. 망원경을 달로 돌렸을 때, 갈릴레오는 그 표면이 크고 작은 구덩이와 계곡과 산들로 덮여 있음을 발견했다. 태양, 달, 지구의 상대 위치가 알려진 시점에 구덩이와 산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길이를 잼으로써, 그는 구덩이의 깊이와 산의 높이를 추정하고 달의 지형에 대한 삼차원 묘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가 판단하기를, 달의 지형은 지구의 지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혜성의 시차 관측과 마찬가지로, 달에 대한 망원경 관찰은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에 의심을 제기했고, 이러한 의심은 태양에 대한 망원경 관찰에 의해서도 거의 즉시 강화되었다. 그 관찰 역시 결함들, 즉 표면에서 보였다 사라지는 흑점들을 보여 주었다. 흑점의 존재 그 자체는 천상계의 완벽함과 충돌했고, 그들의 출몰은 하늘의 불변성과 충돌했으며,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태양 표면을 가로지르는 그 점들의 운동이 태양이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계속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지구의 자전에 대한 가시적인 모델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림 43. 목성과 그 위성에 대해 며칠 간격으로 연이어 이루어진 세 번의 관찰. 작은 위성 네 개의 끊임없는 재배치는 그 위성들이 더 큰 행성 주위로 끊임없이 돌고 있다고 가정하면 가장 쉽게 설명된다.

그러나 이는 최악이 아니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목성을 보면서 하늘에 그와 매우 가까이에 있는 네 개의 작은 빛의 점들을 발견했다. 그 후로 밤마다 계속 이어진 관찰은 그들이 목성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매우 빠르게 돌고 있다고 가정하면 가장 단순하게 설명될 만한 방식으로 상대적 위치가 끊임없이 재배치되는 것을 보여 주었다(그림 43). 이 천체들은 목성의 주요한 네 개의 달이었으며, 그 발견은 17세기의 상상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분명 ‘창공’뿐 아니라 ‘행성’에도 새로운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더 중요하게도, 이 새로운 세계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가설을 가정하든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가정하든 우주의 중심에 대한 대략 원형의 궤도를 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그들은 행성의 주위를 돌았으며,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에서 지구의 달이 보이는 행동과 똑같았다. 새로운 천문학뿐 아니라 옛 천문학도 행성의 지배를 받는 위성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아마도 무엇보다 중대한 것은, 목성에 대한 관찰이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 자체의 가시적인 모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곳 행성 공간에는 자기 자신의 ‘행성들’로 둘러싸인 천체가 있었으며, 이는 기존에 알려진 행성들이 태양을 둘러싼 것과 마찬가지였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옹호 논변은 망원경 덕분에 거의 천체 그 자체만큼이나 빠르게 증식되었다.

그림 44. (a)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b)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 금성의 위상과 (c) 저배율 망원경으로 관찰된 금성의 위상. (a)에서 지구상의 관찰자는 빛나는 표면의 얇은 초승달 모양 외에는 절대로 볼 수 없다. (b)에서 관찰자는 금성이 태양 뒤를 지나기 직전과 직후에 빛나는 금성의 거의 온전한 표면을 볼 수 있다. 금성의 이러한 거의 원형의 실루엣은 금성이 처음 저녁별로 보일 때 저배율 망원경을 가지고 관찰하면 다이어그램 (c)의 왼쪽 그림처럼 그려진다. 그 오른쪽에 그려진 연이은 관찰들은 금성이 궤도 운동을 통해 지구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금성이 어떻게 이지러지는지와 동시에 어떻게 크기가 커지는지를 보여 준다.

다른 많은 논변들도 망원경 관찰로부터 도출되었으나,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끌 만큼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에 대해 충분히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것은 금성에 대한 관찰뿐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회전에 관하여』 제1권 10장에 금성의 모양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면 금성의 궤도 형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적었다. 만약 금성이 지구 중심의 주원 위에서 도는 주전원에 박혀 있고, 만약 그 주전원의 중심이 항상 태양과 나란히 있다면, 그림 44a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구상의 관찰자는 그 행성의 초승달 모양 가장자리 외에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금성의 궤도가 그림 44b에서처럼 태양을 둘러싸고 있다면, 지구에 있는 관찰자는 달처럼 거의 완전한 위상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삭(new)’과 ‘만(full)’에 가까운 위상들만이 보이지 않을 텐데, 이는 그 시점의 금성이 태양에 너무 가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성의 위상은 맨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으며, 맨눈으로는 행성이 무형의 점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망원경은 그 형태를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행성을 확대해 주며, 그림 44c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 형태는 금성이 태양 중심의 궤도를 따라 돈다는 강한 증거를 제공한다.[13]

갈릴레오의 망원경이 제공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증거는 강력하지만, 이상한 점도 있다. 아마도 마지막 증거를 제외하면 위에서 살펴본 관찰 중 어떤 것도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핵심 주장들, 즉 태양의 중심적 위치 또는 그 주위를 도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프톨레마이오스나 티코의 우주도 새로 발견된 별들을 위한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둘 다 하늘의 불완전성이나 천체에 들러붙은 위성을 허용하도록 수정할 수 있다. 또한 적어도 티코 체계는 금성의 관찰된 위상과 거리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체계만큼 좋은 설명을 제공한다. 따라서 망원경은 코페르니쿠스의 개념 체계의 타당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망원경은 전투를 위한 정말 엄청나게 효과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그것은 증명이 아니라 선전이었다.

1609년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주된 심리적 무기는 그것의 보수성이었다. 그것을 고수한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을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망원경 관찰 결과들에 맞추기 위해 대규모의 수정이 필요했다면, 코페르니쿠스주의로 완전히 전향하는 일의 어려움은 새롭게 요구되는 버전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적응하는 일의 어려움과 거의 비슷해질 것이며, 그 관찰들을 심각하게 고려한 사람들은 정말로 완전한 전향을 했다. 이러한 새로운 전향에는 또 다른 고려도 작용했을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또는 적어도 우주론적으로 더 급진적인 이들은−망원경이 밝혀낸 새로운 종류의 우주를 예견했다. 그들은 세부 사항을, 즉 금성의 위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더 중요하게, 그들은 적어도 모호하게라도 하늘의 불완전함과 엄청나게 늘어난 [천상의] 주민들을 예견했다. 우주에 대한 그들의 비전은 망원경이 드러낸 우주와 뚜렷한 유사성을 보였다.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아”라는 말보다 더 곤란한, 혹은 더 효과적인 말은 별로 없다.

천문학자들에게, 망원경에 의한 증거는 아마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훨씬 느리긴 했겠지만, 케플러의 법칙들과 『루돌프 표』는 똑같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망원경이 엄청나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대상은 천문학자들이 아니다. 망원경의 첫 번째 고유한 역할은 코페르니쿠스주의 관점에 대해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는 비수학적인 증빙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609년 이후 천문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망원경을 통해 우주가 상식에 의거한 소박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17세기 동안 그들은 그것을 정말로 보았다. 망원경은 대중적인 장난감이 되었다. 전에는 천문학이나 그 어떤 과학에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이 새로운 기구를 사거나 빌려서 맑은 밤하늘을 열심히 살폈다. 아마추어 관찰자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모방의 대상이자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와 함께 새로운 장르가 등장했다. 대중과학과 과학소설의 시작은 모두 17세기에 나타났고, 그 초창기에 망원경과 그것을 이용한 발견들은 가장 유명한 주제였다. 이것은 갈릴레오의 천문학 연구에서 최고로 중요한 점이다. 그것은 천문학을 대중화했고, 그것이 대중화시킨 천문학은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쇠퇴

케플러의 타원과 갈릴레오의 망원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반대를 곧바로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이 장을 시작할 때 언급한 것처럼, 가장 격렬하고 시끄러운 반대는 케플러와 갈릴레오 둘 다 자신들의 주요한 천문학적 발견을 이룬 후에야 일어났다. 65년 전 코페르니쿠스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케플러의 연구는 훈련받은 천문학자만 이해할 수 있었고, 그가 이룬 그 엄청난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천문학자들에게 그의 비원형 궤도와 행성의 속도를 계산하는 새로운 기법은 곧장 받아들이기엔 너무 이상하고 못마땅했다. 세기 중반까지도 다수의 저명한 유럽 천문학자들은 케플러의 정확성이 수학적으로 덜 급진적인 체계로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주전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노력했고, 다른 사람은 타원에 동의했지만 행성의 속도가 타원의 빈 초점에 대해 균일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른 형태의 궤도를 시도했다. 이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세기가 지속될수록 그러한 시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케플러의 법칙들이 유럽 최고의 현역 천문학자들 사이에서조차 행성의 계산을 위한 기초로 보편적으로 수용된 것은 17세기 마지막 몇십 년의 일이었다.

갈릴레오의 관찰은 처음에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받았다. 다만 그 저항은 다른 집단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망원경이 출현한 후로 코페르니쿠스주의는 더 이상 난해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주의는 더 이상 고도로 훈련된 수리 천문학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것은 더 불온해졌고, 누군가에게는 더 위험해졌다. 망원경을 통해 발견된 새로운 세계는 던이 가진 불만의 주된 원천이었다. 몇 해 후 망원경 관찰은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가톨릭의 공식적 반대를 위한 교회 시스템이 가동하는 데 필요한 동력을 일부 제공했다. 1610년 갈릴레오가 관찰을 발표한 후, 코페르니쿠스주의는 유용하지만 물리적 의미는 없는 단지 수학적 도구일 뿐이라며 묵살할 수가 없었다. 가장 낙관적인 사람조차도 지구의 운동 개념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사라질 일시적인 정신착란으로 계속 간주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망원경에 의한 발견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에 끊임없이 제기된 상당수의 반대 의견에 자연스러우면서도 적절한 초점을 제공했다. 그 발견들은 수학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현재 중대한 기로에 있는 진정한 우주론적 문제를 보여 주었다.

반대는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갈릴레오의 더 광적인 일부 반대자들은 아예 새로운 기구를 통해 보는 것도 거부했는데, 그들은 만약 인간이 지식을 얻는 데 그러한 기구를 사용하는 것을 신이 의도했다면, 신은 [애초에] 인간에게 망원경 같은 눈을 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꺼이 혹은 심지어 열광적으로 [망원경을] 보았고, 새로운 현상도 인정했지만, 새로운 물체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 자체에 의해 야기된 환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반대편 대부분은 더 합리적으로 행동했다. 벨라르미노처럼, 그들은 그 현상이 하늘에서 나타난 것임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갈릴레오의 주장을 증명한다는 점은 부정했다. 물론 이 점에서 그들은 정말로 옳았다. 망원경은 많은 주장을 했지만, 증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망원경의 관찰 결과에 대한 계속되는 반대는 17세기 동안 더욱 오래 지속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더욱 뿌리 깊은 반대의 전조를 보여 준다. 둘 모두는 같은 기원, 즉 오랜 세기 동안 일상의 실제적 삶과 정신적 삶의 토대가 되어 왔던 우주론의 파괴를 인정하기 꺼리는 잠재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케플러와 갈릴레오 이후 과학자들에게 경제성을 의미했던 개념적 재전환은 던과 밀턴처럼 주된 관심사가 다른 분야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대개 개념적 정합성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최우선적인 관심이 종교나 도덕이나 미학에 있었던 사람들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공격은 17세기 중반까지 거의 약해지지 않았다. 성서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지구의 운동에 대한 불합리성을 주장한 많은 주요 소책자들은 18세기 초 몇십 년까지도 계속 출현했다. 1873년이라는 늦은 시점에도, 미국 루터교에 속한 한 교사 신학대학의 전직 총장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과 후대의 유명 천문학자들을 성서적 우주론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저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신문은 가끔씩 지구의 유일성과 안정성을 주장하는 미치광이의 말을 보도해 준다. 옛 개념 체계는 절대 죽지 않는다!

그러나 옛 개념 체계는 정말로 사라졌고, [당시에는] 거의 알아차리기 어려웠겠지만 지구의 유일성과 안정성이라는 개념이 서서히 사라진 것은 분명히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갈릴레오가 죽은 1642년 이후 150년 사이에, 지구 중심의 우주에 대한 믿음은 온전한 정신의 필수적인 표식이었다가 처음에는 완강한 보수주의의 표식으로, 그다음에는 지나친 편협성의 표식으로, 마지막으로는 완전한 광신의 표식으로 점차 바뀌었다. 17세기 중반에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아닌 중요한 천문학자를 찾기 어려워지고, 세기 말에는 불가능해진다. 기초 천문학은 더 느리게 반응했지만, 세기 끝자락의 몇십 년 동안 많은 저명한 개신교 대학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천문학,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티코 천문학을 나란히 가르쳤고, 18세기 동안 뒤의 두 체계에 대한 강의는 점차 사라졌다. 대중의 우주론은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충격을 가장 천천히 감지했다. 18세기 대부분은 대중과 그 교사들에게 새로운 상식을 심어 주고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서구의 공통 자산으로 만드는 데 할애되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승리는 점진적인 과정이었으며, 그 속도는 사회적 지위, 직업적 소속, 종교적 믿음에 따라 엄청나게 달랐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예측 불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적어도 그 과정은 사상사학자에게 알려진 그 어떤 과정보다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갈릴레오 사후 150년 동안 수용된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우주도 아니었다. 그것의 새로운 구조가 대부분 천문학적 증거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그를 추종한 천문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으로부터 중대한 단절을 꾀하는 데 최초로 성공을 거두었고, 새로운 우주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그들의 작업이 어디를 향하는지 온전히 볼 수 없었다. 17세기 동안 다양한 과학적 경향과 우주론적 경향들은 그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우주론적 틀을 수정하고 완성하는 데 힘을 모았다. 18, 19, 20세기가 물려받은 코페르니쿠스주의는 17세기 뉴턴주의적 세계ᐨ기계 관념에 맞추어 재건설된 코페르니쿠스주의다.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이 17세기에 구상된 완전하고 정합적인 우주 속으로 통합되는 최종적인 역사적 과정은 마지막 장의 주제다. 다만 우리는 에필로그에 부합하도록 세부 사항은 줄이고 압축적으로만 다룰 것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단지 천문학적 사고방식에서만 일어난 혁명인 한, 그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는 과학과 우주론에서 일어난 더 큰 혁명에 대한 부분적인 스케치다. 이 혁명은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1. Francis R. Johnson, 『Astronomical Thought in Renaissance England』(Baltimore: Johns Hopkins Press, 1937), p. 207에서 인용. 나는 이 인용문을 비롯해 이 장의 많은 다른 인용문에서 철자와 구두점을 현대적으로 고쳤다.
  2. Ibid., pp. 188∼189. 이는 조슈아 실베스터(Joshua Sylvester)의 [영문] 번역(1605)이다.
  3. Dorothy Stimson, 『The Gradual Acceptance of the Copernican Theory of the Universe』(New York, 1917), pp. 46∼47에서 번역 및 인용. 원 출처는 Bodin, 『Universae Naturae Theatrum』(Frankfort, 1597).
  4. Andrew D. White,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New York: Appleton, 1896), I, 126에서 번역 및 인용. (옮긴이 주) 오언 깅거리치(Owen Gingerich)에 따르면, 루터의 이러한 언급은 안톤 라우터바흐라는 제자가 기록한 버전과 요하네스 아우리파버라는 제자가 기록한 버전이 있다. 그중 “바보”라는 표현이 포함된 버전은 아우리파버의 버전인데, 전문가들은 루터가 실제로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의심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우리파버는 실제로 그 말이 나온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언 깅거리치,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지식의숲, 2008), 215-216쪽.
  5. Ibid., pp. 126∼127. 원 출처는 Melanchthon, 『Initia Doctrinae Physicae』.
  6. Ibid., p. 127.(옮긴이 주) 에드워드 로젠은 이 구절이 칼뱅의 어떤 책에도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구절은 인용에 관한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한 19세기 성공회 사제 프레더릭 윌리엄 패러로부터 처음 나와 앤드류 화이트(Andrew D. White)의 1896년 저서 『기독교에서 과학과 신학의 전쟁의 역사(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 수록되어 이 책에까지 인용되었다. Edward Rosen, “Calvin's Attitude Toward Copernicus”,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21 (1960), 431-441. 이 연구에서 로젠은 칼뱅이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결코 들은 적이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떠한 견해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결론내렸지만, 다른 연구자인 오언 깅거리치는 칼뱅이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보았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하고 있다. 오언 깅거리치, 『아무도 읽지 않은 책』 (지식의숲, 2008), 217-218쪽.
  7. John Donne, <Ignatius, his Conclave>, in 『Complete Poetry and Selected Prose of John Donne』, ed. John Hayward (Bloomsbury: Nonesuch Press, 1929), p. 365.
  8. Ibid., p. 202.
  9. John Milton, 『Paradise Lost』, Book I, line 26.
  10. (옮긴이 주) 그레고리우스 13세의 달력 개혁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기초해 13세기에 만들어진 『알폰소 표』가 주로 사용됐으며, 특히 그레고리력에서 채택한 1년의 길이는 『알폰소 표』에서 계산한 값을 거의 정확히 따르고 있다. 달력 개혁에서 『프로이센 표』는 단지 비교 및 참고용으로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1. Nicole Oresme, 『Le livre du ciel et du monde』, in 『Mediaeval Studies』, IV, 276.
  12. James Brodrick, 『The Life and Work of Blessed Robert Francis Cardinal Bellarmine, S. J.』(London: Burns Oates and Washbourne, 1928), II, 359에서 번역 및 인용.
  13. (옮긴이 주) 그림 44c의 금성의 위상 변화 그림은 약간 수정될 필요가 있다. 북반구 중위도 지역에서 관측할 경우, 금성이 처음 저녁별로 보일 때부터 점점 지구에 가까이 다가옴에 따른 금성의 위상 변화는 아래의 그림 a와 같으며, 금성이 새벽별로 보이기 시작하여 점점 지구에서 멀어져감에 따른 금성의 위상 변화는 그림 b와 같다. 저녁별로 보이는 동안 금성은 오른쪽 아래가 불룩해 보이는 반면, 새벽별로 보이는 동안에는 왼쪽 아래가 불룩해 보인다.

목차

토머스 쿤 지음, 정동욱 옮김, 『코페르니쿠스 혁명 : 행성 천문학과 서구 사상의 발전』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원문 : Thomas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Planetary Astronomy in the Development of Western Thought (Harvard University Press,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