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쿤의 역사학, 철학, 그리고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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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욱, “토머스 쿤의 역사학, 철학, 그리고 과학”, 󰡔서양사 연구󰡕 33(2005): 139-175.

토머스 쿤은 과학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함으로써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쿤은 과학이라는 인간의 활동이 그동안의 믿음보다 훨씬 덜 객관적이고 덜 합리적이라는 것을 선포했다. 과학이 그러하다면,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 덜 객관적이라는 사실이 꼭 단점이 아닐 수 있게 됐다. 역사학에서 수사, 소설적 요소, 언어로의 전환 등이 역사학의 지배적인 방법이 된 데에는 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한편,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쿤의 과학관을 좀더 확장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쿤은 이러한 태도들을 반기지 않았는데, 쿤은 오히려 과학사학이 물리학만큼이나 엄밀하고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논문은 쿤의 역사적 연구를 그의 철학과 ‘과학’의 맥락 속에서 다룸으로써 쿤의 업적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쿤의 생애와 초기 과학사 연구

하버드 대학 2년부터 학생 잡지 <크림슨>에서 활동. 3학년 때에는 편집장 역임. 1943년 학부 졸업 후 하버드의 “라디오 연구소”에서 레이더 방해전파연구에 투입. 공식들 보완하는 이론적 작업. 쿤은 이 공식들이 어떻게 유도되었는지도 모른 채로 공식을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 이 경험은 그가 나중에 ‘정상과학’이라고 부르는 과학활동의 특성을 착안하는 데 한가지 계기가 됐음.

1949년 물리학 박사학위 받음. 그러나 1948년에 이미 진로 바뀌어 있었음. 1948년 코넌트의 요청으로 그와 함께 “자연과학 4”를 위한 교재 편찬 작업 착수. 비자연과학 전공 대학생을 위한 과학방법론 교양 수업과 같은 것임. 갈릴레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 읽기 시작. 한편, 코아레의 연구 탐독. 아리스토텔레스 이해 안됨. 그의 운동 개념이 근대적 운동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달음.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경험.

1948년의 쿤의 경험은 “텍스트가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 과거의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 이를 이해가능한 방식으로 해석하던 쿤은 점점 더 과거의 텍스트와 현재의 지식 사이에 번역 불가능성이 존재함에 주목. 그의 유명한 공약불가능성은 그의 개인적 경험에서 유래함.

쿤 식 사료 읽기 : 텍스트에서 잘 맞지 않는 것들을 찾아내고, 이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고,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그것을 꿰어 맞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식으로 텍스트를 읽는 방식. -> 핵심

1962년까지 역사학자로서 입지 굳혀감. 한편, 머튼, 피아제, 콰인의 논문 읽음. 버터필드와 코아레의 저술 읽음. 과거의 과학적 사건을 현재의 관심이 아니라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 정리.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하던 오토 노이라트는 <국제 통일과학 백과사전> 시리즈 기획. 쿤은 그들 중 모리스의 부탁을 받아, <과학혁명의 구조> 집필 시작. 1956년 버클리로 옮김. 1957년 <코페르니쿠스 혁명> 출판. 쿤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는 전통적이자 혁신적. 코페르니쿠스는 1300년 가량 지속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공부하고 그 방식대로 문제를 풀던 천문학자. 그렇지만, 누적된 구체제의 문제점을 최초로 명확하게 인식했던 사람이기도 함. 코페르니쿠스는 과거 천문학의 기술적 도구를 완벽히 소화했지만, 그 한계 느끼고 새로운 방식 도입. 그러나 과거의 보수적인 성격 여전히 담지.

쿤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비해 더 정확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더 간단하지도 않았음을 강조. 이론선택에서의 ‘비합리적’ 요소 제안.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 출판.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와 역사학 서술 방법론의 변화

󰡔구조󰡕는 과학 발전의 ‘구조’에 대한 책이다. 그에 의하면, 과학은 정상과학과 과학혁명을 반복한다. 정상과학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며, 이 지점에서 포퍼와 입장이 갈린다. 한편, 혁명 기의 패러다임 선택은 ‘합리적’인 기준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쿤은 ‘상대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두 패러다임 간에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수렴적 진보관’을 부정했다.

쿤의 󰡔구조󰡕는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① 직접적으로 과학사학계에서는, 쿤의 과학혁명 모형이 물리학, 천문학 이외의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를 놓고 논쟁했으며, 사례별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촉발됐다. 더 나아가 정치학, 혁명사 등의 분야로 확대적용될 수 있는지를 놓고도 논쟁이 촉발되었다. ② 역사학 방법론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역사학의 방법을 과학적인 방법(eg. 포괄법칙의 발견과 같은 방식)으로 끌어올릴 것이냐, 아니면 수사, 언어 등의 방식으로 복귀할 것인가에서 쿤의 영향은 모순적이었다.

홀링거의 정리에 의하면, ① 과학혁명의 확대적용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느 공동체이든 전통과 혁명의 싸이클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쿤의 일반화를 그대로 확대적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며, 각 영역마다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② 역사과 과학의 관계에서, 쿤은 단일한 포괄법칙 없이도 작동하는 과학을 보여줌으로써, 원시과학자 사회 자체의 정당성에 주목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쿤이 역사학과 같은 원시과학이 꼭 과학으로 가야할 당위성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홀링거는 쿤을 (너무) “사려 깊게” 독해했다. 쿤의 견해는, ‘원시과학이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을 확립한 정상과학이 되어야 한다’에 가깝다.(논쟁적일 수 있는 주장임) 패러다임은 범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상과학의 본질은 퍼즐 풀이에 있다. 역사학도 그러한가? 쿤은 역사학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쿤은 과학사학자가 해야할 일이 “텍스트 상의 기묘한 점들”을 해결하는 것, 즉 어떤 종류의 퍼즐풀이라고 생각했으며, 쿤은 자신의 역사적 연구를 통해 과학사학의 모범적인 범례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쿤의 방법은 전수되지 않았으며, 과학사는 외적 과학사와 같은 다른 길로 가기 시작했다.

쿤 식의 사료 읽기: 역사학자로서의 쿤에 대한 재평가

1978년 출판된 쿤의 󰡔흑체 이론과 양자 불연속󰡕은 양자역학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를 새롭게 해석했다. 쿤은 플랑크의 가설이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전적인 것임을,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플랑크 자신조차 1908년 로렌츠가 그를 설득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가설이 지닌 혁명성을 알지 못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결론을 얻어낸 과정은 바로 쿤식 사료읽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쿤에게, 과거의 텍스트는 낯선 문화의 일부이며, 이는 그 전체 문화와 분리한 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쿤은 이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텍스트에 드러난 기묘한 점이나 오류를 발견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아 다른 부분도 열 수 있는지 테스트를 반복하며 모든 것이 일관되게 이해될 때까지 이 작업을 수행했다. 이러한 쿤식 사료읽기는 가설-연역적 과학적 방법론과 흡사했다. 역설적으로, 그는 과학적인 방법론이 지닌 “객관적인 힘”을 과학으로부터 빌려와 역사연구에 적용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그에게 과학은 ‘문화’가 되었지만, 역사학은 과학만큼이나 엄밀한 것이 되었다.

결론

쿤은 자신을 “철학적 목적을 위해서 역사로 전환한 물리학자”로 묘사했다. 과학에 대한 역사적 분석에 기초한 쿤의 철학적 통찰은 그를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에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철학적 통찰을 실제 역사에 적용한 과학사 연구는 일반 역사가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며, 쿤 이후의 학자들은 쿤의 해석을 확장하여 역사와 과학, 사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쿤은 여전히 전통적인 역사 방법론과 전통적인 과학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쿤 자신의 말을 빌려 쓰자면, 그는 “혁명을 만든” 사람이었지 “혁명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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