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하기와 개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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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해킹 지음, 이상원 옮김,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자연과학철학의 입문적 주제들』 (한울 아카데미, 2005), 68-72, 340-342쪽에서 발췌.

이 글은 이언 해킹(Ian Hacking)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에서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그의 견해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을 짧게 발췌하였다. 이언 해킹은 이 글에서 조작가능성을 기준으로 한 존재자 실재론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여러분이 그것을 흩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한다.” 한편, 해킹은 현미경 관찰을 일상적인 관찰만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격자 논변"이라는 흥미로운 논변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논변은 과학의 비통일성에 대한 건강한 인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과학적 실재론이란 무엇인가?

과학적 실재론은 올바른 이론에 의해서 기술되는 존재자, 상태, 구조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양성자, 광자, 역장, 블랙홀은 손톱, 터빈, 개울의 소용돌이, 화산처럼 실재한다. 입자 물리학의 약한 상호작용은 사랑에 빠지는 일처럼 실재한다. 유전 부호를 운반하는 분자 구조에 관한 이론은 참이거나 거짓이며, 진정으로 올바른 이론은 참인 이론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과학이 아직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조차도, 실재론자는 종종 우리가 진리 가까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사물의 내부 구성을 발견해내는 일, 우주의 가장 먼 곳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목표로 한다. 너무 겸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알아내 왔기 때문이다.

반실재론은 정반대로 말한다. 전자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히 전기 현상과 유전 현상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아주 작은 상태, 과정, 존재자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거리인 사건을 예측하고 산출시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전자는 허구이다. 전자에 관한 이론은 사고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론은 적절하거나 유용하거나 보장되었거나 적용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자연과학의 사변적 승리와 기술적 승리를 아무리 많이 숭배할지라도, 자연과학의 가장 유효한 이론조차도 참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떤 반실재론자는 이론은 세계가 어떠한가에 관한 글자 그대로의 진술로서 이해될 수 없는 지적 도구일 뿐이라고 믿는다. 다른 반실재론자는 이론을 글자 그대로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론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러한 반실재론자는 우리가 이론을 아무리 많이 사용할 수 있을지라도 이론이 올바르다고 믿게 할 확신을 주는 이유는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양쪽의 반실재론자는 세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의 종류 속에 이론적 존재자를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다. 터빈은 실재하지만, 광자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연 속의 여러 사건을 정말로 정복해 왔다고 반실재론자는 말한다. 유전공학은 제강 작업처럼 상식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지만, 현혹하지 말라. 분자의 긴 사슬이 실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고 가정하지 말라. 생물학자는 철사와 색이 칠해진 공으로 분자 모형을 만들면 아미노산에 관해서 더 명확하게 사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형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현상을 배치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것은 새로운 미시기술을 제안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실제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느냐에 관한 글자 그대로의 그림이 아니다. 나는 도르래, 지레, 볼 베어링, 저울추로 경제에 관한 모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저울 추 M(돈의 공급)의 모든 감소는 각도 I(인플레이션율)의 감소와 저울 접시 안의 볼 베어링의 수 N(실업 노동자의 수)의 증가를 산출한다. 우리는 올바른 입력과 출력을 얻을 수 있지만, 어떤 이도 이것이 경제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

... 내 사정을 말하자면 한 친구가 내게 분수 전하(fractional electric charge)의 실재를 탐지하기 위해서 계속 수행되고 있던 실험에 대해서 이야기해줬을 때까지 나는 과학적 실재론에 관해서 전혀 재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쿼크라 불린다. 현재 나를 실재론자가 되게 했던 것은 쿼크가 아니라 전자다. 그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며, 실제 이야기, 일상적인 과학 연구와 연결된 이야기이다. 전자에 관한 오래된 실험에서 출발하기로 하자.

전하의 근본 단위는 오랫동안 전자라고 여겨졌다. 1908년 밀리컨은 그 양을 측정하는 아름다운 실험을 고안했다. 음전하를 띠는 아주 작은 기름방울이 하전된 판 사이에 떠 있다. 먼저 전기장을 꺼서 기름방울이 떨어지게 한다. 이어 떨어지는 속도를 크게 하기 위해 전기장을 가한다. 기름방울을 관찰한 두 가지 종결 속도는 공기의 점성 계수, 공기와 기름의 밀도와 결합되어 있다. 이것들은 알려진 중력의 값과 전기장의 값과 함께 어떤 이로 하여금 기름방울의 전하를 계산하도록 해준다. 반복된 실험에서 기름방울의 전하는 일정한 양의 작은 정수배가 된다. 이 일정한 양을 최소 전하, 즉 전자의 전하로 취하게 된다. 모든 실험처럼, 이 실험은 대충만 옳은 가정을 만들어낸다. 즉 기름방울은 구형이라는 것이 그 예다. 밀리컨은 맨 처음에는 기름방울이 공기 분자의 평균 자유 행로에 비해 크지 않기 때문에 기름방울이 약간 충돌하게 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험의 착상은 최상이다.

전자는 오랫동안 전하의 기본 단위로 주장되었다. 우리는 그 전하의 이름으로 e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자 물리학은 1/3 e의 전하를 갖는 쿼크라 불리는 한 존재자를 점증적으로 제안해왔다. 이론 속의 어떤 내용도 쿼크에 독립적 존재성이 있다고 제안해주지 않는다. 이론이 함축하듯 만일 쿼크가 실재한다면, 쿼크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것이고, 즉시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스탠퍼드 대학교의 라뤼, 페어뱅크, 헤버드가 시작한 교묘한 실험을 그만두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밀리컨의 기본 착상을 이용해 ‘자유’ 쿼크를 사냥하게 된다.

쿼크는 희귀하거나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가 있으므로, 아주 작은 방울보다는 커다란 공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때 쿼크가 공을 때리게 되는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용된 방울은 질량이 10-4그램보다 작았지만 이는 밀리컨의 방울보다 107배나 큰 것이다. 만일 그것이 기름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거의 돌처럼 떨어질 것이다. 그 대신에 그것은 니오브라고 하는 물질로 만들어지는데, 니오브는 그것의 초전도 전이 온도인 9K 이하로 냉각된다. 하나의 전하가 이 몹시도 차가운 공 둘레를 일단 회전하게 되면, 그것은 영원히 도는 채로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방울은 자기장 속에 떠 있을 수 있고, 장을 변화시킴으로써 실제로 앞뒤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한 자력계를 사용해 어디에 방울이 존재하며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

공에 있는 최초의 전하는 점차 변화하며, 밀리컨과 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우리의 기술을 적용하면 양전하에서 음전하로 가는 경로가 0 또는 ±1/3 e에서 일어나는지를 결정해낼 수 있다. 만일 후자의 경우가 확인된다면, 공에 매여 있지 않은 하나의 쿼크가 확실히 존재해야 한다. 가장 최근의 출간 이전 원고에서, 페어뱅크와 그의 동료는 +1/3 e와 일치하는 4개의 분수 전하, -1/3 e와 일치하는 4개의 분수 전하, 0의 전하를 갖는 13개를 보고했다.

이제 어떻게 니오브 공 위에 있는 전하를 바꿀 것인가? 내 친구가 말하기를, “음, 이 단계에서 우리는 전하를 증가시키기 위해 그것에 양전자를 흩뿌리거나 전하를 줄이기 위해 전자를 흩뿌리지요.” 그날 이후로 나는 과학적 실재론자가 되었다. 나로서는, 여러분이 그것을 흩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오래 살아 있는 분수 전하는 논쟁거리이다. 나로 하여금 실재론을 확신하도록 한 것은 쿼크가 아니다. 아마도 내가 1908년의 전자에 관해서 확신하게 되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의심 많은 사람이라면 찾아낼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존재했다. 기름방울에 영향을 미치는 분자간 힘에 관한 골칫거리를 없애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밀리컨이 실제로 측정하려 했던 것인가? 그러므로 그의 수치는 이른바 전자에 관해서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것인가? 많인 그렇다면 밀리컨은 전자의 실재성을 보여주는 쪽으로 가고 있지 않다. 최소 전하가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전자가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쿼크 사례에서도 똑같은 종류의 고민거리가 있다. 마리넬리와 모르푸르고는 최근의 한 미출판 원고에서, 페어뱅크 집단은 쿼크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전자기력을 측정한 것이라고 제안한다. 나로 하여금 실재론을 확신하도록 한 것은 쿼크와 관계가 없다. 나로 하여금 실재론을 확신하게 한 것은 현재 양전자와 전자를 흩뿌릴 수 있는 표준적인 방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으며, 즉 그것은 정확하게 우리가 양전자와 전자를 갖고 하는 바다. 우리는 결과를 이해하고, 원인을 이해하며, 원인과 결과를 그밖의 어떤 것을 알아내는 데 사용한다. 물론 똑같은 이야기가 그 일에 관계되는 모든 종류의 여타의 도구, 즉 과냉각된 니오브 공 위에 회로를 만드는 장치와 ‘이론적인 것’에 관한 거의 끝없는 여타의 ‘조작’을 위한 장치에 대해서도 통용된다. …

격자 논변

나는 이제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주제에 관한 한 철학자의 주장에 도전한다. 반 프라센은 우리가 지구 위에 위치해 있을 때 우리는 목성의 달들을 보기 위해서 망원경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로 가서 맨눈으로 그 달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망원경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반면 우리는 아주 작은 물체에 대해 그와 똑같이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현미경을 통해서 절대 볼 수 없다고 말한다]. ... 그것은 공상과학 소설이다. 현미경 사용자는 공상을 피한다. 조밀한 물체를 재파악하는 데 사용된 격자를 생각해보라. 아주 작은 격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육안으로는 좀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이것들은 펜과 잉크로 매우 큰 격자를 그려냄으로써 만들어진다. 글자들이 격자의 각 사각형들의 모서리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이어 격자는 사진술을 사용해 축소된다. 현재 표준적인 기법이 되고 있는 것을 사용하여, 결과로 나온 미시사진 위에 금속이 놓이게 된다. 격자는 100, 250, 1000개 단위의 다발로 또는 통으로 팔린다. 그러한 격자를 만드는 절차는 전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떤 여타의 고품질 대량 생산 체계만큼이나 신뢰할 만하다.

짧게 말해, 상상 속의 우주선 속에서 즐긴다기보다는, 우리는 일상적으로 격자를 수축시키고 있다. 이어 우리는 거의 어떤 종류의 현미경을 통해서라도 그 아주 작은 원반을 살피고 원래 커다란 규모로 그렸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모양과 글자를 보게 된다. 내가 한 자루의 족집게로 들고 있는 그 미세한 원반이 사실은 태그가 붙은 격자의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고를 심각하게 품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격자를 바로 그런 식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현미경을 통해서 보는 바가 참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제작의 과정이 신뢰할 만하며, 그것은 우리가 그 결과를 그 현미경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임을 나는 안다. 더욱이 그 결과를 어떠한 종류의 현미경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는 상을 산출하기 위해 다수의 서로 무관한 물리적 과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치가 나타날 가능성을 어떻게 달리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현미경으로 보이는 대로, 원반이 태그가 붙여진 격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인가? 그 커다란 격자가 서로 다른 12가지 종류의 현미경을 통해서 볼 때도 여전히 격자처럼 보이는 어떤 비격자로 수축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13가지의 전적으로 서로 무관한 물리적 과정의 거대한 공모여야 할 것이다. 그 격자에 관해 반실재론자가 되려면 여러분은 현미경의 사악한 데카르트적 악마를 불러내야 할 것이다.

격자 논변은, 적어도 현상론적 수준에서, 과학의 비통일성(disunity of science)에 대한 건강한 인정을 요구한다. 광학 현미경 모두는 평범한 빛을 사용하지만, 간섭, 편광, 위상차, 직접 투과, 형광 등등은 본질적으로 빛의 서로 무관한 현상론적 측면을 이용한다. 만일 광파의 이러한 서로 다른 측면들을 사용해 동일한 구조가 식별된다면, 우리는 그 구조가 모든 서로 다른 물리적 체계들에 의한 인공물이라고 심각하게 가정할 수 없다. 더욱이 나는 이 모든 서로 다른 물리적 체계들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말하자면, 빛의 위상 간섭 특성을 격리해냄으로써, 자연의 몇몇 측면을 순화시킨다. 우리는 원리적으로 한 도구가 어떻게 작동하게 될는지를 정확하게 앎으로써 그 도구를 설계하는데, 이는 바로 광학이 아주 잘 이해되어 있는 과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제품을 디버깅하는 데 여러 해를 소모하며, 마침내 바로 쓸 수 있는 도구를 갖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한 특별한 구조를 식별해낸다. 여타의 몇 가지 바로 쓸 수 있는 도구는 전적으로 서로 다른 원리 위에 세워지는데, 이들도 그 동일한 구조를 드러내준다. 데카르트적 회의주의자에 이르지 못한 누구도 그 구조가 표본에 내재하는 것이 아닌 도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1800년에 현미경이 섬유의 구조보다는 광학적 체계의 인공물을 주로 노출시켰다는 평범한 근거에서 조직학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금지시켰던 일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분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옳지 않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이 광학적 내용의 준비 과정의 인공물이기보다는 표본 속에 정말로 있는 것인지를 확신하게 되는 일은 혁신적인 현미경에서 항상 문제가 된다. 그러나 1983년의 우리는 1800년과는 달리 그러한 확신을 엄청나게 많은 방식으로 얻고 있다. 나는 ‘시각적’ 측면만을 강조한다. 거기서조차도 나는 아주 단순화하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몇 가지 서로 다른 물리적 체계를 사용해 구조의 똑같은 기초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것은 인공물이다’보다는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아주 훌륭한 이유를 갖는 것이라고 나는 이야기한다.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못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일상적 시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느 뜨거운 날에 여러 서로 다른 조망에서 볼 때 아스팔트 길 위에 검은 반점이 보이되 항상 그 위치에 있다면, 어떤 이는 그 사람이 보고 있는 바가 친숙한 환영이라기보다는 푸들이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어떤 이는 여전히 틀릴 수가 있다. 현미경 사용에서도 어떤 이는 이따끔씩 틀린다. 그럼에도 거시적 지각과 현미경적 지각에서 이루어지는 실수의 종류가 완전히 유사하다는 것은 우리가 현미경을 통해서도 본다고 말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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