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최전선? 북해 연안 지역의 의학과 자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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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k, Harold J. (1993), “The Cutting Edge of a Revolution? Medicine and Natural History Near the Shores of the North Sea”, J. V. Field and Frank A. J. L. James (ed.), Renaissance and Revolution: Humanists, Scholars, Craftsmen and Natural Philosophers in Early Modern Europ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5-61.


혁명의 최전선? 북해 연안 지역의 의학과 자연사


해롤드 J. 쿡 (Harold J. Cook)

서민우 역


과학혁명에 관한 연구를 평가할 때, 시간의 경과에 따라 논의에서 사라져버린 것에 주목하는 것이 새로이 덧붙여진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만큼이나 유용한 경우가 있다. 물론 아무도, 오늘날 종종 실증주의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역사]서술 전통으로의 단순한 회귀를 옹호하려 하지는 않는다 하여도, 소박한 진보사관(progressivism) 하에서 이뤄진 근대 초기 과학에 관한 역사적 연구들이, 스스로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한 사건을 논의해온 더 최근 세대의 연구들보다, 의학이나 자연사에 훨씬 더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대략 194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16, 17세기의 과학을 다룬 많은, 아니 대부분의 연구들은 소위 ‘발견’이라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한 연구들은 실증적 지식의 축적을 보여주는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중세의 제한적이고 미신적인 철학화에 비해 속박에서 벗어난 르네상스 이후의 합리적 사유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역사에 관한 이러한 접근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찰스 싱어(Charles Singer)나 조지 사튼(George Sarton)과 같이 그러한 접근법을 옹호했던 주요한 학자들이 의학과 자연사에 관한 탁월한 연구들, 예를 들면 아그네스 아버(Agnes Arber), 콜(F. J. Cole), 찰스 셰링톤(Charles S. Sherrington), 찰스 레이븐(Charles Raven), 그리고 애쉴리 몬테규(M. F. Ashley Montague)와 같은 이들의 연구를 촉진했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1940년대 후반 이래로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자연사가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에 공헌한 바를 간과해왔다.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또 사용했던 이들은, 16세기와 17세기를 묘사할 때 단순한 실증적 발견이나 합리주의의 등장 이상의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거니와, 그들은 유럽인들의 개념적 전망에 있어 수학적이고 기계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둔 일대 혁명이 발생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분명히, 현대 물리학과 연관된 철학적인 관심과 그에 바탕을 둔 엄청난 능력은 과학사 서술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새로운 세대는 현대 물리학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사고실험과 자연의 수학화의 기원을 근대 초기의 과학혁명에서 찾았다. 루퍼트 홀(A. Rupert Hall)은 알렉상드르 코아레(Alexandre Koyré)의 연구에 관해 언급하면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혁명으로 여겨졌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역사적 배경을 제시하기 위해 코아레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특별히 강조한 바 있다. 홀은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버트(E. A. Burtt) 그리고 데익스터하위스(E. J. Dijksterhuis) 역시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덧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홀이 올바로 지적한 것처럼, 과학사가 영국과 미국에서 하나의 분과로 제도화되고 있던 세계대전 이후의 세대에 있어 코아레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 자신 플라톤주의자라고 천명했던 코아레는 어떤 식으로든 순수한 과학적 관념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들어보라.

나는 “활동적인 지식”(scientia activa)이 미적분학의 발전과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 부르주아지의 부상이 코페르니쿠스 혹은 케플러 천문학의 등장과 무슨 상관이 있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경험과 실험-우리는 두 가지를 구분해야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대립시켜야만 한다-에 관해서라면 나는 실험적 과학의 등장과 성장이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접근, 다시 말해 새로운 “형이상학적” 접근의 원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결과라고 확신하고 있다.

요컨대 코아레에 따르면 과학은 ‘자연의 수학화(기하학화)’로부터 등장한 것이요 이와 같은 순수한 사유상의 변천이외의 어느 것도 그 원천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역사학자들은, 진정한 과학이란 자연의 수학화로부터 출현한다는 이러한 생각에서, 홀이 아주 정교하게 정리한 바 있는 논쟁점, 즉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옹호를 위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설명틀을 발견해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 수사(canon)였던 찰스 레이븐(Charles E. Raven)은, 도덕적 관심사에 대해 마찬가지의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과학사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처럼 과학사를 보일과 후크와 같은 몇몇 사람들을 포함한,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는 로마 교황의 계승과정처럼 서술하는 것은, 19세기 후반에 지배적이었던 기계론과 결정론으로 귀결된 것들만이 중요한 공헌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과, 16세기, 17세기의 동물학자들과 식물학자들의 놀라운 성취는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더욱 최근에는 수학적, 기계적 세계관이 17세기 학자들(virtuosi)의 철학적 사상을 포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겨냥한 일군의 비판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발터 파겔(Walter Pagel), 라탄시(P. M. Rattansi), 앨런 디버스(Allen Debus), 찰스 웹스터(Charles Webster)와 같은 몇몇 학자들의 주목할만한 연구를 제외한다면, 과학혁명이라는 개념이 당시 가장 활발했던 연구의 많은 부분, 즉 의학이나 자연사 연구에 당대인들이 기울인 노력을 사실상 배제해왔음을 우려한 이는 거의 없었다. 놀랍게도 레이븐이 새로운 정설에 불만을 제기했던 1950년 이후로는 과학자들이나 과학사가들은 16, 17세기의 자연사를 다룬 책을 거의 쓰지 않았던 것이다. 리처드 웨스트폴(Richard S. Westfall)과 같은 저자들이 근대 초기의 과학을 유기적으로 설명하려 했을 때 그들은 자연사로 묶어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훌륭한 연구들을 자신들의 설명틀로 결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리 보아스 홀(Marie Boas Hall)과 루퍼트 홀의 설명은 자연사를 어느 정도 의식한 것들 중에서는 가장 성공적이었지만, 루퍼트 홀마저도 자연사의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방식으로 생물학과 자연사를 구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식물과 동물, 나아가 인간으로 이뤄진 세계에 관한 관념상의 변화를 논한 책과 에세이를 저술하는 일은 키스 토마스(Keith Thomas), 잭 플럼(Jack Plumb), 조지프 르바인(Joseph Levine) 그리고 과학사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화사적 지향을 가지고 근대 초기를 다뤄왔던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오늘날의 학문적 경향에서 보면 사정이 급변하고는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이 이른바 과학혁명이라 불러온 [역사적] 사건 내에서 자연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재평가해볼 적절한 시기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초기의 자연사

16, 17세기의 자연사는 레스 나투라이(res naturae), 즉 자연적인 것들에 관한 탐구로 정의될 수 있다.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9)와 디오스코리데스(Pedanius Dioscorides, c.40~c.90) 시대 이후 자연사[의 주제]는 하늘과 땅에 관한 모든 서술들(여기에는 우주론, 천문학, 지리학, 지지학(地誌學), 광물학, 기상학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여타 주제들이 포함된다)과, 땅에 사는 생명체들 및 그것들의 존재이유(그러므로 어류, 새, 곤충 및 다른 동물들, 허브, 관목과 교목,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에게 가지는 경제적, 의학적 효용들, 또한 사람들의 도구, 복식, 전통과 믿음들에 관한 탐구들을 포괄한다)를 포함한다. 최근에 필립 슬로안(Phillip Sloan)이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고대의 자연사 전통은 실질적으로 백과사전적 전통과 일치한다. 그러나 슬로안은, 근대에 들어서는 자신이 헤르메스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유래한 새로운 자극이 존재했음에 주목하고 있다. 확실히 자연사 항목에 포함된 토픽 목록에 화학 정도를 부가한다면 우리는 그 주제들이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이 ‘피지올로기(physiology)'라고 불렀던 것 혹은 데이비드 룩스(David Lux)[의 연구]가 보여주었듯이 프랑스 학자들이 ‘피지끄(physique)’라고 불렀던 것과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7세기 중엽이면 화학적 방법은 광물, 식물 그리고 동물의 성분을 분석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내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16세기의 자연사 탐구가 부활한 히포크라테스 전통으로부터도 부가적인 추동력을 얻었다는 것인데, 당시 히포크라테스 전통은 많은 화학자들까지도 의식적으로 추종했던 면밀한 관찰방법으로 여겨졌다.

슬로안을 따라 자연철학이 인과적 분석을 그 목표로 삼는데 반해 자연사는 기술(記述)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래서 둘은 분리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의 동기를 북돋운다는 측면에서는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구분한다면 우리는, 동시대인들이 자연철학을 사태의 원인에 관한 탐구로 이해했기에 자연사는 지식 그 자체보다는 지식에 이르는 수단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로안 식으로 자연사와 자연철학 사이에 분명하고 견고한 경계를 그을 수 있을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플리니우스가 전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후자로 경도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이 쪽 혹은 다른 쪽으로 향하는 경향이 존재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플리니우스는 사물들뿐 아니라 원인들에 관해서도 글을 썼고,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발견보다는 분석을 강조하면서도 전자 역시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근대 초 유럽의 많은 자연철학자들은 원인에 대한 이론적 추론을 전개하기에 앞서 사실을 곧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산성 물질과 염기성 물질에 관한 17세기의 한 프랑스인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사실’을 도입하는 이는 철학자이고, 지적 의심을 제기하는 이는 경험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사가들이라면 그들 자신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익히 배워 알고 있을 테지만, 이론과 기술(記述)은 심대한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이고, 이러한 사실은 17세기 사람들 역시 잘 알고 있던 바였다.

물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자연사적인 경험과 실험의 수집을 토대로 삼아 자신의 과학철학을 구축하였다. 이제 소위 ‘베이컨적’ 경험주의라는 것이 진정으로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소박하게 보이게 된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한스 슬로안 경(Sir Hans Sloane, 1660~1753)은 왕립학회의 회장이 되었던 말년에 이르러, ‘사실이라는 것(matters of fact)'은 지식의 정수 그 자체라고 쓰며, 그러한 문제를 밝힐 수 있다는 것에 흥분한 적이 있다.

나에게 그러한 설명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묻는다면, 자연사에 관한 지식은 사실이라는 것에 대한 관찰에 다름 아닌데, 그것은 다른 대부분의 것들보다 확실하고, 내 빈약한 생각으로는 추리, 가설 그리고 추론보다도 실수에 종속되는 정도가 덜하다, 라고 대답하겠다. ...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감각이 오류를 일으키지 않는 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고, 아마도 창조 이후로 계속하여 우리가 지금 알아낸 그 상태 그대로 존재해왔으며 또한 세상이 종말에 이를 때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들이다.

토마스 브라운 경(Sir Thomas Browne)이 거짓된 것들로부터 참된 것을 가려내려 할 때 사용한 아름다운 언어가 예증하듯, 17세기의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실을 발견하고 세세한 항목들을 분류해내는 일은 대단히 신선하고 새로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는 지식을 향한 특정한 태도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의학사에서 ‘존재론(ontology)’이라 설명돼온 것을 향한 철학적 운동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너무 단순하거나 ‘실증주의적(positivistic)’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당시 그러한 운동은 유럽 전역에 걸쳐 많은 관심과 환대를 받았는데, 심지어 프랜시스 베이컨 경의 저작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곳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사에 관한 연구들을 재검토하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버크(Thomas Birch)의 『왕립학회사』(History of the Royal Society)를 아무 페이지라도 펼쳐, 가령 1682년 12월 6일에 열렸던 모임에 관한 보고를 살펴보면, 자연사가 왕립학회에 얼마나 중심적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모임은 인디고(indigo) 팅크제를 살아있는 개의 창자 속으로 주입하는 것에 관한 토론으로 시작했다. 색깔로 보건대 팅크제는 세 시간이 지나 암죽관(lacteal)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이는 애블리온비(Ablionby) 박사, 타이슨(Tyson) 박사 그리고 슬레어(Slare) 박사에게 직접 실험을 해보고 그에 관해 보고를 해달라는 요청으로 이어졌다. 이어 스미스(Smith) 박사는 암죽관 속에 집어넣은 방향물질이 암죽(chyle)속에 남아있다고 보고하였고, 리스터(Lister) 박사는 암죽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유미가 왜 흰 색인지에 관한 추론이 포함돼 있었다. 그루(Grew)는 리스터의 추론에 반대했는데, 이는 식물 속의 ‘유액(milk)’과 나아가 반추동물들의 창자에 관한 논의로 이어졌다. 다음 과제로 동인도의 바타비아(Batavia)에 있는 네덜란드인 내과의사 빌렘 텐 레이너(Willem Ten Rhijne, 1647~1700)가 학회 앞으로 보낸 편지가 낭독되었고, 이 편지에 관한 토론으로 인해, 누군가 첼시 약제 정원(Chelsea physic garden)에서 자라고 있는 녹나무(camphor tree)는 텐 레이너가 보낸 것이라고 밝히게 되었다. 나아가 아브라함(Abraham)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아들 알베르투스(Albertus)일 가능성도 있는 반 문팅(Van Munting)이 열대식물, 심지어 계피와 육두구(nutmeg)까지도 ‘프리즐란드(Friesland)’에서 키울 수 있었다는 주장이 언급됐다(사실은 프리즐란드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흐로닝헨(Groningen)에서였다). 이로 인해 보르헤세(Borghese) 공이, 비, 천둥 그리고 지하의 열을 일으킬 수 있다고 알려진, ‘플럼부스 마리누스(plumbus marinus)’를 왕립학회에게 약속한 바 있다는 누군가의 언급이 이어졌다.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의 지방들에서 산출된 흑연에 관한 보고들과 함께 광물에 대한 더 깊은 토론이 계속되었고, 리스터 박사에게 자기적 성질을 띠는 석화된 물푸레나무(petrified ash) 한 조각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논의는 황철광(pyrite)과 치유력 있는 샘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고, 인디고 팅크제를 개 두 마리의 십이지장(duodenum)에 주입한 또 다른 보고로 되돌아갔다. 마침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모임은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3)의 실험과 함께 끝이 났다. 특별히 명기되지 않은 물체가 겨우 물에 잠길 정도로만 배치되었고, 잠시 후에 물체가 담겨져 있던 용기에 충격을 가하자 그 물체는 물속으로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진기한 것들, 생리학과 해부학, 식물학에 관한 이러한 종류의 일반적인 논의와 종결 실연(closing demonstration)은, 왕립학회, 1663년 특허장에 적힌 명칭대로 하자면 ‘자연지식을 증진하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the Promoting of Natural Knowledge)’의 업무에 꽤 전형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잉글랜드 회원들은 유사한 소식통들을 통해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여타 지역의 연구들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식민지에서 행해지고 있던 훌륭한 연구들에 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소화관 내의 암죽에 관한 논의는 임파선의 발견으로 이어졌던 네덜란드인의 연구가 자극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ie van Leeuwenhoek, 1632~1723)가 왕립학회에 편지를 보내 그와 같은 활발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더욱이 왕립학회는, 텐 레이너가 바타비아에서 보낸 전갈로 인해, 침술(acupuncture)에 관한 유럽인 최초의 설명이 포함돼 있는 그의 책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텐 레이너의 책은 또한 뜸질(moxibustion)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었는데, 왕립학회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공사의 아들 헤르만 부스호프(Hermann Busschof)로부터 그것에 관해 들은 적이 있던 콘스탄테인 회이헨스(Constantijn Huygens, 1596~1687)를 통해 이미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상태였다. 회이헨스는 헤이그에 있던 잉글랜드 대사 윌리암 템플 경(Sir William Temple)에게 통풍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으로 뜸질 처방을 추천한 적이 있었고, 템플은 그 처방이 무척이나 효력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후에 펠멜가에 살고 있던 그의 이웃 토마스 시덴햄(Thomas Sydenham)은 통풍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그 주제를 다루게 되었다. 왕립학회가 그 처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텐 레이너의 책을 출판했을 뿐 아니라 뜸질에 관한 부스호프의 네덜란드어 책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의뢰하기도 했다.

스밤메르담과 그의 사회적 환경

얀 스밤메르담(Jan Swammerdam, 1637~1680)의 고도로 숙련되고 광범위한 연구를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17세기의 자연사적인 탐구의 범위와 중요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스밤메르담의 아버지는, 세계 각지에서 온 배들이 정박해 있는 암스테르담 조선소 바로 옆에 약제상 가게를 소유하고 있었고, 당시의 다른 많은 이들처럼 중국산 자기나 여타의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동인도에서 회항한 선원들에게서 구입하곤 했던 이국풍의 산물들(exotica)과 자연산물들(naturalia)이 포함돼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진열장(cabinet)은 꽤나 유명해졌다. 스밤메르담은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의 진열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특히 곤충 수집에 관심을 보였다. 몇 년 안가서 그는 1200여개나 되는 곤충을 수집하여, 표본으로 만들어 슬라이드에 고정시키고 가지런히 배열해두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에서 활용할 수 있던 기회는 스밤메르담의 식견을 더욱 넓혀주었다. 그는 학위를 수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점에서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던 지역학당(Athenaeum)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그곳은 도시의 학식 있고 온후한 섭정자(regent)들에 의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다. 스밤메르담은 또한 도시의 네 명의 시장 중 한명이었던 요하네스 후더(Johannes Hudde)로부터 자그마한 유리 방울을 가지고 현미경용 렌즈를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후더는 레벤후크가 렌즈 만드는 기술을 개량할 방법을 찾기 전에 그에게 렌즈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던 이였다. 스밤메르담은 통상 800~900배 배율의 렌즈를 가지고 연구한 듯하지만, 후더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렌즈 중 가장 작은 것은 2200배의 배율을 가능하게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도구의 도움으로 스밤메르담은 곤충에 관한 몇 가지 굉장히 놀라운 해부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법들을 개발했고, 그리하여 토스카나의 대공인 메디치가의 젊은 코시모가 1668년 그의 진열실을 방문했을 때, 얀은 애벌레를 해부하여 나비 날개가 될 것이 이미 애벌레의 몸속에 어떻게 들어있는지 보여줄 수 있었다. 대공은 스밤메르담의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과 지적 능력에 큰 인상을 받아, 그가 곤충 컬렉션을 피렌체로 가지고 와서 자신을 위해 봉사한다면 12,000 길더의 돈을 주겠다고 했지만, 스밤메르담은 이를 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방대한 『곤충의 일반사』(Historia insectorum generalis, 1669)를 네덜란드어로 출판했을 때, 그는 그 책을 암스테르담의 시장들에게 헌정했고, 그들은 답례로 200 길더의 사례금을 수여하였다.

이즈음 스밤메르담은 또한 아주 훌륭한 해부학자가 되어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실험에 경도된 몇몇 내과 의사들과 연구하면서 그는 상당한 해부기술을 습득하였고, 더욱 큰 표본을 보존하고 조사할 수 있는 새로운 기법들을 발전시켰다. 교수들이 정력적으로 해부학, 식물학, 화학, 임상학 연구를 추진하고 있던 라이덴 대학에 가기도 전에 스밤메르담은 반 호르너(Van Horne) 교수에게 큰 인상을 남길 기술들을 발전시켰는데, 반 호르너는 일찍이 다른 기관들 사이에서 흉부 도관(duct)을 발견했던 사람이었다. 라이덴에서 반 호르너의 격려를 받는 가운데 스밤메르담은 근육과 호흡에 관해 선구적이라 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살아있는 개와 개구리를 자신의 방이나 반 호르너의 집에서 해부했다. 그의 의학 학위논문은, 데카르트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1660년대와 1670년대 초의 그의 선생들처럼 그 역시 생리학적 기계론자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암스테르담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스밤메르담은 한 작은 내과의사 집단의 일원으로서 집중적인 비교해부학 연구를 계속했는데, 그 내과의사 집단은 도시 섭정자들의 친구로서, 화학자이자 식물학자였고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해부학자 중 하나였던 헤라드 브라지우스(Gerard Blasius)가 주도하고 있었다. 사설 의학 협회(Collegium Medicum Privatum)라는 이 내과의사 집단은, 1665년 10월에서 1666년 2월 사이의 모임에서 볼 수 있듯 때로는 일주일에 한번 이상 만나기도 하며 2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회합을 유지했던 하나의 연구 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밤메르담은 해부재료 비용을 지불했던 반 호르너와 함께 라이덴에서 연구를 계속했고, 그 와중에 반 호르너는 사설 의학 협회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암스테르담까지 다녀오곤 했다. 스밤메르담은 도시 내과 의사이자 협회 회원이었던 마티어스 슬라두스(Mathias Sladus)의 허가를 얻어 도시 병원 피터스하스트하위스(Pietersgasthuis)에서 해부학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슬라두스가 1669년에 은퇴하고, 반 호르너가 1670년 초에 죽은 뒤에는 시장 중 한명이었던 콘라드 반 뵈닝헨(Coenraad Van Beuningen)이 그를 위해 병원에서 사체를 해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주었다. 반 뵈닝헨은 파리에서 스밤메르담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 그는 네덜란드 대사였고, 스밤메르담은 내내 아주 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지지자였던 멜키세덱 테브노(Melchisédec Thèvenot)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반 뵈닝헨 역시 줄곧 테브노의 견실한 친구였다.

스밤메르담은, 그가 자신의 발삼(balsam)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신체 부위를 저장하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그는 심지어 양 한 마리 전체와 한달 된 아이를 ‘발삼’ 처리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몸 도관(vessel)에 밀랍을 주사하는 새로운 기법을 상당히 발전시켰는데, 착색한 밀랍을 사용하여 그것을 상이한 도관에 주입해보면 시각적으로 각각이 구분됐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기관(trachea)은 흰 밀랍으로, 폐동맥은 유사하게 붉은 밀랍으로 채우고, 폐정맥은 장밋빛 밀랍으로, 기관지 동맥의 작은 구멍은 화염과 같은 붉은 물질로 채워 넣은 흉부 표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 간 역시 비슷하게 발삼과 밀랍으로 처리되었다. 이러한 기법들은 곧 라이덴의 교수 안토니우스 눅(Antonius Nuck)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는데, 그는 림프계를 아주 상세히 밝혀내기 위해 수은 조제약(preparation)을 사용하였다. 생애 후반기에 이르러 스밤메르담은 기계론 철학의 핵심적인 점들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한동안 종교적 신비주의자 앙트와네트 뷰리뇽(Antoinette Bourignon)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도 했으나, 그의 자연사 연구는 아주 높은 수준에서 여전히 계속되었다.

스밤메르담의 삶에 관한 이와 같은 짧은 요약이 그의 관심사와 학문적 활동의 범위를 실상 그대로 드러내줄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 중요한 논점들, 즉 스밤메르담과 같은 이들의 연구를 확실히 전위적이라고 생각했던 학자들과 후원자들의 국제적 네트워크(그는 런던 왕립학회의 회원들과 파리 과학 아카데미의 구성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가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시간, 금전, 기술과 학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는 것, 또한 화학적, 해부학적, 생리학적 연구 및 현미경을 사용한 연구와 표본의 수집 및 준비 작업은 종교-철학적인 관심과 하나로 얽혀있었다는 것 정도는 소략하나마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과학혁명을 수학이나 역학과 관계되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던 이전의 개념을 고수하며, 거기에 잘 들어맞는 당대의 연구들에 비해 스밤메르담의 연구는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고 평가해야만 할까?

비록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스밤메르담 세대가 데카르트주의를 채택하여 자연사에 적용하려 한 첫 세대였다면, 그보다 나이가 많았던 동료, 헤라드 브라지우스의 세대는 분명히 데카르트주의가 아주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도 높은 수준의 연구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 브라지우스는 덴마크 국왕 아래에서 복무했던 건축가의 아들이었고, 1645년에 대학 교육을 위해 라이덴으로 오기 전까지는 카스파르 바르톨린(Caspar Bartholin)과 함께 코펜하겐에서 공부했던 듯하다. 그는 1660년에 암스테르담 의학부 임시 교수이자 도시 내과의사가 되었고, 곧 병원 내과의사가 되었으며 1666년에는 전임 교수, 1670년에는 시 사서(city librarian) 그리고 1681년에는 자연 및 예술을 위한 러시아 아카데미(Russian Academy for Nature and Art)의 회원이 되었다. 브라지우스는 스밤메르담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니콜라스 스테노(Nicholas Steno)와 같은 젊은이를 격려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스테노의 첫 해부학적 발견은 양의 머리 속에 있는 주요한 구강(oral cavity) 타액원, 이하선(parotid gland) 도관을 찾아낸 것이었는데, 이는 그가 브라지우스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지 3주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브라지우스는 대부분 암스테르담 시장들에게 헌정한, 상당히 많은 양의 책을 저술하고 편집했다.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해부학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한 짧은 논고의 서문에서 그는 해부학이 그 의학적 유용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인간과 자연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라는 측면에서도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브라지우스는 해부학에 관한 저술만 출판한 것이 아니라 화학에 관한 저술도 출판했다. 더 나아가 브라지우스는 지역학당의 교수로서, 의학 협회의 지도적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병원 내과의사로서, 병원의 넓은 안마당에 위치하고 있던 암스테르담 식물원에서 수습 외과 의사들과 약제상들에게 식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수집물과 교화

유럽의 식물원은 당대의 가장 거대한 연구 실험실이었다. 식물원은 모든 곳에 있었으며 엄청난 재원을 필요로 했다. 후에 변호사가 된 영국인 윌리엄 셰라드(William Sherard)가 대륙을 여행했을 때 처음으로 간 곳이 파리의 식물원(Jardin des Plantes)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투르네포르(Tournefort)와 함께 화학과 식물학을 연구했다. 거기서 그는 라이덴의 의학교수이자 식물학자였던 파울루스 헤르마누스(Paulus Hermannus)를 만났는데, 그 역시 투르네포르를 만나러 와있던 참이었다. 헤르마누스는 셰라드를 라이덴으로 초대했다. 셰라드는, 그 자신이 1698년에 편집한 헤르마누스의 연구에 관한 책에서, 라이덴 식물원(Leiden Garden)을 현대의 에덴동산처럼 묘사했다. 그 책에서 셰라드가 언급한 것은 라이덴과 암스테르담의 놀라운 식물원들만이 아니었다. 그는, 오라녀(Orange)공과 헤이그 근방의 ‘조그플리트(Sorgfliet)’에 있는 한스 빌렘 벤팅크(Hans Willem Bentinck)의 정원(garden)들, 바몬드(Warmond) 근방의 ‘오드 데이링어(Oud-Teylinghe)'에 있는 이로니무스 베버닝(Hieronymus Beverning)의 정원들, 노오드베이커하우트(Noord-wijkerhout) 근처의 ’뢰벤호스트(Leeuwenhorst)'에 위치한 카스파 파글(Caspar Fagel) 소유의 정원들, 다니엘 데스마트(Daniel Desmaret)나 헤이그에 있는 시몬 반 보몽(Simon van Beaumont), 할름(Haarlem) 근방의 ‘스파른하우트(Sparen-Hout)'에 있는 필립 드 플린(Philips de Fline)의 정원들, 그리고 요하네스 반 리트(Johannes van Riedt), 풀라스 부인(Frau Pullas), 루넌(Loenen) 지방의 ’베버호프(Vijverhof)'에 위치한 아흐너스 블로크(Agnes Block)의 정원들과 같이 그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사설 정원들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부학 강당 역시 정원들과 마찬가지로, 최신 지식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장소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부학 이미지들은 신체, 생명의 숨겨진 구조, 우리 각각에 임박한 죽음 그리고 이 세상의 덧없음에 관한 도덕적 의미로 가득차있었다. 스스로 이러한 의미들을 곧잘 감득(感得)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라이덴에서 해부학 강의가 열리지 않았던 봄부터 가을까지 대학 해부학 강당은 인간의 해골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그림 3.1). 말하자면 몇몇은 짧은 삶에 관한 라틴어 모토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고, 한명은 덧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소를 탄 채 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으며, 나무 옆에 서 있는 둘은 아담과 이브임을 식별케 해주는 상징물을 들고 있는 식이었다. 아래의 벽에는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 관한 다양한 도덕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예술작품들이 걸려있었다. 거기에 더해 각 도시의 예술적 전통 역시 개별 도시의 상이한 해부학 수행 방식과 관련돼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자연에 관한 연구는 엄청난 노력과 세세한 항목들에 대한 관심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한 가지 점에서 우리는 존 맨드빌 경(Sir John Mandeville)의 『여행기』(Travels)에 나오는, 흥미롭지만 믿기지 않고 기적 같기만 한 14세기의 이야기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즉,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혼란스러움 아래에 하느님의 섭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스밤메르담, 레벤후크 그리고 대다수의 다른 네덜란드 자연사학자와 자연철학자들의 정서적 성향은 영국에서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네덜란드에서는 ‘물리-신학(physico-theology)'이라 불렸던 것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이 모든 탐구의 목적을 분명히 해보자면, 맨드빌과 스밤메르담은 모든 것이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기는 하다. 맨드빌의 독자들에게 시가(詩歌)와 자연철학의 차이는 결코 분명하지 않았던데 반해, 스밤메르담의 독자들에게 하느님의 지혜야 이(louse)의 형상(figure)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를 노래한 시가는 세세한 항목들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틀림없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테브노에게, “나는 이제 이의 해부체 속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현현하심을 당신에게 설명하는 바이니, 그 해부체 속에서 당신은 경이로움이 경이로움 위에 쌓여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의 미세한 입자 속에도 하느님의 지혜가 분명히 드러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세세한 신체적 항목들은 본질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가치의 변화는 암스테르담의 또 다른 해부학 교수, 즉 암스테르담 외과의 길드(Amsterdam Surgeons' Guild)의 수장이자 조산원 감독자(Supervisor of Midwives)이기도 했던 프레드릭 라위스(Frederik Ruysch)의 연구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말 라위스는 자신의 집에 크고 유명한 수집물 진열실을 만들었다. 그 진열실은 조개껍질이나 광물에서부터 인공적 유물들과 건조시켜 보존한 식물들, 나비에서 포유동물을 아우르는 각종 동물들이 표본 슬라이드에 올려진 것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희귀한 것들과 자연에 존재하는 진기한 것들을 전시해놓고 있었고, 건조시키고 밀랍처리를 하거나 알코올 속에 보존한 해부 표본들 역시 엄청나게 많이 마련해 놓고 있었다. 라위스의 집에서 이러한 전시물들로 채워져 있던 다섯 칸의 방에는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들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표트르 대제(Tsar Peter, 1672~1725)의 경우에는 라위스가 죽었을 때 그의 상속인들로부터 상속물 전부를 사들여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그 전시관을 세울 정도였다.

라위스의 진열실에서 중심 장식물이었던 것은, 삶의 무상함을 표현하는 알레고리들에 맞춰 진열돼있던 상당수의 아기들과 태아들의 해골 무리였다. 다수의 자그마한 손가락들은 ‘vita humana lusus’(인간의 삶은 그저 게임일 뿐이다)와 같은 라틴어 모토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미라로 만들어진 아기들이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채 작은 관 속에 누워있었고, 몇몇은 유리로 만든 의안을 낀 채 방문객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압권(pièce de résistance)은 열 가지의 보물들(thesauri)이었는데, 여기에는 죽음을 주제로 하여 신장, 쓸개, 낭석을 가지고 조립했던 정교한 디오라마들, 그리고 건조시킨 정맥과 동맥으로 만든 나무에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태아의 해골이 올려져 있는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림 3.2에 그려져 있는 세 번째 보물(thesaurus)을 보면 중심 인물상은 자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아, 운명이여, 쓰디쓴 운명이여!’라고 한탄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고, 그 오른쪽에는 작은 인물상이 미세한 신장결석을 박아 넣은 지휘봉으로 음악에 박자를 맞추고 있다. 더 오른쪽으로 가면 밀랍을 주사한 양의 창자와 경화된 정관(male vas deferens)으로 만든 창을 둘러맨 해골이 있는데, 이는 사람의 첫 순간이 곧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다는 전언을 담고 있다. 이제 왼쪽 편을 보면 덧없음(vanitas)의 상징인 깃털을 꽂은 인물상이 있고, 앞쪽에는 하루살이를 손에 든 자그마한 해골상이 위치해 있다. 하루살이는 한 유명한 책에서 스밤메르담이 이미 다룬 바 있는 곤충인데, 그 책은 성체로 사는 날이 단지 하루뿐이라는 추정된 사실에 근거하여 주로 도덕적 논증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우리는 라위스의 진열실에서 자연의 세세한 항목들에 관한 엄격한 관심을 간파해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도판에 그려진 생물체에 관한 묘사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그리고 해부학 표본 상태의 생체 유물들도 주의 깊은 세심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심오한 의미를 전달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우리는 생체 유물들에서 그것들의 외적인 형태 이상을 알 수 있다. 자연에 관한 탐구가 사실상 물질주의적(materialistic)인 것이었고 도서관 밖에서 더욱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인문주의적이고 문예적인 목적, 즉 교화라는 목적과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러한 관심들을 ‘소박한’ 경험주의나 ‘엄격하지 않은’ 과학, 혹은 어떤 식으로든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근대 초기의 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그와 같은 자연사적 탐구에 바쳤는지를 차츰 깨닫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당대의 ‘거대과학’을 찾는다면, 우리는 화학을 포함한 자연사가 그 시기 [과학적 연구에 기울인] 노력 한 가운데에 놓여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천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커다란 네트워크들이, 관측은 이뤄질 것이고 진기한 것들은 보고 될 것이며 표본들은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수집될 것이라고 확신했고, 이 모든 것이, 지방민들, 협잡꾼들과 허풍선이들, 상인들과 선원들, 여행자들과 군인들, 신사들과 귀족들, 교수들과 사제들에 의해 이뤄질 것이라고 믿었다. 무엇이 ‘사실’을 구성하는가를 결정하는 일은 협동적 연구, 기술적 전문성, 그리고 책과 병 수집품, 껍질과 돌, 해부학 강당과 식물원, 유리제품, 화학제품, 도구, 기구 및 기계, 살아있거나 죽은 식물과 동물, 종이, 그림 그리고 우편가방을 이용할 권리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일의 상당 부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들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후원, 법적 보호와 허가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했다. [가령] 1680년대 당시 암스테르담 식물원을 위해 새로운 표본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운영하는 데 매년 대략 1200 길더의 돈을 쏟아 부어야 했는데, 이는 도시의 의사들과 약제상들에게 부과한 세금, 벌금 그리고 수수료에서 지불되었다. 한편 당연히도 이러한 당대의 거대과학은, 때로 호사스러운 도판을 포함하고 있는, 출판서적들과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와 같은 정기 간행물에서 자세하게 다뤄졌고, 그 와중에 부유하고 평범한 방문자 모두를,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해부학 강당과 식물원들, 진기한 것을 전시한 진열실로 끌어들였다.

결론

우리의 시선을 왕립학회 너머로 돌린다면, 우리는 자연적인 것(res naturae)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조직된 많은 공식적, 비공식적 과학 아카데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테브노와 같은 귀족 후원자를 둘러싼 파리의 여러 집단들이나 왕립 식물원(the Royal Jaridn des Plantes)은 물론이고 심지어 과학 아카데미(the Académie des Sciences)까지도 그러한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었으니, 과학 아카데미의 첫 출판물이, 후에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의 이름을 연상케 한, 동물에 관한 익명의 연구물이었음을 상기해보는 것이 유익할 수 있겠다. 데이비드 룩스는 최근에, 루이 14세의 국무대신 콜베르가 캉(Caen)에 있던 단명한 왕립 아카데미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어류해부에 쓰도록 하려 했음을 보인 바 있다. 치멘토 아카데미(the Accademia del Cimento)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초기 과학 학회들 역시 의학적 주제나 자연사적 주제에 관한 저작들을 출판했고, 해부학자 말피기(Marcello Malpighi, 1628~1694)의 명성은 갈릴레오에 버금갈 정도가 되었다.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면, 우리는 요한 로렌쯔 보쉬(Johann Lorenz Bausch) 박사에 의해 1652년에 창설되었고 주로 게르만인들로 구성돼 있었던 자연탐구학회(Academia Naturae Curiosorum)와 그 구성원들에 의해 발표되었던 많은 자연사 출판물들이나, 코펜하겐의 토마스 바르톨린(Thomas Bartholin)을 중심으로 한 덴마크 계열의 단체와 그들이 출판했던 『악타 메디카 하프니엔시아』(Acta Medica Hafniensia), 그리고 암스테르담의 사설 의학 협회를 발견하게 된다. 약간의 명성을 가진 대학이라면 어느 곳을 막론하고 식물원과 해부학 강당, 자연사 표본 수집물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은 이들에는 왕이나 주요 대학들만이 아니라 사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반인들 역시 포함돼 있었고, 직접 인간의 몸을 해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개 해부가 있을 때면 항상 지체 높은 이들은 앞자리를 차지했으며, 일반 대중들 역시 구석에나마 자리를 얻어 앉을 수 있었다. 18세기쯤 되면 현대적인 물리학 교육 방식과 유사한 자연철학 교육 전통이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7세기까지 학식 있는 이들의 서신교환뿐 아니라 정규 교과과정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주제는 자연사였다.

물론 많은 과학사가들이 주장해왔듯이 자연사적 연구는 당대의 ‘진짜(real)' 과학에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존 레이(John Ray)가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을 구분한 것이나 실비우스(Sylvius)와 보일이 알칼리와 산을 구분한 것이, 진자 운동을 둘러싼 논의들에 비하면 그 중요성이 뒤떨어지는 사소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가 대담한 새 이론의 사례를 찾을 때, 인간의 신체란 속까지 단단한 살덩어리라기보다는 대부분은 용기에 담긴 액체와 같은 것이라는 관념이나 모든 생명체는 종자나 알에서 유래한다는 관념을, 지구가 태양 주위를 운동한다는 생각과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심지어 데카르트까지도 네덜란드에 있을 당시 얼마간의 시간을 해부학적 탐구에 심취하여 보내지 않았던가.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대륙이 아닌 옥스퍼드의 사례, 즉 에드워드 타이슨(Edward Tyson)의 경우를 마지막으로 검토해보도록 하자. 그는 로버트 플롯(Robert Plot)이 개인 지도교수이자 자연사 교육 편성을 담당하고 있던 마그달렌 홀(Magdalen Hall)로부터 1667년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타이슨은 뛰어난 [학자였던] 로버트 모리스 아래에서 식물학을 공부했을 것이고,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타이슨의 해부학적, 식물학적 연구에 관한 글을 썼던 플롯과는 분명히 해부학을 함께 공부했을 것이다. 1677년 런던으로 옮긴 뒤에 타이슨은 자연사의 저명한 후원자였던 로버트 후크를 방문했었는데, 후크는 타이슨을 보살펴주었고, 그를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추대해주었다. 타이슨은 이내 런던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지도적인 인사가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는 파리와 암스테르담에서 행해지고 있던 비교 해부학 연구들에 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쓴 『오랑우탄』(Orang-outang)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한편 타이슨은 후크와 함께 하루살이의 일생에 관한 스밤메르담의 책 『생명일지』(Ephemeri vita)의 영어 번역본을 출판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타이슨의 전기를 쓴 애쉴리 몬테규의 말을 빌리자면, 돌고래(porpoise)에 관한 타이슨의 해부학은 “단순히 일반 생물학의 방법을 약술하고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일반 의학의 방법에 대해서도 소략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데, 항상 체계적이고 실험적인 방법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의학은 인간에 관한 실험 생물학으로서 자연사의 영역에 도입되고 있다 ...”

요컨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연사학자들은 사실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사실은 정말로 중요했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선구적 탐구 기법들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 기술, 시간 그리고 자원들을 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실들을 직접 획득하는 것에만 신경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실용적인 이로움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에 깔려있었던 더 깊은 목적은 도덕적 교화였다. 그러한 교화는 어떤 이들에게는 혁명적으로, 심지어는 전복적으로까지 보였던 보편적 원리들을 상술하는 것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세세한 항목들에 정통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었다. 한편, 한스 슬로안과 같은 이들에게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지루한 일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새로운 모험으로 여겨졌다. 사물들의 집적(assemblage of things)은, 사람들에게 도덕성을 상기시키는 강당뿐 아니라 천국에나 있을 법한 정원도 창조해냈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이란 개념은 틀림없이 이와 같은 거대과학, 당대의 최전선의 연구를 포함해야만 할 것인 바, 그렇지 않다면 적절치 못한 개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조지 사튼으로 돌아가 보자. 50여 년 전 사튼은 타이슨에 관한 애쉴리 몬테규의 책에 서문을 쓴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타이슨이 행한 해부학적 분석이 가치 있다는 것은 그리 과장이 아니며, 나는 그의 『오랑우탄』(The orang-outang)이 과학사의 획기적인 저작 중 하나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물론 나로서는 이 저작이 『인체 해부에 대하여』(Fabrica, 1543)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Revolutiones, 1543) 혹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 1687)와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문제는 내가 토론하고 싶지 않은 문제이다. 그처럼 상을 나눠주는 일은 역사가들의 임무가 아니다.... [그저] 『오랑우탄』은 과학과 철학에 신기원을 이룩했던 저작이었다라고 기술해두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타이슨이 베살리우스, 코페르니쿠스 혹은 뉴턴과 같은 대중적 명성을 얻지 못했기에 다소 강하게 주장할 필요는 있겠다.

동감이다(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