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Innovation to Use: ten eclectic theses on the history of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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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Edgerton, "From Innovation to Use: ten eclectic theses on the history of technology"

지금까지의 기술에 관한 역사는 기술보다 혁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둘의 혼동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혁신’과 ‘사용’을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기술사와 일반사 사이의 결합을 꾀할 수 있으며, 또 둘의 구분은 기술사에서 ‘성’, ‘인종’, ‘계급’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사용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우리는 ‘기술 결정론’과 같은 개념을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혁신의 역사는 기술사의 핵심에 있는 논점을 놓치고 있으며, 기술사의 많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사용-기술의 역사는 새로운 탐구 영역(예컨대 유지, 보수, 리모델링)을 열어주며, 사용에 기반해서 혁신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자신의 논제들은 각각 독립적이지만, 각각은 서로 얽혀 있음.

자신의 논제들이 절충적(짜깁기식의, eclectic)이라고 말하는 이유.

  • 첫째, 자신의 논제들은 현대 기술에 큰 관심
  • 둘째, 자신의 논제들은 역사에서의 기술의 역할에 관한 여러 다른 전통에서 뽑아져 온 것. 따라서 논제들은 해체될 수도 있음.
  • (셋째, 자신의 재료들은 모두 영국 사례)

10개의 논제는 아래와 같다.

  1.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널리 사용되는 기술을 다루어야 하지만, 실제 기술사 또는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글들은 모두 혁신, 즉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은 혁신에 관한 연구와 널리 사용되는 기술(필연적으로 오래되고, 흔히 시대에 뒤떨어진데다가 폐기되었거나, 단지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에 관한 연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2. 혁신의 역사와 사용-기술의 역사는 지리적으로, 연대기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매우 다르다.
  3. 혁신과 기술을 혼동(conflation)은 국가사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국가는 전체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다.
  4. 혁신에 치중된 기술 연구는 기술사와 일반사 사이의 진지한 결합에 어려움을 초래한다. 역으로 일반사적인 문제들과의 결합은 사용-기술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5. ‘기술 결정론’은 사회가 사용-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술적 혁신이 사회 변화를 결정한다는 불합리한 논제로 정의되고 공격받아 왔다.
  6. 기술 결정론은 기본적으로 사회 이론이지 기술 이론이 아니다.
  7. 기술의 퍼진 정도는 그 중요성에 관한 절대적 척도가 아니다.
  8. 발명과 혁신은 대개의 경우 사용을 이끌지 않지만, 사용은 자주 발명과 혁신을 이끈다.
  9. 혁신과 사용-기술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지식의 변화와 사용-지식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10. 기술에 관한 혁신-중심적이고 지식-중심적인 설명은 20세기 문화의 핵심에 있다.

이제 각각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널리 사용되는 기술을 다루어야 하지만, 실제 기술사 또는 기술과 사회 관계에 관한 글들은 모두 혁신, 즉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만 관심을 두고 있음. 그들은 혁신에 관한 연구와 널리 사용되는 기술(필연적으로 오래되고, 흔히 시대에 뒤떨어진데다가 폐기되었거나, 단지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에 관한 연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

기술과 사회의 연구가 사용-기술에 관한 연구여야 하는 것은 당연! 예컨대, silk-throwing machine은 Thomas Lombe(1685-1739) 이전에는 경제사에서 나타나지 않음. 경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은 발명이 아니라 ‘채택’과 ‘사용’이다. 경제사가들은 기술 장치의 기원만큼이나 그것의 ‘확산’도 중요하게 다룸.

랭던 위너 : 새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몇 십 년 전 개발되어 영향을 주어 지금은 인간 세계 질서의 구조의 일부가 된 기술과 장치에 관한 진지한 관심은 거의 없음.

네이던 로젠버그 : 누가 먼저 발명했나에 관한 관심 많음. 그러나 새 기술이 채택되고 생산과정에 장착되는 비율에 관해서는 관심 별로 없음. 확산 과정은 흔히 주어진 것처럼 간주되어 왔음. ‘발명은 오직 그것이 도입되고 널리 확산될 경우에만 경제적 중요성을 얻음’

폴 스톤맨 & 폴 데이비드 : 생산과 생산의 질의 개선을 결정하는 것은 새 기술의 개발 비율이 아니라 상업적 작업에 그것을 적용하는 속도와 정도임.

빈센티, 캐롤 퍼셀, Svante Lindqvist : 역사가들 새 기술, 변화 시기에만 관심. 그러나 혁신 중심의 역사의 위험성 있음 지적. 사용과 ‘사라짐’에 대한 관심 촉구.

용어의 유무 창작과 새로움에 관한 용어 : 발명, 혁신 사용의 증가 : 채택(적용), 확산 사용 및 사용의 감소 - ??

실제 Technology and Culture 저널의 대다수 논문들은 혁신에 치중되어 있음. Staudenmaier는 이 저널이 노동자와 기술, 전파에서의 문화적 충돌, 비서구 기술, 자본주의 비판, 여성과 기술에 관한 연구가 실리지 않는다고 비판했지만, 그것이 혁신과 사용-기술의 구분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 못함. 에저튼이 보기에 이들이 무시된 중요한 이유는 둘의 구분 실패에 있음. 루스 코완 등 기술 사용에 관한 연구자들 생겨났지만, 혁신과 사용-기술 구분의 중요성을 완전히 개념화하지는 못함.

혁신의 연대기는 잘 정리되어 있음. 기술 ‘혁명’의 관점에서 다루어짐. 그리고 그 연구는 지리적으로 매우 좁은 지역, 즉 서구 유럽만을 다룸. 이는 산업혁명이라는 것 때문에 정당화되고 있음.

최근 어떤 연구가들은 혁신에 관한 심화된 사례 연구를 통해 문제를 섞고 있음. 물론 더 큰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분명 그들은 확산 단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 초기 단계까지만 다룬다. 예컨대 바이커의 자전거 연구는 1890년,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 연구는 1920년, 형광등 연구는 1945년에서 끝난다!

2. 혁신의 역사와 사용-기술의 역사는 매우 다르다. 지리적으로, 연대기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혁신 활동은 생산 활동보다 국가, 지역, 회사의 측면에서 매우 좁은 곳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1945년 이후 혁신의 대부분은 미국 및 일부 국가에서만 담당하지만, 그 사용 및 생산은 모든 국가에서 이루어진다.

혁신과 사용은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기술은 보통 확산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혁신은 빠른 확산 시기에 생산성 증가에 큰 영향을 주는데, 그 시기는 혁신의 시기보다 오랜 뒤의 일이다. 예컨대 증기기관은 1800년보다 1900년에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더 중요했다. (세계적으로) 석탄 소비량은 1980년대까지 계속 증가했으며, 영국에서조차 석탄 소비량은 1950년대에 피크였다. 19세기 말의 특징으로 꼽히는 새로운 과학 기반 산업(전기)은 산업 혁명기의 ‘오래된’ 산업에 의해 방해받았기 때문에, 그것의 피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달성됐다. 미국 생산성에 대한 전기의 영향은 19세기 말이 아니라 1,2차 세계 대전 중에야 나타났다. ‘옛’ 기술조차도 새로운 살 길을 찾는다. 자동차 생산이 증가하고 있지만, 1960년대 말 이래 한 해 자전거 생산량은 자동차 생산량을 넘어선다.

소비제의 경우, 미국과 유럽의 첫 채택 시기는 별 차이가 없지만, 실제 널리 사용되는 시기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예: 가전제품 1920 vs. 1950) 특정 환경에서는 매우 오래된 기계가 현재까지 사용되기도 하는데, 우루과이에서는 아직도 미국산 1920년대 자동차가 거리에서 다니고 있다.

혁신과 사용은 사회적 계급, 지위, 성, 인종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혁신은 상위 계급의 남성 백인에 의해 대부분이 이루어지지만, 사용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이루어진다. 즉 혁신에 대한 연구는 여성, 흑인, 가난한 사람의 기술적 경험을 간과하게 된다. 20세기 평균적인 사람은 미국 발명-사업가보다는 중국 농부에 가깝다!

3. 혁신과 기술을 혼합은 국가사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국가는 전체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다.

국가 기술사의 전통 있음. 주요 발명 국가와 주요 사용 국가는 일치하지 않는다. 새 기술을 습득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외국으로부터의 수입이다. 한 국가의 사용 기술은 대부분 자국보다 외국에서 발명된 것이다.(예외가 있다면 19세기 영국,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기술 ‘이전(transfer)’. 선진국 -> 후진국으로의 기술 이전만 생각. 그러나 선진국->선진국으로의 기술 이전이 보다 중요하고 흔하고 근본적이다.

이러한 혁신과 사용기술의 국제적 성격은 국가의 혁신이 국가의 경제성장을 추동한다는 가정에 일격 가함. 국내 혁신은 국가 기술의 주된 원천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 혁신과 국내 성장률은 분명한 긍정적 상관관계 없음. 상관관계가 있다면 오히려 부정적일 것.

4. 혁신에 치중된 기술 연구는 기술사와 일반사 사이의 진지한 결합에 어려움을 초래한다. 역으로 일반사적인 문제들과의 결합은 사용-기술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일반사가들의 기술사에 대한 관심 부족은 놀라운 일이 아님. 실제 혁신의 연대기와 일반사의 연대기는 근본적으로 다름. 사용기술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 일반사와 기술사는 접점이 만들어질 수 있음. (계량 경제사의 영향을 받은) 증기기관의 확산과 영향 연구는 사용에 초점 맞추고 있으며, ‘노동 과정’사는 제조 기술 연구를 낳고, 여성사 연구는 사용 기술 연구의 새 영역 열었음.

혁신에서 사용-기술에 관한 연구는 기술 자체에 관한 연구와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 기술의 사용에 관한 연구와 사용-기술에 관한 연구 구분될 필요 있음.

사물에 관한 연구라는 더 넓은 개념이 통찰을 줄 수 있음. Brand의 건물들의 변화(리모델링) 연구는 중요하지만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주제임. 지속적인 소규모 리모델링이 이루어짐. 집, 다리, 배의 역사도 생각할 수 있음. 유지, 보수, 리모델링, 재사용, 재활용의 과정은 물질 문화에서 근본적이었음. 그러나 초기 창조에 대한 강조 때문에 무시 받아 왔음.

5. ‘기술 결정론’은 사회가 사용-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기술적 혁신이 사회 변화를 결정한다는 불합리한 논제로 정의되고 공격받아 왔다.

많은 사람들은 기술 결정론은 혁신 결정론과 혼동. 그러나 혁신 결정론과 기술 결정론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술 결정론이란 논제는 다음과 같음 : 사회는 사용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퍼듀 : 현대 사회에서 기술 결정론의 평가하기 힘듦. 왜냐하면 새 기술은 옛 기술이 충분히 쓰이기도 전에 나타나기 때문. 느리게 변하는 사회에서 특정 기술의 효과가 더 분명하게 보임! 혁신의 결여는 다음을 제안할 수도 있음 : 옛 사회는 혁신적인 사회보다 더욱 기술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결정되어 있다. 혁신 결정론은 오직 빠르게 혁신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에만 적용.

기술 결정론은 주로 변화에 관심이 있지 않음. 따라서 방향이나 변화에 관해 특정하게 말을 할 필요가 없음. 그것은 진보에 관한 나이브한 설명이 아님. 혁신 결정론은 변화에 관심이 있으며, 보통 나이브한 진보주의자이다.

사회구성주의 및 사회-기술 공동 구성주의는 기술결정론을 비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혁신 결정론을 비판하는 것일 뿐. 혁신 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쉬움 : 첫째, 혁신 중 극소수만 널리 사용된. 둘째, 사용의 정도가 효과를 결정하지 혁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님. 물론 기술 결정론도 원리적으로는 쉽게 반박됨. 그 논제는 기술뿐 아니라 기술의 사용 정도도 주어진 것으로 보는 매우 강한 가정을 깔고 있음. 이를 반박하기 위해 우리는 기술의 사용 정도가 내적으로(endogeneously) 결정된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다. 사실, 기계와 구조물은 유지, 보수를 필요로 하고, 그것들은 변하며 리모델링된다. ??

6. 기술 결정론은 기본적으로 사회 이론이지 기술 이론이 아니다.

기술 결정론은 사회의 구조와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이면서, 사실 사회 이론 중 변방에 위치한다.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쉽게 반박된다. 맷돌은 봉건세를 낳고, 증기기관은 산업 자본주의를 낳는다는 말. 증기기관은 사회주의에서도 장착될 수 있으며, 맷돌 또한 모든 사회체제에서 살아 남아 있다.

마르크스의 기술결정론 실패가 모든 기술결정론 실패를 뜻하진 않음. 기술이 조금도 역사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분명 현대 사회와 현대 기술의 광범위한 사용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다. 혁신 연구는 그 관계의 본성을 밝힐 수 없으며, 사용-기술 연구는 아직 그 관계의 본성을 밝히기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7. 기술의 퍼진 정도는 그 중요성에 관한 절대적 척도가 아니다.

어떤 큰 효과를 특정 기술, 특히 문화적 가시성이 있는, 눈에 띄는 기술(예: 비행, 핵발전 등) 탓으로 간주하는 경향 있음. 눈에 안 보이는 기술(예: 피임 기술)은 흔히 저평가됨. 어떤 기술의 중요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가장 많이 쓰이는 측정 방법은 ‘사용 정도’.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측정 방식에 문제 있다고 생각. 중요성 측정은 언제나 ‘대안’과 ‘기회 비용’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 즉 어떤 기술의 사용과 대안 기술의 사용 사이의 비용-이익 차이가 바로 기술의 중요성 척도임. 이를 망각할 때는 엉뚱한 생각 하게 됨(예: 클립 없이는 관료제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대안을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음. 이를 위해서는 반사실적인 상상 필요. 이러한 방법을 통해 Fogel은 19세기 미국 철도에 대한 과대평가 지적하면서 (다른 수송기술과의 비교를 통해) 보다 낮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됨. Von Tunzelman도 증기기관의 중요성에 대해 (수력기관 등의 에너지 기관과의 비교를 통해) 재평가했더니 생각보다 무척 작아짐.

기술선택에 관한 연구는 대안이 흔히 존재하며, 또 한 기술이 다른 기술을 대체했다는 것이 그것의 월등함의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술 대체에는 다른 요인들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대안에 비해 복리를 줄이는 사용 기술의 사례도 있음(대표적인 사례로는 핵발전). 게다가 사회는 실제 대안보다 못한 기술에 갇히게 될 수도 있음.

8. 발명과 혁신은 대개의 경우 사용을 이끌지 않지만, 사용은 자주 발명과 혁신을 이끈다.

사회는 혁신 중 대부분을 버리고 일부만을 선택한다. 대부분의 기술은 방해받았으며, 그래야 했다. 그러나 혁신 연구의 대부분은 확산에 성공한 것들에 관한 연구이다. 또 혁신 연구는 대부분 단절적인 변화에 편향되어 있다. 예컨대 과학으로부터 온 변화.

“즉 혁신 연구는 미래에 의해 체계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우리는 나중에 (확산에) 성공한 혁신에 관해 연구한다. 우리는 나중에 지배적이 된 유형의 혁신 기관의 전사를 연구한다. 그리고 나중에 전형적이 된 과학-기술 관계에 관해 연구한다.”

예컨대 우리는 19세기 말을 볼 때, 화학과 전기에서의 ‘과학 기반’ 혁신에 초점을 맞추며, 초기 산업 연구소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19세기 대부분의 혁신은 다른 영역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대부분 개인 활동에 기초해 있었다. 사실 발명 활동은 미래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당시와 과거에 의해 모양지어진다. 혁신은 ‘새’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옛’ 산업도 혁신이 이루어진다. 20세기 혁신은 석탄 채굴, 철강, 조선, 직조에서 모두 나타난다. 1900년 무렵 산업 연구소는 혁신에 아주 조금 공헌했을 뿐이며, 지금도 R&D는 혁신의 여러 원천 중 하나일 뿐이다. 더구나 대부분 생산에서의 변화는 점진적이다. 예컨대 자동차나 비행기 디자인(상의 점진적 변화)에 관한 무시는 20세기 기술 변화의 이미지를 오도하기 마련이다.

또 다른 중요한 질문 : 어떻게 기술의 사용과 사용-기술이 혁신에 영향을 주는가? Schmookler의 특허 연구에 따르면, 특허는 기술의 사용의 변화에 반응한다. 또다른 혁신에 관한 설명에서는 사용-기술의 작은 점진적인 변화의 축적에 초점을 맞춘다. 혁신의 경로-의존성에 따르면, 혁신은 실제로 사용되는 기술이 무엇인지와 사용 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사용 중에 발생하는 ‘병목 현상’이나 ‘역돌출’ 자체는 점진적인 혁신과 급진적인 혁신 모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추가적으로, 사용 그 자체는 ‘learning by doing’과 ‘learning by using’으로부터 사용의 효율성 증가를 이끈다. 즉 모든 변화가 기계와 과정에 귀착되지 않음을 상기시켜주며, 전문성이나 ‘노하우(know-how)’가 꼭 구체화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켜준다.

9. 혁신과 사용-기술을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지식의 변화와 사용-지식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혁신의 역사에서 초기 R&D를 강조하는 이유는? 연구소에서 지식에서의 혁신을 산업과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

보통 사람들은 과학을 지식 덩어리로 간주.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님. 발전하길 멈춘 과학적 지식 덩어리는 더 이상 과학이 아님. ‘과학적’은 ‘지식 만들기’를 함축. ‘in the making’ 중이 아닌 것은 과학으로 간주될 수 없음.

지금 역사 연구들은 연구에 종사하는 과학자와 기술자에 관한 연구에 편향되어 있으며, teaching, routine testing, management, maintenance와 같은 다른 형태의 활동에 관한 연구는 없음.

잉크스터(Inkster)가 지적했듯이, 국가의 기술적 능력은 그들의 연구 능력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결국 보통 우리가 과학의 역사라 불리는 것은 (프런티어에서 일어나는) 지식 혁신의 역사이지 지식 전체의 역사가 아니다. 변화하는 지식을 지식과 동일시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폭력일 뿐 아니라 현재에 대한 폭력이다. 혁신이 과학과 기술의 일상이 된 19세기 말 이후에도, creating은 knowing의 작은 요소에 머물러 있었다.

기술의 사용은 연구소의 설립 이전부터 formal 지식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 연계는 분명 지속되어 왔다. 분석, 유지, performance of routine practices는 단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일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정립되고 관례가 된 영역에서 새로운 영역으로의 지식 이전은 새 영역에서의 혁신이라 부를 만한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혁신은 이미 존재하는 지식에 의존할 뿐 아니라, 혁신적 과정에 존재하는 지식을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의존한다. 예컨대 새로운 산물과 과정에 대해 테스트하는 표준 절차는 오래 전부터 정립된 절차였다.

이제 아래에서는 ‘발명의 발명’, ‘발명의 산업화’, ‘혁신의 루틴화’의 중요성을 지적할 것이다.

10. 기술에 관한 혁신-중심적이고 지식-중심적인 설명은 20세기 문화의 핵심에 있다.

기술, 과학, 지식에 관한 혁신 중심적인 관점은 deeply 제도화되어 있다. 과학 기술 정책이란 연구와 혁신에 관한 정책을 의미하지 과학과 기술 모두에 관한 정책이 아니다. R&D와 같은 혁신에 관한 통계 조사는 있어도 기술 사용이나 확산에 관한 통계 조사는 거의 없다. 확산과 사용은 시장 조사의 영역이 되었다. 사용-기술은 기술에서 빠져 차, 비행기, 물, 정기 등, 일상의 흔해 빠진 비품이 되었다.

왜 혁신이 이토록 강조되었을까? 퍼셀 : 백인 남성이 썼기 때문. -> 대부분 그들도 사용자이지 혁신가 아님. 바살라 : 1) 앞선 일의 망각 혹은 은폐, 2) 영웅, 특히 국가적 영웅으로서의 발명가의 출현 (특허 제도도 한 몫) 3) 기술의 혁명적인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대한 과대평가. MacLeod : 영웅으로서의 발명가 이미지는 특허 분쟁과 함께 19세기 3/3분기 정착. David Nye : 실제로 존재하는 기계에 대한 경외감에서 최근과 미래 기술에 대해서만 경외감을 가지게 된 미국인들의 기술에 대한 태도 변화 1930년대 말 무렵, 기술 박람회는 주요 회사 연구소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를 사람들의 상상 속에 심어줌. 기술적 장난감의 역사도 비슷한 과정 보여줌. 세계 대전 기간, 장난감은 당대 practice를 반영했음. 1950년대 무렵, 장난감은 아직 사용되지 않는 기술로의 강한 편향성을 보여줌. Paul David : Futurism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

기술적 변화에 대한 수사와 실제 사이의 큰 간극 존재. ‘a remarkably dynamic society that goes nowhere’ 역사가의 중요한 임무는 이 ‘변화 없는 변화’를 설명하는 것!

혁명적, 미래-지향적인 수사학은 기술 담론의 지배적인 방식. 그런데 혁명적 수사학 자체는 시간이 흘러도 별로 바뀌지 않고 있음!

통신 기술이, 즉 철도가, 증기선이, 라디오가, 비행기가, 이제는 인터넷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장담. 그들은 세계가 작아지고 사람들이 함께 하게 되고 영원한 평화가 정착될 거라 주장. 반대로 파괴 기술도 평화를 가져다 줄 거라고 주장. 철갑선이, 다이너마이트가, 폭격기가, 핵폭탄이! 그러나 이들 주장이 맞으려면, 그들은 자기 주장의 역사를 부정해야 할 것. 폭격기는 1945년 평화-창조의 기술이기를 중단. 핵폭탄이 폭격기의 자리를 대신할 때, 핵폭탄은 동일한 논증 반복. 최근 역사와 연재에 대한 망각은 지속적이며 체계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최근의 역사까지 망각시키고, 그럼으로써 새 기술의 새로움에 관한 완전히 잘못된 얘기를 하는 것이다. 새 기술은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지속적인 ‘문화적 지체’에 시달리게끔, humanity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정보 기술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편 시스템, 전신, 라디오, 텔레비전을 잊는다. 유전 공학은 품종 개량이나 우생학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결론

기술적 미래주의는 우리의 historiography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혁신 편향성을 계속해서 재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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