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c of Discovery or Psychology of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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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rted>Zolaist님의 2018년 2월 21일 (수) 11:1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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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은 과학에서 시험의 역할을 강조하는 포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과학은 비판적 논의에 대한 포기를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쿤은 포퍼를 비판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의 논변을 제시한다. 첫째, 현행 이론을 극도로 긴장시키는 종류의 시험을 통해 과학을 특징지우려고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시험은 정상과학보다 과학의 혁명적 국면에서나 나타나는 매우 드문 일이다. 둘째, 심지어 과학의 혁명적 국면에서도 시험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과학혁명의 주요 사례에서, 예컨대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경우, 기존 이론은 시험에 의해 반증되기도 전에 새 이론에 의해 대체되기 때문이다.

비판적 논의에 대한 포기로서의 과학

포퍼에 따르면 과학자는 명제 또는 이론을 시험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쿤이 보기에 이는 애매하다. 시험되는 것이 명제(가설 혹은 하나의 추측)인지 이론인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이론에 대한 시험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상과학기에 과학자는 현행 이론을 게임의 규칙으로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과학자는 퍼즐을 풀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추측(가설)을 시험하며, 만약 그것이 시험에 통과되지 못하면, 현행 과학(이론)이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과학자 자기 자신의 능력이 비난받게 될 뿐이다. 즉 정상과학에서 시험받는 것은 현행 이론이 아니라 개별 과학자(와 그의 추측)이다.

포퍼는 이론에 대한 시험을 강조하는데, 그가 "강조하는 시험은 용납된 이론의 한계를 조사하거나 혹은 현행의 이론을 극도로 긴장시키기 위해 수행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연소/하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실험이나 1919년 에딩턴의 일식탐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 전체를 전복하는) 극도로 파괴적인 시험은 소위 비통상적인 탐구(extraordinary research)에서나 일어나는 매우 드문 현상이다. 즉 포퍼는 과학의 혁명적 부분에만 적용되는 것을 가지고 전체 과학을 특징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을 다른 활동과 가장 잘 구분시켜주는 것은 비통상적 과학의 국면보다는 정상과학이며, 정상과학기에는 포퍼가 말하는 종류의 시험은 발생하지 않는다.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짓는 뚜렷하고도 결정적인 기준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상과학활동에서 나타나는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과학 분과들의 역사를 볼 때, 전과학(철학적 활동)에서 과학으로의 전환을 특징짓는 것은 (근본원리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대한 포기이다.[1] 한 분야에서 그러한 전환이 일단 이뤄지면 비판적인 논의는 오직 그 분야의 기초가 위태롭게 되는 위기의 순간에만 다시 발생한다. 경쟁적인 이론들 중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마치 철학자처럼 행동한다. 오직 이 시기에만 이론 체계에 대한 포퍼식의 시험 및 선택이 이뤄진다. 그러나 그 선택의 순간에도 시험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어떤 시험이 결정적이려면 시험 통과/실패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엄격한 시험은 이론간의 선택이 이루어지는 비통상적 연구활동보다 오히려 퍼즐풀이 활동이 이루어지는 정상과학의 특징이다.[2] 그러나 어떤 퍼즐 풀이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을 때 비난받는 쪽은 이론이 아니라 과학자 개인(의 추측)이다. 퍼즐풀이의 실패가 이론의 실패로 보이는 때는 특별한 위기상황이 도래했을 때이며, (더구나 그 시기가 되면 시험 통과/실패의 기준은 오히려 모호해진다.)

점성술의 예

포퍼와 쿤은 점성술을 사이비과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다르다.

포퍼에 따르면, 첫째 점성술은 애매모호한 예측을 통해 반증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점성술은 그동안 명백히 실패한 예언을 한 바 있다. 둘째, 점성술은 자신의 예측 실패를 여러 핑계로 설명한다. 예컨대 점성술사들은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엄청나게 복잡해서 관련된 자료의 미소한 오차에도 극도로 민감하다는 점을 든다. 성좌와 여덟 개 행성들의 배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한 사람의 출생시 그 배치를 계산하기 위해 쓰였던 천문도는 악명높게도 불완전한 것이어서, 사람들의 출생 순간에 대해 충분히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점성술사의 예언이 가끔씩 실패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에 대한 설명은 의학, 기상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화학, 천문학에서도 흔히 제시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점성술사들의 실패 설명 방식에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점성술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점성술은 100여년 전 공학이나 기상학, 의학 분야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점성술을 비롯해 이들 이론들은 꽤 쓸모 있는 원리만을 제공했다. 물론 실패의 재발을 막으려면 더 정연한 이론과 보다더 강력한 규칙이 있어야 했지만, 그것이 당장 없다는 이유로 꽤 신빙성이 있으면서 필요하기도 한 분야를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들은 과학으로서의 특징을 갖추지 않았다.

천문학과 비교했을 때, 천문학은 예측에 실패하면 이는 퍼즐을 제공하며, 천문학자들은 주전원, 이심원, 대심 등의 수학적 도구들을 보정하거나 천문학적 기술을 개혁하는 방식으로 그 퍼즐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때 사용된 도구와 더불어 천년 이상 천문학적 탐구의 전통을 구성하는 이론적이며 수학적인 퍼즐이었다. 그에 비해 점성술사는 그러한 퍼즐을 전혀 지니지 않았다. 실패가 되풀이되는 것은 설명될 수 있지만, 그 특정한 실패가 연구를 위한 퍼즐을 제공해주진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에게도 그러한 실패는 점성술의 전통을 개혁하기 위한 건설적인 시도로 활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실패들은 대부분 점성술사의 능력과 책임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이기에 그 실패를 이유로 개인을 탓할 수 없었으며, 개개의 실패 사례들은 개선을 위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즉 천문학의 퍼즐 풀이 전통에 상응하는 것이 점성술에는 결코 없었다.

  • 천문학 : 예측 실패 -> 퍼즐 제공 -> 도구 보정, 계산 수정 등등 -> 퍼즐 해결 -> 계속 반복 (실패가 특정 개선에 의해 해결 가능하다는 믿음 있음)
  • 점성술 : 예측 실패 -> 실패의 설명 but 실패의 이유는 개인의 능력과 책임의 범위를 넘어섬 -> 풀어야 할 퍼즐이 없음 (실패가 너무 막막)

혁명과 시험

또한 포퍼는 과학이론의 대체에서 시험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어떤 이론들(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실제로 시험되기도 전에 대체되었다. 16세기 프톨레마이오스는 아직 조정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따라서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은 시험에 실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코페르니쿠스를 포함한 소수의 천문학자는 접근방식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형적인 것이다. 즉 과학의 징표를 시험에 둔다는 것은 과학자들이 대부분 행하고 있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며, 또한 과학자들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간과하는 것이다.

각주

  1. 포퍼는 과학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비판적 토론 전통에 두고 있지만, 그들의 활동은 결코 과학을 닮지 않았다. 그러한 활동방식은 헬레니즘 시대의 수학, 천문학, 통계학, 그리고 광학의 기하학적 부분들의 퍼즐 풀이에 밀려 포기되었으며, 그 이후의 다른 과학들도 동일한 변화 과정을 거쳤다.
  2. 쿤은 퍼즐풀이의 시험 통과 기준을 이론 또는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패러다임 덕분에 퍼즐풀이의 시험 기준이 더 명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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