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ing and Necessity

크립키에 따르면, 이름(고유명사)은 (단일 혹은 다발의) 속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이름은 단지 특정 대상을 지시할 뿐이며, 이름은 모든 가능 세계에서 (그것이 존재한다면) 동일한 한 대상만을 가리키는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이다. 이의 귀결로서 이름, 즉 고정 지시어 사이의 동일성 진술(예: 새벽별은 저녁별과 같다)은 그것이 비록 경험적 사실임에도 (형이상학적) 필연적 사실임을 논한다. 더 나아가 이름(고유명사)뿐 아니라 자연종 용어의 고정성을 논하며 본질주의를 옹호한다.

이 책이 쓰여지던 당시 영미 철학계에서, 이름은 속성들의 다발을 뜻했고, 가능세계란 논리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또 경험적 명제는 필연적일 수 없고, 본질주의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크립키는 영미철학계의 지배적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요약

고유명사 vs. 한정기술구

한정기술구 이론이나 다발 이론에 따르면, 단일 기술어구 혹은 다발의 기술어구들은 고유명사(이름)의 지시체를 확정해 준다. 예컨대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존재 진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속성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라 불린 x는 존재한다는 것은 거짓이다"와 같은 진술로 변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고유명사는 한정기술구와 동일시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과 같지 않다. ‘닉슨’은 ‘미국의 37대 대통령’과 같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이 아닐지 모르며, 닉슨은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안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트머스’라는 지역이 ‘다트 강 하구’로 한정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다트 강이 말라버리거나 그 행로를 바꾸어 더 이상 그 지역이 다트강의 하구에 있지 않게 된다면? 한정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이 경우 그 지역을 계속해서 ‘다트머스’라 부르는 것은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 지역이 더 이상 다트 강 하구에 있지 않더라도 ‘다트머스’라는 이름으로 그 지역을 문제없이 부를 수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언제나 그를 지시하지만, ‘이중 초점 안경의 발명가’라는 한정 기술구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중 초점 안경의 발명가’는 다른 가능 세계에서 또는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 벤자민 프랭클린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름은 한정기술구로 한정되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한정기술구에 따르면, 반사실적 상황에서는 그 이름의 대상이 바뀌어 버리는 문제를 안고 있다. 우리는 이름을 가지고 어떠한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동일한 대상을 지시할 수 있다. 즉 이름은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 이를 크립키는 고정지시어라고 불렀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은 이름은 고정 지시어이지만, ‘이중 초점 안경의 발명가’와 같은 한정기술구는 비고정 지시어이다.

인과적 지시론

크립키에 따르면 최초의 명명 단계에서는 기술 이론이 적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그러한 기술에 부합되는 대상에 특정한 이름을 부여한 이후에는, 이름은 애초의 기술 없이도 그 대상에 적용될 수 있다.

지시의 성공은 기술의 참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시의 성공은 언어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그 이름이 어떻게 그에게 도달했는가의 역사와 그와 같은 것들에 의존한다. 이름은 전통에 의해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내려온 것이다. 다시 말해 최초의 명명이 직시적(ostensive) 지시 혹은 기술에 의한 지시로 이루어진 후 그 이름은 그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간의 의사사통의 고리(인과적 고리)를 따라 퍼져 나가게 된다. 이렇게 퍼져 나간 이름은 그 후에는 처음의 직시적 지시나 기술적 지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그 이름의 최초의 명명자에게 이르는 인과적 고리만 존재한다면, 화자는 그 지시체를 올바르게 지시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홍길동’에 대해 매우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최초의 명명자인 홍길동의 부모와 인과적 고리(의사소통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홍길동’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사람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

가능 세계와 고정 지시어

가능 세계는 반사실적 상황이다. 현실 세계의 개념과 이 세계 내에 현존하고 있는 대상들로부터 시작하여 반사실적 상황을 기술하거나 규정함으로써, 우리들은 하나의 가능 세계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 세계를 기술하면서, 우리들은 현실 세계로부터 나온 약간의 대상들이나 특성들을 (전부는 아니지만) 보존한다. 하나의 가능 세계는 우리들이 현실 세계를 언급하지 않고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독립적인 자신의 존재 유형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81의 제곱근이 지금의 수와 다른 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수는 9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차드 닉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고,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우리는 ‘닉슨’이라는 고유명사에 의해 현실 세계에서와 똑같은 사람을 지시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닉슨이 실제로 지금의 이 세계에서 지시되고 있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일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37대 대통령’과 같은 구는 비고정적이지만, 고유명사 ‘닉슨’은 고정 지시어인 것으로 보인다.

통세계적 동일성

혹자는 고정 지시어 개념을 도입하기 앞서 ‘통세계적 동일성’의 조건을 명시할 것을 요구할지 모른다. 그러나 크립키에게 이는 본말이 전도된 문제제기이다. 예컨대 다른 가능 세계에서 닉슨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할 때, 이는 ‘닉슨’이라는 이름을 이미 고정 지시어로 사용하여 현실 세계의 닉슨과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규약(약정?)에 의한 것으로, 통세계적 동일성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크립키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는 가능 세계를 순수하게 질적으로 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한다. 즉 현실세계에서 ‘닉슨’에 해당되는 모든 기술들의 집합이 ‘통세계적 동일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여러 기술들은 대상의 우연적 속성들로서 어떤 가능세계의 닉슨이 현실 세계의 닉슨이 갖는 어떤 속성을 갖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닉슨은 여전히 닉슨이라 불릴 수 있고 이는 전혀 모순이 안 된다고 반박한다.

선험적(a priori) vs. 필연적(necessary)

우리는 어떤 언명을 ‘필연적’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 언명이 참이라는 것과 함께 그 언명이 거짓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실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그 사건이 달리 되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그 사실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다. ‘필연성’은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형이상학과 관련된다.

반면 ‘선험적’ 진리는 모든 경험과는 독립적으로 무관하게 (현실 세계에서) 참으로 알려질 수 있는(can not must) 것을 의미한다. 이는 어떤 언명의 진위를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즉 이는 인식론적인 개념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선험적’과 ‘필연적’을 상호 대체 가능한 것, 즉 외연이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논증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에 대한 반례를 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어떤 두 소수의 합이다”라는 언명을 생각해 보자. 이 언명은 참이라면 필연적 참이겠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선험적으로 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름간의 동일성 명제, 예컨대 “새벽별은 저녁별이다”라는 명제의 진위를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일단 그 명제가 경험적으로 참임이 밝혀진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참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은 고정 지시어이고 “새벽별”과 “저녁별”이라는 이름은 모든 가능 세계에서 동일한 대상, 즉 금성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자연종과 본질주의

자연종 용어인 ‘금’, ‘호랑이’나 ‘고양이’와 같은 것들도 특정 자연종을 고정적으로 지시한다. 이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자연종의 어떤 본질적인 속성이다. 크립키는 이러한 본질적 속성으로 자연종의 내부조직, 즉 구조를 제안한다. 예컨대 색깔은 금에 대한 여러 인식 표지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금의 본질적 속성은 아니다. 반면 현대 과학 이론에 의해 밝혀진 “원자번호 79인 원소”라는 속성은 금의 본질적 속성이 된다. 더 나아가 ‘호랑이’나 ‘고양이’도 고정 지시어가 될 수 있는데, DNA와 같은 내부조직에 의한 본질적 속성이 그것을 가능케 해준다.

본질적 속성에 추가될 수 있는 것으로는, (i) 대상의 기원이나 (ii) 대상 물질(substance)의 구성, 또 (iii) ‘~임(being~)’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닉슨은 37대 대통령이 아닐 수 있지만, 그 부모가 아닌 다른 부모로부터 태어날 수는 없다. 둘째,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서 나무라는 그 책상의 물질적 구성은 본질적 속성이다. 만약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이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라는 가능세계를 떠올려 본다면, 역시 이는 더 이상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이 아니다. 셋째, 어떤 ‘나무책상’이 책상이 아니라 의자인 가능세계를 떠올려 본다면, 그 ‘나무책상’은 더 이상 책상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크립키의 본질적 속성 이론은 자연종에 이어 유기체나 나무책상과 같은 인공물로까지 일반화된다.

평가

기술이 틀리더라도 지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직관을 구제하는 이론. 그 직관을 구제하기 위해 이름과 기술을 완전히 분리시킴. 그러나 어떠한 도넬란처럼 한정기술구가 한정 용법과 지칭 용법이 있다고 했듯이, 이름 또한 지칭 용법과 한정 용법 둘 다 있을지 모름. 한정 용법의 예를 찾을 수 있을까? 과거에는 하나의 대상을 지시하는 역할로 이름을 썼지만, 그 이름이 어떤 특정한 속성을 가진 것을 뜻하는 한정 용법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고유명사의 경우에는 거의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일반명사에서는 그럴 수 있음. “원자”, “전자”는 고정지시어인가? “원자”, “전자”는 기본적으로 지칭 용법이 아니라 한정 용법이 아닐까? 왜냐하면 직시적으로 지시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분명 아니므로, 처음에는 한정기술구를 통해 지시했더라도 나중에 그 한정기술구 없이도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이름이 된 것인가?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애초에 한정기술구를 통해 지시한 대상과 지금의 대상 사이의 동일성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

자연종에 본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어디까지가 자연종인지 불명확. “고양이”, “호랑이”와 같은 생물학적 종에 본질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움. DNA는 같은 종이라도 개체마다 다름. 특정 DNA와의 유사성이 종의 본질인가?

이름에도 본질이 있는가? 일반명사는 어떤 대상들의 집합을 지시하므로, 그 대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속성을 본질로 뽑을 수도 있겠지만, 고유명사는 단일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공통적인 속성같은 것을 뽑아낼 수 없음.

이름은 대상의 속성이 조금 바뀌어도 같은 대상을 지시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제한은? 현실의 “닉슨”에서 성별은 바꿀 수 있는가? 사람이란 속성도 바꿀 수 있는가? 예컨대 “닉슨이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닉슨이 물 분자라면...” 이 경우엔 동일성이 거의 확보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크립키는 그런 상황은 가능세계로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크립키는 “닉슨이 살다가 여자로 바뀌었다면... ”과 같은 반사실적 가정은 가능세계로 인정할 것이다. 일단은 그 자체로 태어나는 것까지는 못 바꾸는 것인가?

자연종 용어의 경우에는 본질적 속성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질적 속성 사이의 관계, 예컨대 자연 법칙은 가능세계에서 바뀔 수 있는가? 그 관계가 바뀔 수 있다면 본질적 속성이 보존되더라도 그 자연종 용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거의 같은 역할을 못할 것이다. 관계에 비해 대상에 너무 존재론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부여한 것 아닌가?

러셀에게 일반명사나 한정기술구는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없지만, 크립키에게 일반명사는 자연종인 한 주어가 될 수 있음.

크립키의 형이상학적 필연성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법칙적 필연성과 거의 유사한 개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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