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 문서와 "과학철학 읽기 모임" 문서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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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 『물은 H2O인가?』 (김영사, 2021), 5장.
== 49-53회 : Khalifa's Scientific Understanding ==
Kareem Khalifa, ''Understanding, Explanation, and Scientific Knowle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 53회 (2024.01.29) 7-8장/강형구
* 52회 (2023.12.27) 6장/정동욱, 7장/강형구
* 51회 (2023.11.29) 4장/이정민, 5장/정동욱
* 50회 (2023.10.25) 3-4장/이정민
* 49회 (2023.09.20) 1-2장/최이선


== 요약 ==
== 46-48회 : Kuhn's The Plural Worlds in The Last Writings ==
이 장에서 장하석은 자신의 다원주의를 정의하고, 앞선 장들에서 내비친 단서들(1장 : 플로지스톤주의의 종말이 화학의 발전을 지체시켰음. 2장 : 전기화학에서의 다원주의의 생산성. 3장 : 원자화학에서의 다원주의의 생산성. 4장 : 물이 H2O라는 불가피성이 없다는 점)을 묶어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체계적인 논증을 제시하고자 한다.
Thomas S. Kuhn, ''The Last Writings of Thomas S. Kuhn: Incommensurability of Science'', ed. Bojana Mladenovic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2).
* 48회 (2023.08.17) 5-6장/전진권
* 47회 (2023.06.22) 3-4장/허원기
* 46회 (2023.05.18) 1-2장/천현득


=== 5.1 과학이 다원주의적일 수 있을까? ===
== 41-45회 : 장하석의 물은 H2O인가 ==
다원주의를 동기를 밝히고, 일원주의에 대항하는 다원주의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일반적인 우려에 대해 답한다.  
장하석, 『물은 H2O인가?: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김영사, 2021). Hasok CHANG, Is Water H2O?: Evidence, Realism and Pluralism (Springer, 2012).
* 45회 (2023.04.14) 5장/정동욱
* 44회 (2023.03.10) 4장/이정민
* 43회 (2023.02.01) 3장/전진권
* 42회 (2023.12.28) 2장/허원기
* 41회 (2023.11.30) 1장/천현득


==== 다원주의의 동기 ====
== 37-40회 : 페란도의 포스트휴머니즘 ==
다원주의의 직관적 동기는 경허함이다. 우리는 풍부하고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우리가 단 하나의 완벽한 과학 시스템을 발견할 성싶지 않다면, 다수의 과학 시스템들을 육성하는 것이 합당하다." 각각의 시스템은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것이고, 제각각 다른 시스템이 실재의 다양한 부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체스카 페란도,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 (아카넷, 2021).
* 40회 (2022.10.26) 3부B/정동욱
* 39회 (2022.09.28) 3부A/이정민
* 38회 (2022.08.26) 2부/전진권
* 37회 (2022.07.25) 1부/허원기


보편적 환원주의의 비현실성에 기초한 동기 : 환원주의 전략이 일부 성공적이라도 일반적으로 성공적일 수는 없는 것 같다. (1) 궁극적인 기초에는 끝이 없을 것 같고, (2) 기본 수준으로 가도 물리학이 단순해지지 않는 듯하며, (3) 때로 우리의 관심사에 따라 전체가 부분보다 단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수준의 이론이 필요하다.
== 30-36회 : Winsberg's Philosophy of Climate Science ==
Eric Winsberg, <nowiki>''</nowiki>Philosophy and Climate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36회 (2022.06.17) 13장&에필로그/천현득
* 35회 (2022.05.13) 11-12장/정동욱
* 34회 (2022.03.25) 9-10장/이정민
* 33회 (2022.02.10) 7-8장/전진권
* 32회 (2022.01.04) 5-6장/허원기
* 31회 (2022.11.23) 3-4장/천현득
* 30회 (2021.10.26) 1-2장/정동욱


현실적 비관주의에 기초한 동기 : 우리의 시도들 중 일부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뜻밖의 실패가 과학을 모두 무너뜨리는 일을 방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직관들 있음(단일경작에 대한 반론, 갤리슨의 이론, 실험, 장비의 독립성과 엇갈린 발전에 의한 물리학의 튼튼함. 사슬보다 밧줄이 좋다는 퍼스의 직관). 쿤의 일원주의적 과학관에 대한 일반적 비판도 이러한 요점을 드러냄. 첫째는 새 패러다임에 의한 교체가 일어나려면 정상과학기에도 다원성이 필요하다는 점. 둘째는 성공적이었던 시스템이 실패했다고 그것을 완전히 버릴 이유는 없다는 점. 오히려 보존해야.  
== 제23-29회 : Shea's Representation in Cognitive Science ==
Nicholas Shea, ''Representation in Cognitive Scie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 제29회 (2021.09.28) 8장(이정민)
* 제28회 (2021.08.25) 7장(전진권)
* 제27회 (2021.07.21) 6장(허원기)
* 제26회 (2021.05.26) 5장(천현득)
* 제25회 (2021.04.21) 4장(정동욱)
* 제24회 (2021.03.24) 3장(이정민)
* 제23회 (2021.02.24) 1-2장(전진권)


==== 다원주의 ====
== 제16-22회 : 생물학에 기초해 철학하기 ==
일원주의적 통념을 지지하는 직관이 있긴 하다. "단 하나의 세계만 존재하므로 세계에 관한 진리도 단 하나뿐이며, 단 하나의 과학이 그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일원주의를 정식화하자면, 첫째, 과학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의 포괄적인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고, 둘째, 좋은 탐구 방법이란 그런 설명을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이며, 최소한 각각의 영역에서 가장 좋은 탐구 방법이 하나만 있다는 생각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엮음, 『생물학이 철학을 어떻게 말하는가: 자연주의를 위한 새로운 토대』 (철학과현실사, 2020).
* 제22회 (2021.01.05) 12-13장(허원기)
* 제21회 (2020.11.17) 10장(천현득) / 11장(정동욱)
* 제20회 (2020.10.20) 8장(천현득) / 9장(정동욱)
* 제19회 (2020.09.16) 7-8장(천현득)
* 제18회 (2020.08.19) 5-6장(이정민)
* 제17회 (2020.07.29) 3-4장(허원기)
* 제16회 (2020.06.10) 1-2장(전진권)


일원주의에 대한 장하석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과학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이든 이론의 일원주의적 성격 자체가 우리의 궁극적 목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오히려 과학의 목표를 이루는 데 일원주의보다 다원주의가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분류:과학철학]]
 
장하석은 일원주의에 대항하여 다원주의를 과학의 이상으로 제안한다. 그의 다원주의는 "임의의 주어진 과학 분야에서 다수의 실천 시스템을 육성하는 것을 옹호하는 교설"로 정의된다. 이는 과학이 다원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적 진술을 넘어 다수의 실천 시스템의 현존을 촉진하겠다는 결심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우려 불식 =====
첫째, 다원주의는 상대주의 아닌가? 다원주의는 상대주의가 아니다. 다원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는 테이블에 몇 개의 자리를 마련할 것인지에 따른 차이일 뿐,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으로 앉힐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정답 외에 다른 열등한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 아닌가? 문제는 궁극적인 정답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으며, 현재 정답이라 여겨지는 것 외의 가능성을 애초에 봉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봉쇄는 원하는 결과도 얻지 못할 뿐더러, 과학을 교조주의로 타락시킬 뿐이다. 불합리해 보이는 입장(가령 창조론)과는 논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오만이며, 그들을 설득하거나 그들로부터 유익한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앎의 불가피한 정치적 차원을 수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가 과연 다원주의적일 수 있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다원주의적일 수 있다. (1) 개인이 일원적이더라도 집단은 (서로의 또는 중앙 통제에 의한) 관용을 통해 다수의 패러다임을 보유할 수 있다. (2) 개인도 노력하면 여러 시스템을 보유할 수 있다. 여러 시스템을 번갈아 사용하거나(틀 전환), 동시에 여러 시스템을 섞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틀 섞기),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좋은 증거들이 있다. 생각의 영역에서는 다원주의가 괜찮을 수 있지만, 행위의 순간에는 다원주의가 비효율을 낳기에 억제되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효율적 행위를 위해 내적인 정합성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믿음들이 한결같아야 한다거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동일한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적당히 자족적인 활동 뭉치들을 식별하는 것이다." 각각의 뭉치는 최대한 정합적으로 만들더라도, 때때로는 우리는 다른 뭉치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물론 삐걱거림이 있겠지만, 그것은 삶의 일부이다. 우리가 삶에서 다양한 문제에 대처하여 서로 다른 대처법을 채택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으며, 심지어 하나의 기술을 만들기 위해 여러 시스템을 융합하기도 한다(GPS의 예 : 뉴턴 물리학,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지구중심좌표계, 평면좌표계).
 
셋째, 한정된 자원을 모든 시스템에 지원할 수는 없지 않을까? (1) 모든 시스템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복수의 시스템을 감당할 자원은 있다. (2) 일부 시스템을 살려두는 데는 자원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으며, 유사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이미 존재했다. (3) 하나에만 집중하면 성과가 감소하는 시점이 도래할 개연성이 높으며, 모든 과학자를 한 방향에 밀어넣는 것은 자원 낭비이다. (4) 다원주의를 통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됨으로써) 과학에 투입할 자원(과학자와 돈) 자체가 늘어날 수도 있다.
 
===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
이 소절에서는 장하석이 옹호하고자 하는 다원주의의 특징을 열거하고, 다원주의의 혜택에 기반하여 다윈주의를 옹호한다.
 
장하석이 옹호하는 다원주의는 (3) 능동적 (2) 규범적 (1) 인식적 다원주의이다. (1) 인식적 : 형이상학적 다원주의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 규범적 : 지금까지의 과학이 다원주의적이었는 서술적 주장이 아니라, 과학이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과학의 목표들과 과학 안에서 작동하는 근본적 가치들에 관한 어떤 합당한 입장을 전제하더라도 다원주의가 일원주의보다 더 많은 혜택을 과학에게 준다"고 주장한다. (3) 능동적 : 단지 구경꾼의 가치 판단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시스템을 '육성'하는 일에 뛰어들겠다는 다짐을 강조한다.
 
위와 같은 다원주의의 핵심적인 옹호 논증은 다원주의의 두 가지 혜택에 기초한다. 하나는 관용의 혜택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작용의 혜택이다.
 
==== 관용의 혜택 ====
 
첫째, 다원주의는 실패의 위험에 대비하는 분산 투자이다. 과학의 목표를 진리로 두더라도, 혹은 과학의 목표를 경험적 적합성에 두더라도, 과학적 발전의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할 때,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향을 열어두는 것이 하나의 방향만 열어두는 것보다 좋다. 근본적인 예측 불가능성 하에서, 특정 순간의 추측에 기반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하나만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리석으며, 한번 제거되거나 망각된 탐구의 길을 재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둘째, 다원주의는 영역 분담을 통해 과학의 목표를 더 잘 성취하게 해준다. 현재 바로 지금의 입장에서, 진리는 작업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현재적 시점에는 그 성취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목표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경험적 적합성을 목표로 설정할 경우, 영역에 따라 그 목표를 성취하는 데 적절한 시스템이 있다. 최선의 과학 이론도 모든 현상을 다루지 못하며, 여전히 고전역학의 영역에서는 고전역학이 필요하다(이는 단지 실용적인 것이 아닌데, 우리는 거시적 강체에 적절한 슈뢰딩거 방정식을 세우지 못한다). 실용적인 목표를 따질 경우, 고전역학도 문제마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할 때가 있고 라그랑지안이나 해밀토니안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할 때가 있다. 직관적 이해를 추구할 경우에도, 다양한 이상화된 모형이 현상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다. 측정에서도 측정 영역에 따라 다양한 측정법이 필요하다.
 
셋째, 다원주의는 과학의 다양한 목표를 성취하게 해준다. 과학의 목표를 하나로 볼 이유가 없다. 그러면 쿤의 정확성, 단순성, 일관성, 생산성, 넓은 범위, 반 프라센의 우아함, 완전성, 통합력, 설명력 등도 과학의 인식적 가치로 볼 수 있다. 반 프라센은 이러한 가치들이 경험적 적합성에 비해 부차적이라고 볼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실제 과학자들은 그러한 가치들을 목표 삼아 과학에 헌신하곤 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목표(e.g., 경험적 적합성 대 이해) 및 목표의 다양한 해석들(e.g., 이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단순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이 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경험적 포괄성을 추구한 프리스틀리 대 이론적 우아함을 추구한 라부아지에. 화학결합에 대한 설명을 추구한 전기화학자들 대 화학결합의 구조만을 추구한 유기화학자들.
 
넷째, 다원주의는 앎을 풍부하게 해준다. 한 시스템이 우리의 목표들에 꽤 적합하게 종사할 수 있을 때에도, 다른 시스템 역시 똑같은 목표들에 새로운 방식들로 종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동일한 문제에 대한 뉴턴적 정식화, 라그랑지안 정식화, 해밀토니안 정식화 가능. 동일한 현상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과 기계론적 설명 가능. 세계를 음미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많으면, 자연을 향한 창들이 더 많아지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지는 것이다. 증거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은 단지 나쁜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의 혜택 ====
첫째, 융합(짜깁기). 여러 시스템을 임시방편적으로 융합하여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는 GPS. 3장의 원자화학의 역사도 융합의 좋은 예인데, 당시의 실제 화학자들은 다양한 시스템을 적당히 짜깁기하여 사용했으며, 가장 대표적인 융합의 거장은 베르셀리우스.
 
둘째, 수입. 한 시스템은 다른 시스템의 성과를 빌려올 수 있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와 캐븐디시의 성과(산소 발견 실험, 물 합성 실험)을 빌려온 셈인데, 라부아지에의 방식에서는 그러한 실험들이 나올 여지가 별로 없었고, 플로지스톤주의자에게는 자신들의 실험을 새롭게 해석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볼타 전지도 볼타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용되어 새로운 성과를 냈다. 그러나 볼타의 접촉 전기 이론은 볼타 전지의 발명으로 이끈 중요한 동기였다. 물론 남의 것을 빌려 쓰는 과정은 약간의 재조정과 재발명을 요구한다.
 
셋째, (장기적) 경쟁. 여러 시스템이 공존하면 경쟁이 촉진된다. 여러 시스템이 공존할 경우, 각 시스템은 자신들의 접근법을 정당화하고, 자금 제공자, 학생들, 잠재적 협력자들에게 판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됨으로써, 시스템들의 발전적인 경쟁이 촉진된다. (경쟁상대가 없는 시스템은 게을러질 것이며, 과학 전체는 사회로부터 매력을 잃을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강조되는 경쟁은 단거리 경주보다는 장거리 경주에 가까우며, 상대를 제거하는 경쟁이 아니라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승자 독식의 경쟁은 경쟁의 목적을 없애기 때문이다. 경쟁자를 성급히 제거하지 말아야 하는데, 경쟁자가 잘하던 것이나 추구하던 목표나 질문 자체를 상실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누락 효과).
 
====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임무와 상보적 증식 ====
능동적 다원주의, 즉 지식의 육성을 위해, 과학사와 과학철학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직업적 과학자들의 다원주의는 그 직업적 제약에 한정되기 쉽다. 따라서 (보다 폭넓은) 능동적 다원주의는 직접적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 특히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활동을 요구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 과학사학자들은 과거의 과학에 실제로 존재했던 다원성을 드러냄으로써, 과학철학자들은 통상적인 과학관의 바탕에 깔린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을 들춰냄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과학사학자들은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을 통해 기여할 수 있다. 다원주의적 역사 서술은 다음의 명령의 수행이다. (1) 패배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불운하게 배제된 합리적 대안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선을 다해 살펴보라. (2) 종결 및 종결에 대한 설명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라. (3) 다원성을 과학의 정상적인 특징으로 부각하라. 딱히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좋은 과학이 많이 실행된 사례들을 이야기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과학에서 관건은 오로지 승리도 아니고 심지어 합의도 아님을 깨닫기가 쉬어질 것이다.
 
과학철학자들은 우리의 일원주의적 집착이 스며든 전제들을 식별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기여할 수 있다. 우선 이론 선택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다분히 일원주의적 편견에 빠져 있는데, 다원주의 철학자들라면 다원적 선택 자체도 합리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떤 결과의 불가피성을 함부로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에도 일원주의적 가정이 깔려 있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만들어야 한다.
 
능동적 다원주의는 과학사와 과학철학에게 역사 서술과 철학적 논평의 작업을 넘어 과학 그 자체, 즉 상보적 과학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즉 다원주의적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능동적 임무는 과학적 실천 시스템을 증식하여 현재의 정통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이다.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는 소멸의 위기에 처한 시스템을 보호하고, 멸종했던 시스템을 되살리는 과학적 작업에 종사함으로써, 전무화된 과학이 외면하는 과학적 질문들을 다룰 수 있다.
 
===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
 
첫째, 능동적 다원주의 대 다원주의적 태도. 켈러트, 론지노, 워터스(2006)은 "다원주의적 태도"를 옹호한다. 그들의 다원주의는 "과학 탐구의 내용과 실천을 해석하기 위한 접근법"으로서, 그러한 다원주의적 해석이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 무의미한 논란을 피할 수단을 제공"하고 "과학 지식의 편파성을 부각하은 데 기여"한다고 말한다. 장하석은 이러한 다원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만 너무 수동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특정한 주제 영역마다 다원주의와 일원주의 가운데 어느 쪽이 생산적인지는 열린 문제로 둔다. 그런데 이를 알아보려면 시험을 해봐야 한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누가 다원주의적 태도의 실험을 해보겠는가? 장하석은 일원주의자는 실험을 수행하기 어려울테니, 다원주의자가 하는 수밖에 없다고, 즉 다원주의자라면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 인식적 다원주의 대 형이상학적 다원주의. 장하석은 자신의 인식적 다원주의가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양립가능함을 인정하지만, 특정한 형이상학적 전제나 결론에 연루되길 원치 않는다. 장하석의 다원주의는 실재의 본성을 서술하려는 목표를 가지기보다는, 인간 지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하석의 다원주의는 복잡한 특정 분야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다원주의 대 메타-다원주의. 동기적 측면에서 일원주의는 광신주의처럼 위대한 성취를 밀어붙이는 데 도움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도 그런 광신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일원주의는 놀라운 성취 이면에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자는 일원주의자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원주의자는 일원주의자도 관용하는 메타-다원주의를 채택해야 할까? 장하석은 메타 다원주의를 채택하진 않으며, 이 문제를 "관용적 사회에서 절대주의자를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와 같은 정치적 질문과 유사하게 취급한다. 다원주의는 다원주의를 존중하는 일원주의자만을 허용할 수 있다. 불관용적 일원주의는 허용할 수 없다. 또한 서로 다른 일원주의자들만으로는 관용의 혜택만 얻을 수 있다.
 
넷째, 상보적 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이 책의 기여. 회복, 비판적 의식, 새로운 발전 모두 기여했다. (1) 회복 : 프리스틀리의 전기화학 실험들, 초기 전기화학의 신기한 실험들. 중요한 회복의 성과는 발견보다는 복권이었다. 특히 플로지스톤주의 화학이나 전기분해에 대한 리터의 해석을 복권하는 데 힘을 보탰다. (2) 비판적 의식 : 물이 H2O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어떻게 합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에 대한 역사적 검토를 통해 이긴 진경이 완전하게 명백하게 우월했던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를 통해 "물은 H2O"라는 상식에 도전했고, 그러한 믿음에 도달하는 미묘하고 정교한 이유들을 검토하는 비판적 의식을 통해 과학 지식의 질을 높였다. (3) 새로운 발전 : 기초 전기화학에 관한 새로운 상보적 연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원조 전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실험을 하고, 볼타의 접촉 포텐셜 개념을 현대적인 전기화학의 틀 안에 수용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그 실험적 연구 과정에서 전문 화학자들에게도 낯선 현상들을 산출해냈다. 이 연구는 현재 진행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성과가 나올 것이다.
 
== 관련 항목 ==
* [[Inventing Temperature]]

2024년 1월 17일 (수) 14:06 판

49-53회 : Khalifa's Scientific Understanding

Kareem Khalifa, Understanding, Explanation, and Scientific Knowle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 53회 (2024.01.29) 7-8장/강형구
  • 52회 (2023.12.27) 6장/정동욱, 7장/강형구
  • 51회 (2023.11.29) 4장/이정민, 5장/정동욱
  • 50회 (2023.10.25) 3-4장/이정민
  • 49회 (2023.09.20) 1-2장/최이선

46-48회 : Kuhn's The Plural Worlds in The Last Writings

Thomas S. Kuhn, The Last Writings of Thomas S. Kuhn: Incommensurability of Science, ed. Bojana Mladenovic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2).

  • 48회 (2023.08.17) 5-6장/전진권
  • 47회 (2023.06.22) 3-4장/허원기
  • 46회 (2023.05.18) 1-2장/천현득

41-45회 : 장하석의 물은 H2O인가

장하석, 『물은 H2O인가?: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김영사, 2021). Hasok CHANG, Is Water H2O?: Evidence, Realism and Pluralism (Springer, 2012).

  • 45회 (2023.04.14) 5장/정동욱
  • 44회 (2023.03.10) 4장/이정민
  • 43회 (2023.02.01) 3장/전진권
  • 42회 (2023.12.28) 2장/허원기
  • 41회 (2023.11.30) 1장/천현득

37-40회 : 페란도의 포스트휴머니즘

프란체스카 페란도,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 (아카넷, 2021).

  • 40회 (2022.10.26) 3부B/정동욱
  • 39회 (2022.09.28) 3부A/이정민
  • 38회 (2022.08.26) 2부/전진권
  • 37회 (2022.07.25) 1부/허원기

30-36회 : Winsberg's Philosophy of Climate Science

Eric Winsberg, ''Philosophy and Climate Sci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 36회 (2022.06.17) 13장&에필로그/천현득
  • 35회 (2022.05.13) 11-12장/정동욱
  • 34회 (2022.03.25) 9-10장/이정민
  • 33회 (2022.02.10) 7-8장/전진권
  • 32회 (2022.01.04) 5-6장/허원기
  • 31회 (2022.11.23) 3-4장/천현득
  • 30회 (2021.10.26) 1-2장/정동욱

제23-29회 : Shea's Representation in Cognitive Science

Nicholas Shea, Representation in Cognitive Scie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8).

  • 제29회 (2021.09.28) 8장(이정민)
  • 제28회 (2021.08.25) 7장(전진권)
  • 제27회 (2021.07.21) 6장(허원기)
  • 제26회 (2021.05.26) 5장(천현득)
  • 제25회 (2021.04.21) 4장(정동욱)
  • 제24회 (2021.03.24) 3장(이정민)
  • 제23회 (2021.02.24) 1-2장(전진권)

제16-22회 : 생물학에 기초해 철학하기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엮음, 『생물학이 철학을 어떻게 말하는가: 자연주의를 위한 새로운 토대』 (철학과현실사, 2020).

  • 제22회 (2021.01.05) 12-13장(허원기)
  • 제21회 (2020.11.17) 10장(천현득) / 11장(정동욱)
  • 제20회 (2020.10.20) 8장(천현득) / 9장(정동욱)
  • 제19회 (2020.09.16) 7-8장(천현득)
  • 제18회 (2020.08.19) 5-6장(이정민)
  • 제17회 (2020.07.29) 3-4장(허원기)
  • 제16회 (2020.06.10) 1-2장(전진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