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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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laist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1월 26일 (수) 18:0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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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라우든 지음, 정동욱 옮김, "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원문 : Larry Laudan, "The Epistemic, the Cognitive, and the Social", in Science, Values, and Objectivity, eds. Peter Machamer and Gereon Wolters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04), pp. 14-23.

라우든에 따르면, 과학자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는 과학 이론의 중요한 덕목들(예컨대, 적용 범위, 설명력 등)은 참/거짓을 판단하는 인식적 기준들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그러한 덕목은 (참/거짓을 판가름해주지 않기 때문에) 정의상 비인식적이지만, 과학의 핵심 구성 요소이다. 라우든은 그러한 덕목들을 “인지적(cognitive)” 덕목이라 칭하고자 하며, 과학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에는 인식적 평가 외에도 인지적 평가들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합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면, 인지적 덕목을 가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 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

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지음, 정동욱 옮김


(초벌 번역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여 읽기 바랍니다.)


이 장에서 나는 과학철학자들이 충분한 검토는커녕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던 문제인 과학철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간주하는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과학철학자이든, 보다 전통적인 부류의 철학자이든, 과학철학이 일종의 응용 인식론이라고, 즉 과학철학은 분석적 인식론의 범주와 도구를 과학이라 불리는 활동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1968년 시드니 모르겐베서(Sidney Morgenbesser)가 “과학철학은 과학적 사례들을 활용한 인식론이다.”라고 조롱했을 때(Morgenbesser 1967, xvi),[1] 내가 믿기에 그는 이러한 상식을 말했을 뿐이었다. (물론 과학철학에는 응용 인식론이라기보다 응용 형이상학으로 보이는 또다른 측면 — 전통적으로 과학 “기초론”이라 불리는 — 도 있는데, 이 주제는 여기서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런대로 무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 방식은 무해하지 않다. 반대로, 과학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사례를 활용한 인식론이라는 생각으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식론자의 오만일 뿐 아니라, 과학철학 내의 특정한 한 접근법, 특히 인식적 실재론이 맞다는 것을 전제하는 동시에 적어도 실재론 이상의 탁월한 실적을 기록한 다양한 다른 과학철학의 적절성을 부정하고 있다. 게다가,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보는 관점은 건전한 과학에서 사용되는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평가 전략들의 대다수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나는 과학철학이 (배타적으로든 일차적으로든) 인식적인 작업이 아니며, 그렇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과학이 오로지 인식적인 것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인식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서로 연관된 이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다소 먼 길을 돌아갈 것이다. 그 출발점으로서 과학철학이 인식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논제의 익숙한 구체적 사례를 하나 검토할 것이다. 나는 과학철학을 합리적 재구성으로 본 관점,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의 한스 라이헨바흐(그리고 다소 약한 정도로는 루돌프 카르납)에 의해 개진된 생각을 검토할 것이다. 나는 라이헨바흐식 재구성이 (흔히 생각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 과학에서 어떤 부분을 재구성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재구성할 수 없는지에 대한 엄격한 제약조건들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 제약조건들이 인식론의 도구들이 가진 극심한 제약으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로 확립하고자 하는 첫 번째 요점은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한데)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을 임의의 주어진 과학적 사건에서 인식적으로 중요한 특징들을 규정하는 도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직 매우 약화되고 특이한 의미에서만 합리적 재구성이며, 이 점은 내가 이에 대해 지적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경험과 예측』의 첫 장에서 라이헨바흐가 생각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란 그 사건의 요소들이 어떻게 또는 얼마나 탐구자의 목표를 추동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과학적 사건의 세부사항을 치우려는 시도가 아니다. 라이헨바흐가 합리적 재구성에 관해 얘기할 때 머릿속에 품었던 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그 문구에서 ‘합리적’이라는 용어가 싣고 있는 것은 순수히 인식적인 것이다. 그는 어떤 상황이 합리적 재구성에 적절히 포함되기 위한 유일한 특징은 그것이 문제가 되는 사건에서 평가 중인 이론 혹은 가설의 참 또는 거짓과 관련되어야 있다는 점뿐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반복하자면, 라이헨바흐에게 합리적 재구성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인식적 재구성이었다. 가설의 진위를 결정하는 일과 무관한 활동이나 원리가 관련된 사례의 경우, 그러한 활동과 원리는 그 사례의 소위 합리적 재구성에서는 적절한 자리를 찾지 못한다. 똑같은 요점이 라이헨바흐의 — 자주 언급되지만 제대로 이해되지는 못한 —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그에게 한 연구자의 탐구에서 나타나는 시기적 단계의 구분이 아니라 당신이 역사책에서 볼 수도 있는 사건에 대한 기술적으로는(descriptively) 풍부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무관한 이야기와 그에게 그 사건의 합리적 재구성을 구성할 순전히 인식적인 이야기 사이의 구분을 말할 뿐이다. 라이헨바흐에게 정당화의 맥락은 문제가 되는 이론에 대한 인식적 평가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로 그리고 오직 그러한 요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즉 비인식적인 모든 것은, 발견의 맥락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대한 심화된 탐구는 심리학자나 인류학자에게 맡겨진다. 그 사건에서 철학자의 관심은 인식적 검열을 통과한 그러한 요소들에만 엄격히 제한되었다.

자 이제, 만약 과학철학이 응용 인식론이라는 생각을 당신이 지지한다면, 당신은 과학철학의 일이 사건 자체라기보다 사건의 합리적 (이제 인식적인 것으로 이해된) 재구성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라 여기는 라이헨바흐의 생각에서 어떠한 이상한 점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게다가 당신은 이렇게 덧붙일지도 모른다. 인간 활동에 대한 모든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설명은 감당 가능한 분석 단위를 갖기 위해 실제 세계의 지독한, 와글와글대는 혼란을 단순화하고 이상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단순화가 유용한 목적을 제공하는 한, 나는 단순화를, 심지어 과도한 단순화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수상한 점은 과학 활동을 추동하는 대부분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과학 활동에서조차, 엄격한 의미에서는 아무런 인식적 정당화를 갖지 못한 고려로서, 라이헨바흐를 비롯해 과학철학을 응용 인식론으로 생각하는 다른 많은 이들이 보기에 과학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장의 뒷부분은 이 주장을 공략할 것이다. 나는 과학자들에 의해 사용된 많은, 거의 대부분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론 평가 원리들이, 그들 자신에 의하면 합리적이고 적절할지라도, 인식적 근거(rationale) 또는 토대를 전혀 갖지 못함을 보일 것이다.

내가 선택할 만한 사례는 더 많지만, 나는 그중에서 한 가지 유형의 사례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의 핵심 논증은 과학자들이 이론을 평가할 때 그것의 범위와 일반성에 대해 묻는 빈도와 지속성에 의존할 것이다. 몇몇 익숙하고 중요한 이론 평가 방법들(rules of thumb)은 그러한 고려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용가능한 이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만족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역 내의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해야 하고(“현상 구제”), 다양한 종류의 사실들을 설명해야 하고(귀납들의 통섭), 왜 경쟁 이론이 성공적이었는지 설명해야 하고(셀라스-퍼트남 규칙), 경쟁 이론을 자신의 극한으로 포섭해야 한다(보이드-퍼트남 규칙). 과학 이론을 평가하는 데 이런 종류의 규칙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독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문제는 그런 규칙들이 인식론 자체에 조금이라도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가지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지에 있다.

이 목록의 첫 번째 규칙, 즉 영역 내의 알려진 사실들을 설명하라는 규칙을 생각해보자. 정상 상태 우주론은 1960년대에 거부되었지만, 이는 그것이 반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벨 연구소에서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해 설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허튼(Hutton), 플레이페어(Playfair), 라이엘(Lyell)의 동일과정설은 19세기 대부분의 지질학자에게 거부되었는데, 이는 그 이론이 막대한 반박에 부딪혔기 때문이 아니라, 지구가 원초적인 초기 상태로부터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상태로 어떻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시종일관 아무 얘기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판구조론은 1960년대 대륙 고정 지질학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전자는 대륙 조각 맞추기의 친숙한 패턴들과 구대륙-신대륙 사이의 동물군과 식물군의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후자는 못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목성에 왜 달이 있어야 하는지나 태양에 흑점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목성의 달과 태양의 흑점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 있는 어떠한 주장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 논증의 힘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그러한 현상들을 이해하게 해줄 어떠한 메커니즘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유래했다.

보다 일반적으로, 한 이론이 경쟁 이론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세계에 관한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예측할 수 있다면 전자자 후자보다 우수하다는 주장을 과학자들이 자주 한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단언컨대, 이를 허울만 그럴듯한 논증 형식으로 간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외에 모든 점들이 같을 때, 다른 영역의 사실들을 설명하거나 예측하면, 혹은 경쟁 이론을 자신의 극한적 경우로 보일 수 있다면, 그 이론이 더 낫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아무런 인식적 토대를 가지지 않는, 그리고 가질 수 없는, 논증 형식이다. 이론의 범위에 관한 다른 세 가지 규칙도 똑같이 인식론과 단절되어 있다.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한 진술이 그 속성들 가운데 무엇을 가지든, 그것은 그 진술의 참에 대한 필요 조건도 충분 조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진술이 그와 분명히 양립가능한 어떤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그 진술이 참임을 반대하는 논증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이러한 덕목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한 진술이 여럿이 아닌 한 종류의 사실들만 설명한다는 점은 그 진술이 거짓임을 믿을 이유가 될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실들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진술로부터 그와 상반된 진술들 중 하나가 왜 그렇게 잘 작동했는지 설명될 수 없다고 해서, 그 진술의 참이 논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참된 진술들은 그와 상반된 진술들이 — 만약 성공적이었다면 — 왜 성공적이었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참된 진술들에 대해 그와 상반된 진술들의 일부가 그들의 극한적인 경우로 보여질 수 있을 거라 일반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범위와 일반성에 관한 이러한 속성들이 좋은 덕목일지라도, — 그리고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 그것들은 인식적 덕목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론의 폭과 범위에 관한 질문들을 다룰 뿐, 그들의 참이나 개연성에 관한 질문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때로 범위에 관한 이러한 덕목들을 인식적 덕목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통섭에 이른 귀납이 참에 가깝다는 것을 보이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했던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의 시도를 들 수 있다. 또한 보이드와 퍼트넘은 선행 이론을 현행 이론의 극한적 경우로 포착하는 것이 그 이론의 참의 증거임을 보이고자 노력했다.) 내가 다른 곳(Laudun 1981)에서 이미 논증했듯이, 이 규칙들 중 어느 하나라도 그것이 거짓인 이론보다 참된 이론을 더 잘 선별한다는 것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이 규칙들 중 어떤 것도 인식적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 속성들이 인식적 지표(indicators)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하게 일반적인 증명을 짜맞출 수도 있다. 나 자신은 그러한 논증들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지만, [일반적인 논증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이론 T가 범위의 덕목 중 하나인 v를 보이는 이론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T는 많은 귀결들을 가질 것이고, 그 귀결들 중 무한히 많은 것들은 v를 결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범위의 진술의 논리적 귀결들 중 다수는 그러한 범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결들 중 하나를 c1이라고 불러 보자. 이제 T가 참이라면, c1 역시 참이어야 한다. 만약 T가 매우 개연적이거나 그럴듯하다면, c1은 그보다도 개연적이거나 그럴듯해야 한다. 요컨대, 함축의 진리-보존적 성격 덕분에, c1은 필연적으로 T의 모든 인식적 덕목을 가지면서도 v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결국 v는 인식적 덕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1처럼) v를 가지지 못한 진술들이 적어도 v를 보이는 T와 같은 진술만큼은 인식적으로 단단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 때문에 불편해질 사람은 인식론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들이 과학의 동력을 제공한다거나 "단지 미적인" 잣대가 [과학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좋은 과학 이론에 대해 이론의 참에 관한 고려를 훨씬 넘어서는 것들을 기대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score)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어떤 과학자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모든 진술을 수용가능한 이론으로 인정할지 자문해보라. 과학자들은 참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론 평가에서 적어도 참만큼 중요해 보이는 이론의 다른 덕목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의에 의해, 이것들은 인식적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이지만 그러한 덕목들을 보이는 진술도 많고, 참이지만 그러한 덕목을 가지지 못한 진술도 많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그것들은 인식적 의제(agenda)에 의해 추동되는 소위 과학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설 자리가 없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은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이 격언을 다음과 같이 뒤틀 수도 있다. 나쁜 이론이 되기 위해 거짓일 필요는 없다. 어떤 이론은 유관한 비인식적 덕목들을 가지지 못해 나쁜 이론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대다수의 단지 참이기만 한 진술들이 해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일을 우리의 이론이 우리에게 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추가적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알아낼 때, 우리는 인식적 영역 너머 내가 인지적-비인식적(cognitive but nonepistemic) 가치들이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러한 가치들은 고전적인 지식 이론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가치들은 그것들 없이 제대로 작동하는 과학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과학의 구성 요소이다. 이 가치들은 흔히 이해되는 방식의 철학적 의미론이나 정당화 조건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인지적(cognitive) 덕목들 또는 가치들이라고 부르며, 인식적 덕목들은 그것의 (내가 거의 흥미롭지 않다고 보는) 진부분집합을 형성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인지적 덕목들 중에서 이론의 범위(range or scope)와 관련된 종류에 초점을 맞췄었다. 그러한 고려들 중 다른 것으로는, 필립 키처(Philip Kitcher)의 언어로, 문제가 되는 이론이 "설명적 통합성"을 달성했는지를 들 수 있다.[2] 범위와 일반성의 덕목들과 마찬가지로, 설명적 통합성의 덕목은 — 키처가 때로 그에 대해 주장한 바와 달리 — 참과 관련된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통합적 이론 TT가 참일 경우 반드시 참인 비통합적 이론들 T1*, T2*, ..., Tn*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T를 그것의 임의의 약한 이론들에 비해 좋다고 간주한다면 — 사실 그들은 항상 그럴 것이다 — 이는 T가 비인식적인 덕목들을 보유한 반면 Ti들은 이를 결여했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절반만 맞더라도, 합리적 재구성을 직조하기 위한 라이헨바흐식 공식은 치명적인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제한은 인식론 자체의 적용 및 관련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최선의 과학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식론의 자원을 통해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더구나, 라이헨바흐식 공식은 과학에서 이론 평가에 개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의 상당수를 철학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즉 단지 심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의 관심거리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나의 비판을 라이헨바흐 자신의 언어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발견의 맥락에 넘겨 버리고, 앙상한 뼈대에 불과한 것만을 정당화의 맥락에 남겼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합리적 재구성을 인식적 가치들뿐 아니라 과학을 구성하는 인지적 가치들을 이용해 과학을 분석하기 위한 기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맥락 사이의 구분선은 대폭 변경될 것이다. 이제 정당화의 맥락은 범위, 일반성, 적용 범위 — 그리고 어쩌면 설명 범위도 — 에 관한 고려들을 임의의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일부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들이 비인식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인지적 가치들을 통한 합리적 재구성은, 내 제안에 따르면, 엄격히 인식적인 요인들에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는 과학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에 그 합리적 재구성에 의해 관련된 과학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많이 포착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하면, 인지적 재구성은 인식적 재구성보다 분명히 선호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합리적 재구성을 지지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처음에 내가 얘기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관념은 나의 더 큰 비판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당연히 그 비판 대상은 분석적 인식론 자체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범위, 일반성, 정합성, 통섭, 설명력이 과학 이론의 평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과학은 그 본성상 단지 주변적으로만 혹은 부분적으로만 인식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인식적 용어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본능 — 그리고 단지 그 일에만 충실한 과학철학(예컨대 베이즈주의)도 존재한다 — 은 억제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학(statistical theory of error) 전체는 인식론으로의-환원병에 감염되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통계학자들은 딱 두 가지 유형의 오류 — 거짓인 가설을 수용하는 것과 참인 가설을 거부하는 것 — 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연히 과학이 참 이외의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면, 우리는 각각의 인지적 가치들과 연관된 오류 유형들의 전체 집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과학자는 설명적이지 않은 이론을 설명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 있고 설명적인 이론을 설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들 — 현재의 오류 이론에서는 찾을 수 없는 — 은 거짓을 수용하고 참을 거부하는 보다 익숙한 오류만큼 이론에 치명적일 수 있다. 라이헨바흐식 합리적 재구성과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학자는 자신의 역할을 전적으로 인식론자에게서 빌려 온다. 이는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유일한 적절한 요구가 그것의 참이라고 가정할 이유가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이해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전제를 믿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론이 자신의 의도된 적용 영역에 있는 유명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자신이 설명하기로 선택한 사실들을 훌륭하게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이론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매우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란 점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평가를 이해하는 데, 오류 통계학자들은 인식론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 과학자들은 이론에 이러한 추가적인 요구를 정말로 하고 있고, 그렇게 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통계학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을 해명하는 일에 그들이 현재 써먹고 있는 도구가 얼마나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시간이다. 나는 베이즈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들은 오류 통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확률 부여를 조정하는 데만 집착할 뿐, 더치북을 피하고 참에 관한 손해 보는 베팅 전략에 빠지는 것 외의 이론 평가 가치들의 역할에는 무관심하다. 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나도 알고 있듯이, 왜냐하면 기발한 베이즈주의자들은 고생대의 잡식 동물처럼 그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소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참인 이론을 갖고자 한다 — 물론 이는 달성하기 힘든 이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커다란 일반성을 가진 이론, 우리가 특히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이론, 예측뿐 아니라 설명도 하는 이론, 기존의 성공들을 통합할 뿐 아니라 그 너머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론도 좋아할 것이다. 첫 번째 문제를 제외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인식론자는 거의 하나도 알지 못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처럼, 인식론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들은 과학적 연구를 추동하는 가치 대부분에 대해 신중하게 침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의 제목의 세 번째 요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 나머지 둘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에 함축된 계약을 이행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100년 넘게 지속된 철학 전통이 있는데, 마르크스(Marx)와 만하임(Mannheim)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다음을 가정한다. 오직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하여 수용된 것처럼 보이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인식적 덕목을 결여한 이론에 대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심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 이론이란 결국 설득력 있는 인식적 논증이 없는 관념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엄밀히 말해, 이런 사고 방식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적 요인들 자체는 탐구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믿음들과 믿음 검증(authentification)에 관한 관습들을 비롯해 모든 인공물은 의사소통, 협상, 합의 형성의 사회적 과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란 용어의 이러한 뜻은 너무 넓어서 공허하다.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맥락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간주했을 때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믿음이 정착하는 사회적 과정들 중 인식적 이유를 결여한 것들은 (사회병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지만)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헨바흐는 믿음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엔, 철학자가 그 정당화를 탐구하고 그 정당화와 그 믿음 자체의 유관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노선을 따라 우리가 사회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뿐 아니라 인지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 전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범위를 인식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한 반면, 나는 그 범위가 인지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잠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주저 없이 주장할 수 있는 2가지는 순수한 인식적 가치들의 설명적 빈곤과 범주상 인식적인 것을 넘어서는 과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필요성이다.

  1. 1960년대 말, 라카토슈는 런던 정경 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진행한 세미나에서 비슷한 관찰을 많이 했다.
  2. 키처는 많은 곳에서 이러한 논증을 정식화했다. 그중 가장 상세하고 정교한 버전은 Kitcher(1993)을 보라.

참고문헌

  • Kitcher, P. 1933. Advancement of Sci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 Laudan, L. 1981. A Confutation of Convergent Realism. Philosophy of Science. 48:19-49.
  • Morgenbesser, S., ed. 1967. Philosophy of Science Today. New York: Basic Books.
  • Reichenbach, H. 1938. Experience and Prediction: An Analysis of the Foundations and the Structure of Knowledge.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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