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의 실재성
(마술의 현실성에서 넘어옴)
피터 윈치, "마술의 현실성", 『사회과학의 빈곤』, 2부 「원시사회의 이해」, 1장)
에반스-프리차드 vs. 윈치
에반스-프리차드 : 과학적 관념이란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는 관념
- 마술에 대한 믿음만으로 지성의 열등함 주장 X (우리의 믿음 형성 방식[전승적 요소 채택]과 크게 다르지 않음)
- 그들 역시 논리적
- 야만인의 생각은 비과학적 / 우리의 생각은 과학적(객관적 실재와의 일치)
- 이런 생각의 기반 : "실재"라는 것이 과학적 추론 그 자체의 맥락 밖에서 이해 가능하며 적용될 수 있음.
- 진리, 과학적 관념이란 객관적 실재와의 일치
윈치 : 과학적이라는 것을 "객관적 실재와 일치"에 입각하여 규정하려는 시도 잘못!
- 왜? 사고의 맥락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 없음!
- 생각 및 믿음과 독립적인 무언가로서의 실재가 존재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제약된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지만, 조심해야! 왜?
- 실재들은 (발화자의 바람에 따라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용되는 전통(맥락)에 입각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정말로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은 각각의 전통에 따라 달라짐.
- 실재가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는 언어가 가진 의미 안에서만 드러난다.
- 게다가 실재/비실재의 구분 및 실재와의 일치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실재'라는 말이 사용되는 방식을 잘 생각해보라.)
윈치의 핵심 아이디어 : '실재'라는 개념의 의미는 그 언어 사용자에 의해 결정
'실재하는 것'이란 개념은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는 것'과 쌍으로 정의되고, '믿음과 실재와의 일치'를 확인하는 (다양한) 방법과 결합된 채로만 그것의 구체적인 의미를 얻을 수 있다.
- 과학적 맥락에서도 이것이 달라지진 않으며, 여전히 (과학적 맥락에서의) 실재 역시 (과학적 맥락에서의) 사용법에 의해 그 구체적 의미를 가질 뿐, 언어 바깥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과학에서는 관념과 실재가 일치하는 반면, 주술적 사고방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 불가능. 왜? 주술적 사고방식에서는 관념과 실재가 불일치한다는 평가는 과학적 맥락의 '실재' 사용법에서나 그럴 뿐이기 때문.
비판과 대응
윈치에 대한 비판 1 : 그러면 아무거나 실재? 그러면 도대체 이해 가능?
- 그러면 아잔데의 주술 체계에서 실재와 불일치한 관념이 불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일치/불일치를 결정한다는 것인가?
- 그러면 혹시 우리는 아잔데의 믿음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윈치의 답변 : 실재와의 일치/불일치 구별 가능. 단 그들의 문화를 기준으로!
- 기독교 문화에서 신은 실재하지만, [그에 기생하는] 흑마법은 비실재,
- 아잔데 문화에서 마법은 실재, 단 그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주술은 비실재.
- "비실재", "비합리"과 같은 평가는 어디서나 가능하지만, 그 단어의 사용을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확립된) 합리성에 비추어 대조해야!
윈치에 대한 비판 2 : 그럼 아잔데의 마법이 실수가 아니라면?
윈치의 답변 : 그들의 마법에 입각한 설명은 자연적 설명에 대한 보완 ('왜'에 대한 보완, 목적론적 보완, 그외 대부분의 설명 우리의 설명과 비슷)
- 마법이란 모종의 능력, 그 원천은 "마법-물질".
- 독물 신탁 → 벵게 신탁 : 1차 신탁 : 죽음 = yes / 2차 신탁(앞의 신탁은 진실인가?) : 삶 = yes
- 독물 신탁 : 아잔데의 삶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의식으로서, 한 사람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중요한 일은 모두 이 신탁에 의해 결정
- "만일 이 신탁이 없다면 아잔데 사람은 어쩔 줄 몰라 완전히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사라진 것과 같을 것"
- 신탁이 없는 아잔데 사람의 당황스러움은 마치 우리 사회의 수학 없이 다리를 건설해야 하는 건축기사나 시계 없이 합동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군대 지휘관의 당황스러움과 마찬가지!
윈치에 대한 비판 3 : 그러나 아잔데의 신탁은 이해 불가능하고 명백히 착각에 기반해 있지 않은가?
윈치의 답변 : 이해불가능성은 우리의 이해불가능성일 뿐! 아잔데 사람에게도 건축기사가 자를 들고 여기저기를 재는 행동이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
- 그럼에도 일어났다고 하는 그 "무슨 일"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이는 사람의 믿음에 대한 만족감과는 무관한 것 아닌가?
- 윈치의 추가 답변 : 무언가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종의 기준에 기초한 평가. 혹시 모순이라는 뜻?
- 두 가지 모순 가능성 (1) 두 신탁의 모순 → 유연한 해석, 정합적 해석 가능 (2) 신탁 이후의 경험과의 불일치 가능성, 즉 경험적 검증에 의한 실패? → 그런 방식으로 검증 불가능.
- 신탁에 대한 윈치의 해석 : (1) 신비적 힘 여부 결정은 경험적 검증 X, 신비적 힘 여부를 분류하는 기준 자체에 경험적 검증과의 차이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 (2) 신탁의 계시는 가설이 아님 : 신탁의 계시는 호기심이 아닌 실천적 결정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반증 또는 검증의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음". (3) 심지어 어떤 관찰도 그들의 믿음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석됨. (4) 심지어 명백히 모순이 있더라도, 그것을 해소하는 데 관심이 없을 수 있고, 그들의 믿음이 작동하는 맥락에서 이는 문제가 되지 않음.
합리성의 대칭성
상대주의
- 에반스-프리차드의 말에서도 "어떠한 경험이든지 결국 그 관념들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다. 아잔데 족은 이와 같이 신비적 관념의 바다에 빠져 있다. 따라서 신비적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고 독물 신탁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는 길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 윈치의 패러디 : "어떠한 경험이든지 결국 그 관념들을 정당화하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이와 같이 과학적 관념의 바다에 빠져 있다. 따라서 과학적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고 독물 신탁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는 길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 그럼에도 유럽인이 맞다? No. 둘의 상황은 정확히 대칭적!
비트겐슈타인의 얘기에 비유하자면
- 에반스-프리차드 : "실재와의 일치 또는 불일치" 여부가 그 표현 자체의 쓰임새에 대한 자세한 탐구에 선행하여 주어진다. (『논리-철학 논고』의 태도)
- 윈치 : "실재와의 일치 또는 불일치" 여부가 그 표현 자체의 쓰임새에 대한 자세한 탐구에 선행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철학적 탐구』의 태도)
마지막 반론에 대한 대응
아잔데 사람들은 마법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까지 끌고가지 않는데, 이것이 결국 그들의 비합리성 아닌가?
- 그러한 논리적 귀결 추론 및 검토를 왜 합리적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다른 게임을 강요한 것일 뿐.
- 오히려 유럽인의 강박관념 아닌가? (그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면 철학만이 최고의 활동이 되어 버림! 다른 모든 과학은 그들의 귀결을 끝까지 밀고 가지 않기에)
관련 항목
-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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