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에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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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Feyerabend, 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 Theory of Knowledge, third edition (New Left Books, 1993). 아래의 번역은 정병훈의 번역본 『방법에의 도전 :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 (한겨레, 1987)을 참고하여 현대적인 문체로 다듬은 것이다.

본문

방법에의 도전: 무정부주의적 인식론의 개요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정병훈 옮김, 정동욱 수정


1장. 무엇이든 좋다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검토와 관념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상적 분석으로부터 다음이 밝혀진다. 진보를 방해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이다.

과학이라는 활동을 관장하는 견고하고, 불변하며, 절대적 구속력을 가진 원리들을 담고 있는 방법이라는 관념은 역사적 연구 결과들에 직면하여 상당한 곤경에 빠진다. 이제 우리는, 인식론에 단단히 근거한 아무리 그럴듯한 규칙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위반되지 않는 규칙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위반들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이 아니며, 불충분한 지식이나 피할 수 있었던 부주의의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반대로, 우리들은 그러한 위반이 진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최근 논의에서 나타난 가장 현저한 특징 중 한 가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즉 고대 원자론의 발명이나, 코페르니쿠스 혁명, 현대 원자론(기체 운동론, 기체 확산 이론, 입체 화학, 양자 이론)의 출현, 빛의 파동 이론의 점진적 출현과 같은 사건들과 발전 사례들은, 일부의 사상가들이 어떤 “분명한” 방법론적 규칙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거나 아니면 그 규칙들을 무의식 중에 깨뜨렸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자유로운(liberal, 무제약적인) 실천 양식은 단지 과학의 역사에서 나타난 사실만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의 성장을 위한 적절하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어떤 규칙이 주어지든, 그 규칙이 아무리 ‘근본적’이거나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그 규칙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규칙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임시방편적 가설, 또는 잘 확립되어 널리 수용된 실험적 결과들과 모순되는 가설, 또는 경험적으로 적합한 기존의 대안보다 협소한 내용을 가진 가설, 또는 자기-모순적인 가설 등을 도입하고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들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논증이 자신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을 잃고 진보의 장애물이 되는 상황도 존재하며, 이러한 상황은 꽤 자주 나타난다.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논증이 사용되기도 하고, 통상 생각되는 것보다 많이 사용되어야 할 수도 있지만) 오직 논증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의 산물로 보이는 것들 — 언어의 숙달, 풍부하게 명료화된 지각 세계의 존재, 논리적 능력 — 이 부분적으로는 주입(indoctrination) 덕분이고 부분적으로는 자연 법칙에 의한 성장 과정 덕분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논증이 정말로 효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것은 논증의 내용(semantic content)보다 그것의 물리적 반복 덕분인 경우가 더 많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어른뿐만 아니라 과학, 종교, 성매매 등의 제도(의 이론적 부분)의 성장에 있어서도 비논증적인 성장의 가능성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어린 아이에게 가능한 일 — 사소한 자극을 통해 새로운 행동 양식을 획득하는 일, 의식적인 노력 없이 그것에 익숙해지는 일 — 이 어른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간주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물리적 환경의 파괴적 변화, 전쟁, 전반적 도덕 체계의 붕괴, 정치 혁명이 어른의 중요한 논증 양식들을 비롯한 반응 양식들을 마찬가지로 변형시킬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 그러한 변형 역시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으며, 합리적 논증의 유일한 기능은 그것이 행동에 앞서 행동을 야기하는 종류의 정신적 긴장을 증대시킨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

이해관계나 강요, 혹은 선전(propaganda)이나 세뇌 기술이 우리 지식의 성장이나 과학의 성장에 있어서 통상 믿어지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관념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도 보여질 수 있다. 새로운 관념에 대한 명석판명한 이해가 그것의 정식화 및 제도적 표현에 선행되며, 또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당연시 되고 있다(연구는 문제와 함께 시작된다고 포퍼는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먼저 관념이나 문제를 가지고, 그 다음에 행위, 즉, 말하고, 만들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어린 아이들의 발달 방식과 확연히 다르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이해 능력 너머에 있었던 의미를 파악할 때까지 단어들을 사용하고, 결합하며, 그 단어들을 가지고 논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의 놀이 활동은 이해라는 최종 행위를 위한 본질적인 필요조건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성인에게는 작동을 멈추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우리들은 자유라는 관념이 자유를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로 그 행위들을 통해서만 명료해질 수 있다고 기대해야 한다.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과 그것의 정확한 관념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동일한 분리불가능한 과정을 구성하는 부분들로, 그 과정을 중단시키지 않고는 분리될 수 없다. ...

갈릴레오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의 발전은 내가 기술하고자 하는 상황의 완벽한 사례를 제공한다. 우리들은 동시대의 이성과 동시대의 경험을 거스르는 강력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믿음은 — 더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 똑같이 비합리적인 다른 믿음들(관성의 법칙, 망원경)에서 지지를 넓히고 근거를 찾는다. 연구는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굴절되고, 새로운 종류의 도구들이 만들어지며, ‘증거’는 이론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결국에는 풍부하면서도 유연한 이데올로기가, 즉 그것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도 독립적인 논증들을 제공할 정도로 풍부하며, 필요해 보일 때면 언제나 그러한 논증들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유연한,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갈릴레오가 올바른 노선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한때는 어리석은 우주론으로만 보였던 [새로운] 우주론에 대한 그의 고집스러운 추구가, 특정한 방식으로 말해질 때에만 그 견해를 수용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관찰 보고’라 불리는 마법적 문구를 포함하고 있을 때에만 그 견해를 신뢰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 우주론을 변호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지금까지 창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아니며, 이것은 정상적인[평범한] 경우이다. 즉 이론은 그것의 비정합적인 부분들이 오랫동안 계속 사용된 에야 비로소 명료해지고 ‘합리적’이 된다. 따라서 그러한 비합리적이고, 터무니 없으며, 무질서한(unmethodical) 초기의 놀이 활동(foreplay, 전희)이 명료함과 경험적 성공의 불가피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제, 우리들이 이러한 종류의 발전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기술하고 이해하고자 할 때, 당연히 우리는 그러한 [미래의] 발전을 고려에 넣지 않은 기존의 언어 형식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따라서 이 언어 형식은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과 어울리기 위해 왜곡되고, 오용되며, 새로운 패턴에 끼워 맞춰질 수밖에 없다(언어의 지속적인 오용 없이는 어떠한 발견도 진보도 있을 수 없다). “더우기, 전통적인 범주들은 (통상적인 과학적 사고를 포함해) 일상적인 사고와 일상적인 실천의 금과옥조(gospel)이기 때문에, [그러한 범주들을 이용한 이해 시도는] 결국 — (과학적) 상식의 관점에서 — 잘못된 사고 및 행위의 규칙과 형식을 제시하게 된다.”[1] 바로 이와 같이, 변증법적 사고는 형식 논리를 비롯한 “상세히 완결된 이해를 무산시키는”[2] 사고 형식으로 등장한다.

(부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즉 내가 ‘진보’, ‘진전’, ‘개선’ 등의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내가 과학에 있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지식을 독자에게 강요하려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은 이 용어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고, 따라서 각자가 속한 전통에 맞추어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어떤 경험주의자에게는, ‘진보’란 그것의 기본적 가정들 대부분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적 시험을 제공하는 이론으로의 전이를 의미할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양자 이론이 이러한 종류의 이론이라고 믿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보’란 경험적 적합성에 있어서는 희생을 치를지라도 통일과 조화를 의미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일반상대성 이론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의 논지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의 진보를 채택하든, 무정부주의가 그 진보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법과 질서에 의한 과학마저도, 때로는 무정부주의적 조치가 허용되는 경우에만 성공을 거둘 것이다.)

그렇다면 고정된 방법 혹은 고정된 합리성의 이론이라는 관념은 인간과 그 사회적 환경에 대한 너무도 소박한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역사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사람들과, 저급한 본능 — 명료성, 정확성, ‘객관성’, ‘진리’라는 형식 안에서 자신들의 지적 안정성을 갈구하는 본능 — 을 만족시키느라 역사를 빈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상황에서 또 인류 발전의 단계에서 옹호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라는 원리이다.

이 추상적인 원리는 이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면까지 검토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2장. 반귀납

예를 들어, 우리는 잘 확립된 이론이나 잘 확립된 실험 결과와 모순되는 가설을 사용해도 된다. 우리는 반(反)귀납적으로 과학을 발전시킬 수도 있다.

그 원리[‘무엇이든 좋다’는 원리]를 상세하게 검토하기 위해서는 과학이란 활동의 익숙한 규칙들과 반대되는 ‘반(反)규칙들’의 귀결들을 추적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 이론의 성공을 측정하는 것은 ‘경험’이나 ‘사실’ 혹은 ‘실험 결과’라는 규칙, 즉 이론과 ‘자료’ 사이의 일치는 그 이론을 지지(또는 그 상황을 용인)하지만 불일치는 이론을 위태롭게 만들어, 심지어 그 이론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규칙에 대해 살펴보자. 이 규칙은 모든 입증 또는 승인에 대한 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그것은 경험주의의 정수이다. 이에 대한 ‘반규칙’은 우리에게 잘 확립된 이론이나 잘 확립된 사실과 모순되는 가설을 도입하고 발전시킬 것을 권장한다. 그 규칙은 우리에게 반(反)귀납적으로 연구할 것을 권장한다.

반귀납적 절차는 다음의 질문들을 야기한다. 반귀납은 귀납보다 합리적인가? 반귀납의 사용을 선호할만한 상황은 존재하는가? 그것을 옹호하는 논변은 무엇인가? 그것을 반박하는 논변은 무엇인가? 아마도 귀납이 항상 반귀납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등등

이 질문들은 두 단계에 걸쳐 답변될 수 있다. 나는 우선 수용된 고도로 입증된 이론들과 모순되는 가설을 발전시킬 것을 권하는 반규칙을 검토할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잘 확립된 사실들과 모순되는 가설을 발전시킬 것을 권하는 반규칙을 검토할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는 그와 양립불가능한 대안의 도움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정통 이론이 이미 반박되어 신뢰를 잃었을 때에만 대안을 사용하라는 조언은 (뉴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도 여전히 매우 대중적인 조언이지만) 일의 순서를 정반대로 만든다. 또한, 한 이론의 가장 중요한 형식적 특성들 중 일부는 분석이 아닌 대조를 통해 발견된다. 따라서 한 과학자가 자신이 가진 견해의 경험적 내용을 최대화하고 그것을 가능한 분명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른 견해를 도입해야 한다. 즉 그는 다원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관념들을 ‘경험’보다는 다른 관념과 비교해야 하며, 그는 경쟁에서 진 견해를 폐기하기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는 창세기나 포이만드레스(Pimander)에서 발견되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이론들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진화론이나 다른 ‘현대적’ 견해들의 성공을 측정하는 데 그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개선된 버전의 창세기를 통해 진화론이 일반적인 생각만큼 좋지는 않아 그에 대한 보완이나 완전한 교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지식은 이상적인 견해를 향해 수렴하는 자기-일관적인 이론들의 연속물이 아니며, 진리로의 점진적인 접근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끊임없이 확장되는 상호 양립불가능한 대안들의 바다로, 각각의 이론, 각각의 설화(fairy-tale), 각각의 신화는 서로를 보다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집단의 일원으로, 그 모두는 경쟁의 과정을 통해 우리 정신의 발전에 기여한다. 어떤 것도 끝내 확립되지 않으며, 어떤 견해도 완전한 이해에서 생략될 수 없다. 디랙(Dirac)이나 폰 노이만(von Neumann)이 아니라 플루타르크(Plutarch)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가 이런 종류의 지식을 보여주는 모델로, 여기서 과학의 역사는 과학 자체의 분리 불가능한 부분이 된다. 그것[과학의 역사]은 과학의 계속된 발전을 위해서도 매순간 과학의 이론들에 내용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프로와 아마추어, 진리광과 거짓말쟁이, 그들 모두는 시합의 선수로 초대되며 우리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각자의 기여를 한다. 그러나 과학자의 임무는 더 이상 ‘진리 추구’나 ‘신의 찬양’이나 ‘관찰의 체계화’나 ‘예측의 개선’이 아니다. 이것들은 그의 주된 목표가 되는 활동의 부산물로, 그 활동이란 소피스트들이 말한 ‘보다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 전체의 운동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관찰, 사실, 실험 결과와 모순되는 가설을 편드는 두 번째 ‘반규칙’은 어떠한 특별한 변호도 필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신의 적용 범위 내에 있는 알려진 모든 사실에 부합하는 흥미로운 이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과학에서 반귀납적 이론을 허용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이론과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증가시켜야 하는지, 감소시켜야 하는지, 아니면 그 불일에 대해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관찰 보고, 실험 결과, ‘사실적’ 진술에 이론적 가정이 포함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들[관찰 보고, 실험 결과, 사실적 진술]이 사용되는 방식에 의해 당연시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이점에 대해서는 6장의 자연적 해석에 대한 논의를 참고하라). 즉, 우리는 평범한 상황에서 양호한 지각을 가지고 탁자를 볼 때는 ‘탁자가 갈색이다’라고 말하지만, 조명 조건이 나쁘거나 자신의 관찰 능력에 확신할 수 없을 때에는 ‘탁자가 갈색인 것 같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지각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익숙한 상황이 존재하고 우리의 지각에 착각을 일으키는 다른 익숙한 상황도 존재한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의 감각 자극 중 일부는 진실인 반면 다른 일부는 그렇지 않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대상과 우리 사이의 매질이 어떠한 왜곡 효과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과 빛처럼 둘 사이를 맺어주는 물리적 존재자가 참된 모습을 운반한다는 것도 당연시한다. 이 모든 믿음들은 직접적인 비판에는 노출되지 않은 채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미치는 추상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가정들이다. 대개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며 그들의 영향은 우리가 완전히 다른 우주론에 직면했을 때에야 인식된다. 즉 편견은 분석이 아니라 대조를 통해 발견된다. 그의 가장 탁월한 이론과 그의 가장 정교한 기술을 비롯해, 과학자가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도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그 도구들에 포함되는 원리 또한 인식되지 않거나 인식되더라도 시험하기 극도로 어려울 수 있다. (그 결과, 한 이론과 증거의 충돌은 이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증거의 오염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이제 —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늘상 사용하고 있는 무언가를 검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관찰들을 표현하는 데 우리가 늘상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분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늘상 하던 대로 작업할 때 전제하는 그러한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것을 그 내부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외부적인 비판 기준이 필요하고, 우리는 대안적인 가정들 혹은 (이 가정들이 상당히 일반적인 상황으로서) 흡사 대안적인 세계 전체를 만들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거주하는 (사실은 또다른 상상의 세계일 수도 있는) 현실 세계의 특징들을 알아내기 위해 상상의 세계가 필요하다. 따라서 익숙한 개념과 절차에 대한 비판의 첫 번째 단계, ‘사실’에 대한 비판의 첫 번째 단계는 순환의 고리를 끊는 시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장 신중하게 확립된 관찰 결과들을 무시하거나 그들과 충돌하고 가장 그럴듯한 이론적 원리들을 뒤엎는 새로운 개념 체계를 발명해야 하며, 기존의 지각 세계(perceptual world)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직관들(perceptions)을 도입해야 한다. 이 단계 역시 반귀납적이다. 따라서 반귀납은 항상 합리적이며, 그것은 항상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 누군가는 내가 귀납을 반귀납으로 교체하고 통상적인 이론/관찰 구분 대신 이론, 형이상학적 견해, 설화의 증식을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추천한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상은 분명한 오해이다. 나의 의도는 한 묶음의 일반적 규칙들을 그러한 다른 묶음으로 교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의도는 독자들에게 모든 방법론이, 심지어 가장 명백해보이는 것들조차도,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이를 보이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기초적이라고 간주할 것 같은 어떤 규칙들의 한계와 심지어는 그 비합리성을 논증하는 것이다. 귀납의 경우(반증에 의한 귀납도 포함하여), 이는 반귀납적 절차가 얼마나 잘 뒷받침될 수 있는지 논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논증과 수사가 나의 ‘깊은 확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이들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휘둘리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무정부주의자는 이성(진리, 정직, 정의 등)의 권위를 깎아내리기 위해 이성의 게임에 참가한 비밀 요원과 같다.

3장. 이론의 증식

새로운 가설이 수용된 이론과 일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일관성의 조건은 더 좋은 이론이 아닌 더 낡은 이론을 보호하기 때문에 비합리적이다. 잘 확립된 이론에 모순되는 가설은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얻을 수 없는 증거를 우리들에게 제공한다. 이론의 증식은 과학을 위해서 유익한 반면, 획일성은 과학의 비판적 능력을 손상시킨다. 또한 획일성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협한다.

... 영역 D' 내의 상황을 성공적으로 기술하는 이론 T'을 생각하자. T'은 유한한 수의 관찰(그 집합을 F라 하자)과 일치하고 동시에 이러한 관찰과 오차 M의 범위 내에서 일치한다. 집합 F의 외부에 있는 관찰과 오차 M의 범위 내에서 T'과 모순되는 어떠한 대안적 이론도 동일한 관찰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T'이 수용될 수 있다면 그의 대안적 이론도 수용될 수 있다(나는 F가 유일하게 행해진 관찰이라고 가정한다). 그런데 일관성의 조건은 이것보다 훨씬 덜 관용적이다. 이 조건이 이론이나 가설을 배제하는 것은 그것들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론이나 가설을 다른 이론, 특히 그것을 입증하는 사례들을 공유하고 있는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을 그 이론의 아직 시험되지 않은 부분을 타당성의 척도로 삼고 있느 것이다. 그러한 척도와 보다 새로운 이론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오래된 정도와 친밀함의 정도일 뿐이다. 새로운 이론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면 일관성의 조건은 그것에 유리하게끔 작용했을 것이다. ...

... 일관성의 조건을 옹호자는 실제적인 개선은 오직 새로운 사실첨가로부터 초래되는 것이라고 계속 주장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은 현재 통용되는 이론을 지지하든가, 혹은 어디가 틀렸는가를 정확하게 지적함으로써 그것들을 고치도록 강요하든가 할 것이다. 그 두 경우에 있어서 새로운 사실들은 자의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진정한 진보를 촉진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수용된 관점을 가능한 한 많은 관련 사실들과 맞춰보는 일이 적절한 절차를 밟는 것임에 틀림없다. 대안적 이론의 배제야말로 효용성의 척도이다. 그러한 것의 발명은 진보에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보다 나은 일에 바쳐질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을 소모시킴으로써 진보를 방해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일관성의 조건은 이러한 비생산적인 논의를 배제하고, 궁극적으로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이론의 심판관인 사실들에 집중할 것을 과학자에게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현장의 과학자들이 경험적으로 가능한 대안적 이론을 배제하면서 단일한 이론에 집중하는 것을 변호하는 방식이다.[3]

... [그러나] 나는 이것이 실제 상황에 대한 너무나도 단선적인 묘사라는 점을 지적하겠다. 사실과 이론은 자율성의 원리[사실이 이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주어진다는 원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단일한 사실에 대한 기술은 어떤 이론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험된 이론에 대한 대안적 이론의 도움 없이는 발견될 수 없고, 이러한 대안 이론이 배제되는 순간 곧 입수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는 사실들도 존재한다. 시험이나 경험적 내용의 문제를 논의할 때에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방법론상의 단위는, 부분적으로 겹쳐쳐지고, 사실적으로 타당하지만 서로 양립불가능한 이론들의 총합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위 사실은 시사하고 있다. ...

... 결정적인 사실들과 연관을 맺거나 그것을 반박하는 성질은 모두 사실적으로는 타당하면서 시험되어야 할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는 다른 이론의 도움을 얻어서 비로소 확립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안적 이론들의 발명과 그것의 정교화는 반박하는 사실들의 산출에 선행되어야 한다. 경험주의는 적어도 그것의 보다 세련된 버전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경험적 내용을 가능한 한 증가시킬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논의의 중심에 있는 견해에 대한 대안들의 발명은 경험적 방법의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 의견의 만장일치는 엄격한 교회나 일부 (오래된 혹은 현대적인) 신화의 (겁먹은 혹은 탐욕스런) 희생자들, 혹은 일부 독재자의 (나약한 혹은 자발적인) 추종자들에게 적합할 것이다. 반면 의견의 다양성은 객관적 지식을 위해 필요하며, 다양성을 북돋는 방법만이 인도주의적인 견지와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4장. 과학 우월주의의 극복

오래되고 터무니없는 관념이라도, 우리의 지식을 개선시킬 수 없는 관념은 없다. 사상의 역사 전체는 과학에 흡수되어 어떤 이론이든 그것을 개선하는 데 사용된다. 정치적 간섭도 금지되지 않는데, 이는 현상태의 대안들에 저항하는 과학 우월주의(chauvinism of science)를 극복하는 데 필요할 수 있다.

자신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의 경험적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론의 가능한 한 많은 측면을 이해하기를 원하는 과학자는 다원주의적 방법을 채택할 것이고, 그 이론을 경험, 자료, 혹은 사실들과 비교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론과 비교할 것이고, 경쟁에서 진 것으로 보이는 관점들을 배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선시키기를 꾀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합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대안적 이론은, 과거의 것에서 얻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안적 이론들은 그것을 찾아낼 수 있는 곳이라면 — 고대의 신화이든 현대의 편견이든, 전문가의 역작이든 기인의 환상이든 — 어디에서 받아들여져도 좋다. 한 주제의 역사 전체가 그 주제의 가장 새롭고 가장 진보된 단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활용된다. 과학사, 과학철학 및 과학 그 자체 사이의 구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도 또한 사라진다.

이 입장은 앞에서 제시되었던 논증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지만 대답하기 쉬울 것 같은 반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사학적 물음에 의해서 빈번하게 공격된다. 내가 전에 쓴 논문에 대한 논평에서 헤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어떤 형이상학이라도 좋다면, 우리는 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부두교에서 가능한 현대과학에 대한 객관적 비판으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정말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암시는, 그녀의 독자들의 상당한 무지를 가정하고 있다. 진보는 바로 그녀가 지금 추방했던 것 같은 종류의 과거로부터의 비판에 의해 종종 이룩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이후에 이상하고 낡고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역사의 쓰레기더미에 방치되었던 피타고라스의 견해, 즉 지구가 움직인다는 관념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재생되고 다듬어져서 그 관념을 쳐부순 자들을 다시 쳐부수는 무기가 되었다. ... 어떠한 관념도 그것의 모든 가지까지 검토되지는 않으며, 어떠한 관점도 그것이 가져야 할 모든 기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이론들은 그 진가를 나타낼 기회를 얻기 훨씬 전에 포기되고 보다 시류에 적합한 설명에 의해 대치된다. ... 부두교 역시 아직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 않지만 확고한 실질적인 기반을 갖고 있고, 그 표현들에 대한 연구는 우리들의 생리학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개정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한층 더 흥미로운 실례는, 중국에서의 전통의학 부흥이다. 우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발전으로부터 시작한다. 위대한 문화를 가졌던 거대한 나라가 서양의 지배 하에 들게 되고, 통상적인 방식으로 창취당하였다. 새로운 세대는 서양의 물질적 지적 우월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과학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전통적인 요소들을 젖혀두고, 과학이 수입되고 가르쳐졌다. 과학 우월주의가 승리를 거둔다. “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은 살 것이요, 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죽어야 한다.” 이 맥락에서 과학이란 단지 특별한 한 가지 방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지금까지 산출해 온 결과 모두를 의미하였다. 이 결과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배제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구식의 의사는 의료행위를 못하게 되거나 아니면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본초의학이나 침술요법이나 뜸요법 및 그것의 기초를 이루는 철학은 구식이라며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1954년 경까지의 태도였는데, 이 해에 보건성에서 부르주아적 요소들을 숙청하면서 전통의학의 부흥을 위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캠페인은 정치적 이유에 의해 고취된 것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1) 서양 과학과 부르주아 과학의 동일시 (2) 과학을 정치적 감시로부터 제외시키는 것과 전문가에게 특권을 주는 것에 대한 당의 거부. 그러나 이것은 그 시대의 과학 우월주의를 극복하고 관점의 다원성(실제로는 이원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 필요한 대항력을 제공했다. ...

한편 이 정치적으로 강요된 이원론에 의해 중국과 서양 모두에 있어서 매우 흥미롭고 수수께끼 같은 발견이 가능했고, 또한 현대 의학에서는 재현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진단의 효과나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서양 의학에 상당한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켰다. ... 여기서 지식은 선호된 이데올로기의 결정된 적용보다는 관점의 증식에 의해 얻어진다. 그리고 관점의 증식은 가장 강력한 과학 제도마저도 극복할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진 비과학적 동인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게 된다. 그러한 동인의 예로서는 교회, 국가, 정치적 당파, 공중의 불만, 또는 돈이 있다. ...

코페르니쿠스, 원자 이론, 부두교, 중국의학의 예들은 가장 진보된 그리고 가장 안전해 보이는 이론도 안전하지 않으며,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던 관점들의 도움을 얻어 무지한 독단이 수정될 수도, 혹은 아주 전복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지식의 내일의 옛날 이야기가 되고, 가장 바보같은 신화가 얼마 안 가서 과학의 가장 확고한 일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5장. 모든 사실과 일치하는 이론은 없다

어떠한 이론도 자신의 영역 내의 모든 사실과 일치한 적이 없는데, 그 책임이 항상 이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들은 낡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며, 사실과 이론의 충돌은 진보의 증거일 수도 있다. 그것은 친숙한 관찰적 개념에 함축된 원리들을 찾아내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

[양적 불일치의 사례들] 갈릴레오 시대에 코페르니쿠스적인 견해는 매우 평범하고 명백한 여러 사실들과도 불일치했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그것을 “분명히 틀렸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후일의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가 이성을 가지고 감각을 정복하여 감각을 무시하고, 이성을 그들의 신념의 주인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뉴턴의 중력 이론은 처음부터 반박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심각한 난점들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비상대성 이론적인 영역에서도 “관찰과 이론과의 수많은 불일치가 존재한다.” 보어의 원자 모형은 정확하고 흔들릴 수 없는 반대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입되었고 유지되었다. 특수상대성 이론은 1906년 카우프만의 명백한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또한 밀러의 반박(나는 그 실험이 그 당시의 증거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그것에 앞선 마이켈슨과 몰리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게 수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었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어떤 영역에서는 놀랄만큼 성공적이지만, 금성의 교점(node)의 운동에 대애서는 10초, 화성의 교점의 운동에서는 5초 이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 디케와 그밖의 사람들에 의한 수성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계산에 의해, 또다시 난점에 부딪히고 있다. ...

[질적 불일치의 사례들] ... 질적인 결함을 가진 이론의 또 하나의 예는 뉴턴의 색채 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빛은 각기 다른 굴절율을 가진 광선들로 구성되고 이들 광선들은 분리되고 재결합되며 굴절될 수도 있지만, 그 내부적 구조는 결코 변화될 수 없고 공간에 있어서는 횡적으로 아주 조금만 팽창할 수 있다. (뉴턴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거울의 표면이 광선의 횡적 팽창보다도 훨씬 거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광선 이론은 거울상의 존재와 불일치한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즉, 만일 빛이 광선들로 구성된다면 거울은 거친 표면과 같이 진동해야 할 것이다. 뉴턴은 이런 난점을 임시방편적 가설의 도움으로 제거함으로써 이 이론을 유지했다. 즉 “광선의 반사는 반사체의 어느 한 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표면 전체에 고르게 발산되는 그 물체의 어떤 힘에 의해서 결과된 것이다.” ...

우리들의 현재의 논의 결과에 따르면, 사실들과 일치하는 이론은 거의 없다. 입수 가능한 수용된 사실들과 일치하는 이론만을 허용한다는 요구는 어떤 이론도 우리들에게 남겨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의 과학은 우리가 그러한 요구를 역시 철회하고 우리들의 방법론을 재차 수정하고, 결국 근거 없는 가정을 허용하는 것에 덧붙여 반귀납을 허용할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반증에 기초하여 이론을 선택하게 하는 규칙을 일체 포함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규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미 시험을 통해 반증된 이론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가설은 오늘날의 사라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방법론적 규칙에 반해서 창안되고, 옹호되고, 부분적으로나마 입증되어 왔다. 이를 위한 보조과학은 지구상의 대기의 성질과 영향을 기술하는 법칙(기상학), 눈의 구조와 망원경의 구조를 다루는 광학적 법칙, 빛의 움직임을 다루는 법칙, 게다가 운동계에서의 운동을 기술하는 동력학적 법칙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각과 물리적 대상 사이의 어떤 단순한 관계를 추정하는 인식에 대한 이론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조적인 학문 영역이 모두 명시적인 형태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이 모든 상황들, 즉 관찰 언어, 감각의 중심핵, 보조과학, 배경을 이루는 사변 등에 대한 고찰은 하나의 이론이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부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론은 그 증거가 외부적 과정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대응하는 분석되지 않은 감각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혹은 증거가 낡은 견해를 통해서만 제시되기 때문에, 또는 그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보조학문의 도움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위협받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

...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나 습관적인 반응을 비판하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울타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가장 주의깊게 확립된 관찰결과와 충돌하고 가장 그럴듯한 이론적인 원리들을 깨뜨리는 하나의 새로운 개념 체계, 예를 들어, 새로운 이론을 발명하든가 혹은 그러한 새로운 체계를 장외의 과학으로부터, 종교로부터, 신화 체계로부터, 무능력자의 관념으로부터, 혹은 미치광이의 터무니없는 생각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이다. 이 첫 단계는 역시 반귀납적이다. ...

6장. 자연적 해석

그러한 사례로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지구의 운동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 탑 논변을 검토할 것이다. 그 논변은 — 관찰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념들로서 그것의 존재를 깨닫고 그것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 자연적 해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와 모순되는 자연적 해석들을 식별해내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교체한다.

... 낙하하는 돌로부터의 논변[지구가 돈다면 탑에서 떨어뜨린 돌이 뒤쳐져야 하지만, 실제로는 수직으로 떨어지므로 지구가 돌지 않는다는 논변. 줄여서 탑 논변]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를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내재한 약점 때문일 수도 있으나, 개선이 필요한 자연적 해석[감각 그 자체는 아니지만 감각과 밀착되어 분리되기 힘든 해석]의 존재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경우 첫 번째 과제는 이러한 미검토된 진보의 장애물들을 발견하고 고립시키는 것이다.

베이컨의 믿음에 따르면, 자연적 해석은 모든 관찰의 감각적 핵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한 장 한 장 껍질을 벗겨가는 분석의 방법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방법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첫째, 베이컨이 생각하는 종류의 자연적 해석은 앞서 존재하는 감각의 영역에 단순히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베이컨 자신이 말했듯이, 그것은 그 영역을 구성하는 데 사용된다. 모든 자연적 해석을 배제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사고하고 지각하는 능력마저 잃게 된다. 둘째, 자연적 해석의 이러한 근본적 기능을 무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분명해질 것이다. 즉 동원할 수 있는 자연적 해석을 단 하나도 갖지 않은 채 지각적 영역을 대면하는 사람은 전혀 방향을 잡지 못할 것이고 그는 과학이라는 활동을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베이컨적 분석 이후에도, 우리들이 정말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그 분석이 미진한 상태에서 중단됐음을 나타낸다. 그 분석은 딱 — 우리들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것 없이는 나아가지 못하는 — 자연적 해석 앞에서 중단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자연적 해석을 완전히 제거하고서 무의 상태에서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다.

더우기 일군의 자연적 해석을 부분적으로만 해명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얼핏 보면 그 일은 아주 간단한 일로 보일 것이다. 누군가 관찰 진술들을 하나씩 받아 그 내용을 분석한다고 해보자. 그러나 관찰 진술들 속에 숨어 있는 개념들은 보다 추상적인 용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 같지 않다. 만일 정체를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을 고정시키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개념은, 지각 대상과 마찬가지로, 애매하며 배경에 의존한다. 더군다나, 한 개념의 내용은 그것이 지각과 연결되는 방식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어떻게 순환 없이 발견될 수 있을까? 지각이 [개념과 구별되어] 식별되어야 하지만, 그 식별 메커니즘은 조사되어야 하는 개념의 사용을 관장하는 아주 똑같은 요소들 중 일부를 포함할 것이다. 우리들은 절대로 이 개념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개념]의 구성 요소를 알아내려고 시도할 때마다 항상 그것의 일부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은 유일한데, 그것은 — 개념과 지각 대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을 비롯한 — 외부적인 비교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적인 기준은 자연스러운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구성하는 모든 원리, 습관, 태도들로부터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말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 기준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처럼 이상하다는 인상은 자연적 해석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자연적 해석을 발견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다. 이러한 상황을 탑 논변의 사례를 이용해 설명해 보자.

탑 논변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려는 의도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사실’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의 운동이라는 관념은 이상하고, 불합리하며, 명백한 오류이다. 이는 당시 빈번히 사용되었던 표현들 중 단지 몇 가지만 언급한 것으로, 이들은 현재도 고지식한 전문가들이 새로운 반사실적인 이론과 맞닥뜨릴 때마다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은 코페르니쿠스적 견해가 위에서 얘기한 바로 그 외부적인 잣대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 논변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어, 그것[코페르니쿠스적 견해]을 지구의 운동을 배제하고 있는 자연적 해석의 존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탐지 장치로 사용할 수 있다. 논변의 방향을 뒤집어, 우리는 지구의 운동을 먼저 가정하고, 어떠한 변화를 주어야 그 모순이 제거될 지 그 다음에 탐구한다. 이러한 탐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그 탐구는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그 모순은 수십 년 내지 수 세기 동안 우리 곁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모순은 우리의 검토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검토, 즉 우리 지식 속의 케케묵은 성분들을 발견하기 위한 시도는 시작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는 사실과 모순되는 이론들을 유지하는 일이, 어쩌면 그것을 발명하는 일도, 왜 필요한지에 대한 한 가지 이유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 지식의, 특히 우리 관찰의, 이데올로기적 성분들은 그것에 의해 반박되는 이론의 도움을 받아 발견된다. 즉 그것은 반귀납적으로 발견된다. ...

  1. Herbert Marcuse, Reason and Revolution, London, 1941, p. 130.
  2.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Vol. 1, Hamburg, 1965, p. 6.
  3. 이러한 태도의 존재와 과학의 발전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는 Thoma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1962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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