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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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라우든 지음, 정동욱 옮김, [[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원문 : Larry Laudan, "The Epistemic, the Cognitive, and the Social", in ''Science, Values, and Objectivity'', eds. Peter Machamer and Gereon Wolters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04), pp. 14-23.
래리 라우든 지음, 정동욱 옮김, [[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원문 : Larry Laudan, "The Epistemic, the Cognitive, and the Social", in ''Science, Values, and Objectivity'', eds. Peter Machamer and Gereon Wolters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04), pp. 14-23.


과학의 중요한 판단 기준들은 참/거짓을 판단하는 인식적 기준들을 넘어섬. 라우든은 이를 “인지적(cognitive)”이라고 칭하고자 하며, 이것이 사회적 가치와는 구별된다고 주장함.
라우든에 따르면, 과학의 중요한 판단 기준들(예컨대, 적용 범위, 설명력 등)은 참/거짓을 판단하는 인식적 기준들을 넘어선다. 라우든은 이를 “인지적(cognitive)”이라고 칭하고자 하며, 소위 합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구분선을 그어야 한다면, 인지적 근거를 가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 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본문 ==
== 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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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제목|인식적, 인지적, 사회적}}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지음, 정동욱 옮김
래리 라우든(Larry Laudan) 지음, 정동욱 옮김  
 
 
(초벌 번역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여 읽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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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약 우리가 합리적 재구성을 인식적 가치들뿐 아니라 과학을 구성하는 인지적 가치들을 이용해 과학을 분석하기 위한 기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맥락 사이의 구분선은 대폭 변경될 것이다. 이제 정당화의 맥락은 범위, 일반성, 적용 범위 {{--}} 그리고 어쩌면 설명 범위도 {{--}} 에 관한 고려들을 임의의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일부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들이 비인식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인지적 가치들을 통한 합리적 재구성은, 내 제안에 따르면, 엄격히 인식적인 요인들에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는 과학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에 그 합리적 재구성에 의해 관련된 과학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많이 포착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하면, 인지 기반 재구성은 분명히 인식 기반 재구성보다 선호할 만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합리적 재구성을 인식적 가치들뿐 아니라 과학을 구성하는 인지적 가치들을 이용해 과학을 분석하기 위한 기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맥락 사이의 구분선은 대폭 변경될 것이다. 이제 정당화의 맥락은 범위, 일반성, 적용 범위 {{--}} 그리고 어쩌면 설명 범위도 {{--}} 에 관한 고려들을 임의의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일부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들이 비인식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인지적 가치들을 통한 합리적 재구성은, 내 제안에 따르면, 엄격히 인식적인 요인들에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는 과학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에 그 합리적 재구성에 의해 관련된 과학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많이 포착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하면, 인지 기반 재구성은 분명히 인식 기반 재구성보다 선호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합리적 재구성을 지지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처음에 내가 얘기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관념은 나의 더 큰 비판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당연히 그 비판 대상은 분석적 인식론 자체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범위, 일반성, 정합성, 통섭, 설명력이 과학 이론의 평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과학은 그 본성상 단지 주변적으로만 혹은 부분적으로만 인식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인식적 용어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성향은 {{--}} 그리고 그저 그렇게 하는 데 충실한 과학철학(예컨대 베이즈주의)도 존재한다 {{--}}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합리적 재구성을 지지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처음에 내가 얘기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관념은 나의 더 큰 비판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당연히 그 비판 대상은 분석적 인식론 자체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범위, 일반성, 정합성, 통섭, 설명력이 과학 이론의 평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나면, 과학은 그 본성상 단지 주변적으로만 혹은 부분적으로만 인식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인식적 용어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성향은 {{--}} 그리고 그저 그렇게 하는 데 충실한 과학철학(예컨대 베이즈주의)도 존재한다 {{--}}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 이론은 통째로 인식론으로의 환원 벌레에 감염되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통계학자들은 딱 두 가지 유형의 오류 {{--}} 거짓인 가설을 수용하는 것과 참인 가설을 거부하는 것 {{--}} 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연히 과학이 참 이외의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면, 우리는 각각의 인지적 가치들과 연관된 오류 유형들의 전체 집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과학자는 설명적이지 않은 이론을 설명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 있고 설명적인 이론을 설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들 {{--}} 현재의 오류 이론에서는 찾을 수 없는 {{--}} 은 거짓을 수용하고 참을 거부하는 보다 익숙한 오류만큼 이론에 치명적일 수 있다. 라이헨바흐식 합리적 재구성과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학자는 자신의 역할을 전적으로 인식론자에게서 빌려 온다. 이는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유일한 적절한 요구가 그것의 참이라고 가정할 이유가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이해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전제를 믿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론이 자신의 의도된 적용 영역에 있는 유명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자신이 설명하기로 선택한 사실들을 훌륭하게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이론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매우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란 점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평가를 이해하는 데, 오류 통계학자들은 인식론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 과학자들은 이론에 이러한 추가적인 요구를 정말로 하고 있고, 그렇게 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통계학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을 해명하는 일에 그들이 현재 써먹고 있는 도구가 얼마나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시간이다. 나는 베이즈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들은 오류 통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확률 부여를 조정하는 데만 집착할 뿐, 더치북을 피하고 참에 관한 손해 보는 베팅 전략에 빠지는 것 외의 이론 평가 가치들의 역할에는 무관심하다. 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나도 알고 있듯이, 왜냐하면 기발한 베이즈주의자들은 고생대의 잡식 동물처럼 그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소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참인 이론을 갖고자 한다 {{--}} 물론 그 이상은 달성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커다란 일반성을 가진 이론, 우리가 특히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이론, 예측뿐 아니라 설명도 하는 이론, 기존의 성공들을 통합할 뿐 아니라 그 너머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론도 좋아할 것이다. 첫 번째 문제를 제외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인식론자는 거의 하나도 알지 못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처럼, 인식론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들은 과학적 연구를 추동하는 가치 대부분에 대해 억지로(studied) 침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의 제목의 세 번째 요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 나머지 둘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에 함축된 계약을 이행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100년 넘게 지속된 철학 전통이 있는데, 마르크스(Marx)와 만하임(Mannheim)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다음을 가정한다. 오직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하여 수용된 것처럼 보이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인식적 덕목을 결여한 이론에 대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심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 이론이란 결국 설득력 있는 인식적 논증이 없는 관념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엄밀히 말해, 이런 사고 방식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적 요인들 자체는 탐구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믿음들과 믿음 인증(authentification)에 관한 관습들을 비롯해 모든 인공물은 의사소통, 협상, 합의 형성의 사회적 과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뜻은 너무 넓어서 공허하다.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맥락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간주했을 때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믿음이 정착하는 사회적 과정들 중 인식적 이유를 결여한 것들은 (사회병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지만)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헨바흐는 믿음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엔, 철학자가 그 정당화를 탐구하고 그 정당화와 그 믿음 자체의 유관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노선을 따라 우리가 사회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뿐 아니라 인지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 전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범위를 인식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한 반면, 나는 그 범위가 인지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잠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추후 완성 예정)
그럼에도 내가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인식적 가치들이 설명적으로 빈곤하다는 것과 따라서 범주상 단지 인식적인 것을 확실히 넘어서는 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주 ===
===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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