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적, 인지적, 사회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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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바이트 추가됨 ,  2022년 1월 26일 (수)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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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속성들이 인식적 지표(indicators)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하게 일반적인 증명을 짜맞출 수도 있다. 나 자신은 그러한 논증들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지만, [일반적인 논증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실제로, 이 속성들이 인식적 지표(indicators)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하게 일반적인 증명을 짜맞출 수도 있다. 나 자신은 그러한 논증들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지만, [일반적인 논증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인용|이론 ''T''가 범위의 덕목 중 하나인 ''v''를 보이는 이론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T''는 많은 귀결들을 가질 것이고, 그 귀결들 중 무한히 많은 것들은 ''v''를 결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범위의 진술의 논리적 귀결들 중 다수는 그러한 범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결들 중 하나를 ''c''<sub>1</sub>이라고 불러 보자. 이제 ''T''가 참이라면, ''c''<sub>1</sub> 역시 참이어야 한다. 만약 ''T''가 매우 개연적이거나 매우 그럴듯하다면, ''c''<sub>1</sub>은 더욱더 개연적이거나 더욱 그럴듯해야 한다. 요컨대, 함축의 진리-보존적 성격 덕분에, ''c''<sub>1</sub>은 필연적으로 ''T''의 모든 인식적 덕목을 가지면서도 ''v''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결국 ''v''는 인식적 덕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sub>1</sub>처럼) ''v''를 가지지 못한 진술들이 적어도 ''v''를 보이는 ''T''와 같은 진술만큼은 인식적으로 단단하기 때문이다.}}
{{인용|이론 ''T''가 범위의 덕목 중 하나인 ''v''를 보이는 이론이라고 해 보자. 그러면 ''T''는 많은 귀결들을 가질 것이고, 그 귀결들 중 무한히 많은 것들은 ''v''를 결여할 것이다. 왜냐하면 넓은 범위의 진술의 논리적 귀결들 중 다수는 그러한 범위를 가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귀결들 중 하나를 ''c''<sub>1</sub>이라고 불러 보자. 이제 ''T''가 참이라면, ''c''<sub>1</sub> 역시 참이어야 한다. 만약 ''T''가 매우 개연적이거나 그럴듯하다면, ''c''<sub>1</sub>은 그보다도 개연적이거나 그럴듯해야 한다. 요컨대, 함축의 진리-보존적 성격 덕분에, ''c''<sub>1</sub>은 필연적으로 ''T''의 모든 인식적 덕목을 가지면서도 ''v''를 가지진 못할 것이다. 결국 ''v''는 인식적 덕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c''<sub>1</sub>처럼) ''v''를 가지지 못한 진술들이 적어도 ''v''를 보이는 ''T''와 같은 진술만큼은 인식적으로 단단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인식론자들을 빼면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들이 과학의 동력을 제공한다거나 "단지 미적인" 잣대가 [과학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좋은 과학 이론에 대해 이론의 참에 관한 고려를 훨씬 넘어서는 것들을 기대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score)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어떤 과학자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모든 진술을 수용가능한 이론으로 인정할지 자문해보라. 과학자들은 참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하지도 모른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론 평가에서 적어도 참 만큼 중요해 보이는 이론의 다른 덕목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의에 의해 이것들은 인식적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이지만 그러한 덕목들을 보이는 진술도 많고 참이지만 그러한 덕목을 가지지 못한 진술도 많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그것들은 인식적 의제(agenda)에 의해 추동되는 소위 과학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설 자리가 없다.
사실 때문에 불편해질 사람은 인식론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가치들이 과학의 동력을 제공한다거나 "단지 미적인" 잣대가 [과학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아니다. 그것이 정말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좋은 과학 이론에 대해 이론의 참에 관한 고려를 훨씬 넘어서는 것들을 기대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사실(score)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어떤 과학자가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모든 진술을 수용가능한 이론으로 인정할지 자문해보라. 과학자들은 참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할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할 것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론 평가에서 적어도 참만큼 중요해 보이는 이론의 다른 덕목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의에 의해, 이것들은 인식적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거짓이지만 그러한 덕목들을 보이는 진술도 많고, 참이지만 그러한 덕목을 가지지 못한 진술도 많기 때문이다. 정의에 의해, 그것들은 인식적 의제(agenda)에 의해 추동되는 소위 과학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설 자리가 없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은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이 격언을 다음과 같이 뒤틀 수도 있다. 나쁜 이론이 되기 위해 거짓일 필요가 없다. 어떤 이론은 유관한 비인식적 덕목들을 가지지 못해 나쁜 이론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대다수의 단지 참이기만 한 진술들이 해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일을 우리의 이론이 우리에게 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추가적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알아낼 때, 우리는 인식적 영역 너머 내가 인지적-비인식적 가치들이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바스 반 프라센(Bas van Fraassen)은 좋은 이론이 되기 위해 참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이 격언을 다음과 같이 뒤틀 수도 있다. 나쁜 이론이 되기 위해 거짓일 필요는 없다. 어떤 이론은 유관한 비인식적 덕목들을 가지지 못해 나쁜 이론이 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대다수의 단지 참이기만 한 진술들이 해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일을 우리의 이론이 우리에게 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추가적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알아낼 때, 우리는 인식적 영역 너머 내가 인지적-비인식적(cognitive but nonepistemic) 가치들이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러한 가치들은 고전적인 지식 이론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하더라도 과학의 구성 요소이다. 그것들 없이 과학이 기능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가치들은 흔히 이해되는 방식의 철학적 의미론이나 정당화 조건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인지적 덕목들 또는 가치들이라고 부르며, 인식적 덕목들은 그것의 (내가 흥미롭지 않다고 말할 뻔한) 진부분집합을 형성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인지적 덕목들 중에서 이론의 범위(range or scope)와 관련된 종류에 초점을 맞췄었다. 그러한 고려들 중 다른 것으로는, 필립 키처(Philip Kitcher)의 언어로, 문제가 되는 이론이 "설명적 통합성"을 달성했는지를 들 수 있다.<ref>키처는 많은 곳에서 이러한 논증을 정식화했다. 그중 가장 상세하고 정교한 버전은 Kitcher(1993)을 보라.</ref> 범위와 일반성의 덕목들과 마찬가지로, 설명적 통합성의 덕목은 {{--}} 키처가 때로 그에 대해 주장한 바와 달리 {{--}} 참과 관련된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통합적 이론 ''T''는 ''T''가 참일 경우 반드시 참인 비통합적 이론들 ''T''<sub>1</sub><sup>*</sup>, ''T''<sub>2</sub><sup>*</sup>, ..., ''T''<sub>''n''</sub><sup>*</sup>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T''를 그것의 임의의 약한 이론들에 비해 좋다고 간주한다면 {{--}} 사실 그들은 항상 그럴 것이다 {{--}} 이는 ''T''가 비인식적인 덕목들을 보유한 반면 ''T''<sub>''i''</sub>들은 이를 결여했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가치들은 고전적인 지식 이론으로는 이해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가치들은 그것들 없이 제대로 작동하는 과학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과학의 구성 요소이다. 이 가치들은 흔히 이해되는 방식의 철학적 의미론이나 정당화 조건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인지적(cognitive) 덕목들 또는 가치들이라고 부르며, 인식적 덕목들은 그것의 (내가 거의 흥미롭지 않다고 보는) 진부분집합을 형성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 인지적 덕목들 중에서 이론의 범위(range or scope)와 관련된 종류에 초점을 맞췄었다. 그러한 고려들 중 다른 것으로는, 필립 키처(Philip Kitcher)의 언어로, 문제가 되는 이론이 "설명적 통합성"을 달성했는지를 들 수 있다.<ref>키처는 많은 곳에서 이러한 논증을 정식화했다. 그중 가장 상세하고 정교한 버전은 Kitcher(1993)을 보라.</ref> 범위와 일반성의 덕목들과 마찬가지로, 설명적 통합성의 덕목은 {{--}} 키처가 때로 그에 대해 주장한 바와 달리 {{--}} 참과 관련된 덕목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통합적 이론 ''T''는 ''T''가 참일 경우 반드시 참인 비통합적 이론들 ''T''<sub>1</sub><sup>*</sup>, ''T''<sub>2</sub><sup>*</sup>, ..., ''T''<sub>''n''</sub><sup>*</sup>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만약 과학자들이 ''T''를 그것의 임의의 약한 이론들에 비해 좋다고 간주한다면 {{--}} 사실 그들은 항상 그럴 것이다 {{--}} 이는 ''T''가 비인식적인 덕목들을 보유한 반면 ''T''<sub>''i''</sub>들은 이를 결여했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절반만 맞더라도, 합리적 재구성을 마련하기 위한 라이헨바흐식 공식은 치명적인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제한은 인식론 자체의 적용과 관련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최선의 과학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식론의 자원을 통해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더구나, 라이헨바흐식 공식은 과학에서의 이론 평가에 개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의 상당수를 철학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즉 단지 심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의 관심거리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나의 비판을 라이헨바흐 자신의 언어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발견의 맥락에 넘겨 버리고, 앙상한 뼈대에 불과한 것만을 정당화의 맥락에 남겼다.   
이 모든 것이 절반만 맞더라도, 합리적 재구성을 직조하기 위한 라이헨바흐식 공식은 치명적인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제한은 인식론 자체의 적용 및 관련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최선의 과학에서 일어나는 일은 인식론의 자원을 통해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는다. 더구나, 라이헨바흐식 공식은 과학에서 이론 평가에 개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들의 상당수를 철학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즉 단지 심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의 관심거리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나의 비판을 라이헨바흐 자신의 언어를 사용해 표현하자면,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발견의 맥락에 넘겨 버리고, 앙상한 뼈대에 불과한 것만을 정당화의 맥락에 남겼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합리적 재구성을 인식적 가치들뿐 아니라 과학을 구성하는 인지적 가치들을 이용해 과학을 분석하기 위한 기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맥락 사이의 구분선은 대폭 변경될 것이다. 이제 정당화의 맥락은 범위, 일반성, 적용 범위 {{--}} 그리고 어쩌면 설명 범위도 {{--}} 에 관한 고려들을 임의의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일부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들이 비인식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인지적 가치들을 통한 합리적 재구성은, 내 제안에 따르면, 엄격히 인식적인 요인들에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는 과학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에 그 합리적 재구성에 의해 관련된 과학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많이 포착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하면, 인지 기반 재구성은 분명히 인식 기반 재구성보다 선호할 만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합리적 재구성을 인식적 가치들뿐 아니라 과학을 구성하는 인지적 가치들을 이용해 과학을 분석하기 위한 기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두 맥락 사이의 구분선은 대폭 변경될 것이다. 이제 정당화의 맥락은 범위, 일반성, 적용 범위 {{--}} 그리고 어쩌면 설명 범위도 {{--}} 에 관한 고려들을 임의의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일부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들이 비인식적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인지적 가치들을 통한 합리적 재구성은, 내 제안에 따르면, 엄격히 인식적인 요인들에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레 라카토슈(Imre Lakatos)는 과학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에 그 합리적 재구성에 의해 관련된 과학자들의 활동이 얼마나 많이 포착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하면, 인지적 재구성은 인식적 재구성보다 분명히 선호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합리적 재구성을 지지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처음에 내가 얘기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관념은 나의 더 큰 비판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당연히 그 비판 대상은 분석적 인식론 자체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범위, 일반성, 정합성, 통섭, 설명력이 과학 이론의 평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나면, 과학은 그 본성상 단지 주변적으로만 혹은 부분적으로만 인식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인식적 용어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성향은 {{--}} 그리고 그저 그렇게 하는 데 충실한 과학철학(예컨대 베이즈주의)도 존재한다 {{--}}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합리적 재구성을 지지하는지보다 중요한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처음에 내가 얘기했듯이, 합리적 재구성이라는 관념은 나의 더 큰 비판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당연히 그 비판 대상은 분석적 인식론 자체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범위, 일반성, 정합성, 통섭, 설명력이 과학 이론의 평가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과학은 그 본성상 단지 주변적으로만 혹은 부분적으로만 인식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인식적 용어로만 환원하고자 하는 본능 {{--}} 그리고 단지 그 일에만 충실한 과학철학(예컨대 베이즈주의)도 존재한다 {{--}} 은 억제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 이론은 통째로 인식론으로의 환원 벌레에 감염되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통계학자들은 딱 두 가지 유형의 오류 {{--}} 거짓인 가설을 수용하는 것과 참인 가설을 거부하는 것 {{--}} 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연히 과학이 참 이외의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면, 우리는 각각의 인지적 가치들과 연관된 오류 유형들의 전체 집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과학자는 설명적이지 않은 이론을 설명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 있고 설명적인 이론을 설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들 {{--}} 현재의 오류 이론에서는 찾을 수 없는 {{--}} 은 거짓을 수용하고 참을 거부하는 보다 익숙한 오류만큼 이론에 치명적일 수 있다. 라이헨바흐식 합리적 재구성과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학자는 자신의 역할을 전적으로 인식론자에게서 빌려 온다. 이는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유일한 적절한 요구가 그것의 참이라고 가정할 이유가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이해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전제를 믿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론이 자신의 의도된 적용 영역에 있는 유명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자신이 설명하기로 선택한 사실들을 훌륭하게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이론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매우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란 점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평가를 이해하는 데, 오류 통계학자들은 인식론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 과학자들은 이론에 이러한 추가적인 요구를 정말로 하고 있고, 그렇게 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통계학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을 해명하는 일에 그들이 현재 써먹고 있는 도구가 얼마나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시간이다. 나는 베이즈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들은 오류 통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확률 부여를 조정하는 데만 집착할 뿐, 더치북을 피하고 참에 관한 손해 보는 베팅 전략에 빠지는 것 외의 이론 평가 가치들의 역할에는 무관심하다. 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나도 알고 있듯이, 왜냐하면 기발한 베이즈주의자들은 고생대의 잡식 동물처럼 그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소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학(statistical theory of error) 전체는 인식론으로의-환원병에 감염되어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통계학자들은 딱 두 가지 유형의 오류 {{--}} 거짓인 가설을 수용하는 것과 참인 가설을 거부하는 것 {{--}} 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당연히 과학이 참 이외의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면, 우리는 각각의 인지적 가치들과 연관된 오류 유형들의 전체 집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과학자는 설명적이지 않은 이론을 설명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 있고 설명적인 이론을 설명적이지 않은 것으로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들 {{--}} 현재의 오류 이론에서는 찾을 수 없는 {{--}} 은 거짓을 수용하고 참을 거부하는 보다 익숙한 오류만큼 이론에 치명적일 수 있다. 라이헨바흐식 합리적 재구성과 마찬가지로, 오류 통계학자는 자신의 역할을 전적으로 인식론자에게서 빌려 온다. 이는 이론에 대한 과학자들의 유일한 적절한 요구가 그것의 참이라고 가정할 이유가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이해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전제를 믿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론이 자신의 의도된 적용 영역에 있는 유명한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자신이 설명하기로 선택한 사실들을 훌륭하게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이론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매우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란 점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평가를 이해하는 데, 오류 통계학자들은 인식론자들보다 나을 게 없다. 과학자들은 이론에 이러한 추가적인 요구를 정말로 하고 있고, 그렇게 할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식론자들과 마찬가지로 통계학자들은 과학적 합리성을 해명하는 일에 그들이 현재 써먹고 있는 도구가 얼마나 심각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을 시간이다. 나는 베이즈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들은 오류 통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확률 부여를 조정하는 데만 집착할 뿐, 더치북을 피하고 참에 관한 손해 보는 베팅 전략에 빠지는 것 외의 이론 평가 가치들의 역할에는 무관심하다. 나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나도 알고 있듯이, 왜냐하면 기발한 베이즈주의자들은 고생대의 잡식 동물처럼 그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소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참인 이론을 갖고자 한다 {{--}} 물론 그 이상은 달성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커다란 일반성을 가진 이론, 우리가 특히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이론, 예측뿐 아니라 설명도 하는 이론, 기존의 성공들을 통합할 뿐 아니라 그 너머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론도 좋아할 것이다. 첫 번째 문제를 제외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인식론자는 거의 하나도 알지 못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처럼, 인식론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들은 과학적 연구를 추동하는 가치 대부분에 대해 억지로(studied) 침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참인 이론을 갖고자 한다 {{--}} 물론 이는 달성하기 힘든 이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커다란 일반성을 가진 이론, 우리가 특히 이해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이론, 예측뿐 아니라 설명도 하는 이론, 기존의 성공들을 통합할 뿐 아니라 그 너머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론도 좋아할 것이다. 첫 번째 문제를 제외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인식론자는 거의 하나도 알지 못한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처럼, 인식론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들은 과학적 연구를 추동하는 가치 대부분에 대해 억지로 침묵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의 제목의 세 번째 요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 나머지 둘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에 함축된 계약을 이행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100년 넘게 지속된 철학 전통이 있는데, 마르크스(Marx)와 만하임(Mannheim)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다음을 가정한다. 오직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하여 수용된 것처럼 보이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인식적 덕목을 결여한 이론에 대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심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 이론이란 결국 설득력 있는 인식적 논증이 없는 관념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엄밀히 말해, 이런 사고 방식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적 요인들 자체는 탐구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믿음들과 믿음 인증(authentification)에 관한 관습들을 비롯해 모든 인공물은 의사소통, 협상, 합의 형성의 사회적 과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뜻은 너무 넓어서 공허하다.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맥락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간주했을 때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믿음이 정착하는 사회적 과정들 중 인식적 이유를 결여한 것들은 (사회병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지만)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헨바흐는 믿음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엔, 철학자가 그 정당화를 탐구하고 그 정당화와 그 믿음 자체의 유관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노선을 따라 우리가 사회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뿐 아니라 인지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 전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범위를 인식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한 반면, 나는 그 범위가 인지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잠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의 제목의 세 번째 요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이 나머지 둘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에 함축된 계약을 이행하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100년 넘게 지속된 철학 전통이 있는데, 마르크스(Marx)와 만하임(Mannheim)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전통은 다음을 가정한다. 오직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하여 수용된 것처럼 보이는 이론들에 대해서는 인식적 덕목을 결여한 이론에 대해 요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심리적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데올로기 이론이란 결국 설득력 있는 인식적 논증이 없는 관념을 사람들이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엄밀히 말해, 이런 사고 방식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 왜냐하면 인식적 요인들 자체는 탐구자들 사이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고 또 그로부터 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믿음들과 믿음 인증(authentification)에 관한 관습들을 비롯해 모든 인공물은 의사소통, 협상, 합의 형성의 사회적 과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뜻은 너무 넓어서 공허하다.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맥락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간주했을 때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믿음이 정착하는 사회적 과정들 중 인식적 이유를 결여한 것들은 (사회병리학의 관심사일 수는 있겠지만) 철학적 관심사가 아니며,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라이헨바흐는 믿음에 대한 인식적 정당화가 있는 경우엔, 철학자가 그 정당화를 탐구하고 그 정당화와 그 믿음 자체의 유관성을 주장하는 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이 노선을 따라 우리가 사회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한다면, 당연히 나는 철학자들이 인식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뿐 아니라 인지적 근거를 가진 믿음들 전부에 대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만하임은 지식 사회학의 범위를 인식적으로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한 반면, 나는 그 범위가 인지적 근거가 없는 믿음을 통해 정의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물론, 앞에서 얘기했듯이, 인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견해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잠정적이어서, 단순한 공식으로 환원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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