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standing, Explanation, and Scientific Knowledge/Understanding and True Belief"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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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장 전략 ====
==== 확장 전략 ====
여전히 두 가지 우려가 남는다. (1) 이해가 믿음 그 자체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 (2) 이상화된 설명이 단지 차이-위조자의 징표를 넘어 훨씬 더 거짓스러운 경우, 확장 전략을 채택할 수 있다. 확장 전략은 두 가지 우려를 함께 공략한다. 그 방법은 EKS 모델이 믿음 외에도 수용을 포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EKS2*) S는 왜 p인지에 대한 최소 이해를 갖는다. iff 어던 q에 대해
:(A) S는 q가 왜 p인지를 설명한다고 믿고, q가 왜 p인지 설명한다는 것은 근사적으로 참이다. '''또는'''
:(B) S는 q가 왜 p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을 수용하고, q가 왜 p인지 설명한다는 것은 효과적이다.
이러한 변경이 칼리파의 전체 기획과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우려에 대응해, 칼리파는 이러한 변경이 자신의 전체 기획의 자연스러운 확장임을 보이고자 한다. 칼리파의 EKS1에 따르면, 이해는 "넥서스 원리"와 "과학적 지식 원리"를 더 잘 만족할수록 증진되는데, 여기서 과학적 지식에 믿음뿐 아니라 수용이 포함되기만 하면, EKS2*가 따라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과학적 지식에 수용이 포함되어야 하는가?
첫째, 수용도 (믿음처럼) 안전한 수용과 그렇지 않은 수용을 구분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쉽게 폐기되기 어려움이라는 속성에 있다. 좋은 수용은 쉽게 폐기되지 않으며, 과학적 지식에 포함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둘째, 수용도 과학적 설명 평가(SEEing)의 결과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여러 설명에 대한 평가 결과가 확정적이지 않거나, 상호보완적이거나, 트레이드오프(trade-off)가 성립할 때, 우리는 때로 수용이란 태도를 취하곤 한다.<ref>이러면 도구적으로 수용된 모든 이론들이 다 설명적일 수 있게 될텐데... 정말로 이런 길을 가려는 것일까?</ref>
이를 옹호하기 위해 칼리파는 세 가지 근거를 더 든다. (1) 수용과 믿음이 유사한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이, 둘의 비슷한 심적 상태 및 과학적 지식에서 비슷한 역할 담당하는 근거 제공, (2) 수용 포용하지 않는 "과학적 지식" 개념은 과학적 실천 설명 어려움, (3) 수용은 과학적 탐구의 가장 흔한 (초기/중간) 결과. 칼리파는 어쩌면 "과학적 지식"이 "지식"의 한 종류라기보다, "과학적 지식"과 "상식적 지식"이 가족유사성만을 가진 서로 다른 종류일 가능성도 언급한다.
결국 이상화에 근거한 비-사실주의에 대응하는 가장 건강한 전략은 과학적 지식에 수용을 포함시키도록 우리의 과학적 지식 개념을 확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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