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ntering the "Big Picture"
- Andrew Cunningham and Perry Williams, "De-centering the "Big Picture":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and the Modern Origins of Science," BJHS 26 (1993), 407-432.
- Andrew Cunningham, "Getting the Game Right: Some Plain Words on the Identity and Invention of Science," SHPS 19 (1988), 365-389.
요약 (2007. 9. 21)
최근 과학사의 상세한 연구들과 현대 과학관에 대한 각종 비판들로 인해, 과학이 시간을 초월한 논리에 뿌리를 둔, 자유․합리성․진보와 같은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를 체현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기획이라는 옛 ‘큰 그림’은 이제 거부되었으며, 이제 과학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이며, 특정한 사회적 그룹의 가치, 목적, 규범을 체현하고 있으며, 세계를 인식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입장을 확장하여 “과학”이라는 말 또한 모든 시간, 모든 공간으로 확장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커닝햄(Andrew Cunningham)과 윌리엄스(Perry Williams)의 1993년 논문 “De-centering the ‘Big Picture’: The Origin of Modern Science and the Modern Origins of Science”를 들 수 있다.
새로운 역사서술 원리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자신들의 역사서술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과학의 기본적인 가치, 규범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당연한 것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즉 한 사회의 지식은 그 사회의 통합적 산물로서, 그 안에 그 사회의 가치, 사회관계를 체현하고 있다. 둘째, 역사적 행위자들의 범주를 존중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과거 행위자 본인들이 자신들의 기획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아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특히 과거의 행위자들이 어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특정한 텍스트를 썼는지 알아내야 하며, 그 ‘탐구의 기획’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으로 쓰여진 텍스트 역시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다.
자연철학 (not 과학) : about God
이러한 원칙에 따라 커닝햄과 윌리엄스는 과학이라는 용어를 오늘날과 같이 자연을 탐구하는 기획에 전용한 것은 19세기 초까지는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전까지 “과학”은 자연탐구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대신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연탐구에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자연철학”을 오늘날의 “과학”과 동의어로도 볼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들이 생각한 자연철학에 따르면 자연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 즉 신의 권능과 목적이 체현된 것으로서, 자연철학은 그러한 신의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시작 : 19세기에서야
중요한 변화의 시기는 바로 19세기 초로, 이 시기에 학문 분류 체계에 주요한 변화가 있었고 자연탐구 분과의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생물학, 지리학과 같은 새로운 분과가 탄생했고, 물리학, 생리학은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획득했다. 직업으로서 자연을 탐구하는 것 역시 이 시기에 시작되었고 이는 ‘전문직업화’로 표현되었다. 실험실 또한 이 시기에 대학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자연탐구가 독실한 행위에서 세속적인 행위로 바뀐 것 역시 이 시기에 들어서였다. 이 시기에 들어서야 뉴턴의 우주에서 신이 제거되었고, 과학은 자연세계를 세속적인 대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분과들의 집합적 범주가 되었다.
나아가 저자들은 이 시기가 혁명의 시대, 곧 정치적 혁명으로서 프랑스 혁명, 경제적 혁명으로서 산업혁명, 지적인 혁명으로서 포스트-칸트적 지적 혁명의 시대였다는 점을 들어, 이 혁명들과 과학의 탄생이 그 궤를 같이 하는 변화였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서, 우선 이 모든 변화의 핵심에 전문직 중간계급들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둘째, 이들이 오늘날 과학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가치와 규범(천재성, 자유, 객관성, 공평무사함 등)을 위의 혁명들에게서 빌려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와 독일 낭만주의에 근거하여 19세기 과학의 기원을 각각 17세기와 고대 그리스로 상정하는 전통을 재창조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세계에 대한 신을 배제한 자유로운 탐구전통을 확립하였고, 갈릴레오, 베이컨, 뉴턴은 이러한 그리스식의 사유방식을 되살려 그것을 넘어선 것으로 그려졌다. 요컨대 이 시기는 과학의 시작이기도 하고 과학사의 시작이기도 하며, 과학사의 특정한 전통, 즉 휘그주의와 현재 중심주의 전통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새로운 big picture 및 평가
커닝햄과 윌리엄스가 제시한 그림의 귀결로서 과학사는 짧고 국소적인 대상이 되었다. 정직하게 말해, 과학사는 기껏해야 250여 년 이하의 기간 동안 서유럽과 미국 정도에 국한된 역사를 다루는 것이 되며, 그 외의 시기와 지역의 앎의 방식은 더 이상 “과학”이란 이름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안은 어떠한 장점을 가지는가?
첫째, 우리가 한 때 보편적이라고 당연시했던 우리의 과학적 앎의 방식이 실제로는 서구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적 세계에 국한된 특유의 것임을 오늘날 과학이 매우 협소한 지역에서 최근에 우연히 발명된 활동이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오늘날 과학의 잣대로 다른 앎의 방식을 평가하지 않도록 하게 한다. 특히 그동안 오늘날 과학의 선조로서 주목받아 왔던 그리스 시대와 16, 17세기 과학혁명기 유럽의 탐구 활동에 대해서 그 당시 사회의 맥락에 따른 실상을 보다 정확하게 그릴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둘째,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다양한 시기, 다양한 지역의 앎의 방식들에 대해서 주목하도록 이끈다. 그들의 앎의 방식들은 단지 과학사의 곁가지로서가 아니라 “앎의 방식의 역사”에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다양한 “앎의 방식”들은 역으로 오늘날 과학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며, 만약 우리가 현재 과학의 대한 다양한 대안적 자원으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과학을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산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과학사에서 그동안 상세히 탐구되지 않았던 ‘혁명의 시대’의 맥락을 탐구하도록 이끌 것이다. 특히 과학의 가치와 규범이 당시의 혁명과 어떠한 연관을 맺으며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몇 가지 단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커닝햄과 윌리엄스의 이 글이 1993년에 발표된 것임을 감안하더라도, ‘맥락 강조’는 새로운 제안이라기보다는 이미 진행중인 과학사학계의 흐름을 재정식화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의 범위를 19세기 이후에만 한정하자는 이들의 제안도 실제 과학사 연구에서는 큰 변화를 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제안은 과학사학계에서 19세기 이전을 다루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 대해 그에 대한 온전한 ‘앎의 방식’을 연구하자는 제안일텐데, 이는 결국 과학사 연구에서 ‘맥락’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둘째, 저자들은 오늘날 과학이 다른 앎의 방식을 평가하는 잣대로 쓸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오늘날 과학이 매우 최근 협소한 지역에서 우연히 발명된 활동이라는 것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우연적으로 발명된 19세기 서양 과학이 보편성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추가될 필요가 있다.
셋째, 19세기 이전은 “자연철학”, 그 이후는 “과학”이라는 구도 또한 단순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저자들은 ‘당사자들의 범주와 탐구의 기획’을 존중한다는 원칙에 따라 그렇게 구분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이는 역사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좀더 세심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i) 당사자들의 범주와 실제 탐구의 기획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자연철학”은 17세기 이래 당시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정식화되어 왔고, “자연철학”에 ‘세속적 활동’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여러 논자들에 의해 시도되었으며, 자연철학에서 신의 위상 또한 계속 변해왔다. 즉 당사자들의 범주와 탐구의 기획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저자들의 공식보다 훨씬 복잡한 그림을 가지게 될 수 있다. (ii) 당사자들의 범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안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역사를 기술할 수 있을까?
요약 (옛 버전)
"인간의 활동인, 전적으로 인간의 활동인, 단지 인간의 활동일 뿐인" 과학
과학사가들은 과학사를 쓰고 있는가?: 특정 시기 역사적 산물로서의 'science'라는 범주
과학사가들은 과학사를 쓰고 있는가? 이에 대한 저자들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과학'이란 범주는 역사적으로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우리들의 범주일 뿐이어서 과학사가들이 과학사라는 이름 하에 서술하고 있는 모든 시기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과학이란 용어는 역사적으로 근대의 특정한 시기, 소위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저자는 1760-1848년 사이로 잡는)'라고 명명한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과학(science)'이란 단어 자체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어 'episteme'의 라틴어 번역어인 'scientia'라는 단어가 영어의 'science'로 옮겨진 것은 1300년경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 대략 19세기 초까지 science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science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확실한 원리에 입각한 이론을 다루는 모든 분과 및 그러한 분과에서 생성된 지식에 대해 science라는 말을 사용했고, 거기에는 논리학, 수사학, 문법, 신학, 윤리학까지 포함돼 있었다. 신학은 'Queens of sciences'라고 불리기도 했다.
과거 행위자들의 자연 탐구: 그들의 범주
그러나 과거의 행위자들이 자연에 대한 탐구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 그들이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이름, 즉 자연사, 응용수학, 자연철학과 같은 이름을 붙여두고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자연철학이 당시의 실제 행위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 기존의 역사학자들은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진단이다. 기존의 역사학자들은 잠시 용어상의 차이를 지적한 후에는 너무나 쉽게 자연철학을 과학으로 바꿔 쓰거나 근대적 의미의 과학과 혼용하곤 했다. 최근에 와서야 이들 상이한 시기 사이에는 단순한 어휘 이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깨달음에 따르면, 과거의 행위자들이 비록 자연세계를 탐구했다 하더라도, 심지어 경험적이거나 실험적인 방법을 채용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근대적 의미의 과학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자연세계를 탐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대한 탐구로 과학을 정의하고 나면 과거의 행위자들 역시 과학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들은 바로 이러한 반론이 단순할 뿐만 아니라 그 배경에 놓여있는 더욱 심각한 역사철학적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초월적인 물신화된 '과학'에서 인간의 활동으로서의 과학으로
자연세계를 탐구한다고 해서 같은 행위가 아니라는 저자들의 지적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위해 저자들은 과학을 시공간을 초월한 무엇이 아니라 인간들이 행하는, 전적으로 인간들이 행하는, 단지 인간들이 행할 뿐인 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의 행위자들과 오늘날의 과학자들 모두 자연세계를 탐구한다는 공통의 과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란 과거의 자연 탐구자들(그들의 용어에 따르면 '자연철학자', '과학 지식인' 등으로 불린)이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그들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자연을 탐구했다는 그 사실, 곧 그들의 행위 자체를 지우고 과학이라는 인간의 활동을 인간의 활동이 아닌 하나의 사물인 양 묘사하려는 태도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비판자들은 일련의 구별되는 관념들, 지식 체계와 같은 것으로 과학을 상정하고는 그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거나 그러한 토픽을 중심으로 한 과학 분과(가령 천문학, 역학, 물리학, 생리학 등)의 역사를 추적하였으며, 과학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생각한 객관성이나 합리성(이것은 상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의 획득과정을 자신들의 역사적 테마로 삼아왔다. 이는 객관성과 합리성을 보장해준다고 믿어진 과학적 방법론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과 연결돼 있었고, 이러한 과정의 산물로서 과학 법칙이나 과학적 개념 역시 역사 서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와중에 과학사는 역사상의 인물을 그릴 때조차 상술한 주제들과 관련된 이들만을 거론할 뿐이었거니와 그들의 위치 역시 특정한 과학 법칙이나 개념, 혹은 과학적 방법론의 주창자이자 전달자, 매개자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과학사는 시공간을 초월한 거대한 담론이 객관성과 합리성을 담지하고 진리를 향해 전진해가는 인간 없는 역사처럼 그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과 사회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과학은 종교와 충돌하는가? 와 같은 잘못된 질문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고 충돌하는 것은 사람들이지 과학이란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존의 과학사는 과학을 물신화했다.
행위자들의 활동으로서의 과학: 게임 유비
과학이 인간의 행위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역사를 기술할 때 무엇보다도 과거의 행위자들이 자연세계를 탐구할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커닝햄은 과학을 게임에 유비한다. 특히 커닝햄은 과학과 게임 모두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진 행위자들의 행위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게임이라는 것이 아니라 과학은 게임과 같은 속성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게임은 어떤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가? 커닝햄은 이를 여섯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 게임은 인간이 발명했고, 오직 인간들만이 수행하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게임 행위자들이 특정하게 행동하도록 하는 구조와 정식이 존재한다.
- 모든 게임은 목적, 규칙, 과정, 관행을 포함하고 있다. 게임을 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실행한다.
- 주어진 게임은 특정한 순간에 행위자가 하거나 하지 않는 무엇이다. 특정한 게임을 하고 있다면 그는 그가 그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게임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 어떤 게임의 정체성은 게임을 수행하는 특정한 개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가 그것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와도 무관하다.
- 게임의 전문가들과 게임에 대한 역량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곧 게임에 빠삭한 이들이다.
- 어떤 게임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반드시 발명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과학은 바로 이와 같은 게임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느 것이 커닝헴의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과거 행위자들이 과학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논증해보겠다. 이를 위해 커닝햄은 다음과 같은 유비를 들고 있다.
- 과학 = 가족유사성을 가지는 일군의 게임들 (예. 카드 게임들)
- 특정한 과학분과 = 특정한 카드 게임 (예. 휘스트)
- 특정한 시공간에서 추구되는 특정한 과학 분과 = 휘스트의 특정한 변종 (예. 솔로)
이렇게 보면 17세기의 자연철학자들과 20세기의 과학자들은 자연세계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종류의 카드 게임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얼핏 보기에는 비슷한,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다른 규칙과 과정, 관행을 포함하고 있는 특정한 카드 게임의 변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게임을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자신이 수행하는 게임이 무엇인지 게임의 수행자는 알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두 집단이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결론을 지을 수 없다.
이상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잘못된 과학사를 서술하고 있었나? 또한 과학이 발명되었다는 주장의 함축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거의 행위자들은 자연세계를 탐구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곧 그들은 어떤 종류의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을까?
과학사가 아닌 과학사: 과학사가들은 왜 잘못된 과학사를 서술하고 있었나?
문제의 진단: 기존 Big Picture의 영향
예전의 과학사가들이 (당시 행위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잘못된 과학사를 서술했던 까닭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당시 행위자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이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기존의 과학사가들은 왜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까? 저자들은 기존의 역사가들을 지배했던 '큰 그림'과 그러한 큰 그림을 받치고 있던 과학관에서 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 있다. 우선 저자들은 오늘날 큰 그림에 대한 회의감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지만, 교육현장과 연구현장에서 실제로 큰 그림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렇다면 큰 그림의 문제를 분명히 정식화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것이 더 나은 대응책이라 보고 있다. 여기서 대결 상대는 2차대전을 전후로 코이레나 버터필드와 같은 이들에 의해 형성된 큰 그림이다.
옛 Bic picture: 인류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인류 보편적인 활동으로서의 과학. 과학사는 '앎의 방식'의 변화 과정 그리는 것
옛 큰 그림에 따르면 과학은 인류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과학사는 원칙적으로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과 청동기시대의 야금학에서부터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적 과정에서 특히나 17세기 과학혁명이 핵심적인 사건으로 승격되었는데, 버터필드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고대나 중세의 과학과는 다른 '근대' 과학의 기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세계에 대한 모든 앎의 방식은 하나의 단일한 과학사로 전유되고, 과학은 인간의 보편적인 활동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 따라 과학은 모든 인간사와 인간 문화에 걸쳐 앎의 방식을 정렬할 수 있는 중립적인 틀이라 여겨졌고, 과학사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묘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 큰 그림에 입각해 과학사를 서술했던 역사가들이 과거 행위자들의 관점을 무시한, 잘못된 역사를 서술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좀더 커다란 문제, 즉 옛 큰 그림 자체를 지탱하고 있었던 과학관 자체의 문제가 놓여 있다.
옛 큰 그림의 과학관
저자들은 코이레나 버터필드가 과학의 본성으로 포착한 대표적인 요소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이들이 내린 철학적 규정에 따르면, 과학은 특정한 탐구방식으로서, 일반적인 인과법칙의 형태(가능하다면 물리과학에서처럼 수학적인 형태의 법칙이나 혹은 이런 형태로 환원할 수 있는 형태의 법칙)로 표현된 지식을 생산한다. 둘째, 이들은 과학에 대해 도덕적 규정을 내리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과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와 합리성, 진리와 선과 같은 기본적 가치의 담지자이자, 사회적 물질적 진보의 동력이다. 그러므로 참된 과학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이해로부터 자유로운 공평무사한 진리 추구 활동이거니와, 오해와 편견, 사회적 충돌, 심지어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종결시켜 줄 합리적인 사유로 추앙되었다. 셋째, 이들은 과학을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기획으로 보았는데, 이에 따르면 과학은 타고난 인간 호기심의 표현이자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욕망의 산물이었다. 즉 과학은 모든 시공간에 걸쳐 나타나는, 인간 본성과 인간 사유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때로 과학을 '새로운 인문주의(사튼)', '과학적 인문주의(헉슬리)'로 규정하면서 과학을 문명 그 자체와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했다.
옛 큰 그림 하에서의 과학혁명
이러한 과학관에 입각해 기존의 과학사가들은 과학혁명에 대한 영향력 있는 그림을 제시하였다. 우선 이들은 철학적으로 17세기에 발생한 과학혁명의 산물을 20세기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정의된 과학지식 개념에 근접한 형태로 인식하였고, 그에 따라 일반적인 수학적 인과법칙의 이념에 가까운 지식들을 중요시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혁명, 갈릴레오의 역학 혁명, 뉴턴의 종합 등은 그러한 세계상의 기계화와 수학화의 표상으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한편 이들은 과학혁명에 미신과 기독교 도그마에 대항하는 사유의 독립성 또는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과학혁명은 부당한 연구전통과 권위보다 편견 없는 경험을 강조하였고, 고전 텍스트에 대한 주석에 대항하여 합리적인 연구와 실험을 정립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가톨릭 교회를, 하비는 갈레노스를 거부하고 자유주의적인 정신을 만개시켰던 영웅들로 그려졌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정치, 종교, 경제적 요소는 자유로운 사유상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그려지기도 했으며, 과학을 사회적 조화와 연결한 관점은 왕립학회의 형성을 그러한 과학적 협동의 사례로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 끝으로 이들은 과학을 인간의 보편적인 기획으로 보았던 탓에 과학혁명만이 과학사상의 유일한 혁명인 것처럼 그렸다. 자연에 대한 가치 있는 지식은 모두 과학의 형태를 띠어야 했으므로 어떠한 혁명적인 일이 발생했다 해도 그 지식들은 모두 보편적인 과학이라는 점에서 연결돼 있었고, 그러한 점에서 과거와 현재는 본질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게 된 것이다. 고대인들 역시 본질적으로 17세기 영웅들과 동일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운동과 같은 동일한 질문에 답하려 했으나 단지 17세기의 영웅들보다 나은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이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동일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한 문제들에 대해 고대인들이 생각해내지 못했던 해답과 접근법을 제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옛 큰 그림에 대한 도전
그러나 이러한 과학혁명관은 최근의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연구에 의해 점차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우선 철학적인 정식화에 대해 일군의 논자들이 생명과학에서는 수학화와 기계화를 주장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물리과학에서도 17세기의 기계론적 철학은 20세기의 이념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한편 맥락과 외적 요소를 강조하는 연구들은 종교, 정치, 경제적 요소가 과학혁명이라고 규정된 변화를 방해했다기보다는 대개 강화했음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행위자들의 범주, 가치, 기획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서투른 근대과학자였던 탓에 영혼이나 신적인 것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이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었던 것임이 밝혀졌고, 뉴턴이 신학, 신비주의, 연금술, 성서 연대기를 자연 연구에 이용했던 것 역시 신의 창조를 연구함으로써 기독교적 신을 더 심원하게 이해하겠다는 일관적인 시도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다.
옛 큰 그림의 과학관에 대한 도전
더욱이 옛 큰 그림에 깔린 과학관 자체도 문제시되었다. 철학적으로 1960년대 이후 파이어아벤트나 쿤과 같은 이들이 역사에 근거해 과학방법론의 다양성을 주장했다. 또한 과학적 지식이 일반적인 인과법칙 형태의 통합된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인식도 비판을 받았다. 한편 1960년대, 70년대에 걸쳐 급진주의자(권력과 통제의 형태로서의 과학, 가치 판단이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지식 주장 비판), 페미니스트(객관성, 자연에 대한 통제의 바람직함 의문시, 세계로부터의 감성적 분리라는 남성적 기획을 병리적인 것으로 봄), 환경주의 운동(오염, 산성비, 온실효과 등등의 용어 도입. 과학과 기술은 더 이상 선을 향한 추동력으로 간주되지 못함. 더 큰 물질적 문제늘 낳을 수 있다는 비판)에 의해 가장 고결한 지적 성실성의 발현이자 사회적, 물질적 진보의 동력으로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근대과학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동양종교, 페미니스트 인식론, 토착 아메리칸들의 전통 문화와 같이 대안적인 자연인식을 추구하는 흐름이 등장했다. 이에 따르면 과학을 추구하는 것은 더이상 본성과 문명에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다양한 앎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근대과학의 기원에서 과학의 근대적 기원으로
4가지 역사기술적 원리: 객관성의 획득 과정, 사회의 가치와 관계를 체현하고 있는 지식, 역사적 행위자들의 스스로의 범주, 역사적 행위자들 스스로의 '질문의 기획'
결국 과학은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산물이다. 즉 과학이라는 말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으로 확장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은 언제 발명된 것일까? 저자들에 따르면 과학은 '혁명의 시대'라 불리는 1760-1848년 사이의 시기에 서유럽에서만 고유하게 탄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저자들은 자신들이 근거하고 있는 4가지의 역사기술적 원리를 거론한다. 우선 과학의 기본적인 가치, 규범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당연한 것으로 다른 것을 설명하는 범주가 아니다. 이에 따르면, 과학의 객관성은 무엇으로 구성돼 있나와 같은 질문은 과학은 어떻게 그것에 부여된 객관성을 획득하게 되었나와 같은 질문으로 바뀌게 된다. 둘째, 지식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한 사회의 지식은 그 사회의 통합적 산물로서, 그 안에 그 사회의 가치, 사회관계를 체현하고 있다. 셋째, 역사적 행위자들의 범주를 존중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역사학자들은 과거 해우이자들 자신들이 자신들의 기획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아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탐구의 기획(projects of inquiry)을 당시 행위자의 맥락에서 구체화, 특성화해야 한다. 이는 콜링우드가 '질문과 대답'의 원리라 명명한 것인데, 과거의 행위자들이 어떤 질문에 대한 답으로 특정한 텍스트를 썼나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으로, 그 탐구의 기획을 알지 못하면 그에 대한 대답으로 적힌 텍스트 역시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과학'은 19세기 초의 산물
이러한 원칙을 따를 때, 과학이라는 용어를 오늘날과 같이 자연을 탐구하는 기획에 전용한 것은 19세기 초까지는 없었던 일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전에 과학은 자연탐구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과거의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자연탐구에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이들이 생각한 자연철학에 따르면 자연과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 그러므로 신의 권능과 목적을 체현한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신학이나 자연신학과 등치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학 혹은 자연신학과 자연철학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자들은 신학자들과 똑같은 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지만 그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즉 신학자들이 신의 책을 연구한다면, 그들은 신이 만든 자연세계를 연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원칙을 따를 때, 중요한 변화의 시기는 분류체계에 주요한 변화가 있었고, 자연탐구 분과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을 것인데, 이러힌 시기 역시 19세기 초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생물학, 지리학과 같은 새로운 분과가 탄생했고, 물리학, 생리학은 (오늘날과 같은)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획득했다. 개인의 커리어로서 자연탐구를 하는 것 역시 이 시기에 시작됐고, 전문화는 그 중요한 표현이었다. 더욱이 실험실이 자연탐구자들이 자연적 지식을 산출하는 일상적인 공간이자, 연구의 기본 단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시기였다. 독일을 선구로 하여 실험실이 점차 자연에 관한 진리의 최종적 조정자이자 판정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한편 자연탐구가 독실한 행위에서 세속적인 행위로 바뀐 것 역시 이 시기에 들어서였다. 천상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신이란 가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라플라스의 언급은 그러한 뜻을 담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들어서야 뉴턴의 우주에서 신이 제거되었고, 과학은 자연세계를 세속적인 대상으로 연구하는 새로운 세속적 분과의 집합적 이름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혁명의 시대와 과학의 탄생: 신화의 창조
나아가 저자들은 이 시기가 혁명의 시대, 곧 정치적 혁명으로서 프랑스 혁명, 경제적 혁명으로서 산업혁명, 지적인 혁명으로서 포스트-칸트적 지적 혁명의 시대였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혁명과 과학의 탄생이 그 궤를 같이 하는 변화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들은 새로이 등장하고 있던 전문직 중간계급들이었다. 이들은 위의 혁명들에서 자신들의 지적 정당성을 빌려왔다. 즉 세 가지의 동시대적 혁명은 과학의 정체성에 있어 불가결한 부분이 된 가치와 목적, 즉 천재, 자유로운 탐구, 사상의 자유로운 교환, 객관성, 공평무사함 등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자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근거하여 19세기 과학의 기원을 각각 17세기와 고대 그리스로 상정하는 전통을 재창조하였다. 18세기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만들어낸 이야기들은 이제 19세기 사람들의 맥락 속으로 전유되었다. 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세계에 대한 신을 배제한 자유로운 탐구전통을 확립하였고, 갈릴레오, 베이컨, 뉴턴은 이러한 그리스식의 사유방식을 되살려 그것을 넘어선 것으로 그려졌다. 오컨대 이 시기는 과학의 시작이기도 하고, 과학사의 시작이기도 하며, 과학사의 특정한 전통, 즉 휘그주의와 현재 중심주의 전통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버터필드가 처음으로 휘그적 해석이라고 부른 바 있는 정치사의 기원이기도 하였다. 실로 승리한 진보주의적 휘그의 전통이 정치사와 과학사 모두에서 발생한 셈이다.
탈중심화된 큰 그림
이러한 큰 그림의 결과, 과학사는 짧고 국소적인 문제가 되었다. 기껏해야 250여년 이하의 기간 동안 서유럽과 미국 정도에 국한된 역사를 다루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시기나 다른 지역의 유사한 앎의 방식에 대한 연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큰 그림에서 과학은 세계를 아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이므로 다른 종류의 지식 역시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그려져야 할 것이다. 이제 과학은 서구 문화에 토착적인 지식 형태로 드러나고 지금까지 차지했던 중심적이고 특별한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탈심중화로 우리를 이끈다. 저자들은 탈중심화의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 시간적 탈중심화: 과학을 우연적이고 최근에 발명된 활동이라고 보는 것으로, 우리가 한때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과학적 앎의 방식이 실제로는 서구 근대 자본주의적, 산업적 세계에 국한된 특유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 공간적 탈중심화: 우리의 선조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우리 문화 외부에 존재하는 자연세계에 대한 앎의 방식의 존재 자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세계지도를 펴고 지금까지 과학사 분과가 다뤄온 자료의 산지를 보라. 지리학적으로 극히 일부분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간적으로 혹은 지리학적으로 탈중심화된 큰 그림은 모든 종류의 지식형태를 완전하게 대칭적으로 취급해야 한다.
- 지식 자체의 탈중심화: 앞의 두 가지 모두 인지적 지식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이론적 지식이 실천적 지식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보는 관점에 기인하다. 새로운 큰 그림은 인지적 지식, 사실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실천적 지식, 기술에 대한 지식도 함께 다뤄야 한다. '무엇'에 대한 앎(know of)뿐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앎(know how)도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인지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은 우리 각각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두 측면일 뿐이다. 관계적 지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있고 가치에 대한 지식도 있다.
이처럼 사실, 기술, 인간의 관계, 윤리를 모두 완벽하게 대칭적으로 다루는 인간 지식에 대한 역사가 가능할까? 저자들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