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 Gods and Kings
- Steven Shapin, "Of Gods and Kings: Natural Philosophy and Politics in the Leibnitz-Clarke Disputes," Isis 72 (1981), 187-215.
미적분 발견에 대한 우선권 논쟁에서 시작된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은 자연철학,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그들 논쟁의 주요한 쟁점은 세 가지 ― 신이 자연세계의 질서에 개입하는 방법, 진공의 가능성, 공간과 물질의 속성 ― 로 볼 수 있고, 그중 신학적 공리에 대한 견해차 ― 뉴턴의 신은 자율적 의지(will)가 강조된 신인 반면 라이프니츠의 신은 완벽한 지혜(wisdom)가 강조된 신이다 ― 가 근본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분석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들 사이의 형이상학, 신학, 자연철학 논쟁의 중요성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사회정치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1680년에서 1720년 사이의 영국의 특수한 사회정치적 대립구도 하에서 특정 정치그룹들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 라이프니츠와 클라크의 논쟁이 존재했고,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그 논쟁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클라크 논쟁의 왕조적 맥락
라이프니츠주의 철학과 뉴턴주의 철학에서 의지 대 지혜
뉴턴주의의 국내 적들
휘그와 토리, 궁정과 지방: 질서 이데올로기
1680년대에서 1720년대까지 영국내 정치적 담화는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떤 권리로 제임스 2세, 윌리엄과 메리, 앤, 조지 1세가 왕위를 가졌는가? 어떤 범위로 그들은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그 권력은 "인민"과 의회의 권리와 자유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군주에 대한 인민의 의무는 무엇이며, 인민에 대한 군주의 의무는 무엇인가? 국가와 책임에 대한 추상적인 정치적 이론은 항상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 및 그 진행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시기 영국의 정치 사상은 권력 분배 문제와 왕권의 적법성과 권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 정치적 물음들은 정치뿐 아니라 신학과 자연철학을 자원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자연 세계"와 "정치 세계"는 종교적 의미의 그물망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신과 자연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정치적 질서의 관념과 중요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특히 군주의 의지의 범위에 대한 논쟁은 당대의 자연철학적 논쟁에 중요한 빛을 던져 주었다. 왕정복고기에서 하노버 왕가의 계승기까지 영국의 정치적 정서는 왕권의 역할과 범위에 대한 생각에 따라 몇몇 정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대표적인 대립쌍은 "토리"와 "휘그" 이데올로기이다. 전통적으로 토리는 왕권을 절대적으로 보았다. 왕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신의 권한으로 통치한다. 세습 계승은 신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토리의 입장에서 절대왕정에 대한 제한은 결국 혼돈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명예혁명 이후 많은 토리는 양심적 판단력의 위기를 겪는다. 윌리엄과 메리는 적법한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다른 대안은 그들에게 더 위험했다. 내전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토리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지주계급의 권리를 위협했다. 토리에게 하나의 해법은 윌리엄과 메리에 대해 제임스 2,3세가 가진 '적법한' 왕위 권한은 없지만 '사실상의' 통치자인 것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다른 대안적 해법은 실제로 벌어진 일을 정당화해주는 신의 섭리와 특별한 의지 관념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688년에서 1714년 사이 여전히 소수의 반대자들이 있긴 했지만 토리는 점점 사태를 인정하고 대부분은 절대왕정의 절대권력에서 왕과 의회의 권력으로의 이양을 인정했고, 자신들의 정치철학을 굽히고 대세를 따랐다. 혁명 이후의 안정과 위계질서가 딱 토리의 입맛에 맞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근거가 되는 상당한 토지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는 그 사회의 안정과 위계질서 하에서만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는 전통적인 휘그 이데올로기이다. 절대왕정은 원리적으로 거부된다. 왕의 의지는 법에 의해 적절히 제한된다. 계승은 세습 권한이 아닌 일종의 계약에 의존한다. 신과 특정 군주의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고 중개자를 필요로 한다. 가장 중요하게, 인민(과 그 의회의 대표자)는 군주의 적법한 한계를 넘어서려 하는 과도한 권력 행사에 저항할 수 있다. 휘그는 절대왕정으로의 복귀를 막아낸 명예혁명을 뒷받침하고 그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보호해야 했다. 이것이 기본적인 휘그의 입장이다. 휘그는 제한된 버전의 왕정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혁명 이후의 특정한 군주의 권리를 변호해야 했다. 휘그는 토리만큼이나 군주가 폭도로부터의 위협을 막아내는 보루로 서 있기를 기대했다. 휘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부자들이었고 위계질서와 그 서열에 따른 의무 복종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