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ileo, Courtier
- Mario Biagioli, Galileo, Courtier: The Practice of Science in the Culture of Absolutism (Chicago and 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3).
요약 (2007. 9. 21)
비애지올리의 Galileo, Courtier는 갈릴레오의 삶을 바로크 궁정 문화와 후원이라는 키워드로 분석하고 있다. 궁정과 후원은 갈릴레오의 운신을 제약하는 동시에, 갈릴레오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심 없는 과학자로서의 갈릴레오 대신 자원 동원에 능한 전략가로서의 갈릴레오를 만나게 된다.
서신 인류학
비애지올리는 우선 ‘서신 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후원의 의례를 재구성한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는 사회적 위계를 반영했고, 하층의 피후원자는 강력한 후원자를 직접 만날 수 없었고 항상 중개인을 거쳐야 했다. 중개인은 후원자의 이미지를 보호하면서도 그들의 욕구를 전달했고 기존의 사회구조를 보존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후원은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무질서한 관계가 아니라 권력순환의 필요성을 통해 후원자, 중개인, 피후원자를 묶어주는 구조와 논리를 갖춘 것이었다. 또한 후원은 선물교환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는데, 선물교환은 시장에서의 경제적 교환이 아니라 군주와 가신 사이의 지위와 정체성, 그리고 신뢰성을 산출하는 그 무엇이었다. 따라서 피후원자는 후원자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명예로운 선물을 주어야 했으며, 후원자는 사심 없이 피후원자의 명예와 신뢰성을 승인해주는 방식을 취해야 했다. 또한 특별한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단지 유용한 장치를 선물하기보다는 특별히 그 후원자만의 명예를 드높여주는 그런 선물을 해야 했다.
후원 동역학과 인식론적 정당화
갈릴레오는 당시의 이러한 후원의 동역학을 잘 꿰고 있었고, 따라서 누구에게, 어떤 선물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포장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흥미롭게도 그는 후원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발견과 과학적 주장의 인식론적 지위까지 높이는 전략을 취했다. 자철광 선물이 비록 실패로 그쳤지만 길버트의 ‘자기적 세계관’을 끼워 팔고자 했던 그 첫 번째 시도였다면, 목성의 위성 선물은 망원경이라는 새로운 도구와 그것을 통한 발견을 함께 정당화하려 했던 그 두 번째 시도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에 대해 광학적 설명이나 대안적 인식론을 제시하기보다는, 메디치의 이미지를 자신의 발견과 연결시키고 메디치의 외교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사회적 권력에 자신을 연결하는 한편, 망원경과 관측결과를 블랙박스로 만들어 비전문가인 군주들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발견과 도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는데, 메디치가가 그의 선물을 받아들인 것은 발견의 실용성이나 과학적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는 스스로 별들의 전령이 되어 그 별들을 메디치 신화의 담화 속에 포장하여 군주에게 사심 없이 선물했고, 코시모는 그 선물에 사심 없이 보상함으로써 양쪽의 지위는 동반 상승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철학자 겸 수학자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이렇게 얻은 철학자의 칭호는 다시 그가 실천에 옮겼던 코페르니쿠스 천문학과 자연에 대한 수학적 탐구 모두에 대한 인식론적 정당화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후원의 역설 : 자기 지우기의 효과
그러나 갈릴레오의 성공적인 후원 전략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메디치가는 이론의 저자에게 보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준 진기한 일을 높이 산 것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자로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발견이 지닌 천문학적 중요성이나 기구제작자로서의 능력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메디치의 별을 헌정하면서 그 별이 원래부터 천상계에 존재하면서 메디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어야 했다. 즉 철학자가 되기 위해 그는 ‘자기 지우기’의 화법을 구사했는데, 결국 발견에 대한 자신의 저자됨을 지워야 했던 것이다. 절대군주 시기의 후원체계 하에서, 그는 군주의 권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모’의 비밀을 지켜야 했고, 군주만이 진정한 저자(author)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은 군주의 대리인으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는 독립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대공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갈릴레오는 ‘철학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궁정인’이 되어야 했다. 궁정은 그 내부의 독자적인 논리로 움직이는 곳이었으며, 그렇기에 외부 대학이나 전문 학자 그룹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다. 즉 궁정은 (다른 곳에서는 정당화해 줄 수 없는) 갈릴레오의 새로운 사회-전문적 역할을 정당화해 줄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연구의 기술적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 공간이기도 했다. 궁정 철학자로서의 갈릴레오는 계속 새로운 발견을 통해서 군주 입맛에 맞는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과학적 논쟁에서 궁정의 대표선수로 싸워 군주의 명예를 보호하고 드높여야 했다. 궁정에서의 과학적 논쟁이란 결투와 유사했는데, 후원자는 논쟁을 관장하긴 했지만 내용에는 별 개입을 하지 않은 채 결투에 참가한 과학적 기사들의 ‘좋은 스포츠맨쉽’만을 관람할 뿐이었다. 즉 후원자의 관전 포인트는 주장의 진위가 아니라 위트, 우아함 등 논쟁의 미학적 요소나 형식에 있었다. 후원자들은 자신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대부분의 논쟁에서 중립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후원자의 입맛에 맞는 진기한 발견으로서 목성의 위성에 이어 태양의 흑점과 같은 천문학적 발견을 해냈는데, 그러한 발견과 그에 대한 논쟁 과정은 후원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갈릴레오의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대공의 철학자’라는 지위는 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의 파급력을 배가시켜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장의 진위에 무관심했던 궁정 문화는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자연에 대한 수학적 분석을 정당화하려는 갈릴레오에게 완전한 후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몰락
1621년 코시모 2세가 죽고, 1623년 갈릴레오의 친구가 교황 우르반 8세로 오르게 된다. 비애지올리는 이 시점이 갈릴레오에게 매우 중대한 시점이었다고 말하는데, 코시모가 강력한 후원자이긴 했지만, 교황은 더 강력한 후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는 이를 로마로 입성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메디치보다 더 변덕스럽고 위험한 곳이었다. 갈릴레오의 친구 치암폴리가 스페인 음모에 개입되고, 교황을 둘러싼 여러 상황이 안 좋아지자, 우르반 8세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총신’ 갈릴레오를 속죄양으로서 철저하게 몰락시키게 되었다.
평가
첫째, 비애지올리의 이 책은 갈릴레오의 과학적 이력에서 특이한 시기 또는 과학과는 무관한 신분 상승전략처럼 보였던 궁정인으로서의 경력이 오히려 그의 과학 활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17세기 초 ‘지식’과 ‘권력’이 각자의 필요에 의해 서로를 요청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갈릴레오는 자신의 도구와 발견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철학자가 되기 위해 궁정을 필요로 했고, 궁정은 왕조의 상징으로서 갈릴레오의 ‘목성의 위성’을 필요로 했다. 특히 여기서 과학혁명기 새로이 생산된 지식의 정당화란 ‘인식론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셋째, 무엇보다도 탁월한 부분은 당시 지식과 권력이 맺은 “특수한 관계”에 대한 섬세한 묘사이다. 궁정 문화와 후원의 의례를 정밀하게 되살려냄으로써, 궁정과 후원이라는 독특한 맥락 속에서 갈릴레오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이 어떠한 것이었으며, 어떠한 전략을 통해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비애지올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닌데, 서로의 윈윈(win-win)을 성취하게 만들었던 그 특정한 전략이 어떠한 형태의 과학 활동을 고취시켰으며, 또 어떠한 한계를 지녔는지까지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는 당시 맥락에 대한 철저한 천착 없이는 불가능했다.
넷째, 궁정의 독특한 문화나 내적 논리를 강조하다보니 다른 맥락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 측면이 있다. 예컨대 갈릴레오의 “지적 생산물”이 궁정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궁정 담화의 맥락에 적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천문학적 맥락에서도 정당한 지식이어야 했다. 비애지올리는 전자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룬 반면 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룬 듯 보인다. 즉 궁정이 갈릴레오의 성취를 평가하는 데 케플러와 같은 전문 천문학자의 인증이 궁정의 맥락에서 ‘충분조건이 되지 못했음’을 보이는 데 치중한 반면, 그것이 ‘필요조건이었음’을 보이는 데에는 배려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요약 (옛 버전)
과학혁명기 대표적인 후원 형태는 궁정의 후원이다. 비애지올리는 후원 동역학을 통해 갈릴레오의 과학적 이력을 분석하면서, 후원자와 피후원자 그리고 중개인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드러낸다. 그는 갈릴레오에게서 궁정의 역할은 필수적인 부분이었으며, 궁정의 후원은 수학자인 그에게 사회적 정당화를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과학의 인식적 정당화에서 기여했음을 주장한다. 저자는 수학자였던 갈릴레오가 메디치가와 교황청의 후원을 얻어 궁정철학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밑천들을 활용하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회전문적(socio-professional) 정체성을 구축했던 브라콜라주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더 나아가 갈릴레오의 재판과 유죄판결 역시 후원 동역학의 틀로 재해석한다.
후원동역학
비애지올리는 '서신 인류학' 분석을 통해 후원의 의례를 재구성한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는 사회적 위계를 반영했고, 하층의 피후원자는 강력한 후원자를 직접 만날 수 없었고 항상 중개인을 거쳐야 했다. 중개인은 후원자의 이미지를 보호하면서도 그들의 욕구를 전달했고 기존의 사회구조를 보존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후원은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무질서한 관계가 아니라 권력순환의 필요성을 통해 후원자, 중개인, 피후원자를 묶어주는 구조와 논리를 갖춘 것이었다.
후원은 선물교환의 논리를 갖추고 있었고, 선물은 결투와 유사하게 탐침처럼 작용했다. 선물교환은 경제적 교환이 아니라 지위와 정체성, 그리고 신뢰성을 산출하는 그 무엇이었다. 특히 절대군주를 지향했던 근대 초의 상황에서 이런 논리는 중요하다. 절대군주는 마치 신을 닮아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책을 헌정하면서 목성 위성의 발견자로서 자신을 지워버리고 대리인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절대군주를 유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체하면서 엄청난 것을 선물하는 것이었는데, 비애지올리는 이를 '자기 지우기'의 화법이라 부른다.
"메디치의 별들": 갈릴레오의 성공과 그 이면
갈릴레오는 망원경 관측으로 인한 천문학적 발견을 메디치 가문의 상징으로 만들어 헌정함으로써, 후원자의 힘을 통해 자신의 발견과 망원경 및 연구분야와 방법까지 정당화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에 대해 광학적 설명이나 대안적 인식론을 제시하기보다는, 메디치의 이미지를 자신의 발견과 연결시키고 메디치의 외교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사회적 권력에 자신을 연결하는 한편, 망원경과 관측결과를 블랙박스로 만들어 비전문가인 군주들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발견과 도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메디치가가 그의 선물을 받아들인 것은 발견의 실용성이나 과학적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드높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는 스스로 별들의 전령이 되어 그것을 군주에게 사심없이 선물했고, 코시모는 그 선물에 사심없이 보상함으로써 양쪽의 지위는 동반상승할 수 있었다. 즉 이를 통해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철학자 겸 수학자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구분야와 연구방법까지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성공적인 후원 전략은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메디치가는 이론의 저자에게 보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준 진기한 일을 높이 산 것이었다. 그러므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주의 천문학자로서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발견이 지닌 천문학적 중요성이나 기구제작자로서의 능력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메디치의 별을 헌정하면서 그 별이 원래부터 천상계에 존재하면서 메디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어야 했다. 즉 철학자가 되기 위해 그는 '자기 지우기'의 화법을 구사했는데, 결국 발견에 대한 자신의 저자됨을 지워야 했던 것이다. 절대군주 시기의 후원체계 하에서, 그는 군주의 권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모'의 비밀을 지켜야 했고, 군주만이 진정한 저자(author)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은 군주의 대리인으로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독립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대공의 철학자가 되었다.
후원 동역학 하에서의 과학적 논쟁: 과학적 기사(knight)로서의 과학자
과학적 발견은 후원자에 대한 선물로서 적절해야 했고, 그래서 볼거리를 제공하거나 논쟁적인 것이어야 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신뢰성이 구분되지 않던 당시에 과학적 논쟁은 결투와 유사했다. 과학자들은 후원자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그들의 대표로서 싸웠다. 과학적 신뢰성보다는 명예가 중요시되었고, 과학자들은 격에 맞지 않는 상대와는 논쟁하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웠다. (티코-케플러, 갈릴레오-카스텔리) 후원자는 논쟁을 만들고 관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들의 권력은 그 논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논쟁의 내용에는 개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는데, 이들의 논쟁에서 그 종결 기제는 사실상 없었다고 볼 수 있다. 후원자의 관심은 내용이 아니라 '좋은 스포츠맨쉽'에 있었고, 주장의 진리가 아니라 논쟁 스타일, 위트, 우아함 등 미학적 요소나 논쟁의 형식에 있었다. 후원자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명예를 순식간에 상실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거리두기의 장치로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태도 변화와 후원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갈릴레오의 태도 변화도 후원 동역학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초기에 느슨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믿음이 점차 강화된 것은 '후원이 추동한 발견들'에 의한 것이었다. 궁정철학자라는 새로운 사회전문적 지위에 의해서 갈릴레오는 더 많은 발견들을 하도록 압력을 받았고 자신의 발견이 지닌 의미를 방어해야 했다. 그는 실제로 목성의 위성, 태양의 흑점과 같은 발견들을 이루어냈으며, 그러한 천문학적 발견과 논쟁 과정은 후원자가 좋아할만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마침 발견들 중 일부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뒷받침하기에 적절했던 것이었다. 그는 새롭게 획득한 명예를 지키는 과정에서 원숙한 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된 것이다.
갈릴레오의 구체적 논쟁 사례
갈릴레오는 1611년 파파쪼니와 부력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이 갈릴레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상대편이 실험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호소하려 했던 것에 반해 갈릴레오는 자신을 '수학적 철학자'로 칭함으로써, 논쟁 상대가 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논쟁을 회피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자신을 높이고 상대를 낮춤으로써, 자신과 후원자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다. 이는 당시 과학논쟁이 사회적 지위와 명예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620년대 예수회 수학자인 그라씨와 벌인 혜성 논쟁도 살펴보자. 1618년 예수회 학자들이 혜성의 출현을 관측하면서 이를 근거로 지구중심설을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아파서 그것을 관측할 수 없었다. 그는 최고의 관측전문가라는 지위를 잃을까 우려해 강한 어조로 예수회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그의 근거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가설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진정한 자연철학자라고 주장하면서 그라씨에 대해서는 과거의 권위에 의존하는 현학가라며 공격했다.
갈릴레오의 몰락과 후원
비애지올리는 갈릴레오 재판도 후원의 틀로 재해석하는데, 이 때 쓰이는 것은 '총신의 몰락'이라는 구도이다. 이전의 연구들이 신학, 우주론, 방법론 등 개념적 문제나 갈릴레오의 개인적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왔음을 지적하면서, 누가 어떤 이유에서 갈릴레오를 몰락시켰는지, 재판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를 모른다 하더라도 후원 동역학을 통해 어떻게 갈릴레오가 몰락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갈릴레오가 우르반 8세의 총신은 아니었지만 돈독한 관계였기 때문에 군주-총신 관계와 유사하게 볼 수 있다. 당시 궁정에서 총신의 몰락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통상적이고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일이었는데, 다른 피후원자에게는 신분 상승의 기회를, 후원자에게는 권력 강화와 피후원자 조정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갈릴레오의 몰락은 다음의 두 측면에서 총신의 몰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i) 피후원자를 제거하는 명분으로 '배신'이란 개념이 동원되었다. 교황과 갈릴레오의 중개인인 치암폴리는 원래 교황의 측근이었으나 자신의 측근이 추기경 승진에서 탈락하자 교황 반대 세력인 스페인 국왕 진영에 가담했다. 교황은 그를 징계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교황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교황은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갈릴레오를 속죄양으로 삼았다. 교황은 갈릴레오를 치암폴리와 연결시켜 배신자로 낙인찍고 징계했는데, 이런 배신자라는 죄목은 갈릴레오에 의해 조롱당한 것에 분노했던 교황의 개인적 감정을 은폐해 중립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ii) 군주의 절대적인 힘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피후원자는 철저히 몰락해야 했다. 정도가 지나쳐 보이는 갈릴레오에 대한 탄압은 이러한 구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평가
- 후원 동역학은 만병 통치약인가?
- 갈릴레오에게 사용되었던 수학자의 지위상승이라는 틀을 당시 서유럽 전체로 일반화할 수 있을까?
- 갈릴레오가 말년에 역학에 힘을 쏟았던 것은 어떻게 설명? (이제 후원은 포기하고 애초에 관심 가지고 있었던 것을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