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gic of Discovery: An Analysis of Three Approaches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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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서론

과학 이론의 발견과 관련하여 과학철학자들이 적법하게 관심가질 만한 것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논란거리이다. 예컨대, 포퍼(Popper 1959), 헴펠(Hempel 1966), 브레이스웨이트(Braithwaithe 1955)는 발견의 논리와 같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단정적으로 거부했다. 반면, [발견의 논리라는] 그 개념은 퍼스(C.S. Peirce),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핸슨(Hanson 1961), 애친스타인(Achinstein 1970), 사이먼(Simon 1973), 섀프너(Shaffner 1974) 등에 의해 열렬히 옹호되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발견의 논리의 가능성에 대한 찬반 논변들을 검토하고, 논쟁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음의 세 가지 주요 입장을 분석할 것이다.

(I) 가설연역론의 관점 (포퍼, 헴펠)
(II) 귀납확률론의 관점 (라이헨바흐 Reichenbach, 새먼 Salmon)
(III) 귀추론의 관점 (퍼스, 핸슨)

세 입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준비단계로서 [발견의 논리라는 말로 거칠게 표현되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예비적인 구분들을 도입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이런 구분들에 주의하지 않은 것이 발견의 논리가 가능한지 아닌지의 논의에 불필요한 혼동을 일으켜왔다.

첫째, 일상적 담화에서 ‘발견’은 ‘보기’나 ‘인지하기’와 마찬가지로 ‘성공’ 단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사람 P가 (물리적 대상인) X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강한 함축을 갖는다. (1) 발견된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2) P는 발견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X를 옳게 기술했다. 첫 번째 조건이 물리적 대상의 발견에 대한 어떤 적법한 주장에 대해서도 본질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은 일상적 맥락과 특히 과학적 우선권 논쟁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엇이 한 물리적 대상에 대한 ‘옳은’ 기술을 구성하는가?) 이 논문은 사물의 발견이 아니라 이론의 발견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두 번째 조건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일상적 맥락에서 P가 Y임(여기서 Y는 명제)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Y가 참이라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만 지적하겠다. Y가 거짓이라면, P가 Y임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일상 언어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과학적 이론의 발견에 이러한 조건을 부과한다면, 한 이론 T는 그것이 참일 경우에만 발견된다는 용납할 수 없는 귀결이 따라나온다. 이렇게 일상 언어에 기초한 고려사항의 부당한 침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이론 생성 기간(period of theory genera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T의 발견에 대한 중립적인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설명방식에 따르면, T가 발견되거나 ‘생성된’ 이후에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열린 문제로 남는다.

누군가 과학 이론의 발견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대개 특정한 한 순간이 아니라 내가 이론 생성 기간이라고 부르는 장기간에 걸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뒤앙(Pierre Duhem)은 이론의 발견에 대한 ‘순간 창조’ 관점을 풍자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평범한 문외한은, 어린이들이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물리 이론의 탄생을 생각한다. 그는 팔라스 아테나가 제우스의 이마에서 완전 무장 상태로 나타난 것처럼, 과학이라는 이름의 요정이 천재의 이마에 마술 지팡이를 대었고, 그 순간 이론이 생생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믿는다(1955, p.211).


[그러나] 이론도 최종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달걀 못지않은 부화의 기간이 필요하다.

이 논문에서는 한 과학자(혹은 연구 집단)가 한 문제에 대해 최초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때를 시작점으로 하고, 그 이론(핸슨이 ‘완료된 연구 보고서’라고 부른 것)이 최초로 과학 잡지에 출판되기에 적합한 형태로 쓰인 시점을 마지막이 되도록, 이론 생성 기간을 정의할 것이다. 나는 그 시점까지 이론이 실험적으로 시험되지 않았다고 가정할 것이고, 또한 이론 생성 기간의 끝은, 말자하면, 충분히 명료한 형태로 작성된 이론이 처음 공개된 것으로 나타난다고 가정하겠다. 예를 들면, DNA의 이중 나선 모형 발견의 경우, 이론 생성 기간은 1951년 왓슨(Watson)과 크릭(Crick)이 그 문제에 대해 처음 협동연구를 시작했을 때 시작되어, 1953년 『네이처(Nature)』에 자신들의 유명한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 끝난다.

이론 생성 기간 동안 그 이론이 아직 시험되지 않았다는 단서조항은 처음 봤을 때만큼 느껴지는 것만큼 그렇게 인위적이지는 않다. 어떤 의미의 시험인지가 중요하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시험이란, 한 이론으로부터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결과를 도출해내고, 통제된 실험 하에서 이러한 새로운 예측이 얻어지는지 여부를 조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론들은, 참인 것으로 인정되는 임의의 결과들과 모순되지 않도록, 그리고 문제의 탐구 영역과 유관한 것으로 간주되는 결과들이 도출되도록, 그렇게 생성된다. 혹자는 이론들이 통상 제약(constraint)들의 집합을 충족시키도록 치밀하게 구성된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제약들은 사전에 알려진 결과(자료, 사실, 법칙, 잘 확립된 이론)들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만족한다고 해서 우리가 채택한 의미에서의 시험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발견의 논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론 생성 기간의 서로 다른 두 국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 국면들을 다음과 같이 부르겠다.

(A) 사전 평가의 논리(a logic of prior assessment)
(B) 이론 생성의 논리(a logic of theory generation)


(A) 사전 평가의 논리는, 가설들이 이미 생성되었지만 아직 시험받지 않았을 때, 그 가설들에 대한 방법론적 평가와 관련된다. 이런 종류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가설의 제안이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여 우리를 침수시킨다”는 퍼스가 지적한 사실에 의해 제기된다(Peirce 1931-1958, 5.602). 일련의 한정된 경험적 자료들이 주어지면, 그 자료들을 연역해낼 수 있는 잠재적으로 무수히 많은 대안적 가설들이 늘 존재한다. 우리의 지적․재정적 밑천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을 무시해야 하는지 결정할 방법이 필요하다. 실험기구를 만드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고, 실험가들이 실험을 수행하는 데도 그렇다.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과학 인력도 제한되어 있다.

이제, 나는 두 종류의 사전 평가를 선명하게 구분하려 한다.

(A1) 개연성의 논리(logic of probability)
(A2) 추구의 논리(logic of pursuit)


개연성의 논리는 다음 유형의 판단들과 관련된다. 가설 H는 개연성이 있거나 참일 것 같다(probable or likely to be true). H1은 H2보다 참일 개연성이 크거나 더 참일 것 같다. 반면, 추구의 논리는 훨씬 더 현실적인 물음들과 관계된다. 우리는 어떤 가설들을 가지고 연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설들을 시험해볼 정도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가? 추구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판단들에서 나타난다. H1은 H2보다 더 추구할 만하다. 개연성에 대한 것이든지 아니면 추구할만한 가치에 대한 것이든지, 두 종류의 평가는 모두 판단되거나 비교되는 가설들이 이미 명료화되었거나 생성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개연성의 논리가 추구의 논리와 다르다는 것은, 가설의 개연성에 대한 객관적 척도가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개연성이 적은 가설을 먼저 시험하거나, 지금 이용할 수 있는 증거에 비추어보면 있을 법하지 않은 가설을 추구하기 위한 좋은 이유를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나는 추구의 논리가 개연성의 논리보다 과학적 탐구에 보다 직접적인 실천적 유관성을 갖는다고 주장할 것이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식화할 수 있는 사전 평가의 논리라는 의미에서 추구의 논리만이 유일하게 실행가능한 발견의 논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는 통상적인 주장을 뒤엎는다. 보통 한 이론을 추구하려는 결정은 개연성이나 참일 법함에 대한 판단에 기초해야한다고 이야기된다. 즉, 추구의 논리는 개연성의 논리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이 만들어진 가설들 중에서 어떤 것이 참일 것 같은지 혹은 개연적인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는 반면, 개연성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떤 가설을 추구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가설이 시험되기 전에도 그것이 개연적인지 혹은 참일 것 같은지 알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데, 주된 반론은 진리 개념에 대한 고찰에서 유래한다. 타르스키(Tarski) 식의 진리 정의로부터, 만일 가설 H가 참이면 다음의 조건들이 만족될 것이라는 것이 따라나온다.

(1) H는 내적인 모순이 없다.
(2) H의 귀결들 중 어떤 것도 거짓이 아니다.
(3) H는 다른 참인 진술들과 일관적이다.


조건 (1), (2), (3)은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연합하여(jointly) H의 진리를 보장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 조건들이 만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더라도, 그것들은 기껏해야 H가 참일 지도 모른다는 것만 확립한다. 그러나 만일 이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는 것이 진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면, 적어도 H가 개연적이거나 참일 것 같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위의 조건들을 만족하고, (앞서 도입된 용어로 표현하자면) 경험적 제약들의 집합을 따르는 가설 H1을 고려해보자. 논의를 단순하게 하기 위해, H1이 경험적으로 적합하다고 하자. 이제, H1이 주어지면, H1과 양립불가능하지만 같은 정도의 경험적 적합성을 갖도록 원래의 가설을 정말 사소하게 수정함으로써, 또 다른 가설 H2를 고안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다. 예를 들어, H1이 역제곱 법칙 가설이라고 하고, H2는 1/r의 지수가 2와 소수점 열째 자리에서 다른 가설이라고 하자. 물론, H1은 일반적으로 H2보다 단순할 것이고, 보다 유관한 유비(analogy)들을 포함할 것이며, H2보다 현상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하리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H1이 H2보다 개연성이 높다거나 더 참일 것 같다는 주장은 어떤 토대 위에서 정당화되는가? 단순성이나 설명력(explanatoriness) 같은 기준은 진리와 어떤 명백한 연관도 없다. 사실, 과거에 이런 조건들을 가장 잘 만족시켰던 많은 이론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어 왔다.

개연성 판단의 옹호자들에게는 P(H2/e)보다 P(H1/e)에 더 높은 값을 부여하는 적절한 귀납 논리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과학 이론에 적용될 수 있는 그러한 논리를 정식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 한 적이 없었다. 가설의 개연성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제공하려는 라이헨바흐의 빈도 접근과 카르납의 프로그램이 실패했다고 해서 그 개념이 부당하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X에 대한 적절한 분석을 갖는다’는 것은 ‘X의 개념을 갖는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이러한 실패는 개연성이나 참일 법함을 사전 평가의 논리에서 사용하는 것에 [분명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B) 이론 생성의 논리가 무엇인지는 훨씬 덜 분명하다. 내가 고려할 세 가지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B1) 사소하지 않은(non-trivial) 가설들을 만들어낼, 아마도 알고리듬적인, 절차의 상술
(B2) 개별 과학자가 그 가설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거쳐온 단계들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
(B3) 과학자들이 가설들을 추리할 때 사용하는 추론들의 분류와 분석, 그리고 왜 이런 추론들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내 주장은, 이론 생성의 논리 중에서 (B3)가 “합리적 재구성”으로서 옳게 이해된다면, [자료와 제약으로부터] 이론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ory)에 대한 정당화는 사전 평가의 논리 안에 있는 평가 범주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전 평가의 원리 중에서 유일하게 실행가능한(viable) 개념은 추구의 논리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추구의 논리는 발견의 논리에 대한 진짜 열쇠(real key)가 된다.

가설연역론의 관점

발견의 논리의 가능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포퍼, 헴펠, 브레이스웨이트와 같은 과학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포퍼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과학자들의 작업은 이론을 제안하고 시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초기 단계, 즉 이론을 착상하거나 고안하는 행위는, 내가 볼 때, 논리적 분석이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susceptible) 않다. 한 사람에게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음악적 테마이든지 극적 갈등이든지 아니면 과학 이론이든지 간에, 경험적 심리학에서는 큰 관심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 지식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는 무관하다. 그 문제에 대한 내 견해로는 ...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는 논리적 방법이나 그 과정에 대한 논리적 재구성 같은 것은 없다. 내 견해는 모든 발견은 ‘비이성적인 요소’ 혹은 베르그송(Bergson)적 의미에서 ‘창조적 직관’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1959, pp. 31-32).

발견의 논리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견해는 보통 과학적 방법에 대한 가설연역적 관점의 따름정리로 표현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론에서 예측으로의 연역적 추론과, 아마도 (적어도 포퍼주의자가 아닌 이들에게) 성공적인 예측에서 다시 이론으로의 귀납적 추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추론들은 이론이 시험될 때에만 일어난다. 여기에는, 애당초 이론으로의 추론이란 것은 없다.

이론과 가설은 단지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운 좋은 추측(happy guess)을 바라지만, 어쨌든 그것은 추측일 따름이다. 아인슈타인(1933)이 지적한 것처럼, “한 이론은 경험에 의해 시험될 수 있지만, 경험으로부터 이론을 세우는 방식은 없고”, 이론들은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다. 가설연역적 관점에 따르면, 이론이 꿈이나 환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든 아니면 완강한 자료들과의 길고도 끈질긴 투쟁을 통해서든 간에, 그것이 처음으로 제안되는 방식은 순전히 심리학적 문제에 속한다. 그래서 그것은 이론 생성 초기의 그럴듯함(initial plausibility)과 무관하고, 과학 지식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도 관계가 없으며, 이 때문에 과학철학자들의 관심사와도 유관성이 없다. 그러므로 발견의 논리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로 인도하는 초대장과 같다.

우리가 앞서 도입한 발견의 논리에 대한 두 가지 개념적 구분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가설연역적 관점이 겨냥하는 것은 사전 평가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이론 생성의 논리가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반대임을 알 수 있다. 후자를 반대하면서도 전자의 개념을 옹호하는 것은 일관적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포퍼나 헴펠과 같은 이들도, 한 가설을 일부러 시험할 정도로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하다는 것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증되기 이전에, 그 가설이 만족시켜야하는 일반적 요건들을 논의한다. 예를 들어, 가설 H를 사전 평가할 때 포퍼가 고려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1) H의 내적 일관성 : H는 자기모순적인가?
(2) H의 경험적 성격 : H는 항진적이지 않은가?
(3) 과학 지식의 성장을 위한 H의 함의 : H가 “다양한 시험들에서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과학적 진보를 이룰 것인가?” (Popper 1959, p. 33).


물론 포퍼에게 요인 (3)에 관련된 고려사항은 추구의 규범(pursuit norm)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의 관점에서 우리는 시험된 이후에도 그 이론들을 결코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요인 (3)에서 “살아남음”에 대한 제약은 너무 강해 보인다. 가설 H를 반박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가 H를 추구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이렇게 요인 (3)을 완화하면 포퍼의 반증주의적 입장과 더욱 양립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면, 이론 생성의 논리를 거부하는 것은 반직관적 결론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이 가설들을 제안할 때 그들은 단지 추측만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신화적인 침팬지 종족이 충분히 오랫동안 타자기 더미 위에서 열심히 애쓴 결과, 마침내 셰익스피어 전집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DNA 구조에 대한 왓슨-크릭의 가설도 만들어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가설연역적 관점이 채택하는 입장은 선입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논증들에 기초해 있다. 이제, 이런 논증들이 정확히 무엇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는지 혹은 하지 못했는지 검토해보자.

첫 번째 논증은 ‘발견 기계’ 반론 혹은 ‘고안의 논리’의 불가능성으로부터의 논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포퍼와 헴펠은 “과학적 탐구에 대한 좁은 귀납주의적 관점”(Hempel 1966, p. 11)이라고 불리는 것을 비판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종종 베이컨과 밀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 생각에는 이런 평가가 다소 공정하지 않지만) 이 관점은, 과학자들은 어떠한 이론적 선입관(preconception) 없이도 수집된 사실들을 총망라하여 이로부터 참된 과학 이론을 기계적으로 추론하게 해주는 방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알고리듬이 있지도 않고 그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1) 우리의 탐구를 안내하는 사전 가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사실들이 우리의 연구에 유관한지 알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그런 사실들의 집합은 모두를 포괄(exhaustive)할 수 없다.
(2) 이론들은 언제나 가용한 자료들에 의해 미결정되기 때문에, 생성된 이론이 모든 알려진 사실들에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그 이론이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3) 뉴턴, 맥스웰, 아인슈타인의 이름들과 관련된 중요한 이론의 발견은, 알고리듬을 따라 수행하는 기계에 의해서는 결코 수행될 수 없는 창조성과 개념적 혁신을 본질적 요소로 포함한다.

이런 논증들은 이론 생성의 논리를 귀납주의적 발견 기계로 보는 관점에 심각한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들이 이론 생성의 논리에 대한 여타의 덜 반대할만한(less objectionable) 관점들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는 알고리듬적이지만 (그렇진 않더라도 적어도 프로그램가능하지만), 어떤 개념적 혁신과 연관되지도 않고 모든 유관한 자료들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절차들을 여전히 고려하고 싶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런 절차를 따르는 사례들로는 자료 집합에서의 패턴 인식(pattern recognition)이 있는데, 멘델레예프의 원소 주기율표, 수소 스펙트럼 선에 대한 발머의 공식, 그리고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과 동료들은 현재 휴리스틱 검색 알고리듬(Heuristic Search Algorithm)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잡한 자료에서 단순한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인간에 필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Simon 1973).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이 개념적 혁신을 동반한 중요한 발견들과 관련하여 어떤 철학적 빛을 던져줄 지 알 수 없다고 말해도 용서가 될 것이다.

발견 기계에 대한 반론에서 그 어떤 것도, 이론 생성의 논리가 <과학자들이 가설들을 주장할 때 사용하는 추론들의 분류와 분석, 그리고 왜 그 추론들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해명>이라는 세 번째 관점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이 앞서 말한 논증들 때문에 옹호될 수 없다고만 주장하는 것은 논점 회피이다. 물론 가설연역법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세 번째 관점에 반대하는 논증을 가졌다고 믿는다. 이것이 이제 내가 착수하려는 일이다.

나는 두 종류의 논증을 고려할 것인데, 이 논증들은 종종 ‘심리주의’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의도된 것인데, 다음과 같다.

(1) ‘유레카 순간’ 반론
(2) 비동형성(nonisomorphism) 논제

어머니의 과수원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중력의 신비를 곰곰이 생각했다는 뉴턴의 일화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유레카 순간 현상은 친숙한 것이다. 문제에 대한 해답이 처음으로 의식적 마음에 떠올랐을 때를 가리켜 포퍼는 ‘시적 직관’의 순간이라고 불렀는데, 그 순간들에 대해 성공적인 과학자들이 잘 기록해놓은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왓슨은 뉴클레오티드 염기들에 대한 자신의 조야한 모형(template)들을 다루다가 어떻게 그 염기들이 비슷한 것끼리(like-with-like) 수소결합으로 묶일 수 있는지 알았을 때, 얼마나 그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는지’를 진술했다(1969, p. 118).

[그래서] ‘유레카 순간’은 종종 확신이나 깨달음(illumination)의 느낌을 동반하는 짧은 통찰의 순간인데, 때때로 중요한 과학적 발견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많은 수의 실패한 추측들도 양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왓슨은 그가 구아닌과 아데닌에 대한 잘못된 호변이성 형태(tautomeric form)를 골랐다고 지적당하자, 곧 맥박수가 느려졌다(Watson 1969, p.120).

이론 생성의 논리라는 의미에서 발견의 논리가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많은 발견들에서 그러한 유레카 순간들은 제거될 수 없는 심리적 요소를 이루고 있고, 그런 점에서 논리적 분석에 항상 저항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관련된 두 번째 유형의 반론은 내가 비동형성 논제라고 이름붙인 것에 해당한다. 그것에 따르면, 개별 과학자의 마음 속에서 이론을 발견하도록 이끈 일련의 심리적 사건들이 명제적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 중에서도, 쾨슈텔러(Koestler)와 폴라니(Polanyi)는 많은 창조적 사고의 비언어적 성격을 강조했다. 슈뢰딩거가 라이헨바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점이 드러나는데, 거기에서 이론의 발견은 종종 “직관적(instinctive) 추측이라는 암흑의 베일 뒤로 철저히 감추어진 일련의 추론” (Reichenbach 1944, p. 67)을 통해 도달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발견의 논리는 아마도 명제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관련되기 때문에, 처음 발견한 개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명제적이지 않은 사고 과정들을 충실하게 반영할 수 없다.

이러한 두 가지 반론들에 대응하려면, 발견의 논리란 한 가설을 정식화하도록 이르는 일련의 심리적 사건들을 일일이 설명(blow-by-blow account)하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발견의 논리는 시험(testing)의 논리와 비교되어야 한다. 시험의 논리는, 실험 장치를 만들고 실험을 위해 자금을 확보하거나 측정을 할 때 과학자들이 하는 일들에 대한 그저 역사적인 이야기로서 의도된 것이 아니다. 과학철학은 규범적이고 비판적인 작업이다. 그렇기에, 과학철학은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단순히 기술하는 데 관심이 없고 (그것은 역사가, 사회학자, 심리학자의 몫이다), 오히려 과학자들이 이론들을 제안하고, 시험하고, 취사선택할 때 그 행위들의 인지적 정당성과 관계된다. 이 점은 종종 과학철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과학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말로서 표현된다. 그래서 만일 발견의 논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당화의 맥락 안에 위치한 이론 생성 기간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발견의 논리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무엇을 약속하는지 보기 위해, ‘합리적 재구성’과 ‘정당화의 맥락’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한스 라이헨바흐의 견해로 옮겨 그것을 검토해보자.

귀납확률론의 관점

라이헨바흐는 『경험과 예측』의 첫 장에서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이라는 용어들을 도입했다. 라이헨바흐가 그렇게 한 목적은, 한편으로는 사고 과정을 일련의 시간적 단계로서 심리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즉, 발견의 맥락)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과 무관한 명제들 간의 논리적 관계(즉, 정당화의 맥락) 사이의 선명한 구분선을 그리는 데 있었다. 라이헨바흐에게, 논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추론하는 것에 대한 기술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합리적 재구성을 제공함으로써 그 추론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과 관련된 규범적 작업이다. 그는 ‘논리적 추론이 실제로 수행되는 방식은 기묘하고 불분명하며, 형식 논리의 방법과는 거의 닮지 않았다’고 썼다(1957, p. 43). 그래서 과학철학은 단지 정당화의 논리에만 관련되는데, 왜냐하면 라이헨바흐에게는 그것이 바로 논리이기 때문이다. 즉, 정당화의 맥락의 논리이다. 엄격히 말해, 만일 우리가 라이헨바흐의 용법을 충실히 지키고 싶다면, ‘발견의 맥락의 논리’라는 의미에서 ‘발견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발견의 맥락이란 순전히 심리학적인 문제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이제 핸슨은 두 맥락에 대한 라이헨바흐의 구분을, “과학철학은 [가설을 제안하는 이유]와 관련될 수 없고, 단지 [가설을 수용하는 이유]와 관련된다”는 견해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핸슨은 라이헨바흐를, 발견의 논리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들 중 하나로서 포퍼-헴펠 진영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라이헨바흐가 표명했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라이헨바흐의 논리적 구분을 시간적 구분으로 해석한 것은 핸슨의 과실이다. 왜냐하면 라이헨바흐는 진정한(bona fide) 과학적 발견의 사례들에 대해, 철학자들(과 약간의 과학자들까지)이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정도까지 합리적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라이헨바흐는 과학적 가설의 제안을 ‘행복한 추측’이나 ‘신비한 육감’으로 보는 견해에 반대했다는 점에서 핸슨과 똑같았다. 라이헨바흐가 보기에, 과학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자연스런 가설’이나 ‘단순성’, 그리고 ‘신비한 육감’ 등의 용어들을 써가며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발견의 심층 구조는 귀납의 원리에 의해 안내되는 것이다(Reichenbach 1938, p. 403).

라이헨바흐는 실제로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의 발견이 일련의 귀납 추론을 의식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이러저러한 과학적 발견의 진정한 사례들은 정당화의 맥락 안에서 합리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합리적 재구성에서, 이론은 시험되기 이전에 이미 알려진 사실들과의 귀납적 관계에 의해 그럴듯하거나 개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라이헨바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왜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천문학적 관측에 의해 입증되기 이전에도 위대한 발견이었는가? 앞선 과학자들은 보지 못했지만 아인슈타인은 알려진 사실들이 그러한 이론을 가리킨다(indicate)는 것, 즉 알려진 사실에 대한 귀납적 전개(inductive expansion)가 새로운 이론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았다 ... (1948, p. 382)

진정한 발견의 사례들로 제한하는 것은, 그러한 사례에서만 기민한 과학자가 밝혀내는 귀납적 관계가 있다는 것과 그런 귀납적 관계가 과학자의 가설과 단순한 추측의 지위를 구분하는 데 쓰인다는 라이헨바흐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시험 후의 논리적 상황은 그 이론이 보다 높은 귀납적 지지를 획득한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시험 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한 귀납적 입증이 이론의 참됨과 예측의 성공을 보증하지는 않지만, 라이헨바흐는 진정으로 발견된 이론은 임의의 주어진 증거적 기초에 대한 최상의 가정(best posit), 즉 귀납적 단순성이 가진 큰 가설을 나타낸다는 것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도입된 용어로 말하면, 라이헨바흐가 발견의 논리로 제안한 것은 사전 평가의 논리와 이론 생성의 논리이다. 사전 평가의 논리는 [시험하기에 앞선] 사전의 그럴듯함(prior plausibility)에 대한 논리인데, 귀납적 확률에 의해서만 완전히 표현된다. 그로써, 그것은 시험한 이후의 수용의 논리와 동연적(coextensive)이다. 이론 생성의 논리는 오직 귀납 추론과 [귀납에 대한] 그의 유명한 정당화 전략(vindication approach)을 통해 그 추론을 (합당한 것으로) 정당화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라이헨바흐의 발견의 논리 개념이 어떤 결점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는 그 문제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도발적인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최고의 영예(full credit)를 받아야 한다. [그에 대한] 나의 비판을 자세히 전개할 시간은 없다. 나는 다만 라이헨바흐의 접근이 갖는 결점으로 생각되는 부분과 왜 그것이 결국 실패한다고 생각하는지를 간단히 지적하겠다.

(1) 그것은 이론 생성의 논리로서 결점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나 뉴턴의 보편 중력 이론으로의 추론이 알려진 법칙과 자료들에 기초한 귀납 추론들의 연쇄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은 유지되기 힘들다. 한 가지 이유는 이론들(예, 뉴턴 이론)이 대개는 자신이 설명하려고 했던 법칙들(예, 케플러 법칙)의 그릇됨(falsity)을 함축한다는 뒤앙 식의 관찰 때문이다. 이런 사례에서 추론은 오히려 설명적 추론에 가깝다. 예를 들어, 뉴턴의 이론은 왜 행성들이 어느 정도로 케플러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2) 그것은 사전 평가의 논리로서 실패한다. 나는 확률에 대한 상대 빈도 해석 하에서 가설에 확률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내 생각에, 라이헨바흐의 시도에 대한 포퍼의 비판(Popper 1959, section 80)은 이러한 점에서 결정적이다.

라이헨바흐의 분석이 지닌 주된 가치는, 이론 생성의 논리 중에서 과학철학자와 관련된 측면은 합리적 재구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론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ory)을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점과, 이러한 정당화가 사전 평가의 논리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평가에 호소함으로써 성취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데 있다. 그러나 나는 라이헨바흐가 사전 평가의 논리를 잘못 선택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추구의 논리가 아니라 개연성의 논리를 선택한 것이다.


귀추론의 관점

이제 나는 발견의 논리를 귀추적 추론(abductive inference)을 통해 접근하는 기획을 고려할 것이다. 이 접근법의 주된 옹호자는 귀추(abduction)라는 이름을 붙인 퍼스이다. 근래에 그의 견해는 핸슨에 의해 다소 수정된 형태로 옹호되어 왔다.

1910년, 퍼스는 폴 캐러스(Paul Carus)에게 초안을 써 보냈는데, 거기서 퍼스는 세기가 바뀌기 전에 자신이 썼던 거의 모든 글에서 귀추적 추론을 어느 정도 귀납 추론과 혼동해 왔다는 것과, 그제서야 귀추가 개연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고백했다(Peirce, 8.227). 1891-1901년의 과도기적인 10년 이전에, 퍼스는 귀납과 귀추를 자료로부터의 추론으로서 간주했는데, 추론된 이론의 유형에 따라 둘 중 하나가 이론 생성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Burks 1946, Goudge 1950). 보일 법칙과 같은 기술적 일반화(descriptive generalization)는 귀납적으로 도달하고, 기체운동론 같은 설명적 이론들은 귀추적으로 도달한다. 귀납과 귀추의 주된 차이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가설의 본성에 있다.

1901년 이후 퍼스는, 귀추와 연역 그리고 귀납이 과학적 탐구의 서로 다른 단계에 대응하는 별개의 추론 유형이라고 제안했다. 연역과 귀납은 가설연역적 설명에서와 같이 이론 시험의 기간에만 한정된다. 반면, 퍼스에게 이제 귀추는 이론 생성 기간에 고유한 내용확장적 추론의 한 형태로서 간주된다. 모든 가설들은 그 특성에 관계없이 귀추적으로 도달한다.

많은 논평자들은 퍼스의 귀추 개념을 정합적으로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그의 후기 저작으로만 주의를 한정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어려움은 퍼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 귀추는 설명적 가설을 형성하는 과정이고 새로운 착상을 도입하는 유일한 논리적 조작이다.
(2) 가설은 직관적인 추측과 번뜩이는 통찰을 통해 시작된다.
(3) 귀추는 퍼스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보호관찰 중인(on probation)' 가설을 채택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채택’은 가설을 참이거나 아니면 귀납적으로 개연적인 것으로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설을 작업을 위한 추측(working conjecture)으로서, 즉 상세한 탐구와 시험에 부칠 만큼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유망한 제안으로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퍼스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견해들에 동의(commit)한 것으로 보인다.

(1) 귀추는 이론 생성의 논리이다.
(2) 발견은 제거될 수 없는 심리학적 요소를 포함한다.
(3) 귀추는 사전 평가의 논리이다.

앞서 심리주의라는 혐의에 대한 대응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1)과 (2)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1)과 (3)을 화해시키는 작업이 남겨진다. 퍼스는 어떤 종류의 이론 생성의 논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또 어떤 종류의 사전 평가의 논리였을까?

퍼스가 귀추를 추론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것이 일정한 논리적 형식을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형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놀라운 사실 C가 관찰되었다.
 그러나 만일 A가 참이라면, C는 당연지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A가 참이라고 짐작(suspect)할 이유가 존재한다. (Peirce, 5.189)

퍼스 자신이 관찰한 것처럼, 가설 A의 내용은 전제들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논증 양식은 우선 가설에 이르는 순차적 단계들을 문자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한 이야기식 설명에만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는 없다. 퍼스 역시 이론을 생성하는 알고리듬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퍼스의 귀추적 추론 도식이 표현하려고 했던 바는 (a) (B3)의 의미에서 이론 생성의 논리이고, (b) 사전 평가의 논리이다. 이러한 두 개념은 화해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합리적 재구성에서 이론 추론의 합당성을 정당화해주는 것을 바로 사전 평가의 논리라고 논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퍼스는 어떤 종류의 사전 평가의 논리를 귀추적 추론으로서 포착하려했던 것일까? 귀추는 진술된 형태로 보면 개연성의 논리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퍼스가 그것을 추구의 논리로서 의도했다는 것과 이것이 보다 합당한 선택이라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애친스타인(1970, 1971)은 개연성의 논리로서 귀추법을 비판했는데, 그 근거는 귀추가 지나치게 방만해서 어떤 개연성의 정도로도 결론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서 반론을 제시했다. 내가 오늘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 C가 관찰되었다. 내가 오늘 이야기하는 데 백만불을 제안받았다는 가설 A는,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C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갑자가 백만장자가 된다고 믿을 근거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대학에 대한 배경지식을 고려해 볼 때 가설 A는 매우 있을 법 하지 않다.

그러나, 귀추적 추론이 문제의 가설이 개연적인지 혹은 참일 것 같은지를 확립하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동등하다면 그 가설을 추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만을 확립하려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애친스타인의 반론은 힘을 잃는다. 추구에 대한 평가와 개연성 평가는 그 범주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귀추적 추론에 대한 퍼스의 도식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놀라운 사실 C가 관찰되었다.
 가설 A는 C를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일견(prima facie) A를 추구할 근거가 존재한다. 

그 근거들이 단지 첫인상(prima facie)인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다.

(1) C에 대해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 추구의 평가와 연관된 다른 가설들이 거의 틀림없이 존재한다.
(2) 추구의 논리에는 다른 요소들도 있다. 퍼스가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요소는 단순성, 비용, 그리고 A의 추구가 과학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갖는 함축이다. 퍼스는 이런 요소들을 전부 ‘탐구의 경제성(economy of research)'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묶었다. “과학적 귀추의 규칙들은 탐구의 경제성에 전적으로 기초해 있어야 한다”(7.220, n. 18).

추구의 논리 안에 있는 평가의 범주는 실용적으로 정당화된다. 우리는 설명적 이론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싶은 종류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설명력(explanatoriness)은 반드시 진리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표(indicator)는 아니지만, 지금 논의에서는 필수적 요구조건이다. 단순성은 우리가 자연의 신비를 벗겨내었다는 표시가 아니라 작업하기 쉽고 시험하기 쉬운 이론들에 대한 신중한 선호이다.

퍼스는 귀추가 개연성의 논리를 위한 열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결코 단념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이는 귀추적 추론을 활용한 과학자들이 참된 이론을 생성하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다. 퍼스는 이것이 “우주의 모든 경이로움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라고 느꼈다(8.238). 그러나 퍼스는 귀추가 개연적인 이론으로 이끈다는 주장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가 제시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설명은 단지 몇 번의 시도만으로 올바른 추측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지성(human mind)이 자연과 특별한 친화성이 있다는 가설 뿐이었다. 그러나 퍼스 자신이 인정했듯이, 이 가설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귀추적이다. 그래서 그 가설은 귀추의 성공을 독립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퍼스는 내가 추천한 단계(step)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이론이 시험되기 전에는, 그것이 참이거나 참에 가깝다고 믿을 설득력 있는 근거를 우리가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단계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논문에서 검토한 어떠한 반론도 사전 평가의 논리나 이론 추론의 합리적 재구성으로 이해된 발견의 논리가 불가능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는 귀추적 추론과 탐구의 경제성을 다루는 퍼스의 논의에서 가치 있는 통찰들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개진된 해석에 따르면, 사전 평가의 논리 중에서 유일하게 작동할 수 있는 개념은 추구의 논리이고, 이론 생성 기간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여 이론으로의 추론을 정당화해주는 것도 바로 추구의 논리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당하다(as it should be). 이론으로의 추론을 최초로 정당화해주는 요소는 일단 이론들이 생성된 후에 어떤 이론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요소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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