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우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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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 기초론 중간보고서 - 서평>

장회익, 『과학과 메타과학』, 지식산업사 스콧 매클루드, 『만화의 이해』, 아름드리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한울 스튜어트 카우프먼, ⌈슈뢰딩거는 옳았는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후 50년』, 지호 로저 펜로즈, ⌈정신을 이해하는 데 왜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한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후 50년』, 지호 알프레드 코징,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 물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천 논쟁』, 거름

인식, 우주, 생명, 그리고 인간의 의식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4-20304 정동욱 | 담당교수 : 최무영 | 제출일 : 2004. 11. 17


1. 들어가며

이 서평은 장회익의 『과학과 메타과학』의 흐름을 그대로 좇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메타과학』 한 편에 대한 서평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책들의 독자성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과 메타과학』은 크게 첫째, 과학과 인식, 둘째 우주와 인간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술 방식도 매우 독립적이다. 통일성의 측면에서 보면 다소 무리가 있는 두가지 주제를 하나의 책에 억지로 묶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책들, 특히 알프레드 코징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 물음⌋을 읽고 난 후엔, 저자의 의도를 어렴풋이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장회익은 철학을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방법론적 탐구 그 자체에 한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철학은 세계관이며 우주의 진화와 인간의 위치와 실천과 유리될 수 없으며 유리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 듯 하다. 서평의 소주제는 첫째, 과학과 인식, 둘째, 우주의 진화, 셋째, 생명과 진화, 넷째, 의식과 실천이 될 것이며, 주제별로 다른 책들과의 비교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주제를 적고 보니 무척이나 엄청난 얘기가 될 것 같아 본인이 감당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과학과 메타과학』을 서평의 주된 대상으로 결정한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을 하고 차근차근 얘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2. 상징, 연상 그리고 과학

여기 마르그리트가 <형상의 반역>이라고 이름 붙인 그림이 있습니다. 제목은 불어로 되어 있는데, 번역하면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건 파이프가 아니죠. 파이프 그림일 뿐. 맞나요? 아니, 틀렸습니다. 이것은 파이프 그림을 복사 인쇄한 것입니다. 제 말이 들리나요? 그랬다면 귀를 한번 의심해 보시지요.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매클루드의 『만화의 이해』 2장, ⌈만화의 어휘⌋는 위의 언급과 함께, 우리를 ‘상징의 세계’로 초대한다. 우리가 위의 그림 복사본을 보고 떠오르는 ‘파이프’는 바로 머리 속에 있는 작은 소리, 즉 개념이다. 인간은 실제 파이프를 보지 않고도 머리 속으로 파이프를 관념적으로 모사할 수 있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모사된 파이프는 현실세계의 파이프를 반영하긴 하지만,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파이프는 아니며, 머리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그것은 물질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파이프 모양의 그림으로도 그려질 수 있고, ‘파·이·프’라는 세 개의 글자로도 표현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만화의 어휘, 상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이 상징들은 과연 만화에만 이용되는가? 매클루드는 상징의 특징을, 단순성, 추상성, 보편성에서 찾고 있으며, 상징은 또한 ‘의미’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카툰 작업을 통해서 형상을 추상화하는 건 세부묘사를 없애는 게 아니라 특정 부분에 초점을 맞춰가는 것이며, 핵심 의미를 좇아 주어진 형상을 벗겨내면, 사실 묘사를 했을 때보다 그 의미가 더 커진다. 즉, 사실적으로 그려진 어떤 특정한 사람의 그림을 보면 개별 사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지만, 단순화시켜 그려진 ☺과 같은 카툰을 보면 ‘사람’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볼 수 있고, 또한 ‘사람이 웃고 있다’는 의미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인간 인식 과정의 보편적인 특징이다. “즉 우리는 사물을 관찰하는 데 그 대상이 어떤 보편적 현상의 특수한 경우라는 관점을 택하여 이해하려 하며, 따라서 보편과 특수라는 구분은 이간의 사물 이해에 대한 기본 바탕을 이루는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인식은 사진기나 거울의 반영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보통 관찰의 대상은 상징체계와 개념체계로 변환되어 인식된다. 인식이란 복사와 같은 모사라기보다는, 상징적 또는 언어적 또는 관념적으로 재구성되는 모사라 할 수 있다. 이론과학이란 개별사례들로부터 추상화된 기본개념들과 기본법칙들을 뽑아낸 후, 다시 그것을 이용해 개별사례들을 설명하는 과정으로서, 위에 서술한 평범한 인식과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과학과 평범한 인식의 차이는 이 그 성립 조건의 까다로움의 차이일 것이다. 장회익은 이론과학의 기준으로 ‘합리성의 요건’과 ‘사실성의 요건’을 삼는다. 한편, 보편이론과 특수이론의 차이는 이론간의 ‘보편성’의 상대적 차이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매클루드는 『만화의 이해』 3장, ⌈홈통에 흐르는 피⌋에서, 만화의 두 번째 요소 ‘연상(closure)’을 소개한다. 연상이란 ‘부분들을 보면서 전체로 인식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의 감각은 좁고 불완전한 세계를 드러낼 뿐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인식한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연상 행위는 필수적이다. 자고 있는데 ‘웽웽~’ 소리가 난다고 해보자. 분명 모기가 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모가 지갑을 챙겨서 나가는 것을 봤고, 얼마 후 채소와 두부가 담긴 봉지를 들고 오는 것을 봤다고 해보자.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부모가 집 앞의 슈퍼에 가서 그것들을 사왔다고 스토리를 구성할 것이다. 전자는 공간적인 연상이고, 후자는 시간적인 연상이라 할 수 있다. 공간적인 연상도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적인 연상만을 다루기로 하자. 만화에서 시간적인 연상은 전면에 등장한다. 만화는 시간의 흐름을 모두 보여주지 않으며 장면과 장면을 불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칸과 칸 사이를 저자는 ‘홈통’이라 부르는데, 이 홈통에서 마술과 같은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분명 만화는 불연속적이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독자의 머리 속에서는 분명 연속적인 스토리가 그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개연적이고, 또는 인과적으로 그려질 것이다. 동역학의 구조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현실세계의 사건1과 사건2 사이는 블랙박스이지만, 사건1에 대한 해석1과 사건2에 대한 해석2 사이는 운동방정식으로 계산된 시간에 대한 함수로 서술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사건1과 사건2의 블랙박스도 그와 같을 것이라 추정한다. 즉, ‘시간에 대한 함수’로 표현되는 서술세계는 ‘잘 고안된 연상’이다. 여기서 사건1과 사건2 사이가 블랙박스라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자유낙하를 관찰할 때, 우리는 그 과정을 연속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첫째, 현실적으로 연속적인 측정은 불가능하다. 낙하하는 물체에 대한 시간과 낙하거리의 관계를 보기 위해서는 스트로보스코프와 같은 측정 기구가 필요하며 그 기구를 통한 측정결과는 언제나 불연속적이다. 둘째, 우리의 눈은 세계를 연속적으로 보는 능력이 없다. 빨리 돌아가는 프로펠러의 방향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눈에 의한 관측 또한 불연속적이다. 여기에 몇 가지 이유를 더해보면, 관측은 원리적으로 불연속적이다. 따라서 사건1과 사건2 사이는 아무리 좁은 시간 간격일지라도 블랙박스로 남아있게 마련이며, 그 블랙박스에 대한 이해는 연상, 즉 ‘상상력의 산물’인 이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학이 고도의 추상력과 합리적인 체계성, 그리고 수많은 검증절차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인식 행위와 차별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과학적인 인식 행위와 통속적인 인식 행위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이해가 과학의 신비화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과학을 인간의 활동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오히려 우리가 놀라야 할 사실은, 그 소박한 인식 행위가 현대의 놀랍도록 성공적인 과학을 이루어냈다는 점일 것이며, 어떻게 하여 그러한 능력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가일 것이다. 이를 위해, 과도하게 많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일 수 있겠지만, 『과학과 메타과학』을 따라 우주의 진화에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3. 우주의 진화

장회익이 우주의 진화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전제는 두가지로 보인다. 첫째, 양질전화적 관점이며, 둘째, 전체론적 관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는지와 다른 존재들과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회익은 이에 대해 “인간이 자연계 속에서 자신이 속하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가늠하지 않고 주관적 성찰의 결과만을 기준으로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치 주체와 객체가 미분화된 유아의 자기이해와 같다고 할 수 있다”며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장회익은 우주의 진화를 서술하기 위해 우선 샤르댕의 논의를 소개한다. “샤르댕은 우주가 지속적으로 진화를 계속한다고 보아 이를 ‘우주진화’라고 명명했으며, 이 과정은 ‘복잡성’이라는 하나의 축을 따라 진행된다고 하였다. 즉 자연계에는 물리적인 엔트로피 증가의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이에 역행하여 복잡성 증가의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우주의 물질이 점진적으로 복잡하게 조직되어 간다는 것이다. … 그는 우주가 복잡성 증가의 축을 따라 진화해 오던 과정에서 현재까지 두 개의 임계점을 지나왔다고 보고 있다. 첫 번째 것은 ‘생명화 임계점’으로서 그 복잡성의 정도가 단백질의 수준에서 생명체의 수준으로 넘어가는 경계 즉 무생물에서 생물로 전환되는 임계점이며, 두 번째 것은 ‘인간화 임계점’ 또는 ‘반성적 사고 임계점’이라 명명한 것으로서 단순한 앎에서 ‘안다는 것을 아는’ 단계를 넘어가는 경계, 즉 정신의 기원을 이루는 임계점이라 한다.” 그러나 장회익은 각 단계의 독자적인 실체를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생명현상 또는 정신현상을 물질이 복잡성 증가로 인해 특정한 경계조건을 만족할 때 나타나는 협동현상으로서 그 자체의 법칙을 통해서만 ‘의미있게’ 기술될 수 있는 새로운 현상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생명현상 또는 정신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을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 과정 하나하나는 완전히 물질법칙만을 순응하여 발생하는 물질현상이기 때문에, 각 단계의 현상은 ‘독자적인 실체’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실체가 보여주는 ‘다층적인 측면’이라는 것이다.

4. 생명의 물리적 기반과 전체론적 성격

우주 진화의 첫번째 단계 생명화 임계점을 생각해보자. 슈뢰딩거는 그의 유명한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첫째, 양자역학의 중요성, 둘째, 비주기적 고체로서의 유전물질, 셋째, 음의 엔트로피를 섭취함으로써 죽음을 유예하는 유기체의 본질, 넷째, 새로운 물리학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을 부호화되어 있는 정보를 담고 있는 물질이며, 그것은 아마도 ‘커다란 비주기적인 고체’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물질은 확률적 열운동으로부터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커야 하며, 엄밀한 질서를 지닌 분자구조여야 한다. 그러나 결정은 매우 규칙적인 구조이므로, 결정의 각 부위는 어느 면에서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규칙적인 결정은 많은 정보를 부호화할 수 없다. 따라서 슈뢰딩거는 비주기적 고체에 승부를 걸었고, 그런 비주기적 형태는 생물의 발생을 통제하는 일종의 미시부호 ― 모스부호와 같은 ― 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주기적 고체의 양자 특성은 불연속적인 작은 변화들(양자도약), 즉 돌연변이들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의 비율은 생존과 동시에 진화가 일어날 만큼의 적절한 수준이어야 한다고 예측했다. 한편, 슈뢰딩거에 의하면, “살아있는 유기체는 계속해서 자체 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죽음을 뜻하는 최대 엔트로피의 위험한 상태로 다가가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유기체는 환경으로부터 계속하여 음의 엔트로피를 얻어야 죽음에서 멀리 벗어나, 즉 살아 있을 수 있다. 음의 엔트로피는 우리가 곧 보게 되는 바와 같이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유기체가 먹고사는 것은 음의 엔트로피이다.” 카우프먼은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분자의 안정성, 개체 발생을 이끄는 미시부호의 가능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장회익은 “생명이라 불리우는 것은 기능하고 있는 ‘부호기록’을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또한 소요되는 ‘부 엔트로피’(음의 엔트로피)를 공급받을 수 있는 상황에 그 자체가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슈뢰딩거에 동의하면서 그의 언급들이 생명의 본질적 양상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슈뢰딩거, 카우프먼, 장회익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한 대상은 바로 생명체가 지닌 놀라운 ‘질서’ 또는 ‘질서의 출현 및 증가’이다. 이 현상이 기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외형상 생명현상 자체, 생명의 출현 및 생명의 진화의 과정이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고 있는 바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셋 모두는 생명 현상에 대해 열역학적인 가능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최초의 설명은 슈뢰딩거의 ‘음의 엔트로피’였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음의 엔트로피’ 주장을 좀더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카우프먼과 장회익에 의하면, 엔트로피의 감소, 즉 질서의 출현은 계가 열역학적으로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열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즉, 우리가 찾는 생명과 같은 동적 질서는 비평형 열역학 계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열역학적 평형에서 멀리 있다는 것 또한 고도의 질서를 갖춘 역학이 출현하기 위한 필요 조건일 뿐 아직까지는 충분 조건은 아니다. 장회익은 생명 출현의 조건을 설명하기에 앞서, 일단 어떠한 생명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열역학적으로 자체조성계 또는 자체증식계일 것이라 말한다. 자체조성계란 작동체가 그것이 수행한 성과의 일부로서 자체의 구조 및 성분을 개조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자체촉매적 성질을 띤) 열린계를 말하며, 자체증식계란 기능의 일부로서 자체와 동일한 기능을 지니는 또 다른 작동계를 생산해 내는 기능을 가진 자체조성계를 말한다. 전자는 생명 이전의 진화 또는 생명의 발생에 대응하는 모델이며, 후자는 생명 또는 생명의 진화에 대응하는 모델이다. 그에 따르면, 생물적 개체란 ‘자체증식계’, 다른 표현으로는 “부호기록을 지닌 자체촉매적 개체”이며, 이러한 성격의 기구가 형성된 것이 바로 생명의 기원이다. 카우프먼은 특히 ‘집단자가촉매’ 현상에 집중하여 그러한 현상이 도대체 어떠한 조건 하에서 출현할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고찰하기 시작한다. 카우프먼은 먼저 생명 분자라 일컬어지는 DNA 또는 RNA를 의심한다. 이것이 과연 “살아있는 분자”인가? 독립생활을 하는 생물 중 가장 단순한 것은 미코플라스마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독립 생활 생명체조차도 600종류나 되는 중합체(유전자)와 1000종류나 되는 작은 분자들을 이용하는 대사 기구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사실 미코플라스마 내에 있는 분자들 중에 실제로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곤 한다. 전체인 계가 집단적으로 자가 촉매 작용을 하는 것이다. 모든 분자들은 계의 안팎에서 “먹이”의 형태로 공급되는 다른 분자들로부터 촉매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왜 독립 생활을 하는 세포 속에는 왜 600개나 되는 단백질 중합체와 약 1000 종류나 되는 작은 분자들이 필요한 것일까? 카우프먼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하기보다는 몇가지 사고실험 및 컴퓨터상의 실험을 보여준다. 요지는 화학 반응계에서 분자의 다양성이 일정한 임계 다양성을 넘어서면, 집단 자가 촉매 작용을 하는 하위계가 존재할 확률이 1.0에 다다른다는 점이다. 여기엔 특정한 설계가 필요 없으며, 마구잡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러한 계는 필연적으로 창발적 특성과 일종의 완고한 전체주의를 드러내는데, 다양성이 어느 수준까지 증가하면 촉매반응들이 연결된 망이 출현하고 이 망은 촉매들 자체를 감싼다. 갑자기 촉매 닫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적어도 컴퓨터 속에 구현된 세계에서 보면 “살아있는” 계, 즉 자기복제 계가 출현한다. 이러한 컴퓨터 실험은 생명 출현에 필요한 최소수준의 복잡성의 수준을 암시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한편, 이러한 컴퓨터 실험 하에서, 위의 자가촉매계는 “먹이” 환경이 어떤 식으로 변형될 때에는 “생존할” 수도 있지만, 흐름 반응기 계로부터 다른 먹이들을 제거하면 “죽는다”, 즉 붕괴한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그런 계가 어느 정도까지는 유전체 없이도 진화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는 점이다. 카우프먼은 이러한 실험결과를 토대로 안정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DNA라는 비주기적 고체가 생명의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니며, 오히려 필요한 것은 “상태공간에서 작고 안정한 동적 끌개를 향한 강한 수렴을 보여줄 능력을 갖춘 특정한 유형의 열린 열역학 계”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장회익은 카우프먼과 같은 세부적인 논의로 나아가진 않지만, 그와 유사한 통찰로부터 보다 큰 그림을 끌어낸다. 장회익은 생명의 단위를 어떻게 규정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유전자에 대해 그 후보로서 적당한지 되묻는다. 그러나 유전자는 그 주변환경으로부터 독립되는 순간 생명으로서의 성격이 제거된다. 즉, 유전자를 하나의 작용체라고 할 때 새포내의 이를 둘러싼 물질들과 세포밖의 주변환경은 보작용자라 할 수 있는데, 보작용자와의 관계를 떠난 작용자로서의 유전자는 무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유전자를 독립시켜 하나의 생명의 단위로 보는 것은 이러한 행위 자체가 생명으로서의 유전자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포, 유기체, 생태계 등은 어떠한가? 마찬가지의 원리에 의해 세포, 유기체, 생태계 등도 생명의 단위로는 적합지 않다. 생명현상의 열역학적 본성상 자유에너지의 궁극적인 근원을 그 보작용자로서 생명 자체에 포함하지 않는 한 생명의 단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장회익은 생명의 ‘정상적 단위’로서 하나의 별-행성계 안에 상호의존적으로 생존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작용체 및 그 보작용자의 총합을 생각해야 하며, 이를 하나의 단위체로 보아 ‘우주적 생명’이라 부른다. 장회익이 여기서 말하는 ‘우주적 생명’의 함의는 무엇인가? 첫째, ‘개체생명’은 우주적 생명의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인 ‘보생명’에 의존적으로만 생명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둘째, 개체생명에 생명의 자격을 부여한다면, 보생명에도 생명의 자격이 부여되어야 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보생명은 한 특정 개체에 대해 함께 삶을 이루는 동반자의 지위를 가진다. 셋째, 그동안 환경이라 일컬어졌던 영역에 대해 단순한 배경이 아닌 보생명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생명에 대한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슈뢰딩거와 같이 생명현상의 미시적인 물리적 기반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카우프먼과 장회익이 슈뢰딩거의 기계론적인 귀결과는 상당히 다른 역동적이고 전체론인 귀결을 도출해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 사이의 차이는 그들의 물리학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른 귀결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들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생명현상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서 질서만을 간파한 반면, 카우프먼과 장회익은 질서와 함께 역동성 및 상보성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우프먼과 장회익은 슈뢰딩거보다 설명해야 할 내용이 더 많았던 것이고, 그러한 내용과 정합적인 귀결을 도출해낼 수 있는 모델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경우에 따라, 설명하고자 했던 내용에 부합하도록 구성한 모델이 원래의 의도보다 더 많은 통찰을 제시해줄 수 있는데, 장회익의 ‘우주적 생명’ 사례가 그러하다고 보여진다. 또한 나는 생명현상을 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생명현상이 아무리 ‘창발’적이라 하더라도,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제약조건을 무시하면서 창발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명현상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개연적인 물리적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며, 그러한 물리적 구조를 찾는 작업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이러한 작업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생명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해주며 때로는 새로운 통찰까지도 제시해줄 수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러한 노력이 환원주의적이라고 해서 비판받아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왜 생명현상은 창발적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환원주의적인 탐구는 필수적으로 보인다. 나에게 환원과 창발은 동전의 양면으로 보인다.

5. 의식의 물리적 기반

생명에서 더 나아가 의식의 문제를 다뤄보도록 하자. 나는 인공지능 연구가 과연 의식을 설명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상당히 회의적이었으며, 의식이 물리학 체계와도 모순된다는 생각을 계속해왔다. 왜냐하면 첫째, 인간 의식의 인식적 특징이 계산적인 과정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이 어떤 보편적 현상의 특수한 경우라는 관점을 택하여 이해하려 하며, 이에 따르면 이해·인식을 위해 보편개념으로의 추상화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직관적인 과정으로서 이는 원리적으로 논리·계산적인 과정에 의해 환원될 수 없다. 둘째, 선택·결정이 스스로 이뤄진다는 것, 즉 자유의지가 결정론적인 물리학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이다. 나의 선택이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로저 펜로즈는 이러한 고민을 ‘비계산적’이란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정식화한다. ‘수학적 이해가 완벽한 신뢰를 받는 기존의 계산 규칙 집합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괴델 정리로부터, 튜링머신 ― 이상화한 계산기(컴퓨터) ― 은 원리적으로 할 수 없는 수학적 논증을 우리가 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즉, 우리가 의식적인 사유 과정에 몰두할 때, 우리 뇌가 비계산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한편, 로저 펜로즈는 우리 뇌의 활동이 물리법칙에 전적으로 지배받는다는 것도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대의 표준 양자론은 본질적으로 계산불가능한 것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로저 펜로즈는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가? 그의 해결책은 새로운 비계산적 물리학, 즉 양자론의 새로운 해석을 도모하는 것이다. 표준 양자론에 따르면, 세계의 대상들은 이따금 계의 행동에 전적으로 마구잡이 요소가 추가되는 시기(즉, “측정”이나 그와 동등한 것이 일어날 때)를 제외하면, 전적으로 계산 가능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양자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계에서는 진화가 전적으로 결정론적이고 계산 가능한 절차를 통해 기술된다. 따라서, 펜로즈는 측정 이외의 시기에도 ‘자체적인’ “순수한 마구잡이”가 정말로 물리계에서, 특히 뇌 활동과 관련된 수준에서 나타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펜로즈는 그 후보로 GRW 상태환원틀과 상당한 수준으로 조직화된 응집 상태를 제안한다. 전자는 양자이론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고, 후자는 그 해석 하에서 비계산적 작용이 나타날 조건이다. 즉, GRW 틀 하에서, 양자상태가 (환경과의 얽힘 때문에 붕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붕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오래 고립된 환경에서 대규모 양자 응집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면, 비계산적 작용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뇌의 신경 신호와 시냅스 작용 외에 뉴런의 세포 골격에 있는 미세소관들의 활동에 주목한다면, 위의 작용이 설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GRW 해석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펜로즈 본인도 많은 추측에 근거하여 논의를 이끌어 가고 있긴 하지만, 그의 논지는 매우 단순 명쾌하다. 의식은 본질적으로 비계산적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리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 나가며 : 의식과 실천

의식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한 방향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펜로즈와 같은 시도 외에도, 사회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진화에 의해 현재와 같은 뇌의 구조가 만들어지면 자연스레 의식이 형성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의식은 어떠한 형성되고 어떠한 성격을 가지게 되는가? 알프레드 코징은 의식의 문제가 실천과 고립될 수 없다고 제기한다. 의식을 인간의 실천적 활동으로부터 분리시킬 경우, 의식은 단지 물질적 실재에 관한 수동적인 반성으로 간주되며 의식의 기능은 관조적인 반영에 한정되며, 실재를 변형시키는 능동적 역할로서의 의식이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노동 과정에서 획득된 자연대상이 그의 의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물질적으로 존재하며 또한 물질적·사회적 관계가 사유와 욕구에 의하여 결코 전복될 수 없다는 실천적 경험을 얻게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자신의 역사적 실천과 인식에 의하여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을 파악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실천적 활동을 통하여 사유가 노동과정과 사회적 생산 활동과 사회의 전체적 삶에서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는가를 경험한다.” 즉, 인간은 실천을 통해서만 자신의 사유·의식의 존재와 역할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실천 없이는 우리는 자기 의식의 존재조차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원래부터 ‘순수’ 의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정신’은 물질에 부착되어 있는 저주 그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이 저주는 피운동적 기층과 목소리의 형식으로, 즉 간단히 말하자면 언어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언어는 의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언어는 실천적 의식이다. 언어는 다른 사람들과 또한 바로 나 자신을 위해 비로소 존재하는 실재적인 의식이다. 언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자 하는 욕구와 필요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 그러므로 의식은 원래부터 이미 사회적 생산물이며, 여하튼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의식과 실천은 상호작용한다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정말 어떠한 지는 참으로 오묘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실천행위가 도출될 수 있는지에 대해 명백히 답하기 어렵다. 또한 실천행위의 직전단계라 할 수 있는 가치판단·결정행위와 인식행위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명백히 말하기 어렵다. 분명, 인간의 의식은 인식, 예측, 목적 정립, 판단, 결정의 기능을 머리 속에서 함께 수행한다. 또한 현실적으로 사실에 관한 지식 자체가 당위에 관한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형식논리적으로 ‘사실’의 세계에 속하는 지식으로부터 ‘가치’의 세계에 속하는 당위 판단으로의 접속은 불가능하다. 즉, 인식으로부터 가치판단 및 실천이 논리적으로 도출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장회익은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윤리적 실천으로의 천이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아마도 생명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로부터 당위적 과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도출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로부터 당위적 과제를 도출할 수 있다고 믿듯이 말이다. 장회익과 사회주의자들이 내놓은 과제가 나를 설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러한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아직도 계속 고민 중이다.